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론의 현대적 해석
김수행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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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본론은 힘겨운 책임에 틀림없다. 그 방대한 양 뿐 아니라 논리 전개의 세밀성, 폭넓은 예시와, 비교되고 있는 기존의 경제이론에 대한 이해 등이 이 책의 독파를 어렵게 하는 이유들이다. 김수행 교수의 이책은 이런 자본론읽기의 어려움을 넘어 자본론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면서 그 핵심적 내용을 전달하는데 성공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마르크스는 비참한 인간 상황의 원인을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일반이 접근하기 어려운 자본이라는 독점권으로 노동력에서 나오는 잉여가치를 빼앗아가는 생산방식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전체와 맞물리면서 인간의 생존조건 자체를 규정하는 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가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알지 못한다면 자본주의적 삶의 비참함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가치라는 댓가를 지불하고 얻어진다. 노동자와 자본가를 모두 천박하게 만들며 서로 인간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자본주의는 지구라는 행성을 댓가로 얻어진다. 좀더 미친듯 지구를 파헤쳐 복구가 불능할 때까지 소비의 축제를 불사를 것이다.
 
한 사람의 임금노동자로서(드러커의 고상한 표현을 빌리면, 지식노동자) 살아가며 과연 임금 뿐 아닌 삶의 모든 양식에서 나를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사고와 생활방식을 벗어날 수 있을까? 자본주의는 한 인간을 효용가치 없게 내버려두진 않는다. 반드시 그의 포로로 만들고 말 것이다. 연대가 해결책인가? 헤게모니의 장악인가? 대안적 삶이 장기적 모델인가? 자본론의 쓰여지지 않은 부분인 국가자체나 주위국가의 압력은 이런 대안을 무색한 것으로 만드는 힘이 아닌가? 지하철 옆자리에 지쳐 잠든 한 아주머니의 얼굴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각 개인에 드리운 그늘과 나의 무력함을 본다. 잠든 아주머니와 나를 싣고 지하철은 계속 달린다. 자고있든 깨어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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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로역정 정편
존 바니언 지음, 황찬호 옮김 / 서울대학교출판부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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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나의 신앙 속에 구원에 대한 확신을 빙자한 안이함과 뻔뻔스러움이 있었음을 느끼게 해 준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의 길을 가라.] 성경은 늘 우리에게 머리가 쭈뻣하게 정신들도록 해 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소견에 좋은대로 살면서 걱정이 없다. 말로만 변명할 수 있다면... 신앙에 대한 것이면 모르는 것이 없지 않나? 이단적 위험의 감별과 新思潮의 맥락까지를 논한다면 아는 것으로야 수준급이라 할 수 있지. 그러나 과연 마음이 바뀌지 않았다면, 삶이 변하지 않으면서 판단만 드높은, 이 책에 나오는 '수다쟁이'가 빠진 오류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수다쟁이는 결국 하늘길이 아닌 곳을 향하던 인물이 아닌가? 
 
이런 삶은 신앙의 핵심은 피한체로 정말 나의 정신 건강, 해나가는 일의 위로, '내 일'의 성공적 진행을 위한 축복으로만 신앙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니체가 역겨워하던 신앙의 모습은 사실 이 책의 순례자도 고개를 흔드는 것이기도 하다. 하늘의 축복과 땅의 지배권을 동시에 붙잡으려는 마음. 금욕과 선행의 이유가 내 안에 있는 심리적 이유들과 그 해결책 때문이라면 이런 발걸음은 올바른 목적지에 결코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언젠가부터 하나님은 내 머리 안에 갇혀 계시고 그분에 대한 생생한 두려움과 기쁨의 마음은 記述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순례자의 길 어디에서 잘못 들어 이런 지경에 왔는지는 모른다. 슬금슬금 신앙의 길과 나란히 가는 어느 길에선가 길을 잘못든 것일거다. 내 믿음이 다만 [죽음의 의미]를 획득하기 위한 위로책에 불구했다면 어떻게 위로의 한 단편이라도 맛볼 수가 있었을까?
 
