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COLAS POUSSIN 1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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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 철학                     출처: http://www.pakebi.pe.kr/philosophy/general/hume.html

 

1. 인상과 관념
그는 우선 로크와는 달리, 인간 마음의 대상은 지각(perceptions)이며, 이것이 다시 인상(impression)과 관념(idea)으로 나뉜다고 주장한다. 그가 인상과 관념의 구별기준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생생함>인데, 이것은 다시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① 인상은 보통 뚜렷하고 생생한 지각(가령 감각적 지각)이며, 관념은 일단 마음 속에 들어온 인상이 사유나 추리, 기억 등에 의해 다시 나타날 때 생기는 희미한 것이다.
② 인상은 그것을 모방하는 어떤 관념보다도 원초적이며 시간적으로 선행한다. 이렇게 보아을 때 인상과 관념의 근본적인 질적 차이는 없다.
③ 인상은 마음에 주어지는 것이며, 그것을 지각하는 사람이 완전히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관념은 공상적일 수 있다. 흄은 공상적인 관념을 설명하기 위해 단순지각과 복합지각을 구별한다.
이처럼 우리의 지각(마음의 대상)은 인상이거나 관념인데, 모든 관념은 인상이 있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생긴 것이다. 따라서 흄은 인상이 먼저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떤 사유나 정신활동도 불가능할 것이라는 경험주의적 인식론을 제시한다.

 

2. 관념의 관계(relation of idea)와 사실(matter of fact)
'연구'에서 흄은 인간에 대한 연구의 모든 대상이 두 종류, 즉 관념의 관계(가령 수학)와 사실로 나뉜다고 주장한다. 이 중 수학적 명제의 진리는 존재에 대한 물음과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즉 그것은 경험적 가설이 아니라 형식적 명제이다. 반면 사실에 있어서의 모든 추리는 인과적 추론인데, 이것은 확실한 지식일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의 지식에서 인과적 추리의 역할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인과관계의 본성과 우리가 인과적 추리에 의해 감각들의 직접적 증거를 넘어서서 나아가는 근거를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 흄의 생각이다.

 

3. 흄의 인과론
① 인과관계의 조건 : 근접성(contiguity)과 계기성(succession), 그리고 필연적 연관성(necessary connection)

흄은 인과의 관념도 대상들 간의 관계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인성론'에서 인과 관계에 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어떤 대상이 다른 대상에 시간적으로 선행하고 시간 공간적으로 근접해 있을 때, 그리고 전자의 대상과 유사한 대상들이 후자의대상과 유사한 대상들과 시간적으로 선행하며 시공간적으로 근접 관계에 놓여 있을 때, 그 전자의 대상을 원인이라 한다."


"한 대상에 대한 관념이 생기면 자연적으로 다른 대상에 대한 관념도 생기며, 한 대상에 대한 인상이 생길 경우 자동적으로 다른 대상에 대한 더 생생한 관념도 생기게 되는 식으로, 마음 속에서 결합되는 두 개의 대상 중 시공간적으로 근접되어 있으면서 시간적으로 선행하는 대상을 원인이라 한다."

여기서 공간적으로 두 대상이 근접되어 있다는 말은 두 대상 사이에 아무런 공간적 틈이 없음을 뜻한다. 그런데 두 대상 간에 공간적 틈이 없다는 말은 또한 무슨 뜻일까? 불행히도 흄은 '공간적 틈이 없다'는 말의 뜻을 더 이상 밝히고 있지 않으며, 이 대문에 근접성의 조건도 큰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흄은 근접성과 계기성만을 가지고는 인과관계가 충분히 해명되지 않음을 알고, 더 중요한 조건인 필연적 연관성을 제시한다. 그는 우선 필연적 연관성의 관념이 어떤 인상에서 유래되었는가를 조사했으나, 어디에서도 필연적 연관성의 관념과 대응될 만한 인상을 찾지 못한다. 그래서 직접적인 해답을 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 문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다음의 질문들을 먼저 고찰한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원인을 가진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는 왜 특정한 원인이 특정의 결과를 필연적으로 낳는다고 생각하는가? 원인에서 결과로, 결과에서 원인으로 나아가는 추론과 그 추론에 우리가 부과하는 믿음은 어떤 성격의 것인가?


 

앞서 살핀 바와 같이 흄의 입장은 철두철미한 경험주의적 인식론이다. 즉 그는 모든 관념들이 서로 상이하고 분리될 수 있기 때문에 원인과 결과의 관념도 궁극적으로는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독립된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첫번째 물음에 대해, 그는 모든 존재하는 것이 원인을 가진다는
주장은 "직관적으로 확실하지도 않고 명증적으로 확실하지도 않다"고 대답한다. 그리고는 두 번째 물음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원인의 관념에서 결과의 관념으로 나아가는 추론과정부터 살핀다.


"두 대상 간의 불변적 연속(constant conjunction)이 수차례의 경험에 의해 확인되면, 우리는 더 이상 고찰할 필요도 없이 전자의 대상을 원인, 후자를 결과라고 부르게 되며, 전자로부터 후자에로의 추리도 이와 같이 해서 성립된다."


흄은 이처럼 인과관계에 불변적 요소가 있음을 고찰한 후, 이제 본래의 주제인 필연적 연관성의 문제로 다시 돌아온다. "우리가 두 대상이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말할 때 우리가 가지는 필연성의 관념이란 어떤 관념인가? 하는 것이 그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 던진 물음이었으며, 그는 대답을 위해 필연성을 낳은 인상을 찾아볼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라고 말해지는 대상들과 불변적 연속의 관계를 고찰한 결과, 어느 곳에서도 필연성의 관념을 산출한 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그러면 그의 필연성론이 의도하는 바는 무엇인가? 당시에는 필연성이 힘, 에너지 등으로 정의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흄은 그것들이 모두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령 그는 어떤 대상에서 힘이나 필연성의 인상을 획득한 사람이 있다면, 그 대상이 무엇인지 지적해 보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떤 구체적인 힘이 어떻게 구체적인 대상에 존재할 수 있는지 우리가 분명히 파악할 수 없으므로, 만약 일반적인 힘의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한다면 그것은 우리들 자신을 속이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연성의 관념에 해당하는 인상이 외부세계에는 없지만 우리가 그런 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필연성의 관념을 가지게 되는가가 다시 문제시된다. 필연성이 경험의 반복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상황에서,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유사한 경험이 반복됨에 따라, 그런 반복을 경험한 주체인 인간의 마음에 스스로 필연성이라는 관념을 생성시키는 인상이 생긴다"라는 심리주의이다. 즉 인간의 마음은 자신을 외적 대상에까지 넓혀 그것들을 내적 인상과 결합시키려는 성향(propensity)을 가지고 있으며, 필연성의 관념에 대응하는 인상이 인간의 외부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② 필연성론의 딜레마
먼저 성향을 P, 두 사건 e와 f 사이에 필연적 연관이 있다고 믿는 믿음을 B라고 하자. 이 때 성향 P가 믿음 B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흄의 인과분석에 따라 우리는 P와 B 사이에 필연적 연관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같은 2차적 믿음을 B'라고 하면, 다음과 같음 문제가 발생한다. 즉 흄의 설명을 논리적으로 따르면 B'도 거짓어어야 하며 B와 B' 사이에 필연적 관계가 있다는 믿음 B''도 거짓이 되는 등, 결국 흄의 인과적 설명은 무한퇴행에 빠진다.


물론 이에 대해 '우리가 믿음과 성향에 관하여 완결된 논리적 체계를 수립할 수가 있는가가 문제시되지 않는 한 무한퇴행 자체는 오류가 아니다'라는 반론을 펼 수 있다. 하지만 무한퇴행은 접어두더라도 B'에 근거한 흄의 설명은 다음과같은 딜레마에 빠진다.


