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포로 된 교회 - 21세기 예레미야 마이클 호튼의 세속화된 복음주의 치료책 마이클 호튼 시리즈 4
마이클 호튼 지음, 김재연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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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느꼈던 확신들이 오히려 이런저런 교회 안의 이야기들과 설교들을 통해, 또한 더욱 크게는  나 자신의 사고의 틀로 인해 갈피를 찾지 못하는 느낌이 든지 오래이다. 이 책이 참 오랜동안의 믿음안에서 궁금증을 풀어 준다는 것을 깨닫는다. 더욱이 복음의 핵심과 현재의 삶을 하나로서 살게 하는 처음 눈을 다시 회복하게 해 준다.

이 책의 읽은 후의 나는 이전과 같을 수는 없다면 과장인가? 신학을 몰라도 된다는 주위의 이야기들과 다른 신앙서적들의 홍수 속에 믿음은 느낌과 현실의 괴리 속을 떠돌고 있었다. 분명 계시와 역사 속의 구속사역이 그 시작이었음에도. 알고보면 황당한 일이지만, 분명 나 자신의 이론과 주위의 압력, 인간조정의 인문이론과의 조화와, 삶의 특수영역에 거대한 탑을 쌓아 다른 부족을 벌충하려는 "숨은 자기의"로 얽혀 돌아가는 도피의 생활. 돌아돌아 20년을 보내고 다시 믿음의 영역에 있어 신학-계시의 명료화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는다. 

알고보면 살상을 할 수 있는 기독교 민병대, 부시의 십자군 전쟁, 이 낯선 일이 내 믿음 가운데 벌어지고 있었다. 성공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는 시도. 선교가 아닌 나의 전투에 축복해 주시길 원하는 신앙이라는 것. 그 뿌리에는 걸어갈 길. 주어진 일에서 그 구실을 다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고도 내세울 무언가가 있는, 좀더 나은 기독인으로 인정 받으려는 우위의 욕구. 그래서, 기복과 두려움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하던 고단한 자아라는 신. 

어느 것 하나 쉬어지진 않았지만 이제 나는 내 싸움을 알 것 같다. 이곳의 주신 일을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삶. 아, 왜 이로도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 왜 이런 과정을 허락하셨을까? 기독교를 길들일려면 시민종교로 만들어야 한다던 루소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인 전략이 20세기의 문화 속에 미국 신학 속에, 그리고 내 안에 기가 막히게 성공적인 셈이다. 나의 공부와 사회생활과 노력의 목적이 무엇이던가?  하나님이 아니셨던가? 언제 이것이 이생의 자랑을 넘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까지로 변하여 나는 겨우 아둥바둥 견디어내고 있었던가?  그래서, 나는 내가 더 나은 내가 되도록 노력한다면 언젠가 이루리라는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이제는 매달릴 곳이 나에게는 남지 않게 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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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전쟁
스티븐 아터번.프레드 스토커 지음, 윤종석 옮김 / 사랑플러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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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에게 있어 성적인 유혹은 일반적인 것이다. 청소년에서 40대에 이르기까지 나도 여기에서 자유스럽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이 책에서는 70대가 되어서도 그렇다고 하니 아직 끝나려면 멀은 셈이다. 수많은 성인사이트와 잡지들이 난립하고 케이블 TV와 영화 다운로드 사이트가 이것을 주수입원으로 삼고 일간지 사이트도 이런저런 낯뜨거운 사진을 호객수단으로 삼고 있는 걸 보면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성을 통해 이들을 먹여 살리는지 알만하다. 

하지만 이 책은 보는 것을 절제할 줄 알며, 생각의 고삐를 잡으며 그래서 더욱 자신의 짝에게만 눈과 마음을 고정한다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것은 훈련이며 헌신이고 하루하루의 분투이다. 보는 것을, 생각하는 것을 붙잡으려 한다면 얼마나 습관이 되어야 하겠는가.