이 순례의 마지막에 순례자Christian과 동행자Hopeful이 하늘성에 들어갈 무렵, 뒤에 남겨진 한 사람이 잊혀지지 않는다. Ignorance. 번역은 무지, 그의 이름은 무시이기도 하다. 어렴풋이 알 것 같은, 사실은 뻔한 진실을 없는듯, 별것 아닌듯 하고 끝까지 살아버리는 삶이다. 그는 목적지의 바로 앞에서 나락의 구멍에 떨어뜨려지고 만다. 그리고 천로역정 정편은 순례자의 다음 독백으로 끝난다. [지옥을 가는 길은 멸망의 도시뿐만이 아니라, 천국의 문 옆에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은 훌륭한 번역과 영문판의 삽화뿐 아니라 우리나라 옛 번역판의 한복입은 삽화가 읽는 즐거움을 더한다. 신이 살아계시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 자기 삶을 되집어보기 위한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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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 2005-08-14 0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도란....힘들 때 선하신 하나님때문에 행복할 수 있고, 자신이 하나님앞에서 곤궁한 자임을 인정하는 자가 아닐까요? 교회의 이름으로 모여 열심히 섬기는 모습보다 말씀을 가슴에 품고 자신의 현장에서 땀흘리며 수고하는 섬김의 모습이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챤 중에도 황우석 교수보다 더 뛰어난 전문인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카를 2005-08-16 0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논어 동양고전 슬기바다 1
공자 지음, 김형찬 옮김 / 홍익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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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중국에 갔을때, 그래도 그 동네에서 지식인임네 하는 사람들에게 논어에서 잘 이해 안되는 구절을 물어본 적이 있었다. 헉, 읽어본적이 없덴다. 논어는 중국의 정치와 철학에 중요한 책이었지만 이제 우리나라나 일본에서만 읽히는 책이 된걸까? 나도 공자를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나도 관심이 가게 마련...논어는 소로우가 사랑하는 책이었고 나도 이 책을 사랑하게 되었다.
 
논어는 공자의 사상이 노자와 다름에 많은 강조점을 둔다. 이것은 역사에 참여하는 자의 얼룩 묻음과 세상을 등진 삶 사이의 오랜 갈등을 보여준다. 세상을 등지고 자기안의 창조본성과 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삶. 나빠지기 마련이고 사람을 망치기 마련인 더러운 정치놀음에 가까이 않는 것. 분명 옳은 삶의 하나이다. 그러나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삶에 눈감고 있을 것인가? 그들이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그깟 얼룩묻음이야 다시 씻으면 되는 것을...공자는 자신을 위한 삶이 자신을 위하지 않고, 타인을 위한 삶이 자신을 위한 삶임을 보여준다. 더러운 정치의 암투와 전쟁, 속임수와 배신. 그래도 그는 그 자리에 옳은 사람이 들어서야한다고 믿는다.
 
논어는 하늘뜻에 그 근본을 둔다. 주위의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도, 존대하고 예로 대하는 것도 사실 하늘이 있고 그 뜻이 선함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이 기준이면 그것은 기준이 없음이다. 허접한 옆사람을 어찌 사랑하랴? 하늘이 그 사람을 사랑함을 알지 못한다면...극악무도하고 아래로만 향하는듯한 세상의 풍속과 비참함 또한 하늘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면 한가닥 희망이나 가져볼 수 있을까? 하늘이 있음으로 그리고 그 선한 뜻이 있음으로 옳은 삶을 살 이유가 있다. 공자는 뒷사람後生을 두려워했다. 웃사람이 아닌 아랫사람, 사람의 시선이 아닌 하늘의 시선, 두려워한 것이 도치되어있다. 하늘이 없으면 어떻게 후생을 두려워할까? 이것이 진정한 지혜임을 살아보며 느낀다.
 
논어에는 이 모든 일의 중심에 自己가 서 있다. 수양과 반성, 끊임없는 배움과 사고의 훈련들. 이것은 자기가 바로 될때 하늘뜻 실천과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이 가능해짐을 뜻한다. 자기가 되어있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할까? 수많은 꾀임과 교묘한 말과 욕망을 자극하는 유혹을 어찌 이길 수 있을까? [君子求諸己,小人求諸人 군자는 일의 원인과 해결을 자기 안에서 찾는다]라고 했다.
 
하지만 이 자기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임을 공자는 또한 알고 있었다. 이것이 두고두고 문제임은 모든 도의 길을 가는 사람은 알고 느끼며 절망하는 이유이다.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자기를 이겨내 예로 돌아감이 仁이다. 단하루만이라도 자기를 이길수 있다면 천하는 仁으로 돌아갈 것이다] 천하는 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자기를 이길만한 사람이 없는 때문이다.
  