1) B'가 필연적 연관성에 관한 다른 믿음과 마찬가지로 거짓이라면, 필연성 관념의출처에 대한 흄의 설명도 거짓이 된다.


2) B'가 거짓믿음이 아니라면, "원인과 결과 사이에 필연적 연관성이 있다는 우리의 믿음이 거짓이다"는 그의 주장은 보편적 타당성을 가질 수 없다. B'의 경우에는 우리의 믿음이 참이기 때문이다.

 

5. 마음과 인격의 동일성 문제

동일한 대상이란 '지속되는 존재자라는 허구에 의해, 쪼개져 있는 대상들을 결합하는 경향'을 지닌 <상상력의 활동>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흄은, 단순불변하며 항상 동일하다고 생각된 마음의 존재도 부인한다. 즉 그는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관계에 의해 결합된, 그릇되게도 완전한 단순성과 동일성으로서 추정된, 상이한 지각들의 집적 또는 집합일 뿐이다. 이 지각들의 연관된 집단이 하나의 사고하는 존재를 구성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다발이론을 제시한다.


그러나 다발 이론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마음의 일관된 동일성이 전제되지 않고 마음을 단지 지각들의 집합이라고 보면, 동일한 경험은 존재할 수 없으며 따라서 습관이 형성될 수 없다. 또한 그는 기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의 이론에서 어떻게 기억이 가능하게 되는가도 의문시된다.

 

6. 자연주의적 윤리설

① 요약
흄은 선악의 구별도 이성이 아니라 도덕감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이 때 만약 흄이 말하는 도덕감이 보편적 도덕의 원리가 될 수 있으려면, 동일한 대상에 의해 유발되는 도덕감이 사람이나 때에 따라 달라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동정심 등이 객관성을 만족시키는지는 의문이다.
결국 그의 경험론적 윤리설은 윤리학 자체의 부정에까지 이른다. 왜냐하면 그의 이론에 따르면 객관적인 도덕 판단의 기준을 제시할 수 없으며, 도덕 판단의 규범적 성격을 정당화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② 흄의 윤리학은 그의 경험이론, 본성이론, 그리고 규약 이론의 규명을 통해 드러난다.
1> 경험이론 : 경험 이론에서는 인간의 지식의 대상은 관념이며 관념은 경험을 통해서 획득된다고 한다. 감각경험을 통해 인상을 얻고 반성경험을 통해 관념을 획득하는데, 관념은 상상이나 기억으로 떠오른 것을 말할 뿐이다. 지식은 이러한 관념 사이의 연합과 일치에서 비롯하는 것인데, 이것을 결정짓는 것은 실재의 사태연관이 아니라 주관의 연합의 습관에 불과하다고 한다. 흄은 관념의 연합이 시공간적 근접성의 원리, 비슷함의 원리, 원인과 결과의 원리에 따른다고 한다. 그런데 독립된 두 사건의 필연적 관계를 의미하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우리가 그 필연성을 인식할 수 없기에 두 원리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라서 우리의 정신은 대상을 파악하는 것도 아니며, 관념의 연합의 결과로 지식을 얻었다 해도 그것의 확실성은 주관적 개연성의정도에 그칠 뿐이라 한다.


2> 본성이론 : 본성이론에서는 인간은 회의적인 지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반복된 경험에 자연적 연상의 습관을 부여하여 자신의 인과관념에 신념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이기심과 자신의 유용성을 고려하는 이해에 치우치게 되어서,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쾌라고 하고, 불리한 것을 불쾌라고 하며 도덕의 근거를 쾌불쾌에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도덕의 근거를 이해에 근거한 주관성에 기초하게 되면 인간의 다양한 경험과 각자의 반성능력으로 말미암아 사회질서는 보장할 수 없게 된다.


3> 규약이론 : 규약이론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에 질서가 존재하는 근거는 감정에 있다고 한다. 즉, 자신의 주관에 매몰된 인간이 경험하게 되는 시행착오적 경험을 통해 반성적으로 인위적 규약을 정하게 되는데, 그 반성하는 감정·정서가 도덕감이다. 도덕감은 자신의 유용성과 이해에 근거하여 쾌 불쾌를 느끼는 원초적 감정에서 후천적으로 발전된 것으로서 자신의 이해뿐만 아니라 공감에 기초하여 타인의 이해에도 설 수 있는 동정심·인간애가 있기에 객관성을 띤다고 보았다.


4> 흄은 인간이 인간의 지적 능력의 빈약함과 사욕에 머물기 쉬운 본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동정심에 기초하여 스스로 규약 및 규제를 설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점에서 그는 중세의 윤리관을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보겠다. 중세의 형이상학적 윤리학의 전통은 어떠한 선천적  도덕규칙에 따르는 것이 도덕적인 것이라 하면서 질서의 근원을 절대진리 및 신에게로 환원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적 탐구에 의해서는 드러나지 않는 존재와 신의 원리인 실재란 알 수 없으며 인간의 목적이 어떤 것이라는 주장은 사실상 인간이 언제나 어떠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환원가능하기에 경험을 통하여 윤리적 판단에 관련된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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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1년 집필시작-1689년 통치론과 함께 출간

I. 날때부터의 관념이란 없다
 
II. 관념
관념-단순관념
        복잡관념-관계
                     양상- 단순,혼합
                     실체- 단순, 집합
 
III. 관념의 기호인 언어는 한계를 갖는다.
언어의 명료화는 정의보다 감관으로 가능하다
언어가 명료화되면 도의의 논증까지 가능하다
 
IV. Knowledge란 관념간의 일치, 불일치 여부에 대한 지각(직관적,논증적,감각적)
Real knowledge란 관념과 사물이 일치할 경우
Truth란 기호와 사물의 일치, 불일치
Opinion이란 probability를 가진 명제에 대한 마음가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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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로빙거les Meroviniens 481-751

클로비스 , 다고베트르, 궁재 피핀, 궁재 카를 마르텔.

 

카롤링거 les Carolingiens 751-987

카를만과 땅딸보왕 피핀- 궁재에서 왕으로, 카를로만과 키다리왕 카를(샤를마뉴),

경건왕 루이

 

프랑크 왕국 3분됨: 베르됭 조약(843) - 메르센 조약(870)

로타르와 루트비히(게르마니아) 대머리왕 샤를(프랑스)

 

카페 왕조 - 발루아 왕조 - 부르봉 왕조 - 보나파르트 왕조 - 오를리앙 왕조 - 보나파르트 왕조 - 공화정  

 

 ▣ 카페 왕조 (987 ∼ 1328) : 봉건 왕조

(1) 위그노 카페(987 ∼ 996) - (2) 로베르 2세(경건왕 996 ∼ 1031) - (3) 앙리 1세(1031 ∼ 1060) - (4) 필리프 1세(1060 ∼ 1108) - (5) 루이 6세(1108 ∼ 1137) - (6) 루이 7세(1137 ∼ 1180) - (7) 필리프 2세(존엄왕1180 ∼ 1223) - (8) 루이 8세(1223 ∼ 1226) - (9) 루이 9세(성왕 1226 ∼ 1270) - (10) 필리프 3세(1270 ∼ 1285) - (11) 필리프 4세(美麗王 1285 ∼ 1314, 단테) - (12) 루이 10세(1314 ∼ 1316) - (13) 필리프 5세(1316 ∼ 1322) - (14) 샤를 4세(1322 ∼ 1328)

 

 ▣ 발루아 왕조(1328 ∼ 1593) : 중앙 집권 국가 형성

(1) 필리프 6세(발루아의 백작1328 ∼ 1350, 1346년 에드워드3세의 칼레공격) - (2) 잔(선량왕1350 ∼ 1364) - (3) 샤를 5세(현명왕1364 ∼ 1380) - (4) 샤를 6세(사악왕1380 ∼ 1422, 1399년 랭카스터의 헨리4세, 헨리5세) - (5) 샤를 7세(1422 ∼ 1461, 1429 잔 다르크, 1453 카스티용) - (6) 루이 11세(1461 ∼ 1483) 

