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층산
토머스 머턴 지음, 정진석 옮김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197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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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피스트 수도원의 루이스 수사, 토마스 머턴의 자서전적 자기 삶에 대한 고백이다. 예술가의 집안에 태어나 여러나라를 옮겨 다니며 교육을 받았던 그는 부모를 모두 잃고, 미국에서의 대학생활 중 신의 살아계심과 그 부르심을 경험한다. 세례 후에도 지속된 그의 영혼에 대한 탐구는 결국 그를 수도사로서의 길로 향하게 했다.  이런 삶의 행적을 되돌아보며 그는 어릴적부터의 많은 신자들과의 만남과 영향이 그에게 이런 결정에 이르게 했음을 고백한다. 어찌보면 단순해 보이는 이 자서전은 뛰어난 글솜씨와 삶과 영적 세계에 대한 날카로운 표현들로 그 빛을 더한다.
 
이 책이 나에게 준 물음은 세가지이다. 첫째, 부르심이다. 각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과 준비시켜주신 소질을 가지고 있다. 마흔이란 나이는 혹 그 이후의 삶을 계획하지 않고 살도록하는 나태함의 나이일수도 있다. 하지만 사십에 왕자의 자리에서 쫓겨나 광야를 헤매이며, 팔십에 부르심을 받아 백이십에 이른 모세를 보면 이건 하나님의 시간과는 무관한 인간적 판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둘째, 업적을 이루는 것과 자기수도와의 갈등이다. 성공한 인생은 과연 많은 일을 이룬 실행에 집중한 삶일까? 아니면 자기 자신의 갈고 닦음에만 오로지 몰두하는 삶일까? 공자와 노자의 갈등이었고 칼빈과 프란체스코의 차이이기도 한 이 문제는 분명 그 해답이 둘 다임에 틀림없지만 수학적 중앙점처럼 단순하진 않다. 행동과 신앙으로 이분된 세계가 아님을 알기에 온전함은 분명 둘을 구분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과 전혀 다른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살아가려는 나의 눈은아직  너무 어둡다.
 
셋째, 영적인 삶의 훈련과 환경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살려면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방법인 수도자적 삶을 백안시하는 것은 나의 문화적, 교육적 배경에서 오는 선입견은 아니었을까? 나는 주위를 온통 하나님과 담쌓고 살도록 흐트려 놓고 영적 생활이 빈곤하다고 한탄하며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위대한 삶이 내적 중심과 일치하는 삶, 한가지에만 뜻을 두는 삶이라고 하면서도...

벌써 25년이 지난 중학교시절의 [다니의 일기]에서 느꼈던 삶에 대한 공감을 삼십대 중반이었을 당시의 머턴에게서 다시 한번 느끼며, 남은 삶의 [사도됨discipleship]에 대한 심각한 성찰을 하게 됨을 감사케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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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훈련과 성장
리처드 포스터 지음 / 생명의말씀사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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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영적 세계에 대한 두드려 깨움이 있다. 왜냐하면 철저히 세상적 삶과는 반대인 삶에서만 찾을 수 있는 진정한 기쁨에 대한 안내서이기 때문이다. 훈련으로 하나님의 빛으로 매일 더 가까이 나아가는 삶이 있다. 그리고 그 길은 그리스도의 죄사함으로 부름받은 모든 사람에게 마땅한 길이다. 그 길은 가나안을 목적지로 하는 광야의 길이다. 하나님은 누구도 이 광야 한가운데 잠들어 짐승의 먹이가 되길 원치 않으신다. 훈련은 부름의 한부분임을 이 책은 보여준다.    
 
이 책은 좋은 안내서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 것만은 아무 의미가 없다. 책은 얼마나 많이 읽었던가? 나의 알아감은 진짜 삶터와는 사실 아무 상관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만을 위해 살아가고자한다면 사실 책은 필요가 없었다. 그분을 사랑함을 잃지 않을때 비로소 지침도 되고 좋은 도움도 된다. 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훈련은 매일 삶의 생활방식이면서 또한 달콤한 사랑의 일기이다. 그분은 매일 따라가야할 구름기둥 불기둥이다. 사랑하는 자만이 이 길을 마치도록 실족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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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소독시 -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G. K. 체스터튼 지음, 윤미연 옮김 / 이끌리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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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신앙이라면 이미 검증이 끝난 것이 아닌가? 서양철학의 19세기는 정통신앙이 현대인의 삶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낡았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규정과 함께 19세기의 인간은 삶의 기쁨과 의미, 자유와 행복을 위한 근거를 잃었고, 지금 21세기까지 계속되어오는 [작은 조각배처럼 부유하는] 의미없는 삶을... 이런 목적지 없는 망망대해에서의 표류를...과연 자유라고 불러야할지 난파한 삶이라 불러야할지 고민하고있다.
 
