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 스피노자, 홉스와 루소- 유물론적 전통

 

- 마키아벨리 fortuna와 virtu

16세기 이탈리아는 열정적인 인민, 소국들의 분열, 외국의 점령과 약탈, 무질서한 반항으로 분열된 상태였지만 통일의 목적을 위해 그것들이 사이에 연결이 없는 원자화된 상태였다. 마키아벨리의 기획은 이탈리아의 어딘가에 자리잡기에 충분한 운(fortuna)과 능력(virtu)을 지니고 이 원자적인 한 점에서 시작하여 민족국가라는 통합을 이루어내는 것이다.

 

이 기획은 정치적으로 통합자의 이름과 통합이 이루어지기 시작할 지역의 이름을 공백으로 놓아두는 완전히 우발적인 추론이다. 이는 주사위들이 비워 있는 도박테이블에 던져지는 상황이다. 마키아벨리는 로마냐 지방에서 공국을 이루었고 로마로 진격하던 중 병사한 체자레에게 운과 능력이 마주치는 상황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키아벨리는 군주가 운을 맞이했을 때 군주는 그것을 유혹하거나 폭력을 가하기위해 그 운을 여자처럼 다루는 능력, 요컨대 자신의 운명을 실현하기 위해 그것을 이용하는 능력을 가져야한다고 했다.

 

우리는 이 점에서 마키아벨리에게 운과 능력의 마주침에 대한, 여우와 사자와의 마주침이라는 정치이론을 배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그 정치이론뿐아니라 예정된 어떤 것도 가정하지 않는 철학이다. 민족통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도 이 정치적 공백 속이다. 완성된 사실의 필연성에서 입각해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해야할 사실에 입각해서 사고하는 것이 공백의 철학, 마주침의 유물론의 흐름이다. 알투세는 마키아벨리가 왕정주의자였는지 공화주의자였는지는 훌륭한 계몽철학이 빠져드는 어리석음의 함정이라고 말한다.

-스피노자는 "어떤 사람들은 세계에서 시작하고 다른 사람들은 인간정신에서 시작하지만 나는 신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신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전체에서 시작하는 것, 나는 그 어느 것에서도 시작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에게 신은 자연일뿐이다. 그것은 무한한 수의 무한한 속성들을 갖추고 있는, 절대적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속성들이 수적으로 무한하고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 속성들의 실존에, 그리고 이 속성들의 우발적인 형상들에 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이 속성들이 평행하며 이 속성들에서는 모든 것이 평행의 효과라는 사실이 에피쿠로스의 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신체와 정신의(외연과 사유) 의 마주침이 없는, 결합이 없는 이 평행이 인간이다. 이 평행의 철학적 효과들은 신은 자연일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자연은 이 무한한 수의 평행하는 속성들의 무한한 총합이라는 사실이다. 철학은 더 이상 신에 대해 말할 일이 없도록 만들 뿐이다.

 

이 철학의 효과는 '인식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의 문제에 대해서도 더 이상 말할 일이 없도록 만든다. 사고는 사고라는 속성의 양태들의 잇달음(suite)일 뿐이며, 사고는 하나의 주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 저 평행 속에서, 연장이라는 속성들의 양태들의 잇달음을 가리킨다. 신과 인식이론이 일단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환원된 후에 철학에 남는 것은 목적이나 기원이 없는 철학 그 자체인 공백이다.

-계약론과 우발적 유물론

홉스는 자연상태는 만인과 만인의 투쟁이며 모든 사회는 이 두려움 위에서 세워져 있다고 가정한다. 자연상태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기 위해 이 자연상태를 그 구성요소들로 분해하기 위해 "사회의 원자들"에 까지 도달한다. 코나투스(conatus, 힘쓰다의 명사형,에너지)를 타고난, 자신의 존재를 집요하게 유지하려는 권력과 의지, 그리고 자신들의 자유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자기 앞을 비워두려는 권력 및 의지를 타고난 개인들이 이 사회의 원자들이다. 원자화한 개인들, 그들의 운동의 조건으로서의 공백은 개인을 존재하게하는 힘을 이루는 자유가, 자신의 정복적 힘앞의 "장애의 공백", "장애의 부재" 속에 들어있다고 주장한다.

 

이 개인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에 자신을 맡기지 않으며, 곧바로 행진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장애를 피하려는 의지에 의해서만 그렇게 한다(원자들의 자유롭고 평행하는 낙하를 연상시킨다). 비어있는 세계안에 마주치지 않는다면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세계는 꽉 차 있다는 것이다.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들, 자신의 코나투스에 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서로 맞서고, 서로 죽음을 주는 것 밖에 다른 수단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계산에 의해 어떤 반대급부도 없이 그들의 모든 권리(자연권)를 위양하게 될 자, 즉 리바이어던의 전능한 권력에 저항하지 않을 것을(원자론적 개인들로서) 서로 약속한다.

