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의 길과 십자가
디트리히 본회퍼 지음 / 오리진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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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제자도의 댓가 The cost of discipleship]의 번역본을 얻을 수 없어 대신 구한 책이다. 이 책에는 본회퍼의 생애에 대한 설명과 1928년 예수그리스도의 중심성에 대한 강의, 1937년 [제자도의 댓가]중 발췌, 1938년 [공동생활]발췌, 1937년-42년 고백교회의 설교,1940년-1943년 [윤리학] 발췌, 1943년 새해기록과 1943년-1944년의 [옥중서간]의 발췌까지를 싣고 있어 본회퍼의 사상의 변화와 각 저서의 맛을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옥중서간 중에서는 특히 그의  [기독교의 비종교적 해석]이 나타난 부분이 많이 발췌되어 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에 대한 그의 권고가  아직도 가슴을 울린다. 오늘 나의 삶과 역사에의 십자가를 깨닫고 순종할 힘 주시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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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와 마녀와 옷장 나니아 나라 이야기 (네버랜드 클래식) 2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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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니아 이야기 중 가장 먼저 쓰여졌다. 이 책을 쓴 후, 그 앞 줄거리로 루이스가 나중에 쓴 책이 1권에 해당하는 [마법사의 조카]이다. 조지 맥도날드의 [공주와 고블린]처럼 기존의 북유럽 신화와 접목된 기독교적 색채의 동화이다.

[공주와 고블린]에서 공주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오해받는 미지 세계의 첫 탐험자는 여자아이 루시다. 루시가 설명해도 아무도 믿지 못하던 세계를 나중에는 모두가 체험하게 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모두가 사자 아슬란의 선한 편을 든 것은 아니다. 그 중 하나인 에드먼드는 하얀 마녀의 속임에 넘어가 터키젤리에 영혼을 판다. 그것이 에드먼드를 대신해 아슬란이 죽어야 하는 이유가 된다. 또한 에드먼드도 죽음의 은혜를 체험하는 계기가 되어 다시 아슬란과 아이들에게 돌아오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옷장과 관련된 모든 걸 미리 알고 있는 듯한 디고리 커크 교수. 스토리로는 앞서 있고 출판은 나중에 된 [마법사의 조카]의 주인고이 될 인물이다. 이미 [1권의 디고리]가 이 책을 쓸 당시부터 루이스의 마음에 들어있었던 것 같다.

이 이야기는 사실, 강력한 예수 그리스도 구원사역과 사탄에 대한 승리의 유비이다. 악한 자의 멸망과 사랑으로 대신 죽음으로 완성되는 승리. [공주와 고블린]이 현재인 중간시대에서의 성령에 의한 승리의 비유라면, 루이스의 이 책은 역사 속의 성자 하나님이 이루신 일의 의미와 그로 인해 약속된 궁극적 승리를 보여준다. 하지만, 기독교적 의미를 생각지 않는다해도, 참사랑의 힘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동화로서, 재미와 교훈을 아울러 갖춘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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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2004-06-13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니아 이야기를 시리즈로 다 올리셨군요!
 
기술의 역사
자크 엘루 지음, 박광덕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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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챠니티 투데이 20세기의 책들 시리즈(7)

엘룰을 처음 접한 건 [하나님의 정치, 사람의 정치]를 통해서 였다. 독특한 성경읽기와, 성경과 무관하다고 여기던 현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기준을 맞닦드리게 하는 그의 글은 충격적이면서도 속 시원히 이해되지 않아 아쉬움이 있었다. 그후 몇권의 책을 더 읽고도 이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기술의 역사]를 읽고야 이제껏 그의 책의 전제가 되어왔던 엘룰의 현대사회에 대한 이해와, 그가 대안으로 생각한 성경적 계시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1954년 처음 프랑스어로 나왔던 이 책은 엘룰의 세계관에 공감한, [멋진 신세계]를 쓴 올더스 헉슬리에 의해 영미권에 소개되어 1964년 영어로 번역되었다.

엘룰은 이 책에서 기술을 [인간활동의 모든분야에 합리성으로 도달하는 절대적 효율성의 방법들]로 정의한다. 이런 정의는 기계나 과학의 정의를 압도하는 것으로,  사실 현대 삶의 근저의 모든 방법들이 포함되는 것이다. 산업혁명이전의 기술과의 차이는 현대기술이 합리성과 인위성, 효율성을 특징으로 자기목적적인 자동성을 갖고 확장되어 간다는 점이다. 이런 흐름은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고, 저항을 무기력화 시키는 인간조정기술의 등장으로 더욱 無敵이 되었다.  경제기술과 정치기술, 그리고 인간기술은 합목적적으로 기술사회의 성장을 지향하고 한번 이에 길들여지고 대중화로 개인을 상실한 인간은 이에 대한 저항의 조직화나 변화를 이룰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살다보면 기존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 중에 이처럼 광범위하고 깊게 뒤집어엎는 가치의 전복은 드물다. 현실세계의 매트릭스다. 이 책을 보고 다른 여러 책 읽기도, 다른이들에게 사랑이 아닌 기술적 접근으로 인간관계를 꾀하는 것도 꺼려지게 된다. 기술에 젖어살고 새로운 기술을 찾고자 책을 읽고, 문제에 봉착하면 기술적 해결책에 매달리고..이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 배후를 보여주는 이 책은 그래서 위험스럽기까지하다.

