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하려면 신처럼 혹은 야수처럼 살아야한다
발타자르 그라시안 지음, 김만중 엮음 / 거송미디어 / 2002년 2월
평점 :
절판


17세기 당시 유명한 예수파 신부이며 스페인 국왕의 정치고문이었던 그라시안은 책제목처럼 다른 이들을 압도하는, 마키아벨리와 같은 공격적 처세술을 제안한다. 원제목은 [지혜의 교리The doctrines of wisdom]. 17세기유럽은 아직 잃어버린 고전주의적 인간형을 대체할 인간 모델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돈키호테의 모델은 이미 16세기에 세르반테스에 의해 사형선고가 내려졌고 샨초 빤사가 흠모해 마지 않던 푸른 망토의 신사라는 전형도 이제는 힘을 잃고 말았다. 그리스로마적 고전 영웅과 종교적 성인을 모두 해체시킨 후 그라시안에게 남은 선택은 지금의 우리와 무척 닮았다. 현실적 인간, 계산적 인간, 적극적 처세에 능한 실용적 인간형이다.

당시 유럽인에게 이 책이 무척 인기가 있었던 까닭은, 이전까지 누구도 이렇게 과감하게 모두가 원하는 노골적인 세계관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이브한 인간형의 모색에 목말라 있던 독자들에게 부르조와 인간형 탄생의 전조를 울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2004년 한국에선 자극적 제목에도 불구하고 그리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하는 까닭은, 혹 우리가 심리적 인간 조종술과 이미지 메이킹, 자기관리술에 넘치는 전문기량을 이미 충분히 확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04-08-02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롭겠는데요. 과연 17세기 사람들이란...

카를 2004-08-02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 번역 부탁하신 것은 제가 참고로 두고 볼려고 올렸던 것이라 비공개로 옮겨버렸습니다.
죄송..
 
지식인을 위한 변명 한마당 글집 1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조영훈 옮김 / 한마당 / 199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르트르는 선과 악의 구분에 있어 자본의 소유 유무에 그 기준을 둔다. 자본의 소유는 악이며 타도의 대상이고 그 이면이 까발려져야 할 허위와 착취의 근원이다. 지식 노동자들의 본래 역할이란 기껏 이런 자본의 소유를 두둔하는데 있다. 그래서 사르트르가 말하는 지식인이 회개하는 길은 계급적 전향에 있다. 자본 소유자의 계층에서 태어난 지식인은 무산자의 편에 서야만 선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보편성의 정의는 [계급의 해체]다. 여기서의 계급이란 다만 통칭적 사회계층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자산의 소유의 양에 따른 [실존적 상황으로서의 계급의식]의 반영이다. 그래서 자기 계급을 뛰어넘어 무산자를 향하는 속죄의 길은 훨씬 험난하다. 이것은 진정한 보편성을 추구하는 자산자 출신의 지식인의 운명이다. 끝없는 자신 안의 긴장과 계급의식의 잔재를 송두리째 뽑아내고자 투쟁하는 삶이다.  

과연 무자산은 선일까? 진정한 균형은 소유는 마음대로 하게 두고 가난한 자를 돌보아주는 것인가 아니면 소유 자체를 가능치 않게 하는 모어의 유토피아인가? 이런저런 갈피잡지 못함을 사이에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고통당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라 해도 자산을 소유한 자기계급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동료인간의 실제적 어려움을 못 본체하는 자는 선하지 못하다. 무산자라고 선한 것은 아니라는 논리로 두둔하는 것도 낯부끄럽다. 그렇다고 무산자의 편에 서고 계급이 없어지는 그날까지, 지식인의 자기정체가 붕괴되는 그날까지 자기자신을 불사른다면 비로소 선하다 할 수 있는가? 지난 한세기를 지식인은 우왕좌왕한다. 그래서 아무 일도 하지는 않았다.

