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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에서 달음질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경기에 나서는 사람은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썩어질 월계관을 얻으려고 절제를 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썩어지지 않을 면류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달음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허공을 치듯이 권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가 버림을 받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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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3-12-06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전 요즘 <천로역정>을 읽고 있습니다. 사춘기 시절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몰라 덮어버렸지요. 번역에 문제가 있는 건지, 저의 이해력에 문제가 있는건지...게다가 그땐 세로줄 책이었습니다. (어, 사춘기 시절 세로줄로 된 책을 읽었다고 하면, 나이가 탄로날 것 같은데...조심해야지.)

지금 다시 읽으니 넘 좋습니다. 존 번연의 영성은 그의 상상력에서 빛나고, 뛰어나고도 생생한 왜 이 책을 영문학사에 길이남을 작품으로 치는지 알 것도 같습니다.
<하늘가는 마부> 기회 있는대로 꼭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문학 속의 의술과 인술

시인의 입을 빌지 않더라도 사계절이 분명한 이 땅이기에 겨울이 어김없이 찾아온다. 이 땅의 입동(立冬)의식은 대학 입시와 함께 시작된다. 수십 년 동안 거의 매년 조령모개를 거듭해 온 대학입시이기에 전승되는 비법도 없다. 한 해 한 해 승부를 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듯 지극히 혼미한 제도 아래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뚜렷한 현상이 있다. 법대와 의대에 어김없이 우수한 수험생이 몰린다는 사실이다. 법률가나 의사가 사회에 기여하는 바는 적지 않지만, 그처럼 우수한 인재들이 기를 쓰고 매달릴만 한 가치가 있는 직업은 아니다. 법대, 의대를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일신의 영달과 경제적인 안정에 있을 것이다. ‘사회정의’나 ‘인술(仁術)’이라는 숭고한 이념은 애초부터 명분과 구실에 그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의사와 법률가란 직업에 대해 문학이 취하는 기본 자세는 시기와 질시, 그리고 풍자가 특징이다. 문학이 사회의 거울이고 어느 사회에서나 이들 직업이 차지하는 의미는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크리톤이여, 나 대신 아슈클레피오에게 빚진 닭 한 마리 갚아주게.” 소신 때문에 죽으면서 소크라테스가 남긴 유언이다. 의술의 신에게 답례를 잊은 것을 일생일대의 부채로 여긴 것이다. 크세노폰이 전하는 ‘소크라테스 회상’에는 도제교육의 전형적인 예로 의사수업을 들었다. 스승의 시동 노릇을 통해 성장하는 전통은 오늘날에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유달리 학맥 전통이 강한 것이 의학교육이다.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통렬한 사회소설이다. 의사이자 선원인 걸리버가 진단, 해부한 법률가라는 직업은 “보수 때문에 검은 것을 희다고, 흰 것을 검다고, 말로 증명하는 기술을 훈련받은 패거리”이다. 그렇다면 법률가의 눈에 비친 의사는 어떨까?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에 선연하게 드러난다.

각종 인연과 끈을 활용하여 세속적 성공을 거둔 고등법원 판사가 이름 모를 죽을 병에 걸리자 의사를 찾는다. 그런데 의사는 환자의 생명보다 병명에 더욱 관심이 깊다. 자신의 직업적 지식과 능력이 관심사일 뿐, 인간 그 자체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판사는 분개하지만 독자는 감탄한다. 어쩌면 의사도 판검사와 그리 같은가 라고. 그들도 피의자에게 적용될 죄명에만 관심을 두었지, 어디 인간 취급을 해주는가?

우리의 설화문학 속에는 살신성인의 의인이 많다. 모두가 서러운 신분이다. 몸과 마음을 바쳐 인술을 베푸는 사극 속의 의녀(醫女)들은 남을 구하기 위해 서역나들이를 감내한 바리데기의 후예일 것이다. 드라마 ‘허준’과 이제마의 인술이 빛나는 것은 그들의 신분이 중인에 불과하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의사가 상류 지배계급이 되면서 이미지는 달라진다. 청년의사들을 위한 교양서 ‘문학 속의 의학’(2002)에 단서가 제시되어 있다. 김동인의 ‘약한 자의 슬픔’을 보자. 엘리자베스의 몸을 유린한 남작, 그리고 강간자를 감싼 의사와 재판관, 이들 모두가 자신의 이익에 따라 타인의 몸을 재단하는 권력자인 것이다.

황석영의 ‘한씨연대기’ 에는 이데올로기 병에 물들지 않은 한 순수한 의사의 인생유전이 그려져 있다. 김일성대학 의학부교수가 전쟁의 소모품 신세가 되고, 월남하여 생계를 위해 무면허의사의 뒤치다꺼리 끝에 장의사로 전락한다. 오로지 약삭빠른 자만이 세월의 파도타기에 성공한다.

전광용의 ‘꺼피딴 리’의 임기응변은 실로 외과의사 이인국만의 장기가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부분의 상류층 인물들에 공통된 처세술이다. ‘국어상용의 가’(國語常用의 家)로 지정 받은 자랑스런 황국신민, ‘불령선인’의 치료를 거부한 그는 일본의 뒤를 이어 지배자가 된 소련과 미국을 차례차례 ‘치질 핥기’로 섬긴다. 권력과 금력따라 움직이는 것은 어찌 그뿐이랴.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그리고 내 자신이 미워졌다’ 라는 독백 속에 일말의 양심 찌꺼기라도 건질 수 있을지.

박완서의 ‘그 가을의 사흘동안’은 낙태왕국의 섬뜩한 현주소를 다시 보게 하는 시대의 거울이다. 역설적이게도 생명의 손길보다는 죽음의 칼을 휘두른 산부인과 의사가 자신이 설정한 퇴임을 앞둔 마지막 사흘이나마 실로 오랫동안 맛보지 못한 생명의 냄새를 갈구한다. 그러나 ‘사람백정의 손에 맡길 수 없다’는 황영감의 냉소에 아직도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가 아프다. 수능시험을 치르고 의대를 지망하는 청년들에게 상기시키고 싶은 구절이다. (안경환·서울법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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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 (Puritans)

엘리자베스 여왕은 헨리 8세에 의해 생겨난 성공회의 최고 수장직을 계속 이어가면서 구교와 신교사이의 공통 분모를 찾으려하였다. 하지만 정통 로마 카톨릭측과 정통 개혁파측은 여전히 그들만의 교리와 교회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 때 생겨난 것이 청교도 운동이었다. 프랑스의 개혁파를 위그노파라 불린 것과 같이 영국의 개혁파의 주류는 청교도들이었다. 청교도들은 더욱 급진적으로 교회를 개혁하길 바랬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녀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배격하는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청교도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신앙 노선을 불신하였고 로마 카톨릭 교황 Pius 5세도 여왕을 1570년 파문시켰다. 청교도들은 스코틀랜드의 장로 교회를 그들의 모범적 교회관으로 삼았다. 청교도들은 성공회로부터 분리를 원했고 그래서 기성교회와 정부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아야 했다. 1588년 스페인의 필립 2세가 이끄는 130척의 무적함대가 영국 해협으로 출현하였다. 필립 2세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복누이 Mary Tudor의 남편으로써 영국의 개혁주의 운동을 차단하기 위해 영국으로 해군을 보낸 것이다. 1588년 7월19일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네델란드 해안을 경유해 영국으로 나아가려다 갑작스런 돌풍에 휘말려 대부분 바다에 침몰되었다. 필립 2세는 다시 2차 공격을 준비하다가 병들어 죽었다.

