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롬웰 (Cromwell, Oliver ; 1599.4.25~1658.9.3)

  영국의 정치가로서 탁월한 재능과 함께 경건한 칼뱅주의 신앙을 바탕으로 한 강인한 성품을 갖춘 인물로 영국내란(청교도혁명)에서 국왕 찰스 1세에 맞선 의회진영의 유력한 장군 가운데 한 사람이다. 스튜어트 왕가를 전복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1653~58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포괄한 공화국의 호국경을 지냈다. 호국경으로 있으면서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은 후 쇠퇴의 길에 들어섰던 영국을 재차 유럽 열강의 지위로 끌어올렸다. 그는 근대 유럽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통치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칼뱅주의 신앙으로 무장되어 있었으나 종교적 관용(신앙의 자유)의 가치에 대해서도 깊은 신념을 갖고 있었다. 이와 함께 국내외적으로 그가 거둔 승리는 영국과 북아메리카 모두에서 청교도적 사고방식을 확대하고 유지하는 데 기여했으며 이로써 최근까지도 정치·사회 생활에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1599년 4월 25일 잉글랜드 동부 헌팅던에서 로버트 크롬웰과 엘리자베스 스튜어드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엘리자베스 여왕 치하에서 의회의원을 지냈으며 지주와 치안판사로 지역사회에 적극적으로 봉사했다. 아버지는 그가 18세 때 죽었으나 어머니는 89세까지 생존했다. 그는 시골에서 그래머 스쿨(초등학교)에 다니다 이후 1년간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시드니 서식스 칼리지에서 수학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어머니와 누이들을 돌보기 위해 케임브리지를 떠나 귀향했으나 한때 런던에 있는 링컨스인 법학원에서 공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곳에는 지방 젠트리들이 모여들어 어설프게 법률공부를 하곤 했었다. 1620년 8월 런던 시의 상인 제임스 부처 경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했다. 그녀와의 사이에 5남 4녀를 두었다.

  그의 부모는 모두 헨리 8세 통치기간의 수도원 해체로 꽤 득을 본 프로테스탄트 가문 출신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크롬웰의 성장과정에서 종교적인 면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가 헌팅던에서 다니던 학교의 교장이나 시드니 서식스 칼리지의 학장은 모두 열렬한 칼뱅주의자였으며 반(反)가톨릭 성향이 강했던 인물이었다. 젊은시절 크롬웰은 눈에 띄게 공부에 열중하는 편은 아니었으며 사냥과 같은 야외 운동을 좋아했다. 그러면서도 성서를 탐독했으며 월터 롤리 경이 쓴 〈세계사 The History of the World〉를 읽고 극찬했다. 그는 스승들로부터, 그리고 도서를 통하여 지상에서 인간의 죄는 징벌받아야 하는 것이지만 신은 성령을 통해 선택받은 자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른 나이의 결혼생활에서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에게 딸린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이 강했으며 고향의 여러 가지 일들에 관심을 쏟았다.

  39세 때 외삼촌으로부터 엘리에 있는 토지를 물려받을 때까지는 재정적 어려움에 시달렸는데 다른 하층 젠트리처럼 그역시 흉작에 따른 피해와 종류도 가지각색인 세금 및 부과금과 악전고투해야 했다. 1628년 헌팅던 선거구 출신으로 의회에 진출했으나 이듬해 의회는 찰스 1세에 의해 해산되고 11년간 1번도 소집되지 않았다. 의회가 열리지 않는 동안 크롬웰과 같은 시골 젠트리들에게는 불만이 쌓여갔다. 크롬웰 가문에는 이같이 불만에 찬 젠트리들이 상당수 있었다. 일례로 버킹엄셔 출신으로 부유한 지방지주였던 좀 햄던은 건함세(建艦稅) 부과에 반발해 국왕을 상대로 소송을 걸기도 한 인물이었는데 그는 바로 크롬웰과 사촌간이었다. 1640년 봄 케임브리지 선거구에서 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웨스트민스터에서 서머싯 출신의 노련한 정치가로 군주제에 아주 비판적이었던 좀 핌이 이끄는 많은 친구와 어울리게 되었다. 그런데 구성된 지 3주 만에 해산된 이 단기의회는 거의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크롬웰은 다시 케임브리지 선거구에서 당선되어 1653년까지 지속되는 이른바 장기의회에 진출하게 되었으며 본격적인 공직활동에 들어갔다.

  1628~29년 의회에서 활동하면서 크롬웰은 이미 열렬하고 다소 투박한 청교도로 알려져 있었으며 찰스 1세의 주교들에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는 그리스도교도 개인이 기도를 통해 직접 신과 직접적으로 교통할 수 있으며 성직자의 주된 임무는 설교를 통해 속인들을 감화시키는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 순회 설교사들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재산 일부를 내놓았으며 예배의식과 국교회의 권위를 중시하던 고교회파 지도자인 엘리의 지방주교에 대해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크롬웰은 국교에 대해 결코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영국교회의 전체 성직위계조직에 대해서는 불신감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성직감독제도의 폐지를 주창했으며 신자들 스스로가 목회자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믿었다. 세금과 각종 독점제도, 그리고 백성들에게 지워진 과중한 부담에 대해 동료의원들이 품고 있는 반감을 함께 느끼고 있었으나 크롬웰이 왕의 정부에 대해 반대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종교문제 때문이었다. 1641년 11월 존 핌과 그의 동료들이 주교들을 비난하고 성직자의 타락상을 지적하는 내용의 '대간의서'(大諫議書)를 제출하자 크롬웰은 하원이 대간의서를 통과시키지 않을 경우 자신이 가진 전재산을 "다음날 아침까지 모두 처분하고 다시는 잉글랜드를 쳐다보지도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대간의서는 찰스 1세에 의해 거부되었으며 왕과 의회내 비판세력 간의 괴리감은 더욱 심화되었다. 1개월 뒤 찰스 1세는 자신의 반대세력 가운데 5명을 반역혐의로 체포하고자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는데 당시 크롬웰은 여기에 포함될 만큼 두각을 나타낸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1642년 찰스 1세가 군사를 일으키고자 런던을 떠나자 상황은 내전으로 치달았으며 크롬웰은 거리낌없이 말하는 청교도로서뿐만 아니라 조직력과 지도력을 갖춘 실제적인 인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해 7월 그는 케임브리지 선거구민들이 방위조직을 구성하고 무장할 수 있도록 하원의 승인을 얻어냈으며 내란이 발발하자 곧 고향인 헌팅던에서 기병대를 조직했다. 같은 해 10월 23일 에지힐 전투의 마무리 단계에서 크롬웰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처음 모습을 나타냈다.

