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의 우수와 자폐

 

1부에서는 주인공의 한 분신인 돈키호테의 내적 갈등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 대표적인 예가 1  5장에 나온다   뻬드로 알론소가 똘레도 상인의 하인들에게 맞아 쓰러진 돈키호테에게 당신은 발도비노스도 아니고 아빈 다라에스도 아닌 끼하나라고 말하자 돈키호테는  나는 내가 누군지 알고있(Yo se quien soy)라고 대답한다 se의 주어와 soy의 주어가 각각 시골 양반과 돈키호테로 분리된다면 광기는 하나의 속임수와 연극이 되며 이같은 확대 해석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결국 두 주어는 하나의 인식론적 주체로 통합되며 주체의 내면적 갈등은 보이지 않는다   우나무노는 돈키호테의 산초의 삶 에서 이 문장을  나는 내가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다 (Yo se quien quiero ser)로 해석하며   의 정체성과 의지를 분리시키고 정체성이 의지에 종속된다고 파악한다      그러나 이보다는 환상을 꿈꾸던 주체가 스스로 환상이 된다는 해석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그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문제로 남지만 정체성과 의지는 종속 관계가 아니라 통합 관계에 있으며 1부에서는 아직 그것들 사이의 분리 징후를 찾을 수 없다   그것의 분리는  2부에서 암묵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며 그것의 완전한 분리가 바로 돈키호테에서 알론소 끼하노로의 각성이다 1부에서 돈키호테가 광기 환상  거짓의 세계에 있고 다른 인물들이 그 반대에 있다면 2부에서는 관계가 역전된다   다시 말하면 1부에서는 돈키호테가 들판 위에 서 있는 물체를 거인으로 보았고 다른 사람들은 풍차로 보았다면   2 부에서는 돈키호테의 눈에 풍차로 보이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거인이라고 그에게 강요한다   산손 까라스꼬는 세 번째 출정을 떠나라고 돈키호테를 꼬드기고   산초는 촌스런 농촌 여자를 둘씨네아라고 속인다  특히 공작의 궁정에서의 사건들은 거의 모든 주변 인물들이 돈키호테를 속이고 있는   그러나 연출자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는 거대한 연극이다   돈키호테의 우수와 자폐는 바로 이 연극성에서 발아한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 형성된 세계가 연극화되면서 조금씩 존재 기반이 허물어져 가고   이를 깨달은 주인공은 그 세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없다고 인식해 간다   연극화 혹은 연극성에 대한 인식은 갑작스런 깨달음이 아니라  2부 전체 동안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   진실이라고 믿어왔던 삶이 연극으로 변하면서 돈키호테의 존재 기반은 모호해지고 연극 밖의 세계와 유리되면서 결국 우수에 빠지고 만다   따라서 마법에 걸린 둘씨네아를 구원할 수 없다는 절망이 우수와 자폐를 낳았다는 해석은 피상적이다   절망이 우수와 자폐를 낳았다면 절망은  273 장에서 마을로 들어오면서 만난 징조를 통해 가시화된다   그런데 바로 전날 밤 산초의 매질이 끝나 둘씨네아가 마법에서 풀려났을 것이라 알고 있고 마을로 돌아오기까지 길에서 마법이 풀린 그녀를 만나게 되길 기대했던 돈키호테는 일상적인 사건을 절망의 징조로 받아들일만한 이유가 없다   일상적인 사건이 절망의 징조가 된 것은 돈키호테의 각성만큼이나 급작스런 사건이며 각성과 죽음의 출발점이다   다시 말하지만 텍스트에는 절망의 이유도 없고 절망의 단초를 엿볼만한 부분도 없다   이를 위해 1 1 장으로 돌아가 보자   투구의 얼굴 가리개를 골판지로 만든 돈키호테가 얼마나 강한지 알아보기 위해 칼로 내리치자 그것은 완전히 부서진다   그러자 그는 쇠를 안에 덧대어 다시 만든 뒤 이번에는 시험하지 않고 그것을 세상에서 가장 강한 투구로 믿어버린다   의지를 통해 현실을 변형시킨 것이고 이때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낸 돈키호테의 모습에는 의지와 정체성이 하나로 합쳐져서 나타난다   1  1장의 돈키호테가 이러했다면 2  73 장의 돈키호테는 이와는 거의 다른 인물이다   산초의 매질이 끝났고 돈키호테는 둘씨네아의 마법이 풀렸다고 믿고 있다   또 불길한 징조에도 불구하고 산초는 귀뚜라미를 사고 산토끼를 주인에게 건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키호테는 아무런 이유 없이 절망에 빠진다   이제는 그의 의지가 현실 세계를 변형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하얀 달의 기사 에게 패배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인공의 정체성과 돈키호테라는 의지가 이제는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주인공이 돈키호테이고 싶은 의지가 사라진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정체성을 구현할 새로운 의지와 표상이 필요하다 

 

 

주인공의 정체성과 돈키호테의 의지 사이의 분리   돈키호테를 우수와 자폐로 이끈 절망의 징후는 공작 궁정에서의 사건 전후로 나타난다   그 촉발은 몬떼시노스 동굴의 모험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돈키호테가 그 안에서 보았다고 말한 내용의 진위가 아니라 그로테스크한 부조화다   미친 돈키호테가 자신의 의지로 세계를 만들고 있다면 동굴에서 일어난 사건은 당연히 기사 소설에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곳에는 두란다르떼의 심장이 부패하지 않도록 소금을 뿌린다거나   마법에 걸린 둘씨네아의 하녀가 치마를 담보로 6 레알을 빌리려고 하는데 그 돈이 없어서 4 레알 밖에 주지 못하는 지극히 비기사도적 현실적 인 요소가 개입되어 있다   1 부에서 돈키호테가 본 것이 거인이라면 몬떼시노스 동굴에서 본 것은 풍차처럼 보이는 거인이다   그런데 풍차처럼 보이는 거인은 실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1부의 세계가 기사도적 이상과 현실이 의지에 의해 통합되어 있다면 동굴에서 본 그로테스크한 현실은 이 두 요소의 결합이 결국 깨어질 운명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바로 여기서 마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주인공의 인식론적 혼란이 표면화된다   그리고 마법의 배 모험에서 이 혼란은 존재에 대한 회의로 이어진다   돈키호테와 산초는 호의적인 마법사가 마련해 놓은 배를 타고 악한