1603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자 Darnley경의 의해 스코틀랜드 Mary여왕이 낳은 제임스 1세가 영국의 왕이 되었다. 제임스 1세는 어려서 장로에 의해 교육을 받았으나 왕이 되자 성공회를 선호하게 되었다. 왕위에 오르자 제임스 1세는 교회를 개혁하라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1604년 런던 Hampton 궁중에서 성공회교도와 청교도들이 함께 모이는 의회를 소집하였다. 의회 모임은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 의회에서 영국 성경 번역이 제안되어 성경을 영어로 공식적으로 번역하게 되어 나온 것이 King James Version (Authorized Version)성경이다 (1611년). 그 전에는 Mary Tudor 여왕 시대에 Geneva Version이 있었으나 Geneva Version이 군주제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KJV를 만든 것이다. Hampton 궁중 의회의 결과에 실망한 많은 청교도들은 그 후 네델란드와 나중에는 북미로 이민가게 되었고 이것이 미국의 청교도들이 발생한 원인이었다.

17세기 전반부에 영국의 청교도는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특히 캠브리지 대학 도시에서 청교도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 중에는 캠브리지에 엠마누엘 대학을 세운 Walter Mildway도 있었다. 또한 캠브리지에서 영국의 캘빈이라 불린 William Perkins(1558-1602)은 많은 학자들에게 캘비니즘에 입각한 설교로 그들을 개혁시켰다. 그리고 Richard Sibbes(1577-1635)는 49세에 캠브리지 성 캐서린 홀의 주임이 되어 개혁주의 설교로 청중에게 깊은 감화를 주었다. Thomas Goodwin(1600-1679)은 옥스퍼드 Magdalen 대학의 학장이 되어 많은 저술활동으로 청교도 정신을 유럽에까지 알렸다.

제임스 1세에 이어 영국 왕이 된 찰스 1세는 로마 카톨릭 성도인 Henrietta Maria와 결혼하게 되자 청교도 주류의 의회와 마찰하게 되었다. 영국의 청교도 교회들을 박해하고 나아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까지 구교를 강요하다가 2년 간(1639-1640) 전쟁을 치른 끝에 스코틀랜드를 복종시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1642년부터 1648년까지 영국 내에서 구교를 지향하는 왕당파 군과 청도교를 대변하는 의회 군(New Model Army)간의 시민 전쟁이 반발해 신교를 대표하는 의회 군이 이기자 찰스 1세는 1649년 처형당했다. 7년 간의 시민 전쟁에 스코틀랜드 군도 의회 군 편에 가담하게 되었는데 의회 측과 스코틀랜드 장로회 측은 개혁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교리와 예배와 제자 훈련과 교회 감독에 관한 전반적인 계약서를 만들자고 결의하였다. 성공회와 같이 교회의 수장이 국왕이 되는 제도를 철폐시키고 개혁 교회들의 통일된 교리문답서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Abby에서 만들었는데 이 것이 웨스트민스터 대요리, 소요리 문답서인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서 작성에는 Thomas Goodwin, Samuel Rutherford, Richard Baxter 등 청교도와 장로교의 지도자들이 주도하였다.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은 장로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1658년 회중교회(Congregationalists)와 독립교회(Independent), 1689년 침례교회에서 신앙고백서로 채택되었다. 후에 미국 교회들의 대부분의 보수주의 교단에서 웨스트민스터 교리 문답서를 인정하고 그들의 교리 문답서로 채택하였다.

그 후 의회와 의회군이 분열되고 스코틀랜드도 장로교 방식의 왕정 정치를 주창하다가 최종적으로 의회군에 의해 권력이 장악되어 영국 연방은 올리버 크롬웰 호민관(Lord Protector)이 이끄는 청도교파에 의해 올리버의 아들 리차드 크롬웰까지 군사독재로 통치되었다. 구교파의 입지가 약화되고 청교도를 비롯한 장로교, 침례교, 독립교회 지도자들이 재판관으로 올랐다. 올리버 크롬웰은 모든 종교를 공평하게 다루려 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유대인들이 영국에 들어와 유대교를 세우는 것도 400년 만에 허용하였다. 올리버에 의해 청교도인 존 오웬이 옥스퍼드 대학의 부총장으로 발탁되었으며 존 오웬은 많은 저술 활동으로 청교도의 정신을 체계화시켰다. 올리버가 죽고 그의 아들 리차드가 새로운 호민관이 되었으나 얼마 못가 1660년 찰스 2세를 국왕으로 하는 군주제가 부활되자 청교도의 입지가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그 시기에 조지 폭스에 의해 퀘이커 교도들이 만들어졌다. 초기에 그들은 기독교 신앙으로부터 출발하였으나 신앙 교리를 가지려하지 않은 이유로 얼마 못 가 비기독교적 단체로 전락하게 되었다. 나중에 북미로 건너 간 퀘이커교도들은 1681년부터 펜실베니아를 중심으로 그들의 본거지를 구축하였다.

찰스 2세로 군주제가 세력을 회복하자 청교도들은 다시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 구교 세력은 각종 종교적 제약으로 청교도의 입지를 줄여갔다. 찰스 2세 시대에 베드포드 지역에서 태어난 땜장이 존 번연은 갖은 투옥과 핍박 속에서도 수많은 저술 활동으로 청교도의 기본 정신을 알리려 하였다. 존 번연의 책으로 천로역정, 거룩한 전쟁, 죄인들의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 등이 있는 데 특히 천로역정은 성경 다음으로 전 세계에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 셀러였다. 존 번연 외에도 17세기에는 청교도들에 의해 지어진 많은 책들이 알려졌다. 윌리암 거넬이 지은 '전신무장의 그리스도인', 리차드 백스터가 지은 '성도의 영원한 쉼', 요셉 캐럴이 지은 욥기 강해, 존 오웬의 히브리서 강해, 매튜 헨리가 저작한 전성경 주석이 1687년~1712년 사이에 쓰여졌다.

1684년~1685년 사이에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전 교회들을 Episcopal(주교주의) 제도화하려는 찰스 2세의 시도에 대항하는 스코틀랜드의 저항으로 스코틀랜드에서는 많은 핍박과 순교가 잇달았다. 1685년 찰스 2세에 이어 왕이 된 제임스 2세는 영국 연방을 모두 로마 카톨릭화 하려고 갖은 시도를 다하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위그노파를 멸종시키려는 루이 14세와 같은 방식으로 청교도파와 성공회파를 모두 멸종시키려 하였으나 결국에 실패로 돌아갔다. 제임스 2세가 프랑스로 망명하고 난 후, 1689년부터 모든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기 시작하였다. 17세기 말부터 성공회는 세계 선교의 눈을 뜨고 북미 매리랜드에 성공회 교회를 세우는 등 전 세계에 성공회 선교사들을 파송하게 되었다.

17세기 초반 영국의 청교도는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캠브리지에서 영국의 캘빈이라 불린 William Perkins, 그리고 캠브리지 성 캐서린 홀의 주임 Richard Sibbes, 옥스퍼드 Magdalen 대학의 학장 Thomas Goodwin은 많은 저술활동과 설교로 청교도 정신을 유럽에까지 알렸다. 당시 의회 측과 스코틀랜드 장로회 측은 개혁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교리와 예배와 제자 훈련과 교회 감독에 관한 전반적인 계약서를 만들자고 결의하였다. 개혁 교회들의 통일된 교리문답서를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Abby에서 만들었는데 이 것이 [웨스트민스터 요리 문답서]이다. Thomas Goodwin, Samuel Rutherford, Richard Baxter 등 청교도와 장로교의 지도자들이 이를 주도하였다.