(7) 샤를 8세(1483 ∼ 1498, 마키아벨리)

(8) 루이 12세(1498 ∼ 1515)

(9) 프랑수아 1세(1515 ∼ 1547, 카를5세, 루터와 칼뱅)

(10) 앙리 2세(1547 ∼1559, 비극적 마상시합, 카트린 드 메드시스)

(11) 프랑수아 2세(1559 ∼ 1560) 

(12) 샤를 9세(1560 ∼1574, 성바돌로매 학살)

(13) 앙리 3세(1574 ∼ 1589, 기즈공작 앙리, 앙리3세, 나바라왕 앙리)

 

▣ 부르봉 왕조(1589 ∼ 1792) : 절대 왕정

(1) 앙리 4세(1589 ∼ 1610, 1598 낭트칙령, 마리 드 메디시스, 쉴리) 

(2) 루이 13세(1610 ∼ 1643, 리슐리외, 숨은 전쟁) 

(3) 루이 14세(태양왕1643 ∼ 1715, 프롱드의 난, 모후 안과 마자랭, 파스칼, 콜베르)

(4) 루이 15세(1715 ∼ 1774, 오를레앙섭정, 플뢰르 내각,모푸의 개혁) 

(5) 루이 16세(1774 ∼ 1793, 여러내각의 실패) 

@프랑스 대혁명 (1789 삼부회의와 국민의회, 1792지방연맹군 공화정,1차 공포정치,1793년 루이16세처형, 1794년 테르미도르파, 1795년 총재정부 ). 

@나폴레옹 시대(1799∼1815)

1799 임시통령

1804년 황제대관식, 제1제정

1812년 러시아원정

1814년 폐위

(6) 루이 18세(1814 ∼ 1815) - 나폴레옹 백일천하-(1815 ∼1824)

(7) 샤를 10세(1824 ∼ 1830, 7월혁명 영광의 3일)

 

▣ 오를리앙 왕조(1830 ∼ 1848 7월왕정)

오를레앙공작 루이필립(레 미제라블, 산업혁명,낭만주의)

 

▣ 보나파르트 왕조(1804 ∼ 1814), (1852 ∼ 1870)  

[제2 공화정1848-1851]

1848년 2월혁명, 동부 서부파리의 충돌

1848년 12월 대통령선거-루이 나폴레옹

1851년 12월 황제 쿠데타,

 

[제2 제정. 나폴레옹 3세1852-1870]

1852년 제정선언, 식민지 팽창

1870년 잔인한 해, 프로이센의 침입

 

[제3 공화정, 1870-1940]

1870년 임시정부

1871년 독일정부에 항복, 파리코뮌, 피의 일주일

공화국 대통령-티에르

1873년 마크-마옹

1879년 그레비-의회제

1894년 사디 카르노 대통령 암살

1894-1899년 드레퓌스 사건

1870년-1914년 벨르 에포크

1914년 1차 세계대전

1918년 휴전

1939년 독일의 폴란드침공

1940년 독일과의 휴전

 

비시괴뢰 정부(페탱장군)(1940 ∼ 1944)

 

[제4 공화정]

1944년 임시정부 수립

1947년 라마디에 내각

1954-1962년 알제리전쟁

 

[제5 공화정]

1962년 드골-대통령제

1968년5월 학생운동과 드골의사퇴

1969년 퐁피두 집권

1974냔 지스카르 데스탱

1981년 미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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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

모나드의 운동과 상호작용에 대한 고찰

한 우 진


I. 서문

경험론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근대 합리론으로 분류되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철학에 있어 ‘실체(實體, subtance)’라는 개념은 말 그대로 어떠한 가상, 혹은 비본질적인 것 등, 실체가 아닌 것을 대립항으로서 전제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내려져 오는 서구 지성사 속에서의 이러한 뿌리깊은 이분법적인 도식은 많은 변주곡들을 만들어왔다. 만물의 ‘arche’를 찾으려 했던 철학의 시조에서부터 본질과 가상으로 세상과 존재를 파악해왔고 그러한 세상에 대한 설명, 각론으로서 세상의 질료적 측면과 더불어 움직임 또한 중요한 주제가 되어왔다.
라이프니츠는 세계를 동적인 것으로 설명하려 했던 철학자이다. 근대 철학사에서 그가 서 있는 위치는 좀 특이하다 할 수 있겠다. 그가 저술활동을 한 시기는 17세기 후반과 18세기초이다. A. F. 와이트헤드가 ‘천재들의 세기(The Century of Genius)’라고 불렀고 S. 햄프셔가 ‘이성의 시대(The Age of Reason)’라고 부른 이 시기는 데카르트 이후 철학과 과학의 여러 성과들(동시대에 갈릴레오, 뉴튼 등이 활동했다)로 인해 지금 돌아보면 기존의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완전히 제거된 시기로 생각되지만 여전히 이전 1000년간의 영향이 어느 정도 지속되고 있었다. 미분법을 고안했으며 자연과학자로도 알려져 있는 라이프니츠가 아리스토텔레스와 스콜라 철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다. 실제로 그가 가정한 단순 실체, 즉 모나드를 ‘엔텔레키’라 부른 것이나 물리학적인 ‘힘’을 염두에 두긴 했으나 운동을 형상적인 것으로 설명하려 한 것 등 이러한 요소들을 꼽아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라이프니츠의 이러한 위치는 지금에 있어 오히려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는 데카르트 등의 기계론에 맞서는 목적론적 체계를 구축하려 했다. 라이프니츠가 옹호했던 내용들은 이미 그의 시대에 기울어가던 것들이었으며 결국 기계론이 승리한 셈이다. 그러나 기계론에 있어서도 뉴튼이 ‘세계 기계설’을 퍼뜨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사실 그가 물리학을 신학의 테두리에 넣었던 것에서도 볼 수 있듯, 기계설 내에도 형이상학적 가정들이 내재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설명을 전근대적이며 이미 지양된 논의 정도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커다란 가능성을 상실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은 오늘날에 있어 많은 가능성을 던져주는 하나의 미토스나 세상에 대한 틀, 혹은 모델로서 재발견 될 수 있다.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 내에서 단순 실체라고 정의된 모나드의 본성 중, 운동이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다른 것에 대한 영향을 함축한다는 전제하에서 운동에 주목하고자 한다. 본 논문은 크게 1) 개별 실체의 운동에 대한 고찰과 2) 운동을 하는 모나드들 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고찰로 이루어질 것이다.
필자는 세상을 정적인 원리로 이해하려 했던 흐름에 비해 운동을 세상의 중요한 원리로 파악했던 라이프니츠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그 자체로 흥미로워서 문학적 소재로도 인용되기도 하는 그가 구성한 형이상학적 세계의 모습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의 단순 실체는 닫힌 세계이며 그가 세상을 필연성이라는 울타리에 가두어 놓으려 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지만 그 속에서 운동과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찾아보려 한다. 필자는 라이프니츠가 구성한 세계는 아주 동적인 것이며 그 세계 속에서는 구성체들이 자율성을 유지하면서도 그 사이에는 있는 끊임없는 모종의 상호작용을 찾아내길 희망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가 단순 실체로 세상의 움직임과 변화를 설명했을 때 일어나는 난제들을 해결하는 방식을 살펴보고서 이를 평가할 것이다.


Ⅱ. 본문

1. 개별 실체의 운동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설명
‘형이상학 서설’에서 얻으려 했던 두 가지 답은 피조물들이 스스로 순수한 ‘원인’이 되며, 특히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가질 수 있다는 점과 신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원인이 될 수 있을까라는 것 사이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것과 영혼은 불멸한다는 점에 대한 것이었다. 라이프니츠는 신과 함께 창조된 실체들도 모두 원인(causes)이 될 수 있다는 것(능동적이며 운동을 한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한다. 다른 것들의 원인이 되는 창조된 실체들이 갖는 능동성과 운동성은 라이프니츠가 구성한 형이상학적 세계를 설명하는데 중요한 원리가 된다.
 
