달려라 메로스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욱송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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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 오사무는 [인간실격]의 작가다. 그의 자서전적 소설이 잘 드러내듯, 그는 끊임없는 죄의식과 무력감으로 살아갔다. 그의 이 단편집도 [달려라 메로스]와 [여학생]이외에는 모두 그의 힘겨웠던 삶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형과의 불화, 공산주의 운동으로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던 동경생활, 자살미수로 한 여자만 죽게 한 사건, 진통제 중독으로 빚과 정신병원 신세, 그리고 연인의 배신. 그의 이런 비참한 삶의 뒤로 그는 한 빛줄기를 본다. 자신을 걱정하여 주고 챙겨주는 사람들. 어떻게든 형과 화해시켜 주려는 따뜻한 마음. 끝나버린 줄 알았던 가족의 정이 불씨처럼 살아있음을 본다. 그는 희망을 미워하고 또 희망을 잡고 싶어한다. 

그의 마음에는 한 낯가리는 연약한 [여학생]이 자리하고 있다. 반드시 빚진 삶을 갚고픈 비장한 각오와 그 일만이 그의 삶을 유지시키는 끈이 되고 있음을 그도 잘 알고 있다. 버려진 슬픔만 처음에 없었더라면, 가녀린 그의 마음을 다독이며 어머니와 함께 오손도손 사는 기쁨을 맛보았을지도 모른다. 어쩔 수 없는 인간조건만 아니었더라면, 그도 이웃에게 친구에게 가족에게 신세를 지지 않고  보탬이 되고 기쁨이 되는 존재이었으리라. 

부모에게도 미안하고, 형들에게도, 죽은 여자에게도, 현재의 처에게도, 두 아저씨에게도, 소작농에게도, 혁명운동을 하던 친구에게도 그는 죄책감, 자신에 대한 분노, 포기하고픈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단편들은 그런 오사무의 한편에 살고픈, 행복하고픈, 자신을 용서하고픈 마음이 끊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을 어찌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아무도 모르는 자신의 부끄러움과 악행들. 마음에 아직도 하나도 변하지 않은 추악한, 용서받지 못할 모습들. 오사무는 마지막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더라도, 우리는 도움을 받으러 손을 내밀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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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브 공작 부인 밀레니엄 북스 91
라 파예트 지음, 김인환 옮김 / 신원문화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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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8년 라파예트 부인에 의해 쓰여진 이 책은 고전주의 소설의 시초라고 불리는 작품이다. 이전까지의 궁정한담과 같은 프레시오지테 소설이 심리적 변화의 묘사와 인간심리의 분석에 있어 이 책의 모태 역할을 하여 왔지만 이 소설에 이르러 비로소 라신의 비극에서  보이던 극적 전개의 탄탄함이 희곡에서 소설로 유입되어 소설의 신고전주의시대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이 17세기 소설에 대해 아무 쓸모 없는 지식이라고 말해 反사르코지의 대명사가 되기도 한 이 연애담은, 실제 21세기 우리 눈으론 그저 하이틴 로맨스 같은 느낌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 하이틴 로맨스라고 불리는 혹은 많은 연애 소설의 원조가 되는 이성적 판단과 감정의 충돌, 도덕적 사회 기반과 이성적 삶의 설계를 반하는 격정적 연애감정과 한눈에 반하기, 감출수 없는 표정과 손동작에 대한 표현들로 넘쳐난다.

라파예트 부인은 당시의 문학 흐름과 독자의 취향에 맞춰, 고전적 희곡 기법의 비극적 요소와 심리적 만족과 우아함의 당시 소설 기법을  동시에 어울어낸다. 비로소 소설이라는 형태로, 희곡이 만들어내던 긴장과 해소 속의 일체감, 즉 복선의 도입과 상승하는 갈등, 파국의 진행과 반전으로의 결말이 도입되었을 뿐 아니라, 소설 자체가 갖던 우아함과 말재주, 궁정심리의 재미들을 같이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르코지의 생각과는 달리 이 소설은 단지 그의 생각에 대한 반대로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를 위한 이정표로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포스트모더니즘적  예술 창작에 있어 이러한 낭만주의적 자유성과 고전주의적 형식성의 조화는,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쳤을때 빚어지는 어색함을 극복하게 한다. 형식적 식상함이나 와닿지 않는 어설픈 낯설음의 양쪽 극단을 극복하여, 아름다움과 만족감을 느끼게 하는 균형을 갖게 하는 것이다. 라파예트 시절의 프레시오지테의 가벼움이 우리 시대의 대중문화라면, 라신적인 그리스 비극의 무거움이 우리가 그간 여러 자유로운 내용에도 간직하고 있던 형식미가 아닐까? 그리고 이것을 우리시대에 독자에 맞추어 엮어냄이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가 아닐까? 결국 이 둘의 대화는 양쪽이 변화하고 닮아갈수록 더 기발한 방식의 융합을 요구할 것이다. 일본소설로 말하자면, 하루키보다는 무거운, 오사무보다는 가벼운, 소세키 정도의...
하지만, 21세기판.
 