결국 하늘이 기준이나,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낀다. 자기가 해결되지 않는 것과 절망적 현실 앞의 무한한 힘의 원천이 되어야할 하늘뜻이 명시적이 아닌 때문이다. 하늘뜻을 찾고자하나 하늘의 뜻은 모호하다 역을 하거나 점을 쳐도 선한 뜻이려니 한다. 이것이 근본인데 주어지지 않으니 답답하다. 천지의 조화와 생물의 기이함을 보면 그 뜻을 알듯도 한데 하늘은 말이 없다 [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
 
논어는 우리나라 사람이 원문으로 접근할 수 있는 귀한 자산이다. 소로우의 [원문으로 읽는 것이 진정한 이해를 준다]는 말이 문득 기억난다. 그에게는 라틴어였지만 우리에게는 한자가 있는 셈이다. 이 책의  앞 부분 번역도 아래에 자세한 주가 있어 도움이 되나, 뒷부분에 수록된 원문 읽기를 권하고 싶다. 원문에 필요한 해석들이 같이 있어서 원문으로 읽으며 해석자의 생각을 뛰어 넘어보는 재미가 있다. 도는 우리 마음 속에 있고 각 사람이 자란만큼 들리는 것이니까...추가로 콘텍스트 안에서 텍스트를 보기 위해선 공자의 삶과 제자들의 됨됨이도 공부를 병행하면 살아있는 공자를 만나는데 더 도움이 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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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부터의 수기 외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덕형.계동준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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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집의 기록]
 
29살의 도스또예프스끼는 반역죄로 총살형을 선고 받았다. 1849년 4월, 그는 니꼴라이 1 세의 왕정을 비판하고 급진적 민주의의를 주장하던 뻬뜨라셰프스끼 사건에 연좌되어 다른 서클 회원과 함께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총살 직전 황제의 특사로 4년간의 시베리아 징역형과 4년의 병역의무로 감형되어 그는 시베리아로 유형된다. 이 시베리아의 옴스끄 감옥에서 지낸 4년간의 생활을 고스라니 담아 40세에 출간하게 된 것이 이 책중 [죽음의 집의 기록]이다. 소설의 형식을 빌린 이 글은 그래서 도스또예프스끼 자신의 감옥생활에 대한 기록이면서 또한 그가 그곳에서 관찰한 범죄자와 범죄에 대한 형벌 시스템에 대한 관찰을 담은 기록이기도 하다.
 
그가 본 유형수로 온 범죄자들은 스스로의 범죄행위에 대해 특별한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 자신을 현 사회제도의 희생자로 여기며 분노하는 것이다. 러시아 민중은 그들이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범법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운명에 강제로 놓여져 있으며 그래서 유형자가 되었고, 이런 부당한 형벌이 결국 그들의 죄를 정당화해준다고 믿는다. 이런 부당한 사회 시스템의 개발 및 유지 보수는 지배층의 전유물이다. 유형자들은 그러므로 상부층이 만든 시스템에 희생당하는 자신들의 모습에서 결코 죄를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은 희생자일 따름이다.
 
최근의 뇌물수수사건이나 대학에서 연구비 횡령 후 당사자들의 태도는 그것이 늘상해오던 일이거나 관습적으로 받아들일수 있을때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나에게 쏟아지는 모욕이나 혹은 비난은 과도하다는 것이다. 옳음에 대한 기준이 없다면 누군가 정한 룰에 의한 이런 정죄는 과연 불합리하다. 우리 사회는 범칙금이란 내가 잘못해서 내는 것이라기 보다는 [재수가 없어서 걸린 것]이다. 잘못된 최고속도 기준, 잘못된 장소에 설치된 카메라, 숨어서하는 잘못된 적발. 모두 다하는데 왜 나만 이렇게 재수없게 걸려들었을까? 어쩌면 그때의 러시아나 우리는 많이 닮아있다. 과연 그러면 죄란 존재하나?
 