1.1 실체 개념의 도출과 가정된 본성들
스피노자는 실체를 ‘그것의 개념을 형성하기 위하여 다른 것의 개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즉 ‘존재하기 의해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자기 원인(causa sui)을 가진 것’으로 정의했다. 라이프니츠의 실체 개념도 이러한 합리주의 전통의 연속선상에 있는 셈이지만, 그는 스콜라 철학 이후 데카르트, 스피노자, 로크 등이 논의한 실체 개념에 모호한 점이 아직 남아있다고 보았고 이를 제거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실체 개념을 제시했다. 그의 실체 개념은 초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면서 변화를 겪었는데 여기에서는 ‘형이상학 서설’ 이후에 나타난 실체 개념을 다루고자 한다.
라이프니츠의 실체개념은 ‘in-esse의 원리’에서부터 도출된다. 형이상학 서설 8절에 서술된 ‘in-esse의 원리’는 다음과 같다.

“술어가 주어 안에 있다고 말할 때, 이것이 바로 철학자들이 in-esse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어는 주어의 개념을 완전히 이해하는 누구나가 술어가 이 주어에 속한다는 것을 아는 식으로 항상 술어를 포함한다.”

‘in-esse의 원리’에 따라 실체개념이 도출된다. 여기서 실체는 바로 술어들의 궁극적인 주어에 해당하는 것이다. ‘in-esse의 원리’와 관련하여 라이프니츠는 실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많은 술어들이 하나의 주어에 귀속되고 반면에 이러한 주어가 다른 것에 귀속되지 않을 때, 이 주어가 개별 실체라 불린다는 것은 물론 참되다. 이는 술어 자신으로부터 술어의 개념이 돌려지게 되는 주어의 모든 술어를 우리가 이해하거나 연역해낼 수 있게 하는데 충분할 정도로 완전한 개념을 갖는 것이 실체 혹은 완전 존재의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라이프니츠 자신이 그렇게 분류한 것은 아니지만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in-esse의 원리’는 칸트가 말한 분석명제와 유사하다. 많은 사람들이 칸트와 라이프니츠간의 차이를 구별하지 않고서 ‘분석적’이란 말을 쓰고 있으나 둘 사이엔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 칸트에게 있어 분석명제에는 예컨대 ‘수녀는 결혼 안한 여자이다’라는 명제가 해당하겠으나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는 ‘시저는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단칭, 우연 명제도 주어가 술어를 포함한다. 이 때문에 실체에는 모든 술어들이 귀속될 수 있으며 주어는 이미 모든 가능한 술어들을 포함하고 있게 된다. 그렇다고 모든 술어의 합이 실체개념을 지시하는 것은 아니다. 실체는 모든 개념과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미 완전성과 운동을, 나아가서는 전 우주와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실체는 ‘우주’를 포함하고 있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주어의 개념을 철저히 분석해 나간다면 과거, 현재, 미래의 상태를 알아낼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다음과 같이 실체의 본성을 가정한다. 이들은 각자가 공리라기보다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가정들이다. 다음절에서는 운동의 측면에서 이와 같은 가정들을 검토하려고 한다.
1. 단일체(unity, unum per se): 실체는 본래적인 단일체여야 하고 우연적인 것이어서는 안된다.
2. 동일성(identity): 실체는 변화하는 동안에도 유지되는 개별자들이다.
3. 자율(autonomy): 실체는 스스로에게서부터 존속하는 존재이다. 신을 이러한 존재라 했을 때, 다른 실체들의 존재가 가능 하느냐는 문제가 생긴다.
4. 작용(agency): 활동성과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은 실체의 개별성과 관련되어 있다. 이는 스콜라철학의 ‘능동성과 수동성은 분명하게 개개의 실체에 속한다(Actiones sunt suppositorum)’는 공리와 관련된다.
5. 완전성(completeness): 개별적인 실체들은 완전한 존재이다.

1.2 개별 실체의 운동
라이프니츠는 실체의 운동을 실체가 ‘모든 술어의 궁극적인 주어라는 것’에서 도출해냈다. 실체가 모든 술어의 주어라면 그것은 궁극적인 설명원리로 작용할 수 있어야 하며, 혹은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이유로 주어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라이프니츠는 계속해서 세상에서 설명되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사실 가운데 하나가 변화, 즉 무언가가 처음에 가졌던 성질을 다음에는 잃는 현상이며, 변화를 설명하는 것은 변화가 일어나는 것에 대한 이유를 가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라이프니츠는 여기서 실체가 궁극적 설명 원리의 역할을 수행한다면 세상 안의 변화를 설명하고 있는 운동의 궁극적 기반으로서 인정되는 것이라는 사실이 도출되며, 이 사실은 실체가 운동의 원리여야만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보았다.

1.2.1 개별성과 운동
스피노자는 신 이외에 어떠한 실체도 존재할 수 없으며 파악될 수 없다고 보았다. 자연 안에는 오직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하고 있으며 res extansa나 res cogitans는 신의 속성이나 신의 속성의 변용이 되어 버린다. 스피노자는 실체를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이며 무한한 속성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하며 자신은 유 안에서 무한하다고 하기보다는 절대적으로 무한하다고 말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단지 자신의 유 안에서만 무한하다면 이러한 어떤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무한한 속성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피노자에게서는 개별적인 다수의 실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실체의 변용으로 파악했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모든 실재하는 혹은 존재하는 것들은 구체적인 개별자들이라는 유명론자들의 논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가 실체가 실체들의 개개의 질료나 개별원리(haecity, thisness)에 의해 개별화된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보다 논리적인 설명을 원했다. 개별성에 대한 설명은 ‘in-esse’의 원리에서부터 나온다. 그러나 일견 ‘in-esse’의 원리에서 도출된 실체가 꼭 다수의 개별 실체여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없어 보이기도 하다. 모든 술어를 포함하는 가능한 하나의 실체를 상정할 수도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다수성을 부정하는 파르메니데스나 스피노자의 결론은 변화를 설명하는데 적당하지 않다고 보았다. 변화를 실체의 변용이나 실체의 속성의 변용으로 파악한다면 능동성이 가지는 자리가 좁아지게 된다. 라이프니츠는 능동적인 개별자들로 이루어진 동적인 세계를 그리고 싶어했다.
술어는 실체 속에 내재해 있는 속성에 대한 언급으로 이루어진다. 어느 한 실체가 특정한 한 속성을 가져야만 한다는 사실은 필연적이다. 특정한 한 속성을 가지는 어느 한 실체가 그러한 속성을 가지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다른 실체가 되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개별 실체들의 구분은 각자 특정화되는데 있어서의 완전성에 의해 결정되며 이러한 식으로 실체는 자신의 술어의 합을 통해 개별화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운동과 변화의 개입의 여지가 생긴다. 한 주어와 그것에 부착되는 여러 술어들과의 결합에 있어, 즉 실체가 처하게 되는 여러 다른 상태에 있어 한 주어인 실체는 자신이 처하는 여러 다른 상태, 즉 실체의 운동과 변화의 원리를 포함하고 있어야만 한다. 이렇게 개별화의 원리를 가지고 있는 각 개별 실체는 자신의 실체적 형태(substantial form)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개별화의 원리는 각 개별 실체를 끊임없이 변화하도록 한다. 서로 성질은 같으면서 단지 숫자상에서만 다른 두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실체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변화는 달라지는 것을 뜻하므로 실체의 한 상태는 반복이 가능하지 않은 그 때 그 때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지만 각 개별 실체는 변화하면서도 다른 실체들과 구분되는 동일성을 가져야 한다. 따라서 실체의 내적 상태간에는 연관이 있어야 하고 이렇게 동일성을 유지하며 다른 실체들과 끊임없이 구별되려 한다는 점에서 운동이 설명될 수 있다. 한편 주어가 술어들을 포함하고 있다면 ‘영수는 모나돌로지를 읽을 것이다’라는 명제에서 ‘읽을 것이다’는 ‘영수는 모나돌로지를 읽고 있다’에서 ‘읽고 있다’와 마찬가지로 ‘영수’라는 주어의 술어가 된다. 따라서 각 실체는 과거와 미래를 그 안에 포함한다고 할 수 있으며 이렇듯 실체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변화하는 것을 라이프니츠는 ‘실체의 운동’이라 불렀다.

