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ine의 역사인식

1. Augustine 사관의 제문제

기독교 사관은 Augustine 에 의해서 체계화되었고 그의 저서인 {신국론}에 대한 중세적 이해는 교황청과 중세의 종교, 정치, 사회면에 대해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Augustine 의 역사관과 그것이 잘 드러나고 있는 {신국론}에 대해서는 몇 가지 문제가 제기되었다.
우선은 {신국론}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혹자는 그것을 사회관과 정치관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는 반면, 다른 이는 기독교에 대한 '교리적 역사서설'이라 규정하였고 기독교에 대한 변호가 Augustine 의 주된 관심사라고 말한 이도 있다. 그러나, {신국론}의 영향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역사가 무엇인가를 결과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논쟁거리는 Augustine 을 역사철학의 아버지라 볼 수 있는가하는 문제였는데 이에 반대한 이들은 Augustine 이 역사를 계시의 영역으로 보고 계시의 관점에서 역사를 종합하였으므로 이것은 철학이 아니라 역사신학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그를 역사철학자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가 역사의 통일성을 제시하고 고대 그리이스적 시간관과 운명관을 극복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인간에게 현세를 넘어선 목적을 부여함으로써 역사에도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을 중시하였다. 역사철학이 역사적 사실들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경향성에 빠질 수 있는 결함을 가지고 있으나 사변적 역사와 비판적 역사가 적대관계가 아닌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Augustine 은 남다른 비젼을 제시한 역사철학자라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2. 역사가로서의 Augustine

성바오로의 역사인식이 Augustine 에 이르러 체계화되었으나 Augustine 은 전통적인 의미가 역사가가 아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역사'란 용어를 탐구적 의미, 또는 예언적 의미 그리고, 성서적 역사의 의미 등으로 모호하게 사용하고 있다. Augustine 은 역사적 사실의 인용을 로마 역사가들에게 의존하면서 자료 사용에 정확성을 기하지 못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착오는 그의 교육적 배경과 역사에 대한 태도의 변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원전 2세기 이후 로마제국 말기에 있어서 교과과정은 문학과 수사학이 중심이 되었는데 문법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역사적 지식을 공여하게 되었다. 역사책은 수사학자들이 주로 가르쳤으며 문체의 장단점에 대한 토의가 자주 이루어졌고 Augustine 자신도 역사는 수사학자가 담당하는 분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로 개종한 이후 역사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다.
당시 웅변가들은 주장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내용의 과장이나 거짓말을 크게 문제시 하지 않았다. 또, 시와 역사의 구별이 불분명하여 사료의 비판이나 사실의 정확성이 크게 문제시 되지 않았다. 그래서, Augustine 은 진정한 역사를 성서의 역사로 보았고 진실의 기준은 그것이 성경과 합치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평가하였다. 그 결과 이교도들의 역사는 성서역사의 보조적인 기능만을 담당하게 되었고 Augustine 에게서 두드러지는 현상으로서 역사적 서술과 역사적 사실들을 분리시키는 결과들을 낳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란 신의 섭리와 계획의 전개이며 그 과정이란 그 의지의 구현에 불과하다는 구속사적 의미를 짙게 내포하게 되었다. 그래서, 로마사가들에게서 나타났던 애국적 표현이나 수사적 표현의 중요성은 퇴색하고 성경의 6시대 구분법에 따라 역사를 서술하고 모든 인류의 역사를 하나의 시각에서 보는 통일성을 역사 서술의 근간으로 도입하게 되었다.
이같은 배경의 변화속에서 Augustine 의 역사인식은 성경에 대한 충실한 태도, 목적을 향해 역사가 지속된다는 확신, 신의 행위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의 세 가지 기본점위에 기초하게 되었다.
그는 인식의 방법을 이성에 의한 인식으로서 지혜를 그리고, 감각을 통한 인식으로서 지식을 들었는데 보다 진정한 인식을 위해서는 감각적 지각을 넘어서 근원적이고 확실한 인식 즉, 이성적 인식에 도달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마음에 인식되는 큰 진리를 '진리자체'라고 부르고 이 진리자체는 근원적인 진리 즉, 신을 의미하고 출처는 성서, 교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이같은 인식론에서 볼 때 Augustine 의 저술은 성경을 역사적으로 서술한데 불과하며 그는 믿음에 근거하여 역사적 사실을 선별 수용하였다는 비난을 면치 못한다. 다시 말해 그는 역사를 그 자체의 존재기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이해의 보조적 수단으로 취급하였다는 것이다.
G.Keys 는 Augustine 이 믿음과 지식을 혼돈시키고 역사적 전개에 대한 구도를 곡해시키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Augustine 에 있어서 역사는 계시의 역사였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경험은 역사 속에 포함되는 것이었고 성경의 내용을 전혀 착오없는 진리로 받아들였던 그에게 있어서 지식이 믿음과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은 불가피한 사실이었을 것이다. Augustine 자신도 역사를 하나의 신앙의 대상으로 인지하고 있었고 그의 역사적 믿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적 전개는 목적론적이라는 믿음이었다. 이같은 목적론적 입장에서 볼 때 역사적 사실의 정확성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R.Collingwood 의 말처럼 역사의 전반적인 계획은 신의 것이며 인간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의 본질을 종교적 요소에서 구하게 되고 인간들의 행동을 소홀하게 다루었다는 것이다.

 

3. Augustine 사관의 구성요소

Augustine 사관의 구성요소는 크게 1) 천지창조와 종말의 문제, 2) 원죄와 악의 문제, 3) 자유의지와 예정론, 4) 시간관으로 살펴볼 수 있다. 창조와 종말의 원리는 고대 그리이스적 반복의 운명관을 극복하고 진보사관과 목적론적 사관의 이론화를 가능하게 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는 히브리인들의 창조사상과 계약관념, 최후의 심판이라는 사상과 관련있으며 구약의 종말관은 메시아적 소망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Augustine 은 창조설과 관련하여 악의 창조와 구약의 신빙성에 대해 의문을 가졌는데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영향과 Ambrose 의 새로운 성경해석의 도입으로 창조설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확립하였다. Augustine 은 모든 본질은 초월적인 본질인 신으로부터 말미암는다고 하고 창조물은 무(無)가 되고자 하는 경향을 띠고 있어 절대존재로부터 떨어져 나가 선(善)의 부족 상태에 이르러 악(惡)이 생긴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두 도시' 개념과 창세기의 카인과 아벨을 통해 선악관(善惡觀)을 역사속에 이원구조화 시켰다고 할 수 있다. 또, 악(惡)을 자연적 재해와 인간의지가 크게 개입되는 도덕적 악(惡)으로 구분하였는데 그는 역사에서 인간의지의 역할을 중시하여 인류의 역사는 선악 선택의 끊임없는 연속이며 종말을 지향해 가는 역사적인 과정으로서 대립되는 선악의 전개로 파악하였다. 그는 선과 악 즉, 행위의 두 가능성과 원죄를 인정함으로써 역사를 현실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초적 터전을 마련하였다. 원죄에 대한 확신을 가진 그는 지상에서의 인간 생활에 대해 비관적이었고 모든 지상의 불행은 원죄로부터 비롯되며 그것은 인간 의지가 잘못 사용된 결과라고 보았다. 신에 의해 미리 계획되고 주관되는 역사를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주의자나 결정론자의 편에 서지 않고 역사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신의 은총과의 관계를 수립해 놓았기 때문이다. 또한, Augustine 은 과거의 경험과 의지와의 관계를 현실적으로 정립하고 있는데 인간의 과거 경험을 현재적 결단과 연결시킴으로써 개인의 과거를 역사속에 포함시켰다. 즉, 그에 따르면 자유의지란 경험의 반영이기도 한 것이다.
H..Scholz 는 Augustine 의 예정론이 모든 것의 예지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변화와 발전이란 있을 수 없고 역사란 말이 성립될 수 없다고 공박했고 C.Keys 도 또한  Augustine 의 논리의 부당성을 지적했다.
Augustine 자신도 자유의지에 대해 시간의 경과에 따라 생각을 변화시켜갔다. 초기에는 인간의 자유의지적 반응을 상당히 허용하고 있는 듯 하지만 후에는 신이 인간의 의지를 바꿀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Augustine 과 자유의지의 문제에 대해서는 J.Figger 의 입장이 올바른 이해의 기준을 제시하는 듯 한데 그는 '신의 세계는 그 목적을 향하여 움직여 나갈 것이지만 그것은 시간, 공간 속의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인간과 사회를 통해서 움직인다.' 고 하였다.
자유의지와 더불어 Augustine 의 역사사상에 골격을 이루고 있는 시간론에 대해서 살펴보면 그는 시간을 인간의 내면적인 요소 즉, 영혼 또는 기억에서 찾았다. 시간이란 현존하는 순간 항상 현존하는 기억 인상을 재는 것이지 사물의 변화에 의해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는 인간들의 경험이 성장함과 동시에 커가고 축적됨으로써 그 진보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같은 경험의 역사투입론을 자유의지 행위에 연관시켜 볼 때 논리적 일관성을 갖는다. Augustine 이 신의 영원한 계획을 창조관에 포함시켰으며 그가 예정론의 효시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지극히 사실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오늘 날 저술가들 중의 일부는 Augustine 사관에는 진보적인 성격이 결여되었다고 보고 있으나 그의 종말관이 시간을 매개로 하는 현재적 과정을 인정하고 있고 이러한 목적을 향해 인류와 국가와 개인의 역사가 통일성 있게 연결되어 나간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의 사관은 전체적으로는 진보적 구도를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4. Augustine 의 역사인식과 기억론