지식인 역할의 한몫이 진정 자본에 대한 반작용에만 있다면 우리는 더 실제적이어야 한다. 피라미드의 상층부의 삶과 자본의 이익은 달콤하고 안락하며 요람에서 무덤까지 평안하다. 진정한 적은 중류층 지식인 내부에 있는 상층부에 대한 동경이다. 이 오르지 못할 나무를 앞에 두고 불쌍한 우리 인생은 그 아래를 어슬렁거린다. 허접한 중류 지식인이라도 나누어줄 힘이 있다면 자기가 조금 더 가진 것을 나누는 것으로 비로소 이 일은 시작된다. 남의 것으로 가져다 줄 생각을 말고 자기 것을 나눌 수 없다면 나는 또 다른 덫에 걸린셈이다.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모르는 것만 못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위대한 개츠비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방대수 옮김 / 책만드는집 / 2001년 8월
평점 :
품절


 1차 대전은 세계의 중심축이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바야흐로 미국은 돈이 되는 곳이었다. 10-20년 전의 한국이나 요즘 중국이 그렇듯 머리 잘 굴리고 배포만 있으면 대박이 있었던 시절, [위대해질 수 있는] 시대였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시대의 불안정이 낳은 환경이다.

그가 위대한, 선망의 대상이 되고자 했던 이유는 하잘 것 없는 사랑놀음 때문이었다. 상대는 가볍게 생각하지만 자기 혼자 몰두하는 사랑, 그것이 그가 위대하고자 하는 이유였다. 막상 사람들이 본 것은 그의 그런 숨은 열정을 모르는 껍질 뿐...화려한 파티와 신비적 이미지의 사교계의 거물에 대한 덧씌워진 이미지들. 사람들은 여전히 이런 이미지들에 흥분한다. 그것은 신흥 자본주의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천박한 시대정신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겉이 아닌 속의 다른 개츠비는 이 사랑으로 인해 위대한가? 지치지 않는 사랑의 집착.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고마워해주는 이 없는 죽음. 그것이 인생이다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뭔가가 나올 줄 알았던 신비한 인물의 속내, 그것이 우리네 삶과 같은 천박하고 유치한 집착과 미성숙이라면...인생의 대단한 것 같은 이상들과 이념, 그리고 환상적인 로맨틱이 들추어보면 구리구리해진다는 건 우리가 매일 겪는 일상이다.

삶은 우리에게 바다건너 깜빡이는 그 불빛을 불나방처럼 찾아 들었다가 그것이 아니라고 깨닫고 다른 불빛을 좇기에는 너무 짧다. 아예 한번 살고 갈 바에야 처음 노렸던 것, 성공, 부 , 사랑, 명예, 어떤 이름의 상(prize)이나 지위, 그리로 올인하는게 결국 삶의 진실일까? 위대해지고자 했고 그렇게 보였던, 멋쟁이 신비의 인물은 사랑 아니면 집착을 위해 올인한다. 위대하다. 저것도 하나의 선택이지...푯대 없는, 인생이란 항해의 도착지는 어차피 없는 거라 생각한다면 말이다. 또 한편으론 측은하다. 올인하는 대상이 개츠비라는 연약한 한 사람보다 위대하지 못하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오울프 (구) 문지 스펙트럼 11
작자 미상, 이동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제밤 TV에서 상영한 영화가 있었다. [쥬라기 공원]의 원작자 마이클 클라이튼이 쓴 [13번째 전사]. 감독은 [다이하드], [라스트 액션 히어로],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의 존 맥티어넌. 내용은 바로 이 책 베오울프의 모험담과 비슷한 점이 많다. 다만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아랍인으로 이 원정대에 합류하는 것만이 차이라고 할까

