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결혼

예심 판사의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 새로운 고장으로 이사 온 이반 일리이치는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사귀고 새로운 지위를 이룩했다. 생활 태도도 약간 달라지게 되었다. 그는 지방 관청 당국과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 고장의 부유한 귀족과 법관들 가운데서 엘리트들만 골라 서클을 조직했다. 그리고 정부에 대해 적당히 불만을 나타내는 자유주의, 문화주의적인 태도를 연출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우아한 몸가짐을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다만 턱수염만은 깎지 않고 자라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이반 일리이치의 생활은 새로운 고장에서도 아주 원만했다. 주 지사에게 불만을 품은 친구들도 마음이 맞는 다정한 사람들이었으며, 봉급도 많아졌다. 특히 당시 새롭게 시작한 빈트 놀이는 그의 생활에 즐거움을 더해 주었다. 트럼프 놀이에 있어서도 그는 원래 머리를 잘 굴리고 명랑하고 재치 있게 노는 재주를 유감없이 발휘, 대체로 따는 편이었다.

 

이곳에서 2년간 근무했을 때 이반 일리이치는 장차 아내가 될 아가씨를 만났다. 프라스코비야 후요드로브나 미헤리는 그가 드나드는 써클에서 가장 매력 있고, 머리가 좋고, 화려한 아가씨였다.

 

일상적인 판사 업무를 마친 다음 필요한 오락과 휴식을 위해 그는 그녀와 농담 비슷한 가벼운 관계를 맺었다.

 

그는 촉탁 관리 시절에는 대체로 춤을 많이 추는 편이었으나 예심 판사가 되고부터는 가끔씩 예외적인 경우에만 춤을 추었다. 자신이 직분상으로는 오등관이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남에게 뒤지지 않는 춤 솜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을 때 그는 춤을 추곤 했다.

 

그는 야회가 끝날 무렵에 이따금씩 프라스코비야 후요드로브나와 춤을 추었으며 주로 그 춤을 추는 시간을 이용해 그녀를 정복했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반 일리이치는 특별히 그녀와 결혼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인쪽에서 그를 그리워하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이 문제를 자신의 일신상에 관련된 진지한 문제로서 검토했다.

 

'하기는 결혼하지 말아야 할 특별한 이유도 없지.' 그는 자기 자신을 타일렀다.

 

프라스코비야 후요드로브나는 제법 지체가 있는 집안의 딸이었다. 외모도 단정하지만 그녀가 물려받을 재산도 적지 않았다. 물론 이반 일리이치는 그보다 조건이 좋은 처녀를 찾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조건도 괜찮았다. 이반 일리이치는 자신이 받는 봉급 정도의 수입은 그녀도 갖고 있으리라고 짐작했다. 사실 그녀는 학벌도 좋고 귀엽고 예쁘며 나무랄 데 없는 그런 처녀였다.

 

그러나 이반 일리이치의 결혼은, 그 때 주위 사람들이 둘이가 무척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이반 일리이치는 서로 합의해서 결혼했다. 그는 자기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런 방식대로 실행했다. 그러한 결혼, 그러한 아내를 맞이함으로써 자신을 위해서 보다 유쾌하고 동시에 훌륭한 결과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결혼 과정 그 자체와 부부간의 애정 표현, 새로운 가구, 새 식기, 새 내의 등으로 치장되는 결혼 생활 초기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아내가 임신할 때까지도 그랬다. 그래서 이반 일리이치는 일찌감치 결혼이란 것은 사회에서도 인정 받는 것이고, 경쾌하고 즐겁고 흐믓한 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예절 바른 생활 분위기를 파괴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강화시켜주는 것으로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내가 임신 2,3개월째로 접어들면서 이 결혼 생활에는 무언지 새로운, 생각하지도 못했던 불유쾌한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침울하고, 무척 볼성 사나운 모양으로 나타났다. 그는 이것들을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방법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아내는 아무 이유도 없이, 심심풀이 삼아 그의 생활의 즐거움과 예의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적어도 그의 생각으로는 그랬다. 그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 그녀는 뚜렷한 근거도 없이 그를 질투하고 자신의 비위를 맞춰달라고 요구하고 공연히 대들곤 한다 - 그에게는 그런 것들이 불쾌하고 난폭한 행동처럼 느껴졌다.

 

처음 얼마 동안 이반 일리이치는 경쾌하고 점잖은 생활 태도를 취함으로써 이런 불쾌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런 태도는 전에도 그를 곤경으로부터 구출해 주었다. 이런 기대 때문에 그는 아내의 감정에 별로 개의치 않고 종전처럼 경쾌하고 유쾌한 생활을 계속했다.

 

친구들을 초대해 집에서 노름판을 벌리기도 하고 혼자서 클럽이나 친구에게 놀러 가기도 했다. 그러나 아내는 때때로 굉장히 억척스럽게 막된 말투로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가 그녀의 요구를 무시하면 그때마다 더욱 집요하게 비난을 퍼부어서, 그가 마침내 굴복할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역시 그녀처럼 항상 집안에 틀어 박혀서 침울하게 시간을 보내게 될 때까지 결코 그런 행패를 그치지 않은 것이다.

 

이반 일리이치는 그제야 부부 생활이라는 것이, 적어도 아내와의 생활이 언제나 생활의 즐거움과 품위만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런 즐거움과 품위를 무너뜨리는 것이며 그는 스스로 이런 파괴 행위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반 일리이치는 대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근무는 아내를 위압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였다. 그는 그것을 방패 삼아 자기의 독립된 세계를 지키면서 아내와 대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이들의 출생과 양육 및 거기 따르는 여러 가지 실망, 장모의 병(이반 일리이치는 이 문제에 자기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요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등 거듭되는 사건들은 그를 더욱 가정 밖으로 내몰았다. 가정 밖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반 일리이치는 전보다 더 근무에 열중하게 됐고, 거기에 대해 명예심을 갖게 되었다.

 

결혼 후 1년도 못 되어 그는 부부 생활이라는 것이 생활에 어느 정도 편의를 줄 수 있으나 실제로는 아주 복잡하고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 부담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즉, 사회에서 인정 받는 예의 바른 생활을 꾸리기 위해서는 근무에 임할 때와 같은 일정한 태도를 꾸며서 대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이반 일리이치는 부부 생활에서 이러한 태도를 스스로 꾸며냈다. 그는 가정에서는 그저 집에서의 식사, 주부의 역할, 잠자리 등 아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편의와 외면상의 형식적인 품위만을 요구했다. 집에서 그는 명랑과 유쾌와 고상한 것만을 기대했으며 간혹 그런 것이 발견되면 무척 기뻐했다. 그러다가 저항이나 불평에 부딪치면 벽으로 둘러싸인 근무라는 별세계로 피난을 가서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었다.

 

이반 일리이치는 직무 수행에서 훌륭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인정 받았고, 3년 후에는 검사보로 승진했다. 새로운 직무와 그 중요성, 모든 사람들을 투옥하고 기소할 수 있는 가능성, 논고의 공개성과 여기에 대한 자신의 성공, 이런 것들 때문에 그는 한층 더 근무에 몰입했다.

 

아이들은 계속 태어났다. 아내는 점점 더 말이 많고 화를 잘 내는 여인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잔소리도 이반 일리이치의 가정 생활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는 못했다.

 

이반 일리이치는 그 고장에서 7년 동안 근무한 뒤, 다른 주의 검사로 영전되어 갔다. 그는 가족을 데리고 부임했다. 그러나 돈이 딸리고 새로운 고장은 아내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봉급은 전보다 많아졌으나 생활비는 더욱 많이 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이를 둘이나 잃게 되어 그의 가정 생활은 더욱 즐겁지 못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새로 옮겨온 지방에서 무엇이고 좋지 않은 일만 생기면 남편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웠다. 부부가 이야기를 주고 받다 보면 아이들 양육 문제 때문에 말다툼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싸움이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부부 사이에 드물게나마 서로 사랑하는 기분이 되살아나는 경우도 있었으나 그런 것은 결코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문제 때문에 슬퍼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런 상태가 특별히 불편하지도 않았고, 이제 그런 상태를 아주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심지어 이것이 가정에 있어서 자기가 해야 할 역할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는 그 역할과 목표를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을 점차 줄임으로써 이루어 나갔다. 어쩔 수 없이 집에 있어야 할 경우에는 제 3자와 자리를 함께 함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무엇보다도 확실한 구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생활의 흥미를 모두 이 직업의 세계에서 찾았다. 자기의 권력의식, 미운 사람은 누구든지 혼내 줄 있는 가능성, 법정에 들어갈 때나 동료들과 만났을 때 갖추는 위엄, 상관이나 부하 등 동료들과의 원만한 관계, 특히 자신도 느끼고 있는 사무 관리상의 수완 등 이것들은 언제나 그를 즐겁게 해주었다. 그 밖에 동료들과의 대화나 식사, 트럼프 놀이 등도 그의 생활의 윤활유였다. 이처럼 이반 일리이치의 생활은 전반적으로, 그가 마땅히 그래야 할 것으로 여기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흡족하고 품위 있게...

 

그는 그 지방에서 7년 동안 더 살았다. 맏딸은 벌써 열 여섯이 되었다. 아이를 하나 더 잃어버리고 남은 사내 아이 하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그 애가 항상 가정 불화의 원인이었다. 이반 일리이치는 사내 아이를 법률학교에 보내려고 했으나 아내는 그에 대한 반발 때문인지 억지를 부려 중학교에 입학시켜 버렸다. 딸 아이는 집에서 공부를 하고 훌륭하게 성장했으며 어쨌든 아들도 착실한 편이었다.

 

 

6. 위기

결혼하고 나서 17년 동안 이반 일리이치의 생활은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그는 이미 고참 검사였다. 그는 보다 좋은 자리가 나설 것을 기대하면서 두 세 군데 전임 요청을 거절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날 갑자기 그의 생활의 평화를 밑바닥부터 뒤집어 엎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반 일리이치는 전부터 대학이 있는 도시의 법원장 자리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노릇인지 후배인 코페가 그를 뛰어넘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다. 그는 공연히 화를 내며 아무 것에나 트집을 잡고 동료나 친근한 상관들과 말다툼을 했다. 자연히 사람들은 그를 피하게 됐고, 냉담해져서 그는 다음 번 인사 이동에서도 빠지고 말았다.

 

그것은 1880년의 일이었다. 그 해는 이반 일리이치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해였다. 봉급은 생활비를 하기조차 턱없이 부족했고, 사람들은 그를 잊어버렸다. 아버지조차도 그를 도우려고 들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누구나 연봉 3천5백 루블인 그의 지위를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부러워하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아무도 그의 불행을 인정하고 도와주려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 오직 자기 자신만이 - 남들이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며 아내의 끊임없는 잔소리에 진저리를 내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입 이상으로 낭비한 탓에 빚에 쪼들리고 있다. 아무도 이걸 알아주지 않는다. 이것은 결코 정상적인 생활이 아니라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만이 느끼고 있다.

 

그 해 여름 휴가 때, 그는 휴가비를 줄이기 위해 처남이 있는 시골집으로 아내와 함께 내려갔다. 이반 일리이치는 시골에서 근무 없이 무료하게 지냈다. 이반 일리이치는 난생 처음으로 이렇게 감당할 수 없는 심심함에 질려 버렸다. 그는 견디기 힘든 우울함을 느끼고 단단히 결심했다 - 이런 상태로는 살아갈 수 없다. 뭔가 결단을 내리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이반 일리이치는 잠이 오지 않아 테라스를 어슬렁거리며 꼬박 밤을 샜다. 그는 뻬쩨르부르그에 올라가기로 마음 먹었다. 상관들이 그의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그들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루게 될 것이다. 다른 관청으로 옮겨 버리는 거다... 그는 결심했다.

 

다음날, 아내와 처남이 한사코 말리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뻬쩨르부르그로 떠났다. 그는 단 한 가지, 연봉 5천 루블을 받는 지위를 얻기 위해 먼 길을 떠난 것이다. 이제 그는 어떤 관청이든, 또는 일의 방향이나 성격 등은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연봉 5천 루블일 뿐이다. 행정 방면이든 은행이나 철도든 또는 마이야 황후 학원이나 세관일지라도 꺼릴 것 없었다. 그저 5천 루블만이 필요했다. 그리고 자신을 중요하게 쓸 줄 모르는 지금의 소속 관청으로부터 어떻게 해서든 떠나 버리고 싶었다.

 

이반 일리이치의 이번 여행은 뜻밖의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클스크에서 그의 친구 에프 에스 일리인이 같은 일등차에 올라탄 것이다. 일리인은 방금 클스크 주지사로부터 전달된 전보를 보여 주었다. 그것에 의하면 며칠 안으로 주 청사의 인사 이동이 있으며, 표도르 이바노비치 자리에 이반 세미요노비치가 임명되리라는 것이었다.

 

이 인사 이동은 이반 일리이치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즉 표도르 이바노비치와 그의 친구인 자할 이바노비치의 역할 변경은 이반 일리이치에게 다시 없이 유리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소식을 모스크바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하자 이반 일리이치는 자할 이바노비치를 찾아가서 자기가 전에 근무했던 사법성에서 확실한 지위를 약속 받았다. 일 주일 후 그는 아내에게 전보를 쳤다.

 

'자할 미르레르의 후임으로 제 1차 보고시에 임명 됐음.'

 

이반 일리이치는 에상치 못했던 이 인사 이동 덕분에 동료들보다 2계급이나 뛰어오게 됐다. 게다가 5천 루블의 봉급과 부임 수당으로 3천 5백 루블까지 덤으로 받게 되었다. 그는 이전의 경쟁자들과 관청 전체에 대해 품었던 적개심을 깨끗이 잊어버리고 아주 행복한 기분에 잠길 수 있었다.

 

이반 일리이치는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만족스럽고 쾌활한 표정을 되찾고 시골로 돌아왔다.

 

그의 아내도 옛날처럼 명랑해져 두 사람 사이엔 휴전이 맺어졌다. 이반 일리이치는 뻬쩨르부르그에서 여러 사람들로부터 축하인사를 받았다. 예전엔 적이었던 사람들이 체면 따위는 던져 버리고 이제 그에게 아첨하게 된 것이다. 모두들 그의 지위를 부러워했다. 특히 뻬쩨르부르그에서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다.

 

그의 아내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모두 의심 없이 믿는다는 표정을 하면서 단 한 마디도 반박하지 않았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리고 새로 부임해 갈 고장에서의 생활에 대해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 보는 것이었다.

 

아내가 말하는 계획은 이반 일리이치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했다. 그는 서먹서먹하고 씁쓸했던 생활이 이제 멀리 사라지고,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즐겁고 점잖은 생활로 되돌아 가는 모습을 흐믓한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이반 일리이치는 잠시 머무를 생각으로 시골에 돌아왔던 것이다. 9월 10일에는 새 임무를 맡아야 했으며 그밖에 새 부임지에서의 생활을 준비하고 시골에서 이삿짐을 전부 옮겨야 했다. 살림도구도 새로 장만할 필요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이 그의 머리 속에서 꾸몄던대로, 또 아내의 결심대로 정비되어야 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아주 순조롭게 진행됐다. 완전히 의견이 일치한 그들 부부는 사이가 무척 좋아졌다. 신혼 때에도 볼 수 없었던 현상이었다.