  크롬웰은 1643년에 군사조직가·전사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 처음부터 그는 의회군은 신중히 선발되어야 하며 적절한 훈련을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종교적 신념과 사회적 지위와는 관계없이 충성심과 훌륭한 몸가짐이 우선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해 2월 대령에 임명되어 일류급 기병연대를 조직하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군대에 좋은 대우와 함께 정기급료 지급을 요구하는 한편 훈련을 엄격하게 실시하고 군기를 바로잡아나갔다. 기병연대를 성공적으로 훈련시킨 결과 크롬웰은 전투를 치르고 나서도 이들을 통제해 재조직해낼 수 있었다. 이같은 점이 바로 전투지휘관으로서의 그의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643년 줄곧 자신이 사정을 훤히 알고 있는 동부지역에서 활동했으며 따라서 이 지역은 자타가 공인하는 의회파의 아성이 되었다. 7월 28일 링컨셔의 게인즈버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같은 날 엘리 섬의 지사로 임명되었는데 이곳은 왕당파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한 요새로 간주되었다. 실제로 의회군의 토머스 페어팩스 장군과 함께 전투를 수행했던 크롬웰은 링컨셔 윈스비에서 왕당파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했으며 이후 노팅엄셔의 뉴어크를 포위했다. 이에 따라 크롬웰은 이같은 승리에 흡족해하는 하원을 설득해 새로운 군대를 창설할 수 있었는데 이는 동부지역을 방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적진으로 공격을 펴기 위한 군대였다.

  이러한 성격의 군대는 1644년초 맨체스터 백작 2세인 에드워드 몬터규의 지휘하에 편성되었다. 하원에 모습을 나타낸 크롬웰은 맨체스터 백작을 칭찬하는 한편으로 해이해져 있다고 비난했다. 크롬웰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이용해 다른 장교들을 비난하는 데 대해 하원의원 모두가 찬동한 것은 아니지만 크롬웰의 동료의원들은 그에게 지지를 보냈다. 1644년 크롬웰은 중장계급으로 맨체스터 백작 다음 서열의 지휘관에 임명되었으며 하루 5파운드의 급료를 지급받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와의 동맹이 체결된 후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양왕국 위원에 임명되었는데 이 위원회는 내란기간중 총괄적인 전략을 관장하는 역할을 했다. 1644년 5월 맨체스터 백작의 군대가 링컨으로 진격한 데 이어 북쪽으로 나아가 스코틀랜드 군 및 요크셔 의회파 세력과 합류해 요크를 포위공격했다. 왕당파 군대의 총사령관 루퍼트 공은 포위망을 뚫었으나 7월 2일 마스터 무어 전투에 패배했다. 이로써 잉글랜드 북부는 사실상 의회파의 수중에 들어갔으며 크롬웰은 또다시 이 전투를 통해 성가를 드높였다. 그런데 크롬웰 자신은 맨체스터 백작의 꾸물거림과 무기력함을 비판하고 그가 진정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원했다고는 믿지 않았으며 9월 중순경 두 왕국 위원회에 출석해 자신의 불만을 토로했다. 크롬웰과 맨체스터 백작 사이의 불화는 잠시 가라앉았으나 뉴베리 전투에서 주로 맨체스터 백작이 크롬웰의 기병대에 대한 보병지원을 거부함으로써 전투가 패배로 끝나자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 재연되었다.

