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적부터 계신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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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Blake  1757-1827

 
The River of Life  circa 1805

Pen and ink and watercolour on paper
support: 305 x 336 mm
on paper, unique

Bequeathed by W. Graham Robertson 1949

N05887
As Blake’s inscription on the lower right shows, this work illustrates lines from chapter 22 of the Book of Revelation. The River of Life flows from the throne of God to the Tree of Life. The figures are Blake’s invention.

The river banks may represent Innocence (left) and Experience (right). Innocence is symbolised by the babe in arms and the child reaching up to the tree of knowledge. Experience is symbolised by the grey bearded figures hiding books. Christ leads two children through the river towards the sun which is the light of the Lord.
 (From the display caption May 2003)

오른쪽 하단에 쓰여진 블레이크의 기록처럼, 이 작품은 계시록의 22장에 들어간 일러스트이다. 생명의 강은 신의 권좌에서부터 생명의 나무로 흘러간다. 인물들은 블레이크의 창안이다.

강의 둑은 순수(왼쪽)와 경험(오른쪽)을 나타내는 것 같다. 순수는 팔 안의 아기와 지식의 나무에 닿으려하는 아이로 상징화되었으며, 경험은 책을 숨기고 있는 회색 수염의 인물로 상징화되어있다. 예수는 강을 따라서 신의 빛인 태양 쪽으로 두명의 아이들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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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Blake,   Plate 2 of 'Urizen' - 'Teach these Souls to Fly' , 1796(?)

 

 

      엄마의 이름은 Enitharmon. 블레이크의 신화 속에서 저 여인은  'Pity'를 상징한다.

      여인의 아들은 Orc,  'Revolution' 을 상징한다.

 

      이 그림 속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Liberty'를 가르치고 있다.

  

      Orc는 나중에 아버지 Los에 의해 체인에 감겨 산에 묶인다.

      아버지는 아들과 어머니 사이를 질투하여 아들에게 형벌을 내린 것이다.

      Orc가 산에 묶인 사건은 'natural passion' 묶어놓았다는 뜻이란다.

 

      이 블레이크의 신화 속에서는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근친상간이 암시되어 있다.

      그렇다면 왜 아들은 '혁명'을 상징할까...

 

      가타리와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떠올려보자.      

 

      정신분석학에서 오이디푸스 시기는 유아기의 본능적 충동을 넘어,

      윤리와 도덕이라는 사회적 질서 속으로 편입되는 문턱을 뜻한다.

      즉, 자아는 무의식적 본능을 억누르고(산에 묶였다는 점), 어머니를 향한 사랑을 내버리고,

      기존 사회체제 속의 길들여진 자아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는 사회적 문턱으로 들어서는 이 과정을 생략하는 것이다.

      왜? 오이디푸스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이성 중심의 근대적 세계관을  체득하기 때문이다.

 

      근대적 세계관 속에서 모든 것은 이성/비이성, 남성/여성, 서양/동양, 주인/노예와 같은

      이분법적 사고를 통해  불평등한 사회구조, 인식구조를 생성해낸다.

 

      따라서 오이디푸스 과정을 역행하는 것은 Orc의 상징성인 '혁명'을 발동하는 것을 뜻한다.

      블레이크의 신화에서 '어머니와 아들의 사랑'은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퇴행'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블레이크가 살았던 18세기와 19세기 초는 계몽주의가 횡행하던 시절이라는 것을 상기하자.

 

      블레이크는 예언자이자 세상을 버린 은둔자였다.

 

      이 그림은 Orc가 형벌을 받기 전 어머니가 아들에게 '자유'를 가르치는 장면이다.

      즉 '혁명'을 통한 'natural passion'의 분출을 잉태하게끔 하는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블레이크는

      Pity가 Revolution 에게 Liberty를 가르치는 장면을 통해

      natural passion을 억압당한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가여운 것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다.   

      우리는 날아야 한다.  "내 안의 신이 춤을 추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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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커 [Hooker, Richard, 1554~1600.11.2]

옥스퍼드대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의 교수가 되었다. 1581년 성공회(영국 국교회)의 성직자가 되었으며, 1585년에는 법학원(法學院) 부속교회의 목사로 전출하였다. 당시 세력이 커져가기 시작한 청교도와의 대결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던 그는, 그 논쟁이 동기가 되어 《교회정치의 법칙》을 저술하였다. 1594년에 제1~4권을 출판한 데 이어 1597년에 제5권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 1648년에 제6, 8권이, 1662년에 제7권이 출간되었다.

