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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보더니스 지음, 김민희 옮김, 한창우 감수 / 생각의나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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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보더니스, 참 과학에 관한 글을 맛깔나게 잘 쓰는 사람이다. 수많은 독후감에 똑같은 이야기를 덧붙여 무엇하랴 . 

이 책은 도리어 과학자로서 나의 인생을 어찌 살지 생각할 기회를 준 책이다. 1) 위대한 생각은 선배들의 생각위에 자기의 가설과 그 과정을 입증하려는 참신한 노력이어야 한다.2) 젊을 때 해야한다. 3) 새로운 분야를 해야 한다. 4) 자기 아집에 빠지면 안된다. 차라리 수학을 따라가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도 근사했었고, 갈릴레오의 세계도 놀라왔으며, 뉴턴의 세계는 질서 그 자체였고, 아인슈타인의 세계는 우주를 이제야 제대로 본다는 느낌을 준다. 아직도 우리가 알아야할 무엇이 남았다고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지 않았듯. 우리도 아인슈타인의 시대에 현혹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또 새로운 앎의 기쁨을 맛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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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이야기처럼 재미있는 곰브리치 세계사 1
에른스트 H. 곰브리치 지음, 이내금 옮김 / 자작나무(송학)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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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리치 세계사는 그의 20대 후반에 씌여진 책이다. 그런 나이에 이런 책을 쓸 수 있다니 그 식견과 지식의 양, 그것을 엮는 실력이 놀랍다. 특히 내게 있어 그의 일관(一貫)하는 능력은 그의 종교에 대한 설명에 두드러진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몸담고 타종교에 대해서도 공부하지만 그의 책에서와 같이 정확히 각 종교의 특징과 목표를 짧은 글로 잘 설명한 경우는 보지 못했다.

1. 곰브리치가 설명하는 불교  

불교가 설명하는 모든 괴로움으로부터의 구원이란, 바로 우리가 스스로를 괴로움으로부터 구하고 싶으면 우리 자신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괴로움은 자신의 욕심에서 오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여러 해동안 노력하여 이 욕심을 다스리면 자기가 원하는 것 이상은 바라지 않는 상태가 된다. 이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단계는 결국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면의 평온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을때 느낄 수 있는 커다랗고 고요한 행복감. 그리고 자신이 욕망의 주인이 되면 죽은 다음에도 더 이상 인간세상에 태어나지 않는다.욕망도 없고 번민도 없는 무, 니르바나.  이 길은 중도中道에 있다. 쓸데없는 자기학대(힌두)와 지각없는 안이함(세속) 사이에서 구원으로 이끌어주기 때문이다. 올바른 말과 행동, 생활, 올바른 노력과 의식, 사색의 방법으로.(팔정도)

2. 유교 

유교의 목표는 더불어 사는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살아가는데 외형적인 것들이 생각보다 중요하다. 외형이 갖추어지면 생각이 따라온다. 수천년 동안 지켜온 예절이나 관습에는 심오한 뜻이 들어있다. 생각을 깊이 하지 않아도 예의범절로 모든 일이 저절로 잘 이루어지는 인간관계가 생겨난다. 인간은 선한 마음을 타고나므로 그것을 잘 지켜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 이 수행을 방법이다. 가족에서 이것은 시작되고 부모에게 잘 하는 자가 다른 사람에도 나라의 법률도 잘 지키게 됨에 이르는 것이다.  

3. 도교 

세상 모든 것에는 하나의 위대한 법칙인 도가 존재한다. 인간은 불안함, 바쁜 계획과 궁리, 제물바치기와 기도하느라 이 도가 자기에게 다가와 작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게 하고 살고 있을 뿐이다.사람이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것. 마음을 평온한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다. 이 때서야 비로소 모든 일은 자연스레 도로 통한다.