  크롬웰이 하원에 나가 맨체스터 백작의 행위에 대한 불만감을 자세히 털어놓자 맨체스터 백작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상원에서 크롬웰을 비난했으며 그를 '선동꾼'이라고 탄핵하려는 계획을 꾸미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언쟁은 다시 진정되었고 12월 크롬웰은 상·하원의 의원은 군대의 지휘권을 행사하거나 장교가 될 수 없도록 하는 방안을 제시했으며 이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또한 새로운 군대가 토머스 페어팩스 경의 휘하에 편성되도록 한다는 데 동의를 얻어냈다. 페어팩스 경을 추앙했던 크롬웰은 그를 거명하고 나서 새로운 부대를 조직하는 데 전념했으나 스스로가 하원의원 신분이었기 때문에 자신은 부대원에서 제외시켰다. 따라서 제2사령관직이 공석으로 남았으며 1645년 여름 내란이 절정에 달하자 페어팩스 경은 크롬웰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후 크롬웰은 찰스 1세의 마지막 남은 2개 야전부대가 섬멸당하게 되는 네이즈비 전투와 랭포트 전투에 참가했다. 1646년 1월 하원은 크롬웰에게 연간 2,500파운드에 해당하는 급료를 지급했고 직책임기를 6개월간 연장해주었으며 따라서 옥스퍼드 포위공격에 참전할 수 있었다. 페어팩스 경이 새로운 군대의 지휘권을 행사하고 무기력한 맨체스터 백작의 지휘권이 박탈되었기 때문에 크롬웰은 전쟁의 진행과정에 대해 만족해했다. 전쟁의 승리를 신의 자비로 돌렸으며 충성스럽게 전투에 참가했던 병사들에게 마땅한 보상을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내전이 끝나자 하원은 군대를 가능한 한 빨리 해산시키고자 했으며 이에 실망한 크롬웰은 1647년 3월 페어팩스 경에게 "병사들의 사기가 이같이 떨어진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해 5월 의회 내 민간인 출신 지도자들이 스코틀랜드인들을 고용해 자신들을 보호하도록 하면서 군대해산을 명령하자 평소 스코틀랜드인들을 싫어하던 크롬웰은 잉글랜드 병사들이 치욕스런 대우를 받아왔다고 생각하고 런던을 떠났으며 6월 4일 동료병사들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했다.

  1647년의 나머지 기간에 그는 잉글랜드 내의 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방안을 모색했으나 쉽사리 해결될 것 같지가 않았으며 곧 돈독하던 신앙심이 회의에 빠져들었다. 군대의 동요도 갈수록 심해졌으며 크롬웰이 런던을 떠나던 바로 그날 일단의 병사들이 찰스 1세를 체포했다. 크롬웰과 그의 사위 헨리 아이어턴은 2차례 찰스 1세와 면담하고 자신들이 의회에 제출하고자 하는 헌법안에 대해 찰스 1세가 동의하도록 설득을 시도했다. 그당시 크롬웰은 왕의 적이 아니었으며 찰스 1세가 자녀들에 대해 무척 애정이 깊은 데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주된 임무는 왕과 의회 모두를 신뢰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기고 있는 군대 내부의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것이었다. 일반 병사들의 압력에 못이겨 페어팩스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런던의 의사당으로 향했을 때 크롬웰은 그래도 의회의 권위는 유지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9월에는 하원에서 앞으로 더이상 국왕에게 청원하지 않도록 하는 법안이 제출되었으나 크롬웰은 이에 반대했으며 1월 사병대표들도 참석한 군대총회에서 자신은 어떤 특별한 형태의 정부를 구성할 생각이 없으며 또한 왕과 어떠한 밀약을 맺지도 않았다는 점을 납득시켰다. 다른 한편으로는 무정부 상태가 초래될 것을 우려하면서 왕정과 상원의 폐지, 그리고 보다 민주적인 헌법의 도입과 같은 극단적인 조치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그러나 군대와 의회, 그리고 국왕 사이의 관계를 중재하려던 그의 모든 노력은 찰스 1세가 햄프턴 궁에서 탈출하여 스코틀랜드측과 협상을 하기 위해 아일오브와이어트로 도망가는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1648년 1월 3일 크롬웰은 전에 보유한 모든 지위를 포기했으며 하원에 나아가 "왕은 완고한 사람이며 신이 그의 마음을 강팍하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왕에 대해 청원을 내지 못하게 하는 법안을 지지했다. 찰스 1세가 스코틀랜드측과 협정을 맺고 크롬웰이 의회와 군대 사이를 중재하는 데 실패한 것에 고무된 왕당파들은 재차 무장했으며 2차 내란이 발발하게 되었다. 페어팩스 장군은 우선 크롬웰을 웨일스로 파견해 그곳의 봉기를 진압하도록 했으며 이후 북부지역으로 보내 6월에 잉글랜드로 침입한 스코틀랜드 군대와 싸우도록 했다. 스코틀랜군과 북부지역의 왕당파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에 있었지만 랭커셔 전투에서 이들에게 승리를 거두고 나서 스코틀랜드로 진주해 질서를 회복시켰다. 최종단계에서 요크셔로 돌아와 폰티프랙트 포위공격의 책임을 맡았다. 노선을 확실히 정하지 못하고 여전히 머뭇거리면서 북부지역을 맴돌고 있는 동안 그의 사위 아이어턴과 남부지역 주둔군 소속 장교들이 결정적인 행동을 취했다. 이들은 찰스 1세와의 협상을 비난하는 내용의 항의서를 의회에 제출하고 찰스 1세를 살인자로 재판에 회부할 것을 요구했다. 여전히 입장이 불투명하던 크롬웰은 자신의 군대가 남부지역 주둔군과 견해를 같이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페어팩스 장군의 명령으로 런던 귀환길에 올랐으나 그가 런던에 도착한 것은 이미 아이어턴과 그의 동료들이 하원에서 국왕과의 협상을 주장하던 인사들을 모두 축출하고 난 다음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주저하던 크롬웰은 아이어턴에게 떠밀려 마침내 크리스마스 무렵 찰스 1세를 살인자로 재판에 회부할 것을 요구했다. 고등법원의 135명 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크롬웰은 찰스 1세의 사형집행영장에 서명했다.