Augustine 의 역사 인식을 논할 때 제일 먼저 이해해야할 요소는 그의 '기억론'이다. 그는 인간이 가진 기능 중에서 가장 경이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기억이라고 보고 사물에 대한 인식도 기억의 매체를 통해 가능하며 神을 인식할 수 있는 것도 기억을 더듬어 찾아 가는데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사람의 '사유'는 기억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며 또, 그것이 인간의 행위로 표현이 가능하다고 하고 기억이 없으면 사유가 있을 수 없으며 사유가 없는 행위란 상상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았다.
사실, 의지의 선택도 사유 없이는 불가능하며 의지의 선택이 없는 정상적인 행위 또한 존재하기 힘든 것이라 하겠다. 기억의 문제를 역사 인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의지'와 '시간'과의 관계에서 생각할 때 그것이 역사 인식과 역사 행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더욱 부각된다. 객관적인 역사로서는 엄연히 일어난 사건들은 기록의 유무에 관계 없이 일어난 사실임에는 틀림없으나 실체에 있어 그것이 기억되거나 기록되지 않으면 그 역사는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Augustine 은 일찍이 역사의 주관성을 예언했다 하겠다. '기억'된 과거는 또한 단순히 기억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 선택,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인간의 과거 역사란 현재적 행위에 밀접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고 다른 의미에서 현재의 행위와 의지는 과거기억의 축적 결과라 하겠다. 이 점에서 어거스틴은 매우 현대적 감각의 역사 인식 방법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억과 시간의 문제도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 시간이란 단순한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그것들은 기억속에서만 존재한다. 지나가버린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 사이에서 존재하는 시간은 오직 현재뿐인데도 우리가 과거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기억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며 미래가 올 것을 예언하는 것도 우리의 의식이 그렇게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기억이 없는 시간이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모든 역사는 현재적 관점에서 조명 할 수 밖에 없는 역사의 현재성을 일찍이 간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기억속에 없는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기억속에 없는 과거의 역사는 현재의 의지선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래서, Augustine 에게 기억을 배제한 역사인식은 있을 수 없으며 기억은 곧 역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리고, 기억은 현재적이며 그래서, 현재적 관점에서만 역사의 조명은 가능하다. 이 점에서 Croce 가 역사를 '현재적 역사'라고 한것이나, Carr가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던 것은 Augustine 에 그 연원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참 고 자 료 >
이석우, [Augustine 의 역사인식 소고],   {총신대논문집 2},       1982.
______, [어거스틴의 고백록에 관한 고찰],        {경희사학, 15], 1988
H.E.반스, 허승일,안희돈 역,     {서양사학사},   1994,   한울아카데미.

출처http://rose0.knu.ac.kr/~z971554/archiv/hisgene/histgra/augusti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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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 론

신학, 철학, 역사, 정치 사상과 같은 면에 어거스틴이 끼친 영향은 지속적으로 이어져오고 있으며 그가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넓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레오.C.데일리가 서구문명사에서 "어느 누구도 어거스틴 만큼 희랍 철학과 유대교적 전통 그리고 기독교 신앙을 잘 종합한 사람이 없다." 라고 말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그의 영향력과 업적은 무엇보다도 그가 남긴 다수의 저술들에 기초하고 있는데 120권에 이르는 저술과 269편의 서신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고백론>과 <신국론>이라 하겠다. 이 중에서도 <고백론>은 어거스틴 자신의 생애와 사상의 변천, 회심에 따른 고뇌들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서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이해와 그 사상의 뿌리들을 탐색하는데 가장 직접적인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외에도 이 저술에는 어거스틴에 대한 개인적인 사실들을 통해 희랍, 라틴 사상과 기독교의 조우가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가고 있는가를 보여 주고 있으며 어거스틴 자신이 골몰해 오던 문제들 즉, 선과 악의 문제, 원죄론, 시간론, 창조론, 의지론 등에 관한 그의 생각을 직접적이고 핵심적으로 개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어거스틴 사상의 틀을 이루는 관건적인 요인들로써 실상 기타 그의 다른 서술들은 이러한 기본 사상 체계를 확대하거나 각도를 달리해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그점에서 <신국론>도 사실은 <고백론>적 인식을 국가와 사회, 역사에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J.O'meara의 말은 타당한 것이다.


2.<고백록>에 대한 평가

어거스틴의 <고백록>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우선 그것은 기독교 역사상 자신의 신앙적 체험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고백서라고 인정되어야 하는데 물론, 그 이전에도 이러한 저술들이 있었지만 그 심도는 <고백록>에 미치지 못 하는 것이었고 이런 점에서 A.F.West 교수는 <고백록> 이전의 그 어떤 이도 이같은 집필을 시도하지 않았으며 이후로도 이와 같은 작품이 탄생하기까지는 천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Bourk는 웨스트의 주장에서 더 나아가 "어거스틴이 자신의 삶과 사상 그리고 감정을 자성적으로 분석한 업적은 후기 기독교 심리학의 기초를 이루어 놓았다." 고 평가하고 있다.

이와 함께 <고백록>은 단순한 '자기 성찰적 자서전(Introspective Autobiography)'에 머무르지 않고 문학 형식사(The History of Literary Form)상 하나의 신기원을 이루어 놓았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문학 형식면에서도 독특한 경지를 열고 있는데 이것은 로마인들의 창안물인 '자서전적' 형식에 시적인 운율, 간결한 문체, 서정성을 도입하여 독특한 문학 형태를 창안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이와 함께 깊숙한 그의 내면을 분출시키고 하느님 찬양의 장엄한 분위기를 유지시키기 위해 시적 요소와 산문성을 적절히 조화시킨 기도형식의 문체를 구사하였다.

그러나, <고백록>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하는데 먼저, 그 형식의 단조로움과 주제의 단순성은 독자들에게 '지루한 느낌'을 준다는 평가가 있다. 그래서, 부아지에(M.Boissier)는 이 저술이 단조롭다고 비판하고 있으며 하르나크(Harnak) 또한 이 책은 그 분량이 너무 많고 근대적인 사고에 익숙치 않은 내용이 많으므로 독자들에게는 축약하여 소개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또, 와필드(Warfield)같은 이는 이 책은 라틴어로 읽혀질 때 그 진수를 터득할 수 있으며 다른 언어로 번역되어 전해 질때는 메마른 듯한 내용으로 전해지는 단점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고백록>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비판도 있는데 Joseph McCabe는 어거스틴이 자신의 젊은 날의 잘못들을 오히려 미화시켜 보이려는 그릇된 의도를 가지고 썼다고 통박하고 있고 뿐만 아니라 이것은 한 인간의 과거를 빌려쓴 하나의 신학 논문으로 힙포 주교의 수사적 구사력에 의해 인간의 본성과 은총, 철학과 기독교를 적절히 배합시킨 자기 시현의 책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3.저술 배경

어거스틴이 <고백록>을 써야 했던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들을 살펴 봄에 있어서 그가 <고백록>을 쓰기 시작한 397년을 전후로 일어난 역사적 변화는 이 책의 집필 배경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의 상황은 기독교가 크게 성장하고 있던 반면, 로마 제국은 곳곳에서 몸살을 앓기 시작하였는데 378년 서고트족의 침입과 동로마 제국 황제 발텐(Valens)의 아드리아노플에서의 패사는 야만인 족으로 기울기 시작한 대세의 신호탄이었고 어거스틴이 로마로 가던 383년에는 '로마의 기근'이라 불리는 혹심한 배고픔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기독교는 로마와는 반대로 그 위세가 커져 가고 있었는데 어거스틴이 개종한 7년 후인 394년에는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공식적으로 모든 형태의 이교 신앙을 금지 시킴에 따라 기독교는 법적으로나 실제면에서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았으므로 이제 문제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체계화 시켜나가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럼에도 로마의 쇠퇴에 대해 기독교는 나름대로 설명을 해야 할 필요가 증가하고 있었다. 즉, 기독교는 이제 내외적으로 보다 더 체계적이고 이론적이며 경험적인 대응의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의 신앙 조건이 안정되어감에 따라 초기 기독교인들의 관심이 순교에 모아졌던 것에 비해 이 시기의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신앙적 고뇌와 회심의 과정 그들의 가르침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것도 <고백록> 집필의 외적 요인으로 무시 할 수 없을 것이다.