1.2.2. 완전성과 운동
브라운에 따르면 완전성은 동일성과 더불어 어떠한 것이 실체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인 반면, 운동은 어떠한 것이 어떠한 종류의 실체가 되는가(이를테면 ‘어떠한 왕’, ‘어떠한 반지’)에 대한 필요조건이다. 물론 어떠한 종류의 개체가 되려면 실체는 개별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실체들과 구별되는 한 실체의 완전성을 생각할 수 있다. ‘왕’이라는 개념은 ‘~은(는) 왕이다’라는 형태로 술어가 될 수 있으므로 완전한 개념이 되지 못하며 실체가 되기 위한 필요조건이 아니다. 완전한 개념은 ‘in-esse’의 원리에 따라서 모든 술어를 포함하되, 술어에는 속하지 않는 개념이다. 완전성은 어떠한 것이 개별 실체가 된다는 것, 즉 수많은 술어에도 불구하고 변화하는 동안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있는 개별 실체가 된다는 것에 대한 필요 조건이다. 완전성 개념은 완전성을 향해 변화하는 실체가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며 여기서 동일성과 완전성은 서로 연관을 맺는다.
앞에서 살펴본 형이상학 서설 8절, “이는 술어 자신으로부터 술어의 개념이 돌려지게 되는 주어의 모든 술어를 우리가 이해하거나 연역할 수 있게 하는데 충분할 정도로 완전한 개념을 갖는 것이 실체 혹은 완전 존재의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는 라이프니츠의 언급에서 실체는 완전존재이며 완전한 개념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라이프니츠가 의도한 완전성 개념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실체의 역할을 운동의 원칙으로서 밝히는 것이었다. 완전성 개념은 운동으로서 서술되는 궁극적인 주어가 될 수 있는 본성을 정의하는 데에 결정적이다. 라이프니츠는 완전성 개념을 변화의 원리로서 실체의 동일성과 연관시킴에 의해, 운동의 원리만으로 실체를 정의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했다. 완전성은 자발적, 또는 인과적으로 자기충족적인 조건을 만족시키는 본성으로 의도되었다.
라이프니츠는 완전성의 ‘개념’과 운동의 근원이 되는 개념의 ‘본성’ 혹은 ‘형식’을 구분했다. 그는 완전성 개념에 개별 실체에 대한 신의 완벽한 이해의 내용을 연결시킨다. 이러한 이해의 내용의 각자는 실체의 형식이나 본질의 생성에 대한 기반이 된다. 여기서 1) 완전성의 개념이 주어진 주어의 참된 술어가 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는 한, 2) 신이 이러한 개념의 이해를 특정한 실체적 형식(혹은 운동의 원리)에 이용하는 한, 모든 실체는 자신의 모든 본성의 상태와 변용의 원천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도출할 수 있다. 개별 실체의 완전한 개념 속에는, 신에 의존하는 존재에 대한 모든 실제적 섭리 앞에서의 순수한 가능성의 상태 속에는, 이미 존재한다면 이미 무엇이곤 일어날 것이다.

1.3 소결론
지금까지 개별 실체에 관한 논의는 주로 ‘형이상학 서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라이프니츠는 이때까지 개별 실체에 ‘모나드’라는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다. ‘형이상학 서설’에서 ‘체계’로 넘어가면서 실체 개념에 약간의 변화가 오며 또한 말년의 작품인 ‘원칙’과 ‘모나돌로지’에서는 모나드라는 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이 기간 동안의 개념 변화를 유의미하다고는 보지 않을 것이다.
1장에서 다룬 개별 실체에 관한 논의는 모나드 간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데 있어 전제가 되는 내용이다. 개별 실체에 대한 앞의 논의에서 도출된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 간략한 결론을 맺고 넘어가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모나드는 형이상학적 단순 실체이다.”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가 6번째 성찰에서 오성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자신에게 명석판명하게 다가오는 개념으로서의 ‘연장’을 찾아내고 이러한 능력을 형상적으로 혹은 우월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물질적 실체(res extansa)의 개념을 도출해 낸 것을 비판했다. 왜 물체의 본성이 연장이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곧 연장이라는 속성과 연장적 실체가 동일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물체의 본질을 운동으로 보았다. 연장으로부터 운동이 설명될 수 없으며 물체의 운동 속에서 발견되는 자연법칙은 연장개념만으로 도출될 수 없다는 것이다. 데카르트의 연장적 실체는 능동성을 가질 수가 없다. 오직 엔텔레키, 영혼(ame), 정신(esprit) 등으로 말해지는 형이상학적 실체만이 변화의 원천이 될 수 있으며 연장적 실체는 ‘실체’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라이프니츠의 시도는 수학적 점이 갖고 있는 자기 모순을 극복하려는 것과 관련된다. 수학적인 점, 곧 개념적인 점은 공간이 없지만 물리학적인 점은 본성과 형식, 즉 공간을 갖는다. 실제로 그는 이러한 모순을 미분과 함께, 실체 개념으로 극복했다. 공간을 차지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물리학적인 ‘힘’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이는 세상이 연장을 가진 원자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던 원자론자들과도 구별되는 지점이다.
모나드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모나드는 단순하고 하나인 실체이다. 단순하다는 것은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스피노자 또한 실체가 분할된다면 이는 곧 유한한 것이고 따라서 무한함이라는 실체의 속성에 위배되는 것이라는 이유에서 분할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리고 유한한 존재들이 상호작용하고 있는 현상에서부터 유한자들은 실체가 아니며 오직 거대한 자연의 체계만이 실체라는 결론을 도출해 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에게는 유한한 정신들이 곧 실체이며 하나하나는 완전한 독립체이다. 하지만 그는 그 본성상 하나의 단자가 다른 단자에 영향을 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모나드라는 말은 1690년 파르델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부터 쓰기 시작했다. ‘모나드’라는 말은 그리스어 ‘monas’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개체(a unit)를 의미했다. 그리고 피타고라스에게 있어 모나스는 숫자들의 arche를 의미했다. 피타고라스 학파에게는 수가 세상을 설명하는 기본원리가 되므로 모나스는 세상의 arche이다. ‘모나스’라는 어원에서 비롯된 단순 실체인 모나드는 복합체를 이룬다. 라이프니츠는 단순한 것의 집합체인 복합체의 존재 자체가 단순 실체의 존재를 함축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거기엔 부분들이 전혀 없고, 연장도 없으며, 형태도 없고 나누어짐도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 모나드들은 자연의 참된 원자들이며 한마디로 말하면 사물들의 기본 요소(les elemens des chose)이다.”