유고(遺稿)로 출판된 그 책에는 약간의 의문이 있는 것으로 전한다. 그의 종교사상은 성서주의에 입각한 청교도주의에 대해서도, 또 전승(傳承)에 권위를 두는 가톨릭에 대해서도 반대하여, 중용(中庸)의 입장에 있는 성공회의 철학적인 근거를 얻으려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이 책을 쓴 목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책은 당당한 격조로 씌어진 산문이라는 점에서, 산문 문학사상 특기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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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조의 시대 순서

고대 시대 - 중세 시대 - 앵글로. 색슨 7왕국 시대 시작 - 앵글로 색슨 왕조 - 노르만 왕조 - 플랜테지넷 왕조 - 근세 시대 - 랭카스터 . 요크 왕조 - 튜더 왕조 - 스튜어트 왕조 - 하노버 왕조 - 현대 시대 - 윈저 왕조

☞ 고대 시대

* 켈트 족 거주, 케사르의 원정(B.C. 55) - 로마의 통치를 받음.


☞ 중세 시대

♣ 앵글로 색슨 왕조

◈ 웨섹스가(Wessex 家)
(1) 엑버트(829 ∼ 839) - (2) 에델울프(839 ∼ 858) - (3) 에델볼드(858 ∼ 860) - (4) 에델버트(860 ∼ 866) - (5) 에델레드 1세(866 ∼ 871) - (6) 알프레드 대왕(871 ∼ 899) - 에드워드1세(899 ∼ 924) - (8) 에델스탄(924 ∼ 940) - (9) 에드먼드 1세(940 ∼ 946) - (10) 에드레드(946 ∼ 955) - (11) 에드위(955 ∼ 959) - (12) 에드거(959 ∼ 975) - (13) 에드워드(975 ∼ 978) - (14) 에델레드 2세(978 ∼ 1016) - (15) 에드먼드 2세(1016)

◈ 댄가(Dane 家)
(16) 카누트 대왕(1016 ∼ 1035) - (17) 하롤드 1세(1035 ∼ 1040) - (18) 하르디카누트(1040 ∼ 1042) - (19) 에드워드(1042 ∼ 1066) - (20) 하롤드 2세 (1066)

♣ 노르만 왕조(1066 ∼ 1154)
롤로(조대 노르망디 공) - 윌리엄 - 리처드 1세 - 리처드 2세 - 로버트 - (1) 윌리엄 1세 (정복왕 1066 ∼ 1087) - (2) 윌리엄 2세 (1087 ∼ 1100) - (3) 헨리 1세(1100 ∼ 1135) - (4) 스티븐(1135 ∼ 1154)

♣ 플랜테지넷 왕조(1154 ∼ 1399)
(1) 헨리 2세(1154 ∼ 1189) - (2) 리처드 1세(1189 ∼ 1199) - (3) 존(無領王 1199 ∼ 1216) - (4) 헨리 3세(1216 ∼ 1272) - (5) 에드워드 1세(1272 ∼ 1307) - (6) 에드워드 2세(1307 ∼ 1327) - (7) 에드워드 3세(1327 ∼ 1377) - 에드워드(흑태자 1376 死) - 존(랭카스터 공) - 에드먼드(요크 공) - (8) 리처드 2세(1377 ∼ 1399)


☞ 근세 시대

♣ 랭카스터. 요크 왕조

◈ 랭카스터가(Lancaster 家)
(1) 헨리 4세(1399 ∼ 1413) - (2) 헨리 5세(1413 ∼ 1422) - 헨리 6세(1422 ∼ 1461)

◈ 요크가(York 家)

- (4) 에드워드 4세(1461 ∼ 1483) - (5) 에드워드 5세(1483) - (6) 리처드 3세(1483 ∼ 1485)