 

이반 일리이치는 곧 가족들과 함께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처남 부부가 갑자기 그들 가족을 융숭하게 대접하고, 굳이 붙잡는 바람에 일단 혼자 떠나기로 했다.

 

이반 일리이치는 새 임지로 출발했다. 직업적인 성공 그리고 아내와 화합한 것이 그에게 흐믓하고 즐거운 기분을 안겨 주었다. 그 만족감은 점점 더 커졌다. 이사할 멋진 집도 하나 찾아냈다. 그들 부부가 전부터 가슴 속에 그리던 이상형의 그런 집이었다. 고풍스럽게 넓고 높게 설계한 응접실, 편리하고 장엄한 느낌을 주는 서재, 아내와 딸의 방, 아들이 쓸 공부방 등 모든 것이 마치 그들을 위해 일부러 주문해 만든 것 같았다.

 

이반 일리이치는 몸소 집 정리에 나섰다. 벽지를 선택하고 가구를 사들였다. 일부러 아주 고풍스러운 물건을 사들였다. 그것이 특별히 우아하게 보이도록 덮개를 장만하여 마음 속에 그렸던 이상에 가깝게 꾸며 나갔다.

 

집 정리를 절반 정도만 했는데도 그 효과는 그가 예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그는 집 정리가 완전히 끝나고 나면 속되거나 상스러운 구석이란 찾아 볼 수 없는, 우아하고 고상한 분위기가 되리라는 것을 예상할 수 있었다.

 

밤에 잠들면서도 그는 머지 않아 완성될 넓은 응접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손님방을 둘러보며 벌써부터 벽난로와 칸막이, 선반,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의자와 벽에 걸린 큰 접시, 오래 된 접시들과 청동 장식품들이 각기 제 자리에 놓인 모습을 여러 가지로 상상해 보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얼마나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인지 생각하면서 혼자서 흐뭇한 기분에 잠겼다. 특히 방 전체에 아주 고상한 품위를 갖추어 줄 오래된 물건들을 찾아내서 싸게 사들인 것이 무엇보다 성공적이었다. 그는 나중에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결과를 보고 더욱 놀라도록 하기 위해 이런 일들을 실제보다 축소해서 편지로 써 보냈다. 이런 일들이 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려 그는 그토록 갖고 싶어했던 새로운 직무에 대해서도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할 지경이었다.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도 그는 때때로 딴 생각에 잠기곤 했다. 커튼 윗 부분은 어떤 식으로 주름을 잡을까, 직선적인 게 나을까, 좀 여성적인 것이 좋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때로는 너무 생각에 열중한 나머지 몸소 가구를 고쳐보기도 하고 커튼을 갈아 보기도 했다.

 

한 번은 좀 서툰 미장이에게 직접 지시를 하려고 사다리에 올라갔다가 발을 헛디뎌 떨어졌다. 다행히 워낙 몸이 날쌔고 튼튼했으므로 옆구리를 모서리에 부딪쳤을 뿐이었다. 옆구리는 약간 아팠으나 이내 나았다.

 

이반 일리이치는 그 동안 즐겁고 건강하게 생활했다. 그는 때때로 편지에도 썼다 - 나는 나이가 열 다섯 살이나 젊어진 것 같다고. 그는 9월 중으로 모든 것이 완전히 정리되리라고 예상했지만 일은 10월 중순까지 끌었다. 그러나 결과는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 그만이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마다 모두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는 별로 부유하지 못하면서 부유한 척 보이려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것들에 지나지 않았다. 두꺼운 비단 커튼, 흑단 목재 가구, 꽃, 융단, 번쩍이는 것들이 모두 일정한 종류의 사람들이 그 일정한 종류의 사람답게 보이기 위해 장치해 놓은 것일 뿐이었다. 그의 집에 있는 것들은 모두 그런 것이어서 실상 별로 주목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런 모든 것들이 무슨 특별한 것처럼 가치 있게 느껴졌다.

 

그는 철도 정거장으로 가족을 마중 나갔다. 그리고 그들을 완전히 정리된, 눈부신 새 집으로 데려왔다. 하얀 넥타이를 맨 하인이 꽃으로 장식된 대기실의 문을 열어 젖혔을 때 모두들 응접실로 서재로 돌아다니면서 와! 하고 감탄의 함성을 터뜨렸다. 그는 너무 행복해 그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그들의 찬사를 마음껏 즐겼다.

 

그날 밤 차 마시는 자리였다. 그는 아내의 물음에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이 사다리에서 뛰어 내려 미장이를 놀라게 했던 모습을 몸짓까지 섞어가며 이야기해주었다.

 

"내가 체조를 배운 게 뭐 장난인 줄 아나?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정말 죽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여기를 좀 부딪쳤을 뿐이야. 아직 만지면 아프긴 해도 이젠 거의 다 나았어. 가벼운 타박상일 뿐이라니까."

 

이렇게 그들은 새로운 집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매사가 그렇듯 이 새 집에서도 얼마쯤 살다 보니 방이 하나쯤 더 있었으면... 수입도 한 5백 루블쯤 더 많았으면 하는 사소한 불만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모든 것이 아주 순조로웠다.

 

처음 얼마 동안은 아직 갖추어진 시설이 좀 부족했다. 그것을 보충하기 위해 부부가 이것저것 장만하고 고쳐 달라기도 하고 바꿔 놓을 때가 가장 좋았다. 부부 사이에는 무언지 아직 석연치 않은 구석도 남아 있었으나 둘 다 아주 흡족한 상태였다. 또 해야 할 일도 많았으므로 별로 크게 싸우는 일이 생기지는 않았다. 더 이상 손 댈 것이 없어졌을 무렵, 약간 지내기가 심심했지만, 그 무렵에는 새로 친구도 생기고 습관도 정해지고 생활도 충실해졌다.

 

 

7. 가볍고 유쾌하고 고상하게

이반 일리이치는 오전을 법원에서 보내고 점심은 집에 와서 먹었다. 처음 얼마 동안 그의 기분은 문자 그대로 최고였다. 집안 일 때문에 약간 골치를 썩기도 했지만, 그의 생활은 지금까지 그가 계획했던 대로 흘러갔다. 가볍고 유쾌하고 고상하게...

 

그는 아침 아홉 시에 일어나서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읽은 다음 근무복으로 갈아입고 법원으로 나간다. 법원에는 그가 달고 일해야 하는 목걸이가 마련되어 있다. 법원에 도착하자마자 그것을 목에 달아야 했다.

 

사무실에서 민원인들을 조사하고, 사무실 자체 업무나 회의, 공판과 공판 준비 회의 등 이러한 모든 것들이 그를 둘러싼다. 이것들 가운데서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게 만드는 회색의 생활이 끼어든다. 일을 제대로 하려면 이것을 배제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바꿔 말하면 사람을 다룰 때에 직무 이외의 어떠한 관계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일의 동기는 오로지 직무상의 것이어야 하며, 사람을 대하는 것도 직무상 허용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가령 누가 무언가 알아보기 위해 사무실로 찾아 왔다고 하자. 이런 경우 직무를 떠난 자연인 이반 일리이치는 그 사람과 아무런 관계를 가져서는 안 된다. 만약 그 사람의 용무가 관리와 관련된 것이며 공문용지에 기재될 성질의 것이라면 이반 일리이치는 그러한 관계의 범위 안에서 규정이 허용하는 모든 일을 자세히 알아봐 준다. 덧붙여 그는 인간적으로도 깍듯이 예의를 지킨다. 그러나 직무상의 일이 끝나면 그 사람과의 관계는 완전히 정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반 일리이치는 직무상의 일을 분명히 구분, 자신의 진짜 사생활과 혼동하는 일이 없도록 해왔다. 이 방법을 이반 일리이치는 최대한 이용했다. 그것은 오랜 경험과 재능에 의해 이상할 정도로 잘 다듬어져 있었다.

 

그는 가끔 가벼운 농담이라도 하듯이 인간적인 관계와 직무상의 그것을 자신이 혼동하는 모습을 연출해 보이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스스로 정한 원칙의 속박을 풀어버리는 것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언제든지 필요하면 또다시 직무상의 관계를 칼처럼 구별, 인간적인 측면을 떼어버릴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어진 업무를 손쉽고 유쾌하고 의젓하게 처리했다. 그 솜씨는 실로 달인의 경지라고 평가할 만했다. 직무를 처리하는 사이사이에 그는 담배를 피우고 차를 마시며 간단한 정치 관련 화제를 입에 올리는 일도 있었다. 또 일반적인 세상사나 트럼프 놀이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들의 화제는 대부분 인사 이동에 관련된 의견 교환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자신의 역할을 솜씨 있게 해치운 명인처럼, 예를 들어 오케스트라의 제 1 바이올리니스트의 한 사람처럼 피곤해져서 집으로 돌아간다. 집에는 아내가 딸과 함께 외출했거나 손님이 와 있거나 한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은 가정교사와 예습을 하거나 학교에서 배운 것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말하자면 매사가 전혀 흠 잡을 데 없이 매끄럽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저녁 식사 후 찾아온 손님이 없으면 이반 일리이치는 이따금씩 평판이 좋은 책을 읽기도 한다. 그리고 더 늦은 밤에는 다시 일에 열중한다. 서류를 들여다보면서 관련 법규를 조사하고, 진술 내용을 법률과 대조해보고 들어 맞는 조문을 찾아내곤 했다. 이런 일은 지루하고 갑갑하기만 했다.

 

물론 빈트 노름을 할 때도 지루해지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아내하고 함께 있거나 혼자서 우두커니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반 일리이치의 즐거움은 조그마한 만찬회를 마련하고 사회적으로 훌륭한 지위에 있는 신사 숙녀를 초대해서 그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한 번은 그의 집에서 가든파티를 열고 무도회를 가진 일도 있었다. 이반 일리이치는 흐믓한 기분이었고, 파티도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음식 문제로 아내와 대판 싸워야 했다. 아내는 그녀 나름대로 명분이 있었다. 그가 우겨서 고급 음식점에서 음식을 장만했으나 손님들이 다 먹지 못해서 음식이 많이 남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음식점에 치루어야 할 계산이 45 루블이나 되었다. 아내는 남편이 어리석게 고집을 피운다고 몰아세웠고, 남편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홧김에 이혼까지 서슴지 않는 식의 말을 중얼댔다.

 

그러나 야유회는 눈부셨다. 모두 일류급 인사들만 모여서 이반 일리이치도 포르포온노 공작부인과 춤을 추었다. 근무상의 기쁨은 자존심을 충족시키는 데서 생기는 것이며, 사교적인 기쁨은 허영심을 충족시키는 데서 생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반 일리이치가 진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빈트 놀이를 할 때였다.

 

이렇게 그들은 생활했다. 그들은 사교계에서 제 1급에 해당하는 사람들로 조직된 서클에 들어갔다. 이 서클에는 나이 든 사람도 있고, 젊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 서클에 관해서는 남편과 아내, 딸까지도 완전히 의견이 일치했다. 그들은 별다른 약속을 하지는 않았지만, 벽에 일본 도자기 접시가 걸려있는 그들의 객실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종류에 제한을 가했다. 실속도 없이 말만 앞세우는 귀찮은 친구들과 차림새가 허술한 축들은 상대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집에는 최상류층 사람들만 드나들게 되었다.

 

젊은이들은 이반 일리이치의 딸인 리잔카를 자주 화제에 올리곤 했다. 특히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페트리시체프의 아들이며 상속자인 예심판사 페트리시체프가 가장 관심이 많았다. 이반 일리이치는 진작부터 그 문제에 관해서 아내와 상의하곤 했다. 두 젊은이를 트로이카로 드라이브를 시키거나 또는 함께 소인극을 연출시켜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등 여러 가지 의견이 오고갔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생활은 변함없이 그대로 흘러갔다. 만사는 아주 순조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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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무너진 생활

가족들은 모두 건강했다. 이따금씩 이반 일리이치가 입 속에서 야릇한 냄새가 난다거나, 왼쪽 배가 좀 거북하다고 말하는 일이 있었으나 아무도 그것을 심각하게 여기진 않았다.

 

그러나 이상한 기분은 점점 더 심해졌다. 별로 아프지는 않았지만 옆구리에 뭔가 끊임없이 묵직하고 답답한 기분이 느껴져 기분이 침울해지곤 했다. 이 침울한 기분은 나날이 더 심해져서 급기야 그가 고로빈 가문에 어렵사리 이룩해 놓았던 품위 있고 가볍고, 명랑한 생활 분위기를 망가뜨리기 시작했다.

 

남편과 아내는 날이 갈수록 싸움이 잦아졌다. 머지 않아 가볍고 유쾌한 기분은 사라지고 체면 유지를 위한 법칙만이 유지되게 되었다. 아내가 전부터 가끔 남편에겐 음울한 성격이 있다고 말한 것이 이렇게 되고 보니 전혀 근거 없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녀는 무엇이든지 좀 보태서 지껄이는 성품이었으므로 당신은 언제나 이렇게 무서운 성격이었어요, 내가 사람이 좋아서 20년 동안이나 그걸 참고 살아왔노라고 떠들어댔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제는 그가 먼저 그녀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것이 통례였다. 식사를 시작하기 전 그는 식탁에 앉아서 스프를 먹을 때쯤 거의 언제나 잔소리를 시작하곤 했다. 그것도 그릇이 이가 빠졌다거나, 요리가 글러먹었다거나, 또는 아들이 상 위에 팔을 올려 놓았다거나, 딸의 머리 모양이 어떻다는 둥 트집을 잡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을 아내의 잘못 탓으로 돌렸다.

 

아내는 참다 못해 처음에는 말대답도 하고 불쾌하게 쫑알대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밥 먹기 전에 두 차례나 아주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한 후로는 그녀도 그가 병적인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화를 가라앉히고 잠자코 부지런히 식사를 끝마치기로 했다. 그녀는 자기가 그처럼 성격이 유순하다는 것을 큰 자랑거리로 삼았다.

 

그녀는 자기 남편이 아주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로 자기의 생활을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내심 단정하고 자기 자신을 불쌍하게 여겼다.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 더 남편을 증오하게 되었다.

 

그녀는 남편이 죽기를 바랐으나 그렇다고 그것을 실제로 그것을 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봉급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그녀는 더욱 마음이 상했다. 남편의 죽음조차도 자신을 불행으로부터 구해주지 못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 자신의 처지가 더욱 무섭게 불행한 것으로 느껴졌다.

 

그녀는 늘 조바심을 쳤으나 그런 태도를 될수록 남편에게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의 이 감추어진 조바심은 더욱 남편의 울화를 긁어 놓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반 일리이치의 신경질이 유난히 심했던 어느날이었다. 감정이 가라앉은 후 그는 요즈음 자기가 짜증을 잘 내는 것은 모두 병 때문이라고 변명처럼 말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아내는 말했다. 의사에게 보일 필요가 있다, 이름있는 의사의 진찰을 받도록 하라고 성화를 했다.