4. 기독교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며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며 그 앞에서 모두가 죄인인 우리를 긍휼히 여기신다. 죄인인 우리는 정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다. 구원 얻은 자는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듯이 우리도 똑같이 주위사람과 모르는 사람에게도 베풀며 산다. 심령이 가난한 자나 슬픔과 고통을 당하는 자 박해받는 사람들 모두가 불행을 당함에도 도리어 복된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자녀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며 이런 사람들이 곧 그 자녀들인 표지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역사는 어쩌면 인간이 그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며 그로 인해 빚어지지 소소한 일들의 연속으로 바라볼 때만 뜻이 통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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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포로 된 교회 - 21세기 예레미야 마이클 호튼의 세속화된 복음주의 치료책 마이클 호튼 시리즈 4
마이클 호튼 지음, 김재연 옮김 / 부흥과개혁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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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에 느꼈던 확신들이 오히려 이런저런 교회 안의 이야기들과 설교들을 통해, 또한 더욱 크게는  나 자신의 사고의 틀로 인해 갈피를 찾지 못하는 느낌이 든지 오래이다. 이 책이 참 오랜동안의 믿음안에서 궁금증을 풀어 준다는 것을 깨닫는다. 더욱이 복음의 핵심과 현재의 삶을 하나로서 살게 하는 처음 눈을 다시 회복하게 해 준다.

이 책의 읽은 후의 나는 이전과 같을 수는 없다면 과장인가? 신학을 몰라도 된다는 주위의 이야기들과 다른 신앙서적들의 홍수 속에 믿음은 느낌과 현실의 괴리 속을 떠돌고 있었다. 분명 계시와 역사 속의 구속사역이 그 시작이었음에도. 알고보면 황당한 일이지만, 분명 나 자신의 이론과 주위의 압력, 인간조정의 인문이론과의 조화와, 삶의 특수영역에 거대한 탑을 쌓아 다른 부족을 벌충하려는 "숨은 자기의"로 얽혀 돌아가는 도피의 생활. 돌아돌아 20년을 보내고 다시 믿음의 영역에 있어 신학-계시의 명료화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는다. 

알고보면 살상을 할 수 있는 기독교 민병대, 부시의 십자군 전쟁, 이 낯선 일이 내 믿음 가운데 벌어지고 있었다. 성공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는 시도. 선교가 아닌 나의 전투에 축복해 주시길 원하는 신앙이라는 것. 그 뿌리에는 걸어갈 길. 주어진 일에서 그 구실을 다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고도 내세울 무언가가 있는, 좀더 나은 기독인으로 인정 받으려는 우위의 욕구. 그래서, 기복과 두려움 사이에서 갈팡질팡한 하던 고단한 자아라는 신. 

어느 것 하나 쉬어지진 않았지만 이제 나는 내 싸움을 알 것 같다. 이곳의 주신 일을 사랑하고 그것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삶. 아, 왜 이로도 긴 시간이 필요했을까? 왜 이런 과정을 허락하셨을까? 기독교를 길들일려면 시민종교로 만들어야 한다던 루소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인 전략이 20세기의 문화 속에 미국 신학 속에, 그리고 내 안에 기가 막히게 성공적인 셈이다. 나의 공부와 사회생활과 노력의 목적이 무엇이던가?  하나님이 아니셨던가? 언제 이것이 이생의 자랑을 넘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까지로 변하여 나는 겨우 아둥바둥 견디어내고 있었던가?  그래서, 나는 내가 더 나은 내가 되도록 노력한다면 언젠가 이루리라는 말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이제는 매달릴 곳이 나에게는 남지 않게 된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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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목소리로 - 동녘선서 75 동녘선서 75
캐롤 길리건 지음, 허란주 옮김 / 동녘 / 199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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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여성심리학자의 입장에서 씌어진 여성 심리발달의 새로운 해석이다. 길리건은 기존의 남성에 대한 관찰에 기초한 심리발달 이론이 여성의 심리이해에 사용되는 부적절함을 지적하고 자신의 상담에 기초한 여성발달의 심리학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성차별의 뿌리에 심리학 이론들이 자리잡고 있음을 지적한다. 심리발달상 여성이 미숙하다는 기존의 이론. 이것은 여성의 생태적 열등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논리의 밑바탕에는 남성의 잣대로 여성을 측정하는 모순이 존제한다는 것이다.  