당시 군주제 부활을 시도한 찰스 2세 시대에 베드포드 지역에서 태어난 땜장이 존 번연은 갖은 투옥과 핍박 속에서도 수많은 저술 활동으로 청교도의 기본 정신을 알리려 하였다. 존 번연의 책으로 [천로역정], [거룩한 전쟁], [죄인들의 괴수에게 넘치는 은혜] 등이 있다. 존 번연 외에도 17세기에는 청교도들에 의해 지어진 많은 책들이 알려졌다. 윌리암 거넬이 지은 [전신무장의 그리스도인], 요셉 캐럴이 지은 [욥기 강해], 존 오웬의 [히브리서 강해], 매튜 헨리가 저작한 전성경 주석, 그리고 이 책 [성도의 영원한 안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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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틴의 神 이해

황정욱 박사 한신대 신학과 교수

 1. 서론

우리는 아우구스틴의 신론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처해 있던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데서 살았던 인물임을 인식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그를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에 관한 연구는 역사적 연구일 수밖에 없으며, 언제나 역사적 간격 의식이 요청되는 것이다. 아우구스틴은 자기 자신이 변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급속히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경험에 대해 반성하며 사고하였다. 그가 72세가 되었을 때 그는 [교정](Retractationes)이라는 글을 집필했다. 이 글을 쓴 목적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저서들이 발전의 산물임을 알게 하려는 데 있었다. 그의 사상을 동시적인 체계로 서술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신론을 이해하려면 그의 생애의 진행과 더불어서 그의 사상을 진술함이 바람직하다.

2. 스토아주의자로서의 신 이해

우리는 그의 [고백](Confessiones)을 통해서 아프리카로 귀환 전까지의 그의 삶을 알 수 있다. 고백 III, 4에 의하면 아우구스틴은 19세때 카르타고에 와서 수사학을 공부하는 가운데 특별히 키케로(Cicero)의 글 [호르텐시우스](Hortensius)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바로 그의 삶의 목표를 결정해 준 책이었다. 이 책은 현재는 단편으로만 남아 있는데, 독자에게 철학 연구를 권면하는 내용이다. 그의 진술에 의하면 '그는 이 책을 읽고서 이제까지 품어왔던 모든 헛된 희망을 버리고 불멸의 지혜를 추구하려는 욕구로 가득 차 당신에게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섰다'고 한다. 키케로의 책이 그를 사로잡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키케로의 정치 철학도, 회의주의도 아니었다. 그를 사로잡은 것은 바로 그의 도덕적 가치관이었다, 곧 그는 지금껏 수사학자로서 출세하기 위해 공부를 했다면, 철학은 세상적 출세와 부(富)가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키케로는 그에게 지혜에 대한 사랑, 즉 철학에의 욕구를 자아냈다. 키케로는 그로 하여금 어떤 유용한 전문 지식으로 만족할 수 없게 만들었으며, 이런 저런 철학파가 아니라 전적으로 '지혜'에 헌신하도록 만들었다. 이처럼 지혜와 진리는 일찍이 아우구스틴에게 중심 개념이 되었다. 그가 이것을 정의할 때 키케로적 스토아주의 전통에 따라서 정의했으니, 지혜로운 자는 곧 인간 안에 있는 최선의 것에 따라 사는 인간이다. 스토아주의에 의하면 지혜는 인간과 신(神)의 일을 아는 것이다. 진리와 지혜는 어떤 지식도 아니고, 한 통일 원리로부터 삶을 해석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론과 실재의 통일의 프로그램, 생(生)의 의미로서의 지식을 함축한다. 그는 키케로를 읽는 순간부터 그의 정신은 진리를 갈망했고, 오로지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서만 살기로 결심했다. 세상적 출세는 자명한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것이 아우구스틴의 첫 번째 회심이었다. 그리고 위 인용문에 의하면, 아우구스틴은 이렇게 진리로 전향한 것을 신(神)에게로 전향한 것으로 이해했다. 당시 그에게 진리가 곧 신이요, 신이 곧 진리였다. 그리고 이 사건은 바로 이교 철학자의 책을 통해서 야기되었던 것이다. 청년 아우구스틴에게 지혜 개념은 일차적으로 도덕적 구원과 연관된다. 이 지혜 이념은 범상한 삶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가진다. 그러므로 그것은 부와 육적 욕망을 멸시하도록 가르친다. 오직 지혜만이 명백한 삶의 처방을 제공한다. 그것은 일상적 삶의 우연으로부터의 해방을 명한다. 그것은 포기를 통한 구원을 약속한다. 그러나 청년 아우구스틴은 이 숭고한 프로그램을 실천할 능력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행복의 확신과 삶의 명백성에 있었고 이것은 어찌보면 그의 일생을 거쳐 늘 불변하는 동기였다: 진리, 지혜와 행복의 연결. 여기서 진리는 종교적으로 이해된 개념이다. 지혜는 그에게는 행복, 불멸, 신과의 교통을 뜻한다. 지혜 개념은 도덕적이다. 인간은 지혜를 통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청년 아우구스틴의 대전제다. 이 시기에 있어서 아우구스틴은 또한 키케로의 영향하에 그는 물론 신(神)이 존재함과, 불변하는 존재이며, 그가 인간사를 주관한다는 점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스토아적 유물론과 범신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때 나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외의 다른 실체를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당신을 인간의 형체를 가진 존재로 이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존재를 달리 이해할 줄을 몰랐다. …나는 비록 당신을 인간 육신의 모습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도 어떤 공간- 세상 안에 스며들어 있든지 혹은 새상 밖의 무한한 공간에 퍼져 있든지 간에 -을 차지하고 있는 물체와 같은 존재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당신도 무한한 공간을 통해 어디에든지 존재하시는 물질적인 실체, 즉 전세계의 덩어리에 침투해 있고 또한 그것을 넘어 끝없이 무한한 공간에 두루 퍼져 있는 큰 물질적 실체로 이해했다." 이 진술을 보건대, 20세의 청년 아우구스틴은 신을 우주를 지배하며 포괄하고 생기를 불어넣는 단일한 원리로서 이해했다. 스토아적 신 이해는 그 유물론적 면에서는 마니교의 신 이해와 일치하는 점이 있으며, 다른 한편 일원론적 근원으로서의 신 이해의 관점에서는 마니교의 이원론과 상충한다. 전자가 아우구스틴을 마니교로 끌어들이는 통로가 되었다면, 후자는 그로 하여금 마니교에서 멀어지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점은 아우구스틴은 네오플라톤주의를 알게 되면서 스토아주의를 신랄히 비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 배후에는 늘 일정한 스토아적 잔재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지혜, 진리와 행복의 연결 외에도 특히 물질 개체를 지향하는 실재 개념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그가 후일 성서 해석에 있어서 스토아적 실재 개념을 통하여 지성주의적 사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청중들의 현실 이해에 부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스토아적 이해는 그의 네오플라톤주의 내지 기독교적 인식과는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여기에 그의 사상적 갈등 요인이 있다.