 

알투세는 홉스의 리바이어던 구상이 비난받아 마땅한 괴물이 아니며, 그의 야망은 당시의 있는 그대로의 세계, 그의 세계의 생존능력의 조건들과 발전의 조건들에 잘 복무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홉스의 사고 속에서 원자화된 개인들에 대한 파악은 엄격성을 지니고 있지 않지만 세계의 우발적 구성이라는 결과에 도달한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인간불평등기원론}에서 루소의 자연상태는 모든 거의 근본적 기원이 "순수 자연의 상태"와, 순수상태들에 각인된 수정들(modification)에 이어 나오는 "자연상태"로 구분된다. 마주침이 없는 순수자연은 텅빈 무한한 삼림속으로 자기 길을 가는 것으로 에피쿠로스의 허공과 대등한 것이다. 이로써 루소는 모든 사회의 가능성의 조건에 앞서는 '사회의 무'를 형상화 하는 데 성공한다. 그

 

다음 순서는 순수자연상황에 마주침의 상태가 부과되어야 하는 것이다. 공간의 세분화한 축소와 자연재앙들이 실제로 지속되는 마주침과 연합에 들도록 강제하고, 인간들사이에는 사회적 관계인 강제적 관계들이 발전한다. 시간이 누적됨에 따라 강제된 접촉들이 인간들사이에 언어, 감정, 애정관계 또는 투쟁을 산출하고 끝내 전쟁을 산출할 때까지 장기에 걸친 완만한 변증법이 개입된다. 사회가 탄생하고 전쟁 역시 탄생한다. 사회화한 인간본성을 산출하는 축적 및 변화의 과정이 전개된다.

 

우리는 인간들을 서로 접근시키는 자신의 법칙을 부여하지 않는다면, 이 마주침은 전혀 지속되지 않을 것임에 주목해야한다. 루소의 이 글에서는 부당한 계약에 대한 이론, 즉 가장 교활하고 힘센 자들의 거만에 의해 약한 자들의 복종과 함께 묵인되는 힘의 계약이론으로 끝맺는 -그리고 자신의 진정한 의미를 사회계약에 고정시키는 - 이 모든 배치들의 효과들이 충분하게 성찰되지는 못했다. 다만 저 자연상태로 재추락하는 파멸의 위협아래에서만 체결되고 존속된다는 주장이다. 이 사회상태는 요컨대 형태를 취한 마주침, 필연적이게 된, 그러나 마주침 없음의 우발성과 마주침 없음의 형태들의 우발성의 토대-여기서는 계약이 한 순간에 재추락할 수 있다.-위에서 필연적이게 된 형태를 취한 마주침이다.

 

따라서 사회계약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정당한 사회이든 부당한 형태의 사회이든 모든 사회의 내재적 법칙으로 존재하게 되며, 문제는 어떻게 부당한 형태를 정당한 형태로 교정하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정당한 형태는 결국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현존하는 구체적인 형태들, 스피노자가 말하는 "개별적 본질들"이란 모든 조건의 선험적 조건, 다시 말해 모든 역사의 선험적 조건으로서 상정해야하는 개인들, 정세들, 현실의 국가들 또는 그 인민들이어야한다. 여기서 필연성의 우연성을 우연성의 필연성으로 사고하는 루소의 역사이론의 관점이 드러난다.

 

필연성의 우연성과 우연성의 필연성은 당혹스러운 대쌍(couple)이다. 이 대쌍의 직관은 18세기 프랑스 대혁명의 거역할 수 없는 충격에 이끌려 그것에 대해 문을 활짝 연 그 목적론들을 거부한다. "역사의 목적"이라는 질문이 제기될 때, 동일한 진영 안에서 에피쿠로스와 스피노자, 루소가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동일한 '마주침의 유물론'이라는 토대 또는 '정세의 사고'라는 토대에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마르크스도 이러한 면이 있지만, 그러나 마르크스는 '마주침의 우발성'과 '혁명의 필연성'으로 분열된 지평안에서 사고하도록 강제되고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실체·자연·신 (에티카 제 1부를 중심으로)     박 상 욱(서양철학 석사과정)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기하학적 방법론을 따르면서 서술되어 있다. <에티카>는 5가지 주제로 나뉘어지는데, 각 장은 공리(公理)와 정의(定義)로 시작되고, 그 다음에 나오는 명제들은 공리와 정의, 그리고 앞선 명제들에 의거하고 증명된다. 이런 독특한 방식을 통하여 스피노자는 보다 명확하고 분명하게 자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보여줄려고 의도하였다.


 에티가의 제 1 부는 "신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스피노자가 말하고 있는 신의 정의는 전통적인 신의 관념과는 거리가 멀다. 스피노자 말하고 있는 신은 자연, 실체1)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실체의 정의는, 그것이 존재하기 위하여 다른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데카르트의 실체 정의(독립적인 존재의 개념)를 따르고 있지만, 그 의미는 데카르트와 전혀 다르다. 데카르트는 실체를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정신을 사유하는 실체로, 물질을 연장된 실체로 구별하였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물체와 인간의 정신은 피창조자요, 따라서 서로 관계하기 때문에 물체와 인간의 정신은 실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2) 물체와 인간의 정신은 존재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들의 생성과 관계맺음은 여러 가지 조건의 제약을 받는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실체가 아니라 양태3)인 것이다. 즉 그것들은 실체의 양태이다. 세상에는 오직 하나만의 실체가 존재할 수 있다고 스피노자는 생각하였다. 동일한 속성을 가진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실체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같은 속성을 가진 두 개의 사물은 서로 상대편에게 제약을 가하기 때문이다. 실체는 의존적이지도 않고 다른 실체에게 제약 또한 가할 수 없다.
 