자에게 포로로 잡혀있는 사람들을 구하려 한다   그러나 악한 마법사의 농간으로 배가 물레방아로 돌진해 부서질 찰라 흰 가루를 뒤집어쓴 인부들이 나와 구해준다   이것이 모두 착각이기는 하지만 돈키호테는  부와는 달리 이렇게 말하면서 모험을 포기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할 수가 없어  그리고 물레방아를 둘러보며 이렇게 소리 높여 말했다    이 감옥에 갇혀있는 그대들이여   그대들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날 용세하시게   나와 그대들의 행운이 짧아 나는 그대들을 이 고통에서 구해줄 수가 없소   이 모험은 다른 기사를 위해 예비되고 맡겨진 모양이오

 

 

까살두에로는 이 장면을 돈키호테의 운명에 있어서  첫 번째 본질적인 결말이라고 규정한다   세상의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 출정을 감행했던 편력기사가  나는 더 이상 할 수가 없다고 고백한다는 것 자체가 기사라는 표상에 대한 회의이면서 동시에 표상과 본질 사이의 균열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는 배 값으로   50 레알을 물어준다  2 26장에서 뻬드로의 인형극을 부수고 돈으로 보상할 때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이전에는 멜리센드라를 구원했으나 이제는 아무도 구원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모습만 발견한다   이처럼 주인공의 자의식은 비록 섬광처럼 매우 짧게 발현되지만 완전히 감춰져 있지는 않다

 

 

마법의 배 모험 다음에 공작의 궁정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 이어진다 공작 궁정에 머무는 동안 돈키호테의 내면적 문제는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자신이 노리개라는 사실을 감지했는지 아니면 속임을 당하고만 있었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런데 공작의 궁정을 나오자마자 돈키호테는 쓰디쓴 내면적 각성의 일부를 드러낸다   축제를 위해 성인이 된 기사들의 성상을 가져가는 어느 마을 사람들을 만난 그는 성상들을 보면서 편력 기사로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또 다시 드러낸다

 

형제들이여   나는 방금 본 것을 길조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성인 기사 분들은 내가 몸 바쳐 하고 있는 일에 매진하셨기 때문인데   그 일이란 바로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이지요   오로지 그들과 나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성인으로서 신성한 가치를 위해 싸웠다면   죄인된 나는 인간적인 가치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하늘나라가 폭력으로 고통 받고 있었기에 그들 자신의 무공으로 하늘나라를 정복했지만   나는 이렇게 고난을 겪으면서도 내 힘으로 정복한 곳이 없습니다 

               

주인공이 편력기사라는 표상을 통해 삶의 의미를 구현하겠다는 의지가 내면적인 벽에 부딪힌 것이다   공작의 궁정을 떠난 이후 마을로 돌아오기까지 돈키호테의 모습은 사건의 주인공이라기 보다는 증인에 더 가깝다   이제 풍차를 향해 돌진하던 행복한 환상은 사라지고 무기력한 모습만 남는다   산적 로께와의 만남에서 로께가 현재화된 편력기사의 모습을 보여줄 때 돈키호테는 그 옆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의 행위를 보고 있을 뿐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바르셀로나 해변에서 흰 달의 기사로 변장한 산손 까라스꼬에게 결정적으로 패하기 이전에 돈키호테가 이미 편력기사로서의 모습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이는 알제리 해적과의 싸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21장에서 돈키호테는 터키의 위협에 대해 편력기사 한 명이 20 만 명은 상대할 수 있기 때문에 스페인을 편력하는 여섯 명의 편력기사만 있으면 어떤 대군이라도 물리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한다

 

터키 왕이 언제   얼마나 되는 병력을 이끌고 오든지 간에 나는 편력 기사로 죽어야 한다   되풀이 하지만 오로지 하나님만이 나를 아신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말했던 상황이 실제로 벌어졌다   그는 이제 현실과 맞서 싸워야하고 편력기사다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하지만 전투 장면에는 그의 존재 자체에 대한 언급이 없다   편력기사를 향한 그의 의지는  거의   사라졌다   마법에 걸린 둘씨네아를 구할 방법도 자신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다   이제 돈키호테의 존재 이유는 거의 사라져 가고 있고 따라서 흰 달의 기사와의 결투는 그 시작 이전부터 패배가 예정되어 있었다

 

주인공의 본질적인 자아는 돈키호테라는 표상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이유를 구현하려 했다   따라서 표상이 추구하는 바가 현실 세계에서 실현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할 지라도 주인공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 점은 결투에서 항복을 요구받았을 때 항복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했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

 

또보소의 둘씨네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임이고 나는 이 땅에서 가장 불행한 기사로다   나의 연약함으로 인해 이 진실이 뒤집어지는 것은 옳지 못하다      기사여   그대가 이미 내게서 명예를 빼앗아 갔으니   이제 창을 쥐고 내 목숨을 끊어나오  

               

그러나 흰 달의 기사는 그를 죽이지 않고 일년간 마을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명령한다   출정을 하지 못하면 더 이상 편력기사가 아니므로 이 명령은 돈키호테라는 이름의 편력기사에 대한 죽음의 선고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위 인용문에서  진실 이란 문자 그대로 둘씨네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고 자신은 가장 불행한 기사라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 돈키호테의 모습을 통해 추구했던 가치이며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로 해석할 수도 있다   비록 돈키호테의 연약함이 그 가치를 드러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또 편력기사라는 표상을 포기한다 할지라도 진실 그 자체는 위협받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 장에서 바르셀로나를 떠날 때 결투 장소를 돌아보며 이렇게 한탄한다

 

여기가 트로이였다   나의 유약함이 아니라 나의 불행이 바로 여기서 지금까지 거둔 모든 영광을 앗아가 버렸다   여기서 운명은 내게 등을 돌리고 굴러갔고 나의 무훈들은 빛을 잃었다   결국 여기서 나의 행운은 무너졌고 결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강조된 마지막 문장에는 주인공이 앞으로 돈키호테라는 표상을 포기할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있다   즉 돈키호테라는 편력기사는 이곳에서 죽었고 마을로 들어서면서 죽음을 스스로 확인한다   주인공이 자신을 편력기사의 모습으로 세상에 드러내고자 했다면 일년 동안 마을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출정하면 된다   죽음의 확인은 일년 뒤에 재출정의 가능성을 스스로 부정한 것이다   73 장의 징조와 죽음의 확인 이후에 주인공은 더 이상 돈키호테가 아니므로 돈키호테다운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일련의 각성 과정이 이제 끝이 났고 그것을 선언할 일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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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론소 끼하노의 죽음