 

이반 일리이치는 의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했던대로였다. 그는 공식적이고 형식적인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마치 그 자신이 법정에서 취하는 태도를 흉내내기라도 한 것처럼 의사는 정중하게 꾸민 태도와 판에 박은 듯한 형식이라는, 직업의 가면을 쓰고 그를 대했다. 그에게는 이것이 아주 낯익다는 느낌조차 들었다.

 

"그저 모든 것을 내게 맡기시면 됩니다. 해롭지 않게 해 드릴 테니... 우리는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나 똑같은 방법으로 다 해결해 왔으니까요..." 이렇게 말하는 듯한 의사의 그 꾸며진 표정, 이것은 그가 한결같이 법정에서 지켜왔던 태도와 흡사했다. 법정에서 그가 피고인들에게 지어 보이는 표정과 그 저명한 의사가 그에게 보여준 표정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었다.

 

의사는, 이러저러한 징후는 당신의 몸에 이러저러한 병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이모저모 다양한 연구 결과에 의해 확인되지 않는다면 당신의 병은 아마 또 다른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단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에는... 어쩌구저쩌구

 

이반 일리이치에게는 단 한 가지 문제만이 중요했다. 그의 병이 심각한 것이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사는 이러한 질문을 무시해 버렸다. 의사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따위 질문은 이롭지 못한데다, 문제로 삼을 것도 못 되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다만 만성 탈장이냐 아니면 맹장염이냐 둘 가운데서 확률을 놓고 따지는 것일 뿐이다.

 

의사에게 있어서 이것은 이반 일리이치의 생명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맹장염에 대한 논쟁의 문제였다. 의사는 이반 일리이치를 앞에 앉혀놓고 아주 재치 있는 솜씨로 논쟁을 진행, 맹장염의 승리로 결론을 지었다. 의사는 이와 같은 진단에 덧붙여서 혹시라도 소변 검사 결과에서 새로운 증거가 잡힐지도 모르니까 그때는 다시 진찰해야 한다는, 발뺌을 위한 장치를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런 일들은 이반 일리이치 자신도 피고인들을 다룰 때 빈틈없는 솜씨로 천 번도 넘게 해오지 않았던가. 그가 늘 그랬듯이 의사는 즐거운 듯 득의만면해서 이제 피고의 입장에 선 그를 안경 너머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 않아... 의사나 다른 사람에겐 이런 일이야 아무래도 상관없겠지만 내겐 그렇지 않지...' 이반 일리이치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그는 이런 상황이 된 것에 놀라고 두려워졌다.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 가엾다는 생각과 함께 이렇게 중대한 문제를 이렇게 무성의하게 처리하는 의사가 괘씸해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잠자코 일어섰다. 그리고 탁자 위에 돈을 놓으면서 한숨을 쉬고, 이렇게 물었다.

 

"환자들은 원래 쓸데없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만... 제가 혹시 아주 위험한 병에 걸린 것은 아닐까요?"

 

의사는 안경 너머로 그를 차갑게 쏘아 보았다. 마치 '피고인 그대가 허용되지 않은 질문을 끄집어낸다면 부득이 퇴정을 명령할 수 밖에 없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지금 말씀드릴 필요가 있는 것은 모두 말씀 드렸는데요." 의사는 대답했다. "그 이상의 것은 조사 결과가 나온 다음에 말씀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그리고 의사는 정중하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이반 일리이치는 느릿느릿 그곳을 나와 기운 없이 썰매를 타고 집으로 달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의사가 한 말을 곰곰이 되씹어 보았다. 의사가 말한 그 모호한 낱말들은 과연 무슨 뜻을 담고 있는 것일까?

 

'과연, 내 병은 심상치 않은 것일까? 무척 위험한 것인가, 아니면 그리 대단치 않은 것일까?' 그는 이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의사가 한 말 속에서 찾아내려고 애썼다. 그로서는 생각할수록 의사의 말이 아주 위험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길거리의 풍경도 그에게는 서글프게만 보였다. 합승마차도, 늘어선 집들도, 사람들도, 구멍가게도 모두 처량해 보였다. 게다가 잠시도 멈추지 않는 이 둔탁한, 곪는 듯한 아픔... 의사는 모호하게 말하지만, 이 고통은 훨씬 심각한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는 침울하게 아픔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 그는 진찰 결과를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아내는 듣고만 있었다. 이야기 도중에 딸이 모자를 쓰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나가려던 참이었다. 사실 아내는 이 답답한 대화를 억지로 참으면서 자리에 앉아 들어주고 있었으나 그런 그녀의 노력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아, 그래요? 그럼 이제 안심이군요." 아내는 말했다. "당신도 이제부턴 정신 똑바로 차리고 꼬박꼬박 약을 드시도록 하세요. 그럼 게라심에게 처방전을 주어서 약국에 가서 약을 사오도록 하겠어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옷을 갈아 입으려고 다른 방으로 갔다.

 

아내가 방에 있는 동안 그는 숨도 쉬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나가자 그는 한숨을 무겁게 내쉬었다.

 

"이런 젠장! 어쩌면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건지도 모르지..." 그는 중얼거렸다.

 

이반 일리이치는 약을 마시고 의사의 지시를 착실히 지켜 생활했다. 그러나 의사의 처방은 얼마 못 가서 소변 검사 결과에 의해 바뀌었다.

 

그건 별로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의사의 검사와 그 결과에 따른 치료 방법에 일종의 혼란이 생긴 것이다. 이것을 의사의 실책이라고만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의사가 한 말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생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반 일리이치는 종전대로 의사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처음 얼마 동안은 그 속에서 일종의 위안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약을 먹고 기타 요양에 관한 의사의 지시를 제대로 지키는 것은 이반 일리이치의 가장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그는 또 몸의 고통과 내장의 기능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그는 사람들의 병이나 건강에 대해서 흥미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앓고 있는 어떤 환자의 이야기, 특히 자신의 증상과 비슷한 병을 앓는 환자 이야기가 나올라치면 그는 억지로 마음의 동요를 감추면서 열심히 귀를 기울이거나 여러 가지 질문을 해서 자신의 증상과 견주어 보았다.

 

 

9. 혼란과 고독

통증은 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이반 일리이치는 억지로라도 자신의 병이 나아지고 있다고 믿으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특별히 흥분할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스스로를 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내와의 사이에 불쾌한 일이 생기거나 근무상 실수를 하거나 빈트 놀이 패가 좋지 않거나 하면 느닷없이 그 고통을 온 몸으로 느꼈다. 전에는 설혹 실수를 하더라도 굽히지 않고 성공을 되찾을 때까지 버티고 이겨낸다는 의지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온갖 상스럽지 못한 일들, 사소한 불쾌감이 모두 그의 기력을 꺾어 버렸다. 그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 상태였다.

 

그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 겨우 좀 나아져서 약 효과가 생길 만하면 꼭 빌어먹을 놈의 재수없는 일들이 일어난단 말야 - 그는 자신에게 그런 재수없는 일을 가져다주는 사람들, 그리고 그런 재수없는 일 자체에 대해 화를 내고 증오했다. 그런 심정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리라는 것을 그는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는 그것을 억누를 수 없었다.

 

주위 사람과 환경에 대한 그의 이런 분노는 분명 그의 병을 더 심각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 역시 불유쾌한 일에 대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신경을 쓰지 말고 무시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반대로 자신에게는 안정이 절대로 필요하며, 그 안정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을 조심해야 하며, 결국 그래서 조금이라도 안정이 방해되면 신경질이 날 수밖에 없다고 핑계를 대고 있었다.

 

그는 이것저것 의학 서적을 읽고 의사를 이 사람 저 사람 찾아 다녔다. 그러나 이것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병세가 꾸준히, 전체적으로 악화되고 있어서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특별히 달라진 것도 없다고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의사를 찾아보고 이야기를 해보면 병세가 악화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속도도 무척 빠르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그는 부지런히 의사를 찾아 다니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 달에 그는 또 다른 명의를 찾아갔다. 이 의사도 앞서 찾아간 다른 의사들과 거의 비슷한 의견이었다. 그는 진찰하는 각도가 달랐을 뿐이다. 이 의사와의 상담도 그에게는 오로지 의혹과 공포를 더해줄 뿐이었다. 한 다리 건너서 아는 친구 가운데 아주 명성 높은 의사가 있어서 그는 또 찾아가 보았다. 그랬더니 그 진단이 또한 여태까지 들은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그 의사는 반드시 고칠 수 있다고 장담했으나, 여러 가지 질문과 그 나름의 추측으로 미루어 본 생각으로 그는 더욱 혼란에 빠졌을 뿐이었다.

 

의사들은 진단은 각각 다르게 내리면서도 치료 방법은 비슷했다. 또 주는 약은 의사마다 달랐다. 이반 일리이치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일주일 동안 새 약을 복용해 보았다. 그러나 전혀 효과를 볼 수 없었다. 그는 아무도 신뢰할 수 없었다. 도리어 우울한 마음만 하루하루 더해갔다.

 

하루는 친하게 지내는 여인이 찾아와 기도로 병을 고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내가 정말 이렇게까지 정신적으로 약해졌단 말인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제부턴 괜히 쓸데없는 의심을 품지 말고, 믿을 수 있는 의사 한 사람만 골라 철저하게 그의 치료법을 따르도록 하자. 당연히 그래야지... 이제부턴 딴 생각 말고 여름까지 한 가지 치료법에만 전념해야지. 나중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보자. 이젠 이따위로 갈팡질팡하는 것은 정말 지긋지긋하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 먹기는 쉬웠으나 실행은 불가능했다. 옆구리의 통증은 늘 마음에 걸렸고, 점점 더 심해졌다. 입 속의 메스꺼운 기운도 점점 더 심해졌다. 입에서 항상 역겨운 냄새가 난다고 느껴 식욕도 갈수록 줄어들었다. 이제는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 없었다. 뭔가 새로운 것, 아주 두렵고 여태까지 그의 일생에서 만난 적이 없었던 중대한 사태가 그의 몸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오직 그 혼자만 알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이를 알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겐 매사가 예전처럼 아무 탈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반 일리이치가 무엇보다도 괴로운 것은 바로 주위 사람들의 그런 무관심이었다. 집안 식구, 특히 아내와 딸은 나돌아 다니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서 무엇 하나 그의 고통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그가 이렇게 늘 우울하고 화를 잘 내게 된 것이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인 것처럼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물론 그들도 될 수 있으면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자기를 돌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내는 그의 병에 대해서 판에 박힌 듯한 태도를 꾸며내 그가 뭐라고 말하든 상관없이 그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그 태도란 이런 것이었다.

 

"글세, 어쩌면 좋아요..." 그녀는 친지들에게 말한다. "우리집 주인은 딴 사람들처럼 의사가 지시한 치료 방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요. 오늘은 제대로 약을 먹고 음식도 가려 먹고 시간 맞춰서 잠자리에 드는가 싶더니, 다음 날엔 말짱 도루묵이란 말이에요. 약 먹기를 잊어버리고 몸에 좋지 않은 상어 고기를 먹고, 빈트 놀이를 하느라 밤 한 시까지도 자지 않고 버티는 걸요."

 

"아니 내가 도대체 언제 그랬단 말이야?" 이반 일리이치는 화를 버럭 내며 말한다. "그 일은 표도르 이바노비치에게 놀러 갔을 때 딱 한 번 그랬던 것 뿐이야!"

 

"어젯밤에도 슈베크씨 하고..."

 

"글쎄, 늦게 잠드는 건 나도 어쩔 수 없어. 옆구리가 쑤셔서 아무래도 잠을 잘 수가 없는 걸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글쎄 이유가 어떻든 그러다간 당신은 도저히 병을 고칠 수 없을 게 뻔해요. 괜히 우리들만 괴롭히구 말이에요."

 

아내는 남편의 병에 대해서 남들에게나 또는 그에게, 그 병은 이반 일리이치 스스로의 잘못에서 생긴 것이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병이라는 것도 실상은 자신에 대한 남편의 새로운 학대거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반 일리이치도 아내가 순전히 악의로만 그런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고통이, 분노가 조금도 가시지는 않았다.

 

법원에서도 이반 일리이치는 남들이 자신을 아내와 똑같은, 기묘한 태도로 대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그렇게 느낀 것으로 생각했다.

 

어떤 때는 모두들 자신을 머지 않아 자리를 물러날 사람 대하듯 힐끔힐끔 살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때로는 친구들이 갑자기 다정한 말투로 병에 대한 그의 지나친 걱정을 놀려대곤 했다. 그의 몸 속에 번식해서 쉬지 않고 그의 피를 빨아 먹으며 그를 사정없이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이 무섭고 두려운 병이 그들에게는 다시 없이 재미난 농담거리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다.

 

특히 슈발츠는 더욱 그의 비위를 긁어 놓았다. 슈발츠의 태도는 10년 전의 이반 일리이치 자신을 연상시키는, 명랑하고 생기발랄하고 의젓한 것이었다.

 

친구들은 이따금 트럼프를 하러 찾아왔다. 새 트럼프를 뜯어서 섞고 패를 돌린다. 다이아몬드에 또 다이아몬드... 일곱 점이 됐다. 딜러가 말했다. 지금 가진 패만으로 까보기로 하자고. 이건 바로 베팅하는 거다 - 유쾌하고 신나는 판이다. 바로 그 때다. 이반 일리이치는 예의 그 자지러질 것 같은 아픔과 입 속에 피어나는 역겨운 메스꺼움을 맛보았다. 그러자 자기가 지금 노름에서 이긴다는 것이 무슨 기괴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는 딜러인 미하일 미하이로비치를 건너 보았다. 미하일 미하이로비치는 혈색이 좋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치면서 세련되고 너그러운 태도로 도중에 포기한 다른 카드들을 쓸어 모았다. 그리고 이반 일리이치가 팔을 벌리지 않아도 쉽게 카드를 모을 수 있도록 그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뭐야, 이 친구는 내가 아주 다 죽게 돼서 팔도 벌릴 수 없는 줄 아는 모양이군...'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완전히 심사가 틀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만 남에게 돌릴 카드를 자기 앞으로 돌려 버렸다. 그는 결국 세 점이 부족해 완전한 승리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가 괴로운 표정을 짓자 친구들은 "몸이 편치 않으면 오늘은 그만 두지. 자 일찍 쉬는 게 좋을 것 같네..." 이렇게 말했다.

 

쉬다니? 그는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그가 게임을 계속하자고 우겨대자 친구들은 그 판 노름을 마지막까지 놀기로 했다. 그러나 모두 말이 없어졌고, 자리에는 우울한 기분이 감돌았다. 그는 분위기를 깬 것이 자기이며 이제 이 우울한 기분을 회복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챘다.

 

친구들은 밤참을 먹고 헤어졌다. 그들이 돌아가자 이반 일리이치는 자기의 병은 자신만을 해롭게 하는 게 아니라 남들의 생활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런 피해는 줄어들기는커녕 끊임없이 자기의 전 존재 위에 퍼져 가고 있다... 이런 괴로운 자의식과 함께 그는 혼자 남았다.