물론 그 훈련의 동력은 순종에서 온다. 거룩한 모양을 흉내내거나 우월감을 느끼고자하는 종교행위가 아닌 아버지를 따르는 마음이다. 아버지는 옳으시고 사랑하시며 거룩함을 원하시는데 어찌 돌아온 양자가 따르지 않으랴? 하지만 우리는 옛 버릇을 버리기 힘들어하는 사람들이다. 내멋대로, 감각이 만족스러운 곳으로, 우리도 에드먼드처럼 [터키과자] 하나에 녹아난다. 순종은 이 모든 돌이킴의 첫번째이고 또마지막까지의 행동강령이다. 우리는 자칫 천국문 앞에서 열린 구덩이에 던져지는 vincible ignorance 처럼 내 맘에 즐거운대로 거창한 사역에 매달려 순종없는 인생에 속아살 수도 있는 존재다. 다만 그분은 매일 사는 삶에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순종을 원하신다.

성적 영역에서의 순종은 첫걸음이다. 성적 유혹에 약할 때 영적 건강이나 관계가 어려워지는 걸 안다면 어찌 시작하지 않을까마는 저자들이 권하는 [눈을 굶기는 것], [내가 따져볼 권리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언제나 습관이 될까는 아직 모르겠다. 나는 과연 상륙정의 군사처럼 이길 수 없다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죄의 종으로 살지 않고 이 일을 이루려는 하는걸까? 사실은 이것이 매일 새롭게 살아나야하는 이 싸움의 진실이리라. 모든 연령대의 크리스챤 남성에게 권하고픈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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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사람들 - 인간 악의 치료에 대한 희망 보고서, 개정판
M. 스콧 펙 지음, 윤종석 옮김 / 비전과리더십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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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달여를 이 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의견도 구하고 생각도 해 보았다.

스캇펙 박사는 그의 임상경험을 통해 기존의 DSM으로 분류할 수 없는 다른 형태의 personality disorder의 한 유형을 기술한다. 그것은 때로는 강박증의 옷을 입기도하고 교묘한 manupulater 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특징은 치료자에게 혐오감과 혼돈의 역전이를 느끼게 한다는 것과 특징적으로 죄의 은폐와 탐욕, 저속함, 책임전가(희생양 찾기)를 보인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실 자기를 우상화하는 나르시시즘으로 기존 체제에 분류된다. 지속적 악의 선택의 습관은 성격으로 굳어지는데 이른다. 그들은 주위의 인간을 지배하며 떠나지 못하게 하며 자기 욕구의 해소물로 삼는다. 구마와 축사는이런 성격질환의 배후에 영적 어두움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집단적 차원에서 자행된 전쟁범죄를 통해 개인의 결함이나 착각이 아닌, 이러한 퇴행적인 나르시시즘과 게으름을 타고 들어온 악의 존재가 있음을 드러낸다. 

그는 이런 악의 근원에 거짓이 존재함을 지적한다. 나르시시즘이라는 거짓, 그것이 개인의 자아도취든 운동클럽의 우월감이든 지역의 편파감정이든 민족의 자부심이든 국가의 자긍심이든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로서 가당치 않은 스스로를 속이는 거짓이다. 이것은 다른 인간을 깔보고 무시하고 욕하고 학대하고 고문하며 죽이는데까지 나아간다. 아동과 여자학대, 타인종의 학살, 사회적 열등층에 대한 폭력, 도덕적 결함층에 대한 살인, 범죄자에 대한 잔혹함. 거짓의 결과는 악이다 

게으름이라는 거짓, 노력하지 않고 잘 살수 있고, 돌보지 않아도 잘 자랄 수 있으며, 내가 책임지지않아도 알아서 누군가가 그 문제에 발벗고 나설 것이라는 자기기만은 이 모든 일들을 가능하게 한다. "그들은 자기사느라 바빠서 이런 일은 우리가 얼렁뚱땅해도 몰라." 아직도 어떤 전문가들은 대중의 게으름을 기반으로 악을 키워나가고 있다. 문제의 회피. 회피할때 그 문제는 제대로 자라나기 시작하며 형태를 바꾸어 해결할 수 없는 또아리를 만들고 만다. 과학도 인간을 악에 빠지게 하려한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문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가치판단이 과학자의 손에 맡겨지면 과학도 악을 잉태한다. 율법이 하고 신학이 하며 철학이 한 일을 왜 과학이 할 수 없겠는가? 