돈키호테라는 표상의 죽음에 대한 확인 이후에 이제 돈키호테는 사라지고 새로운 표상을 탐색한다   그가 먼저 염두에 둔 것은 목자 놀이였다   신부   이발사   산손 까라스꼬가 이 놀이에 동조한 반면 가정부는 또 다시 반대하고 나서며 이렇게 말한다

 

제발 집에 좀 계세요   가업도 돌보시고   종종 고해성사도 보시고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도 베푸세요   그게 싫으시다면 제게라도 베푸시던가  

    

이것이 마을로 돌아온 주인공에게 남겨진 삶의 모습이며 이 모습은 돈키호테가 되기 이전과 동일하다   그러나 이 같은 소박한 생존은 한때 돈키호테였던 주인공에게 의미가 없다   이에 대한 돈키호테의 대답은 1부 5장의구절을 연상시킨다

 

돈키호테가 그들에게 대답했다   조용히 하거라   무슨 일을 해야 하는 지는 내가 잘 알고 있다   아무튼 나를 침대로 데려가 다오   아무래도 몸이 성치 않은 것 같다   그리고 확실히 알아두어라   내가 편력 기사로 남아있든지   앞으로 양치기가 되어 돌아다니든지 간에 너희들에게 필요한 일은 언제나 잘 챙겨줄 것이다   어차피 앞으로 보면 알겠지만 

      

그러나  나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 와는 달리 여기서 강조된 문장은 앞에서 대명사로 표현된 존재의 본질을 함축적으로 나타낸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모습이 편력 기사일 수도 있고 앞으로 목자나 다른 그 무엇도 될 수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은 본질의 표상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문장 다음에 직접 화법으로 등장하는 목소리를 통해서 주인공은 알론소 끼하노로의 변신을 선언한다 

 

여러분들   기뻐해 주시오   나는 이제 라만차의 돈키호테가 아니라 알론소 끼하노요   나의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선한 사람 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알론소 끼하노란 말이오  

     

그러나 그들은 알론소 끼하노를 또 다른 광기에 사로잡힌 돈키호테로 받아들이며

 

이 말을 들은 세 사람은 그가 틀림없이 새로운 광기에 사로잡혔다고 생각했다 

     

산손은 빈정거리듯 장난까지 친다

 

돈키호테님   지금 우리들은 둘씨네아님이 막 마법에서 풀려났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제 우리가 목자가 되어 왕자처럼 인생을 노래하며 살려고 하는데 은둔자라도 되겠다는 겁니까   제발 그런 말씀 마시고 장신 좀 차리세요 

                

이상한 점은 자신이 알론소 끼하노라고 선언한 주인공의 말을 듣고 신부 이발사 산손 까라스꼬가 그를 또 다른 미친 사람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의 말 가운데 상식을 벗어난 구절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사람들은 왜 그를 미친 사람으로 보고 있으며 그의 말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알론소 끼하노라는 이름이 그의 본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이름만이 문제가 될 뿐 임종을 앞둔 그의 말은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은 이어지는 새 인물과의 대화를 통해 이름을 제외하면 그가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인정한다   마치 주변 인물들이 죽음이 임박한 사람에게 더 이상 이름 가지고 문제 삼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돈키호테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알론소 끼하노도 이성과 광기가 하나로 결합된 애매한 인물로 규정할 수 있다 

 

 2부의 돈키호테를 주변 인물들이 속이고 소외시켰다면 상황은 알론소 끼하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알론소 끼하노는 돈키호테처럼 소외되어 있다  그의 죽음이 임박했는데도 불구하고 조카   가정부   산초가 남겨준 유산으로 인해 즐거워하는 모습이 새로운 인물이 소외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집은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카딸은 식사를 끊지 않았고 가정부는 축배를 들었으며 산초도 즐거워했다   뭔가를 유산으로 받는다는 것이 그들에게 슬픔의 기억들을 지우거나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 슬픔이 상속의 이유인데도 불구하고...

                 

그러나 죽어가는 주인공에게 소외는 인식의 분열을 일으키지 않는다   자신의 진실이 주변 사람들의 거짓으로 인해 그 진실성이 의심될 때 마법을 통해 합리화했던 돈키호테와 달리 알론소 끼하노는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   합리화가 필요할 만큼 지켜야할 가치 기사도의 세계와 둘씨네아는 이미 사라졌고 그 대신 죽음을 통한 영생이라는 알론소 끼하노의 존재 이유가 그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돈키호테의 변신은 또 다른 광기의 시작이다   돈키호테의 기사도적 광기가 사라지고 나서도 돈키호테의 영웅적 성격은 알론소 끼하노를 통해 연장된다   자신의 의지로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을 죽게 놓아두었다는 것이 알론소 끼하노의 유일한 광기이자 영웅적인 성격이다   돈키호테의 광기가 지루하고 반복적인 시골양반의 삶을 버리고 존재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모험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알론소 끼하노의 광기는 대명사로 표현된 그 존재의 의미를 영원히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 그는 기사도의 세계 그리고 둘씨네아를 잊어버릴 수도 있지만 존재의 의미가 사라진 뒤의 삶은 감당할 수 없다   비록 의사는 그의 병을  우수와 자폐로 진단하지만 알론소 끼하노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자신의 존재 근거에 대한 긍정이며 영원한 생존에 대한 약속이다   따라서 죽음은 산초의 말처럼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지독한 광기이면서 알론소 끼하노의 마지막 영웅적 행위가 된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긍정이 바로 죽음으로 표현된 것이다   산손 까라스꼬가 쓴 묘비명의 구절 [죽음은 그가 죽었음에도 삶에게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처럼   죽음은 한때 돈키호테였으며 알론소 끼하노였던 주인공의 죽음에도 승리하지 못하고 그의 이름들을 영원하게 만들었다   알론소 끼하노라는 또 다른 표상의 광기를 통해 주인공은 새로운 영웅으로 태어난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대명사로 표현된 주인공의 본명과 삶의 진실을 알 수 없다   다만 해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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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롱드의 난

 

 1643년 루이 13세가 죽자, 프랑스는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루이 13세는 유언으로 5살짜리 새 국왕이 미성년인 동안 모후 안 도트리슈에게 섭정을 맡겼으나 완전한 권리는 부여하지 않았다. 분노한 모후는 고등법원으로 달려가 유언을 파기하라고 요구했다. 법관들은 자신들의 권한을 과시할 기회라고 생각하고 유언을 파기시켜 주었다. 그들은 곧 모후가 자신들의 힘을 빌리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배반당했고, 모후는 리슐리외의 후계자였던 마자랭을 전적으로 신임했다.