실체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이외이 것으로부터 생길 수 없는 까닭에, 실체는 오직 하나밖에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그 자체 이외의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제한을 받을 수 없다. 그리고 실체는 반드시 무한한 종류의 속성4)을 가지고 있으며, 그 속성의 하나 하나는 실체의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나타내고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반드시 저 유일한 실체이거나 또는 그 유일한 실체의 양태이다. 신 이외의 다른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실체가 존재한다면 그 실체는 어던 속성을 가질 것인데, 이것들은 신의 속성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절대로 성립될 수 없다.5)
 

정리 11에서 스피노자는 신 혹은 무한한 속성을 가진 실체가 존재하며 더구나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정리는 앞의 정리(정리7)를 다시 언급한 것이다. 스피노자의 신 존재 증명은 (1) 신을 생각하는 것은 실체를 생각하는 것이다. (2) 존재는 실체의 본질에 속한다. 그러므로 (3)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이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자기 모순을 포함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6)
 

스피노자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실체에 관한 관념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였고, 즉 그는 실체의 본질은 그 존재를 필연적으로 포함한다고 보았다. 자연은 어떤 의미로는 항상 일정 불변하며, 또 다른 의미로는 끊임없이 변동한다. 스피노자는 이 두가지 의미의 뜻을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이라고 정의하였다. 첫째로 능산적 자연은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자연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모든 사물을 생기게 하는 그러나 일정하고 한결같으며 항구적인 것이다. 능산적 작용은 항상 영원 불변하는 원칙을 따라서 발동한다. 그러나 소산적 자연은 피동적이고 일정한 순간에만 존재하는 자연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잠시 생겼다고 없어지는 사물의 상태이다. 능산적 자연에는 절대로 변화가 없고 소산적 자연에는 끊임없는 변화가 있다.
 

<에티카> 제 1부에 나타난 서른 여섯 개의 명제는 왜 스피노자가 자연과 실체와 신의 세 술어를 같은 뜻으로 쓰게 되었는가를 알려주는 것이다.


1)  실체(實體; substance)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그 자체를 통하여 이해되는 것, 다시 말하면 그것의 개념이 그것의 근거가 되는 다른 어떤 존재의 개념을 요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2)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실체에 대해서 실체란 독립적인 것으로 서로 관계할 수 없으며 실체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실체를 유한실체와 무한실체 두 가지로 나누었고 두 실체가 서로 관계맺고 있다고 함으로써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생각을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였다. 
3)  양태(樣態; mode)란 실체의 변용, 다시 말하면 다른 무엇에 의존해 있으며, 그 다른 무엇을 통해서 이해되는 것을 말한다.
4)  속성(屬性; attribute)이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지성이 지각하는 것이다.
5)  스피노자는 제 1 부 정리.14에서 " 신 이외에 어떠한 실체도 인정되거나 생가될 수 없으며" 따라서 정리.15에서 "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신 안에 있다"라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6) 「근대철학사」R.사하트 정영기, 최학봉(易) 出:서광사 111p 22-29인용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Johnathan Swift (1667-1745)/걸리버 여행기(Gulliver's Travels, 1726)

1. 영국

1667 밀턴(Milton)의 <실락원 (Paradise Lost)>이 출판됨.
1672-3 신교 자유를 부여하려는 왕의 두 번째 시도 실패.
1672-4 Third Dutch War.
1674 곡물 하사금 (Grain bounties)이 도입됨(영국은 식량 자급자족).
1678 Titus Oates and the Popish Plot; 번연(Buyan)의 <천로역정 ((Pilgrim's Progress)>의 1부가 출판됨.
1679-81 휘그당(Whig)과 토리당(Tory)당의 출현.
1683 The Rye House Plot.
1685 찰스 2세 (Charles II) 사망. 제임스 2세(James II)의 승계; 찰스 2세 (Charles II)의 서자 먼모스(Monmuth)의 반란 실패.
1687 제임스 2세 (James II)의 신교자유령 선언 (Declaration of Indulgence); 뉴튼(Newton)의 Principia Mathematica가 출판됨.
1688 제임스 2세 (James II)의 아들 출생.
1688 윌리엄 오렌지 (William Orange)의 침공; 제임스 2세(James II) 사망. 윌리암 3 세 (William III)와 메리(Mary)가 계승.
1689 신교자유령 (Toleration of Act).
1690 보인 전투(Battle of the Boyne); 윌리암 3세(William III)가 아일랜드와 프랑스 군대를 격퇴.
1694 잉글랜드 은행 (Bank of England)이 창립; 메리 여왕(Queen of Mary) 사망.

1695 Licensing Act의 폐지
1697 아우스부르그(Augsburg) 동맹국과 프랑스와의 리스윅(Lyswick) 평화조약 체결; CivilList Act는 왕실의 살림을 꾸려갈 기금 마련을 위해 투표를 실시함.

1701년 영국에서‘왕위계승법’성립, 국왕은 프로테스탄트로 한정. 프로이센 왕국 성립. 
       부르봉왕가의 에스파냐 왕위계승에 반대, 영국˙네덜란드˙오스트리아가 하그동맹
       (對프랑스동맹)을 맺고 싸움. 
1702년 북아메리카에서 앤여왕(女王)전쟁(~1713) 벌어짐.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 쟁탈.
1703년 미쉬엔조약 성립. 영국이 포르투갈 시장을 독점. 

1704년 브렌하임의 전쟁(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 오스트리아와 영국군이 프랑스군과 싸워 이김.

1705년 버킹검궁전 건설

1707년 대(大)브리튼왕국 성립.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병합.
1713년 영국이 프랑스로부터 뉴펀들랜드˙노바스코샤 등을 얻어냄. 
1714년 영국에서 하노버왕조 성립(1917년 이후 윈저家). 
1717년 영국 프랑스 넥덜란드 3국동맹-에스파냐,스웨덴에 대항

1718년 에스파냐와 전쟁(-1720)

1719년 로빈슨크루소 표류기

1721년 런던에 천연두 유행

1724년 헨델 [율리우스 시저]

1726년 스위프트[걸리버 여행기]

 