396년에 어거스틴은 정식 주교로 임명되면서 그 개인의 주변 상황에도 크게 변화가 왔는데 주교가 된 지 일년이 지난 시점에서 <고백록>을 쓰기 시작 했다는 점은 주목 할 만하다. 그가 이 저술을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43세 였으니 인생의 원숙기인 중년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점검하며 미래에 대한 신앙을 정립 해야할 내적 충동을 깊게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틴 자신과 주변관계면에서도 <고백록>집필의 필요성은 증대되고 있었다. 즉, 교회 내에서의 그의 위치는 급속도로 상승되어 온 반면 다른 사람들의 그의 과거에 대한 의구심은 바뀌기 어려웠다. 그의 급속한 위치의 상승은 그에게도 힘든 변화의 연속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도 칭송과 의구심을 동시에 가지게 했던 것이다. 그가 과거 마니교도에서 개종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의 글에는 이교적 플라톤주의자들의 사상적 영향이 사라지기 않았다는 사실은 주위의 의구심을 사기에 충분했으며 교회내의 위치상승과 마니교도들과의 논쟁과 문필력은 그에게 명성을 안겨줌과 함께 그에 대한 반대자도 낳았다.

그리고, 어거스틴 자신도 주교가 되는 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유혹들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들을 전해주고 싶었고 아프리카 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고립 되고 후진 지역이었으므로 다른 성직자들과의 접촉이 쉽지 않아서 그만큼 자료나 신앙서들이 필요하였다는 사실도 성직자로서의 그의 책무와 관련되어 고려되어져야 할 것이다. 더구나, 그의 아프리카인적인 기질은 우정을 중시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자신의 내면의 세계와 변화를 나누어 가지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의 극적인 회심의 경험과 같은 이러한 내적 비밀을 개인적인 편지로 전하는 것보다는 하나의 책으로 집필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 판단한 것같다. 그래서, <고백록>은 교육적인 의미와 자기정리의 필요,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가 그의 타고난 문장력과 감동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4.저술목적

어거스틴이 <고백록>을 서술한 근본 목적에 대해서는 <고백록>에서의 그의 서술, 후일 <재고록>에서 다시 회상하여 밝힌 내용, 그리고 '고백'이라는 말의 의미를 성서적 관계에서 검토하여 봄으로써 얻어질 것이다.

어거스틴이 사용한 '고백(Confession)'이란 "하느님이여,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당신께 고백하게 하시고,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주님을 찬양하게 하소서"(시 66:6)에 가까운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여기서의 '고백'이란 인간의 죄에 대한 고백일 뿐만아니라 신의 능력에 대한 고백이라는 의미이고, 범죄와 불의에 대한 고백은 신의 은총에 의존하기 위한 것이며 죄의 고백은 신의 영광에 대한 찬양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백'은 본질적으로 두 개의 의미를 가지는데 하나는 죄에 대한 것이며 또 하나는 신에 대한 찬양으로 이해 된다. 이러한 점은 어거스틴이 로마 관리인 다리우스에게 보낸 편지나 그의 다른 저술인 <재고록>등에서 죄의 고백과 하느님에 재한 찬양을 거듭하여 강조하고 있는 데서 잘 나타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고백록>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즉, 1-9권까지는 '죄에 대한 고백(Confessio Pecati)'이며 11-13권은 '믿음에 대한 고백(Confessio Fiedi)'으로 이루어 지게 되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또한 <고백록>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그들의 마음과 사랑을 신에게 돌리는 도구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어거스틴 자신의 참회에 대한 것만 고백한 것이 아니라 동시에 알리피우스, 빅토리누스 등 다른 사람들의 참회와 생활을 기록한 것도 이러한 의도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어거스틴은 창세기를 쓴 모세나 시편을 쓴 다윗과 같은 소명감을 가지고 <고백록]을 저술하였다. 즉, 기독교 이론은 체계화 되지 않앗고 회심의 과정에 대해서나, 죄의 문제, 죄인이 구원받는 과정 등에 대한 기준적 설명이 요구되는 당대의 신앙적 상황이 모세가 살았던 출애급의 시대처럼 구시대에서 신시대로 넘어가는 시대로 보고 자신의 체험이 신앙의 길잡이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성서의 '시편'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시편에서 다윗이 서술한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 죄의 고백등이 자신의 신앙적 도정과 유사하다고 보고 자신의 체험을 시편의 형식을 빌려 쓰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저술에서 나타나는 문체와 내용, 그리고 그 감동에서 그러한 냄새가 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래서, <고백록>은 단순히 개인의 죄에 대한 고백으로 끝날 수 없으며 신에 대한 장엄한 찬양과 자기의 죄에 대한 아픈 고백 그리고, 기독교리 체계의 기조를 놓는 논리적 신학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요컨데 A.Pincherle가 <고백록>의 주된 의미를 세 가지 기본 요소 즉, '찬양의 고백','죄의 고백','믿음의 고백'이라고 했는데 바로 이 세 요소가 어거스틴이 <고백록>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핵심적인 내용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한 자전적 저술이 아니라 자전적 형식을 빌린 치밀한 신학 이론서이며 사상서인 것이다.


5.<고백록>의 구성

<고백록]은 전부 1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내용과 문체의 특이성에 따라 크게 3부분으로 나누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다. 제 1부분은 1권에서 9권까지로 묶이며 이것은 다시 1-4와 5-9의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자는 성장의 과정이며 후자는 기독교로의 회심 과정이라 하겠다. 제 2부는 10권 단권으로 여기에서는 회심후의 영적 현재 상태, 철학 및 신학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으며 제 3부분은 11-13까지로 이는 창세기주해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러한 3부분은 그의 시간관과도 관계가 되는데 제 1부분은 과거의 사항이며 제 2부분은 현재 상태, 제 3부분은 미래 지향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문체에 있어서도 제 1부분은 개인적 서술의 형식을 띠어 솔직한 표현과 개인적인 고백에 즉각적인 흥미를 느끼게 하는 반면, 제 2부분은 친숙한 개인적 명상과 회고에 몰입함으로써 사상서적이며 이론적인 서술의 느낌을 갖게 한다. 제 3부분은 장대한 사상과 통찰에 감명을 받게 하며 창세기의 서술방식을 택하고 있다.

1권은 그가 15세가 되는 369년까지의 일로서 마다우라에서 수사학을 배우고 나서 공부에 대한 열정은 있으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더 이상 공부를 계속하지 못 하고 고향인 타카스테에 돌아와 있을 때의 일들을 서술했는데 그가 주로 다룬 문제는 원죄설의 근거와 자신의 가정 형편, 싫어했던 희랍어와 좋아했던 라틴어,연기된 세례 등에 대한 것들이고 성적인 금욕주의와 엄격한 교육과 훈련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제 2권은 성장기(369-370)로 그의 나이 16세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그의 좌절기로 악한 행동을 하는 원인은 재미있었기 때문이라는 심리적인 기술을 하고있다.

제 3권은 카르타고에서의 생활(371-373)을 기록하고 있는데 여인과의 동거,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음으로써 자극된 지혜에 대한 추구와 철학적인 갈증, 그리고 선악의 문제로 고민하다가 마니교를 수락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성서에 다시 돌아가려다 환멸을 느낀 점인데 이는 유아 시절의 세례연기와 더불어 어거스틴이 이때부터도 가톨릭 지향적 심성에 놓여 있었다고 할 점이다.

제 4권은 19세 생일이 지난 후부터 28세에 이르는 기간(373-382)에 대해 적고 있다. 이때에 그는 미신과 점성술에 탐닉하여 <사물의 아름다움과 적절함에 대하여>(380)라는 처녀작을 썼고 아리스토텔레스의 <10범주론>을 읽었으며 카르타고에서 수사학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제 5권은 마니교도와 결별하는 과정과 로마행, 그리고 밀란에 가서의 암브로시우스와의 만남(382-384)을 쓰고 있다. 여기서 서술된 마니교도와의 결별은 그가 이미 10년간 그 종교에 침잠한 이후의 일이어서 이후 그의 사상형성에 미친 마니교의 영향을 논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되었다.

제 6권은 5권에서 시작된 회심과정의 구체적인 서술로 암브로시우스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는 시기(384-386)의 일이다. 이 시기에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회의적이었으며 15년간의 동거녀와의 결별 그리고, 새로운 신부를 기다리는 동안의 성적인 타락과 건강의 악화 등이 그려지고 있다.