♣ 튜더 왕조(1485 ∼ 1603)
리처드 3세(요크가) = 마거릿(랭카스터가) - (1) 헨리 7세(1485 ∼ 1509) = 엘리자베스(에드워드 4세의 딸) - (2) 헨리 8세(1509 ∼ 1547) - (3) 에드워드 6세(1547 ∼ 1553)(시모어의 아들) - (4) 메리 여왕(1553 ∼ 1558)(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와 결혼)(캐서린의 딸) - (5) 엘리자베스 여왕(1558 ∼ 1603)(앤불린의 딸)


♣ 스튜어트 왕조(1603 ∼ 1714)
(1) 제임스 1세(1603 ∼ 1625) - (2) 찰스 1세(1625 ∼ 1649) - (청교도 혁명<1649>. 공화정 시대<1649 ∼1660> ) - (왕정복고<1660>) - (3) 찰스 2세(1660 ∼ 1685) - (4) 제임스 2세(1685 ∼ 1688) - (5) 메리 여왕(1688 ∼ 1694)와 윌리엄 3세(1688 ∼ 1702)의 공동 통치 - (6) 앤 여왕(1702 ∼ 1714)

♣ 하노버 왕조(1714 ∼ 1917)
(1) 조지 1세(1714 ∼ 1727) - (2) 조지 2세(1727 ∼ 1760) - (3) 조지 3세(1760 ∼ 1820) - (4) 조지 4세(1820 ∼ 1830) - (5) 윌리엄 4세(1830 ∼ 1837) - (6) 빅토리아 여왕(1837 ∼ 1901) - (7) 에드워드 7세(1901 ∼ 1910)


☞ 현대 시대

♣ 윈저 왕조(1917 ∼ )
(1) 조지 5세(1910 ∼ 1936) - (2) 에드워드 8세(1936) - (3) 조지 6세(1936 ∼1952) - (4) 엘리자베스 여왕(1952 ∼ )

 

 

1. 튜더왕조

 

영국에서 장미전쟁으로 귀족세력이 쇠퇴하자 헨리 7세는 귀족이 가신단(家臣團)을 거느리는 권리와 재판권을 박탈하고, 향신(鄕紳)과 시민을 추밀원(樞密院)에 기용하였으며, 해운법을 제정하여 상인을 규제하고 왕실재정을 단단히 하는 등 절대주의 정권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어 헨리 8세는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문제를 계기로 1534년 수장령(首長令)을 내리고 직접 교회의 수장이 되었으며, 이에 복종하지 않는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그 영지를 몰수하였다. 그가 처형한 대법관 토머스 모어의 작품 《유토피아》가 양모가격의 등귀(騰貴)에 따른 인클로저운동과 함께 이들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유명한 일이다. 헨리의 아들 에드워드 6세 밑에서 섭정(攝政)이 된 서머싯공(公)과 그의 실각 후의 워릭 백작은 카톨릭에 따르던 교지(敎旨) 내용마저 신교화함으로써 헨리의 사업을 철저히 하였다. 그러나 에드워드의 사후에 즉위한 누이 메리는 교황과 화해하여 카톨릭으로 돌아갔으며, 수장령(首長令)을 폐지하고 신교도를 박해하였다.

 

메리의 사후에 즉위한 여동생 엘리자베스 1세는 두 종파의 반목에서 오는 정정(政情)의 곤란성, 특히 몰수 수도원령을 차지한 신흥계급의 반감에 대처하기 위하여 에드워드 6세 시대의 정책을 부활시켰으며, 새로이 수장령과 통일령을 제정하고(1559) 신앙개조(信仰箇條)를 정비하여 영국국교회를 명실공히 확립하였다. 여왕은 가신단의 해체, 수도원령의 몰수, 인클로저운동 등으로 생긴 빈민대책으로서의 구빈법의 제정, 도제조례(徒弟條例)의 제정 등 국내정책을 충실히 하는 한편 식민사업도 추진하였으며, 러시아회사 ·레반트회사 ·동인도회사의 독점권을 설정하는 등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책을 밀어나가고, 에스파냐 함대를 격파하여 절대왕정을 완성하였다.