2. 서양사

1667년 브레타조약 체결로 영국-네덜란드 간 강화. 뉴욕이 정식으로 영국령이 됨.
1668년 아헨조약 체결. 루이 14세 벨기에 일부를 영유, 그 밖의 침략지는 에스파냐에 반환.
1672년 제3차 영국-네덜란드 침략전쟁(~1674). 루이 14세의 네덜란드 침략전쟁(~1678).오라니에공(公) 빌렘 3세 네덜란드 통령(統領)이 되어 프랑스군의 침공을 방어.
1673년 영국에서‘심사율(審査律)’제정으로, 비국교도들 중앙 관직에서 추방. 독일과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가(家), 네덜란드전쟁에 참가, 루이 14세와 대항.
1678년 나이메헨의 화약(和約) 성립. 네덜란드전쟁 종결.
1679년 영국에서‘인신보호법’성립. 영국에서 휘그당˙토리당 활동, 양당제가 정립. 뉴햄프셔에 식민지 건설.
1681년 윌리엄 펜에 의해 펜실베이니아 식민지 건설.
1682년 러시아에서 표트르 1세(대제) 즉위(~1725). 이복 누이 소피아의 섭정(攝政) 지속(~1689).필라델피아 건설. 라살, 미시시피강을 탐사.
1684년 버뮤다가 영국의 식민지가 됨.
1686년 아우크스부르크동맹 성립. 독일의 황제, 여러 연방의 군주 및 덴마크 이외의 유럽 제국이 대(對)프랑스동맹을 체결.
1687년 영국 국왕 제임스 2세, 신앙자유를 선포.
       오스트리아가 터키로부터 헝가리를 탈환, 헝가리 왕위가 합스부르크가에 의해 세습.
       뉴턴의 ‘만유인력’.
1688년 영국에서 명예혁명 성공, 제임스 2세 망명. ‘권리장전’ 발표.
1689년 영국 오라니에공(公) 빌렘(윌리엄 3세:~1702)과 왕후 메리(~1694)가 즉위.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전쟁인 팔츠 전쟁(~1697) 시작.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의 친정 시작.
1690년 로크의 《인간오성론(人間悟性論)》.
1695년 카를로비치의 화약(和約) 성립. 터키가 오스트리아˙폴란드˙베네치아 등과 강화 체결.
1700년 북방전쟁 시작(~1721). 나르바싸움에서 러시아군이 스웨덴군에게 패퇴.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왕가 단절. 부르봉가(家)가 왕위 계승.
       루이 14세의 손자 펠리페 5세 즉위.
1701년 영국에서‘왕위계승법’성립, 국왕은 프로테스탄트로 한정. 프로이센 왕국 성립.
       브란덴부르크 선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1세:~1713)가 황제로부터 왕호(王號)를 받음.
       호엔촐레른왕조(~1918) 시작. 에스파냐 계승전쟁(~1714).
       부르봉왕가의 에스파냐 왕위계승에 반대, 영국˙네덜란드˙오스트리아가 하그동맹
       (對프랑스동맹)을 맺고 싸움. 
1702년 북아메리카에서 앤여왕(女王)전쟁(~1713) 벌어짐.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 쟁탈.
1703년 미쉬엔조약 성립. 영국이 포르투갈 시장을 독점.
       포르투갈이 대(對)프랑스동맹(하그동맹)에 참가.
1704년 브렌하임의 전쟁(에스파냐 왕위계승전쟁). 오스트리아와 영국군이 프랑스군과 싸워 이김.헝가리에서 라코치의 독립운동 일어남(~1711).
1706년 러시아가 캄차카반도의 완전 점유권 획득.
1707년 대(大)브리튼왕국 성립.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병합.
1708년 러시아 표트르 1세의 개혁 시작.
1709년 볼다바의 싸움 벌어짐. 러시아 표트르 1세가 스웨덴왕 칼 12세와 싸워 이기고,칼은 터키로 망명(북방전쟁).
1711년 러시아에서 최고통치기관인 세나토(원로원) 창설됨. 귀족회의는 폐지.
1713년 위트레흐트조약 체결. 펠리페 5세의 왕위를 승인.
    영국이 프랑스로부터 뉴펀들랜드 노바스코샤 등을 얻어냄. 
    독일 황제카를 6세의‘국본조칙(國本詔勅) 나와,오스트리아 영토의 불분할 여자상속권등을 규정.
1714년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라슈타드조약 체결. 에스파냐 계승전쟁 끝남.
       영국에서 하노버왕조 성립(1917년 이후 윈저家).
       러시아 표트르 1세 핀란드 침입, 발트해 제해권 장악(북방전쟁).
1715년 프랑스왕 루이 14세 사망(재위, 1643~).
1718년 파사로비츠조약 체결. 터키가 헝가리의 나머지 영토 및 세르비아 왈라키아를 오스트리아    에 할양. 동 프로이센 왕의 영지에서 농노제를 폐지.
1720년 사르데냐왕국 성립. 사보이공(公)이 시칠리아와 교환 조건으로 사르데냐를 획득, 왕국을 성립하고 왕이 됨.
       에스파냐 식민지의 엥코미엔다제(制) 폐지되고, 아시엔다제 성립되기 시작.
1721년 니스타트조약. 북방전쟁(1700~) 종결.
       러시아가 발트해로 진출. 러시아 정교회, 총주교좌제 폐지하고 시노드(宗務廳)를 설치.
1722년 러시아 표트르 1세가 관등제(官等制)를 제정하고, 제위계승법을 공포.
1725년 표트르 1세 사망(재위 1682~). 베링, 베링해협 발견(~1730).
1726년 러시아에서 최고추밀원 창설되어 귀족의 과두정치 시작(~17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6세기로부터 18세기에 걸쳐 유럽의 주요 국가들은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절대주의 국가를 형성하고, 국가발전과 해외진출을 꾀하였다. 경제가 발전하고 시민계급도 성장하였으나, 정치는 전제정치이고, 봉건적 잔재가 남아 있었다. 17세기는 궁정을 중심으로 바로크문화가 꽃피고, 18세기에는 시민사회를 지향하는 사상이 대두하였다.