제 7권에서 그는 철학을 통해 제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하느님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는 관계에 대한 문제, 그리고 자유의지나 악에 대한 자유 선택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플라톤학파의 몇 권의 책'에서 얻게 된다. 그는 신플라톤 철학의 글들을 통해 하느님의 본질이 최고의 靈임을 깨닫게 되고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신플라톤적인 방법으로 해석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논자들간에 어거스틴의 핵심은 신플라톤 주의였으며 크리스챤으로서는 아니었다고 이의를 제기하는 계기가 된다.

제 8권은 바로 회심의 장(386)이라 하겠는데 그의 나이 32세때의 일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회심의 결단을 예로써 설명하고 아직도 마음의 소리가 의지에 미치지 못 함을 한탄하던 중 무화과나무 밑에서 '취하여 읽으라'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되고 세례를 받을 최후의 결심에 이르게 된다. 이때까지는 신플라톤적인 영향과 신비주의적인 영감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듯 하다.

제 9권은 그의 33세(387)에 해당하는 시기로 세례와 친구의 죽음, 수사학교수직의 포기, 어머니의 죽음과 그에 대한 회상으로 채워진다.

제 10권은 9권 내용의 시기보다 12년 후(399)인 현재의 자기를 고백하고 있다. 이 무렵 그는 <선의 본성론>과 >삼위일체론>도 함께 저술하고 있었으며 이때는 자신이 힙포의 감독이 된지도 9년째에 접어든 해이다. 이 내용은 자기가 회심한 이후에 얻은 경이로운 깨달음에 대해 얘기하고 있으며 동시에 빠질지도 모르는 위험한 정욕에 대하여스스로를 타이르며 남에게도 경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적 상념에 대한 설명적 기술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보다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다. 이 부분은 기억의 신비함과 그 능력을 기술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데 기억은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하느님을 깨달을 수 없다고 하면서 자신이 겪었던 유혹과 시련의 원인을 설명하고 이것들을 절제를 통하여 극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마지막 부분에 속하는 11,12,13권은 창세기의 주석에 해당하는 글로써 11권에서는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리고, 창조의 사역이 시간속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문제를 논의한다. 12권에서는 태초의 세계를 이해시키기 위해 물체의 질료, 영원성, 창세의 비화들을 논하고 있고 13권에서는 하느님의 완전하심과 피조물의 불완전한 관계를 설정하여 하느님은 영원하며 사물과 생명의 유일한 근원임을 밝힌다. 그리고, 삼위일체설을 설명하고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적으로 말하며 모든 백성이 그에게 돌아가기를 호소하고 그의 은혜와 경이를 찬양하며 글을 마친다.


6.<고백론>의 체제 논쟁

<고백론>의 내용에서 우리는 그것이 서로 다른 내용과 성격을 가진 몇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음을 보았다. 이 점은 이 책에 대해 이 책이 통일성을 지닌 책인가? 아니면 다른 책을 서로 함께 묶어 놓았을 뿐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게 히였다. 어거스틴 자신은 이것을 '단일 저술'로 간주하고 있는 반면 B.Warfield나 Max Zept등은 <고백록>을 1권에서 10권까지와 11권에서 13권까지로 나뉘어진 서로 관계가 없는 두 책으로 보고 있다. 그들은 이 책은 어거스틴의 회심 고백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며 그것으로 이 책의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고 나머지의 서술은 앞의 고백적 의도와는 무관한 창세기 주석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두 입장은 <고백록>안에서 나름대로의 근거를 들고 있어 서로가 타방의 주장을 배제하려하고 있다. 그래서, 통일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유추된 가설을 설정하고 이를 통해 전체를 꿰뚫어 보려하면서 그것들이 가지는 상이점을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는 반면, 분리론자들은 그 차이점에 집착한 나머지 통일성을 지나치려 하고 있다.

분리론을 주장하는 측은 <고백록>을 어거스틴의 죄의 고백과 자전적 생애를 기준으로 평가하려는 관점과 어거스틴의 신앙이 10권까지에서 완성되었다고 하는 관점에서 나머지의 내용을 전혀 다른 별개의 책으로 보고 있으나, 어거스틴 자신이 밝힌 바와도 같이 <고백록>은 단순한 자서전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의 신앙이 완성되는 것은 단순히 그가 세례받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즉, 그는 10권에서 회심한지 12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욕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솔직히 서술하여 회심 이후까지 가진 자신의 약점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의 탁월한 신앙적인 정직성을 보여 주는 이 대목에서 <고백록>이 단순한 신앙적 자서전이 아니며 동시에 회심으로 그의 신앙이 완성되었다는 의도로 쓰여지지도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형식과 톤은 다르지만 고백이 10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되어야하는 필요성과도 관련이 된다고 하겠다.

J.Copper가 지적한대로 <고백록>은 단순한 삶의 기록이 아닌 보다 더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경이로움이었고 이러한 사실은 창조와 영원과 같은 문제를 다루지 않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따라서, <고백록>이 창세기에 대한 주석으로 끝맺은 것은 저자의 사상적 배려에서 나온 결과라 하겠다. 그리고,그에게 문제가 된것은 피조물의 최초상태 즉, 순수했던 상태를 찾아보려하는 것과 창조자와 피창조물의 관계를 대비시킴으로써 창조자에게 의지하지 않고는 영원한 휴식이 없다는 사실을 창조론의 명시적인 사실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요컨데 어거스틴은 <고백록>을 '고백'이라는 단어의 이중적 의미에 맞추어 서술하였으며 그런 점에서 앞 부분과 뒷 부분은 서로 상이한 책의 묶음이 아니라 어거스틴의 계획에 의한 것이며 믿음의 본질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그가 그토록 고심하며 추구했던 하느님의 본질, 선과 악, 시간 문제 등에 필수적인 답이 되는 창조론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7.희랍 사상의 영향 문제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어느 부분까지가 플라톤적이며 어디까지가 크리스챤적인가 하는 문제는 <고백록>에서 추적하고자 하는 중요한 잇슈가 되어 왔다. 그는 <고백록> 제 7권에서 플로티누스의 사상에서 큰 영향을 받고 그것을 통해 체계적인 해답에 도달하고 있음을 숨기려하지 않았다. 플로티누스의 <Enneads>에서 영혼 문제를 논의됨으로써 어거스틴은 물질적인 한계를 극복하게 된다. 그래서, 창조자와 피조물과의 관계는 '유출설'에 의하여 해독이 가능했고 악과 선의 관계도 이 유출의 관정에서 생기는 선의 부족상태라는 방법으로 악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7권에서 그는 플라톤의 [로고스]와 말씀과의 관계를 비교하여 그 유사성을 터득하면서 그같은 깨달음에 이르게 한 것을 하느님의 도움으로 돌리고 있다. 그래서, O'meara는 어거스틴의 플로티누스적 회귀를 신약에서 말하는 탕자의 돌아옴에까지 비유하고 있고 어거스틴이 플로타니우스의 책을 읽음으로써 전혀 다른 새 세계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어거스틴의 젊은 시절의 철학적인 각성도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나 아리스토텔레스의 <10범주론> 등을 통해 이루어졌고 그가 회심한 후에도 플라토, 플로티누스 등을 칭찬하는데 이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고전 사상이나 교육의 중요성을 부인한적이 없으며 신앙과 이성의 중요성을 논하고 있는 경우에도 이것들을 대립적으로 파악하지는 않았다.

