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파네스 희극 - 희랍어 원전 번역
아리스토파네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단국대학교출판부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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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세기말 그리스는 페리클레스의 통치하에 군사력과 경제력,외교에서 전성기를 누렸다. 문화적으로도 458년경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과 431년 에우리피데스의 [메디아]와 같은 비극의 정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429년 페리클레스의 죽음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패배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거치며 차차 민주정의 그리스는 스파르타와 페르시아에 그늘에 가려 필리포스 2세의 마케도니아에 점령당하기까지 기를 펴지 못하는 나라가 되고 만다.

448년에서380년까지의 그리스를 살았던 아리스토파네스는 기울어만 가는 그리스의 영광을 바라보며 이 책에 실린 [구름](423 B.C), [새](414 B.C), [뤼시스트라테](411 B.C), [개구리](405 B.C)를 썼다. 과연 소크라테스의 궤변 때문인가? 잘못된 종교관의 문제인가? 혹은 쓸데없이 호전적인 정책 때문인가? 개콘 시대에 이런 희곡이 과연 코메디라 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여기서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인물들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정치적 관점에서 바라본 비난의 대상들이다. 과연 페리클레스 정치의 한 영광의 산물인 아이스퀼로스가 돌아온다해도 이런 어려움을 스스로 짓고 있는 아테네인들을 돌려 놓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시대의 궤변과 잘못된 정책과 무지개 공약과 똑똑치 못해 보이는 협정들, 진보와 보수라는 틈바구니에 끼어 바라보며 읽는 이 책은 결코 희극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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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중용 동양고전 슬기바다 3
주희 지음, 김미영 옮김 / 홍익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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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과 중용은 원래 한나라 초기 한무제에 의해 집대성된 예기에 포함되어 있던 글이었다. 이 글들이 독립된 책일뿐 아니라, 유학의 중심된 역할을 하는 사서(대학,논어,맹자,중용)의 일부로 자리를 잡은 것은 12세기말 남송시대, 자신의 시대를 위한 하나의 체계를 마련코자 했던 주희의 의도적 선택에 따른 것이었다. 수,당시대를 거치며 거대한 세력으로 자라난 불교와 도교 그리고 당시의 여러 다른 유교의 해석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나타난 12세기 새로운 유교의 해석이다. 이제 유가는 주자를 거치며, 변증되는 철학체계의 확고한 틀을 갖추게 된 것이다.
 
대학의 주축은 나라를 세우는 뿌리를 위해 군주의 마음이 어디로 향해져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중용은 이런 심적 체계의 근본을 밝혀 유학을 종교적 근거(天命=性)를 갖는데까지 이끌고 간다. 이제 유가의 담백하기 그지 없었던 삶의 지혜들은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주희의 [대학장구], [중용장구]을 통해 비로소 공자의 정신은 다시 해석되어져 비로소 하나의 국가체계와 깊은 심적 수양의 종교적 측면을 지니게 된다. 거대국가를 위한 통치이념의 모양새와 종교적 외향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유학은 무엇일까?  새로이 끄집어 내어야 할 보물인가? 아니면 중국의 영향 아래 있던 시절의 쓰레기인가? 책 하나의 독후감으로 주제넘는 질문일지 모른다. 하지만 자신의 시대를 위한 원리들을 끄집어내고 다듬어내는 주자를 보며, 이제 어떻게 이것을 발효시켜 우리 삶을 위해 쓸지 생각해 볼 일이다. 나라의 근간을 유학에 가졌던 세 나라. 아직도 그 문화의 영향력 아래있는 한중일의 한 연결점으로 이제 한 나라의 근간이 아닌 여러나라의 이해와 건설적 관계의 한 축으로 공자의 가르침은 다시 의미를 가질순 없을까. 꼭 그를 죽여 다시는 나타나지 못하게 해야만 우리가 잘 살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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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1 22: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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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
사무엘 베케트 지음, 오증자 옮김 / 민음사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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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한 몽파르나스 바빌론 소극장에서 공연되던 이 연극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53년 [피가로]지에 장 아누이가 쓴 [광대들의 팡세]라는 논평이었다. 고도를 누구로 여기느냐는 베게트의 말처럼 관객 자신의 몫이지만 나 역시 아누이와 같은 느낌으로 고도를 본다.
 
삶의 질곡을 담아낸 구두와 이성적 사고의 모자로 대변되는 고고와 디디가 처음 등장하는 1막은 십자가 옆의 두 도둑들의 구원의 가능성에 관심이 모아진다. 죄인됨을 수락하는 회개로서 이분의 일의 구원의 가능성을 얻을 수 있는가? 디디는 회의적이고 고고는 긍정적이다.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은 회개의 문제에는 다르다. 이들은 인본주의와 전통, 혹은 구교와 신교, 자유주의와 오소독시를 보여주는 대비의 재미가 있다.
 
이들 앞에 등장하는 20세기적 삶의 조건, 자본주의. 땅의 주인인 포조는 고도를 기다리는 두 사람 앞에 자본가의 잔혹함으로 나타난다.  포조는 럭키에 기생하며 럭키의 이론(자본론이라 할 수 있을까)에서 자본주의의 합리화를 배워낸존재이다. 그는 군림하나 정작 자신의 중요한 면들이 소모되어짐을 깨닫지 못하는 자이기도 하다 
 
같은 장소, 2막은 자못 심각한 주제를 논하며 시작한다.  분주함과 말장난, 혹은 이데올로기는 죽음 앞에 선 존재들로 죽음을 잊게 하는 파스칼적 회피이다. 이런 무가치한 시간 보냄에서 확실한 것은 기다림뿐. 시간이라는 가혹한 운명에 기다림조차 없다면 까뮈의 말처럼 나무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존재인걸. 포조는 고도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포조를 고도로 믿고 싶어하는 고고와 디디가 비록 몇 있을지라도...포조가 가는 길은 눈이 멀고 귀가 머는 길이다. 일상의 습관과 투쟁의 변증법 속에 길을 잃고 마는 존재들.
 