 

 1) 유럽의 절대 왕정(봉건적 잔재 남아 있음)

  ① 절대주의―왕권을 중심으로 한 국가 통일과 행정,사법,군사면에서 중앙집권이 달성된 근대 초기 국가 형태로서 관료제와 상비군에 의해 전 영토에 국가권력을 효과적으로   행사하는  체제.(프랑스가 모델)

   ·성립 : 봉건 제후 세력 약화─국왕에 의한 중앙 집권 강화, 

             신항로의 개척 이래 상권의 세계적 확대─식민 활동을 위한 국내 통일 희망

   ·정책 : 왕권 신수설,  상비군과 관료 제도,  중상주의(重商主義) 정책

   ·중상주의 정책:

      ㉠ 목적─국왕의 상비군, 관료 유지비 필요    

      ㉡ 방법─수출의 촉진과 수입의 제한(보호 관세 → 국내산업의 보호,육성)

      ㉢ 결과─식민지획득 경쟁, 열강간 영토전쟁, 상공업발전 → 시민계급 성장 → 정치참여 요구

  ② 에스파냐 : 15-16세기(전성기)

   ·서 유럽 최초의 절대 왕정

   ·세계 제국 형성(펠리페2세) : 레판토 해전─지중해 패권 장악, 포르투갈 합병

   ·쇠퇴: 궁정의 낭비, 귀족과 성직자에게 부가 집중, 에스파냐왕위 계승전쟁, 네덜란드 독립─영국에게 무적함대가 패배(1588)

   ③ 네덜란드 : 17세기 전반(전성기)  

   ·독립: 상업과 모직물 공업의 발달→칼뱅파의 확대→펠리페2세의 박해 →독립선언(1581)→베스트팔렌 조약(1648)─독립 승인

   ·의의: 신교도의 승리, 절대왕정에 대한 시민 혁명의 선구적 역할

   ·번영: 동인도 회사 설립─아시아에 진출, 아메리카 대륙과의 중계무역국으로 번영

   ·쇠퇴: 영국 크롬웰의 항해조례 발표(1651)로 경제 타격,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배

   ④ 프랑스의 절대왕정 : 17세기 후반(전성기)

   ·앙리 4세: 위그노 전쟁을 수습하여 절대 왕정의 토대 마련

   ·루이 13세: 재상 리셜리외 등용― 귀족 세력 누르고 왕권 강화, 30년 전쟁 개입

   ·루이 14세: 마자랭─귀족의 프롱드 난 진압, 30년 전쟁 유리하게 종식

                    →왕권 강화, 콜베르─ 중상주의 정책

   ·절대주의의 동요: 무리한 침략전쟁으로 국력 소모와 재정 궁핍,

                              낭트칙령 철폐─위그노 출신의 상공업자 해외 망명 → 산업에 타격

  ⑤ 영국의 절대 왕정: 17세기 후반 프랑스와 경쟁 → 18세기 후반 최종적 승리

   ·헨리 7세에 의한 튜더 왕조의 개창으로 발전

   ·엘리자베스1세: 통일령 반포로 영국 국교회 확립, 에스파냐의 무적 함대 격파 → 해상권 장악,

                           동인도 회사 설립 → 인도 지배 발판 마련, 셰익스피어-국민문학의 발전

  ◈ 계몽 전제 군주─동유럽은 재판농노제와 같은 보수반동으로 시민계급 성장이 미흡해 계몽으로 포장한 전제군주가 등장- 프리드리히2세, 요제프2세, 예카테리나 여제: 위로부터의 개혁, 전제권력을 위한 개혁 실시

  ①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2세(1740-1786)

   ·절대 왕정의 전성기, 신앙 자유 인정, 근대 산업 육성, 농민 보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슐레지엔 획득, 7년 전쟁─국력 증대

       ※ 대토지 소유 귀족인 융커의 횡포 : 부역 노동의 강화로 시민 계급 성장의 지연

  ② 오스트리아: 요제프 2세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으로 영토 상실,  

      요제프 2세의 개혁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

  ③ 러시아의 성장: 표트르 대제(1682-1725), 에카테리나 여제

   ·표트르 대제: 유럽화, 대내적─군대 정비, 농노제 강화, 산업 진흥,

                       대외적─시베리아 경영(네르친스크 조약), 북방 전쟁→발트해 출구 확보

   ·예카테리나 2세: 계몽 군주, 농노제 강화, 시베리아 개발 추진, 크림반도와 흑해진출

  ④ 폴란드의 분할: 1-3차 분할

 

 2) 17·18세기의 문화

  ① 문화의 성격

   ·군주, 귀족, 부유한 시민층에 의해 보호 장려된 문화→절대주의 체제를 벗어나지 못함

   ·계몽 사상이 확산→시민 혁명의 이념적 바탕이 마련됨

   ·경제적으로 자유방임주의 사상 등장→유럽의 근대적 발전을 준비하는 과도기적 성격

  ② 예술과 문학

   ·미술: ㉠ 바로크 식(17세기)─절대주의 찬미, 호화롭고 웅장함(건축: 베르사유 궁전)

          ㉡ 로코코 식(18세기)─섬세하고 우아함(건축: 상수시 궁전, 회화: 와토)