이상과 같은 신플라톤주의와의 관계 때문에 어거스틴의 회심이 성서적인 완전한 회심이 아니고 다만, 신플라톤주의로써의 사상적 전환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대두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러한 주장의 핵심은 어거스틴의 사고는 본질적으로 신플라톤주의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회심은 신플라톤주의적 유심론의로의 회심이며 무화과 나무 아래의 신비적인 경험도 신플라톤주의적 신비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비록, 어거스틴이 뒤에 기독교에 포용되기는 했지만 그는 여전히 일생을 통하여 본질적으로 신플라톤주의자로 남았으며 적어도 신플라톤주의적 사고기조가 아직도 동화되지 않은 상태의 기독교와 더불어 마음속에 공존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주장들이 나름대로의 근거는 가지고 있지만 그 주장들이 지나친 일반화나 과장의 위험도 가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먼저, 어거스틴의 회심을 지나치게 플라톤사유에로의 변천에 초점을 맞추어 파악하려는 근시안적인 태도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물론, 어거스틴의 사상적 변천 과정에서 신플라톤주의가 가지는 역할을 무시 할 수는 없지만 플라톤의 서적을 읽기 이전인 어린 시절부터 어거스틴은 기독교적인 분위기의 가정에서 자랐으며 동시에 이교도였던 그의 아버지도 죽기 수년전 즉, 어거스틴이 13-15세에 해당하는 시기에 개종하여 사실상 전가정이 기독교화된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정적 배경 때문에 어거스틴은 그의 사상적 방황에도 불구하고 정신의 저변에 기독교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또, 한발 더 나아가 그가 <호르텐시우스>를 읽은 감동에 이어 다시 <성경>을 읽어 보려한 것, 그때부터 선과 악의 문제로 고민하다가 급기야 마니교도가 되었다는 것도 사실은 기독교적 가르침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 즉, 진리 탐구의 과정에서 그곳에 빠져 들어갔다고 역설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것이다. 그후에도 그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읽고 회의주의에 빠지며 플로티누스의 책을 읽고 암브로시우스의 설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보다 바른 종교를 찾기 위한 사상적 추구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이 극적인 회심의 체험을 겪은 후 카시키아쿰에서 세례를 준비하고 있을 때의 대화나 저술의 내용이 아직까지도 철학적인 질문에 가득차 있으나 이 같은 질문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하여야 할 것이다. 즉, 그는 <아카데미파 반박>의 제 3권에서 그러한 질문의 목적은 "이성을 권위에 통합시키고 그의 믿음을 그리스도의 권위에 통합시키는데 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플로타니우스에게서 찾으려 한것도 신앙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도구를 찾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성과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도 회심할 당시에는 독립적인 것으로 파악했으나 뒤에 이성이 신앙에 도움을 준다고 이를 수정한 것도 사실이나, 카시키아쿰 대화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플라톤적 사상기조 위에서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했던 것이지 결코, 플라톤 이해로 자족 상태에 있었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적어도 두 요소가 공존 상태에 있었으며 그 후 점진적으로 성서적 크리스챤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요컨데 그는 기독교를 플라톤적 사유 방법으로 이해 수용하였고 이 수용의 전기를 통하여 성서적 이해에 삼투되어 들어갔으며 궁극적으로 이를 극복하여 기독교적으로 소화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같은 결과로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 믿는 것이다'라는 명제에 도달하게 되었으며 <고백록>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신플라톤적 사유체계를 서술하려는 것보다도 자신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 고백이었다는 점은 어거스틴의 신앙변천의 궁극적인 성격을 대변한다고 보겠다.


8.<고백록>에 나타난 어거스틴의 역사인식

어거스틴의 역사 인식을 논할 때 제일 먼저 이해해야할 요소는 그의 '기억론'이다. 그는 인간이 가진 기능 중에서 가장 경이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기억이라고 보고 사물에 대한 인식도 기억의 매체를 통해 가능하며 神을 인식할 수 있는 것도 기억을 더듬어 찾아 가는데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사람의 '사유'는 기억이 있을 때에만 가능하며 또, 그것이 인간의 행위로 표현이 가능하다고 하고 기억이 없으면 사유가 있을 수 없으며 사유가 없는 행위란 상상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았다.

사실, 의지의 선택도 사유 없이는 불가능하며 의지의 선택이 없는 정상적인 행위 또한 존재하기 힘든 것이라 하겠다. 기억의 문제를 역사 인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의지'와 '시간'과의 관계에서 생각할 때 그것이 역사 인식과 역사 행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더욱 부각된다. 객관적인 역사로서는 엄연히 일어난 사건들은 기록의 유무에 관계 없이 일어난 사실임에는 틀림없으나 실체에 있어 그것이 기억되거나 기록되지 않으면 그 역사는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어거스틴은 일찍이 역사의 주관성을 예언했다 하겠다. '기억'된 과거는 또한 단순히 기억으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치 선택,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인간의 과거 역사란 현재적 행위에 밀접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고 다른 의미에서 현재의 행위와 의지는 과거기억의 축적 결과라 하겠다. 이 점에서 어거스틴은 매우 현대적 감각의 역사 인식 방법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억과 시간의 문제도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 시간이란 단순한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그것들은 기억속에서만 존재한다. 지나가버린 과거와 오지 않은 미래 사이에서 존재하는 시간은 오직 현재뿐인데도 우리가 과거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기억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며 미래가 올 것을 예언하는 것도 우리의 의식이 그렇게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기억이 없는 시간이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모든 역사는 현재적 관점에서 조명 할 수 밖에 없는 역사의 현재성을 일찍이 간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기억속에 없는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기억속에 없는 과거의 역사는 현재의 의지선택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래서, 어거스틴에게 기억을 배제한 역사인식은 있을 수 없으며 기억은 곧 역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리고, 기억은 현재적이며 그래서, 현재적 관점에서만 역사의 조명은 가능하다. 이 점에서 크로체가 역사를'현재적 역사'라고 한것이나, Carr가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던 것은 어거스틴에 그 연원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9.결 론

<고백록>은 어거스틴 사상의 핵심이 모아진 것이며 이에 대한 이해없이 어거스틴 사상의 이해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고백록>은 단순한 신앙 고백의 차원을 넘어서는 조직적인 신학서이며 사상서이고 신의 본질, 선과 악의 문제, 시간관, 창조론등 그 속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들은 그 자체로 매우 획기적인 주장이지만, 그것들은 또한 고대 헬라적 신관이나 역사,우주관과 맥을 달리하는 또다른 사상의 진원이 되었다.

경험 없는 개념 정립이란 불가능하다고 본다면 <고백록>은 어거스틴의 고뇌어린 삶과 신앙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농축된 사상이라 할 수 있고 <고백록>은 이전 사상편력에 대한 정리이며 이후 저술들의 원칙이 된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백록>에서 제시되고 있는 창조론, 시간론, 의지론등은 이미 기독교적 역사 인식의 틀이며 그가 제시한 이러한 개념들은 바로 중세 사학이나 근대 사학사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문헌>

李 石佑. [어거스틴의 <고백록>에 대한 일고찰]. <경희 사학> 15. 1988

 

내용출처 : [인터넷] http://rose0.kyungpook.ac.kr/~z971554/archiv/hisgene/histg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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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論

이미 희랍-로마 시대로부터 헤로도토스는 그의 역사적 저술로 인하여 지대한 관심의 대상으로 비평과 찬사를 받아왔다. 오늘날 "역사서술의 창시자"로 알려진 그가 그의 뒤를 이은 고대의 사가들에 의해 혹독한 비판을 받은 것은 아이러니하다.

투키디데스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대한 접근 방법이 불안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는 진지한 역사를 쓰기 위해서는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현재의 사실을 동시대인의 관점에서 기술해야 하며, 멀리 떨어진 나라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을 기록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헤로도토스의 선구자적인 서술을 미숙한 것으로 보이게 하였다. 또한 그의 역사서술은 고대 역사가들의 모범이 되었으며, 헤로도토스는 고대 역사학의 주류와 단절되었다.

이러한 그에 대한 평가는 민속학 및 지리학적 발견과 더불어 상당히 호전되었으며 특별히 종교적인 관점에서 강력한 호응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16세기 중에 다시금 "歷史의 父"라는 명성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종교적 입장과는 달리 여전히 일반 사가들은 그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었는데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 과학적 방법이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동시에 초기 희랍사상에 대한 이해의 증대는 헤로도토스의 기본적 사상을 새롭게 평가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이제는 헤로도토스가 처했던 시대적 사조와 사회적 배경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다.


Ⅰ. 헤로도토스의 思想的 背景

1. 이오니아 思想의 影響과 偏頗的 感情의 表出

희랍세계에 있어 가장 초기의 역사적 성격을 띤 작품을 산출한 대부분의 저술가들이 소아시아 해안과 에게해의 섬들 출신이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희랍의 역사서술의 기원이 동방과의 접촉에서, 특히 페르시아 지배하의 영향에서 온 것이라는 암시를 던져준다.