 

그는 이런 생각과 육체적인 고통, 거기 따르는 두려움을 안고 잠자리에 들어가 뜬 눈으로 밤을 밝히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런 다음날 아침에도 그는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법원에 출근해서 남들과 이야기도 하고 서류를 뒤적였다. 출근하지 않는 날이면 똑같은 스물 네 시간으로 채워진 하루를 순간순간 고문으로 가득찬 집 안에서 보내야 했다.

 

이렇게 그는 누구 하나 이해해 주거나 동정해주는 이도 없이 외로이 견디며 살아가야 했다.

 

 

10. 감출 수 없다!

이런 나날이 한 달 두 달 흘러갔다. 새해를 앞두고 처남이 찾아와서 그들 집에서 묵게 되었다. 그날 이반 일리이치는 법원에 나갔고, 아내는 장을 보러 외출했다. 집에 돌아와 서재로 들어서면서 그는 가방을 풀고 있는 처남을 발견했다. 처남은 원기 왕성하고 다혈질이었다. 처남은 이반 일리이치의 발 소리에 고개를 돌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처남의 눈초리가 이반 일리이치에게는 모든 것을 분명히 깨우쳐 주는 것 같았다.

 

처남은 '악!' 비명 소리를 지르려다 간신히 참은 것이다. 감추려고 해도 그의 놀란 모습은 역력히 드러나고 있었다.

 

"어때, 내가 많이 달라졌지?"

 

"네에, 좀..."

 

이반 일리이치가 아무리 처남에게 자신의 변한 모습에 대해 이야기해보라고 애를 쓰며 말해도 처남은 끝내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이반 일리이치는 방문을 닫고 열쇠를 잠근 다음 거울 속 자기 모습을 들여다 보았다. 앞으로 또는 옆으로. 그 다음에는 전에 아내와 둘이서 찍은 사진을 꺼내 놓고 거울 속 모습과 견주어 보았다. 그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게 변해 있었다.

 

그는 소매를 걷어 올리고 자기 팔뚝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의자에 주저앉아 밤보다 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안 되겠어, 이러다간 안 되겠어...' 그는 자신을 이렇게 타이르고는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가서 서류를 펼쳐 읽으려 했다. 그러나 허사였다.

 

그는 방문을 열고 나갔다. 응접실 문은 닫혀 있었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문으로 다가가 방 안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아냐, 그것은 동생이 너무 심하게 생각한 거야." 아내가 말했다.

 

"심하게 생각하다니요? 누님은 그래, 모르시겠어요? 자형은 지금 송장이나 마찬가지에요. 그 눈을 좀 보세요. 생기가 하나도 없지 않아요. 무슨 병이래요. 글쎄?"

 

"그걸 아무도 모른다는 거야. 의사가 뭐라고 일러 주기는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도 없고... 또 어떤 의사는 정반대 얘기를 하니 말이야..."

 

이반 일리이치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 자리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의사들이 한 말들, 신장이 갈라져서 흔들흔들 움직이고 있다던 말을 생생하게 눈 앞에 그려 보았다. 그는 상상력을 긴장시켜 이 신장을 붙잡아 고정시켜 보려고 애썼다. 그렇게만 해도 좀 나은 것 같았다.

 

'한 번만 더 표도르 이바노비치에게 부탁해 봐야겠군.' 그는 그 유명한 의사와 친하게 지내는 친구였다.

 

이반 일리이치는 갑자기 초인종을 울려 마차를 준비하라고 이르고 외출 준비를 했다.

 

"아니, 지금 어딜 가세요. 여보?" 아내는 슬픈 표정으로 전에 없이 상냥하게 물었다. 그는 침울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표도르 이바노비치를 좀 만나봐야 할 일이 있어."

 

그는 의사를 친구로 둔 그 친구 집으로 마차를 달려갔다. 그리고 그 친구와 함께 의사에게 갔다. 의사와 오래 동안 이야기 한 끝에,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자세히 검토했다. 그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었다.

 

맹장 속에 아주 조그마한 것이 있다. 그것이 원인이다. 그건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기관의 에너지를 보강하고 다른 기관의 활동을 약화시키면 흡수작용이 생겨서 금방이라도 나을 수 있다.

 

의사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그는 저녁식사에 좀 늦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는 가족들과 명랑하게 웃으며 이야기 꽃을 피우고는 늦게야 서재로 돌아왔다. 그는 서류를 읽으면서도 자기에게는 꼭 해야 될, 중요한 일이 따로 있어서 지금 하는 일을 마치면 곧바로 그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잠시도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일을 끝마쳤을 때 그는 그 중요한 일이란 바로 맹장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금방 그 일을 시작하지 않고 응접실로 차를 마시러 나갔다. 응접실에는 손님이 와 있었다. 그들은 집안 사람들 여럿이 함께 이야기도 하고 피아노에 맞춰서 노래도 불렀다.

 

그의 아내의 말에 의하면, 이반 일리이치는 그날 밤 누구보다도 명랑하게 지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는 맹장에 관한 중요한 일을 뒷전에 돌려놓고 있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 11시에 그는 자리를 떠나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병이 든 이래 그는 서재에 딸린 작은 방에서 혼자 자고 있었다. 그는 옷을 벗고 졸라의 소설을 펼쳤으나 별로 읽히지 않았다. 지금 그의 상상 속에서는 그처럼 간절하게 바라던 맹장의 회복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흡수 작용이 일어나고, 배설 작용도 순조롭다. 이제 맹장이 올바른 기능을 회복한 것이다.

 

'그렇지 바로 이런 식으로 해야지.' 그는 스스로 다짐했다. '오직 자연의 힘에 협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약 먹을 시간임을 깨닫고 일어나 약을 마시고 이번에는 반듯이 누워 약이 제대로 자리를 찾고 아픔을 없애주는 현상을 숨을 죽이고 살폈다.

 

'그래, 맞아. 그저 규칙적으로 약을 먹고 좋지 않은 것들을 멀리 하는 것이 최고야. 벌써 상당히 차도가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드는군. 아니, 분명히 상당히 나아졌어...'

 

그는 옆구리에 손을 대 보았다. 만지기만 해서는 아픔을 느낄 수 없었다.

 

'이것 봐라.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이젠 정말 훨씬 나아졌어!' 그는 촛불을 끄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이제 맹장은 다 나았고 고통을 흡수하고 있다...'

 

바로 그때였다. 그는 또다시 전에 느끼던 그 둔탁한 아픔, 곪는 듯한 느낌, 끈덕지고 조용한, 아주 확실한 아픔을 다시 느꼈다. 입 속에서도 똑같은 그 메스꺼운 느낌과 함께... 머리가 흐려지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이구, 맙소사!'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또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말인가. 도대체 왜 또 이러는가, 언제까지 이렇게 계속될까? 이런 빌어먹을!'

 

그러자 그에겐 문제가 이제 다른 측면에서 다가왔다.

 

'아니다. 문제는 맹장도 신장도 아니다. 산다는 것 그리고... 죽음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 생명은 늘 있어 왔다. 그러나 이제 사라지려 한다. 아니 이미 사라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붙잡지 못한다. 그렇다. 어떻게 내 스스로를 속일 수 있단 말인가? 나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단지 오늘이냐 내일이냐 또는 내주냐 하는 시간 문제일 뿐이지 않은가. 어쩌면 지금 당장일지도 모른다. 전에는 희망이 있었다. 지금은 어두움 뿐이다. 전에는 내가 여기 있었으나 이제는 저기로 가고 있는 것이다. 거기는 어디일까?'

 

소름이 끼치며 호흡이 멎었다. 그는 단지 심장의 고동 소리만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없어진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역시 죽는 것일까...? 아니다. 죽기는 싫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촛불을 끄려고 떨리는 손으로 더듬거리다가 촛대와 초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베개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래서 어떻다는 말인가, 결국은 다 마찬가지 아닌가? 죽음... 그렇지. 죽음이다. 그런데도 저들은 아직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고, 가엾게 여기지도 않는다. 흥, 음악을 듣고 있군...'

 

그는 문을 통해 아득히 들려오는 사람들의 웅성대는 목소리와 리또루니에리 반주곡을 들었다. '저들은 내가 어찌 된들 상관없지. 하지만 저들도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다. 바보들 같으니! 내가 먼저 가고, 저희들은 나중에 간다는 차이일 뿐이다. 결국은 마찬가지야. 그런데도 저것들은 그저 즐길 뿐이야. 빌어먹을 것들!'

 

그는 마음에 원한이 차서 답답하고 견딜 수 없게 괴로워졌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누구나 다 이런 무서운 공포를 느껴야 하다니...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결국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그 무언가 이것과 다른 것이 있을 거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처음부터 차분히 다시 생각해 봐야지.'

 

그는 다시 생각에 골몰했다.

 

'그래, 이 병의 원인은 옆구리를 부딪친 거였어. 그땐 아무런 변화도 없었어. 어제나 오늘이나 나는 똑 같은 나일 뿐이었어. 처음엔 조금 욱신거리다가 차차 심해져서 의사를 찾게 됐고, 그때부터 기운이 쇠약해지고 우울해졌지. 그래서 또 의사에게 보이고... 이렇게 나는 점점 더 깊은 구렁텅이로 가까이 간 것이다. 몸은 자꾸 쇠약해지고 눈에 생기도 사라졌다. 바로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창자가 어떠니 이 따위 공연한 생각만 하고 있다. 창자의 병을 고치려고 하지만 사실은 이것이 곧 죽음인 것이다. 그런데, 이게 정말 죽음이란 말인가?'

 

또다시 그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몸을 구부려 성냥을 찾으려고 했다. 뭔가 나무 기둥 같은 것이 팔에 걸렸다. 나무 기둥이 그의 팔을 누르자 그는 홧김에 이를 밀어서 쓰러뜨렸다. 그리고는 분통이 터져 벌렁 나자빠져 지금 당장 죽음이 찾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숨을 헐떡거렸다.

 

이때 손님들은 흩어지고 있었다. 아내는 손님들을 배웅하다가 뭔가 넘어지는 소리를 듣고 그의 방으로 들어왔다.

 

"아니, 여보 왜 그래요?"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뭘 좀 떨어뜨렸어."

 

그녀는 나가서 촛불을 들고 왔다. 그는 멀리서 달려온 사람처럼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 눈을 휩뜨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다.

 

"아! 왜 그러세요, 여보."

 

"아... 아냐, 아무 것도... 그저 뭘 좀 떨어뜨려서..."

 

무슨 말을 하랴? 말해 보았자 알아듣지도 못하는 걸.

 

프라스코비야 후요드로브나는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부지런히 초를 주워서 불을 당기고는 급한 걸음으로 나가 버렸다. 또 다른 여자 손님을 배웅해야 했기 때문에.

 

그녀가 다시 돌아왔을 때도 그는 그대로 천장을 쳐다보면서 벌렁 자빠져 있었다.

 

"아니, 왜 이러구 계세요? 갑자기 병이 더 심해요?"

 

"아아니..."

 

그녀는 알 수 없다는 듯 머리를 흔들며 곁에 와서 앉았다.

 

"이봐요, 여보, 저어... 다른 의사를 불러보시는 게 어때요?"

 

이 말은 요컨대 용한 의사를 불러 오자는, 돈은 아까울 게 없다는 뜻이다. 그는 독을 품고 미소를 띠면서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잠깐 앉아 있다가 옆으로 다가와서 그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그는 그녀가 자기 이마에 입맞추고 있는 동안 자기 영혼의 힘을 다 기울여서 그녀를 증오했다. 그녀를 밀어버리지 않기 위해 모든 의지력을 동원해 스스로를 억제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이젠 괜찮죠? 푹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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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저 놈만이 진실이란 말인가

이반 일리이치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은 아무래도 생소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끊임없는 절망의 나날로 빠져 들어갔다.

 

그는 다른 생각을 계속 끌어대 그 속에서 마음을 의지할 지주를 찾으려고 노력했다.

 

'어디, 다시 한 번 근무에 정력을 쏟아보자. 사실 난 그것으로 살아온 셈 아닌가...'

 

그는 자신의 머리에서 모든 의혹의 상념을 쫓아 버리면서 부지런히 법원에 가서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오랜 습관대로 의자에 걸터앉아 무슨 의미가 있는 듯한 눈초리로 사람들을 둘러 보았다. 야윈 두 팔을 회전 의자의 팔걸이에 올려놓고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동료를 향해 한 두 마디 작은 목소리로 말은 주고 받으며 몸을 숙여 서류를 밀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 눈을 똑바로 뜨고 자세를 꼿꼿이 한 다음 늘 써 먹는 말로 심문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때, 갑자기 옆구리의 통증이 그의 존재를 빨아 들이는 것 같은 작업을 개시했다. 사건 진행 따위는 아랑곳없다는 식이다. 그는 귀에 신경을 집중시켜 이 통증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통증은 태연하게 작업을 계속했다. 드디어 그놈(죽음에 대한 생각)은 그의 눈 앞을 가로막고 선다. 그리고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 본다.

 

몸이 움츠러들고 눈에선 빛이 사라진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되물어 본다.

 

'정말 저 놈만이 진실이란 말인가...?'

 

동료들과 부하 직원들은 이반 일리이치 같이 뛰어나고 능숙한 법관이 갑자기 말을 더듬고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보고 모두 놀랐다. 슬퍼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몸을 떨고 정신을 차리려고 애쓰면서 억지로 공판이 끝날 때까지 견디었다.

 

그는 이제는 법원 일도 전처럼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하며 그놈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서글픈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그놈이 자기를 꼼짝 못하게 해놓고, 그놈만을 바라보도록 만든 것이다. 그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결코 외면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그 무엇을 방패막이로 세워 놓아도 그놈은 기어이 그걸 뚫고 들어오고야 만다. 아무리 해도 막을 길이 없다.

 

그는 어느날 그 응접실 - 바로 그가 몸소 장식한,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사다리로부터 떨어져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 병을 얻게 된 - 그 응접실에 들어 갔다. 그는 그곳에 놓여 있는 탁자에 칼 자국 같은, 긁힌 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 원인을 생각해 보다가 드디어 그것이 끝이 구부러진 앨범의 청동 장식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그는 자신이 애정을 쏟아서 만들어 놓은 그 귀중한 앨범을 들춰 보았다. 그리고 딸과 그 친구들이 칠칠치 못하고 뒤끝이 깨끗치 못한 것에 화가 나고 못마땅해졌다. 앨범은 군데군데 찢어졌고, 사진들도 아무렇게나 뒤죽박죽 붙여져 있었다.

 

그는 힘을 들여서 그것을 깨끗이 정리하고 구부러진 장식도 고쳐 놓았다. 그러다 문득 앨범이 놓여 있는 탁자를 꽃이 놓인 다른 구석으로 옮기고 싶어졌다. 그는 하인을 불렀다. 그러나 아내와 딸이 와서 그의 계획을 반대하며 말다툼을 벌렸다. 그러나 그는 보통 때 같으면 부아가 났을 이 일에도 별로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그놈(죽음)을 생각하지 않았으며 또 어디에도 그놈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몸소 탁자를 옮기려고 하자 아내가 말리면서 말했다.

 

"그만 두세요. 딴 사람을 시켜요. 그러다가 또 몸이 상할 거에요."