2. 모나드들간의 상호작용
앞에서의 내용은 개별 실체에 국한된 변화와 운동에 대한 것이었다. 영혼만이 실체이며 그것이 세상을 이룬다는 점에서 ‘유심론’으로도 평가받는 라이프니츠의 체계 속에서 운동 또한 ‘영혼’의 변화와 움직임을 의미한다. 앞으로는 그러한 변화와 운동의 성격과 변화하는 개별 실체가 구성하는 세계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나드 안에서는 신이 미리 배려한 조화에 따라 끊임없는 변화와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으나 모나드 사이의 상호작용은 모두가 ‘현상’일 뿐이다. 자기완결성을 지니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개별 모나드들이 구성한 세계는 동적인 세계이다. 그러나 유명한 ‘모나드엔 창이 없다’는 말처럼 모나드의 본성상 모나드들 상호간의 작용의 가능성은 봉쇄되어 있다. 반면 모나드들이 수없이 많으며 또 이들이 동적인 세상을 이룬다는 사실은 ‘모나드들 간의 상호작용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능하게 한다. 세상의 변화, 복합체의 변화는 모나드가 무수히 존재하며 나름대로 운동을 한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가 필자가 상정한 딜레마의 두 뿔을 해결하는 방식을 살펴봄으로써 세상의 변화를 설명하는 방식과 모나드간의 상호작용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2.1 모나드엔 창이 없다
모나드간의 상호작용에 대해 가장 단적으로 말하고 있는 모나돌로지 7절은 다음과 같다

“어떻게 모나드가 바뀔 수 있는지, 혹은 어떻게 어떠한 또 다른 창조물에 의해 모나드의 내부에서 변화하는지를 설명할 방법은 없다. 어떠한 것도 이동할 수 없고, 그 안에서 고양되고(excit? 지향되며(dirig?, 증가하거나 줄어들 수 있는 내적 움직임도 감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은 부분들간의 변화가 일어나는 복합체(compos?)에서나 가능하다. 모나드들에는 어떠한 것이 들어가고 나올 수 있는 창이 전혀 없다. 스콜라 학파가 말하는 지각되는 ‘esp?es’와는 달리 속성들(les accidens)이 나와 돌아다니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실체(substance)도, 속성도 밖에서부터 모나드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위에 따른다면 모나드들은 다른 모나드들과 인과적으로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서 원자론자들과의 유사성을 지적할 수 있다. 변화는 모나드들이 모여있는 복합체에서 가능한 것이다. ‘모나드에는 창이 없다’는 유명한 언급은 모나드의 본성에 의해 도출될 수 있다. 다른 것에서부터 영향을 받는다면 더 이상 완전한 존재일 수 없으며 실체의 개념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창이 있다면 독립된 주어가 아니라 다른 주어의 영향을 받으며 종속되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모나드엔 창이 없다’는 말은 결국 모나드의 변화는 오직 내적 본성의 결과이지 인과적으로 외적 자극에 의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 모나드는 인과적으로 독립적이라 할 수 있다. 성질을 가져야만 모나드는 존재자일 수 있고 모나드가 서로의 성질에 의해 구별된다고 할 때, 서로의 모든 변화의 양태를 공유하는 두 모나드 또한 있을 수 없다. 모나들간에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각 모나드는 다른 모든 모나드와 달라야 한다.
모나드 간의 인과적인 상호작용이 봉쇄되었다면 복합체로 이루어진 세계의 변화는 각 모나드들 간의 이합집산이나 모나드의 내적 원리에 의한 성질의 변화로 설명될 수밖에 없다. 모나드들은 외적 원리에 의해 내부의 영향을 받을 수 없으므로 모나드의 자연적 변화는 내적 원리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모든 창조된 것들이 변화에 종속되었다면 그 변화는 각자에게서부터 끊임없이 일어난다.
단순 실체 내부에서의 변화로 세상의 변화를 설명하고자 할 때, 변화는 변화하는 것과 남아있는 것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단순 실체 안에 변화하는 것과 남아있는 것, 즉 다수를 포함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단순 실체의 정의와 어긋날 수 있다. 단순 실체는 나뉘어질 수 없으며, 따라서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레셔는 형태상으로는 부분이 없다는 점에서 단순하지만, 단순 실체가 가지는 상태에 대한 기술적 의미에서는 단순하지 않다고 보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단순 실체는 다수를 포함한다. 우리가 어떠한 물체를 보고서 ‘이것은 빨갛다’라는 아주 단순한 생각을 할 때에도 이 생각은 항상 복합적인 것이고 관계적인 것이다(‘이것은’과 ‘빨갛다’). 이러한 식으로 우리가 통각 하는 것에 대한 사소한 생각이 그 통각 되는 대상 속의 다수성을 포함함을 발견할 때 우리는 단순 실체에서 다수성을 경험한다. 단순 실체는 주어진 어떠한 시간동안 복잡한 기술적 상태를 가지며 지속적으로 상태가 변화하는데 대한 내재적인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으며, 그 안에 부분이 없지만 다수를 포함하기 위해서 영향과 관계의 다수성(plualit?d'affections et de rapports)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들간의 관계를 부정하진 않았다. 그는 외부에서 내부에 영향을 주는 형태의 상호작용은 부정했지만 상호 조화(mutual attunement)를 통한 내재화된 상호작용을 받아들였다.

2.2 모나드는 우주의 거울이다.
2.1에서 ‘모나드엔 창이 없다’는 전제에서 시작하여 인과적이지는 않지만 모나드들 간에 작용하고 있는 모종의 상호작용의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라이프니츠는 통일체, 즉 단순 실체 안에서 다양함을 포함하고 표상하며 전이하는 상태를 ‘지각(perception)’이라 불렀다. 지각은 통각(apperception)과 의식(conscience)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지각은 동일성을 유지하는 실체의 다양성의 표상이다. 반면 하나의 지각에서부터 다른 지각으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변화를 일으키는 내적원리의 움직임은 ‘욕구(appetition)’이다. 변화는 모나드의 욕구의 산물이다. 욕구는 항상 완전하게 자신이 의도하는 모든 지각에 이를 수 없지만 항상 약간의 지각을 얻으며 따라서 새로운 지각에 도달할 수 있다.
영혼(ame)은 데카르트의 ‘res cogitans’와 다르다.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는 통각 되지 않는 지각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모나드는 ‘res cogitans’에 해당하는 정신(이성적 존재를 지배하는 모나드)뿐 아니라 영혼(동물을 지배하는 모나드)까지를 의미한다. 우리의 영혼은 명석 판명하지 않더라도, 통각 되지 않더라도 많은 것을 미세하나마 지각할 수 있다. 데카르트를 따를 경우 명석 판명하지 않은 두 상태인 의식불명과 죽음 또한 구별할 수가 없다. 따라서 데카르트에게 있어 회의의 대상이었던 지각과 욕구는 모나드의 중요한 원리가 된다(지각은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전체에 침투되어 있다). 그러나 지각과 욕구는 기계적으로는, 즉 모양(les figures)과 운동(les mouvemens)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지각과 욕구는 오직 자신들의 내적 움직임의 원동력, 즉 무형의 기계가 되게 하는 충분성을 가지는 엔텔레키(창조된 모나드)에서 찾아질 수 있다. 라이프니츠에게 있어 지각은 우리의 일상적이며 감각적인 지각보다 넓은 의미이다. 지각을 통해 영혼 속에 일어난 것은 표상되며 지각은 바로 모나드가 외부세계와 관련을 맺는 방식이다. 실체는 지각없이 존재할 수 없고 지각을 통해서만 다른 것에서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각 모나드의 지각 상태간에는 복잡한 상호작용들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각 모나드가 모든 내적 운동과 정념의 직접적인 원인이면서 다른 모나드에 대해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설명할 수 있겠다. 하나의 모나드는 그것이 다른 것보다 더 완전한 한에서, 즉 한 모나드 안에서 다른 것에서 일어나는 것을 선험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더 분명한 지각을 찾을 수 있는 한에서, 다른 모나드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반대로 한 모나드는 다른 모나드의 지각이 전자에게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한 선험적 설명을 제공하는 한에서 영향을 받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나드간의 상호작용은 개별 모나드의 내적인 속성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지만 한 모나드가 다른 모나드에 작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모나드 각자의 지각사이의 연관에 의해 결정된다. 이렇게 연관된 모나드들은 다른 것에 능동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만큼 수동적으로 영향을 받으며 자신의 능동성만큼 영향에 저항하기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창조물은 완전한 것으로서 외부에서 활동하며 불완전한 것으로서 다른 것에서부터 반응한다고 말해진다.”
지각과 욕구를 가지는 모나드는 그 자체로 영속적으로 살아있는 ‘우주의 거울(miroir)’이다. 라이프니츠는 ‘원칙’ 4절에서 내적 원리와 욕구의 표상 뿐 아니라 ‘외부의 사물들을 표상하는 모나드의 내적 상태’를 지각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모나드가 우주의 거울이라는 것은 모나드 내적인 의미에서, 그리고 한 모나드의 지각은 외부의 반영이라는 두 가지 의미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다른 면에서 보여진 하나의 동일한 마을이 모두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즉 관점이 늘어난 듯이 보이는 것처럼, 다양한 우주처럼 보이는 단순 실체의 무한한 다수는 그러나 단지 각 모나드의 다양한 관점에 따르는 오직 하나의 관점만을 가질 뿐이다.”