최근의 수많은 영화들의 소재, 특히 반지의 제왕의 모티브이기도 했던 베오울프는 6세기 스칸디나비아의 영웅담이다. 베오울프가 덴마크에서 괴물을 물리치고 돌아와 후에 왕이 되었다가 용을 물리치다 전사한다는 이야기이다. 8세기 한 수사에 의해 구전되던 이 설화가 고대영어로 씌여지고, 10세기에 완성되어 보관되어왔다.어쩌면 북구에서 시작된 영국인의 뿌리를 보여주는 이 전설은 그들 스스로의 정체성과 민족적 이데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야만적이고, 전투적이며 호전적인 이들 북해연안의 바이킹인 이들은 결국 영국과 미국을 거쳐 그 호전성을 내세워 아직도 세계에 군림하고 있다. 베오울프는 그들의 전형을 보여주며 그들의 럭비, 미식축구에서 보이는 이해키 힘든 [힘의 숭상]을 납득케 하는 것이기도 하다. 9.11전에 만들어진 [13번째 전사]가(1999년) 아랍인을 그 전투동료이고 1인칭 화자로 만든 점은 아무래도 2004년에 그 영화를 보는 사람의 재미를 더해준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4-03-08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기 혹시... 13번째 전사는 아랍인 이븐 패들란이라는 사람이 쓴 실재 여행기에 토대를 둔 작품이구요, 베오울프와는 전혀 다른 작품인데요. 작성된 시기 역시 큰 차이가 있습니다. 13번째 전사 말고 그 전에 오리지널은 죽은자 먹어치우기라는 제목의 책으로 나왔었구요. 베오울프와 죽은자 먹어치우기 둘다 읽어 보았지만 전혀 내용상의 공통점이 없는데요. 혹시 둘다 읽어 보시면 리뷰 수정하시는 것이 좋을듯 한데요...

카를 2004-03-08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영화는 베오울프와 무척 비슷하던데...
[죽은자 먹어치우기]는 이 영화의 원작 마이클 클라이튼의 소설이구요.그리고 사실 아랍인 이븐 패들란이라는 사람이 쓴 실재 여행기라는 것은 클라이튼의 가상의 이야기가 아닌가요?

비로그인 2004-03-09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기 900년대 실제 여행기를 마이클 클라이튼이 소설 형식으로 재편집한 것이 Eaters of the Dead 이구요, 크라이튼의 오리저널 창작은 아닙니다. 대체로 이븐 패들란의 여행기는 실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풍물과 경험을 다소간 환상적으로 과장한 것이 아닌가 하는평을 듣고 있는데, 마이클 크라이튼 같은 경우는 그것들이 전부 실재 발생한 사건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쪽으로 생각하고 소설을 집필하고 있지요.
베오울프와도 그러고 보니 제법 유사점이 있긴 하네요. 하지만 작품 자체는 전혀 다른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었어요^^;;

카를 2004-04-06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알게 됐습니다. 마이클 클라이튼의 이 책은 이븐 패들란의 여행기의 논픽션과 후반부의 모험담의 클라이튼 자신의 픽션을 합쳐 만든 것이라는군요.
참고 [Both True and Fictional]
http://enotalone.com/books/0345383249.html
 
조선조를 뒤흔든 논쟁 -상
김기현 지음 / 길(도서출판) / 2000년 3월
평점 :
품절


사단과 칠정은 [측은,수오,사양,시비]와 [희로애구애오욕]이다. 性과 情의 면에서 볼때 둘은 모두 인의예지와는 달리 이미 發한 것이므로 情에 해당한다. 하지만 사단이 선한 속성인 반면 칠정은 선악의 구분이 없거나 혹은 아름답지 않아질 소지가 많은 감정이다. 기대승은 이것이 두개의 전혀 다른 情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정 가운데 사단은 선한 것만을 [가려내어 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퇴계는 4단과 7정을 엄밀히 구분하고 4단이 주로 理가 발한 것인 반면, 7정은 氣가 발한 쪽으로 해석한다.