3. 마니교도로서의 신 이해

아우구스틴은 키케로를 알게 된 얼마 후 마니교에 입문한다. 그것은 앞에서 이미 말한 대로 지혜와 행복을 추구한 결과였다. 마니교는 페르샤에서 건너온 종교로서, 잘 정비된 이원론의 체계였다. 두 개의 상반되는 세계 질서는 희랍 철학자들이 추구하는 일자 원리와는 상이하다. 그러나 이미 우주적 이원론 사상은 당시 유대와 헬레니즘 지역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때로는 신화로, 때로는 종교 철학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이 운동이 지식에 비중을 두기 때문에 보통 우리는 이 운동을 가리켜서 영지주의라고 한다. 마니교는 말하자면 다양한 영지주의 운동을 하나의 종교적 형태로 완성했고 선교 활동을 통해 급속히 보급되었다. 마니교의 주요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빛의 나라에 암흑의 나라가 대립한다. 두 나라는 각각 최고의 신을 가지고 있는데, 즉 이 세상의 신(神)과 빛의 신(神)이다. 양자의 투쟁 가운데 원(原)인간이 암흑에 의해 삼켰다. 빛의 신(神)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자인 구원자를 보냈다. 그는 흩어진 빛의 요소들을 모으며 그것들을 가시적 세계로부터 빛의 세계로 인도한다. 마니교도의 지상 목표는 빛과 암흑의 혼합을 중지시킴에 있다. 그렇다면 마니교는 아우구스틴에게 어떤 매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가 9년 동안이나 거기에 빠져 있었던가? 첫째로, 마니교는 세계에 대해 포괄적으로 설명하여 주었다. 즉 하늘과 별, 태양, 달과 같은 자연 현상. 그것은 우주 생성 등 자연 현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약속하였다. 여기에 청년 아우구스틴이 매료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세계에 대한 합리적 설명을 추구했으나 결국 발견하지 못했을 때, 이것은 그로 하여금 마니교에서 멀어지게 만든 한 원인이 되었다. 물론 아우구스틴은 방법적으로 엄격한 과학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마니교의 신화적 우화보다는 차라리 정확한 수학적 증명을 선호했던 것이다. 둘째로, 마니교는 자기 스스로를 기존 종교의 완성으로 이해했다. 마니는 스스로를 약속된 보혜사라고 칭했고, 마니교는 자기 스스로를 조명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집단으로 이해했다. 마니교는 권위로써가 아니라 철학적 통찰로써 설득하려 했다. 마니교는 기독교와 자유로운 사고를 결합시킨 듯 보였다. 마니교는 명령보다는 계몽이 더 신뢰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마니교는 기독교보다 이성을 더 높이 평가하였다. 셋째로, 마니교는 자기만이 악(惡)에 대하여 기독교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직 빛의 신만이 제거할 수 있는 악은 현실적 세력이다. 두 상반된 질서 원리를 인정하는 이유는 악의 실재를 예감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플라톤 이후 철학에서 지혜와 행복을 낙관적으로 등식화한 것보다는 훨씬 심오하다. 여기에 고대 희랍 철학과 문학이 표현한, 그러나 플라톤 이후의 도덕주의와 합리주의가 축출한 인간 삶의 비극에 대한 감각이 표출된다. 마니교는 만일 세계를 창조한 신이 홀로 전능하고 선하다면, 인간들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 처하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구원이 필요하다면, 현재 세상은 선한 신의 의지 탓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 명제에 아우구스틴은 매료되었다. 그것은 마니교가 인간 삶의 비극에 대한 감각과 논리적 자명성을 결합시켰기 때문이다. 네 번째로, 구약성서는 언제나 난제를 던져주었다: 신인동형설적 신관, 현실적 약속, 일련의 도덕적 계명 등등. 아우구스틴은 어떤 구약성서의 본문들은 오래 동안 그에게 걸림돌이었다고 말한다. 마니교는 구약성서의 잔인한 행위나 불쾌한 사건들을 암흑의 신에게로 전가시킴으로써 이 문제를 간단히 해결했다. 구약성서 전체가 악마의 작품이다. 이로써 선한 신은 사면되었다. 그는 유대의 민족 신과는 무관하다. 그는 순수한 선(善)이다. 믿는 자는 구약성서를 폐기할 수 있다. 다섯 번째로, 마니교는 성적 금욕의 이상을 실천한다고 주장한다. 아우구스틴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시인한 적이 없었지만, 자신의 육신이 자신의 의지에 굴복하지 않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마니교는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육신이 의지에 상반하는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를 보여줄 수 있는 듯 보였다. 그러면 아우구스틴은 어째서 마니교를 떠나게 되었는가? 무엇보다도 여기에는 마니교의 신 이해가 주요한 동기로 작용했다: 그는 빛의 신이 어떻게 암흑의 신과 싸울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즉 이런 싸움은 신이 가변적임을 전제한다. 그럴 경우 신은 제압 당할 수 있고 고난을 당할 수 있다. 마니교는 신들의 싸움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다. 그들은 신이 가변적임을 전제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암흑의 나라가 신을 해칠 수 없다. 여기서 보다시피 아우구스틴의 사상에서 주요한 동기는 신의 불변성이다: 즉 신은 순수하고 완전한 선이어야 하므로, 그에게는 아무 결함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에게서 생성은 무의미하며 따라서 신은 불변적 존재다. 그러므로 근본에는 불변성이 가변성보다 더 낫다고 하는 가치 판단이 깔려 있다. 개선이 가능할 경우에만 변화가 있게 된다. 신이 가변적이라면, 그는 우리의 최고의 선이 아닐 것이다. 그럴 경우 신은 궁극적 생의 목표에 도달했다는 확신을 줄 수 없을 것이다. 행복이 확실하기 위해서 신은 불변해야 한다. 그러므로 당시 아우구스틴은 무엇이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것이 어떠한 신이든 간에 상관없이, 그는 지혜자의 행복을 가능케 하는 것은 실재해야 한다고 믿었다. 여기서 아우구스틴은 자명한 듯 보이는 개별 사물에서부터가 아니라 정신적 활동에서부터 신 개념을 취해야 한다는 전제하에 있다. 즉 그의 논거 뒤에는 감각 세계 배후에 또한 정신 세계가 독자적으로 있다는 이론이 있다. 사람들은 이 확신을 '플라톤적'이라고 칭한다. 플라톤 철학에 의하면 가시적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가 있다. 비가시적 세계는 더 나은 세계이므로 불변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경우 인식과 판단의 조건 분석과 관련해서 이를 숙고하게 되었고, 더 나가서 의로운 자가 처벌받지 않는 새로운 정치 세계의 조건을 언급하기 위하여 이를 말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틴은 이런 맥락에는 관심이 없었다. 후기 플라톤에게서 가시적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의 이원론은 극복되었으나, 아우구스틴은 이 대립에만 관심을 가졌다.

4. 회의주의에서 네오플라톤주의로

아우구스틴이 마니교에서 벗어났을 때, 그는 혼란에 빠졌고 회의주의에 접근했다. 그는 아카데미파(회의주의)가 오래 동안 그를 붙잡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의 회의는 그렇게 극단적인 것은 아니었다. 일정한 고대 철학적 유산과 기독교의 신앙 내용에서 그는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신(神)이 존재하고 인간을 돌본다는 사실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우구스틴에 있어서 "회의주의적 단계"라기보다는 "회의주의적 경향"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그가 회의주의에 접근했을 때라도,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고 인간을 돌보지 않는다면 참 종교를 찾으려는 그의 노력은 무의미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인간 정신에 대한 고찰은 그로 하여금 회의주의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인간 정신이 얼마나 활동적이고 날카로운가를 말했다. 그러므로 진리는 인간 정신에 감추어질 수 없다. 끊임없는 진리 탐구와 인간 정신에 대한 고찰을 통한 회의주의의 극복은 아우구스틴에게 있어서 지속적인 동기가 되었다. 극단적 회의주의는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외적 소유와 우리의 육신은 모든 우연에 내맡겨져 있기 때문에, 우리의 행복 추구는 무의미하거나, 아니면 그것은 오직 비감각적 세계에서만 성취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지성적 세계에서 자기의 진정한 본성을 파악하고, 오직 여기서만 인간은 자신을 인식한다. 이런 통찰을 통해 아우구스틴은 마니교와 회의주의를 극복한다. 이런 통찰을 준 것은 바로 마리우스 빅토리누스(Marius Victorinus)가 번역한 플라톤주의자의 책(libri Platonicorum)이었으니, 이 플라톤주의자들이란 바로 플로틴(Plotin)과 포르피리오스(Porphyrios)였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해서 아우구스틴은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를 구별하지 못했다. 그는 플라톤의 도움으로 발견하게 되었다고 믿는 것에 대해 보고한다: 영적 세계의 독자성. 이것은 구체적으로 1) 스토아와 마니교의 유물론을 부정함을 뜻하며, 2) 새로운 실재 개념을 획득함을 뜻하며 (영과 영혼은 감각적 개체보다 현실적이다), 3) 관념론을 수용함을 뜻하며, 4) 감성주의적 인식론을 거부함을 뜻하며, 5) 영혼, 내적이고 윤리적인 것에 집중된 형태로 이론적 철학과 실천의 결합을 의미한다. 진리는 영혼을 행복하게 만든다. 오직 정신적 영혼만이 진리의 영원에 참여할 능력이 있다. 6) 따라서 의식의 전환과 금욕주의가 요청된다. 가시적 세계에의 의존은 우리로 하여금 순수한 진리와 행복한 삶을 파악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외부세계의 세력과 현상과 기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32세의 아우구스틴은 모든 가치를 비가시적 세계, 영적 세계에 둔다. 현실적 삶은 이 목표를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일종의 이원론이다. 그는 이런 사고를 안전한 항구에 도달함, 현재까지의 실천상의 모호성으로부터의 해방으로 인식한다. 그에 의하면 행복은 상실될 수 없는 것의 소유라고 정의되어야 한다. 행복은 행복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확실해야 한다. 이것이 아우구스틴의 초기 작품에서부터 영속적 동기다. 그는 "플라톤주의자들의 글"에서 이 동기를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을 얻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현실에 대한 심령주의적 개념과 그에 상응하는 윤리다. 플라톤주의에서 얻어지는 기독교 명제는 신과 인간의 영혼은 순수한 영이며 육적 사물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새로 얻은 확신은 아우구스틴을 기쁘게 했다. 이전에 영혼이 육신에 의존적이라는 생각이 그를 괴롭혀왔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로부터 육신에 대한 영의 독자성을 확신하게 되었다. 감각적 사물과는 다른 영적 존재, 그것만이 참다운 현실이고, 그것만이 인간을 진실로 행복하게 할 수 있다.