  영국이 공화정을 선포한 후 크롬웰은 단원제 의회의 집행기구인 국무회의의 제1 의장이 되었다. 찰스 1세의 처형 후 3년 동안 주로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 있는 왕당파와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수평파(Levllers)와 같은 극단주의적인 청교도 집단의 반란행위를 진압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크롬웰 자신은 1641년 잉글랜드 정착민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을 아일랜드인들이 자행했다고 믿었으며 따라서 자신이 총사령관 겸 총독으로 나서 아일랜드에 대한 무자비한 원정을 벌였다. 1650년 5월 런던으로 돌아오던 길에 부대를 이끌고 스코틀랜드로 향하도록 명령을 받았는데 당시 스코틀랜드에서는 찰스 2세가 새로운 왕으로 인정된 상태였다. 페어팩스 장군이 취임을 거부했으므로 6월 25일 크롬웰이 페어팩스를 대신해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크롬웰은 가톨릭교도가 대부분이었던 아일랜드인에 비해 청교도가 다수인 스코틀랜드인들에게 보다 호감을 갖고 있었다. 전쟁은 어렵게 진행되었으며 1650년 여름 크롬웰은 병에 걸렸으나 9월 3일 던바 전투에서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1년 후 찰스 2세가 잉글랜드로 진격했을 때도 우스터에서 이를 격퇴했다.

  이로써 내란은 종식되었으며 크롬웰은 평화와 함께 정치적 안정과 사회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사면법을 통과시켰으나 여전히 의회에 대한 군대의 불만은 더욱 심해졌다. 군대 내에는 의회의원들이 부패했으며 의회가 새로 소집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했다. 크롬웰은 양측을 중재하려고 다시 시도했으나 스스로는 군대편에 마음이 기울고 있었다. 마침내 의회를 해산시키기로 결정하고 1653년 4월 20일 자기 휘하의 총기병을 소집해 하원에서 의원들을 강제로 축출했으며 2개월 후 자신이 지명한 인사들로 의회를 구성했다. 이전의 의회가 굼뜨고 이기적인 성격이 강했던 데 반해 새로 구성된 의회는 지나치게 조급하고 과격한 편이었다. 또한 크롬웰은 의회가 자신에게 자문을 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존 램버트 소장과 일단의 장교들이 계획한 쿠데타 이후 1653년 12월 의회의 대다수 인사들이 크롬웰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다. 크롬웰은 3년마다 소집되는 의회와 국무회의의 자문을 받으며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 세 나라를 통치하는 호국경(Protectorate)에 취임했다.

  1654년 9월 3일 의회를 소집하기에 앞서 크롬웰과 국무회의는 국내정책에 관한 80가지가 넘는 조례를 통과시켰다. 그가 목적한 바는 법률 개혁과 청교도 교회의 확립, 종교적 관용, 교육의 진흥, 통치의 분권화 등이었다. 법률가들의 반발이 있기도 했으나 크롬웰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 훌륭한 재판관들을 임명했으며 사소한 범죄에 대해 사형을 내리는 관행에 강력히 반대했다. 또한 일부 국무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입국을 다시 허용했다. 교육에도 종사하여 옥스퍼드 총장직을 훌륭히 수행하고 더럼에 칼리지를 세웠으며 라틴어 문법을 가르치는 중등학교를 크게 육성했다.

  1654년 네덜란드와의 전쟁상태가 원만히 마무리되고 나서 군사력의 활용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어 국무회의가 분열되자 그는 프랑스와 동맹하여 스페인에 대항한다는 최종결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스페인령 서인도제도에 원정대를 파견했으며 1655년 5월 자메이카를 정복했다. 프랑스와 합세해 스페인령 플랑드르에도 원정대를 파견하여 됭케르크 항을 손에 넣었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에도 큰 관심을 쏟았는데 크롬웰 스스로는 스웨덴의 카를 10세를 존경했지만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은 국가적 이익이었다. 경제와 산업정책은 주로 전통적인 노선을 따랐으나 독점제도에는 반대했다. 따라서 동인도회사는 독점체제에서 벗어나 3년 동안 완전히 자유경쟁체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하자 1657년 10월 동인도회사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 그 대가로 새로운 특허장을 부여했다. 자금을 끌어올 만한 만족스런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유럽 다른 국가의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크롬웰의 공화국 역시 재정적 어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공화정하에서 의회가 처음 소집되자 크롬웰은 호국경체제가 내란 이후의 국가위기 극복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역설했으며 자신의 정부가 혼란과 사회적 반란을 막아냈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수평파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며 국교회의 붕괴로 인한 정신적 무정부상태가 심각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법률의 개혁과 같은 일부 측면에서는 급진적이었지만 왕정체제의 전복으로 인한 정치적 붕괴를 우려했기 때문에 한편으로 보수적인 태도를 취했다. 공화주의를 소리 높여 외치는 인사들이 새로 구성된 의회의 지도자로 부상했으며 이들은 입법에만 전념하지 않고 크롬웰 정부의 전체적인 기반에 의문을 제기했다. 크롬웰은 이들에 대해 새로운 체제의 4가지 근본적인 원칙, 즉 한 사람과 하나의 의회에 의한 정부, 의회의 정기적 소집, 양심의 자유 보장, 호국경과 의회 간의 무장군인에 대한 지휘권의 분할 수용을 역설했다. "신이 인정하고 인간이 승인한 이 정부를 멋대로 전복하는 것을 좌시하느니 차라리 무덤으로 굴러가 오명을 쓰고 묻히겠다"고 하면서, 의석을 계속 유지하고자 한다면 호국경과 의회에 대해 충성을 바칠 것과 아울러 체제의 근본 성격을 변경시키려고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라고 요구했다. 공화주의로 무장된 100명의 인사를 제외하고 나머지 의원들은 그렇게 하기로 동의했으나 여전히 호국경이 바라던 대로의 법률 개혁보다는 헌법을 새로 작성하는 데 더 관심을 쏟고 있었다. 그러자 크롬웰은 1655년 1월 22일 의회를 해산했다. 1656년 소집된 의회와도 똑같은 문제로 충돌했으며, 1658년 2월 재차 의회를 해산했다.