우리는 대중이 될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살아서 판단하고 원래 되어야 했을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 미디어 권력과 똑같은 인간을 찍어내는 교육체제와 우리나라를 우월화시키려는 사탕발림의 착각을 가만 두고 볼 수는 없다. 내가 아니라고 말하면 누군가는 들을 것이다. 내가 알고 싶어한다면 누군가는 알려주고 싶어할 것이다. 내가 일어나면 무언가는 변할 것이다. 아니어도 그렇게 살아야한다. 내가 나를 속이면 누구도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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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자의 정신 (반양장)
도로시 세이어즈 지음, 강주헌 옮김 / IVP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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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세이어즈는 그녀의 추리소설로 더 많이 알려진 작가이다. 하지만 이 책은 어느 신학자나 영성가도 넘볼수 없는 깊이를 가지는 영적 세계의 신비에 대한 통찰을 준다. 세이어즈가 소설이나 희곡을 쓰는 작가라는 사실이 하나님의 창조정신과 그 삼위일체적 창조과정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배경이므로 어쩌면 그녀만이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인간이 따르는 것과 상관없는 법칙이 존재함을 보이며, 그 중 신앙고백이라는 信經이 얼마나 우주의 원리와 일치하는지를 보이고자한다. 인간이 갖는 창조의 욕망과 능력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고백과 일치한다. 그리고 실제 한 작가가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모든 내용이 하나님의 구속사에 그대로 반영되어있다. 아이디어에서 시작하여, 에너지를 통해 표현되고, 영향력으로 인간의 내면과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가는 힘. 우리는 작품을 통해 작가를 알며, 창조물은 창조자의 의도안에서 무한히 자유로와지며 생명을 얻는다. 창조자는 창조물을 사랑하여 자유를 주고 자발적 반응으로 사랑에 응답하길 기대한다. 

이런 창조의 과정에 대한 이해가 하나님 三位중 한 방향으로 치우칠때, 아이디어에 매몰된, 행위에 집착하는, 혹은 감정을 중심삼는, 왜곡이 나타난다. 한 창조자인데 분리되어 어느 하나에 흡수된 때문이다. 성부을 위주로 하면 인간의 자유를, 성자 중심성은 하나님의 원래 뜻를, 성령을 강조하면 창조자의 존엄함을 손상 당한다. 삼위가 일체가 될때야 우리의 신앙고백은 온전하여질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 문제의 해결이라는 정신구조는 너무도 독재적이어서 여기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하한다. 하지만 이 도식은 또한 우리를 해결될 수 없는 문제에 매몰시키고 만다. 모든 삶의 경험을 문제로 받아들인 결과로 풀 수 없는 문제로 둘러싸이고 마는 것이다. 삶을 문제가 아닌 창조의 매개체와 그 여유의 시공간으로 보는 것이 예술가의 시각이고 창조자의 시각이다. 언제나 해결되며 완벽히 해결되고 주어진 조건내에서 해결되는 유한한 문제는 추리소설에만 존재한다.  

이제 창조의 정신이 문제해결이라는 모더니즘적 시대정신의 대응점에 서 있다. 조직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새로운 해결은 새로운 문제를 유발하는 악순환일 뿐이다. 인간은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가 아닌 문제를 통해 새로움을 창조하는 존재로 자신을 바라보아야한다. 논리 안의 문제풀이가 아닌 대전제의 창조만이 문제를 소멸한다. 그럴려면 [사람은 하는 일이 적어야 현명해지는]지도 모른다.

