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의 죽음: 각성 혹은 새로운 영웅의 탄생
서어서문연구 26호
서울대학교 김경범
1925년에 출간된 아메리꼬 까스뜨로의 기념비적 저작 [세르반테스의 사상] 이후 축적된 수많은 연구 성과들은 돈키호테 연구자들로 하여금 해석의 차별성에 대한 강박 관념을 갖게 한다 그러나 더 이상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르반테스의 작품은 새로운 방법론이 등장할 때마다 적용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재해석을 위한 시도도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돈키호테의 죽음에 대한 해석 역시 새로운 연구 영역은 아니다 그렇지만 죽음의 의미에 주목한 연구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죽음의 의미가 텍스트에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주인공의 죽음이 아벨야네다의 위작 돈키호테 와 같은 서툰 모방작을 차단하기 위한 작가의 작위적 장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단순히 작위적인 장치에 그친다면 죽음은 삶과 아무런 내적 연관성을 갖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더 이상 그의 죽음에 대해 해석 하고 의미를 찾아낼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작위적 장치로서의 죽음은 텍스트 외적인 설명일 뿐이다 죽음의 의미에 있어서 이것이 전부라면 돈키호테의 모습은 광기라는 정형화된 관념만으로 축소되고 그 결과 이 작품 특유의 다양성과 애매성 더 애매한 표현으로는 근대성 도 근거가 흔들린다 돈키호테는 차가운 조각상이 아니라 현실과 기사도의 세계를 접목하기 위해 사유하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죽음은 단순한 서사적 장치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현실 세계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한 인간의 의미있는 선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주인공의 죽음이란 문제에 크게 주목하지 못했던 두 번째 이유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해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묘비에 쓰인 산손 까라스꼬의 시구에 나와 있듯이 죽음이란 광기에서의 깨어남, 진실에 대한 각성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돈키호테는 기사도의 이상 혹은 마법에 걸린 둘씨네아의 회복을 현실에서 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절망했고 그 결과 2부 마지막 장에서 마을 의사가 진단한 것처럼 우수와 자폐로 인해 죽는다 그리고 엿새 동안의 열병은 일종의 정화 과정이고 여섯 시간 남짓의 잠은 돈키호테에서 선한 사람 알론소 끼하노 로 돌아오기 위한 통과의례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한 인간을 미친 돈키호테와 정신이 온전한 알론소 끼하노로 분리시키면서 죽음의 의미를 돈키호테만의 것으로 한정시키고 있다 모든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듯이 돈키호테의 행위는 현실과 환상 이성과 광기 진실과 거짓이라는 대립적인 두 영역을 포괄하는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살다 와 죽다 는 반대말처럼 보이나 사실은 동의어이며 마찬가지로 미친 과 이성적인 도 동의어로 해석해야 한다 이와 같은 돈키호테의 이중적인 모습은 2부 17장에서 사자와의 모험이 끝난 뒤 그에 대한 돈 디에고 데 미란다의 판단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그러고 있는 동안 내내 돈 디에고는 아무 말도 없이 돈키호테의 이야기와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돈키호테가 미친척하는 정상인이거나 정상인척 하는 미친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1부의 이야기를 모르고 있었기에 돈키호테를 미친 사람으로도 또 정신이 올바른 사람으로도 본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말은 조리에 맞고 우아하며 세련되었는데 그의 행동은 엉뚱하고 바보스러워서 통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부 30장에서 신부가 이미 얘기했었고 그 이후에도 계속 언급되지만 돈키호테는 특정한 상황 앞에서만 기사도의 광기를 보여줄 뿐이며 대부분의 경우에서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정상적이다 즉 광기는 그의 성격 전체가 아니고 그것과 동일화될 수도 없다 이처럼 미친 돈키호테와 정상적인 돈키호테가 동시에 나타나는 모습은 텍스트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유독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만큼은 