 

섭정기가, 또한 외국인의 지배가 항상 그랬듯, 모후과 마자랭 두 외국인의 통치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다. 온갖 불평과 중상모략이 마자랭에게로 집중되었다. 리슐리외 치세 하에서 억눌려 있던 귀족들은 다시금 자신들의 권리를 찾고 싶어했고, 늘어가는 관직매매는 현 관직보유자들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관직의 값이 떨어질까 우려하고 있었다.

 

 1648년 반란의 기미가 파리를 감쌌다. 외국인이 프랑스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 추기경이 재상이 된다는 것, 재정이 악화되고 세금이 과중하다는 것, 정부 공채가 미불 상태에 있다는 것이 파리 시민들을 지긋지긋하게 했고 당시 유럽에 감돌고 있던 혁명의 기운이 그들을 고무시켰다. 나폴리 시민들이 국왕을 제압하는데 성공했고, 영국에서도 국왕을 처형하려 하고 있었다. 대영주들과 귀부인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으려는 생각과 동시에 공상적인 혁명에서 낭만을 느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마자랭을 리슐리외만큼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1648년 6월, 파리 고등 법원은 '성 루이 재판부의 명령' 이라는 일련의 개혁안을 작성했다. 이것은 군주제에 대한 고등법원의 후견권 행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당시 군대가 전선에 나가 있었기 때문에 모후와 마자랭은 양보하였으나 콩데 공(로크루아의 승리자 앙기엥 공작)이 랑스에서 에스파냐 군에게 승리를 거두자 반격을 시작했다. 8월 26일 존경받는 판사이자 항의의 주동자인 피에르 브루셀이 체포되었다. 폴 드 공디 (미래의 레 추기경)를 중심으로 하여 파리 시민들이 봉기했다. 시내에는 1200개의 바리케이드가 쳐졌고 모후의 관저인 팔레 루아이얄이 포위되었다. 사태가 긴급히 돌아가자 모후와 마자랭은 브루셀을 석방했다. 바리케이드는 걷어졌으나 소요는 가라앉지 않았다. 공디는 시민들을 더 부추겼다. 콩데 공의 군대가 파리에 접근하자 궁정은 생 제르멩 앙 레로 피난을 갔다. 피난 중에 루이 14세는 짚단 위에서 추운 밤을 보내야 했고, 이것은 그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는 일이 되었다.

 

만약 프롱드 난에 참여한 이들이 합심해서 왕권을 제압하고 마자랭을 몰아내고자 했다면 그들은 성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프롱드의 난에는 너무도 다른 집단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귀족들(사령관 엘뵈프 공작, 콩티 공, 롱그빌 공작부인, 부이용 공작, 보포르 공작, 공디, 슈브뢰즈 공작부인, 그랑 마드무아젤(가스통 도를레앙의 딸), 튀렌 장군, 라 로슈푸코 등)은 그들의 특권 탈환을 위해, 법관들은 군주제에 대한 통제권을 위해 참여했다. 그들에게 선동되긴 했지만 민중들은 그들을 신뢰하진 않았다.

 

궁정과 합세한 콩데 공의 군대가 파리를 포위하자 집단들은 분열하고 대영주들 자신도 분열했다. 튀렌이 에스파냐 군과 협상을 시도하자 애국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를 반대했다. 공디도 이것이 카톨릭 동맹의 냄새를 풍긴다며 반대했다. 튀렌의 군대는 주인을 버렸고, 고등법원도 그의 매국적인 행동에 충격을 받고 궁정과 협상하기 시작했다. 민중은 마자랭과 협상하려는 사람은 모두 죽이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이미 사태는 모후와 마자랭 쪽으로 기울었고, 1649년 3월 11일 뤼에유에서 협정이 체결되어 궁정은 파리로 복귀했다. 이것이 제 1차 프롱드의 난이자 '고등법원의 프롱드' 라고 불리는 반란의 결말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었다. 할 수 없이 굴복하긴 했으되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불만은 가라앉지 않았다. 두 번째 프롱드의 난의 발단은 콩데 공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콩데공은 자신이 프롱드의 난의 진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마자랭을 구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거만하게 굴면서 재상의 교체를 요구했다. 이 때 롱그빌 공작부인과 슈브뢰즈 공작부인이 음모를 꾸몄다. 슈브뢰즈 부인은 딸을 공디의 정부로 주면서 그와의 결속을 단단히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일부러 마자랭에게 접근해 콩데 공을 체포하도록 선동했다. 로크루아와 랑스의 개선장군인 콩데 공은 영웅이었고 그를 체포하면 봉기가 일어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연히 일어나지 않더라도 선동하면 그렇게 될 것이었다. 마자랭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퇴각을 요구하는 콩데를 그냥 둘 수 없었다. 결국 모후와 마자랭은 1650년 1월 18일 콩데공과 그의 동생 콩티공, 그리고 매부인 롱그빌 공작을 체포하게 했다.

 

다시 소요가 일어났다. 롱그빌 공작부인과 콩데 공비가 지방에서 반란을 선동하고 주도했다. (1650년 1월∼12월) 그러나 마자랭이 이끄는 국왕군은 모든 전선을 압도했다.(1650년 10월∼12월) 이것이 왕족들의 프롱드의 난이다.