과연 이런 구분이 왜 필요한가?
당시 유교는 조선의 국시이자, 파행과 인간적 욕심으로 얼룩지기 시작한 왕조의 기강에 유일한 해결방안이었다. 온전한 유교정치이념의 실현은 조선 유학자의 꿈이었고 [천명]이었다. 혼란의 원인은 유교적 관념의 교육의 적절한 시행과 그 엄밀화의 부재에 있다는 것이 퇴계의 생각이었다. 인의예지가 발한 사단의 마음이 널리 편만한 세상. 기대승의 생각도 이와 다르지는 않았다. 다만 원전에 충실한 4단7정의 정립이 퇴계에 의해 왜곡된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다.

퇴계는 왜 다소 독특한 4단7정의 견해를 갖는가?
이는 그가 정립코자한 유교체계의 연장선상에 있다. 우주원리, 인간본성, 예절과 정치, 수행과 善政이 그에게는 하나의 이념안에 있었다. 우주의 원리로 심성의 4단7정은 해석될 수 있고 해석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기를 성정에 적절히 설명하는 것을 시도한 것이다. 즉 기대승이 결과론적 4단7정, 즉 모양새에 따라 둘을 구분하고(엄밀히 이 개념을 구분치 않았던 중국의 선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정의하려 한 반면 퇴계는 원인론적 입장에서 논리적 귀결로 4단과 7정을 구분 지어 분류하려 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기대승이 4단과 7정은 [서로 선이 다르다]라고 한 반면 퇴계는 [그 선함의 정도는 같다]고 설명한 것이 인식된다. 즉 선악의 결과가 아닌 동일한 선의 정도에 이와 기의 간섭 정도에 따라 둘이 나뉘게 본 점은 이런 유교전체를 아우르고자 했던 전체적 틀 안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결코 이 책이 설명하는 도덕우선주의의 일탈은 아닌 셈이다. 또한 나라의 올바른 운행은 유교의 [기술적 운영의 묘-선악의 정도]에 달린 것이 아니라,하늘의 뜻과 일치되어 백성의 뜻과 선한 군주와 신하의 마음이 만날 때, 하늘의 도움으로 가능하다는 그의 정치론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 나에게 4단7정은 무얼 말하는가?
교육자와 학자로서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열정으로 산 한 사람을 본다. 그는 논변이 자신을 발전시키는 것을 알았고 또한 이것이 올바른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일이라 믿었다. 영남과 기호의 우세가 아닌, 나라의 헌신된 인재를 키웠고 그 정신을 물려주었다. 공자왈 맹자왈은 그들의 입신출세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었겠지만 결코 그 제자들은 이 스승의 평생의 뜻만은 거스를 수 없었을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amoo 2010-08-03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에, 잠시 덧붙일게요~ 퇴계가 이기호발설을 주장한 이유는 바로 수양론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선의 이기론 논쟁은 수양론으로 연결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이냐..약관의 기대승이 노학자의 이론을 걸구 넘어진건 조선유학사에서 희대의 사건이었습니다만, 퇴계는 기대승의 논리를 인정해 서신으로 답을 해 줍니다. 이것이 7년 서신의 결정체인 사단칠정논쟁입니다. 퇴계는 4단이 이가 발한 것이고 7정이 기가 발한 것이라고 하지만 기대승은 이 논리가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만물을 움직이게 하는 동인이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는 발할 수 없고 발한 기 중에서 순선한 면만이 이라는 기대승의 논리가 더 타당합니다. 퇴계도 이 부분을 인정합니다만..퇴계는 수양론 때문에 끝까지 이기양발설을 고수합니다. 4단을 수양하여(발하게 하여) 7정을 다스리게 해야 하기 때문에 무리수를 두게됩니다. 이는 뒤에 율곡이 기대승의 논지를 그대로 계승하여 기중심의 이기철학을 완성하게 됩니다. 쓰신 리뷰 중에서 제가 아는 부분과 좀 다른 면이 있어 주제넘지만 몇 자 남겼습니다~

카를 2010-08-03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좋은 사실을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