5. "회심" (386)

아우구스틴은 밀라노에서 플라톤주의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또한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들었다. 그의 고백에 의하면 아우구스틴은 우선 밀라노의 주교의 웅변술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점차로 그의 설교 내용에도- 즉 그의 이분법적 인간론, 그의 금욕주의, 그리고 그의 성서 주석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암브로시우스는 필로, 오리게네스 등의 영향을 받아 성서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는 네오플라톤주의자 아우구스틴이 수용할 만한 신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구약 성서 해석은 걸림돌이 되는 부분들을 제거해 주었다. 아우구스틴은 가톨릭교회에서도 신을 순수한 영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암부로시우스는 그에게 권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주었으니, 계시적 권위는 이성적 사고와 모순되지는 않는 것같이 보였다. 플라톤주의의 숭고한 진리와 대중의 미신 사이의 간격은 오직 암브로시우스 같은 인간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참된 선에 대한 가르침은 감각적인 것에 몰두한 인간들에게는 기이하게 보인다. 그들은 우선 믿어야 하고 영혼의 방향을 수정해야만 참된 선을 인식할 수 있다. "너희가 믿지 않는다면 인식할 수 없다" (nisi credideritis, non intelligetis). 이것은 아우구스틴의 표어가 된다. 결국 암브로시우스의 권위적 인격은 가톨릭 교회의 신앙에서 경멸할 만한 것을 제거했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틴이 어머니의 신앙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의 소위 "회심"과 이 사건을 기록한 [고백](Confessiones)의 기술 사이에는 12년의 시차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고백]의 회고를 이해함에 있어서 이 점을 감안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32세의 아우구스틴이 자신의 회심을 과연 어떻게 이해했는가에 있다. 그가 "회심"으로 인해서 호르텐시우스 독서 이후 가지고 있었던 철학적 삶에 대한 동경을 포기한 것인가? 그것은 결코 아니다. 그의 [고백]에서 보다시피, 그는 건강상 이유로 카씨키아쿰(Cassiciacum)에 칩거하면서 전적으로 명상 생활에 헌신한다. 그의 "회심" 이후 바로 이 명상적 삶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그의 회심은 신앙고백적 의미에서의 변화라기보다는 철학으로의 회심으로 이해해야 한다. 당시의 글에 의하면 질병이 그로 하여금 철학의 품으로 도피하도록 만들었다고 썼다. 그렇다면 그가 [고백] 8권 12장의 회심 보도에서 언급한 로마서 13, 13-14는 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것은 지금까지 자신의 삶의 목표였던 모든 것을 철저히 부정하였던 당시의 그의 자세를 잘 표현해 준다. 은둔자들처럼 살기로 결심한 청년 아우구스틴은 세상적인 삶 전체를 끊어버린다. 회심 직후 그는 바울이 골로 2, 8에서 철학을 정죄한 적이 없었고 오히려 '이 세상의 지혜'만을 정죄했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곧 이교 철학이 아니라, 이기적 지식으로 이해된다. 청년 아우구스틴은 지혜를 사랑하는 것은 인간 삶의 의미요 행복의 내용이라는 것을 확신했으므로, 이런 관점에서 그는 바울을 이해했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틴은 지성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복음으로 회심한 것이라기보다는 네오플라톤주의로 회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복음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아우구스틴은 복음을 네오플라톤주의적으로 해석했고 이런 류의 기독교로 회심했다. 청년 아우구스틴에게는 지혜가 곧 신(神)이었다. 그는 [고백]에서 이전에 네오플라톤주의 철학에서 알았던 것을 바울에게서 재발견했으며 거기에 추가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신의 은혜에 대한 찬양이라고 말한다.

6. 초기 작품에서의 신 이해

6.1. 철학과 종교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의 회심은 그가 철학 대신 종교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지혜는 행복하게 만들고 행복은 종교의 목표이기도 하다. 그런 한에서 그는 철학과 종교를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의 사고는 기독교와 플라톤주의가 만나는 수렴점을 맴돈다. 아우구스틴은 인식을 외부 세계의 작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영혼'의 활동으로 간주한다. '영혼'은 인식의 장소다. 영혼은 '지성적 세계'를 파악하기에 적합한 것이다. 지성적 세계란 평등, 의와 같은 순수 이념의 세계로서, 감각적 세계 옆의 제 2의 세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는 경험 가능한 세계의 비감각적 본질을 생각했다. 플라톤적 순수 이념은 피안적이다. 감각적 사물은 이념의 현상이다. 이제 아우구스틴은 순수한 一者, 지성적 세계의 원리야말로 성서 본문에서 '신(神)'이라 칭해지는 것이라고 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로써 그의 기독교적 자의식은 신앙의 주요 내용인 신을 고대 철학의 유산과 동일시하게 되었고, 신은 확고한 행복 추구의 목표, 애매모호하게 경험되는 세계에 직면하여 명확성의 상징이 되었다. 아우구스틴의 신(神)은 지성 세계의 모든 내용을 사고하고 그것들을 야기한다. 아우구스틴은 기독교 신을 진리 개념과 동일시함으로써, 유대교적 원시 기독교적 경험을 플라톤주의의 추상적 양식으로 옮겨놓았다. 정신적 구조의 역동적 근거로서 사고된 "신"은 물질적 존재일 수 없고 수동적으로 역사 속으로 끌려 들어갈 수 없다. 이런 사고로써 마니교가 극복되었다. 이념 세계에서 모든 세계 내용이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리고 영혼은 이 내용을 파악하고 가시적 세계와 능동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아우구스틴은 신과 영혼을 인식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이것을 좀더 상세히 서술해 본다면 이러하다: '신'은 유대적- 기독교적 자의식에 속한 표현 양식이지만, 아우구스틴은 플라톤주의적으로 해석하여, 순수 이념들의 원리로서 이해한다. '신'이 규범들의 원리이고 영혼은 그것들을 파악하여 가시적 세계에 적용할 수 있는 한에서, 자기 인식과 신 인식은 일체를 이룬다. 인간이 신을 규범들의 원리로서 인식할 때, 우리의 근원을 알게 되고, 동시에 우리 자신이 규범을 파악하고 올바른 것에 의해 행복해지는 존재임을 안다. 또한 아우구스틴은 단순한 신앙이 아니라 엄격한 신 인식과 영혼 인식을 추구했다. 그는 증명(demonstratio)을 말한다. 신앙은 그에게 심리적 출발점이다. 그러나 그가 추구한 것은 구속력 있는, 즉 합리적이라고 간주될 수 있는 증명이었다. 이것은, 오직 불변적인 내용만이 참 존재를 나타내며 우리에게 행복을 준다는 플라토니즘적 사고를 뜻한다. 자신을 인식하는 영혼은 자신 안에서- 밖에서가 아니라- 신을 자기 근원으로 인식한다. 영혼이 사물들로부터 자신에게로 돌아올 때, 그에게 신은 자신을 지시한다: "그러므로 나는 어떠한 순수 지상적인 것도 너를 기쁘게 할 수 없다면, 바로 그 순간에 너는 네가 바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신 인식은 그에게 일정한 지성적 도덕적 준비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영혼에 내재하는 근거로서, 영혼 저편에 있다: 신은 불변하고, 영혼이 그것을 통해 영속적인 것에 참여함을 얻게되는 지혜, 형식, 숫자가 신에게서 기원한다. 영혼은 그 자신의 근원이 아니다. 영혼을 신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은 그것의 타고난 죄책이나 신의 저주 때문이 아니라 영혼의 실수 때문이다. 영혼은 지혜에 참여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아닌 어떤 다른 것에 의해 방향을 잡아야 한다." 이 "타자"가 바로 신의 지혜다. 신의 지혜는 인간 삶에서 다만 부분적으로, 다른 것과 더불어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종교 영역은 철학적 탐구에 대하여 독자성을 주장할 수 없다. 다만, 신에게 인도하는 것은 이성이지만, 신이 대중에 대한 긍휼함 때문에 세계에 성육신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지 않았다면, 이성은 맹목적 인간들을 자기 자신 및 세상에 대한 그릇 판단으로부터 돌이킬 수 없다. 여기에 이성의 한계가 있다. 종교의 목표는 우리가 자신에게로 되돌아가서 우리의 진정한 고향, 지성적 세계를 파악함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의 인간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철학은 이성을 약속했지만 다만 극소수만을 해방시켰다." 실질적으로 진정한 철학은 기독교와 다르지 않다. 그것이 진정한, 원래적 철학이라면, 바로 만물의 원래적 근원을 지시한다.