모나드는 과거, 현재, 미래를 담고 있는 소우주이며 지각은 한 모나드가 표현하는 다수성과 내적 움직임(욕구)의 표상이라는 점에서도 ‘우주의 거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위의 57절은 모나드들 간의 상호작용과 조화와 관련해서 볼 때 더욱 부각되는 의미를 가진다. 모나드들은 자신의 관점에서부터 단일한 복잡한 세계 체계를 표상한다. 라이프니츠에게 있어 표상은 지각의 역이다. A가 B를 지각할 때 B는 어떠한 식으로든 A 안에서 표상된다. 표상이나 지각은 어떠한 대상을 함축하기 때문에 어떠한 관계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으며 지각들이 서로 관련을 맺고 있다면 모나드의 모든 속성들은 존재론적으로 관계의 범주 안에 있게 된다. 지각의 대상들은 한 모나드 안의 욕구일 뿐 아니라 같이 세계를 구성하는 다른 모나드들이며 각 모나드는 자신의 상태 안에 전 우주를 포함하되 다른 방식으로 표상한다. 모나드들이 지각하는 대상은 실제의 우주이다. 모나드들은 자신들의 관점에 따라 체계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자신의 관점에 따라, 그리고 명석함의 정도에 따라 우주를 반영한다. 따라서 모나드들은 가능한 한 많은 다양성을 얻으며 우주의 질서와 연관되고, 가능한 만큼의 완전함을 얻는 것이다.
 
2.3 신의 개입과 예정조화
2.2에서 모나드간의 지각을 통한 상호작용의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그 상호작용의 근거와 내용에 대해 논구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근거는 모든 모나드의 근원인 ‘神’이며, 내용은 신의 ‘예정조화’이다. 데카르트는 자아가 속임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신을 요청했다.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 신은 모나드의 창조자이며 모나드를 소멸시키 존재이며, 무엇보다도 모나드들 간의 상호작용과 관련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놓은 존재자이다.
라이프니츠는 신을 요청하기 위해 모순율과 동일률, 그리고 충족이유율을 끌어들였다. 진리는 필연적이고 불가능의 반대인 이성적 진리와 우연하며 가능의 반대인 사실적 진리로 나뉜다. 필연적 진리는 분석을 통해 이유를 찾을 수 있지만 사실적 진리들은 충분한 이유를 필요로 한다. 사실적 진리의 충분한 이유는 결국 우연한 진리와 사실들, 우주 전체를 통해 흩어져 있는 창조물들의 전체에서 찾아져야 한다. 이 경우 개개의 이유에 대한 해결은 끝없이 세부에로 나아가는데 모든 이러한 세부는 이전의 다른, 혹은 좀더 자세하지만 우연적인 요소를 포함하며, 그 각각에 대해 다시 이유를 주어야 하는 분석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무한후퇴로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최종원인이 요청된다. 사실적 진리의 최종원인은 무한후퇴의 고리밖에서 찾아져야 하며 이러한 사실적 진리의 충분한, 궁극적인 이유가 바로 신이다. 신은 모나드와 우주에 대한 충분한 이유이다. 충족이유율 또한 ‘in-esse의 원리’에서 유도되었다고 하겠다. 모든 술어가 주어에 포함되었을 경우 사실적 진리에 대한 이유 부여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는 그 자체로 참을 확인 할 수 없는 사실적 진리에도 선험적인 증명을 줄 수 있다는 것, 즉 원인이 없이는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다는 이유를 부여하려는 욕구의 원리이다.
신은 모나드를 만들어 내거나 소멸시키는 존재의 원천일 뿐 아니라 모나드의 본질의 원천이기도 하다. 모나드의 거울 안쪽까지 들여다보고 그 안으로 들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는 신밖에 없다. 모든 것을 가능케 하고 소멸하게 하는 신의 ‘능력’ 안에는 관념의 세부들을 모두 포함하는 ‘지식’과 변화와 생산을 일으키는 ‘의지’가 있다. 신의 능력과 지식과 의지는 각각 창조된 모나드의 ‘존재(실재)’와 ‘지각’, 그리고 ‘욕구’와 상응한다. 각 창조된 모나드들이 가지고 있는 완전성은 신의 완전성의 모방인 셈이다.
이러한 신의 요청만으로도 모나드가 우주의 거울이라는 점과 모나드들 간의 상호작용, 운동에 대한 설명이 일견 가능해 보인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신이 그렇게 해놓았으니까’라는 대답도 가능하겠지만 라이프니츠의 신에 대한 요청과 신과 모나드들 간의 관계는 상당히 세련된 형태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모나드는 신의 모상이며 신은 모나드 안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있기 때문에 욕구와 운동을 유발할 수 있고, 그 운동들간에 나름대로 완전성의 정도에 따라 생기는 역학관계에 따라 상호작용이 가능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신의 관념 안에 가능한 우주의 무한성이 있지만 개별 모나드가 오직 그 하나만이 존재할 수 있듯 어떠한 모나드가 우주의 한 면을 반영하거나 어떠한 작용을 가한다면 그 반영과 작용이 바로 그러한 것이어야 하는 것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요청했다. 이에 대한 설명이 예정 조화이다. 예정 조화는 우주 속에서 사물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나 사물들간의 관계는 다른 모든 것과 조화를 이루게 프로그램 되어 있으며 본질적으로 우연적인 것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정 조화는 한 모나드의 내적 상태와 욕구에 작용한다. 전체 우주의 조화로움을 염두에 두면서 한 모나드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욕구는 결과적으로 욕구의 표상인 지각에 작용하여 조화로운 우주를 표상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식으로 예정 조화는 한 모나드가 영속적으로 살아있는 우주의 거울이 되도록 한다. 예정 조화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이미 있는 관계에 대한 해명일 뿐 아니라 모나드 사이의 관계가 말 그대로 조화로운 것이나 최선의 것이어야 함을 뜻하는 합목적적인 의미를 가지게 한다.
모나드의 지각은 최종 원인의 법칙, 욕구의 법칙에 따라서 다른 모나드에서부터 일어나며, 관찰되는 지각 속에 드러나는 외적인 현상은 그러한 법칙과 충분한 원인의 법칙, 즉 운동의 법칙에 따라서 다른 것에서부터 일어난다. 예정조화는 모나드들 간의 상호작용에 대한 구체적 기술이다. 신은 전체 우주를 조정하는데 있어 각 부분과 각 모나드를 고려하여 한 모나드가 사물들의 그 부분을 표상하도록 제한했다. 모나드들은 대상 속에서가 아니라 대상에 대한 앎의 형성 속에서 제한된다. 예정 조화 속에서 표상들은 전체를 향해 혼란스럽게 움직이지만 분명한 지각의 정도에 따라 서로 구별되고 제한된다. 이러한 예정 조화 속에서 복합체와 단순 실체, 그리고 각 모나드들간의 간접적인 소통이 가능하다. 예정조화는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수많은 모나드들이 전혀 서로 작용함이 없이, 그러나 현상적으로 서로 작용하는 것처럼 서로 조화되게 각자를 전개시키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또한 각 모나드들은 모나드와 결합된 몸과 물체까지도 표상한다. 모든 실체는 몸을 가진다고 했을 때, 모나드가 물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모나드는 영혼으로서 몸과 결합되어 생명체를 구성한다.