 

그러자 갑자기 그놈(죽음)이 또 칸막이 너머에서 어른거렸다. 그는 그놈을 보고 만 것이다. 그놈이 잠깐 어른거렸기 때문에 금방 꺼져버릴 줄 알았다. 그러나 그놈은 어느 틈에 생각치도 못하게 그는 옆구리에 늘어붙어 있었다. 거기에는 역시 같은 것이 도사리고 앉아 그의 일거수 일투족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역시 전처럼 욱신거린다. 이제는 그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놈은 꽃 뒤에서 뚜렷이 그를 지켜 보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것은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그렇다. 나는 바로 여기 이 창문에서 마치 습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목숨을 떨어뜨린 것이다. 그런데 그게 정말이란 말인가? 그런 무서운, 그런 어리석은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그럴 수 없지. 그럴 수는 없어... 그런데 실제로는 그런 일이 바로... 여기 있단 말이야.'

 

그는 또다시 그놈과 단 둘이 있게 되었다. 그놈과 눈을 마주 치면서도 그놈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저 그놈을 바라보기만 하면서 몸이 얼어붙고 있을 뿐이다.

 

12. 게라심

이반 일리이치가 병석에 드러누운 지 3개월째가 됐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 워낙 눈에 띄지 않게 일이 진행된 탓으로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느새 아내도 딸도 아들도 그리고 하인들이나 친지들, 의사, 심지어 이반 일리이치 자신까지도 이제 남은 것은 다만 그가 저 지위를 내놓을 날이 언제인가 하는 것으로 모아졌다. 문제는 살아남을 자들이 그의 존재로 인해 생기는 압박감으로부터 벗어날 날은 언제이며 또한 그 자신 스스로의 고통으로부터 풀려날 날은 언제인가 하는 것들로 모아진 것이다. 그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를 향한 사람들의 관심거리는 모두 그것일 뿐이었다.

 

그는 갈수록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모르핀 주사를 맞고, 아편을 먹었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그를 괴로움에서 구해주지는 못했다. 반 마취상태에서 몽롱한 슬픔을 느끼면서 처음 얼마 동안은 비교적 견디기가 쉬웠으나, 나중에는 그것이 분명한 고통처럼 아니 그보다 더 큰 괴로움으로 변했다.

 

의사가 특별한 음식을 처방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날이 갈수록 그런 음식들조차 맛이 없고, 먹기가 싫어졌다. 배설을 하려면 특별한 장치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바로 그것 때문에 변을 볼 때마다 그는 더 큰 고통을 느껴야 했다. 불결함, 어색함, 지독한 냄새 등을 다른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치르어야 하다니... 그는 그 배설에 필요한 절차가 끔찍했다.

 

견딜 수 없이 불쾌한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이반 일리이치에게 한 가지 위안을 주는 것이 생겨났다. 그것은 변을 본 뒤엔 으레 식당 하인 게라심이 치우려고 온다는 사실이었다. 게라심은 도회지의 음식을 잘 먹고 살이 찐 미끈하고 건강한 젊은 농부출신 사나이였다. 그는 항상 명랑했다. 처음엔 언제나 말쑥한 러시아식 제복을 입고 이런 궂은 일을 하는 사나이의 모습이 적지 않게 이반 일리이치를 당황케 했다.

 

하루는 변기에서 일어섰다가 바지를 끌어올릴 기력이 없어 그는 푹신한 팔걸이 의자 위에 쓰러진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는 힘줄만이 앙상하게 드러나 힘없이 벗겨진 넓적다리를 비참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두꺼운 장화를 신고, 베 앞치마를 걸치고 말쑥한 무명 셔어츠 팔소매를 걷어붙인 게라심이 가볍고 힘찬 걸음걸이로 방에 들어왔다. 그는 병자가 모욕감을 느끼지 않도록, 그의 모습을 외면하면서 변기 쪽으로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 빛나는, 삶에 대한 즐거운 태도를 그는 숨기고 있었다.

 

"게라심." 이반 일리이치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게라심은 자기가 무슨 실수를 저지른 것이나 아닌가 놀라서 몸을 떨었다. 그 젊은이는 재빠른 동작으로 턱수염이 겨우 날까말까 한, 생기가 넘쳐 흐르는 선량하고 단순한 얼굴을 그에게 돌렸다.

 

"무엇을 해 드릴까요?"

 

"항상 생각하는 것인데, 너도 이런 일을 하는 것은 기분이 좋지 않겠지... 미안하다... 그러나 용서해라.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까..."

 

"원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게라심은 눈을 빛내고 하얀 이를 드러내면서 말했다.

 

"원, 이런 일이 뭐 그리 대단합니까? 나리께선 지금 병환 중이신데요."

 

그는 억센 두 손으로 익숙하게 일을 재빨리 해 치우고 가벼운 걸음으로 물러 나갔다. 그리고 한 5분쯤 지나 똑같이 가벼운 걸음으로 되돌아 왔다. 그때까지 이반 일리이치는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게라심, 이리 와서 나를 좀 도와주렴."

 

게라심이 그에게 가까이 왔다.

 

"나를 일으켜다오. 아무래도 혼자선 옷을 입기 힘들구나. 마침 드미트리가 심부름을 가는 바람에..."

 

게라심은 든든한 두 팔로 이반 일리이치를 안아 조심스럽게 가만히 일으켰다. 마치 그의 발걸음처럼 경쾌한 동작이었다. 그런 다음 한 손으로 바지를 끌어올려 입혀주고 다시 자리에 앉혀 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반 일리이치는 자신을 긴 의자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게라심은 별로 힘도 안 들이고 그를 너무 세게 누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겨드랑을 받쳐 안아 긴 의자에 앉혀 주었다.

 

"고맙다. 너는 정말 뭐든지 다 잘하는구나."

 

게라심은 싱긋 웃더니 방에서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반 일리이치는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아주 흐뭇했다. 그래서 그를 내보내지 않았다.

 

"거기 그 의자를 이리 좀 갖고 오너라. 아니, 바로 이렇게 응, 그래 다리 밑에 말야. 그렇지... 이렇게 다리를 고여 놓으면 좀 편해지거든."

 

게라심은 의자를 들고 와서 소리도 내지 않고 아주 익숙하게 마루 바닥에 내려 놓았다.그리고 그 위에 이반 일리이치의 다리를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이반 일리이치는 게라심이 다리를 높이 들어 주자 아주 편안해진 것을 느꼈다.

 

"다리를 더 높이 고여 놓으니까 훨씬 편하군. 저기 저기 있는 의자 세 개도 가져다가 좀 받쳐 다오."

 

게라심은 시키는 대로 했다.

 

"게라심, 너 지금 다른 바쁜 일은 없니?"

 

"제가 뭐 대단스러운 일을 하는 게 있습니까? 해야 할 일은 미리 다 해 놓았습니다. 내일 쓸 장작만 패 놓으면 다 끝납니다."

 

"그래, 그럼... 내 다리를 좀 들고 있어 주겠니?"

 

"네에... 그렇게 해 드려야죠."

 

게라심은 다리를 높이 받쳐 들었다. 이반 일리이치는 이렇게만 하고 있으면 괴로움을 완전히 잊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편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장작 패는 것은 어떻게 하지?"

 

"염려 마세요. 제 때에 쓸 수 있게 다 해 놓을 수 있으니까요."

 

이반 일리이치는 게라심에게 의자를 가져와 앉아 다리를 들고 있도록 일렀다. 그리고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그는 게라심이 다리를 들어 주고 있는 동안은 몸이 아주 편한 것 같았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이반 일리이치는 자주 게라심을 불러 자신의 다리를 그의 어깨 위에 올려 놓고 그와 이야기하곤 했다. 게라심은 그런 일을 전혀 힘들어 하지 않았다. 그는 자진해서 단순한 태도로 그런 일을 했다. 그의 태도에는 이반 일리이치를 감동시키는 단순하고 순박한 것이 있었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지닌 건강과 힘, 젊음은 모두 이반 일리이치에게 모욕감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게라심의 힘과 젊음은 그를 괴롭히거나 슬프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고 위안이 되어 주는 것이었다.

 

이반 일리이치가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허위였다. 그것은 그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거리였다. 남들은 이반 일리이치가 단순히 병을 앓고 있을 뿐이지, 결코 죽어가는 게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가 침착하게 치료를 받기만 하면 틀림없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식의 태도였다. 그러나 이반 일리이치는 그런 허위를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가령 무슨 방법을 써본다 해도 이보다 더욱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을 가져다 줄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결과는 죽음 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허위, 허위, 그의 죽음의 전야에 그에게 행해지고 있는 이 허위... 그의 죽음이라는 이 엄숙한 사실을 다른 사람들은 손님이 찾아오는 것이나 창문에 드리우는 커튼, 식탁에 오르는 연어 고기 따위 평범한 일상으로 끌어내리고 마는 것이다. 사람들은 도저히 그렇게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이러한 허위, 바로 이것이 이반 일리이치에게는 견딜 수 없이 무섭고 괴로웠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그런 허위에 찬 태도를 보일 때마다 외치고 싶었다. 그 따위 입에 발린 수작은 그만 둬! 내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당신들이나 나나 모두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말이야. 그러니 제발 그러지 말아줘! 그런 거짓말은 그만두란 말이야! 이런 말이 혀 끝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는 아무리 해도 그 말을 입 밖으로 끄집어낼 수 없었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이라는 무섭고 우울한 사실을 그저 우연히 생긴 불유쾌한 일 정도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또는 그저 사소한, 예의 바르지 못한 사태 정도의 범상한 일로 격하시키고 말았다. 아무도 이반 일리이치를 가엾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누구도 그의 상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한 사람, 게라심만이 그의 처지를 이해하고 그를 진심으로 가엾게 생각했다. 그래서 이반 일리이치는 게라심과 단 둘이 있는 것이 좋았다.

 

게라심 한 사람만은 그를 거짓으로 대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든 그만이 진실로 이해하고 또 그것을 굳이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그만이 이 병들고 쇠약해진 주인을 지극한 정성으로 가엾게 여긴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한 번은 이반 일리이치가 그를 그만 돌려 보내려 하자 게라심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고 말아요. 무엇 때문에 제 몸을 아끼겠습니까?"

 

게라심은 자기가 이렇게 누군가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 정성껏 돌봐주면 언젠가 때가 와서 자기도 이런 처지가 되면 또 누군가 자신을 이렇게 돌봐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자기가 이렇게 정성껏 주인을 돌봐주는 이유가 거기 있다는 것을 그는 나름대로 그렇게 표현한 것이리라.

 

허위 이외에 또는 허위의 결과로 이반 일리이치를 가장 괴롭힌 것은 누구 한 사람 그를,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동정해 주지 않는 것이었다. 모진 고통을 오래 겪고 나면 사람들은 한 가지를 가장 간절하게 바라게 된다. 비록 그것이 아무리 창피스럽게 느껴질지라도...

 

병을 앓는 아이들처럼, 사람들은 때로 남들로부터 진정으로 동정을 받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반 일리이치 역시 사람들이 아이들을 어르고 위로해 주듯이 그를 애무해 주고 입 맞춰 주고 그를 위해 울어주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것이다.

 

그는 당당한 관리에다, 턱수염이 희끗희끗해진 나이가 지긋한 남자였다. 따라서 자기 자신 역시 스스로가 그런 것을 바란다는 게 무리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마음 속으로 그것을 애타게 바라고 있었다. 게라심과의 관계 역시 어딘지 그런 그의 바람과 비슷한 것이 있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게라심은 그에게 위안이 됐던 것이다.

 

이반 일리이치는 울고 싶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애무해 주고 자신을 위해 울어 주길 원했다. 그럴 때 동료 판사 슈베크가 문병을 온다. 이반 일리이치는 울고 떼를 쓰고 칭얼대는 대신 갑자기 엄격하고 사려 깊은 표정을 지으면서 대심원 판결의 의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늘어놓고 집요하게 그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타성에서 나온 행위였다. 그의 주위와 그 자신 속에 깃들인 이 허위가 무엇보다도 짙게 그의 삶의 마지막 나날을 해치고 있었다.

 

13. 모든 것이 똑같다

아침이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게라심이 물러가고 하인 표도르가 들어와서 촛불을 끄고 커튼을 걷으면서 방 안을 치우기 시작했으므로 그저 아침이 됐다는 것을 짐작할 따름이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혹은 금요일이든 일요일이든 모두가 변함없이 마찬가지일 뿐이었다.

 

'한시도 멈추지 않고 나를 괴롭히는 견딜 수 없는 고통, 절망적으로 끊임없이 멀어지면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생명에 대한 의식, 그리고 끈덕지게 엄습해 오는 저 가증스러운 죽음 그것만이 유일한 현실이다. 그리고 항상 변함없는 그 허위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날짜가 바뀌고 시간이 변화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차를 드릴까요?"

 

'이 놈은 매일 아침 제 주인이 차를 마신다는 습관이 있다는 것 외엔 아무 생각도 없어...'

 

"그만둬."

 

"긴 의자로 바꿔드릴까요?"

 

'방을 치워야 하는데, 내가 가로 걸리는 모양이군. 이들에게 나는 곧 불결이며 무질서일 따름이지.'

 

"아니, 내버려 둬."

 

그래도 하인은 곁에서 뭔가 부스럭거리고 하고 있다. 이반 일리이치가 팔을 벌리자 하인은 공손히 다가온다.

 

"어떻게 해 드릴까요?"

 

"시계."

 

하인은 옆에 있는 시계를 집어 든다.

 

"여덟 시 반이군. 저쪽 방에선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나?"

 

"네, 아직 주무시는데요. 도련님은 학교에 가셨구요... 마님께선 나리가 부르시거든 깨워달라고 그러셨어요. 가서 일어나시라고 할까요?"

 

"그만 둬라."

 

'차라도 마셔볼까...' 그는 생각한다.

 

"그래, 차를 좀 가져와라."

 

하인은 문으로 걸어간다. 그러나 이반 일리이치는 갑자기 혼자 남는 것이 두려워진다.

 

"표도르, 거기 약부터 좀 집어 주렴."

 

'글쎄, 어쩌면 운이 좋아 약이 효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약 효험이 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그는 숟가락으로 약을 마신다. '이까짓 게 들을 리 없지, 순 엉터리인 걸.' 그는 입에 익숙한, 들척지근한 그 맛을 느끼자 절망적으로 이렇게 단정한다. '그런데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이 고통, 이건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제발 일 분 간만이라도 이 고통이 멎어 줬으면...'

 

그는 끙끙 앓기 시작한다. 하인이 다시 들어온다.

 

"나가 봐. 가서 차를 가지고 오렴."

 

하인이 물러가자 이반 일리이치는 또다시 앓는 소리를 냈다. 고통도 심했으나, 그보다도 그는 외롭고 쓸쓸했다.

 

'모든 것이 언제나 그렇다. 언제까지나 변함이 없는 낮과 밤들. 제발 빨리 지나가 버렸으면... 그러면 그 다음엔 무엇이 오나? 죽음, 암흑, 정말 끔찍하다... 그 무엇이 오더라도 죽음보다는 낫지!'