 6.2. 신 증명 진리로서 이해된 신은 모든 질(質) 및 가치 판단의 총괄 개념이다.

아우구스틴의 신은 자의적 지배자도 아니고, 영적 능력의 집합도 아니라, 올바른 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사고의 궁극적 전제다. 신은 자기 경험의 조건을 탐구하는 모든 인간이 자기 안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신은 사고와 행동의 규범을 근거 짓는 것이니, 자의적으로 근거 짓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一者로서, 모든 선 중의 선으로서, 모든 규범 속의 규범으로서 근거 짓는다. 신은 비물질적 세계와 가시적 세계를 결합하는 일자이다. 이 점에서 그는 플로틴의 일자와 같다. 그러나 그는 그의 신적 일자(一者)에게 일련의 속성, 예를 들어 '참된 존재', '진리'라는 술어를 부여함에서 플로틴과 차이가 있다. 신은 사고한다. 그는 지혜다. 플로틴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플로틴의 일자는 사고와 존재 저편에 있다. 아우구스틴의 일자(一者)는 사고하는 신적 로고스다. 아우구스틴은 일자(一者)와 정신(nous)의 구별을 거의 수용하지 않았다. 플로틴의 일자(一者)는 아우구스틴의 신보다 초월적으로 사고되었다. 플로틴에서처럼 신은 선(善)이며 미(美)다. 플로틴처럼 일자(一者)에게서 유래한 숫자, 리듬, 형상, 조화는 미학적이고 형이상학적, 종교적 의미를 가진다. 이 신은 사고 속에서,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 그러나 대상적 경험에서, 그러므로 세계 안에서 특히 미학적, 수학적, 윤리적 판단의 조건으로서 드러난다. 이 신은 사고 자체의 내적 전제이므로, 아우구스틴은 신 존재를 입증할 논거를 제시할 수 있다고 믿었다. 즉 우리가 존재하고 살고 사고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가 의심한다면, 우리가 사고할 때 불변적인 규범을 요구한다면, 불변적인 진리가 있어야 하며, 이것이 신이다. 이런 논거는 철학적 분석들로 이루어진다. 이런 논거는 유대 기독교적 창조 신앙을 4세기 교양인들에게 자명하게 보이도록 함에 도움이 된다. 사람들은 이런 증명법을 인식론적 증명이라 부른다. 이 증명법은 세계의 감각적 경험을 전제하지만 세계 경험을 판단하는 조건들을 가지고 논증한다. 아우구스틴의 신 증명은 우리가 세계를 사고 관조함에 있어서 순수한, 그러므로 정신적 관념들을 전제한다는 것을 입증함에 있다. 그 관념들은 사고하는 영혼보다 고차적이며, 불변적이어야 한다. 플로틴은 영혼과 정신을 구별한다. 정신은 능동적인 순수 관념이다. 영혼은 순수한 관념들로의 운동이다. 아우구스틴은 이런 구별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순수 관념들의 다자성이 최고의 일자(一者)를 요청한다고 하는 한에서 플로틴적이다. 이 일자(一者)가 신(神)이다. 아우구스틴은 이런 신 인식은 누구나 도달할 수 있다고 간주한다. 그는 이것이 수학보다도 확실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는 신 존재에 대한 엄격한 증명을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는 언제나 신앙을 전제하였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에게는 신앙, 곧 감각적 사물로부터의 전향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틴에 의하면 신앙은 철학적 신 인식의 내용적 전제가 아니라, 심리적 도덕적 전제일 뿐이다. 그는 신앙적 진술을 근본 명제로 사용하는 것을 분명히 금지하였다. 그는 신앙과 인식을 엄밀히 구별하고자 했다. 신앙의 필연성은 그에게는 다만 대부분 인간들의 제약을 입증할 따름이다. 그들은 순수 정신적 인식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7. 388년 이후의 신 이해

7.1 과도기 (388-396)

아우구스틴은 388년 이후 아프리카로 귀환한다. 그는 타가스테에서 그의 부친이 물려준 토지에서 친구들과 공동 생활을 계속한다. 이 공동체를 사람들은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이 수도원적 생활을 네오플라톤주의적 철학의 실현으로 이해했다. 이 공동체는 고전적 철학 학파와 기독교 수도원의 중간 형태를 이룬다. 그는 예전처럼 철학적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존재자와 그것의 보편적 속성들을 분석한다. 그는 신(神)을 최고의 일자, ipsa vera et prima unitas, 모든 하모니에서, 특히 수 체계 구조에 존재하는 균등성, 감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지성을 통해서만 파악되는 vera aequalitas 으로 이해한다. 그는 이 시기에 변화를 보인다. 그는 구체적으로 마니교에 대항해서 카톨릭 교회를 방어한다. 388/389년에 그는 더 이상 철학적 대화편이 아니라 처음으로 성서 주석, 즉 마니교에 대항하여 창세기 주석을 쓴다. 또한 교회의 전통, 특히 바울이 점차로 영향력을 그에게 행사한다. 그 단서로 그는 [교사론](De magistro)에서 플라톤의 두 세계, 즉 감각적 세계와 지성적 세계, "혹은 우리 저자들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육적 사물의 세계와 영적 사물의 세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플라톤적 개념 "감각적-지성적"을 바울적 개념 "육적-영적"을 통해 보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 그는 바울적 옛 인간과 새로운 인간, 영과 육의 대립을 플라톤의 지성과 감성의 관계에서부터- 그 반대가 아니라- 해석한다. 여전히 그는 기독교 신앙과 고전 철학을 조화시키려 한다. 기독교는 고전 그리스 철학이 생각한 바를 대중들에게 계시해 주었다. 그러나 카씨키아쿰에서 보다 강력하게 그는 마니교에 대항해서 단순한 신앙의 유익을 강조한다. 그는 지혜자의 理想이 실현될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한다. 만년의 아우구스틴은 이 과도기의 글에서 비난받을 것이 많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당시 세례 받지 않은 아이의 저주에 대해 아직 올바로 사고하지 못했다. 자유로운 자기 결정이 당시에 그에게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다. 또한 그는 무죄한 자의 저주를 배제했다. 당시 그는 은혜의 선택의 문제를 등한시했음을 시인한다. 후기 아우구스틴은 이성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고 예수에게서 폭력을 자랑했다: 예수는 성전의 장사꾼을 폭력으로 몰아냈고 악마를 설득을 통해서가 아니라, 힘으로 쫓아냈다. 아우구스틴은 390년경에는 계시 내용을 그렇게 파악하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그는 너무나 철학적이었고, 너무나 플라톤주의자였다. 신이 세상에 개입함은 지나간 시대에 속했으며, 그의 그리스도는 그에게로 향한 모든 인간을 조명하는 내적 교사였다. 이 그리스도는 내적 인간 안에 거주하는 자이며, 영원한 지혜, 신의 불변적이고 영원한 지혜이다. 아우구스틴이 당시 어디에 관심을 가지는지 여기에서 드러난다. 역사적 예수가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추구되는 불변하는 지혜, 그 본질상 그를 향하는 모든 인간에게 향하는 존재. 우리가 오직 선한 의지만 있으면 불멸의 삶을 얻을 수 있다.