우리 삶이란 클레브 부인처럼, 격정을 이기려하면 할수록 그 감정과 가벼움에 휩쓸릴 수 밖에 없는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지지 않고 질서를 부과하려 하는 존재이기에 아직 희망을 갖는지도 모른다. 감정을 잘 알아차리되 숭고함의 틀에 잘 맞추어가는 것이 정말 인생의 재미있는 부분이지 싶다. 무미건조도 허랑방탕도 별 끌리지 않으니까. 우리가 기다리는 문학도 아마 그런 가볍고 따뜻하며 진실되고도 놀라운 무엇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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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1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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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58년, 나이지리아 출신으로 BBC에서 일하던 아체베의 첫 작품이며 동시에 2007년 부커상을 타게 한 대표작품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그는 출신 종족인 나이지리아 이보족에게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일어난, 급격한 서양문물의 유입으로 인한 변화에 대한 연대기적 기록을 남기면서, 또한 당시 독립을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던 신생 나이지리아를 위한 [독립국으로서의 자아]를 찾아내려는 시도하고 있다.

더 이상 유럽의 역사와 토양에서 자라난, 이식된 세계관이나 지배-피지배의 구도 속에서 강요받는, 지배자들의 이해(利害)와 얽혀있는 타자의 시선이 아닌, 자기 뿌리에 놓인 고대의 문화와 타 문명과의 충돌에서의 실패와 식민지배까지를 포함하는, 자기자신만의 시선을 찾으려는 노력인 것이다. 한편으론 반성도 하고 한편으론 그렇게 자조할 것은 아니라고 위로도 베푸는 이런 자기존중의 시선은 오직 스스로에 대한 철저한 내성이 없이는 주어질 수 없으며 새로운 자아로 출발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스타팅블럭임을 아체베는 잘 알고 있었다.[그러나 내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가르쳐 줄 수 없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스스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아체베 인터뷰 중에서)]

주인공 오콩코는 그래서 신화적 인물도 작가의 피붙이도 아니다. 그는 이보족의 평범한 야심가이며 전시대적 장점과 변화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인물이다. 마치 루쉰의 아Q와 같은듯 다른 듯한 이 인물은 그래서 가장 잘 이보족의 소멸되어버린 부분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동시에 스스로 부끄러운 자기자신들 속의 모습이기도 하다.그것은 작가 안에 살아있는 자신에 대한 거북함이며, 동시에 새롭게 입안에 쳐 넣어진 현재에 대한 메스꺼움이다. 이런 인물의 실패를 통해 아체배가 기대한 독자들인 개화된 나이지리아인들은 더 이상 거부도 굴종도 아닌 자기자신의 모습을 지니고 떳떳이 세계의 개활지 속으로 걸어나아가야 함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 또한 실패한 과거와 이식된 문화 속을 살아왔고 또 살고 있다. 무척 잘 이 과정을 적응한 케이스인 우리는 남이 가르쳐준 기술로 다시 되팔아먹기도 하고, 남의 스포츠로 일등도 하는 나라가 되었다. 또 한편으로 스스로 비웃어마지 않던 자신의 문화, 풍속, 역사-부끄러하던 김치, 비실용적이라던 한복, 숨기던 수제비, 부대찌게, 떡볶이를 외국인에게 권하는 지경이 되었다. 사실 [우리의 것은 소중한 것이다]라는 말은 많은 의미를 갖는다. 거기서 자라고 영양분을 받고 생각의 틀을 마련한 까닭이다. 또한 여태껏 너무 우리 것을 홀대하고 살도록 압력 받아 왔기 때문에 이제는 소중이 여길 때도 됐다. 우리는 나이지리아보다 여러 유리한 조건으로 이제 정체와 자신감에서 아체배가 그리던 모델과도 같은 나라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자신감이 넘친다. 그러면서 우리의 모습은 도리어 우리를 지배하던, 우리를 비웃던 사람들을 닮아가고 있다. 중국사람에 대한 슬쩍 얕보고 싶어하는 마음, 동남아 사람에 대한 동정을 가장한 우월감, 러시아, 동유럽, 남미 국가의 하얀 사람들을 보며 얻어보려는 보상심리들. 우리는 가난할 때 더 좋은 사람들이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예전보다 차갑다.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운전에서 바쁘고 서로의 양해 아래 무례하다. 다른 사람들을 나를 위한 부속물로 여기도록 자녀를 기르고 있는 사회다. 교활한 것을 자랑거리로 여긴지 제법됐다. 성적(性的)인 추문을 상대에 대한 또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 여기지 않는다. 뒤쳐진 사람의 추락을 방치하는 사회구조를 고치지 못한채로 또 1년을 보냈다.