 

하인이 쟁반에 차를 받쳐 들고 들어오자 그는 오래도록 멍하게 하인을 쳐다보았다. 마치 그가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여기 들어왔는지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표도르가 그런 시선에 당황하여 어물거리자 이반 일리이치는 비로소 제 정신이 돌아왔다.

 

"그래, 잘했다. 거기에 그냥 놓아라. 그리고 내가 세수하고 셔츠 갈아 입는 것을 좀 도와주렴."

 

이반 일리이치는 세수를 시작했다. 쉬엄쉬엄 손과 얼굴을 씻고, 이를 닦은 다음 머리에 빗질을 하면서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든다. 푸른 기가 도는 이마에 머리카락이 착 달라붙어 있었다.

 

셔츠를 갈아 입을 때 자신의 몸을 보면 더욱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몸을 보려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가운을 걸치고 담요로 몸을 감싸고 차 쟁반을 앞에 놓았다. 이렇게 팔걸이 의자에 기대 앉는 짧은 순간 그는 상쾌한 기분을 맛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찻잔을 입에 대자 또다시 그 메스꺼움과 고통이 시작되었다. 그는 억지로 차 한 잔을 마신 다음 두 다리를 뻗고 모로 드러누웠다. 그리고 하인을 내보냈다.

 

그저 모든 것이 똑같다. 때로는 희망이 한 방울 반짝이는 듯 하다가 다음 순간 절망의 거친 바다가 파도를 일으킨다. 언제나 그 고통, 똑같은 그 고통, 그리고 외로움과 우울함, 모든 것이 항상 같을 뿐이다.

 

혼자 있노라면 무섭고 침울해진다. 그래서 누구든지 옆에 불러 같이 있고 싶었으나 또 누가 곁에 있으면 더욱 침울해진다.

 

'모르핀을 놓아 달라고 할까... 이 고통을 잊을 수만 있다면... 이번에 의사한테 부탁해서 좀 다른 방법을 써 달라고 부탁해야겠어. 제기랄, 이건 정말 미치겠군. 정말 못 견디겠어...'

 

한 시간 두 시간 이런 상태로 흘러간다. 문득 현관에서 초인종 소리가 난다.

 

'의사가 온 것이겠지.'

 

과연 뚱뚱한 의사가 팔팔하고 생기에 가득찬 표정으로, 쾌활한 태도로 들어선다. 마치 '이런, 또 시름에 잠겨 계시는군. 이제 곧 다 낫게 해 드리죠' 하는 듯한 표정이다. 의사 역시 자신의 쾌활한 표정이 이곳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런 표정이 얼굴에 굳어져 버려 바꿀 수가 없다. 마치 아침부터 연미복 차림으로 여러 집을 방문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의사는 힘차게 위로라도 해주는 것처럼 두 손을 비빈다.

 

"몸이 꽁꽁 얼어버렸습니다. 추위가 대단하군요. 잠깐만 불을 좀 쪼이겠습니다."

 

마치 '불을 쪼이는 동안만 잠깐 참으면 곧 금방 낫게 해 드리죠'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아픈 건 좀 어떠세요?"

 

'요즈음 경기는 좀 어떠세요?' 의사는 이렇게 묻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지난밤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이렇게 묻는 것이라고 느낀다. 적어도 이반 일리이치의 느낌은 그렇다.

 

'자네는 늘 거짓말만 늘어놓으면서도 그게 부끄럽지 않은가?' 이반 일리이치는 이렇게 묻는 표정으로 의사를 본다. 그러나 의사는 이런 질문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다. 이반 일리이치는 말했다.

 

"항상 마찬가집니다. 통증이 도무지 줄어들거나 덜하지도 않아요. 좀 어떻게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까?"

 

"환자들은 으레 그렇게 말하는 법이죠. 이제 겨우 몸이 좀 녹았습니다... 까다로운 프라스코바아 후요드로브나께서도 이제 제 손이 차다는 소리는 못하겠죠... 어디, 좀 볼까요?"

 

의사는 손을 내밀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표정을 싹 바꾸어 근엄한 얼굴로 진맥을 하고 열을 재어 본 후 손으로 환자의 몸을 두드리고 청진기를 대보기 시작한다.

 

이반 일리이치는 이런 것들이 모두 쓸데없는, 공허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의사가 무릎을 굽히고 자신의 몸 아래 위로 청진기를 대어보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진찰에 열중하는 것을 보노라면 어느결에 그의 태도에 빨려 들어가곤 했다. 마치 법정에서 변호사의 변론을 듣고 있노라면 그들이 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그 거짓말을 하는 이유까지 훤히 보이면서도 어느덧 거기에 빨려 들어가듯이.

 

의사가 긴 의자 옆에 무릎을 굽히고 이반 일리이치의 몸을 똑똑 두드리고 있는데, 문에서 아내의 옷 스치는 소리가 났다. 의사가 왔다는 것을 알리지 않은 하인을 나무라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방에 들어오면서 남편에게 입을 맞추기가 무섭게 자기는 벌써부터 일어나 있었다는 것, 의사가 집에 온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 방에 오지 않았다는 등 변명을 해댔다.

 

이반 일리이치는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의 온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것이다. 그녀의 하얀 살결과 알맞은 몸집, 고운 팔목, 윤기 있는 머리카락, 생명력에 가득찬 눈 등이 모두 그에게는 트집 잡을 구실일 뿐이다. 그는 모든 정신을 기울여 그녀를 증오한다. 그녀와의 접촉은 그런 증오를 그에게 가득차게 했다. 그것은 그를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

 

그와 그의 병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과거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의사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를 한 번 정해 놓으면 결코 고치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가 그를 대하는 태도도 그랬다. 즉 그가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아서 저 지경이 되었다는 것, 모두 그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 그러나 자기는 애정을 갖고서 이를 나무라고 있다는 태도였다. 그리고 그녀는 이 태도를 완성해놓고 결코 바꾸지 못하는 것이다.

 

"이 양반은 남의 말을 통 듣질 않아요. 약도 때 맞춰 드시지 않구요.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그래도 다리를 치켜 들고 주무신다니까요. 그러니 열이 위로 오를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글세...?"

 

그녀는 남편이 게라심을 시켜 다리를 쳐들고 눕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의사는 비웃는 듯, 불쌍하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띄운다. 마치 '뭐 별 수 없죠. 환자란 이따금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곤 하니까요. 그래도 그 정도야 봐 주어야죠.' 라고 말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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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모든 것이 똑같다

아침이었다. 하지만 이것 역시 게라심이 물러가고 하인 표도르가 들어와서 촛불을 끄고 커튼을 걷으면서 방 안을 치우기 시작했으므로 그저 아침이 됐다는 것을 짐작할 따름이다. 아침이든 저녁이든 혹은 금요일이든 일요일이든 모두가 변함없이 마찬가지일 뿐이었다.

 

'한시도 멈추지 않고 나를 괴롭히는 견딜 수 없는 고통, 절망적으로 끊임없이 멀어지면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생명에 대한 의식, 그리고 끈덕지게 엄습해 오는 저 가증스러운 죽음 그것만이 유일한 현실이다. 그리고 항상 변함없는 그 허위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날짜가 바뀌고 시간이 변화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차를 드릴까요?"

 

'이 놈은 매일 아침 제 주인이 차를 마신다는 습관이 있다는 것 외엔 아무 생각도 없어...'

 

"그만둬."

 

"긴 의자로 바꿔드릴까요?"

 

'방을 치워야 하는데, 내가 가로 걸리는 모양이군. 이들에게 나는 곧 불결이며 무질서일 따름이지.'

 

"아니, 내버려 둬."

 

그래도 하인은 곁에서 뭔가 부스럭거리고 하고 있다. 이반 일리이치가 팔을 벌리자 하인은 공손히 다가온다.

 

"어떻게 해 드릴까요?"

 

"시계."

 

하인은 옆에 있는 시계를 집어 든다.

 

"여덟 시 반이군. 저쪽 방에선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나?"

 

"네, 아직 주무시는데요. 도련님은 학교에 가셨구요... 마님께선 나리가 부르시거든 깨워달라고 그러셨어요. 가서 일어나시라고 할까요?"

 

"그만 둬라."

 

'차라도 마셔볼까...' 그는 생각한다.

 

"그래, 차를 좀 가져와라."

 

하인은 문으로 걸어간다. 그러나 이반 일리이치는 갑자기 혼자 남는 것이 두려워진다.

 

"표도르, 거기 약부터 좀 집어 주렴."

 

'글쎄, 어쩌면 운이 좋아 약이 효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약 효험이 나지 말란 법은 없지 않은가.'

 

그는 숟가락으로 약을 마신다. '이까짓 게 들을 리 없지, 순 엉터리인 걸.' 그는 입에 익숙한, 들척지근한 그 맛을 느끼자 절망적으로 이렇게 단정한다. '그런데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이 고통, 이건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제발 일 분 간만이라도 이 고통이 멎어 줬으면...'

 

그는 끙끙 앓기 시작한다. 하인이 다시 들어온다.

 

"나가 봐. 가서 차를 가지고 오렴."

 

하인이 물러가자 이반 일리이치는 또다시 앓는 소리를 냈다. 고통도 심했으나, 그보다도 그는 외롭고 쓸쓸했다.

 

'모든 것이 언제나 그렇다. 언제까지나 변함이 없는 낮과 밤들. 제발 빨리 지나가 버렸으면... 그러면 그 다음엔 무엇이 오나? 죽음, 암흑, 정말 끔찍하다... 그 무엇이 오더라도 죽음보다는 낫지!'

 

하인이 쟁반에 차를 받쳐 들고 들어오자 그는 오래도록 멍하게 하인을 쳐다보았다. 마치 그가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여기 들어왔는지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표도르가 그런 시선에 당황하여 어물거리자 이반 일리이치는 비로소 제 정신이 돌아왔다.

 

"그래, 잘했다. 거기에 그냥 놓아라. 그리고 내가 세수하고 셔츠 갈아 입는 것을 좀 도와주렴."

 

이반 일리이치는 세수를 시작했다. 쉬엄쉬엄 손과 얼굴을 씻고, 이를 닦은 다음 머리에 빗질을 하면서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든다. 푸른 기가 도는 이마에 머리카락이 착 달라붙어 있었다.

 

셔츠를 갈아 입을 때 자신의 몸을 보면 더욱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몸을 보려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가운을 걸치고 담요로 몸을 감싸고 차 쟁반을 앞에 놓았다. 이렇게 팔걸이 의자에 기대 앉는 짧은 순간 그는 상쾌한 기분을 맛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찻잔을 입에 대자 또다시 그 메스꺼움과 고통이 시작되었다. 그는 억지로 차 한 잔을 마신 다음 두 다리를 뻗고 모로 드러누웠다. 그리고 하인을 내보냈다.

 

그저 모든 것이 똑같다. 때로는 희망이 한 방울 반짝이는 듯 하다가 다음 순간 절망의 거친 바다가 파도를 일으킨다. 언제나 그 고통, 똑같은 그 고통, 그리고 외로움과 우울함, 모든 것이 항상 같을 뿐이다.

 

혼자 있노라면 무섭고 침울해진다. 그래서 누구든지 옆에 불러 같이 있고 싶었으나 또 누가 곁에 있으면 더욱 침울해진다.

 

'모르핀을 놓아 달라고 할까... 이 고통을 잊을 수만 있다면... 이번에 의사한테 부탁해서 좀 다른 방법을 써 달라고 부탁해야겠어. 제기랄, 이건 정말 미치겠군. 정말 못 견디겠어...'

 

한 시간 두 시간 이런 상태로 흘러간다. 문득 현관에서 초인종 소리가 난다.

 

'의사가 온 것이겠지.'

 

과연 뚱뚱한 의사가 팔팔하고 생기에 가득찬 표정으로, 쾌활한 태도로 들어선다. 마치 '이런, 또 시름에 잠겨 계시는군. 이제 곧 다 낫게 해 드리죠' 하는 듯한 표정이다. 의사 역시 자신의 쾌활한 표정이 이곳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런 표정이 얼굴에 굳어져 버려 바꿀 수가 없다. 마치 아침부터 연미복 차림으로 여러 집을 방문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의사는 힘차게 위로라도 해주는 것처럼 두 손을 비빈다.

 

"몸이 꽁꽁 얼어버렸습니다. 추위가 대단하군요. 잠깐만 불을 좀 쪼이겠습니다."

 

마치 '불을 쪼이는 동안만 잠깐 참으면 곧 금방 낫게 해 드리죠'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아픈 건 좀 어떠세요?"

 

'요즈음 경기는 좀 어떠세요?' 의사는 이렇게 묻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지난밤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이렇게 묻는 것이라고 느낀다. 적어도 이반 일리이치의 느낌은 그렇다.

 

'자네는 늘 거짓말만 늘어놓으면서도 그게 부끄럽지 않은가?' 이반 일리이치는 이렇게 묻는 표정으로 의사를 본다. 그러나 의사는 이런 질문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다. 이반 일리이치는 말했다.

 

"항상 마찬가집니다. 통증이 도무지 줄어들거나 덜하지도 않아요. 좀 어떻게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까?"

 

"환자들은 으레 그렇게 말하는 법이죠. 이제 겨우 몸이 좀 녹았습니다... 까다로운 프라스코바아 후요드로브나께서도 이제 제 손이 차다는 소리는 못하겠죠... 어디, 좀 볼까요?"

 

의사는 손을 내밀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표정을 싹 바꾸어 근엄한 얼굴로 진맥을 하고 열을 재어 본 후 손으로 환자의 몸을 두드리고 청진기를 대보기 시작한다.

 

이반 일리이치는 이런 것들이 모두 쓸데없는, 공허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의사가 무릎을 굽히고 자신의 몸 아래 위로 청진기를 대어보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진찰에 열중하는 것을 보노라면 어느결에 그의 태도에 빨려 들어가곤 했다. 마치 법정에서 변호사의 변론을 듣고 있노라면 그들이 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그 거짓말을 하는 이유까지 훤히 보이면서도 어느덧 거기에 빨려 들어가듯이.

 

의사가 긴 의자 옆에 무릎을 굽히고 이반 일리이치의 몸을 똑똑 두드리고 있는데, 문에서 아내의 옷 스치는 소리가 났다. 의사가 왔다는 것을 알리지 않은 하인을 나무라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방에 들어오면서 남편에게 입을 맞추기가 무섭게 자기는 벌써부터 일어나 있었다는 것, 의사가 집에 온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 방에 오지 않았다는 등 변명을 해댔다.

 

이반 일리이치는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의 온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것이다. 그녀의 하얀 살결과 알맞은 몸집, 고운 팔목, 윤기 있는 머리카락, 생명력에 가득찬 눈 등이 모두 그에게는 트집 잡을 구실일 뿐이다. 그는 모든 정신을 기울여 그녀를 증오한다. 그녀와의 접촉은 그런 증오를 그에게 가득차게 했다. 그것은 그를 더욱 괴롭힐 뿐이었다.

 

그와 그의 병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과거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의사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를 한 번 정해 놓으면 결코 고치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가 그를 대하는 태도도 그랬다. 즉 그가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아서 저 지경이 되었다는 것, 모두 그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 그러나 자기는 애정을 갖고서 이를 나무라고 있다는 태도였다. 그리고 그녀는 이 태도를 완성해놓고 결코 바꾸지 못하는 것이다.