 

 하지만 마자랭의 승리는 두 프롱드를 연합시켰다.(고등법원의 프롱드와 왕족들의 프롱드, 1650년 12월∼1651년 9월) 공디와 고등법원의 법관들이 다시 소요를 일으켜 왕족들을 옹호했다. 고등법원 인사들은 1651년 2월 3일, 1648년에 기초하였던 강령을 다시 채택하였으며 마자랭의 해임과 콩데 공의 석방을 요구했다. 마자랭은 자신에 대한 적개심으로 모두가 뭉쳐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므로 분노의 중심인 자신이 떠나면 프롱드의 인사들이 다시 분열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2월 6일, 그는 콩데 공을 석방시키고 프랑스를 떠나 콜로뉴 선제후에게로 갔다. 그러나 모후와의 서신 연락을 통해 비밀리에 계속 프랑스의 재상으로 활동했다.

 

그의 예상대로 프롱드 인사들은 곧 서로 다른 목적과 의견 때문에 분열했다. 모후는 공디를 추기경으로 서임함으로써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롱그빌 공작부인에게 매혹되어 프롱드에 가담했던 튀렌도 모후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콩데 공은 고등법원 인사들과 다투었고, 공디를 살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나서 1651년 9월 기옌으로 떠났다.

 

보르도에 근거를 잡은 콩데 공은 에스파냐와 손을 잡고 민중봉기를 일으켰다. 그것의 진압을 위해 마자랭은 12월 말 프랑스로 귀환하여 푸아티에에서 국왕과 모후를 알현했다. 그 때 콩데는 보르도를 떠나 파리로 진군하고 있었다. 모후와 튀렌이 이끄는 국왕군이 콩데를 뒤쫓았다. 1652년 4월 콩데는 파리로 입성했으나 7월 2일 파리의 성벽 아래에서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콩데는 패배했지만 그랑 마드무아젤이 성문을 열고 바스티유의 대포들을 국왕군을 향해 쏘아대면서 엄호하여 콩데 군은 파리로 후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고등법원 인사들과 다투었고 가장 과격한 인사들에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리 시민들은 곧 그를 지긋지긋해 했다. 또한 에스파냐와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이 일반 시민들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시민들은 콩데 편에 총부리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1652년 7월 4일 학살이 일어나고 시청사가 불타올랐다. 마침내 콩데는 10월 13일 스페인으로 달아났다. 21일, 루이 14세와 모후는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파리로 입성했다.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마자랭은 잠시 물러났으나 1653년 2월 3일 귀환하였다. 이리하여 콩데의 프롱드는 끝나고 모든 프롱드의 난은 막을 내렸다.

 

반란의 실패 이유는 단일한 원칙과 주장이 결여되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대혁명과 비슷한 구석이 없지 않았으되 참여한 집단들의 공통된 목적은 마자랭의 실각이었을 뿐 이 이외의 이해관계는 서로 달랐고 원칙이나 이념도 없었다.

 

파리는 마자랭의 귀환 이후의 반동을 쉽게 받아들였다. 프롱드의 난이 귀족들과 고등법원에 통치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프롱드의 난의 결과는 종교전쟁의 결과 못지않게 프랑스를 물심양면으로 피폐하게 했고 국민들에게 절대군주제의 지속을 바라도록 하였다. 자유에 대한 불신으로, 프랑스의 질서는 회복되었다.

 

 프롱드의 난을 겪었지만 마자랭 치세의 프랑스는 유럽의 최대 강국으로 인정받았다. 그것은 리슐리외의 정책의 열매이기도 했고 마자랭의 능란한 외교술 덕택이기도 했다. 비록 백성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국가재정은 피폐하였으나 프랑스의 국가위신만큼은 어느 때보다도 상승해 태양왕 지배의 기초를 닦았다. 1643년의 앙기엥 공작(콩데 공)의 로크루아에서의 승리, 1648년 그의 랑스에서의 승리, 튀렌의 1545년 뇌르틀링겐에서의 승리 등 프랑스의 빛나는 승리들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가져왔다. 프랑스는 스트라스부르를 제외한 알자스를 받았고 독일에 개입할 수 있는 재량권을 가지게 되었다. 거기다가 독일은 350개 이상의 연방 국가로 분리되어 더 이상 프랑스에 위협을 가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에스파냐는 그 뒤로도 계속 프랑스와 전쟁을 계속했다. 에스파냐로 건너간 콩데 공은 프랑스의 튀렌과 대결했다. 당대 프랑스의 최고의 명장 두 사람이 서로 적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는 종교가 없다는 리슐리외의 신념을 이어받은 마자랭은 영국의 크롬웰과 동맹을 불사했고(덕분에 프랑스 궁정에 망명해 있던 찰스 1세의 왕비이자 프랑스 공주였던 앙리에트와 그녀의 아들 찰스 2세, 딸 앙리에트가 홀대받긴 했지만) 크롬웰의 지원을 받은 튀렌은 1658년 6월 14일 됭케르크 근처의 뒨에서 콩데를 격파했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4세는 협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659년 6월 4일 피레네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랑스는 루시용, 오뜨 세르다뉴, 아르투아, 티옹빌, 몽메디를 획득했다. 카탈루냐는 에스파냐에 반환되었다. 또한 루이 14세와 에스파냐 왕녀 마리 테레즈의 결혼이 성사되었다. 당시 루이 14세는 마자랭의 질녀인 마리 만치니와 열렬한 사랑을 나누고 있었지만 마자랭의 간곡한 요청으로 루이는 마리 테레즈와 결혼하기로 했다. 마자랭은 마리 만치니를 브루아주로 보냈고, 그녀는 절망하고 분노하여 루이 14세에게 "당신은 국왕이십니다. 당신은 눈물을 흘리시지만 전 떠나갑니다!" 라는 말을 던지고 떠났다.

 

 에스파냐에는 살리카 법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도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따리서 에스파냐는 마리 테레즈에게 지참금 명목으로 50만 에퀴를 주는 대신에 그녀의 왕위 계승권을 없애기로 했다. 그러나 마자랭은 에스파냐가 그 돈을 마련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마리 테레즈의 왕위계승권은 유지되었고 그것은 이후의 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의 빌미가 되었다. 1660년 결혼식이 생 장 드 뤼즈에서 거행되었다.

 

 본인의 능력과 유능한 대신들의 도움으로 국정을 돌보고 루이 14세에게 통치술을 가르치던 마자랭은 1661년 3월 9일 사망했다. 궁정은 상을 치렀고, 루이 14세의 친정이 시작되었다. 모후 또한 얼마 지나지 않은 1666년 1월 20일에 유방암으로 숨을 거뒀다.