“ … 복합체들은 단순체들과 조화를 이룬다. 전체가 모든 물질이 묶여 있는 충만된 것인 것처럼, 충만된 것 안에서 모든 움직임은 거리에 따라 떨어져 있는 물체에 어떠한 영향을 주듯이, 각 물체는 단지 접촉하는 것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으며 어떠한 방식으로든 그것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감지할 뿐 아니라 곧장 접촉하게 되는 것을 그것에 의해 감지한다. 그 소통들은 존재하는 일정한 거리에까지 미치게 된다. 결과적으로 모든 물체는 현재에서 시간에 따라 공간에 따라 떨어진 것을 주목할 때, 모든 것을 봄이 도처에서 일어나는 것과 일어날 것을 각 물체 속에서 읽을 수 있는 만큼,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감지한다. 그러나 영혼은 자신에게서 거리적으로 표상되는 것을 오직 읽을 수 있을 뿐이고 한 번에 얽혀있는 모든 것을 전개하는 것은 그것들이 무한에로 나아가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따라서 각 창조된 모나드는 전체 우주를 표상하지만, 특히 모나드의 영향을 받는 물체를 더 분명하게 표상한다. 각 물체가 전체 우주를 표현하듯 영혼도 특별한 방식으로 우주에 속하는 물체를 표상하는데서 또한 전체 우주를 표상한다.
우주, 충만함 안에서 예정 조화에 따른 모든 물질의 연관에 의해 각 모나드는 우주를 표상한다. 여기서 모나드는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우주의 거울이면서 물리적 의미에서도 운동의 원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라이프니츠는 모든 존재자에게 엔텔레키를 적용했다. 무기적인 세계 또한 소박한 단자들과 결합되어 있으며 따라서 물리학적 현상 또한 단자의 욕구와 지각이라는 측면에서 이해 가능한 것이다.

2.4 간략한 함축과 평가
전술했듯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는 필연적으로 단절되어 있으며 고립된 세계이다. 그것은 겉이 거울로 되어 있는 밀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각자가 분투하는 가능자(The Striving Possibles)들인 모나드는 고립된 채로 각자의 완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필자는 앞에서의 검토를 통해 모나드 사이의 상호작용은 미리 예정되어 있는 가상일 뿐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명현이 본성상 불가능하기는 하지만 ‘창이 있는 모나드’를 현대 산업화 사회에서 일어나는 난제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했을 때, ‘창이 없는 모나드’로 이루어진 세계와 자아가 가지는 폐쇄적인 의사소통 구조의 한계 때문이었다. 한편 조성우는 소피스트들이 감각과 욕구의 ‘밀실’에 갇혀있음을, 그리고 라이프니츠는 반대로 이성의 ‘밀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음을 논구했다.
필자는 나름대로 동적인 세계를 구성한 면에서 라이프니츠에 대한 호감이 있음을 밝혔었다.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 체계에 있어 세상의 변화, 혹은 실체의 변화는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렇다면 세계 속에서 현상적으로 보여지는 변화는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필자가 나름대로 모나드와 같은 다수의 개별자로 변화를 설명할 수 있도록 구성해 본 모델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1) (개별자들의 이합집산 외에도) 개별자들간의 소통을 통해서 변화가 이루어지는 세계. 2) 개별자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거나 변화하지는 않지만 합성과 분해를 통해 변화가 일어나는 세계.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이 1)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의 모델이 2)에 가깝긴 하지만 이 부분은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 라이프니츠는 세상에 존재하는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는 개별 실체와 세계는 변화하는 개별 실체로 이루어진 복합체일 것을 요구했다. 개별 실체간의 인과적인 관계맺음은 불가능하다. 신이 자신의 능력 안에 지식과 의지를 가지듯 지각과 욕구를 갖는 모나드는 지각으로만 상호연관될 수 있을 뿐이다. 필자는 본 논문을 통해 사실 ‘창이 없는 모나드’간에 존재하는 일종의 ‘상호작용’의 가능성을 찾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 상호작용은 지각들 사이의 간접적인 것이었다. 하나의 거대한 실체에 속하는 속성들의 변용으로 변화를 설명하려 했던 스피노자와 비교할 때 각 개별자에게 능동성의 여지는 확보되었지만 이것으로는 아직 불만족스럽다.


Ⅲ. 결어

지금까지 라이프니츠가 구성한 형이상학적 체계 속에서 모나드들의 운동과 상호작용이 어떻게 설명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모나드엔 창이 없다’라는 널리 알려진 진술과 ‘무수히 많은 개별 실체인 모나드는 운동을 하며 능동성과 수동성을 갖는다’라는 서로 상충되어 보이는 두 진술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 속에서 모나드엔 창이 없지만 개별 실체들은 자신의 본성상 운동과 변화를 하고(완전성, 개별성 등과 관련하여), 모나드는 개별 실체의 내적 원리의 표상으로서 ‘지각’과 변화의 내적 원리로서 ‘욕구’를 가지며, 각 모나드가 가지는 지각은 우주의 거울로서 자신의 내부 뿐 아니라 다른 모나드와 우주 전체, 그리고 모나드와 결합된 물체까지 반영하고 있음을 논구하였다.
데카르트는 운동을 연장을 가진 물체들의 위치 이동으로 설명했으며 운동의 원인은 충돌 같이 기계적인 것으로 설명된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전통적인 스콜라 철학적인 내용들을 끄집어내어 운동과 상호작용을 설명했다. 모나드는 그것이 형상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나 중세 철학자들의 논의와 유사하며 사실 많은 부분을 그들에게 빚지고 있다. 그의 실체개념의 도출이나 운동에 대한 논의는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실체와 우연적인 것의 구분이 갖는 함축, 그리고 창조된 실체들의 움직임에 대한 설명도 그러하다. 그러나 엔텔레키에 대해 논리적인 설명을 하려 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그가 신이 운동을 일으킨 것을 단순하게 ‘신이 전지전능하기 때문에’라고 설명하지 않았으며 예정조화를 또한 ‘합목적’이라는 말로 간단히 넘어가지 않고 여러 논의를 통해 나름대로 도출한 것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겠다.
오히려 기계론이 승리를 거둔 현대에 있어 라이프니츠의 철학이 갖는 매력과 의미는 각별해 보인다. 필자의 무리한 간략한 평가도 이 때문이었다. 그가 기계론에 대해 당시로서는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라이프니츠가 움직임에 대해 형이상학적 이유로 설명하려 했던 것은 동시대의 기계적 자연 철학자들에 대한 반동이었다. 그는 전근대적인 방법(그러나 개량된)으로 근대적인 운동이론을 설명하려 했다.
근대와 전근대가 섞여 있음으로 인해 혼란스러울 수 있는 라이프니츠의 이러한 논의를 탈현대라 일컬어지는 지금에 있어 문화 분석의 맥락과 관련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형이상학을 통해 논했던 다원성(pluralism)과 움직임과 변화, 각자의 차이에 대한 강조는 탈현대주의자들의 주장과 닿아있으며 지각과 욕구, 무의식을 철학적 주제로 놓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이 가질 수 있는 생동감과 예언자적인 힘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해석과 비교할 때 더욱 부각되는 가벼움과 곡해의 위험 등은 충분히 곱씹어져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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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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