과연 그렇다면, 해결책은 없는가? 세가지가 있단다. 전면적 핵전쟁으로 뿌리부터 기술이 붕괴되든(미래소년 코난과  매드맥스의 세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새하늘과 새땅이 도래하든 아니면 인간이 스스로 기술발달을 중지시키는 것이다. 물론 가장 불가능한 것은 세번째라고 한다. 결국기술사회에 봉사하고  사는 방법 이외의 삶의 선택은 없단말인가? 그 해답이 알고 보니 엘룰의 그 전후 저술한 책들이었다. 다시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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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입은 치유자
헨리 나우웬 지음, 최원준 옮김 / 두란노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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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챠니티 투데이 20세기의 책들 시리즈(6)

나우웬의 책은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죽음 가장 큰 선물],[탕자의 귀향]을 여러사람에게 추천받았었고 그의 감동적 사역만큼이나 큰 감흥으로 읽었었다. 하지만,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에 오른 책은 의외로 얇고 간단히 써진 이 책이었다. 왜 이책인지는 책을 읽어갈수록 깨닫게 되었다.

나우웬은 이책에서 고통에 집중하고 있다. 세상이 당하는 고통(1장), 이 시대의 고통(2장), 고통받는 개인(3장), 고통받는 사역자(4장). 그는 이 고통을 미화하거나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처절히 이것을 직면하고 우리가 무얼할지를 이야기한다. 똑같이 고통당하는 자로서 우리는 도움이 될 수 있는가? 부유하듯 정처없는 세대의 우리에게 희망은 [인간으로 다가감]에 있다. 치유사역 전문가나 상담가가 아닌, 공감하여 같이 울며, 그의 처지를 절절히 느끼며 우는 사람, 자기의 고통 가운데 얻은 참 평화를 동료에게 정확히 표현해 주는 사람, 고통당하는 동료를 손잡고 기다려 주는 사람이다.

비록 나우웬은 그 사역을 전문적 사역자의 영역으로 한정하여 설명하지만 이 일은 사실 그리스도로 살고 있는 모든 평신도의 부름이다. 매일 만나는 사람에게 인간으로 만나고 옆에 있어주고자 자리를 마련하는 일, 예수께서 인간이 되신 이유이고 우리가 아직 여기 남아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P.S: 고쳐 읽으면 더 이해에 도움이 되는 표현들.
1. 강박성(p41)-convulsiveness는 강박보다는 급격히 일으키는 발작이나 심리적 폭발을 가리킨다.
2. 긍휼(p60)-compassion은 '같이 느낌'이라는 뜻이므로 공감이나 同情(불쌍히 여김보다는 같이 마음이 움직인다는 뜻으로)가 더 이해에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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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현대신앙
그레삼 메이천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198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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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챠니티 투데이 20세기의 책들 시리즈(5)

국내에는 [메이첸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크리스챤 헤럴드에서 나왔던 적이 있으나 이 역시 절판된 것 같다. 원제는 [기독교와 자유주의], 자유주의에 대한 가장 고전적 비판서이다. 메이첸은 20세기에 이르러 기독교는 공리주의적 자유주의 기독교와 보수주의 가운데 기로에 놓여있다고 진단한다. 또한, 교리에 대한 자유주의의 공격은 실제로는 신약성경과 우리 주 자신을 공격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자유주의에 대한 논거로 그는
1. 예수님의 신의식과 죄에 대한 지적은 추상적이 아니라 실제적이었다.
2. 체험이 아닌 성경이 중요함.
3. 예수는 스승이 아닌 구주이시다. 기적은 죄의 정복을 위한 것이다.
4. 구원은 예수님 사역의 결과이며 배타적이다. 자유주의는 현대적 필요를 위해 변형된 종교 프로그램이다.
5. 교회의 교직은 자유주의적 선언과 일치하지 않음을 보인다.

하지만, 그는 결론으로 [우리는 기독교가 무엇인가를 그의 논적이 아닌 자신이 기독교인인 사람으로부터 배운다는 것이다. 싸움이 없고 십자가 발아래 넘치는 감사의 기쁨으로 연합하기 위해 모이는 곳이 하나님의 집이며 천국의 문이다. 그 문지방에서 지친 세계를 소생시킬 강물이 흘러나올 것이다.] 라고 말한다. 지리한 논쟁은 우리에게 예방주사로 그리고 잘못든 길을 돌이키기 위해선 필요하지만 정작 더 힘 기울일 바는 복음의 능력있는 공동체와 그 삶이라는 뜻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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