          ㉢ 시민 계층의 성장에 따른 시민 생활에 대한 사실적 묘사

   ·음악: 바로크 음악─궁정과 결탁됨   바흐,헨델─독일 근대음악 기초   모차르트

   ·문학: 고전주의, 국민주의─밀턴, 스위프트, 괴테, 실러 등

  ③ 과학과 철학

   ·과학: 전통적 세계관을 변혁시켜 자연과학적 세계관 실증―뉴턴 등

   ·철학: 경험주의 철학─(베이컨→로크, 흄), 합리주의 철학─ (데카르트→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경험론과 합리론의 종합, 비판철학의 완성으로 독일 관념론의 기초를 완성

④ 정치·경제 사상 

시대

정치 사상

경제 사상

17세기

 왕권신수설: 보댕, 보쉬에

중상주의

18세기

 자연법사상

 크로티우스: 국제법 사상

자유방임주의

 ㉠고전경제학파: 아담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중농주의: 튀네. 케르고

 홉스의 사회계약설: 양도설-절대군주권 옹호

 로크의 사회계약설: 위탁설-명예혁명 정당화, 미국혁명에 영향

 계몽사상: 이성과 진보 확신,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사회계약설-주권재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646. 7. 1 (구력 6. 21) 라이프치히~1716. 11. 14 하노버.

독일의 철학자·수학자·정치고문.

탁월한 형이상학자이자 논리학자로서 미·적분의 독창적 발명으로 유명하다.

초기생애와 교육

독일을 폐허로 만든 30년전쟁이 끝날 무렵, 독실한 루터교도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니콜라이 학교에서 교육받았으나 대부분 아버지(1652 죽음)의 장서로 독학했다. 1661년 부활절 학기에 라이프치히대학교에 들어가 법학을 공부하면서 갈릴레오, 프랜시스 베이컨, 토머스 홉스, 르네 데카르트 등 과학과 철학을 혁명적으로 발전시킨 사람들의 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라이프니츠는 일생 동안 이 근대 사상가들과 스콜라주의화한 아리스토텔레스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했다. 1663년 5월에 나온 학사학위 논문 〈개체의 원리 De Principio Individui〉는 루터의 유명론(唯名論 : 보편은 실재가 아니라 단지 이름에 불과하다는 이론)에서 어느 정도 영감을 받은 글로 개체의 존재가치를 형식이나 질료 중 어느 하나가 아니라 전체존재(entitate tota)로 설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전체존재라는 개념은 뒤에 나온 '단자'(單子 monad) 개념의 첫 싹이었다. 1666년 〈결합법 De Arte Combinatoria〉에서는 문자로 표현하든 표현하지 않든 모든 추론과 모든 발견을 수·단어·소리·색과 같은 요소들의 질서있는 결합으로 환원하는 방법을 제시하여 현대 컴퓨터의 이론적 선구가 된 모형을 정식화했다. 1666년 정규과정을 끝낸 뒤 법학 박사학위를 신청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거절당해 결국 고향을 영원히 떠났다. 자유도시 뉘른베르크의 알트도르프대학교에서 〈까다로운 문제 De Casibus Perplexis〉로 박사학위를 받고 뒤이어 교수직도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 뉘른베르크에 머물면서 당시 가장 유명한 독일 정치가인 보이네부르크 남작 요한 크리스티안을 만났다. 보이네부르크는 라이프니츠를 고용하여 마인츠의 선제후(選帝侯)이자 대주교인 요한 필리프 폰 쇤보른에게 소개했고,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법률과 정치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차츰 독일 신성 로마 제국을 위협하자, 이러한 위험을 방지하고 그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대주교 필리프는 루이 14세에게 이집트 원정계획을 제안하려 했다. 필리프는 종교를 구실로 삼았기 때문에 이 원정계획이 교회의 재통합을 앞당길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라이프니츠는 교회의 재통합을 지지하기 위해 〈가톨릭 논증 Demonstrationes Catholicae〉을 썼다. 이 연구로 라이프니츠는 단자론으로 가는 새로운 발전경로가 된 영혼의 위치를 한 점으로 보는 관점을 세웠고, 충족이유율(充足理由律 : 어떤 것도 이유없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법칙)을 전개했다. 나아가 이 난해한 점이론을 다루면서 그의 사고는 광학·공간·운동 문제로 이어져 1671년 〈새로운 물리학의 가설 Hypothesis Physica Nova〉을 출판했다. 라이프니츠는 독일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운동은 정신(신)의 행위에 의존한다고 주장했다. 1672년 3월말 라이프니츠는 선제후가 파견한 외교관 자격으로 파리에 갔다. 그해 9월 라이프니츠는 예수회를 반대하는 글로 유명한 얀센주의(수많은 엄격한 도덕 형식을 만들어내는 비정통 로마 가톨릭 운동) 신학자 앙투안 아르노를 만나 교회 재통합을 위해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1672년 12월 보이네부르크 남작이 죽고 1673년 2월 마인츠 선제후가 사망하자 후원자를 잃고 곧 파리를 떠났다. 대신 이제는 자유롭게 자신의 학문을 연구할 수 있었다. 재정적 도움을 얻기 위해 계산기를 발명하여 1673년 처음으로 런던을 여행하던 도중 왕립학회에 기증했다.