 

 마자랭이 사망하자 그의 아래에 있던 대신들이 모두 재상이 될 꿈을 꾸기 시작했다. 세기에, 리온, 르 텔리에, 세르비엥, 푸케, 콜베르가 유망한 후보자였다. 그러나 국왕은 재상을 두지 않고 모든 것을 스스로 통치하려 하였다. 그것은 프롱드의 난이 그에게 준 교훈이었다. 그는 고등법원과 귀족들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리슐리외와 마자랭 때처럼 강한 재상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불만을 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이 왕에서 시작하여 왕에서 끝나도록 만들려 했다. 장관들은 많았으되 왕족, 대귀족, 고위성직자 중에서 선택하진 않았다. 그는 부르주아 계급을 중용했고, 전국에 지사들을 파견해 관료제를 확립하려 했다. 그 과정에서 재무총감 니콜라 푸케가 해임되어 감금되고, 콜베르가 그의 자리를 대신했다.

 

 루이 14세의 시대는 위대함의 세기였다. 왕은 귀족들을 엄격한 예법을 통해 복종시켰다. 베르사유에서의 화려한 생활을 그들에게 강요하고, 왕으로부터 시작하는 엄격한 예법 절차를 통해 모든 권위가 왕에서부터 나온다는 것을 인식시켰다. 예를 들면 왕이 기침했을 때 가운을 벗기는 것, 셔츠를 들고 서 있는 것, 그 셔츠를 왕에게 건네는 것 등이 모두 예식 절차로 정해져 있었다. 귀족들은 좀 더 중요한 역할을 맡기 위해 왕에게 잘 보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들은 촛대를 들고 있을 영광을 위해, 왕과 함께 마를리(베르사유의 궁전 중 하나)로 갈 수 있는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폴리냐크 사제는 '마를리는 비에 젖지 앉는다' 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귀족들은 영지를 떠나 왕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했고 그렇지 못한 귀족들은 연금, 특혜 등 모든 것에서 배제되었다. 「짐이 본 일이 없는 자」라는 말은 유죄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사치스런 궁정 생활은 막대한 경비를 소모하게 했다. 1678년 맹트농 부인은 귀족이 중간 수준의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12000 리브르의 연수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재산을 탕진해 버린 귀족들은 생활 유지를 위해 왕이 내려주는 연금을 바라보고 살았다. 종교전쟁, 모후의 반란, 프롱드의 난을 일으켰던 귀족들은 이제 그럴 수 있는 의지조차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루이 14세가 바라던 것이었다.

 그의 위대함에의 추구는 국내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54년의 치세기 동안 37년이 전쟁기였다. 사실 루이 14세가 친정을 시작했을 때 마자랭은 평화롭고 강대한 프랑스를 물려주었다. 독일은 소국으로 분리되었고, 영국은 왕정복고가 이루어져 프랑스에 망명해 있던 찰스 2세가 즉위하여 프랑스와 깊은 우호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왕비 마리 테레즈의 지참금 문제가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1665년 에스파냐 왕 펠리페 4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카를로스 2세가 즉위했다. 그는 마리 테레즈의 이복동생이었다. 마리 테레즈는 앙리 4세의 딸 엘리자베스와 펠리페 4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인데, 카를로스는 그녀의 이복 동생이었다. 루이 14세는 전처의 소생에게 우선권이 있음을 주장하며 에스파냐 영토의 일부를 요구하며 에스파냐령 플랑드르로 진격했다. 왕제 필립 도를레앙의 부인인 앙리에트가 영국으로 건너가 오빠인 찰스 2세와 회담을 가져 그의 우호적인 중립을 확보했다. 위기에 몰린 네덜란드는 오렌지 공 윌리엄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전쟁 체제로 돌입했으며 합스부르크 제국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와 전투를 벌였다. 1672년에서 1678년까지 전쟁이 지속되었는데, 1677년 찰스 2세의 질녀이자 후의 제임스 2세의 딸인 메리와 오렌지공 윌리엄의 결혼으로 찰스 2세가 네덜란드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여러 나라가 이 전쟁에 말려들었다. 1778년 나이메헨 조약으로 프랑스는 프랑슈 콩테와 발랑시엔, 모뵈주, 생 토메르, 카셀 등을 영유하게 되었고, 네덜란드는 영토를 고스란히 유지했으나 가장 약했던 에스파냐가 많은 손해를 보았다. 이 전쟁으로 명장 튀렌이 사망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조약의 불명확성을 이용해 근처의 영토를 병합했다. 1681년 9월 스트라스부르가 병합되었다. 이러한 루이 14세의 합병정책은 유럽의 국가들을 불안하게 하였다. 1683년과 1684년 프랑스는 에스파냐와 전쟁을 치렀다. 그러나 약화된 에스파냐는 프랑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프랑스 군은 룩셈부르크를 점령하고 에스파냐의 동맹인 제노바를 포격했다. 전쟁이 전 유럽으로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독일의 제후들이 중재해 1684년 레겐스부르크의 휴전 조약이 맺어졌다. 프랑스의 국력은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그만큼 적은 늘어났고, 프랑스의 확대를 우려한 다른 유럽국가들이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다. 1685년 팔츠(팔라틴) 선제후 칼의 사망 후 팔라틴 공국의 계승자가 끊어지자 루이 14세는 칼의 동생이자 왕제 필립 도를레앙의 아내인 팔라틴 공녀를 내세워 그 영토를 요구하였는데 그러한 프랑스의 확장을 막고 나이메헨 조약의 준수를 요구하기 위해 스웨덴, 네덜란드, 독일의 제후들, 신성로마제국 황제, 에스파냐, 바이에른, 작센, 사부아가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을 맺었다. 또한 1688년 오렌지 공 윌리엄이 영국의 왕이 되어 영국도 적대세력으로 돌아섰다. 전 유럽이 프랑스에 대항한 동맹을 맺은 셈이었다.