 

"이 양반은 남의 말을 통 듣질 않아요. 약도 때 맞춰 드시지 않구요. 아무리 그러지 말라고 그래도 다리를 치켜 들고 주무신다니까요. 그러니 열이 위로 오를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글세...?"

 

그녀는 남편이 게라심을 시켜 다리를 쳐들고 눕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의사는 비웃는 듯, 불쌍하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띄운다. 마치 '뭐 별 수 없죠. 환자란 이따금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곤 하니까요. 그래도 그 정도야 봐 주어야죠.' 라고 말하듯이.

 

 

14. 허위로 뒤범벅이 된 생활

 

진찰이 끝나자 의사는 시계를 보았다. 아내는 남편에게 그가 뭐라고 말해도 오늘은 유명한 의사가 와 주기로 했으므로 지금 이 의사와 함께 다 함께 모여 병세를 의논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제발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마세요. 이건 저 때문에라도 서두르는 거에요."

 

아내는 비꼬듯이 말했다. 이건 모두 그를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 이런 그녀의 순수한 목적을 생각해서라도 남편이 반대할 권리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것이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잠자코 있었다. 그는 자기를 둘러싼 허위가 이젠 결코 구별해낼 수 없으리만큼 뒤범벅이 되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열 한 시 반이 되자 정말 그 유명하다는 의사가 찾아왔다. 또다시 청진을 하고, 환자 앞에서 혹은 옆방에서 신장이니 맹장이니 하는 진지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과거와 똑같이 엄숙한 표정으로 그에게 묻고 대답하는 절차가 진행되었다. 또 한 번 삶과 죽음이라는, 이제는 그의 앞에 놓인 유일한 현실 문제 앞에 맹장과 신장이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것이다. 두 사람의 의사가 집중 공격을 가해 그들, 삶과 죽음과 맹장과 신장을 설득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유명한 의사는 근엄한 표정으로, 그러나 별로 절망적이지는 않다는 듯한 얼굴로 작별 인사를 했다. 이반 일리이치가 공포와 희망으로 빛나는 눈을 들어 회복할 가능성이 있느냐고 머뭇거리며 묻자, 그는 확답을 할 수는 없지만 가능성은 있다고 대답했다.

 

이반 일리이치가 간절하게 희망을 담아 의사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너무도 비참해서, 그것을 본 아내는 의사에게 왕진비를 주려고 밖으로 나가면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의사의 방문으로 일시 원기가 회복된 듯했지만 그것도 오래 가진 못했다. 여전히 같은 방, 같은 그림, 같은 커튼, 벽지, 약병, 그리고 같은 고통에 시달리는 자신의 육체. 이윽고 이반 일리이치가 앓는 소리를 내자 주사 바늘을 찔러넣었다. 그는 의식을 잃었다.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이미 황혼이 짙어지고 있었다. 식사가 들어왔다. 그는 힘을 들여 고기 수프를 마셨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또다시 밤이 찾아왔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일곱 시에 아내가 그의 방으로 왔다. 야유회에 나가는 듯한 옷차림으로 탐스러운 가슴을 불룩 내밀고 얼굴에는 짙은 화장을 했다. 그녀는 이미 오전에 극장에 간다는 얘기를 그에게 미리 해놓았다. 사라 베르날 극단이 와 있어서 그녀는 그가 예약해 놓으라던 좌석의 표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반 일리이치는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외출 차림은 그에게 극심한 모욕감을 주었다. 그러나 곧 아이들의 교육에도 좋고, 흥미 있는 오락거리이기도 하니 좌석을 예약하라고 말했던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생각해냈다. 그는 모욕감을 감추려고 애를 썼다.

 

아내는 흐믓하지만 어딘지 미안해 하는 표정으로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잠시 곁에 앉아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 질문이 형식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병세를 안다고 해도 별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렇게 물을 뿐이다.

 

그녀는 미리 준비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기는 가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좌석을 이미 예약해둔 데다, 헬렌도 가고 딸과 페트리시체프(사위가 될 예심판사)도 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나는 당신 곁에 있는 것이 더 좋지만, 그러나 자기가 없더라도 당신은 만사를 의사의 지시대로 잘 하시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 저 후요돌 페트리시체프(사윗감)도 이리 오고 싶어하던데 오라고 할까요? 리쟈도 함께요."

 

"오라고 하구려."

 

화려하게 치장한 딸은 몸의 선이 뚜렷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 육체야말로 그를 가장 괴롭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힘있고 건강이 넘치는 그녀는 한눈에 보아도 사랑의 즐거움에 취해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행복에 장애가 되는 병이나 거기 따르는 고통, 죽음 따위는 그녀에게 자신의 행복을 방해하는 분노의 대상일 뿐이다.

 

연미복 차림의 후요돌 페트로비치도 눈이 부시게 하얀 칼라로 길고 굳센 목을 감싸고 넓은 가슴을 쫙 펴고 들어왔다. 그는 검은 바지를 입고 탄력이 넘치는, 기운 찬 발걸음으로 한 손에 꼭 맞는 흰 장갑을 끼고 오페라 모자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들의 뒤로 새 중학생 교복을 입은 아들도 들어왔다. 가엾게도 눈 밑에 푸른 멍이 들어 있었다. 이반 일리이치는 그 멍이 생긴 원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아들이 그는 항상 가여웠다. 그 놀란 듯한, 측은해 하는 눈이 두려운 표정을 담고 있다. 게라심을 제외하고는 이 아들만이 자신을 이해하고 마음 아프게 생각해 주는 것 같았다.

 

일행은 자리에 앉아 또 한 번, 좀 어떠시냐고 물었다. 침묵이 흘렀다. 리자가 제 어머니에게 오페라 안경을 어디다 두었느냐고 물었다. 그것을 누가 어디에 두었느냐를 놓고 어머니와 딸은 말다툼을 벌렸다. 분위기가 불쾌해졌다.

 

후요돌 페트로비치는 느닷없이 이반 일리이치에게 사라 베르날 극단 공연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이반 일리이치는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 당황했으나 이내 대답했다.

 

"아니. 자네는 본 적이 있나?"

 

"네. 학생 때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그 여배우는 그 역을 맡을 때가 가장 멋지다고 했다. 딸이 거기 대해 반박했다. 곧 그 유명한 여배우의 연기에 대한, 틀에 박힌 대화가 시작되었다.

 

이야기 도중에 후요돌 페트로비치는 힐끗 이반 일리이치를 쳐다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를 힐끔 보고는 이야기를 뚝 그쳤다. 이반 일리이치가 그들을 노여움에 가득 차 번들거리는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방 안의 분위기는 극도로 무거워졌다. 그러나 아무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무거운 침묵을 깨뜨려야 했으나 아무도 선뜻 그렇게 할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모두들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겨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이 형식적인 평형이 깨져 제각기 마음 속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면 어쩌나 하고...

 

리자가 제일 먼저 결심했다. 그녀는 침묵을 깨뜨렸다. 그녀는 모두가 느끼고 있으면서도 숨기고 있는 것을 마침내 입 밖에 쏟아 놓았다.

 

"이제 극장에 갈 시간이 되었는데요."

 

그녀는 아버지가 선물한, 자기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리고는 남들은 알아 보지도 못할, 자기들만이 아는 어떤 의미가 담긴 미소를 약혼자에게 보냈다. 그녀는 옷 스치는 소리를 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를 따라 다른 사람들도 일어서서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버리자 이반 일리이치는 갑자기 기분이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 허위가 사라진 것이다 - 그것은 그들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고통은 남았다. 전과 다름없는 고통, 다름없는 공포가 더 무거워지지도 가벼워지지도 않은 채 그대로 남은 것이다. 다만 더 악화되어 가고 있을 뿐이다.

 

"게라심 보고 들어오라고 그래라." 그는 옆에 서 있는 하인에게 말했다.

 

 

15. 나는 잘못 살아온 것 아닐까

밤이 이슥해서야 아내는 돌아왔다. 살금살금 발 끝으로 걸어 들어왔으나 그는 그녀가 들어온 것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는 눈을 떴다가 금방 다시 감아 버렸다. 그녀는 게라심을 돌려 보내고 자기가 그의 옆에 앉으려 했다. 그는 눈을 뜨고 말했다.

 

"그만 두고 저 방으로 그냥 가도록 해요."

 

"여보, 더 심해요?"

 

"마찬가지야."

 

"그럼, 아편을 좀 드세요."

 

그는 아내의 말에 따라 아편을 마셨다. 그녀는 옆 방으로 건너갔다.

 

새벽 세 시경까지 그는 야릇한 혼수 상태에 잠겨 있었다. 자신이 통증과 함께 어디론가 아주 좁은 굴 속 같은 곳을 깊고 시커먼 자루 속에 갇혀서 점점 깊게 빠져 들어가고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곳을 빠져 나갈 수가 없다. 이 무서운 기분은 고통과 더불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두려워 하기도 하고 또 가는 데까지 가 보자고 마음 먹기도 하면서 싸우기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벼랑에서 떨어지듯이 그는 혼수 상태에서 깨어났다.

 

게라심은 침상의 발치에 앉은 채로 조용히 자고 있었다. 그는 긴 스타킹을 신은 야윈 다리를 그의 어깨 위에 올려 놓은 채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갓을 씌운 촛불과 멈출 줄 모르는 이 고통...

 

"이제 그만 가서 자거라, 게라심." 그는 속삭이듯 말했다.

 

"괜찮습니다."

 

"아니야, 이젠 그만 가 보거라."

 

그는 다리를 내려놓고 한 팔을 밑에 고이고 옆으로 드러누웠다. 자신이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게라심이 옆방으로 갈 때까지 간신히 참았다가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자신의 쇠약함, 무서운 고독, 사람들의 잔혹함, 신의 잔혹함을 생각했다.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것을 생각하고 우는 것이었다.

 

'무엇 때문에 당신은 이런 짓을 하십니까? 왜 저를 이리로 보내셨습니까? 무엇 때문에, 정말 무엇을 위해 이런 혹독한 괴로움을 주십니까?'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오로지 아무 대답이 없다는 것, 결코 대답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울었다. 또다시 고통이 엄습해왔으나 그는 몸도 움직이지 않고 누구를 부르지도 않았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자, 더 더 때려 주시오!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했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이윽고 그는 조용해졌다. 울음을 그쳤을 뿐 아니라 호흡도 중지하고 전신에 주의를 집중했다. 그것은 마치 목소리로 하는 말이 아니라 영혼의 소리, 그의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생각의 흐름을 듣는 듯한 자세였다.

 

'도대체 너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 이것이 그가 인식할 수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생각이었다.

 

'무엇이 필요하냐? 무엇을 원하느냐 말이다.' 그는 자신에게 되풀이해서 물었다. '무엇이냐고? 그것은 고통을 없애는 것이다. 살아나는 것이다.' 그는 대답했다.

 

'살아난다? 어떻게 살아난단 말이냐?' 영혼의 소리가 물었다.

 

'예전에 내가 살아온 것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다. 오붓하고 유쾌하게...'

 

'오호, 그래? 예전에 네가 살아왔듯이 오붓하고 유쾌하게 말이지?' 그 소리는 묻는다.

 

거기서 그는 머리 속에서 자기의 유쾌한 생활 중에서 특히 좋았던 순간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들 모든 유쾌했던 생활들이 이제는 당시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느껴졌다. 유년 시절 최초의 기억을 제외하고는... 그러자 이 유년 시절은 정말 좋았던 그 무엇인 것처럼 여겨져서 만약 그것이 되돌아올 수만 있다면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유년 시절의 이 유쾌했던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철이 들었을 때부터의 기억, 당시엔 무척 즐거웠던 것들은 이제 그의 눈 앞에서 흩어져 버리고 무언지 하잘 것 없는, 오히려 누추하기 짝이 없는 것으로 변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것은 법률학교 시절부터 시작된다. 거기에 진실로 좋은 것이 무엇 하나라도 있었던가!

 

그곳에 즐거움은 있었다. 우정도 희망도 있었다. 그러나 상급생이 되어 가면서 이 좋았던 것들도 차차 희미해졌다. 다음으로 주지사 밑에서 처음으로 근무했던 시절의 좋았던 순간이 나타났다. 그것은 여성에 대한 사랑의 기억이었다. 그러나 이것들도 이내 모두 뒤범벅이 되어 버렸다. 그 다음부터는 좋았던 것이 차차 드물어져서 시간이 흐를수록 거의 없어져 갔다.

 

예상하지 못했던 결혼... 그 환멸, 아내의 입 냄새, 육욕, 허위! 그리고 이 죽음과 다름없는 근무 생활, 돈에 쪼들렸던 생활, 이렇게 흘러간 일 년, 이 년, 십 년, 이십 년... 어디까지 간다 해도 결국 마찬가지다. 앞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더욱 활기가 사라질 뿐이다. 그리고 이제는 준비가 다 되었다. 죽음이 있을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도대체 뭐란 말이냐? 무엇 때문이란 말이냐? 이럴 리가 없다. 인생이 왜 이리도 무의미하고 추악해야 한다는 말이냐? 가령 사실이 그렇다고 해도 왜 죽어야 하나, 왜 고통을 겪으면서 이렇게 죽어야 하는 것인가?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아니냐?

 

'어쩌면 나는 잘못 살아온 것 아닐까? 하지만 나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해온 것 뿐인데... 도대체 왜 이렇게 잘못되었단 말이냐?'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삶과 죽음의 수수께끼에 대한 단 하나의 결론을 마치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얘기인 것처럼 완전히 부인하고, 제풀에 멀리해 버렸다.

 

도대체 너는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느냐. 삶이냐? 어떻게 사는 것이냐? 그는 자신에게 되풀이해 물었다. 그렇지, 이게 바로 법정이란 말이다. 하지만 나에겐 결코 죄가 없다! 그는 분노에 차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그는 울음을 그치고 이마를 벽에 돌려대고 단 한 가지 것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기로 했다.

 

'무엇 때문이냐, 이 공포는 무엇 때문이냐?'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답을 찾아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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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유년 시절 외에는 다 틀렸어!

두 주일이 지나갔다. 이반 일리이치는 이젠 긴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서 잠들기를 싫어했다. 거의 언제나 벽 쪽으로 머리를 돌려대고 누워 혼자서만, 해결되지 않는 고민에 괴로워하면서 아무리 해도 풀려지지 않는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이게 무엇일까? 과연 이게 죽음일까?'

 

내부의 소리가 대답한다.

 

'맞다. 바로 그것이다.'

 

'이 고통은 무엇 때문에 생기는 것이냐?'

 

내부의 소리가 대답한다.

 

'그 무엇 때문도 아니지.'