 

2. 스튜어트 왕조

그러나 절대주의는 엘리자베스시대를 정점으로 하여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여왕은 독신으로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사후에는 스코틀랜드왕 제임스가 혈연에 따라 잉글랜드왕을 겸하여 제임스 1세가 되고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었다. 그는 1605년의 가이 포크스 등 카톨릭 교도의 화약음모사건을 계기로 카톨릭을 탄압하였으며, 엘리자베스시대부터 세력을 키워온 칼뱅파(派) 청교도도 박해하였다. 청교도가 많은 의회와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의 제임스의 대립은 뒤를 이은 찰스 1세 시대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

 

1628년 의회가 공채(公債)나 조세(租稅)는 의회의 찬성을 요한다는 것, 함부로 백성을 체포 ·투옥하지 못한다는 것 등을 주요내용으로 한 권리청원을 통과시키자 왕은 의회를 해산시켰다. 왕은 재원조달을 위해 1640년에 의회를 소집하였으나 선출된 청교도가 이를 반대하자 곧 해산해 버렸다. 이것이 단기의회이다. 같은 해에 소집된 장기의회에서는 왕과 의회의 반목이 더욱 격화되었으며, 1642년부터는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의 국내전쟁이 일어났다. 이 내전은 1647년에 이르러 의회군의 승리로 돌아갔으나, 청교도는 온건주의 장로파와 급진주의 독립파 및 평등파로 분열하였다. 왕은 스코틀랜드의 장로파와 결속하고 각지의 왕당파의 지지를 얻어 다시 국내전을 일으켰다. 그러나 제2차 내전은 독립파와 평등파의 승리로 끝나 1649 찰스는 처형되고 올리버 크롬웰을 지도자로 하는 공화정부가 성립하였다.

 

청교도 혁명으로 상원은 폐지되고, 장로파와 토지배분을 요구하는 빈농·군인·직인 등 평등파도 탄압되었다. 크롬웰의 정부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대한 원정, 해운법에 의한 네덜란드의 제해권에 대한 도전, 에스파냐 함대의 타파 등 대외정책에서는 성공하였으나, 대내적으로는 엄격한 종교정책과 군사독재로 국민의 불만이 커졌다. 그가 죽자 1660년 의회는 신교의 자유, 마그나 카르타와 권리청원의 존중을 브레다 선언에서 맹세한 선왕의 아들 찰스를 망명처 네덜란드에서 맞아들이고 왕정을 부활시켰다.

 

새 의회는 소수의 장로파와 다수의 왕당파로 이루어졌으며, 다수파는 국교도만이 국왕이 될 수 있다는 심사율(審査律)의 제정을 비롯하여 국교주의의 재건에 주력하였으나,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밀약을 맺은 찰스 2세와의 대립이 표면화하였다. 이윽고 의회는 카톨릭 교도인 왕제(王弟) 제임스의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휘그와 토리의 두 파로 분열·항쟁하였는데, 찰스가 죽자 신왕 제임스 2세는 카톨릭주의와 절대주의 정치의 부활을 꾀하여 휘그뿐만 아니라 토리와도 적대하였다. 두 파는 협정하여 1688년 제임스의 딸 메리와 그 남편 윌리엄을 네덜란드에서 맞아들여 여왕과 왕으로 만들었다(메리 여왕과 윌리엄 3세). 제임스는 프랑스로 망명하였으며, 이에 이른바 의회 내 국왕을 원칙으로 하는 명예혁명이 성립하였다. 왕은 의회의 승인 없이 법의 정지 또는 면제, 금전의 징수, 상비군의 유지 등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한 권리장전(權利章典)이 이듬해 1689년에 의회를 통과하였으며, 그때부터 이는 마그나 카르타, 권리청원과 함께 영국헌법의 근간을 이루었다.

 

영국의 정치혁명의 시대는 끝나고, 윌리엄 3세는 제임스가 프랑스의 지원으로 복위(復位)를 꾀하자 1690년 네덜란드·독일·에스파냐와 협력하여 1697년의 강화 때까지 프랑스와 싸웠다. 전비조달 방법으로 1692년에는 국채제도가 시작되었으며, 1694년에는 잉글랜드은행이 설립되었다. 또 전비재원·화폐개주(貨幣改鑄)·무역차액·법정이자율 등의 문제를 두고 중상주의 논객들 사이에 활발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윌리엄 치세의 말기인 1702년부터 의매(義妹) 앤의 치세인 1714년까지의 에스파냐 계승전쟁의 결과 영국은 에스파냐와 프랑스로부터 뉴펀들랜드·노바스코샤·허드슨만(灣) 지방·지브롤터·미노르카 등을 획득하였으며, 절대왕정 이래의 식민지체제를 확대하여 국내 상공업자의 이익을 증진하였다. 또 그 동안 동군연합을 이루고 있었던 스코틀랜드와 합동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되었다.