 

1675년말 라이프니츠는 적분과 미분의 기초를 세웠다. 이 발견으로 시간과 공간을 실체로 보지 않게 된 것은 단자론으로 가는 또 하나의 단계였다. 라이프니츠는 연장(延長)과 운동 개념은 상상의 요소를 포함하기 때문에 운동의 기본법칙은 단순히 그 성질을 연구함으로써는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계속해서 연장과 운동은 현상의 진행과정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방법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와 달리 이 세계가 잘 연결된 꿈이라는 가정은 터무니없는 말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만약 눈에 보이는 운동이 연장 개념 속에 있는 상상적 요소에 의존한다면 운동은 더 이상 단순한 위치운동으로 정의할 수 없으며 틀림없이 힘의 결과이다. 역학으로 알려진 데카르트의 운동법칙을 비판하면서 라이프니츠는 1676년 운동보존을 운동에너지로 대체하는 동역학이라는 분야의 새로운 정식을 만들었다. 동시에 빛은 저항을 가장 적게 받는 경로를 따라간다는 원리에 입각하여 최종목적이나 원인을 지향하는 자연의 질서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노버 시절

일정한 수입도 없이 연구에만 몰두하다가 1676년 10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요한 프리드리히에게 일자리를 얻었다. 요한 프리드리히는 1651년 루터교에서 가톨릭교로 개종한 자로서 1665년 하노버 공작이 되었다. 라이프니츠는 사서직을 얻었으나 1677년 2월초부터 고문관 자리를 간청하여 마침내 1678년 고문관이 되었다. 라이프니츠가 당대의 위대한 철학자 가운데 생계비를 벌어야 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라이프니츠는 왕족에게는 항상 만물박사였다.

 

모든 방면에서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 라이프니츠는 교육이 더욱 실용적이어야 하고 아카데미를 설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수력압착기·풍차·램프·잠수함·시계 등 갖가지 기계장치들을 연구했고, 완벽한 수송수단을 고안하여 인(燐)으로 실험을 하기도 했다. 또 풍차로 작동하는 물 펌프를 개발하여 하르츠 산맥의 광산개발을 개선했고 1680~85년에는 이 광산에서 여러 번 기술자로 일했다. 라이프니츠는 최초의 지구가 용해상태였다는 가설을 제시하는 등 그곳에서 많은 관찰자료를 수집한 덕분에 지질학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라이프니츠는 이처럼 다양한 직업을 가지면서도 수학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아 1679년 3월 2진법 체계를 완성했고, 그해말에는 오늘날 일반 위상수학(位相數學 : 일정한 물리적 요소 또는 추상적 요소들로 이루어진 집합의 선택적 속성을 다루는 수학의 한 분야)으로 알려진 위상분석의 기초를 제시했다. 역학과 철학 연구도 계속하여 그의 철학은 점차 반(反)데카르트주의로 나아갔다. 이즈음에 1680년 1월 7일 요한 프리드리히 공작이 죽고 동생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1세가 그 직위를 계승했다.

 

1680~82년 프랑스에서는 낭트칙령 폐지(1685. 10. 18)의 길을 연 프로테스탄트 박해의 심화로 극심한 내부혼란이 일자, 루이 14세는 평화적인 분위기를 깨고 1681년에 이미 스트라스부르를 점령하고 알자스 지방의 10개 도시에 대한 영유권을 요구하는 등 차츰 국경을 넘보기 시작했다. 당시 헝가리 폭동과 투르크의 진격으로 이미 동부지역이 어지러운 상황에 있던 독일 제국에게 프랑스는 실질적인 위험세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라이프니츠는 군주와 제국에 충성하면서 군주에게 린네르의 생산증가 방법과 물의 염분제거 과정을 제시했고, 문서의 분류를 권고했으며 루이 14세에 대항하는 격문을 프랑스어와 라틴어로 썼다. 이 기간에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형이상학 체계를 계속 완성시켜 나갔으며, 이를 위해 모든 존재의 보편적 원인 개념을 연구하여 모든 추론을 사고의 대수학으로 환원할 수 있는 출발점을 제시하려 했다. 또 수학을 계속 발전시켜 1681년에는 원과 외접 4각형 사이의 비례관계를, 1684년에는 고체의 저항을 연구했다. 같은 해 미분 해설서 〈극대·극소를 위한 새로운 방법 Nova Methodus pro Maximis et Minimis〉(1684)을 출판했다.

 

이 무렵에 나온 유명한 저서 〈인식·진리·관념에 관한 성찰 Meditationes de Cognitione, Veritate et Ideis〉에는 그의 인식론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니콜라 말브랑슈가 제시했듯이 사물은 신(神) 안에서는 볼 수 없고 오히려 신의 관념과 인간의 관념 사이에는 엄밀한 관계인 유비(類比)가 있으며, 신의 논리와 인간의 논리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1686년 2월 라이프니츠는 〈형이상학 서설 Discours de métaphysique〉을 썼으며, 〈악타 Acta〉 3월호에 〈자연법칙에 관하여 데카르트 및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중대한 오류에 대한 간략한 논증 Brevis Demonstratio Erroris Memorabilis Cartesii et Aliorum Circa Legem Naturae〉이라는 논문을 기고하여 자신의 동역학을 소개했다. 1686년 더욱 발전된 견해를 담은 책을 1권 썼으나, 이 책은 오랫동안 출판되지 않았다. 이 책에서 라이프니츠는 필연적이든 우연적이든 모든 참인 긍정명제에서 술어는 주어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주장을 일반화했다. 이때에는 그의 단자론이 '단자'라는 단어(1695년에 등장)를 사용하지 않은 채 정의되었다고 할 수 있다.

 

1685년 라이프니츠는 브라운슈바이크가(家)의 사가(史家) 곧 '호프라트'(Hofrat : 궁정고문관)에 임명되었다. 그의 임무는 계보(系譜) 연구를 통해 브라운슈바이크가가 이탈리아 왕가인 에스테가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하노버가 9번째 선제후임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1687년 11월 라이프니츠는 자료를 구하기 위해 두루 여행했다. 독일 남부를 거쳐 오스트리아에 도착하여 루이 14세가 다시 전쟁상태를 선포했음을 듣고, 빈에서 황제의 환대를 받은 뒤 이탈리아로 갔다. 가는 곳마다 과학자들을 만나 학문연구를 계속하여 천체운동과 물체의 지속성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1690년 7월 중순 하노버로 돌아왔으며 그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1692년 10월 선제후가 되었다.