헤로도토스의 출생지인 할리카르나수스는 그 이웃인 이오니아 도시들로부터 언어적으로 그리고 문화 전반에 걸쳐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래서, 희랍사상과 문화 발전의 중심지였던 밀레토스를 바로 이웃한 할리카르나수스에 새로운 진보적 사상과 논리적 탐구경향이 미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러한 영향을 수용한 인물이 헤로도토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역사서술을 시작함에 있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인물이 헤카타이오스였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희랍철학과 과학의 근원인 이오니아 정신의 특색은 현세적이며 합리적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오니아로부터 막대한 혜택과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술 도처에서 反이오니아적인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것을 통해 이오니아에 대한 그의 자료들의 중요한 출처는 그가 상당 기간동안 머물렀던 사모스라고 생각되며 이오니아의 일원인 사모스는 헤로도토스가 이오니아를 이해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오니아 반란시에 불투명한 태도를 취했던 사모스는 이오니아인들, 특히 밀레토스와 소원한 관계에 있었으며 사모스인들은 그 반란의 실패를 이오니아인들의 잘못으로 돌리려 하였다. 그러므로 사모스에서의 영향이 反이오니아적인 요소를 서술하게 하였다. 그리고, 한가지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탐구여행을 사모스를 중심으로 시작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의 이오니아 선구자인 헤카타이오스와는 확실히 다른 저작을 산출해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2. 아테네와 투리이에서의 思想的 交流

그의 생애의 후반기에 있어 중심적인 두 거류지는 아테네와 투리이였으며 이 두 지역은 그의 {歷史}를 저술하는 데 중요한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헤로도토스의 사상과 그의 저술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아테네는 그 당시 이미 희랍 세계에 있어 다른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적인 면에서도 탁월한 위치를 확립하였으며, 모든 지역으모부터 수많은 사상가들이 모여들었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가 역사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것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진 5세기의 지적 혁명에 그 뿌리를 둔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여기서 비극 작가들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는데, 우리는 그의 글에서 비극 작가 소포클레스의 도덕, 종교, 정치적인 감정을 느낄수 있다. 그러나 그가 {歷史}를 저술하는데 직접적인 자극을 준 것은 비극의 선구자인 아이스퀼로스의 희곡 「페르시아인들」이다. 여기서 자극받아 그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보다 합리적인 탐구를 통해 {歷史}를 썼다.

헤로도토스가 아테네를 떠나 투리이 식민지로 가게된 이유로는 아테네 이민정책 때문이라 하겠다. 그는 여기서 피타고라스 학파의 뛰어난 인물 중 하나인 엠페도클레스를 만나 상당한 영향을 받게된다. 그럼 다음 장에서 저술 내용에서 그가 받은 사상적 영향들을 알아보자.

 

Ⅱ.헤로도토스의 思想에 나타나는 兩面性

1. 傳統과 革新의 葛藤

헤로도토스의 {歷史}를 읽으면 그의 사상이 일관성이 없이 매우 복잡하고 여기저기에서 모순성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헤로도토스의 저작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해석하고 설명한 종교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저술을 전반적으로 볼 때 그의 종교관은 전혀 일관성이 없으며 서로 모순되는 몇 가지 사상들이 공존하고 있어서 헤로도토스 자신도 여러 사상에서 방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여러 사상의 흡수와 함께 이오니아에서는 새로운 역사적 문학활동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소위 산문작가로 알려진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대표적 인물로 헤카타이오스가 있는데 헤로도토스는 그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그는 영웅시대와 역사 시대를 구분하는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는데 헤로도토스가 신화시대의 역사를 배제한 것은 헤카타이오스의 직접적인 영향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여전히 수많은 신화적 요소들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그가 전통적인 종교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저작 후반부에 나타나는 중요한 변화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때부터 차츰 범신론적 내지는 일신론적 신성으로 들어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경향은 새로운 종교사상의 발전으로 이탈리아 학파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2. 神話的 要素의 限界

헤로도토스의 저작 내용 중 인간의 활동에 대한 신의 개입을 가장 극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솔론(solon)과 크로이소스(croesos), 폴리크라테스와 되찾은 반지, 크세르크세스의 참모회의와 꿈의 지시에 관한 서술들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호머와 동일한 관점에서 인간의 번영과 오만에 대한 신의 질투로써 설명하고 있고 이러한 사실은 그가 여전히 신화적인 전통에서 벗어나지 모사하였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 외에도 역사적 사건과 신화적 요소를 결합시킨 것이 도처에 나타나고 있다. 헤로도토스가 그의 저작 가운데 그렇게 많은 신화적 요소들을 포함시킨 이유는 몇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그가 그의 독자 혹은 청중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독자들의 흥미와 관심을 획득하기 위해 그들의 관점에서 기술했다고 할 수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가 사용할 수 있었던 자료들의 대부분은 구전에 의한 것으로 신화적 색채를 띤 것이 대부분이었다. 또 특별히 그에게 다량의 자료를 제공한 공급원인 델피 신전에는 수많은 신화들이 보존되어 있었으며, 헤로도토스는 그것들 중 상당수를 그의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물론 헤로도토스는 신화적 요소로 가득찬 그 자료들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한 합리화시키고 역사적 기숭의 틀에 맞추었던 것이다. 그러나 본래의 신화적 성격을 완전히 배제시킬 수는 없었다.

3. 科學的 精神의 適用과 그 限界

헤로도토스의 저작에는 순수한 과학적 요소는 아니지만 이전의 저술가들에 비해 고도의 비판정신이 있었음을 보게 된다. 헤로도토스에게 영향을 미친 이오니아의 과학정신은 어떤 노모스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연 앞에서 사상과 행동에 있어 자유를 향유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정신으로부터 이오니아인들은 신화에 대한 회의주의와 탐구적인 방법을 발전시켰다. 신화에 대한 회의주의는 이오니아들로 하여금 우주의 원리를 탐구케 하고 역사서술이 아니라 형이상학으로 향하게 했다. 반면에 헤로도토스는 그러한 정신을 역사적인 서술을 창안하는데 도입하므로 그의 저작은 인간적이고 세속적이며 정치적인 요소들을 중요한 내용으로 갖추게 되었다.

반면에 기원전 6~5세기에 종교와 신화로부터 끊임 없이 이탈해가는 이러한 사조와는 대조적으로 생생한 종교적 신앙에 의해 계속하여 고취되는 신비적 전통이 있었는데 이오니아의 과학적 사상의 영향을 보여주는 헤로도토스에게서 우리는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종교적 경향이 뚜렷하게 드러남을 보게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기원전 5세기 중엽의 급변하는 희랍의 사상적 환경 가운에 그가 어떠한 위치에 서 있었는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과거의 전통적인 입장을 그대로 고수하는 보수주의자가 아니었던 반면에, 철저한 혁신의 첨단에 서는 급진적 진보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호머적인 신화적 전통으로부터 지적 혁명의 새로운 시대로 전환하는 중간에 처한 과도기적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서 전통적 요소와 혁신적 요소가 존재하는 양면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가 과도기적 위치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역사서술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기 위해 나름대로의 사상적 변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의 독립성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Ⅲ. 歷史에 대한 헤로도토스의 理解

1.宗敎에 대한 새로운 解釋- 神의 攝理요 人間의 自由精神

헤로도토스의 글을 읽으면 적어도 그는 두 가지 수준에서 종교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즉 그는 자신의 사상에 입각해 신을 半추상적인 "신적 존재"로 합리화시킨다. 그러면서도 그는 개체적 신들의 작용과 관습들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종교는 하나의 통일되고 추상화된 신적 세력과 제한되기는 하였지만 전통적인 관념이 복합된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양상을 띠고 나타난다. 이러한 그의 종교적 사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시대를 지배했던 희랍 종교사상의 흐름을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과학적 정신이 이오니아인에 의해 시작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것이 호머적인 신앙을 형성한 바로 그 민족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은 주목할 일이다. 이오니아 철학자들은 초기에 세계의 활동을 설명할 수 있는 본질적인 것을 구하였는데 실제에 있어서 그들은 종교적인 언어를 피하고 그들 시대의 神人同形論的인 관념을 완전히 버렸던 반면에 여전히 그들은 근원적 본질에 "神" 혹은 "神的"이라는 이름을 적용시켰다.

또한 이오니아 철학은 종교로부터 신과 영혼이라는 개념들 외에 자연의 질서라는 지배적인 개념을 물려 받았는데 그것은 운명 혹은 법의 통치라는 개념으로 해석되었다. 헤로도토스에게서 필연성으로서의 운명 또는 법이라는 개념이 발견됨은 바로 이러한 전통의 영향아래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또 그에게 더욱 강력한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사상의 주류가 있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올림피아 諸神에 대한 신앙의 바탕에서 이오니아의 과학정신이 발전되었다면, 고대 희랍 사상 가운데 그와는 상이한 또 다른 중요한 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피타고라스로부터 연유된 신비주의 사상인 것이다. 올림피아 신학과 그 전통 가운데서 형성된 이오니아 철학에서는 모이라, 즉 필연성이 지배적 요소라면, 신비주의에서는 시간의 개념과 수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正義가 모이라를 대신한다. 이러한 신비적 철학은 디오니시우스 종교에서 온 것이다. 이 신비 종교는 일신론적이거나 범신론적 경향을 띠게 된다.