많은 일들과 해결책의 모색, 프로토콜의 확립, 반복과 경험의 전문성의 세계에서 창조성은 늘 잊혀지는 부분이다. 인간의 됨됨이와 자유의 목적이 새로움을 만드는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재생산에 매달려 있다. 그리고 불행함을 어렴풋이 느낀다.  라따뚜이의 레미가 말하듯 [나는 더 이상 take 하길 원치않고 make 하길 원해!]라는 것은 우리 세대의 공통된 내면의 소리이다. 나는 나의 내면의 일그러진 삼위일체를 보며 나를 새로이 창조한 그 창조를 따라 나를 새로이 지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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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거인들의 학교 - 위대한 나를 찾는 비밀을 배우는 곳
전병국 지음 / 토네이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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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자들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존재다. 학교, 출신국가, 인종에 따라 이런 존재규정이 주어진다는걸 살면서 알게 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이 그런 존재인 것에 분노하기도, 낙담하기도, 무시하기도, 타협하기도 하는 반응을 오간다. [왜 날 무시하는가? ] 죽을 존재인 우리에게 이런 자존심은 필요한것이기도 하지만 또 스스로 생각에도 이것만 서로 없다면 좀더 평화롭게 지내지 않을까 싶기도하다. 우린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으며 매일 살고 있으니...

개미는 겨울을 잊지 않고 준비하여 행동하는 지혜를 가진 존재다. 그 겨울은 단지 불황이나 실직 혹은 노년만은 아니다. 인간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겨울은 죽음이다. 우리는 젊을때, 살아있을 때 죽음을 준비하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그것이 판단하시는 자 앞에 서는 것이라 믿는다면 더욱이...

바위너구리는 움직이지 않는, 변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하고 목표로 하는 지혜이다. 돈과 명예는 가장 쉽게 사라지는 목표물이다. 요즘은 안정의 논리와 옳음의 윤리가 만드는 혼란이 만들어낸 도가니다. 나고 자란 곳이 만드는 정치적 견해들. 공리적 결과로만 목표를 삼는 인생관. 이 모든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이 어느 순간 변하고 또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만이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 같은 시대. 말씀이외에는 무엇도 우리를 닻을 내리도록 하여주지 못한다는걸 깨달아간다.

메뚜기는 같은 꿈을 가진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누리는 인생이란 걸 보여주는 존재들. 이순재 아저씨가 그러더라. 결국은 사람이라고...우리는 사람들과 함께 더 멀리나는 존재들이다. 나 혼자 되는 일이란 없다. 꿈을 나누어먹고 우리는 자란다. 혼자 경을 깨치고 깨끗케 하고 봉사하고 뿌듯해하며 결국 실패하는 인생이 되는 일은 얼마나 쉬운가...교제없는 인생은 기로에 선 인생이다.

거미는 작은 자기자신으로 사는 자유, 자기기술로 먹을 걸 구하는 삶이다. 40대의 유혹은 내 손으로 벌지 않고 누리려는 것이다. 네트웤의 마력은 작은 기술이라도 한가지 갖고 있을 때 오는 것이지 연결로 착취하려는 자에게 연결은 일회적일 뿐이다.  한번더 시도하는 자만이 한걸음을 나아간다. 좋은 교훈과 말씀들의 홍수 속에서 내 안에 말씀이 없고 한걸음 순종이 없다면 나는 결국 가난한 자다.

P.S 되지 않는 형편을 겪으며 초라한 자리에서 여기까지 걸어왔다. 실패들이 독인줄 알았는데 모두 약이 되는 이 신비로운 삶 속에서, 모든 실패와 치욕들이 나를 키워줄 양분이 될 것인가? 작은 자로 자기 손으로 마구간의 아들로 살아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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