Things fall apart; the center cannot hold;
Mere anarchy is loosed upon the world,
The blood-dimmed tide is loosed, and everywhere
The ceremony of innocence is drowned;
The best lack all conviction, while the worst
Are full of passionate intensity.
(The Second Coming, William Butler Yeats)

오콩코가 꿈꾸었던 부족 촌장의 꿈이 자신의 욕심으로 바로 눈 앞에서 산산히 부서진 것은 사실 그 자신의 만족, 자신 밖에 모르는, 다른 사람을 돌보지 않는 이 마음에서 찾았어야 하지 않을까? 나의 우월감으로 타인을 무시하는 사람은 결국 영국인도 오콩코도 우리도, 예이츠의 시처럼 붙잡아주는 중심이 없어 부서져 흩어지는 일만 남은 소용돌이가 아닌가? 우무오피아 여인들이 죽으면서 부르는 노래인 [누구에게 좋다는 것인가, 누구에게 좋다는 것인가, 좋은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없다.]는 고통 가운데 살아가야 했던 가난했던 과거의 우리보다는, 이제 인간으로의 존재가 흩어져나가 쓰레기넝마조각으로만 인간성의 치부를 가린채 비인격적 관계와 자살과 성범죄 속을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부르는 노래인양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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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처럼 재미있는 곰브리치 세계사 2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지음, 이내금 옮김 / 자작나무(송학)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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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권력을 지향하는 종교의 실패, 이성이라는 종교의 실패, 기술이라는 종교의 전성시대로 곰브리치는 서양전근대, 근대사를 요약해 놓는다.  

권력을 지향하는 종교는 결국 인간이 만들어내는 이성적 부산물로 전락했다. 이성을 절대적인 위치로 올려 놓았을때 이성은 우리를 속여 커다란 사기극에 살인자로 동참하게 만들었다. 기술을 의지하고 주어지는 것을 받아먹고 살아가는 우리는 사육되는 존재로 바뀌어가고 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고 말한 괴테의 일갈은 참... 인간존재의 한계를 보여주며 세계사를 통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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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1-03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를님, 잘 지내시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카를 2010-01-04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옛날이야기처럼 재미있는 곰브리치 세계사 1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지음, 이내금 옮김 / 자작나무(송학)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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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곰브리치 세계사는 그의 20대 후반에 씌여진 책이다. 그런 나이에 이런 책을 쓸 수 있다니 그 식견과 지식의 양, 그것을 엮는 실력이 놀랍다. 특히 내게 있어 그의 일관(一貫)하는 능력은 그의 종교에 대한 설명에 두드러진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몸담고 타종교에 대해서도 공부하지만 그의 책에서와 같이 정확히 각 종교의 특징과 목표를 짧은 글로 잘 설명한 경우는 보지 못했다.

1. 곰브리치가 설명하는 불교  

불교가 설명하는 모든 괴로움으로부터의 구원이란, 바로 우리가 스스로를 괴로움으로부터 구하고 싶으면 우리 자신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괴로움은 자신의 욕심에서 오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여러 해동안 노력하여 이 욕심을 다스리면 자기가 원하는 것 이상은 바라지 않는 상태가 된다. 이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는 결국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면의 평온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을때 느낄 수 있는 커다랗고 고요한 행복감. 그리고 자신이 욕망의 주인이 되면 죽은 다음에도 더 이상 인간세상에 태어나지 않는다.욕망도 없고 번민도 없는 무, 니르바나.  이 길은 중도中道에 있다. 쓸데없는 자기학대(힌두)와 지각없는 안이함(세속) 사이에서 구원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올바른 말과 행동, 생활, 올바른 노력과 의식, 사색의 방법으로.(팔정도)

2. 유교 

유교의 목표는 더불어 사는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살아가는데 외형적인 것들이 생각보다 중요하다. 외형이 갖추어지면 생각이 따라온다. 수천년 동안 지켜온 예절이나 관습에는 심오한 뜻이 들어있다. 생각을 깊이 하지 않아도 예의범절로 모든 일이 저절로 잘 이루어지는 인간관계가 생겨난다. 인간은 선한 마음을 타고나므로 그것을 잘 지켜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 이 수행을 방법이다. 가족에서 이것은 시작되고 부모에게 잘 하는 자가 다른 사람에도 나라의 법률도 잘 지키게 됨에 이르는 것이다.  

3. 도교 

세상 모든 것에는 하나의 위대한 법칙인 도가 존재한다. 인간은 불안함, 바쁜 계획과 궁리, 제물바치기와 기도하느라 이 도가 자기에게 다가와 작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게 하고 살고 있을 뿐이다.사람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것. 마음을 평온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이 때서야 비로소 모든 일은 자연스레 도로 통한다.

4. 기독교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며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며 그 앞에서 모두가 죄인인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 죄인인 우리는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다. 구원 얻은 자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듯이 우리도 똑같이 주위사람과 모르는 사람에게도 베풀며 산다. 심령이 가난한 자나 슬픔과 고통을 당하는 자 박해받는 사람들 모두가 불행을 당함에도 도리어 복된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자녀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며 이런 사람들이 곧 그 자녀들인 표지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역사는 어쩌면 인간이 그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며 그로 인해 빚어지지 소소한 일들의 연속으로 바라볼 때만 뜻이 통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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