7.2. 은총론에서 본 신 이해

396년 이후, 즉 주교 서품 이후 아우구스틴은 집중적으로 성서를 연구했다. 특히 그의 관심을 끈 것은 바울이다. 바울이 극적 회심을 체험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과 육의 분열, 죄와 칭의에 대한 숙고 등이 바로 그의 관심거리였다. 바울이 율법과 복음, 영과 문자를 구별했다면, 아우구스틴은 이것을 마니교와의 투쟁에 이용했다. 바울에게서 그는 구원사의 단계를 구별하는 것을 배웠다. 특히 여기서 그는 신 인간의 관계를 만나게 된다. 바울의 예수 역사의 해석과, 죄, 구원, 은혜, 최후 심판에 대한 가르침에서는 고전 철학에서처럼 지혜나 영적 세계의 통찰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영적 삶의 약속, 악의 기원 문제에 대한 해명을 포함하고 있었다. 아우구스틴의 사고는 성서적 전통과 네오플라톤-스토아적 전통에 의해 결정되어 있었다. 그의 발전상에서 이 요소들의 강점이 부단히 변천하는 것을 보게 된다. 395년부터 아우구스틴은 집중적으로 로마서를 연구했다. 396년 [Quaestiones ad Simplicianum]에서 그는 처음으로 바울의 은총론을 극단적으로 해석했다. 이 글은 이전의 사고, 곧 기독교 신앙과 플라톤 철학을 동일시한 태도에 대한 작별을 의미한다. 이 새로운 은총론은 전통적인 헬라 철학적 가치관의 추락을 의미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모든 학문적 활동을 과소 평가하지는 않았다. 그의 목표는 기독교적 삶 안에서 고전적 교양에 한 자리를 양보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화시킴으로써 성서 이해에 유익한 도구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은 고전 학문의 기능 변환을 의미한다. 아우구스틴은 자신의 새로운 은총론을 바울 본문에 대한 주해 형식으로 진술했다. 그후 그는 이것을 자신의 삶의 경로에서 입증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는 396년이래 [고백]을 쓰기 시작한다. 이것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자서전이 아니라, 바울의 은총론을 자신의 삶의 예에서 실증하려는 것이다. 신의 은총은 인간의 항거에도 불구하고 승리한다. 그 다음으로 그는 412년 이후 펠라기우스가 야기한 논쟁에서 그의 은총론을 좀더 신랄하게 서술한다. 은총에 관한 투쟁은 아우구스틴에게는 사고를 지배하는 주제가 되었다. 신은 불변적 존재라는 것이 플라톤적 원리이며, 아우구스틴에게는 마니교로부터 해리에 있어 결정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불변하는 것만이 참됨을 지시한다. 그런데 이제 신이 불변성으로 정의된다면, 신을 마니교의 신화에서 구출할 수는 있으나, 인간 역사 속으로 끌어들이게 된다면, 우리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아우구스틴의 은총론의 특징은, 신의 불변성 사상과 바울의 예정론을 결합시킴에 있었다. 신의 결정의 불변성을 강조하는 한에서 이 선택론에 있어 플라톤 철학적 요소는 분명하다. 그러나 바울적 동기는 아우구스틴의 발전에서 획기적 사건이다. 행복한 삶이란, 인간이 덕과 지혜를 결단함으로써 얻어지는 존재론적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이제 사고하고 행동함으로써 지성적 세계를 향하는 자에게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값없는 선물이 되었다. 아우구스틴에게는 인간이 선하게 행동함은 순전한 선물이었다. 신은 참되고 불변하는 존재이며, 또한 사고하고 계획하고 선택하는 자이다. 신은 불변하기 때문에, 그의 결정은 영원전부터 확고하다. 그의 결정은 특히 인간의 영원한 구원 혹은 저주에 관계된다. 아우구스틴의 은총론은, 구원 혹은 저주의 결정이 개별자의 자기 결정에 맡겨져 있을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인간은 전체적 세계 계획의 의미가 그에게 위탁되기에는 너무나 신뢰할 수 없다. 이 의미는 신의 불변적 의지 안에서 확정되어야 한다. 개별 인간은 자기 구원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모든 확실성과 확신은 신의 의지에 달렸다.