  크롬웰은 아일랜드 원정 이후 건강이 계속 악화되었으며 1658년 8월 총애하던 딸 엘리자베스가 암으로 죽은 후 자신도 말라리아에 걸려 런던의 세인트제임스 궁에서 요양할 셈으로 런던으로 돌아왔으나 9월 3일 3시에 화이트홀에서 죽었다. 그의 유해는 11월 10일 웨스트민스터 묘지에 비밀리에 안장되었으며 장례는 13일 뒤 국장으로 치러졌다. 찰스 2세의 즉위로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후인 1661년 크롬웰의 무덤은 파헤쳐져 그의 시신은 죄수들이 처형되던 타이번에 내걸렸다. 이후 그의 시신은 교수대 아래 매장되었으나 머리부분은 웨스트민스터 홀의 꼭대기에 내걸린 채 찰스 2세의 집권말기까지 그대로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크롬웰은 결코 극단적인 청교도가 아니었으며 천성적으로 잔인하지도 무자비한 인물도 아니었다. 자신의 병사들을 매우 아꼈으며 당시의 장군들이 의견을 달리했을 때 그들을 심하게 징계하지는 않았다. 가족들에게도 헌신적이었다. 음악과 사냥을 즐기고 훌륭한 말을 구분하는 데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담배와 술을 즐겼으며 젊은 시절에는 병사들과 함께 말을 타고 달리는 데 빠져 있기도 했으나 위엄을 잃지 않은 통치자였다. 호국경으로 있으면서 그는 젊은 시절의 엄격했던 청교도적 성향에 비해 훨씬 관대했다. 정치적인 면에서는 그의 이른바 자의적인 성격의 정부에 대해 반대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뚜렷한 입장이 없었다. 찰스 1세의 처형에 앞서 찰스 1세의 아들 중 하나를 왕위에 앉히는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했으며 상원의 폐지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17세기말 그에 대한 평가는, 용기는 있으나 악한 인물이라는 혹평이 우세했지만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었다는 점은 인정되었다. 18세기 들어서는 메스꺼운 위선자라는 악평이 우세했으나 19세에 와서는 토머스 칼라일의 영향을 받아 찰스 1세의 전제주의를 파괴한 헌정개혁가로 평가되었다. 현대에 와서는 평가가 더욱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신의 소명에 대한 그의 확신은 심리학적인 견지에서 분석되고 있으며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가 무력으로 급진운동을 탄압하고 수평파의 정책에 저항함으로써 혁명의 대의명분을 저버렸다고 비난한다. 대체적인 평가에 있어서 독재자로서의 그의 성격은 매우 제한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오히려 내란 후 정치적 안정을 회복시키고 입헌주의 정부체제의 발전과 종교적 관용에 공헌한 애국적 지도자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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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오성론 [人間悟性論,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영국의 철학자 J.로크(1632~1704)의 주저(主著). 
1690년 
  
4권. 1690년 간행.

서론(序論) 및 제 1권에서는 인간학적인 인식론적 시점(視點)을 설정하고, 우리들 마음속에는 천성적인 원리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여 형이상학적 의론을 배격하였다.

제2권에서는 오성의 직접대상은 관념이고, 관념은 모든 경험에서 유래한다고 하였으며, 관념을 단순관념과 복합관념으로 나누었다. 이에 따라 종래 지배적이었던 신학적 형이상학의 기본개념을 이루던 실체개념은, 인간의식에 의하여 지향되는 대상개념으로 전화(轉化)하게 되었다.

제3권은 언어를 논하고, 언어를 관념의 외적 기호(外的記號)라고 생각하였다.

제4권에서는 지식을 관념의 일치 ·불일치의 지각(知覺)으로서 논하였으며, 직각적(直覺的) 지식, 논증적 지식, 감각적 지식을 음미하였고, 나아가 개연성(蓋然性)을 벗어나지 않은 판단에 대하여 논하였다. 더욱이 이 저서를 축조적(逐條的)으로 비판한 것에는 독일의 철학자 G.W.F.라이프니츠의 《인간오성 신론(新論)》(1704)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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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 [人間本性-關-論考, A Treatise of Human Nature]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의 철학 저서. 
 발간연도  1739∼1740년 
   
 근대 영국 경험론을 완성한 저서로 세 권으로 구성되었다. 1권 《오성에 관하여》와 2권 《정념에 관하여》는 1739년에 출판되었고, 3권 《도덕에 관하여》는 그 이듬해에 출판되었다. 잘 알려진 제목인 《인간 오성 연구》는 1권의 재판으로 1751년에 출판되었고, 《도덕 원리 연구》는 3권을 개작하여 같은해에 출판한 것이다. 이 책에서 흄은 오성, 정념, 도덕의 문제들을 통해 모든 학의 토대인 인간학을 경험적으로 관찰하여 그 위에 안전한 학의 체계를 세울 것을 의도한다. 이를 위해 흄은 뉴턴의 과학적 방법론을 인간 본성의 연구에까지 확장시키고, 로크·버클리 등의 경험주의 철학의 진전을 이끌어 낸다.