이분법적 방식으로 회귀한다 본 논문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출발한다 미친 돈키호테와 정신이 돌아온 알론소 끼하노라는 인식에 기초한 죽음의 의미는 텍스트가 지닌 여러 켜의 의미 층에서 가장 피상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미쳤으면서 동시에 이성적인 돈키호테처럼 알론소 끼하노도 광기와 이성을 모두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광기와 이성이 서로 다른 외형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광기와 이성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두 인물이 동일하다 따라서 돈키호테와 알론소 끼하노는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하나의 동일한 주체가 지닌 서로 다른 표상이며 이 두 표상은 궁극적으로 분리할 수 없다
의사가 진단했듯이 돈키호테의 병은 육체의 병이 아닌 마음의 병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미친 돈키호테와 제 정신을 차린 본래의 알론소 끼하노로 완전히 분리된다면 돈키호테를 부정한 알론소 끼하노는 살기 위한 노력과 의지를 당연히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텍스트에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알론소 끼하노로 변신하는 순간 돈키호테는 이미 죽었고 남겨진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주인공의 죽음에 대한 총체적인 의미는 돈키호테의 죽음에 알론소 끼하노의 죽음이 덧붙여져야 얻을 수 있다 또한 돈키호테의 죽음 즉 그의 우수와 자폐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으며 갑작스런 각성 의 이유는 무엇일까 라는 문제 역시 알론소 끼하노가 선택한 죽음의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 비록 텍스트는 각성의 결과만 언급하고 정작 중요한 각성의 계기 알론소 끼하노가 왜 돈키호테를 부정하게 되었는가 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언급하지 않지만 돈키호테의 병은 공작의 궁정 이전부터 축적된 쓰디쓴 체험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돈키호테의 각성은 갑작스런 변신이 아니라 일련의 진행과정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각성 이후의 인물이 목동이나 다른 무엇이 아니라 왜 알론소 끼하노라는 새로운 인물이며 그가 죽음을 선택하는 이유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이렇듯 돈키호테 2부 마지막 장에 나오는 주인공의 죽음에 대한 본 연구는 돈키호테와 알론소 끼하노를 비롯한 여러 이름으로 불려진 한 인간의 죽음으로 연구의 초점을 옮김으로써 주인공의 죽음에 대한 기존의 해석들을 확장시키고 주체의 문제를 살펴보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의 죽음이 또 다른 새로운 영웅의 탄생이라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알론소 끼하노라는 새로운 이름
주인공의 죽음에 대한 해석을 위해서 먼저 알론소 끼하노라는 이름부터살펴볼 필요가 있다 돈키호테 의 주인공이 가졌던 이름은 매우 다양하다 라만차의 어느 하급 귀족일 때는 여러 이름 끼하다 께사다 께하나 끼하나으로 불렸고 돈키호테가 되어서는 슬픈 표정의 기사와 사자의 기사라는 별명을 가졌으며 죽기 전에는 선한 사람 알론소 끼하노가 된다 그렇다면 알론소 끼하노라는 이름은 누가 부여했으며 그것이 정말로 라만차의 어느 마을에 사는 어느 양반의 본래 이름일까 1 부 1 장에서 일인칭 화자는 주인공의 이름이 끼하다 혹은 께사다 라고 알려져 있는데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께하나 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5장에서는 농부 알론소의 입을 빌어 주인공이 돈키호테가 되기 전 이름이 끼하나 라고 뒤집는다 여기 까지는 아직 가상의 아랍 작가 씨데 아메떼 베넨헬리가 등장하기 전이며 따라서 알론소 끼하노는 씨데 아메떼 베넨헬리가 지어낸 이름이다 그런데 여러 명의 작가가 등장하는 돈키호테에서 절대적 권위를 갖는 작가는 아무도 없다 비록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 작품이 진실된 역사 라고 강조하고 있으나 역사에 진실된 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는 것 자체가 역사에 대한 패러디이듯이 씨데 아메떼 베넨헬리도 무어인 번역자도 일인칭 화자도 돈키호테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서술자가 아니다 또한 1 부 처음에 끼하나라고 기록한 일인칭 화자가 2부 마지막 장에서 끼하노 로 바꾼 이유가 텍스트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단순히 아랍 작가가 그렇게 썼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궁색해 보인다 세르반테스가 끼하나 대신에 끼하노라고 한 