 

라이프니츠는 죽을 때까지 사가로서 계속 일했다. 그러나 브라운슈바이크가의 계보 연구에만 매달리지 않고 지질학적 사건, 화석 기록 등을 포함한 지구의 역사까지 연구목표를 넓혔다. 유적(遺蹟)과 언어학을 이용하여 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연구하고, 나아가 과학·윤리학·정치학의 출현과 발전과정, 천골사(薦骨史 historia sacra)의 기초 등을 연구했다. 이렇게 보편사를 계획하면서 라이프니츠는 만물이 서로 맞물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비록 보편사를 서술하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과거의 관념들을 새롭게 결합시키는 방법을 고안하여 완전히 새로운 관념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의 노력은 큰 영향을 미쳤다.

 

1691년 라이프니츠는 볼펜뷔텔에서 사서로 임명되었으며, 여러 과학잡지에 논문을 기고하여 자신의 발견을 널리 알렸다. 1695년 〈새로운 체계 Système nouveau〉에서 자신의 운동 동역학 이론의 일부를 설명하면서 실체들 사이의 관계 및 영혼과 육체의 예정조화를 다루었다. 그에 따르면 말브랑슈가 주장했듯이 신은 인간의 행위를 그의 사고를 통해 산출할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신은 영혼과 신체를 조화시키기 위해 일종의 시계태엽을 감을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최고의 시계제작자는 처음부터 육체와 영혼이 일치하고 서로 의미를 부여하도록 이 둘을 정확히 결합해 놓았다. 라이프니츠는 1697년 〈궁극적 근원에 관하여 De Rerum Originatione〉에서 사물의 궁극적 근원이 바로 신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 했고, 1698년 〈자연 그 자체에 관하여 De Ipsa Natura〉에서는 자신의 동역학 이론으로 자연의 내적 활동을 설명했다. 이 모든 저작을 통해 라이프니츠는 신앙을 해롭게 하는 데카르트주의에 반대했다. 독일 아카데미 설립계획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조피 샤를로테(에른스트 아우구스트의 딸로 1701년 1월 최초의 프로이센 여왕이 됨)의 도움으로 마침내 1700년 7월 11일 독일 과학 아카데미가 베를린에 설립되었다.

 

1698년 1월 23일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죽자 아들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왕위를 계승했다. 라이프니츠는 무식하고 촌스러운 난봉꾼 루트비히 왕을 만나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자 온갖 구실을 붙여 하노버를 떠나 이리저리 정처없이 옮겨다녔다. 그의 유일한 위안은 조피 샤를로테와 그녀의 어머니 조피와의 친분관계였다. 라이프니츠는 또다시 교회 재통합에 착수했다. 베를린에서는 루터교도와 칼뱅교도의 통합이 문제였고 파리에서는 베니뉴 보쉬에 주교의 반대를 무마해야 했다. 1700년에 돌아온 빈에서는 영향력이 큰 황제의 지원을 얻었지만 영국에서는 성공회 신도를 설득해야 했다.

 

1700년 영국에서는 글로스터 공작 윌리엄이 사망하자 제임스 1세의 증손자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왕위계승 후보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법률가이자 사가인 라이프니츠에게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가문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은 1701년 3월에 시작되어 바덴 조약이 체결된 1714년 9월까지 계속되었다. 라이프니츠는 루이 14세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찬 애국자의 눈으로 전쟁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1700년 파리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이 되었고 당대 유럽의 저명한 학자 대다수와 교류하고 있던 터라 철학자이자 과학자로서의 그의 명성은 전유럽에 퍼져 있었다. 이 시기에 라이프니츠는 신의 정의(正義)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변신론 Théodicée〉(1710)을 쓰느라 다른 책은 거의 출판하지 않았다. 라이프니츠는 러시아 차르 표트르 대제의 자질에 감명받았고 대제는 1711년 10월 처음 라이프니츠를 초청했다. 그후 1714년 9월까지 빈에 머물면서 황제로부터 '라이히호프라트'(Reichhofrat : 제국고문) 지위를 얻었고 '프라이헤르'(Freiherr : 남작) 칭호를 받았다. 이 무렵 라이프니츠는 〈이성에 기초한 자연과 은총의 원리 Principes de la nature et de la Grâce fondés en raison〉를 써서 자연과 은총이라는 두 질서의 예정조화사상을 피력했으며, 1714년 〈단자론 Monadologia〉을 써 〈변신론〉 철학을 집대성했다. 1714년 8월 앤 여왕의 죽음으로 게오르크 루트비히는 조지 1세라는 이름으로 영국 왕위를 물려받았다. 라이프니츠는 하노버에 돌아와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에 있으면서 또한번 〈서구제국의 브라운슈바이크 연대기 Annales Imperii Occidentis Brunsvicenses〉(1843~46) 집필작업에 착수했다. 1716년 6월 바트피르몬트에서 마지막으로 표트르 대제를 만난 뒤, 통풍으로 크게 고생하다가 죽었다.

 

라이프니츠는 중간 정도의 키에 등이 구부정하고 어깨가 넓고 안짱다리를 가진 사람이었고, 의자에 앉아 며칠씩이나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1년 내내 유럽을 여행하기도 했다. 라이프니츠는 불굴의 저술가, 광범위한 서신교류가(600명 이상과 교류), 애국자, 세계시민주의자, 위대한 과학자로서 서구문명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사상가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