《오성에 관하여》는 인간 정신의 모든 지각을 인상과 관념으로 구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인상은 감각적 대상의 심상을 가질 때나 정념 또는 정서를 느낄 때의 정신의 지각이다. 관념은 인상의 희미한 심상으로 인상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구분은 로크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본유관념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제1 명제를 나타낸다. 오성은 기억과 상상력의 결합 활동에 의해 이러한 단순한 지각 표상뿐만 아니라 복합적인 관념도 갖는다. 상상력은 결합의 능력으로서 인과성, 유사성, 인접성의 성질에 따라 하나의 관념을 다른 관념들과 연합시킨다. 실체나 본질, 원인과 결과와 같은 관념들은 인상으로부터의 단순 관념들을 상상력이 연합한 복합관념들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어떠한 필연적 연결에 대한 관념은 없다.

필연성에 대한 관념은 대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습관과 반복에 따른 심리적 반영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이 반드시 그러하다는 명제를 지식으로 인정할 수 없다. 우리는 관념의 생생함의 정도에 따른 신념만을 하나의 명제나 관념에 대해서 가질 뿐이다. 흄은 이러한 논의를 통해 대상에 대한 필연적인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회의주의적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흄은 극단적이거나 독단적인 회의주의를 비판한다. 흄의 결론은 관찰되고 경험된 사실들을 충분하게 신뢰할 수는 없지만 그것들로부터 추리의 안내를 받아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정념에 관하여》에서는 정서적 측면에서의 인간의 본성을 분석한다. 흄은 정념을 직접적인 것과 간접적인 것으로 구분한다. 전자는 대상의 경험에서 직접 발생하는 고통, 쾌락과 같은 것이고 후자는 인상과 관념의 이중적인 관계에서 생기는 사랑, 미움, 자만, 겸손과 같은 것이다. 흄은 간접적 정념들을 불러일으키는 원인들을 1권에서와 마찬가지로 인상과 관념들의 연합의 원리에 근거하여 설명한다. 필연성과 자유의지 역시 1권에서 부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다. 정념과 행위에 대해서만 특별하게 필연성이 부여될 이유가 전혀 없으며 따라서 최초의 원인으로서의 자유의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다.

《도덕에 관하여》는 도덕적 구별의 원천이 이성이 아니라 쾌나 불쾌에 대한 느낌에 있다는 것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한다. 정의의 기원도 이와 유사하다. 개인은 사욕을 위해 사회를 필요로 하고 그 사회를 존속시키기 위해 소유권과 규제하는 관습을 인식한다. 이것은 공통의 이익에 관한 일반적 인식이며 이를 통해 정의의 근본 법칙들이 나타난다. 흄은 정의가 사욕에 기초한 인간의 관습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인위적인 덕으로 분류한다. 그러면서도 자연법과 유사한 것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자연법에 대한 복종의 의무는 정부를 통해 개인에게 관철된다. 정부는 유용하다는 느낌에 기초한 동의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정부에 대한 충성의 의무도 유용성에서 기인한다.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의 3권은 방법론과 철학적 입장에서 일관성을 가지고 인간 본성에 대한 체계적 설명을 한다. 이 책은 인식론, 윤리학, 사회철학 등의 철학 분야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근대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은 칸트가 그의 비판철학을 계획하도록 그에게 강력한 영감을 불어넣었다. 또한 도덕적 정당화를 유용성에 결부시킴으로써 공리주의의 출현에 기여했다. 그의 철학은 그 영향력만큼 다양하게 해석되어 왔는데, 대표적인 것이 회의주의와 자연주의적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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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04-07-27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책.... 지난 학기 때 리포트로 내야하는데, 결국 구하지 못해 숙제를 못했더랬죠...ㅜ.ㅜ 아~ 서글퍼라...
 

인간의 이성과 지성은 어둡고 고질적인 악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손상되어 있기에 말씀의 변함없는 빛을 품을 수도 그 안에 머무를 수도 없다.

그렇게 되려면 믿음으로 마음을 깨끗이 하여 말씀이 머무를 수 있도록 매일매일 새로와 가야만 한다.

매일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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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의 죽음: 각성 혹은 새로운 영웅의 탄생

 

서어서문연구 26호

 

서울대학교 김경범

 

 