체스터턴의 시대는 버나드쇼와 스펜서의 시대, 니체와 다윈의 제자들의 시대였다. 인간은 [결정적 발견들] 앞에 들떠있었다. 인간은 동물의 한 변종이었던 것이다. 모든 도덕은 어처구니없는 사기극이었고 이제 모두 벗어던져도 되는 것이었다. 모든 제도는 항상 불완전하며 무한한 진화를 향한 길 위에 서있는 것이었다. 그 순간 인간은 갑작스레 자살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사는건, 개인은, 이웃은 아무 의미없는 것들이었다. 아름답다고 하는 모든 것은 정글의 한 모습인 더럽고 추하고 구역질나는 것들이었다. 사는건 무의미했고 내 주위의 인간은 모두 적이었으며 나는 강물 위에 부유하는 쓰레기 정도의 가치를 지닌 존재였다. 죽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20세기초, 이런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한 체스터턴의 질문이 시작된다.그는 인간이 빠진 이 어이없는 자기학대와 무의미성의 처참함에 대해 따뜻하다. 당시 철학의 이성적 결말의 파멸을 지적한다. 이성은 인간을 너무나 [이성적으로] 파멸로 인도했다. 니체와 다윈에게 감탄하며 다다른 길은 어처구니없는 결론이었다. 유머와 촌철살인의 비유로, 체스터터은 인간이 너무 스스로의 지적 유희에 흥분한 것은 아닌지 묻는다. 객관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자료라는 것이 임의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이성이라고 균형과 전인이어야지 단지 theory와 evidences라면 이것들은 도리어 이성을 도탄에 빠뜨리는 끊임없는 순환의 고리가 되는 것은 아닌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20세기초 유행하던 사고는 결국 인간을 현재의 즐거움에 탐닉하는 존재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반짝이는 것들. 맛있는 것들. 최고급의 것들을 향유하도록 이끌었다. 왜냐하면... 인생은 무의미하니까. 빤짝이로 치장한 인생의 속내는 너무도 처참하리만큼 어둡다. 어두운 빛깔옷의 그들 선조의 우주가 무한한 광휘와 뚜렷한 희망과 절대적 기쁨의 약속으로 가득찼던 것과는 반대로...그들은 그들의 놀이에서 너무 큰 뱃팅을 했고 그는 금칠된 시계(무한히 돌아가기만 하는 반짝이는 인생의 상징물인...)를 상품으로 얻고 [돌아갈 집]을 잃었다. 
 
체스터턴은 나에게 스스로를 테스트해보는 방법도 가르쳐 준다. 자유한가? 즐거운가? 가벼운가? 마음 깊은 곳에서 그러한가? 아니면 그렇다고 믿고 싶고 아직도 그걸 찾아 헐떡거리고 있는가? [항상 기뻐한다. 쉬지 않고 기도한다. 범사에 감사한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마음속 한 가운데 기쁨이 있는 사람. 그 기쁨의 근거가 조각배에 탄 자신이 아닌 사람은 정말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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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와 미국문화
조지 마스든 / 생명의말씀사 / 199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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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The Shaping of Twentieth-Century Evangelicalism: 1870-1925" 이다. 원제가  의미하듯 이 책은 20세기초(1870-1925) 복음주의의 형성 배경에 대한 글이다.  마스든은 19, 20세기 미국 기독교에서 근본주의 운동을 지나치게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에 국한시킴으로서 그 이해의 폭이 제한된다고 생각하며, 문화의 관점에서 미국 근본주의를 재구성하였다. 즉 근본주의 운동은 단순히 신학적인 면 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스든은  근본주의 이전인 1870년대 낭만주의의 영향 아래 나타난 자유주의의 도전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제1차대전 초기 평화주의와 국가에 대한 충성을 부인하던 전천년주의는, 전쟁을 통해 미국에 대한 충성은 야만에 대항하는 문명을 옹호하는 의무라는 견해로 급변한다. 공격하는 편에 섰을 때, 혹은 평화기에는 평화주의자이던 그들이 수비하는 전쟁에서는 전쟁을 옹호하게 된 것이다. 반정치적이던 근본주의는 1918년 전쟁이 끝날 무렵은 미국의 기독교 문명 옹호를 주요목표 가운데 하나로 삼을 만큼 애국적 성향으로 바뀌었음을 설명한다.