 

그 뿐이었다. 그 이상도 아니고, 그 이외엔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병이 든 이후 그가 처음으로 의사를 찾아갔던 그때부터 그의 생활은 끊임없이 서로 어긋난 두 개의 마음으로 갈려 싸우고 있었다. 하나는 알 수 없는 무서운 죽음에 대한 예감과 절망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자신의 육체 활동에 대한 흥미진진한 관찰과 희망이었다. 이 두 개의 심정은 병이 든 바로 그때부터 서로 엇갈려서 그의 마음을 지배하곤 했다. 그러다 병이 위중해짐에 따라 점점 죽음의 의식만이 나날이 현실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그는 세 달 전의 자신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견주어 보고 지금 자신은 또박또박 산을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모든 희망의 가능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요즈음 이반 일리이치는 긴 의자의 등으로 얼굴을 돌리고 누워서 지난 날의 회상만으로 살고 있었다. 그의 눈 앞에 잇달아 갖가지 과거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것들은 으레 가장 가까운 현실에서 시작해 가장 먼 유년시절에 이르러서 멎었다.

 

하인이 먹으라고 놓아둔 마른 살구를 보자 그가 유년 시절에 날로 먹은, 껍질이 쭈글쭈글하게 마른 프랑스 살구를 생각해냈다. 그 유별난 맛과 이빨이 씨에 닿았을 때 입 속 가득 고였던 침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기억과 연결된 다른 일련의 회상이 떠올랐다. 유모의 생각, 형제들과 지낸 일, 장난감 등(이런 것들을 회상할 필요는 없다... 너무나 괴롭지 않은가...)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이반 일리이치는 그때마다 자신을 타이르고 현실로 돌아왔다. 긴 의자의 등에 달린 단추와 모로코 가죽의 주름(이 모로코 가죽은 비싸기만 하고 튼튼하지 못해... ) 그것 때문에 아내와 다툰 적이 있다. 또 다른 일로 다투기도 했다.

 

어렸을 때 우리가 아버지의 서류 가방을 찢어 벌을 받을 때 어머니가 피로그를 가져다 주신 적이 있었지... 이렇게 해서 또 기억은 유년 시절에 이르고 그는 다시 괴로워져서 그 생각을 집어 치우고 다른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그러자 또다시 생각의 흐름은 자신의 병이 어떠한 경로로 심해졌고, 악화되었나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런 회상 역시 과거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생기가 넘치고 풍성해졌다. 생활 속에서 옳았던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생명 그 자체가 풍성해지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들이 모두 뒤섞여 있었다.

 

'병이 악화될수록 생활도 나빠져간다.' 그는 생각했다. '죽음과 거리의 두 제곱 세 제곱으로 반비례하면서...'

 

이렇게 가속도를 더해가면서 돌멩이처럼 떨어져가는 생명의 모습이 그의 마음에 깊은 자국을 남기는 것이었다. 차차 더해가는 고통의 연속인 생명이 쉬지 않고 그 속도를 더해간다. 그러면서 최후의 한 지점, 가장 무서운 고통의 정점으로 달음질친다. 그는 몸서리쳤다. 몸을 뒤척여 저항하려고 했다. 그러나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이미 그것을 보는 것에도 지쳤으면서도 자신의 앞에 있는 것을 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어서 긴 의자의 등을 들여다보면서 기다린다. 그 무서운 낙하를, 충격을, 파괴를 기다리는 것이다.

 

'저항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그것만이라도 알았으면... 그것조차도 안 된다. 나의 삶이 틀렸다고 하면 설명이 되겠지만... 그러나 이젠 그것도 믿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생활이 합법적이었다는 것, 자신이 지켜온 도리와 예절 등을 생각해내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제 이런 것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그는 입술 끝에 야릇한 미소를 떠올리면서 마치 누군가 그 미소를 보는 자가 있어 그에게 자신이 이제 더 이상 속지 않는다는 것을 보이기라도 하듯이 혼자서 중얼거렸다.

 

'아니, 아무 설명도 필요 없다. 고통, 죽음...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17. 증오

이렇게 또 두 주일이 지나갔다. 이 두 주일 동안 이반 일리이치와 그의 아내가 바라던 일이 실현되었다. 페트리시체프가 정식으로 딸에게 결혼을 신청해온 것이다. 그때는 밤이었다. 다음날 아내는 그의 신청을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남편에게 갔다.

 

바로 그날 밤 이반 일리이치에게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아내는 남편이 여전히 긴 의자에 누워 있지만 새로운 상태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반듯하게 누워서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치켜 뜨고 앞 만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약 이야기를 하자 그는 시선을 그대로 그녀에게 옮겼다. 그녀는 말하던 것을 멈췄다. 다름 아닌 바로 그녀에 대한 증오가 그 눈 속에 뚜렷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부탁이니 제발, 조용히 죽게 해 줘." 그는 말했다.

 

그녀는 물러가려고 했다. 그때 딸이 들어와서 인사를 하려고 옆으로 왔다. 그는 아내를 바라보던 것과 똑 같은 눈으로 딸을 쳐다보았다. 좀 어떠시냐고 딸이 묻는 것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이제 머지 않아 너희들 전부를 나로부터 풀어주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잠시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아니,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했다는 거에요?" 리자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마치 우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처럼 말씀하시잖아요! 아빠가 불쌍하기야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를 괴롭힐 것 까지는 없잖아요."

 

시간에 맞춰 의사가 집으로 왔다. 이반 일리이치는 노한 눈초리를 의사에게 떼지 않으면서 말했다. "아, 다 그만두시오." 그리고 덧붙였다. "이제 무슨 수를 써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소? 그러니 이만 내버려 두시오."

 

"고통을 덜어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나마도 잘 안되지 않소? 그만 두시오."

 

의사는 응접실로 나갔다. 그리고 이반 일리이치의 아내에게 병세가 위험한 고비에 이르렀다는 것, 무서운 고통이 찾아올 수밖에 없다는 것, 그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선 단 한 가지 아편을 먹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렸다.

 

의사가 말한 것은 사실이었다. 정말 끔찍한 고통이 닥친 것이다. 그러나 그 육체적인 고통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겪은 고통 중 가장 심각한 것이었다.

 

이 정신적인 고통은 그날 밤 게라심의 졸리운 듯한, 호인다운 얼굴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머리에 떠오른 생각에서부터 우러났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만약 나의 생활이, 그 동안 내가 의식적으로 꾸려온 나의 생활이 전부 틀린 것이었다면 어찌 될 것인가?'

 

이런 생각은 전에는 꿈에도 해보지 않은 것이었다. 그의 생활이 전부 틀린 것이었다면, 어쩌면 그것이 진실이라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사회의 최고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옳은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 자신도 가끔 그것에 저항해보고 싶었던 그 깊이 숨겨졌던 마음의 흐름들, 머리 속에 떠오를 때마다 그가 일부러 물리쳐 버렸던 그 아주 작은, 깊이 숨겨진 것들 그것이야말로 진실한 것이고 그 밖의 것들은 모두 옳지 않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근무도, 그의 생활 설계도, 가정도, 사교나 업무상의 흥미도 모두 진실한 것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그는 이것들을 모두 변명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갑자기 자신을 변명해 주는 것이 빈약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을 변명해 보았자 소용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만약...' 그는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나에게 주어졌던 모든 것이 쓸데없는 것이고,그런 사실을 도저히 돌이킬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 세상을 떠난다면 그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는 다시 되풀이해서 자신의 전 생애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아침이 되어서 하인을, 아내와 딸을 그리고 의사를 보자 그들의 일거일동과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모두 그가 밤새 결론지었던 그 무서운 진실을 확증해 주었다.

 

그는 그 진실 속에서 자신을 보았고, 그가 여태까지 의지하고 살았던 모든 것을 보았다. 그것은 분명히 틀린 것이었다. 그것은 삶과 죽음을 모두 덮어 가려버리는 무서운 기만이었다.

 

이런 생각은 그의 육체적 고통을 10배나 더하게 했다. 그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몸을 뒤틀고 걸치고 있던 옷을 쥐어 뜯었다. 그것들이 그를 짓눌러 질식하게 만들었다.

 

아편을 다시 대량 주사하자 그는 인사불성이 되었다. 그러나 식사 때가 되자 또 마찬가지 일들이 되풀이되었다. 그는 모든 사람을 곁에서 물리치고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다. 아내가 곁에 와서 말했다.

 

"여보, 제발 저를 위해서라도(저를 위해?) 이렇게 해 주세요. 이건 아무 해도 없고, 어떨 땐 아주 효과적일 때도 있어요. 네, 걱정하실 것 없어요. 건강한 사람들도 늘..."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성찬식? 무엇 때문에? 필요 없어!"

 

그녀가 울기 시작한다. "네? 여보, 내가 가서 신부님 오시라고 하겠어요. 그 분은 정말 인자하신 분이에요."

 

"좋아, 좋아..." 그는 되풀이했다.

 

신부가 와서 그를 참회시키고 나자 그는 기분이 가벼워졌다. 어쩐지 의혹도 줄어들고 괴로움도 좀 가신 것처럼 느껴져 그는 한 순간 희망을 되찾는 듯했다. 그는 또다시 회복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두 눈에 눈물을 머금고 성찬을 받았다.

 

성찬을 받고 자리에 누웠을 때 그는 잠시 기분이 편안해져서 다시 살아날 희망에 사로잡혔다. 그는 얼마 전에 의사가 권유했던 수술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살고 싶다. 더 살고 싶다.'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아내가 축하하러 왔다. 그녀는 판에 박힌 말을 늘어놓은 다음 말했다.

 

"그거 보세요. 제가 말한 것처럼 좀 나아졌죠?"

 

그는 그녀 쪽을 보지 않으며 대답했다. "음."

 

그녀가 입고 있는 옷, 그 체격, 얼굴 표정, 목소리... 이 모든 것은 다만 한 가지 사실만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 틀린 것이다. 네가 과거에 살아왔고, 현재 살고 있는 모든 것은 허위일 뿐이다. 너에게서 삶과 죽음을 가리우고 있던 기만인 것이다.

 

그러자 증오하는 마음, 그것과 더불어 무서운 육체적인 고통, 그 고통과 더불어 피할 수 없이 다가오는 절망의 의식이 고개를 쳐들었다. 새로운 변화가 왔다. 가슴을 조이는 듯 쿡쿡 쑤시며 호흡을 압박하는 것이다.

 

"음..." 기를 쓰며 안간힘을 다하는 그의 얼굴은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 말라빠진 몸으로는 생각하지도 못할 빠른 속도로 몸을 뒤집어 아내를 외면하면서 그는 소리쳤다.

 

"나가 줘! 나가! 제발 나를 상관하지 말아 줘...!"

 

18. 비명 그러나 안식

그 순간부터 사흘 동안 쉬지 않고, 공포 없이는 들을 수 없었던 그 무서운 고함소리가 시작되었다. 그가 아내에게 대답했던 그 순간 이미 그는 모든 것이 글렀다는 것을, 되찾을 수 없는 최후가 온 것임을, 정말 최후가 왔으나 여전히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은 채 남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으아아! 으악! 아아...!"

 

그는 가지각색 다른 소리를 질러댔다. 처음에는 "싫다아!"하고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고, 그 소리를 그대로 길게 뽑아 내리 고함을 질러댔던 것이다.

 

그 사흘 동안 그에게는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보이지 않는, 당해낼 수 없는 힘에 밀려 들어간 그 검은 자루 속에서 허우적거린 것이다. 그는 사형수가 살아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몸부림치듯이 버둥거렸다. 그리고 끊임없이, 아무리 죽을 힘을 다해서 달아나도 자신은 무섭게 그것이 있는 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괴로움이 이 검은 구멍 속에 빨려 들어가는 데서 나온다는 것,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이상으로 자신은 결코 그 속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에 있음을 의식했다. 그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직도 그의 생애가 훌륭한 것이었다는 그 의식이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그를 괴롭혔다.

 

갑자기 이상한 기운이 그의 가슴과 옆구리를 꿰뚫으면서 한층 더 강하게 그의 호흡을 압박했다. 그는 구멍 속에 빠져 들어갔다. 그러자 그 구멍이 흩어지면서 무엇인가 빛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그는 자신에게 되물어본 다음 조용해졌다.

 

그것은 이틀째 되던 날의 마지막 시간, 그가 임종하기 두 시간 전이었다. 그때 어린 중학생이 가만히 아버지 방에 들어와서 아버지의 곁으로 걸어왔다.

 

죽어가는 이는 끊임없이 소리를 지르고 두 팔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아버지의 한 손이 중학생의 머리 위에 얹어졌다. 중학생은 그 손을 붙잡아 입술에 대고 울음을 터뜨렸다.

 

바로 그 순간 이반 일리이치는 구멍 속에 빠져 들어가 빛을 본 것이다. 누군가 자기 손에 입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눈을 뜨고 힐끔 아들을 보았다. 그러자 아들이 가엾어졌다. 아내도 옆에 와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잠깐 눈을 돌렸다. 그녀는 입을 벌리고 코와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다. 그는 그녀도 불쌍해졌다.

 

'그렇지? 나는 저들까지 괴롭히고 있다. 내가 죽으면 저들은 슬퍼하리라. 하지만 결국은 그러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말하려고 했지만 그럴 기운이 없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내가 이 말을 해야 되는가. 그저 그대로 실행만 하면 되지 않나...'

 

그는 아내에게 눈으로 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데려가오... 불쌍한 자식... 당신도 그렇고..."

 

그는 덧붙여 '프로스치(용서해라)'라고 말하려 했으나 "프로프스치(들여 보내라)"라고 말하고 말았다. 그는 이미 그 말을 다시 할 기력도 없어 필요한 사람은 알아 들으리라 생각하면서 한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여태까지 그를 괴롭히면서 떠나지 않던 것들이 한꺼번에 모두 물러나려고 하는 것을 그는 갑자기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남는 그들이 불쌍했다. 그들이 슬퍼하지 않게 해 줘야 한다. 이 괴로움으로부터 그들을 구해내고 나 자신도 벗어나야 한다.

 

'아, 얼마나 상쾌한 기분이냐! 얼마나 간단한 것이냐!'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고통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이냐? 고통은? 응,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는 다시 귀를 기울였다.

 

'그렇지. 이제 그만이다. 뭐, 아플 테면 아파 봐라. 거리낄 것이라곤 없다. 그런데... 죽음은? 죽음은 어디 있는 거냐?'

 

그는 이제 친숙해진 죽음의 공포를 찾아 보았으나 눈에 뜨이지 않았다. 죽음은 어디 있지? 죽음이란 뭐냐? 아무 공포도 없었다. 죽음이 없었기 때문에... 대신 거기에 빛이 있었다.

 

"아아! 이것이었구나!"

 

갑자기 그는 소리를 높여 말했다.

 

"아! 얼마나 기쁘냐!"

 

그에게 이런 것들은 모두 한 순간에 일어났다. 그러나 그곳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그의 임종의 괴로움은 두 시간이나 더 계속되었다. 그의 가슴 속에선 무언가 걸렁걸렁 소리가 울려나왔고, 수척해진 몸은 계속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드디어 헐떡임과 벌렁거리는 숨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임종하셨습니다." 누군가 그를 굽어보며 말했다.

 

그는 그 말을 듣고 그것을 가슴 속에서 되새겼다.

 

'죽음은 마지막이다.'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이제 죽음은 없는 것이다.'

 

그는 공기를 들여 마시려고 했으나 깊은 호흡은 중간에서 끊어지고, 몸을 한 번 쭉 뻗자 그대로 죽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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