1925년에 출간된 아메리꼬 까스뜨로의 기념비적 저작 [세르반테스의 사상] 이후 축적된 수많은 연구 성과들은 돈키호테  연구자들로 하여금 해석의 차별성에 대한 강박 관념을 갖게 한다   그러나 더 이상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르반테스의 작품은 새로운 방법론이 등장할 때마다 적용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재해석을 위한 시도도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돈키호테의 죽음에 대한 해석 역시 새로운 연구 영역은 아니다   그렇지만 죽음의 의미에 주목한 연구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죽음의 의미가 텍스트에 명확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주인공의 죽음이 아벨야네다의 위작 돈키호테 와 같은 서툰 모방작을 차단하기 위한 작가의 작위적 장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단순히 작위적인 장치에 그친다면 죽음은 삶과 아무런 내적 연관성을 갖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더 이상 그의 죽음에 대해  해석 하고 의미를 찾아낼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작위적 장치로서의 죽음은 텍스트 외적인 설명일 뿐이다   죽음의 의미에 있어서 이것이 전부라면 돈키호테의 모습은 광기라는 정형화된 관념만으로 축소되고 그 결과 이 작품 특유의 다양성과 애매성 더 애매한 표현으로는 근대성 도 근거가 흔들린다   돈키호테는 차가운 조각상이 아니라 현실과 기사도의 세계를 접목하기 위해 사유하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죽음은 단순한 서사적 장치가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현실 세계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한 인간의 의미있는 선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주인공의 죽음이란 문제에 크게 주목하지 못했던 두 번째 이유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해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묘비에 쓰인 산손 까라스꼬의 시구에 나와 있듯이 죽음이란 광기에서의 깨어남, 진실에 대한 각성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돈키호테는 기사도의 이상 혹은 마법에 걸린 둘씨네아의 회복을 현실에서 구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절망했고 그 결과  2부 마지막 장에서 마을 의사가 진단한 것처럼  우수와 자폐로 인해 죽는다   그리고 엿새 동안의 열병은 일종의 정화 과정이고   여섯 시간 남짓의 잠은 돈키호테에서  선한 사람 알론소 끼하노 로 돌아오기 위한 통과의례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한 인간을 미친 돈키호테와 정신이 온전한 알론소 끼하노로 분리시키면서 죽음의 의미를 돈키호테만의 것으로 한정시키고 있다   모든 연구자들이 동의하고 있듯이 돈키호테의 행위는 현실과 환상   이성과 광기   진실과 거짓이라는 대립적인 두 영역을 포괄하는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살다  죽다 는 반대말처럼 보이나 사실은 동의어이며 마찬가지로  미친  이성적인 도 동의어로 해석해야 한다   이와 같은 돈키호테의 이중적인 모습은  217장에서 사자와의 모험이 끝난 뒤 그에 대한 돈 디에고 데 미란다의 판단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그러고 있는 동안 내내 돈 디에고는 아무 말도 없이 돈키호테의 이야기와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돈키호테가 미친척하는 정상인이거나 정상인척 하는 미친 사람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1부의 이야기를 모르고 있었기에 돈키호테를 미친 사람으로도 또 정신이 올바른 사람으로도 본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말은 조리에 맞고 우아하며 세련되었는데 그의 행동은 엉뚱하고 바보스러워서 통갈피를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부 30장에서 신부가 이미 얘기했었고 그 이후에도 계속 언급되지만 돈키호테는 특정한 상황 앞에서만 기사도의 광기를 보여줄 뿐이며 대부분의 경우에서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정상적이다   즉 광기는 그의 성격 전체가 아니고 그것과 동일화될 수도 없다   이처럼 미친 돈키호테와 정상적인 돈키호테가 동시에 나타나는 모습은 텍스트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유독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만큼은 이분법적 방식으로 회귀한다   본 논문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출발한다   미친 돈키호테와 정신이 돌아온 알론소 끼하노라는 인식에 기초한 죽음의 의미는 텍스트가 지닌 여러 켜의 의미 층에서 가장 피상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미쳤으면서 동시에 이성적인 돈키호테처럼 알론소 끼하노도 광기와 이성을 모두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광기와 이성이 서로 다른 외형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광기와 이성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두 인물이 동일하다   따라서 돈키호테와 알론소 끼하노는 존재론적으로나 인식론적으로 하나의 동일한 주체가 지닌 서로 다른 표상이며 이 두 표상은 궁극적으로 분리할 수 없다

 

의사가 진단했듯이 돈키호테의 병은 육체의 병이 아닌 마음의 병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미친 돈키호테와 제 정신을 차린 본래의 알론소 끼하노로 완전히 분리된다면 돈키호테를 부정한 알론소 끼하노는 살기 위한 노력과 의지를 당연히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텍스트에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알론소 끼하노로 변신하는 순간 돈키호테는 이미 죽었고   남겨진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주인공의 죽음에 대한 총체적인 의미는 돈키호테의 죽음에 알론소 끼하노의 죽음이 덧붙여져야 얻을 수 있다     또한 돈키호테의 죽음    그의 우수와 자폐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으며 갑작스런 각성 의 이유는 무엇일까 라는 문제 역시 알론소 끼하노가 선택한 죽음의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   비록 텍스트는 각성의 결과만 언급하고 정작 중요한 각성의 계기 알론소 끼하노가 왜 돈키호테를 부정하게 되었는가 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언급하지 않지만   돈키호테의 병은 공작의 궁정 이전부터 축적된 쓰디쓴 체험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돈키호테의 각성은 갑작스런 변신이 아니라 일련의 진행과정 속에서 피할 수 없는 결과인 것이다   따라서 각성 이후의 인물이 목동이나 다른 무엇이 아니라 왜 알론소 끼하노라는 새로운 인물이며 그가 죽음을 선택하는 이유가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이렇듯 돈키호테   2부 마지막 장에 나오는 주인공의 죽음에 대한 본 연구는 돈키호테와 알론소 끼하노를 비롯한 여러 이름으로 불려진 한 인간의 죽음으로 연구의 초점을 옮김으로써 주인공의 죽음에 대한 기존의 해석들을 확장시키고 주체의 문제를 살펴보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의 죽음이 또 다른 새로운 영웅의 탄생이라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알론소 끼하노라는 새로운 이름

 