그런데, 헤로도토스의 서술을 읽을 때 그가 때때로 다신적 개념을 묘사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종교적 내용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대체로 일신론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은 분명코 피타고라스 계통의 신비주의 사상에서 주장하는 일신론적 경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같이 헤로도토스의 서술은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적어도 두 가지 평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즉 역사적 사건들에 있어 때때로 신적 요인들이 작용하는데, 징조나 신화 혹은 꿈이 개인들로 하여금 행위를 하도록 충동하거나 혹은 하지 못하도록 억제한다. 반면에 실제적인 차원에서는 전략과 정치적 고려에 의해 결정되는데, 그러한 것은 인간의 탐욕과 질투, 복수심과 야망, 정욕 혹은 매우 훌륭한 덕성에 의해 작용한다. 물론, 헤로도토스의 저작 전체를 통해 볼 때 종교적 요소가 보다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나타내고자 하는 인간은 신의 의지와 목적에 무조건 굴복하는 숙명적 존재가 아니라 신에 의해 제한된 한계내에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매우 광범위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신의 개입에 대등한 입장에서 자신의 활동을 추구하고 더 나가서는 신적 존재에 의해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2.「歷史」의 중심 모티브- 自由

헤카타이오스의 모방자인 동시에 경쟁자로 시작한 헤로도토스는 헤카타이오스가 고대의 설화들을 합리화한데 反하여 그의 저작의 통일된 주제를 바로 전 世代의 획기적 사건인 페르시아 전쟁에서 발견하였다. 그의 기본적인 관심은 페르시아에 대한 희랍의 승리에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민주정하에 있던 아테네가 획득한 마라톤과 살라미스승전에 그 촛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그 저변에는 보다 깊은 의의가 담겨져 있는데 거기에는 이질적인 두가지 형태의 문화 즉 헬레네와 동방 민족의 대조와 그 제도 사이의 충돌 및 신정정치(전제)와 입헌정치(민주)와의 대결, 더 나가서는 이민족의 노예화에 대한 희랍의 자유를 위한 도전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 두 세력 사이의 투쟁관게를 핵심적으로 나타내는 개념은 동방의 전제적 침략에 대한 서방의 자유의 수호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헤로도토스는 단순히 페르시아의 패배와 아테네의 승리를 기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역사에 있어 어떤 법칙에 의해 전제적 세력이 망할수 밖에 없으며 또한 자유를 위한 희랍의 투쟁이 세계역사에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를 보여 주려한다고 할 수 있다.


結論

헤로도토스는 희랍 세계의 정신적 활동에 있어 역사의 서술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나 그가 결코 Historia의 최초의 저작자는 아니었다. 그는 그 이전의 저술가들의 영향 아래 전통적인 요소들을 계승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그것들을 종합하고 극복하여 새로운 역사서술의 기원을 이루었다. 호머와 헤시오드의 전통을 이어받은 그는 역사 가운데서 신적 개입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었으나 이오니아의 과학정신에 입각해 사물을 탐구하는 자세를 익혔다. 그는 사상사에 있어 가장 격동적인 시기로 수많은 사상들이 나온 과도기적 시기에 있었다.

매우 흥미있는 일은 헤로도토스 한 사람 안에서 그 시대의 다양한 사상들이 혼합되고 정리되어 그의 저작에 드러난다는 점이다. 그는 필요한 지식을 수용함으로 도덕과 신학, 자연과학적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지만, 세게와 인간에 대한 이해를 그가 속한 시대의 획기적 사건인 페르시아와 희랍의 투쟁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그의 {歷史}로써 서술한 것이다.

일찌기 방랑생활을 한 그는 일반적으로 희랍인들이 사로 잡혀 있던 지방적 애국정신에서 탈피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그는 그 전쟁을 민족적인 정신을 넘어서 전제세력에 대한 자유의 투쟁으로 서술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헤로도토스가 단순히 역사서술을 창시하였다는 의미에서뿐 아니라 "자유를 위한 인간의 투쟁"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점에서 "歷史의 父"라는 그의 위치를 새롭게 평가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용출처 : [인터넷] http://rose0.kyungpook.ac.kr/~z971554/archiv/hisgene/histg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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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마키아벨리에 관한 연구는 그의 정치 사상에 집중되어 왔으며 그의 역사 사상에 대한 연구도 그의 정치 사상의 맥락에서 취급됨에 따라 일관성 없는 견해의 난립을 초래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먼저, 역사 서술의 측면에서 마키아벨리와 휴머니스트적 전통과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보고 다음으로 그의 중요 저술들을 통해 그의 역사 의식의 발전 과정을 검토할 것이다.

Ⅰ.마키아벨리의 역사 서술과 휴머니스트적 전통

A. 휴머니스트 역사 서술의 특징

역사서술은 16세기가 시작 되기 전에 이미 휴머니스트들에 의해 명확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고 그들의 역사서술 일반 원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 원칙은 역사의 유용성에 관한 것으로 이것은 역사의 목적이 독자들에게 도덕적 교훈을 일깨우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두 번째 원칙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역사가는 우아한 수사적 표현을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들은 이미 고전 사가들에 의해서 언급되었던 것으로써 휴머니스트 사가들은 리비우스의 예를 따라 각 역사서술을 권별로 나누었고 그 각권은 개관적 내용으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구성은 연도별로 서술하는 연대기 형식을 취하였는데 그들의 주관심사는 정치였으며 그 중에서도 대외정책이 그들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고 전쟁과 군사 행동이 특히 주목되었다. 그 외에 휴머니스트 사가들이 고전 사가들에게서 배운 또 하나의 기법은 연설의 삽입이었는데 이는 사건의 진행 뒤에 숨어 있는 심리적 동기를 해석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결론적으로 휴머니스트 사가들은 고전 사가들과 같이 역사를 거대한 교훈적 과정이라고 파악하고 이러한 교훈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고전 작가들을 모방한 여러 가지 수사적 표현 양식들을 사용하여 역사를 서술하였던 것이다.


B. {피렌체史} : 전통의 계승과 비판

마키아벨리는 그의 {피렌체사}에서 '이익과 즐거움'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고전 사가들이나 휴머니스트 사가들에 있어서 역사가 지녀야 할 양면성이라 할 수 있는데 마키아벨리가 이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가 휴머니스트 역사 서술의 2대 명제인 '교훈적 역사서술'과 '수사적 역사서술'의 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 서술에 있어서 마키아벨리가 그의 선임자라 할 수 있는 Bruni와 Poggio를 모방하려한 것은 사실이라 할 수있다. 하지만, 그는 양자의 서술이 피렌체의 내부적 정치갈등의 논의에 등한한 점을 비판한 것으로 보아 내용보다는 서술 양식의 면을 배운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표현 기법상의 문제에 대한 준비과정으로 그는 {카스트루치오 카스트라카니의 생애}를 서술하였으며 이 속에서 리비우스의 표현 양식을 모방한 휴머니스트적 표현 양식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그의 작품이 라틴어가 아닌 이탈리아어로 쓰였다는 사실도 휴머니스트적 규범의 패턴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휴머니스트적 규범을 단순히 그 시대의 문학적 범례로서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휴머니스트적 서술 규범은 마키아벨리에 와서는 임의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전시해 놓은 뼈대의 구실을 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전달되는 교훈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다. 즉, 휴머니스트 사가들은 조상들의 훌륭한 업적을 기록함으로써 후대인들이 그것을 본받게 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으나 마키아벨리는 그러한 목적이 오히려 현실의 해악을 회피하고 제거하도록 이끈다고 비판하고 자신은 과거인들의 기만, 술책, 계략들을 기록함으로써 자유정신을 모방으로 불타게 하려는 목적을 가졌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는 '역사는 실례를 통하여 가르친다.'는 휴머니스트적 규범을 고수했으나 그가 제시한 실례들은 정치적 제법칙의 존재와 기능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가 열거한 사건들은 이러한 법칙들을 명시화하기 위해서 정형화 되었던 것이다.


Ⅱ. 마키아벨리의 역사 의식의 발전

A. 로마史로의 종속 : {군주론}과 {리비우스 論考}

1512년 메디치가의 재집권이 이루어지면서 고초를 겪은 마키아벨리는 Sant'Andera에 은거하면서 일생 중 처음으로 사건의 참여자가 아닌 관찰자와 분석자의 입장에서 자신의 정치 경험과 그로부터 배운 역사적 교훈 그리고, 정치의 법칙들을 체계적으로 생각해볼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것을 바탕으로 {군주론}을 저술하였으며 공화주의적 성격이 농후한 모임인 'Rucellai 정원회'에 참여하면서 리비우스의 {로마사}에 대한 논고 형식으로 {리비우스 논고}를 저술하였다.

이 두 저술은 모두 정치 법칙의 도출이라는 실제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주제 사이에 긴밀한 관련성이 존재하고 있다. 즉, 양자는 모두 '영광과 위대성'을 획득하게 하는 방법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군주론}에서 발견되는 정치 법칙들은 주로 마키아벨리 자신의 정치경험에 근거한 것인 반면 {리비우스 논고}는 로마사속에서 위대함을 획득하는데 필요한 방법을 찾으려 하고 있는 차이점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로마적 고대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하여 정치 법칙을 찾으려는 시도는 마키아벨리에게 자신의 경험 이전의 피렌체사에 대해서는 관심이 결여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 점은 이 시기 그의 역사 의식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데 다시 말하자면 마키아벨리에게는 두 개의 역사적 시대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마키아벨리에게 있어서 역사는 로마사로 대별되는 '고대(Cose antique)'와 자신의 동시대적 경험으로 대별되는 '현대(Cose moderne)'의 대립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그러므로 피렌체의 과거는 무시되었고 고대와 현대를 이어줄 역사적 전망은 결여되어 있었던 것이다.