 1688년 9월에, 1697년까지 이어질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팔츠 계승전쟁)이 시작되었다. 루이 14세는 루부아의 강력한 진언으로 알자스를 보호하기 위해 팔라틴을 완전히 파괴했다. 전쟁은 유럽 뿐만 아니라 식민지에서도 전개되었다. 캐나다에서 영국인들과 프랑스 인들 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프랑스 군은 바다를 제외하고는 도처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과거와 같은 전격전의 시대는 갔고, 9년에 걸친 장기간의 전쟁으로 양편 모두 지쳐있었다. 결국 강화를 하기로 하고 루이 14세는 승자로서 라이스바이크 조약을 맺었다. 그는 윌리엄 3세(오렌지 공 윌리엄)를 영국왕으로 승인하고, 네이메헨 이후 획득한 토지는 반환하며, 에스파냐령 플랑드르의 주요 요새의 관리를 네덜란드 군에게 맡기고, 로렌을 로렌 공에게 반환한다는 것에 서명했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는 프랑스에 남았다. 루이가 많은 양보를 한 이유는 에스파냐 왕 카를로스 2세의 건강이 악화되어 곧 왕위 계승이 이루어 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마리 테레즈의 계승권 문제가 불거질 것이었다.

 아우스크부르크 동맹전쟁은 그동안의 영국과의 우호관계를 깨고 이른바 제 2차 백년전쟁으로 불릴 두 국가의 대결의 서막을 열었다.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에스파냐 왕위계승 전쟁·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7년 전쟁·미국독립전쟁 ·프랑스혁명전쟁 ·나폴레옹 전쟁까지, 두 나라의 대립은 계속된다.

루이 14세의 예상대로 1700년 에스파냐의 카를로스 2세가 후사없이 사망했다. 가장 가까운 상속자로는 마리 테레즈의 자손들,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트의 둘째 아들인 카를 대공, 그리고 바이에른 선제후가 있었다. 식민지를 포함해 상속지가 워낙 넓었기 때문에 만약 어떤 한 국가가 에스파냐 전체를 상속받게 된다면 그것은 다른 국가들에게 심각한 위협을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루이 14세는 영국과 협의해 분할안을 제안했으나 마침 다섯 살 난 바이에른 선제후가 죽었고, 황제 레오폴트가 이를 거부했다. 또한 에스파냐의 국민적 여론도 해체에 적대적이었다. 에스파냐의 대신들은 가까이 있는 프랑스의지지가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카를로스 2세에게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 또는 베리 공을 후계자로 지명하는 유언서를 얻어냈다.

 

루이 14세는 영국과의 협약 때문에 망설였으나 결국 앙주 공을 에스파냐의 펠리페 5세로 즉위시키기로 결심했다. 신성로마제국 이외의 국가들은 그 자체로는 수긍하는 분위기였지만 앙주 공이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유지한다는 것에 있어서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상인들에게 라틴 아메리카에서 네덜란드 상인들이 차지하던 지위를 그대로 차지하게 했다. 에스파냐는 프랑스의 위성국가화 되었고 신대륙 무역에서 에스파냐와 프랑스의 제휴는 영국과 네덜란드에게 위협이 되었다. 따라서 영국과 네덜란드, 신성로마제국은 헤이그에서 대동맹을 결성하였고 다른 나라들도 속속 참여했다.

개전 초에는 프랑스군이 우세하였으나 오스트리아군의 오이겐 공이 이탈리아 전선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한 후 1704년 오이겐 공과 영국의 말버러가 블렌하임 전투에서 프랑스·바이에른연합군을 격파함으로써 전국을 전환시켰다. 이베리아반도에 상륙한 오스트리아의 칼 대공의 군대도 1706년 마드리드에 입성하였다. 더욱 오이겐과 말버러는 이 해에 각각 이탈리아와 네덜란드에서 승리하였고 1708년에는 오드나르드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한편, 해상에서도 영국·네덜란드 함대는 포르투갈 연해에서 프랑스·에스파냐 함대를 격파하고 지브롤터를 점령하였다. 동맹군의 우세를 보게 된 루이 14세도 강화를 결의하였으나 동맹군은 펠리페 5세를 왕좌에서 축출하라는 등 너무나 무리한 조건을 내걸어 타협을 결렬시키고 오히려 프랑스의 국민적 분발을 일으켰다. 프랑스 인들은 동맹국의 무리한 요구에 자신들의 국왕의 자존심을 지켜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희생을 감수하고 거국적인 단결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후 1709년 9월 빌라르가 모뵈주에서 동맹군에게 큰 손실을 입히고, 방돔 공작이 에스파냐의 빌라비쵸사에서 동맹군을 격파했으며, 바다에서 뒤게 트루앵이 역시 동맹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수세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1711년 영국에서 휘그당 내각에 대신하여 토리당 내각이 구성되고, 오스트리아에서는 요제프 1세가 죽고 칼 대공이 칼 6세로 즉위했다. 이렇게 되자 영국은 전쟁을 할 이유가 없어졌다. 칼 6세가 에스파냐의 왕이 되면 합스부르크 가의 거대한 세력을 키워주는 격이 되기 때문이다. 1712년 결정적으로 빌라르가 1712년 에우제니오 공을 드냉에서 격파함으로써 파리를 지켜냈다.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의 체결이 성립되었다. 그 후에도 오스트리아는 전쟁을 계속하였으나 그것도 이듬해 라슈타트 조약으로 끝을 맺었다. 프랑스는 벨기에(에스파냐령 플랑드르)에서 완전히 축출되고 아메리카 식민지의 많은 부분을 상실했다. 또한 식민지 무역상의 많은 특혜도 영국에게 양보해야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영토의 기본을 지켜냈고, 프랑스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기는 했지만 펠리페 5세의 에스파냐 왕위도 지켜냈다. 그러나 프랑스의 패권은 막을 내렸고, 이 때부터 영국의 패권시대가 개막되었다.

 

루이 14세 시대의 경제 상황은 뒤로 갈수록 나빠졌다. 초기에는 유능한 재무총감 콜베르의 노력으로(세제 개혁, 상업과 매뉴팩쳐 장려, 해외 진출 등) 재정이 건전화되었으나 루이 14세의 무리한 전쟁과 베르사유 건축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1680년대부터 적자와 공채가 위험스러운 수준으로 늘어났다. 관직 매매는 극에 달했고 조세는 거두기도 전에 탕진되었다. 거기다가 왕은 낭트칙령을 폐지하고 신교도들을 박해하기까지 했다. 1680년부터 용기병들이 신교도들의 집에 거주하면서 폭행·절도·강간 등을 일삼았고 1685년 10월 18일 결국 낭트칙령이 폐지되었다. 국왕은 위그노들이 프랑스를 떠나는 것을 금지했으나 종교의 자유를 잃은 위그노 들은 필사적으로 탈출했고 가장 부유한 17만∼20만 명의 위그노들이 망명에 성공했다. 이것은 프랑스의 경제와 문화에 극심한 타격을 가져왔다.