것은 실수나 의도된 실수가 아니다 만약 2부 마지막 장에서 주인공의 이름이 알론소 끼하나 혹은 알론소 께하나로 쓰였다면 그의 본명은 당연히 그것이며 이 점에 대해 의심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런데 이웃에 사는 농부를 통해 확인된 이름이나 일인칭 화자가 생각한 이름 대신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는 사실은 알론소 끼하노가 주인공의 본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주인공이 살던 마을 이름처럼 그의 본명도 여전히 불확실하다 따라서 주인공이 돈키호테라는 이름과 성격을 자신에게 부여했듯이 알론소 끼하노라는 또 다른 이름과 성격을 스스로 부여한 것이다 여러 이름으로 불린 한 인간에게는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고유한 영혼과 삶에 대한 소명이 있다 무엇인지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그의 본명은 더 이상 나뉘지 않는 자신의 내면적 본질이고 텍스트에 등장하는 여러 이름들은 그 본질이 외부 현실에 투영된 편린이자 세상이라는 연극 무대에서 수행해야할 역할이다 돈키호테도 그 편린의 이름이며 돈키호테가 되기 전의 여러 이름과 알론소 끼하노라는 새로운 이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의 경우처럼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알론소 끼하노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사물과 그 이름에 대한 텍스트 내에서의 설명과도 맥을 같이한다 즉 한 인간과 그의 여러 이름과의 관계는 이발사의 대야와 맘브리노의 투구의 관계로도 설명할 수 있다 돈키호테는 모레나 산맥에서 산초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너에게 이발사의 대야로 보이는 그것이 네게는 맘브리노의 투구로 보이듯이 다른 사람에게는 또 다른 무엇으로 보일 것이다
사물의 본질이 대명사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즉 그것이 결국 궁극적으로 무엇인지 정의할 수는 없으나 그것은 이발사의 대야일 수도 있고 맘브리노의 투구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무엇도 될 수 있다 역으로 말하면 대야나 투구나 또 다른 무엇에도 그것 이 투영되어 있다 더 나아가 호아낀 까살두에로는 대야와 투구는 완전한 절연 관계에 있는 동떨어진 사물이 아니라 반짝임과 반사된 환영이라는 연결 고리로 이어져 있다고 말한다 주인공의 본질과 본명이 바로 위 인용문의 그것 이며 돈키호테와 알론소 끼하노라는 이름과 역할은 대야이며 투구인 것이다 이렇게 한 사물의 표상이 여러 모습일 수 있듯이 한 인간도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으며 새로운 이름은 그 인간의 새로운 표상이다 그리고 사물에 연결 고리가 있듯이 주인공의 두 이름에도 광기라는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아메리꼬 까스뜨로의 지적처럼 돈키호테와 알론소 끼하노는 결국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주체가 된다 까스뜨로는 돈키호테와 동행하고 싶은 마음과 마을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았던 산초처럼 주인공의 실체는 돈키호테와 알론소 끼하노를 하나로 보는 지점에서 찾아진다고 생각한다
돈키호테의 심층에는 그를 편력기사가 될 수 있게도 하고 그것을 그만두게 만들 수도 있으며 그 무엇으로도 나누어지지 않는 궁극적인 실체가 놓여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추론해 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작품 속에서 느껴지도록 고안된 것이다
이 말은 하나의 육체 안에 서로 다른 인식론적 범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게 보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모두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는 말이다 돈키호테에게 기사도 세계에 빠져버린 편집광적인 인물과 적절한 현실판단에 인문적 소양을 갖춘 사람의 모습이 교차하여 나타나듯이 알론소 끼하노에게도 돈키호테를 부정하는 이성적인 모습과 자신만의 광기가 공존한다 돈키호테의 광기가 현실 세계에서 기사도의 이상을 구현하려는 것이었다면 알론소 끼하노가 보여준 더 심한 광기는 바로 스스로 자신을 죽게 놓아두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 산초가 울면서 대답했다 주인님 죽지 마세요 내말 좀 들어 보시고 오래 오래 사세요 사람이 살면서 저지르는 제일 큰 광기는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스스로 자신을 죽도록 놔두는 거예요 아무도 죽이려 들지 않는데도 단지 슬픔 때문에 죽게 놔두는 것 말이에요
산초의 말에서도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듯이 알론소 끼하노에게 죽음이란 돈키호테적 광기의 연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