B. 피렌체사의 자각 : {1520년 논고}와 {피렌체사}

1520년경 마키아벨리는 교황 레오 10세의 요청으로 {로렌조 사후의 피렌체 제반사에 대한 논고}를 저술한다. 이 저술에서 마키아벨리는 최초로 다가오는 피렌체 정부조직의 개편에 채택될 제도의 정확한 구조를 약술하는 문제에 처하게 되어 초기 피렌체 정권들의 강약점을 분석함으로써 자신의 의견을 펴고 있다. 즉, 그는 메디치家 이전의 피렌체에 대해 체계적인 평가를 시도하고 있으며 이러한 내용으로 미루어 그가 이 시대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저술에서 그는 정부를 집단적 세력과 구조들의 갈등이라는 좀 더 복잡한 시각으로 보려하고 있는데 이것은 주로 개인의 능력이 강조된 {군주론}이나 {리비우스 논고}에 비하여 피렌체사를 연구함으로써 얻게 된 역사적 전망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저술에서는 그 이전의 저술에서 피력하였던 인간과 세계의 동일성에 근거한 정치법칙의 발견과 적용에 관한 그의 태도가 유연하게 변하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물론, 과거의 사고를 버리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시대착오적이고 획일적인 법칙의 추출과 적용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각 시대간의 차이점을 비교 분석하고 그에 근거하여 현재의 상황에 적절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역사를 연구함으로써 역사의 다양성에 눈뜨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그에게 역사는 본질적인 동일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 주의하여야 한다. 따라서 이제 그는 일견 모순적인 두 요소인 역사의 다양성과 동일성을 종합하여야 될 시점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Giulio de'Medici의 요청에 따라 저술된 {피렌체사}에서 해결책이 나타나게 된다. 역사의식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저술의 중요성은 역사적 고찰의 범위가 확장되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총체적인 역사적 전망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찾아질 수 있다. 그 총체적인 역사적 전망이란 바로 역사의 순환성에 대한 인식이었다. 그리고, 이 인식으로 이전의 저술들에서 제시되었던 역사의 동일성과 다양성이 하나의 매커니즘안에 포용될 수 있게 되었고 초기 저술의 특징인 고대와 현대간의 대립을 극복하고 양자간의 역사적 연속성을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Ⅲ. 마키아벨리의 역사인식

A. 시대인식 : 부패와 쇠퇴의 개념

{군주론}에서 {피렌체사}에 이르는 마키아벨리의 저술에서 공통적으로 다르고 있는 주제중의 하나는 부패와 쇠퇴에 대한 개념이다. 마키아벨리가 부패와 쇠퇴의 현상에 대한 관심을 지속한 것은 그가 피렌체의 과거와 현재를 바로 부패와 쇠퇴의 시대로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에게 피렌체의 역사는 이러한 부패와 쇠퇴의 법칙에 대한 풍부한 예를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피렌체사} 전편에 걸쳐 부패라는 사악한 세력이 어떻게 피렌체를 장악해서 자유를 질식사 시키고 결국에는 폭정과 치욕을 안겨주게 되었는지를 묘사하였다.

그는 자신의 저술들을 통해 부패의 원인으로 종교의 타락, 도시민들의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 태도 등을 들고 있으며 특히, 강조한 것은 부와 권력이 소수의 손에 집중됨으로써 야기되는 타락성과 정파간의 투쟁이었다. 물론, 그가 건설적인 대립까지도 회피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피렌체에서 발생해온 적대감은 언제나 정파간에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피렌체의 역사는 '방종의 촉진자'인 인민들과 '굴종의 촉진자'인 귀족들에 의해 '폭정'에서 '방종'사이를 방황하는 과정으로 보고 그러한 과정에서 도시와 그 자유는 산산히 부서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정파간의 투쟁은 부에 의해서 권력이 매수될 가능성과 연관이 되어 있는데 그의 {피렌체사}에서는 이러한 분석에 대한 역사적 실례들이 가득차 있다.


B. 미래의 비젼 : 순환론적 역사관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와 이탈리아의 미래에 대해 제시한 비젼은 '역사적 순환론'이라는 가정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역사의 순환성은 역사의 운동성을 규정해 주는 것으로서 르네상스 시대에는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진 것이나 마키아벨리가 가진 의식은 당대인들과는 상이한 것이었다. 그는 당대인들에 비해 자신의 시대가 부패와 쇠퇴속에 있음을 더 뚜렷이 인식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도덕적 비난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지만 동시에 찬양과 비난을 넘어서서 불가피성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다. 즉, 역사에서 고정불변의 상태는 존재하지 않고 그것은 언제나 쇠퇴하고 흥기하는 것을 반복하기 때문에 현재의 부패와 쇠퇴가 불가피한 것으로 파악된다면 미래의 새로운 부흥과 상승 역시 이러한 불가피성에 의해 예견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부패와 쇠퇴라는 비극적 역사인식은 동시에 희망적 미래상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는 인간본성의 불변성이라는 신념 위에서 역사의 다양성조차도 일정한 패턴을 따른다는 순환적 역사관을 발전 시키고 있으며 이것은 그의 저술들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순환론의 제시가 아니라 이러한 순환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도 제시하고 있는데 정치 체제의 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로마 공화정에서 구현된 '混合政體'를 확립함으로써 그 순환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즉, 로마사의 예에서 피렌체의 쇠퇴를 극복할 예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순환론적 사고를 통해 우리는 그의 세계관이 결정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결정론적 매커니즘은 그에게 미래에 대한 비젼을 제시해 준다. 즉, 자신의 시기를 부패의 시기로 규정한 이상, 역사의 매커니즘이 보다 결정적일수록 부흥과 상승의 비젼은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결정론적인 역사 순환론 속에 인간이 예속되어 있다고 할 지라도 모든 인간적 노력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르네상스기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인 인간성에 대한 자각은 역사에 있어서도 세속화의 경향이 나타났으며 이것은 중세와 구별 짓는 중요한 특성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키아벨리는 '세속화에 대한 과감한 실험'을 수행하였다 할 수 있는데 마키아벨리는 시민적 생활이란 초시간적 존재의 개입 없이 우연성의 차원속에서 발전된다고 생각하고 구원과 재생은 역사의 순환성이라는 거대한 매커니즘 속에서 시민 각자가 내적 자각을 가지고 그들의 시민적 virtu를 발휘할 때 비로소 도래한다고 보았다.


Ⅳ. 결 론

마키아벨리가 받아들인 휴머니스트적 역사서술 규범, 즉, 수사학적 표현을 통한 교훈의 전달이라는 측면들은 현대의 실증적인 역사학의 기준에서 볼 때 많은 결점을 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마키아벨리 개인에 대한 비판이라기 보다는 휴머니스트 史家 전체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고 휴머니스트들의 역사 서술 목적이 무엇이었나 하는 관점에서 볼때에는 이 비판 자체도 문제점을 안고 있다. 즉, 그들은 역사에 있어서 정확성의 추구라는 측면을 무시했던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교훈의 전달이라는 측면을 더 중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수사학적 표현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修辭'라는 것이 사실적 정확성과 양립하는 궤변이나 미사여구의 나열이 아니라 '지혜와 표현양식의 조화로운 종합'이고 그 목적은 인간을 미덕과 가치 있는 목표로 인도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르네상스기의 사가들이 이것을 중시한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사}를 서술함에 있어서 브루니와 포지오가 국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음을 비판하였는데 이것은 휴머니즘 이후의 사가들에게 휴머니즘 사학을 비판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출처http://rose0.knu.ac.kr/~z971554/archiv/hisgene/histgra/mach.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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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무지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무지를 깨달을수록 그걸 극복해야 하겠다는 결심 역시 더욱 더 강해졌다.
막노동을 해서 입에 풀칠이라고 해야 했기에 시간이 별로 없었지만 시간이 있을 때마다 책을 읽었다.
나는 책을 앞에 놓고 밥을 먹었고 덕분에 한끼를 때울 때마다 대여섯 페이지씩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다 나는 로크의 <인간오성론>을 읽고 철학에 처음으로 눈을 떴다. ...
그것은 나를 혼수 상태에서 일깨웠고 이전의 비굴한 견해를 단호히 버리도록 만들었다."

-새뮤얼 스마일즈, <인생을 최고로 사는 지혜 Self-He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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