 

국가의 위기에 상응하듯이, 왕가에도 잇따라 불행이 나타났다. 1711년 루이 14세의 맏아들인 왕세자가 죽었다. 1712년에는 왕세자의 아들인 부르고뉴 공작과 루이 14세가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던 부르고뉴 공작 부인, 그리고 그들의 아들인 브르타뉴 공작이 죽었다. 1714년에 부르고뉴 공작의 동생인 베리 공작이 죽었다. 수많은 자녀를 둔 루이 14세였지만 후계자는 부르고뉴 공작의 막내아들이며 자신의 증손자인 어린 앙주 공작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충치로 고생하면서도 넘치는 건강을 자랑하며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사냥을 주저하지 않던 루이 14세도 결국 다리에 온 회저병을 이기지 못하고 1715년 9월 1일 숨을 거두었다. 임종에 왕세자를 부른 루이 14세는 그에게 말했다.

「너는 위대한 국왕이 될 것이다. 너는 건물을 세우는 취미, 전쟁을 좋아하는 정신 등 나의 소행을 닮아서는 안 된다.」

생전에 전 프랑스를 짓눌렀던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을 환호하게 했고 루이 14세를 비방하는 수많은 팜플렛과 풍자시가 나돌았다. 왕의 추도사를 한 마시용 신부는 그의 말을 이렇게 끝맺었다.

 「형제들이여! 오직 하느님만이 위대하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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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트리오스 2004-07-09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니엘 리비에르가 쓴 <프랑스인의 역사>와 비슷한 내용같아요. 아닌가?

카를 2004-07-09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처입니다.http://myhome.naver.com/loena/frame1.htm
작성한 분의 reference도 올립니다.
1. 콜린 존스,『(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프랑스사』, 2001
2. 앙드레 모로아, 『프랑스사』, 기린원, 1993
3. 장 카르팡티에, 『프랑스 인의 역사』, 소나무, 1991
4. 다니엘 리비에르, 『(그림으로 보는) 프랑스의 역사』, 까치, 1995
5. 서정복 역저, 『부르봉 왕조 시대의 프랑스사』, 서원, 1994
6. 알랭 드코, 『화려함의 역사 베르사유』, 한국방송출판, 2002
7. 크리스토퍼 하버트, 『메디치 가 이야기』, 생각의 나무, 2001
8. 쥘리에트 벤조니, 『왕비의 침실』, 영림 카디널, 2000
9. 안 포레 카를리에 ·자클린 리슈탱슈타인· 장 마리 브뤼종·장 프랑수아 그룰리에, 『세비녜』, 창해, 2001
 
 전출처 : 보슬비 > [퍼온글] 파올로와 프란체스카

라벤나의 성주 귀도 다 플렌타의 딸이었던 프란체스카는
리미니의 성주 잔 초토 말라테스타에게 출가했다.
(1275년 무렵이라고 한다)
그녀는 속아서 미남인 동생 파올로와 선을 보았던 것인데,
결혼 후에야 형, 즉 절름발이고 추남인 잔 초토에게 출가한 것을 알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파올로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두 사람 다 남편에게 살해되었다.


- 앵그르

.. 어느 날 우리는 장난삼아 란슬럿이 어떻게 해서
사랑에 끌렸는지 그 이야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단둘이 있었으나 별로 꺼림칙한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 책을 읽는 도중 여러 번 우리들의 시선이 맞부딪쳐
그때마다 얼굴빛이 변했습니다만
다음 한 구절에서 우리는 지고 말았습니다.
그 동경하던 미소에 그 멋진 여인(귀네비어 왕비)이 입을 맞추는
그 구절을 읽었을 때 이이는
내게서 영원히 떠날 수 없게 되었고
떨면서 내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날 우리는 더 읽지 못했습니다.

- 단테 <신곡-지옥편> 중

형수 프란체스카와 사랑에 빠진 파올로.  파올로가 형수인 프란체스카에게 입을 맞추고 있고
그의 형인 초토가 그들을 향해 칼을 뽑아들려 하고 있다.

그 후

- 카바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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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보슬비 > [퍼온글] 벨라스케스2 <라스 메니나스(시녀들)>


벨라스케스의 가장 유명한 그림.

이 그림에는 유독 수수께끼 같은 점이 많아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림의 주체는 화가인가 시녀인가 공주인가 왕인가
미셸푸코는 왕과 왕비를 그리는 자리에 모여든 화가, 공주, 궁녀들을 보여줌으로써, 그림의 주체는 사라져 버리고 상황만 남은 것을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한다.
또 곰브리치는 "벨라스케스는 카메라가 발명되기 이전에 이미 현실의 한순간을 담았다"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클림트는 "세상엔 두명의 화가가 있는데.그것은 바로.벨라스케스와 나다." 라고 했다.

  당시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와 마리아 사이에 난 어린 마르가리타 공주는, 가는 허리에 넓게 퍼진 푸른 스커트로 치장하고, 어딘가에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녀 옆에서 시녀는 무릎을 꿇고 먹을 것을 권하고 있지만 거절당한다. 그녀들 앞에는 두 난쟁이가 개를 발로 건드려보고 있으며, 그 중 하나는 그림의 정면을 묵묵하게 쳐다보고 있다. 다른 인물들은 바라보는 곳이 정확한 반면 마르가리타의 시선은 명확하지 않다. 그녀 뒤에 좀 떨어져 벽에 걸려 있는 거울을 보면 그녀 부모의 얼굴이 비치는데, 공주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미술사가들의 공통된 결론이다.

  거울 속에 국왕 부처의 모습이 비치는데, 이는 원근법적으로 어색한 모양이라고 한다.(때문에 거울이 아니라, 국왕부처의 초상화라는 무리한 설도 나왔다.)  또한 벨라스케스가 지금 국왕부처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고 보기에는 캔버스가 이상할 정도로 크고, 긴장을 풀고 잡담하고 있는 수녀와 경호원이나, 놀란 듯 일어나 인사하고 있는 시녀의 모습도 맞지 않는다.  결국 명확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피카소의 <라스 메니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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