주인공의 죽음에 대한 해석을 위해서 먼저 알론소 끼하노라는 이름부터살펴볼 필요가 있다   돈키호테 의 주인공이 가졌던 이름은 매우 다양하다 라만차의 어느 하급 귀족일 때는 여러 이름 끼하다   께사다   께하나   끼하나으로 불렸고   돈키호테가 되어서는 슬픈 표정의 기사와 사자의 기사라는 별명을 가졌으며 죽기 전에는 선한 사람 알론소 끼하노가 된다   그렇다면 알론소 끼하노라는 이름은 누가 부여했으며 그것이 정말로 라만차의 어느 마을에 사는 어느 양반의  본래   이름일까  1 1 장에서 일인칭 화자는 주인공의 이름이  끼하다   혹은  께사다 라고 알려져 있는데 자신이 생각하기에 께하나 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5장에서는 농부 알론소의 입을 빌어 주인공이 돈키호테가 되기 전 이름이  끼하나 라고 뒤집는다   여기 까지는 아직 가상의 아랍 작가 씨데 아메떼 베넨헬리가 등장하기 전이며 따라서 알론소 끼하노는 씨데 아메떼 베넨헬리가 지어낸 이름이다   그런데 여러 명의  작가가 등장하는 돈키호테에서 절대적 권위를 갖는 작가는 아무도 없다   비록 화자는 반복적으로 이 작품이  진실된 역사 라고 강조하고 있으나  역사에  진실된 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는 것 자체가 역사에 대한 패러디이듯이   씨데 아메떼 베넨헬리도   무어인 번역자도   일인칭 화자도 돈키호테에 대한 진실을 알고 있는 전지전능한 서술자가 아니다     또한 1 부 처음에 끼하나라고 기록한 일인칭 화자가  2부 마지막 장에서  끼하노 로 바꾼 이유가 텍스트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단순히 아랍 작가가 그렇게 썼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궁색해 보인다   세르반테스가 끼하나 대신에 끼하노라고 한 것은 실수나 의도된 실수가 아니다   만약 2부 마지막 장에서 주인공의 이름이 알론소 끼하나 혹은 알론소 께하나로 쓰였다면 그의 본명은 당연히 그것이며 이 점에 대해 의심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런데 이웃에 사는 농부를 통해 확인된 이름이나 일인칭 화자가 생각한 이름 대신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는 사실은 알론소 끼하노가 주인공의 본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주인공이 살던 마을 이름처럼    그의 본명도 여전히 불확실하다  따라서 주인공이 돈키호테라는 이름과 성격을 자신에게 부여했듯이 알론소 끼하노라는 또 다른 이름과 성격을 스스로 부여한 것이다   여러 이름으로 불린 한 인간에게는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고유한 영혼과 삶에 대한 소명이 있다   무엇인지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그의 본명은 더 이상 나뉘지 않는 자신의 내면적 본질이고   텍스트에 등장하는 여러 이름들은 그 본질이 외부 현실에 투영된 편린이자 세상이라는 연극 무대에서 수행해야할 역할이다   돈키호테도 그 편린의 이름이며 돈키호테가 되기 전의 여러 이름과 알론소 끼하노라는 새로운 이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의 경우처럼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알론소 끼하노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한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사물과 그 이름에 대한 텍스트 내에서의 설명과도 맥을 같이한다   즉 한 인간과 그의 여러 이름과의 관계는 이발사의 대야와 맘브리노의 투구의 관계로도 설명할 수 있다   돈키호테는 모레나 산맥에서 산초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너에게 이발사의 대야로 보이는 그것이 네게는 맘브리노의 투구로 보이듯이 다른 사람에게는 또 다른 무엇으로 보일 것이다   

            

사물의 본질이 대명사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이 결국 궁극적으로 무엇인지 정의할 수는 없으나 그것은 이발사의 대야일 수도 있고   맘브리노의 투구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무엇도 될 수 있다   역으로 말하면 대야나 투구나 또 다른 무엇에도  그것 이 투영되어 있다   나아가 호아낀 까살두에로는 대야와 투구는 완전한 절연 관계에 있는 동떨어진 사물이 아니라 반짝임과 반사된 환영이라는 연결 고리로 이어져 있다고 말한다      주인공의 본질과 본명이 바로 위 인용문의  그것 이며 돈키호테와 알론소 끼하노라는 이름과 역할은 대야이며 투구인 것이다   이렇게 한 사물의 표상이 여러 모습일 수 있듯이 한 인간도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으며 새로운 이름은 그 인간의 새로운 표상이다   그리고 사물에 연결 고리가 있듯이 주인공의 두 이름에도 광기라는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아메리꼬 까스뜨로의 지적처럼 돈키호테와 알론소 끼하노는 결국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주체가 된다   까스뜨로는 돈키호테와 동행하고 싶은 마음과 마을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았던 산초처럼   주인공의 실체는 돈키호테와 알론소 끼하노를 하나로 보는 지점에서 찾아진다고 생각한다 

 

 돈키호테의 심층에는 그를 편력기사가 될 수 있게도 하고 그것을 그만두게 만들 수도 있으며 그 무엇으로도 나누어지지 않는 궁극적인 실체가 놓여있다   모든 것은 우리가 추론해 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작품 속에서 느껴지도록 고안된 것이다

 

이 말은 하나의 육체 안에 서로 다른 인식론적 범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르게 보일지라도 궁극적으로는 모두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는 말이다   돈키호테에게 기사도 세계에 빠져버린 편집광적인 인물과 적절한 현실판단에 인문적 소양을 갖춘 사람의 모습이 교차하여 나타나듯이 알론소 끼하노에게도 돈키호테를 부정하는 이성적인 모습과 자신만의 광기가 공존한다   돈키호테의 광기가 현실 세계에서 기사도의 이상을 구현하려는 것이었다면 알론소 끼하노가 보여준 더 심한 광기는 바로 스스로 자신을 죽게 놓아두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  산초가 울면서 대답했다  주인님   죽지 마세요   내말 좀 들어 보시고 오래 오래 사세요   사람이 살면서 저지르는 제일 큰 광기는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스스로 자신을 죽도록 놔두는 거예요   아무도 죽이려 들지 않는데도 단지 슬픔 때문에 죽게 놔두는 것 말이에요  

               

산초의 말에서도 명백하게 표현되어 있듯이 알론소 끼하노에게 죽음이란 돈키호테적 광기의 연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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