이런 죄에 대해 우리사회는 이렇게 처리한다. 이런 종류의 일이 터지면 전 국민을 잡아넣을순 없으니 그중 본보기 일부만 처벌한다고한다. 이는 결국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관행이며 걸린 사람만 재수가 없다는 의식을 국민과 심지어는 지식인과 그들 밑에서 배울 장래의 우리 지식층 사람에게까지 교육시키고 있는 셈이다. 우리사회에 현재 명확한 잘못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는 잘못에 대한 기준이 없기 때문은 아닌가?  우리사회 범법의 기준은 항상 여론과 이를 조정하는 교묘한 잔재주에 놀아나고 있다. 이것은 분명 나라를 망하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며 나라를 뿌리에서부터 뒤흔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기준의 붕괴는 분명 확대 재생산되고 있으며 기준이 없는 백성은 스스로 붕괴하게 될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에 있어 이런 흔들리는 작의적 기준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민중의 가슴안에 숨겨진 본성을 본다. 본성의 깊은 곳에서 인간의 자기 죄에 대한 자각과 인간의 어떠해야함에 대한 명확한 내적 기준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성적으로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소유됨에도 불구하고 교육되고 개발되어지지 않으면 무시되기 쉬운 지각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이 본성을 지하실에서 스스로 고뇌하는 지식인 안에서가 아닌, 수용소에 갇혀 인간의 진실된 삶, 비참함, 추악함과 악함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인간존재를 직접 봄으로써 깨닫게 된다. 인간은 자기의 죄를 보아 깨닫고 바꿀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존재이다. 결코 시스템에만 좌우되지 않는...이 책을 통해 비로소 그의 이후 저작인 [지하로부터의 수기][죄와 벌][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한 실마리가 주어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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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이을상.김수청 옮김 / 이문출판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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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최근처럼 자신이 옳다는 깊은 확신으로 서로를 적대시하고, 옳음에 대한 기준이 흔들린 적이 있었을까? 해방직후의 충돌이후 드문 일이었던 것 같다. 기준이 무엇인가? 기준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걸까? 공리주의는 더 많은 수의 사람이 더 많이 행복할 수 있으면 옳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벤담의 이런 공리주의적 사고는, 행위의 결과를 정량화하여 선악의 판단기준으로 삼는다는 비난을 받아왔다. 도덕에 있어 결과가 판단점이라면, 기준이란 사실 없는 것일 수도 있다. 더욱이 선악의 판단이 쾌락의 양에 따른다는 주장은 비아냥과 더불어, 사람마다 다른 삶의 기준과 가치를 어떻게 서로의 양적 평가로 판가름할 수 있느냐는  비난도 받았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이런 공리주의의 문제를 잘 이해하고도, 결국 해결책은 공리주의 밖에는 없다고 믿는다.  부친 제임스 밀과 벤담의 영향아래 공리주의적 교육을 받고자란 그는 성년이 되며 공리주의에 등을 돌린다. 하지만 결국 그는 종교적 가치를 상실한 인간의 궁극적 기준을 인간 공동 이익에서 찾을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공리주의의 변호자가 된다. 재전향한 대변자로 공리주의를 보완코자 이 책을 쓴 셈이다. 
 
밀은 공리로 도덕의 기준을 삼을 수 있다고 한다. 미래의 예측결과라는 것 혹은 과거로부터 축적된 경험의 결과들이 현재의 동기와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19세기 지대한 성과를 거둔 기술이나 자본경영 혹은 인간경영manipulation의 테크놀로지가 똑같은 방법론으로 도덕과 인간가치의 절대적 기준점으로손색이 없다는 확신이다. 인간의 가치도 도덕도 공리 밑에서 비로소 일사불란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 이 시대는 무엇이 됐든 확고한 가치관이 필요하기도 했다.
 
공리주의가 나의 현재 삶과 어떤 관계가 있나? 20세기를 거치며 이런 새 기준은 정말 삶의 목적을 이루는 핵심어가 되었다, 다수의 행복은 정의와 도덕의 동일어가 되었다. 우리가 매일 거침없이 내닫고 있는 인간기술의 발달과 이를 변호하는 공익의 가치가 이끌어낸 우리 삶을 되집어보면 공리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의미]를 가져가 버렸음을 느낀다. 배아복제를 반대하는 이유도 찬성하는 이유도 [가져다줄 혜택과 손실]에 있지 그 의미에 있지 않은 내 판단기준이 나의 이런 사고의 한계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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