아일랜드인다운, 조이스를 연상케 하는 예술에 대한 견해와 파스칼과 까뮈를 보는 듯한 프랑스적 사변 속에서 베게트는 20세기를 관통한 기독교 사회의 한 질문을 던진다. 슈바이처가 말한 영원히 [연기된 종말]인가 아니면, 자비로우신 오래참음인가. 대답은 사색이나 토론에 있지 않고 오리라 약속한 이에 대한 신뢰와, 나 자신의 구원의 가능성에 대한 겸손함 안에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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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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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에게 그의 어머니에게서 말로만 듣던 세계는 정말 아름답고 놀라운 것이었다.
하지만 구세대적 인간인 그에게 이 새로운 멋진 세계는 무엇을 희생해야만 얻어지는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인간다움과 자유를 댓가로 얻어지는 안정과 쾌락, 소마soma휴일과 감각적 만족의 삶은 부모와 예술, 종교와 지성에 대한 추구, 결국 모든 인간다움을 담보로 한다.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불행해질 권리를 원합니다.늙어 추해질 권리,굶을 권리, 질병에 걸릴 권리, 내일 일로 불안에 떨 권리, 온갖 고민에 시달릴 권리 그 모든 것을 원합니다. ”

헉슬리가 보여주는 안정을 목표로 하는 세계의 구도는 생물학적 방법론의 가능성과 공리적 행복의 추구라는 20세기의 두 빛의 천사가 만나 만들게 될 지옥같은 세계를 보여준다. 개인으로의 인간은 사라지고 기능으로서의 인간단위만이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민족주의든 집단적 인간이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시대정신이 몰고갈 종착역이다.

"[멋진 신세계]의 주제는 과학의 진보가 아니라 그것이 인간 개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이다. 물질의 과학화는 삶을 파괴하거나 복잡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적용될 수 있다. 유토피아는 이미 오래 전에 누군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근접해 있다. 나는 이를 향후 600년이라는 미래에 투영시켰지만 그 공포는 1세기 안에 다가올 것처럼 보인다.” (헉슬리)

2032년안에 우리를 몰고가리라던 이 세계는 벌써 그 냄새를 풍긴다. 소비를 위한 선전과 대중의 세뇌, 노동자계층을 만족시켜 편입시키는 세계구조. 인간됨과 신, 죽음의 의미에 대한 생각들과 추구에 대한 조소 혹은 무플. 멋진 이 세계는 훨씬 강력한 프로스페로의 마법으로 우리를 옴짝달싹 못할 길로 몰아가고 있다. 사회안정은 우리의 모든 권리의 박탈을 합리화하고 있다. 그 안정과 번영이라는 허여멀건허니 비대한 짐승 앞에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내려놓고 주입된 유치한 구호를 되뇌는 백치로 살아가든지, 죽고 싶어할만큼 지독한 고통의 인간됨을 선택하든지를 강요받는 계시록적 전경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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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증보판
라인홀드 니버 지음, 이한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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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에 출판된 세가지 책을 평행 독서중이다. 훗날 프랑스의 문화부장관을 지내게 된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 기술문명에 대한 영국인다운 해학을 엮어낸 헉슬리의 [Brave New World], 그리고 미국인 신학자에 의해 쓰여진 이 책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 사회]이다.
 
이 책들은 인간이 20세기의 세계 안에서 어떤 불가항력적인 파멸앞에 서있는지를 보여준다.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가없는 팽창 앞에 가진자는 자기기만과 감상주의적 태도에 갇혀 살며, 가지지 못한자는 폭력밖에는 선택할 수 없는 냉소적 정신을 강요당한다. 저마다 그 안에서 인간을 찾기 원하며 나 홀로의 인간이 아닌 다 같이 살 수 있는 공존의 공간에서의 인간됨을 소망한다.
 
그 중 이 책은 유독 사십대를 위한 책이란 느낌을 준다. 도덕적 이상주의와 확고한 폭력전복 혹은 비폭력적 원칙에 전념하는 이십대나, 이런 이상주의의 현실과의 괴리를 자신의 부단한 노력으로 메꿀 방법론을 모색하는 삼십대와는 달리,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런 전제하에 원칙의 고수라는 중요한 가닥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 나이에 적합한 책이기 때문이다. 결코 이런 종류의 책을 주로 읽는 대학생 시절이나 석박사시절에 호감이 가는 방향은 아니다. 하지만 때묻은 세대의 바퀴 속을 굴러 가는 자로 자본주의의 젖을 먹지 않는 자가 있으며, 인간에 대한 거리낌없는 증오를 맛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사회에 대해 포기하자니 마음이 걸리고, 나서자니 손에 피를 묻혀도 아무 쓸모없을 것이라는 느낌이  앞을 가로막는 경험을 왜 모르겠는가?
 
사회주의적 성격의 정부, 도덕적 이상을 가졌던 인간들의 타협과 도덕적 오염, 비정규 노동자의 해고와 고급 노동자의 파업, 자본소유자의 선전과 경제적 분배에 대한 중간층의 동요, 평화를 인질로 한 강대국의 기만과 자국내 경제위기에 의한 실권의 위기를 대외긴장 형성과 미국에 대한 의탁으로 해결하려는 일본, 수많은 정치와 경제와 도덕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 이 거대한 흐름앞에 인간으로 서서 버티기를 소망하는 우리 모두를 위해 이 책은 여전히 건재하는 스승이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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