 

3. 하노버 왕조

윌리엄과 앤 시대에 휘그와 토리는 교대로 정권을 잡았으나, 앤이 죽은 뒤 독일의 하노버가(家)에서 즉위한 조지 1세와 그의 아들 조지 2세의 치세는 휘그의 전성기였으며, 특히 1721∼1742년의 월폴 정권과 1756∼1762년의 대(大)피트 정권은 그 대표이다. 월폴은 책임내각제를 확립하였으며, 토리와도 협조하여 남해포말회사(南海泡沫會社) 사건 후의 경제재건에 성공하였다. 피트는 7년전쟁에서 프랑스 식민지를 공격하였으며, 1763년의 강화로 캐나다, 미시시피 동쪽을 영유하는 영국 제국의 길을 열었다.

 

1760∼1820년조지 3세 재위기간에는 토리 정권이 계속되었는데, 이 시대는 산업혁명으로 영국 산업자본주의가 성립한 시기이기도 하다. 사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 산업의 전분야가 일변하였다. J.하그리브스의 제니 방적기, R.아크라이트의 수력방적기, S.크롬프턴의 뮬 방적기, E.카트라이트의 역직기(力織機) 등이 잇따라 발명된 데다 J.와트의 개량 증기기관도 가세하여 면공업의 비약적 발전이 달성되었다. 또한 새 기술은 제철·채탄에도 파급하였고, 나중에는 철도부설에까지 이르렀다.

 

농촌에서도 제2차 인클로저운동, 비료개량, 탈곡기의 보급 등에 따라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 동안 농촌의 탈곡기 파괴 운동과 도시의 방직기 파괴 운동 등이 있었으나, 이러한 반항도 자본주의의 진전을 막지 못하였다. 사회과학면에서도 J.벤담의 정치학, A.스미스, D.리카도의 경제학 등 자유주의 사상이 중상주의를 대신하여 새시대의 요청에 따랐다. 프랑스가 18세기 말의 정치혁명으로 기도한 사회를, 영국은 경제혁명에 의해 실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1832년의 선거법 개정, 1846년의 곡물법 폐지, 1849년의 해운법 폐지 등은 모두 산업자본의 이익을 표현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산업자본의 발전은 노동자의 희생을 전제로 하였기 때문에 노동자의 단결도 불가피하였다. 1799년의 단결금지법, 1819년의 피털루사건 후에 있었던 6법 등의 탄압 입법도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으며, 1837년의 공장법, 1847년의 10시간법 등 보호입법이 실현되었다. 노동조합의 결성도 진행되어 1834년에는 전국 노동조합대연합이 만들어졌다. 매년선거·비밀투표·보통선거 등의 요구를 내건 차티스트는 1830년대와 1840년대에 걸쳐 대청원운동(大請願運動)을 벌였는데 그 결과, 선거법은 1867년과 1884년의 개정을 거쳐 소시민과 노동자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하였다.

 

조지 3세 시대의 영국의 발전은 조지 4세, 윌리엄 4세 시대를 거쳐 1837~1901년에 이르는 빅토리아 여왕시대에 절정에 달하였다. 국내적으로는 글래드스턴의 자유당과 디즈레일리의 보수당 등 2대 정당간의 정권교체에 의한 전형적 의회정치가 행해지고, 선거법 개정과 1871년의 노동조합법 제정 외에 교육·군사·사법 제도의 개정 등 근대화 정책이 추진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 등 백인식민지의 자치령화를 실현시키면서도 한쪽에서는 인도를 식민지화하고, 아편전쟁과 애로호(號) 사건을 계기로 중국시장에도 진출하였으며, 기타 수에즈운하를 매입하고 이집트를 보호령화하는 등, 영국 제국주의를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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