 근본주의는 종교적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1차 대전에 뒤이은 문화적 위기의식이 이 운동을 중요한 여러 방향으로 모양짓고 수정하였다는 것이다. 급진적인 성결운동 및 오순절 집단과는 달리 근본주의는 사회의 변두리에만 존재하기 힘들었고  문화위기에 대한 배타성과 신조의 강조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또한  그들의 문화적 체험은 이차적 문제 특히 정치관의 형성과 많은 관계가 있었다. 진보적인 정서의 소멸은 자유주의의 사회 복음 지지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반발과 관련된 복합적  현상이었다. 비록 조직적인 정치사상은 드러나지 않지만 근본주의자들은 보수적이고 공화적인 색채를 가졌다. 1차대전 이후 정치화는 우연이었다. 그들은 자유주의에 대한 반발로 표류하여 보수로 밀려갔다. 위로부터 물려받은 선입관과 상투적 신조에 입각하여 이슈들에 우발적으로 대응했다는 것이다.  

 근본주의는 진정한 과학은 사실에 입각하지만 진화론은 단순한 가설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베이컨적 과학 사고의 모델과, 인식을 해석과정으로 보고자하던 칸트 이후 철학적 전통과의 패러다임적 충돌이 빚은 현상이다. 양측은 서로 다른 관점으로 의사소통도 불가능했다. 근본주의의 연합 또한 이런 자유주의에 대한 공동전제가 있어 가능했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 최우선적인 영원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진리는 불변하고 진정한 과학과 양식에 의해 진리를 알 수 있다는 견해이다. 양식을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신앙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라는 이런 견해는 상식철학에 근거한 것이다. 근본주의는 자체의 기독교 신앙을, 진리와 도덕에 대한 19세기의 특정 미국적 사상과 결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영국이 전통의 점진적 발전에 뿌리깊은 인식이 존재한 반면, 미국은 합리적 규정,새출발,과거와의 단절을 요구했다.이는 역사의 진화적 발전과 현재를 과거의 산물로 이해하는 가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직접적이고 초자연적인, 혹은 적어도 섭리적인 개입을 당연시하는, 성경 역사로부터 자신들의 역사를 해석해 온 미국의 체험은 성경을 역사의 렌즈를 통해 보아야 한다는 고등 비평 사상과 양립할 수 없었다.  또한 다양한 이 나라의 인종성은 쏟아져 들어오는 새로운 견해를 받아들이기보다 퇴행적으로 고착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내게 독특한 경험을 제공했다. 복음주의자로 특히 미국적 기독교의 영향을 많이 받아온 내 신앙의 한부분 한부분을 마치 배를 열고 장기를 꺼내어보듯 보게 된 것이다. 마스든의 논조가 결코 이런 신앙에 대해 따뜻하지는 않지만,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본질과 미국 문화적 영향을 갈라서 생각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틀을 제공한데서 이 책이 나에게 갖는 특별한 의의가 있다.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Galaxy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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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추구함 - 하나님을 갈망하는 영혼을 위한 메세지 토저 대표작 시리즈 1
A. W. 토저 지음, 이영희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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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두번째 책이다. 마음을 허물고 삶을 돌아보게 하며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새롭게 하는 책이다. 벌써 10여년전에 읽었던 앤드류 머레이의 [순종]이 그 첫번째 책이라면, 이 책은 참 오랜만에 발견한 그 책에 버금가는 대단한 책이었다.

토저의 명성은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신앙의 정수를 잘 설명해낸 사람인지는 몰랐다. 그의 이 책은 신앙의 핵심적이고 생명적인 부분을 와닿게 집어내고 있다. 우리 자신의 내면의 물질에 대한 집착, 자아에 대한 집요한 애착을 보여준다. 그리고 기독교라는 것이 어떤 운동이나 경향, 종교의 하나가 아닌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하고 추구하며 사는 삶임을 보여준다. 살아계신 그분을 추구하는 삶은 그래서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이고 그분의 존재와 성품에 시선을 맞추는 것이다. 그분이 내게 하나님이실때 나는 온전한 방향의 삶을 산다. 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온유를 배우며 쉼을 얻는다. 나는 그분을 삶에 모시고, 먹고 마시는 것 모든 일상을 주께서 기뻐하심을 알고 드린다. 이 책은 이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너무 정확히 짚어낸다.

하나님께서 주위에 귀한 믿음의 동역자, 친구를 허락해 주셨음을 알고 감사할때가 있다.  보내주신 친구, 스승, 배우자, 동역자들...모두 은혜의 선물이다. 책도 그런 것 같다. 읽고 버릴 책, 읽고 보관할 책, 읽고 읽고 또 읽을 책중 이 책은 또 하나의 소중한 내 평생의 책이 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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