7.3. 후기 아우구스틴에 있어서 플라토니즘

아우구스틴이 펠라기안들과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그가 플라토니즘을 포기하였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그에게는 여전히 호르텐시우스 독서 이후 품었던 철학에 대한 열정은 살아 있다. 이것은 그의 삼위일체론(De trinitate)에서 잘 드러난다. 플라톤 이후 철학자들은 인간이 결코 진술할 수 없는 신에 대해 진술한다는 비난을 받아 왔다. 후기 아우구스틴에게 있어서 이런 현상은 극도에 달하여 모순에 이른다. 그는 탐구될 수 없는 신에 대해서 일련의 대상적 진술을 감행한다. 그는 신을 '참된 존재', 최고로 존재하는 자(qui summe est)라고 칭한다. 신만이 참된 의미에서 존재, essentia이니, 그만이 언제나 한결같기 때문이다. 그는 존재라는 것을 현존하는 사물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그는 또한 신에 대해서 또한 순수한 '현존'(est)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성서의 神名 "나는 나다"(출 3,14)에서 신의 본래적 이름을 보았고 이로써 신을 '존재 자체'로 표시하는 중세적 전통을 확립했다. 실로 그는 구약성서를 원용하지만, 언제나 이 성서 본문을 플라톤적 존재론의 정신으로 이해한다: 오직 불변하는 것만이 실재적이다! 그는 성서의 신명은, 신이 본래 존재하는 자, 즉 한결 같은 자라는 것에 대한 대중적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란 이름은 플라톤적 진리를 아직 파악하지 못한 자들을 위한 표현이다. 이것은 그 동안에 그 자신이 부인했던 바 초기 아우구스틴의 사상을 다시 반복한 것이다. 즉 역사적 계시는 이성적으로 파악될 수 있고 철학자들에 의해 사실상 파악된 진리의 표적이라고 하는 생각. 역사적 역동성이 아니라 참된 존재의 정태성이 신에 관한 진리다. 아우구스틴은 신적 一者를 참 존재요 영원한 말씀으로 간주했다. 그런 한에서 일자는 다만 부정적으로만 규정된 것은 아니다. 일자와 정신과의 차이는 그에 의하면 한 신적 존재 안에 있다. 이것은 삼위일체론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부정을 통해 인식되어야 한다. '정신을 생각하기 위해서 모든 육신적 특징들을 제거하여야 한다. 또한 신적인 것의 무궁한 부(富)를 생각하기 위하여 정신을 극복하여야 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우리 사고에 대해서 숙고하고 그것의 비대상적 본성을 인식할 때, 그것에 대한 개념을 형성할 수 있다. 우리에게서 정신적 통찰의 순간으로 때때로 나타나는 것이 부단한, 한결 같은 생명으로서 현재하는 지혜, 혹은 신(神)이다. 우리가 일시적으로 사는 반면, 신은 언제나 살아있다. 아우구스틴에게 부정적 신학(theologia negativa)은 신 인식의 종말이 아니라 그것의 예비다. "우리가 추구하는 참된 생명은 육적이 아니고, 가변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신이 무엇이 아닌가를 앎으로써, 신이 무엇인가를 안다." 초기 글에서 신은 무지(無知)에서 인식된 것처럼, 지금도 또한 말한다: "네가 신을 파악한다면, 그것은 신이 아니다." 이런 진술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틴은 플로틴이 일자(一者)에 대해서보다 그의 신에 대해 말할 것이 더욱 많다. 우선 그의 신은 영이며, 가변적인 인간의 정신은 그것의 모형이다. 영으로서 신과 인간은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한편 그의 신은 예정하고, 선택하고, 유기하고, 은혜를 베푸는 신이다. 이러한 진술은 예정론에서 신과 인간 사이의 간격을 강요한다. 그러나 다시금 이 간격은 이런 신인 동형적 표상에 의해서 줄어진다: 신은 인간처럼 사랑하고, 진노하고 선택하는 존재다. 아우구스틴에게서 이 두 경향은 평행한다. 그의 부정적 신학이 신과 인간을 어떻게 접근시키는지는 [삼위일체론]이 잘 보여준다. 아우구스틴은 선이 나타나는 다양한 형상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선하다고 간주한 것만을 사랑한다. 우리는 개별 현상을 도외시하고 오직 그 안에서 나타나는 선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우리는 신을 보게 된다. 우리는 덜 선한 것과 보다 선한 것을 구별한다. 우리는 판단 기준을 가져야 한다. 이 기준이 선 자체다. 그 개념은 우리에게 새겨져 있다. 이 경험에서부터 신을 사랑하되, 선 자체로서 사랑할 수 있다. 그에게서 기준과 현실은 동일하다. 우리는 이 선에 의지를 향함으로써 선하다. 그에게 매달림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그는 자기 스스로 선하며, 선 자체, 최고의 선(summum bonum)이다. 그는 감소되거나 증가될 수 없다. 그는 자기 자신과 동일하고 따라서 불변한다. 이것은 낯선 선, 단순한 피안, 순수 자족자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이고, 이 선은 우리에게 가깝고, 우리는 그 안에서 살며, 움직이며 존재한다. 모든 개별자의 제거를 통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자를 보게 된다. 이때 인간은 모든 대상들의 비대상적 근원을 보게된다. 그런 의미에서 신은 초월적이다. 신의 단순성, 그의 자족성은 다른 사물로부터 구별된다. 부정의 종말에는 부정이 아니라, 善의 파악이 있으니, 그것을 통해 모든 것이 선하게 되는 이 善은 우리에게는 모든 판단 기준의 총체요 모든 당위의 기준이 된다. 신은 모든 논리적, 윤리적 규칙들의 총괄 개념이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신은 모든 선 중의 선이다. 그의 초월성에 근거해서 신은 만물 속에 존재할 수 있다. 그는 더 이상 선한 것이 있을 수 없는 그런 존재다. 아우구스틴은 신과 인간의 친근성의 경험(거의 범신론에 가까운)을 말한다. 그는 사도행전 17:21에 의거해서 바울이 인용한 스토아적 찬가의 한 구절을 수용한다. 신의 가까움에 대한 이 의식의 따스함! 그에게는 원죄 및 예정론에서 보는 것과 같은 준엄한 신 표상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인간에게- 그리스도인이나 이교도에게나, 은혜를 받은 자나 받지 못한 자 모두에게 - 신의 가까움이다. 신은 빛이니, 그 속에서 모든 정신 존재가 사물을 보게 된다.

8. 결론

19세의 청년 아우구스틴이 읽었을 때 그에게 진리는 곧 신이었다. 그때 이해된 진리는 종교적 의미였으며, 이후부터 그는 진리를 아는 자, 지혜를 가진 자가 곧 행복한 인간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진리는 확실하고 불변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확고히 믿었다. 이것은 그가 회심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변하지 않는 동기가 되었다. 바로 진리 추구의 결과로 한 동안 마니교에 이끌렸던 아우구스틴이 마니교를 떠나게 된 동기는 무엇보다도 여기에는 마니교의 신 이해에 대한 불만이었다. 마니교가 주장하는 바 암흑의 세력에 적대하는 신은 완전한 의미의 신이 될 수 없다. 신은 순수하고 완전한 선이어야 하므로, 그에게는 아무 결함도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에게서 생성은 무의미하며 따라서 신은 불변적 존재다. 그러므로 근본에는 불변성이 가변성보다 더 낫다고 하는 가치 판단이 깔려 있다. 행복이 확실하기 위해서 신은 불변해야 한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틴은 무엇이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것이 어떠한 신이든 간에 상관없이, 그는 지혜자의 행복을 가능케 하는 것은 실재해야 한다고 믿었다. 마니교에서 벗어난 이후 아우구스틴은 네오플라톤주의의 글을 통해서 신 존재는 순수한 영이며 물질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물질에 대한 영의 세계를 확신하게 되었다. 감각적 물질과는 다른 영적 존재, 그것만이 참다운 현실이고, 거기에 인간이 추구해야 할 행복이 있다. 또한 회심 이후에도 그는 철저한 네오플라톤주의자로서 기독교 복음을 이해했고, 그의 신 이해 역시 네오플라톤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에게는 철학과 종교가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철학이 추구하는 지혜와 종교의 목표는 다르지 않다: 행복한 삶. 그에게는 신이 지혜요 지혜가 곧 신이었다. 초기 작품을 보건대 아우구스틴은 네오플라톤주의가 말하는 一者, 지성적 세계의 원리와 성서가 말하는 '신(神)'을 동일시하게 되었다. 신은 확고한 행복 추구의 목표, 애매모호하게 경험되는 세계에 직면하여 명확성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영혼은 자신 안에서 신을 자기 근원으로 인식한다. 영혼이 사물들로부터 자신에게로 돌아올 때, 그에게 신은 나타난다: 신은 영혼에 내재하는 근거로서, 영혼 저편에 있다. 396년 이후 그가 바울의 은총론을 이해한 이후 기독교 신앙과 플라톤 철학을 동일시한 태도에 결별을 선언한다. 따라서 그의 신 이해도 역시 변한다: 그는 신은 불변적 존재라는 플라톤적 원리와 바울의 예정론을 결합시킨다. 행복한 삶이란, 인간이 덕과 지혜를 결단함으로써 얻어지는 존재론적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이제 사고하고 행동함으로써 지성적 세계를 향하는 자에게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값없는 선물이 되었다. 신은 참되고 불변하는 존재이며, 또한 사고하고 계획하고 선택하는 자이다. 신은 불변하기 때문에, 그의 결정은 영원 전부터 확고하다. 그의 결정은 특히 인간의 영원한 구원 혹은 저주에 관계된다. 아우구스틴의 은총론은, 구원 혹은 저주의 결정이 개별자의 자기 결정에 맡겨져 있을 수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 모든 확실성과 확신은 신의 의지에 달렸다. 그러나 아우구스틴이 펠라기안들과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도 플라토니즘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는 신을 '참된 存在', '최고로 존재하는 자'라고 칭한다. 신만이 참된 의미에서 '存在'이니, 그만이 언제나 한결같기 때문이다. 그는 存在라는 것을 현존하는 사물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그는 또한 神을 순수 '存在'라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나는 나다"(출애 3,14)라는 神名에서 신의 본래적 이름을 보았고 이로써 신을 '존재 자체'로 표시하는 중세적 전통을 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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