남성의 발달이 권리와 독립의 과정이라면 여성의 발달은 책임과 보살핌의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 도덕의 발단단계는 남성과 달리 1) 자기 생존 확보에서 2) 모성과 연결된 보살핌-순응과 불평등 수납-과정을 거쳐 3) 타아와 자아의 모두에 유익-인간관계 상호성, 이기심과 책임 대립 해소-을 취하는 단계로 이행한다고 본다. 이 과정에서 1)에서 2) 전이기는 타인의 판단을 의식하여 그것을 받아들이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려하지 않음이고, 2)에서 3) 전이기는 "이기적" 인 것이 모두 나쁜 것이 아니라는 자기자신의 주관적 시선을 획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성은 이런 발달을 통해 자신이 가치있는 존재이며 소중하고 행복할 권리가 있으며 단도직입적이고 솔직할 수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길리건의 이런 이론의 뛰어난 점은 이 이론이 여성발달 설명에 그치지 않고 양성의 발달의 상호보완을 목표로 한다는 점에 있다. 결국 독립적인 투사형의 남성들이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이유가 여성발달에서는 2단계에 속하는 보살핌과  이미 성취한 자신의 독립성과의 조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보며, 여성은 도리어 이미 성취한 보살핌의 능력을 독립확보로 조화시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남성은 독립에서 인간연결로, 여성은 보살핌과 애착에서 독립과 진실대면으로 발전해 가야 하는 것이다.이런 두 도덕관의 상호보완은 여성과 남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할 뿐 아니라. 각자 자기 안에서도 어느 정도 발달해 주어야 자신도 행복하고 상대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옳다라는 것이 결국 법률이나 규율적 내규가 아닌, 인간관계에 권리와 함께 책임과 보살핌 포함해야 한다는 생각, 즉 인식론적으로는 지식이라는 것이 기존의 이데아를 형식이 찾아가는 과정으로보는 그리스적 이원론 아닌, 인간관계의 상호작용을 통해 획득된다는 신약성서적 관점으로의 변화는 우리 시대 여성문제 뿐 아니라 계층과 나이, 인종, 고용관계를 넘어서는 하나의 패러다임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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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 의학의 탄생 - 의학적 시선의 고고학 이매진 컨텍스트 11
미셸 푸코 지음, 홍성민 옮김 / 이매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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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자신이 공간,언어,죽음에 대해 다룬 책이라고 말한 이 책은 18세기에서 19세기초에 걸친 의학적 시선의 변천 과정을 [고고학적] 기법으로 써내려가며 어떻게 주관적이며 실상과 유리되어 있던 의학이 현재 임상의학의 실증적, 부검적, 병리학적 태도를 가진 학문으로 탄생하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단순히 이것은 임상의학 하나의 변화를 보이고자 하는 것이 아닌 언어가 그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이며 현대철학의 한 모형의 성취를 예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임상의학은 증상이라는 시니피앙을 질병이라는 시니피에와 동일시하는 시도이며, 증상이라는 언어적 작용을 이해하는 것으로 출발하여 부검으로 몸 위에 보여짐으로 확인되는, 결국 말하여지고 보여지는 곳에 질병이 존재함을 밝히는 인식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분석과 같은 언어모델에 따라 실제세계를 그려나가는 과정의 살아있는 본보기인 셈이다.

[보이게 된] 의학은 증상symptom의 시간적 과정을 조직tissue에서의 공간적 변화와 연결하며, 이런 보여주는 사체의 개방성 안에서 죽음은 삶과 질병을 이해하는 역할에서 더 나아가 삶과 질병의 본질로서 자리하게 된다. 죽음의 개념하에 환자의 특성은 개별적으로 이해되며, 비로소 죽음으로 바라본 개인 공간화의 언어적 포착이 가능하다. 끝이 죽음이라는 것에서 모든 것은 개별화, 공간화, 언어화된 것이다.

나는 죽음이 현재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 변화를 파악하는 우두머리임에 푸코에 동의한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우리가 지금 이해하는 그 위치에 서 있다. 하지만 그런 현실 이해가 결국 지금 우리의 불만의 이유는 아닌가?  만약 우리의 끝이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라면 이런 우리의 이해는 똑같은 고고학적 접근을 통해 어떻게 발견될까? 이제 개별화는 우리의 반응에 의한 것이 된다. 질병은 생명에 이르기 위해 죽음을 거치게되는 과정의 일부가 된다. 그렇다면 의학은 생명의 존재와 그 중요성에 대한 확인의 시선으로 변하게 된다.결국 실마리를 어디로 잡는가는 우리를 전혀 다른 시선의 존재와 인식과 행위로 이끄는 것이다.    

푸코의 고고학적 접근은 현재의 의학을 이해할 뿐 아니라 앞으로의 전망에까지 매우 적확하다. 결국, 의학이 분류학적 이해(객관주의, 분류학)에서 증상적 접근(주관주의, 진단학)를 거쳐 증후적 실증주의 이해(객관주의,병리학)에 이르는 과정까지를 보여준 것이다. 또한 말미에 앞으로 이 과정이 현상학적 병인 메카니즘의 구축(주관주의, 질병이 말하는 진원지에 대한 가설에 의거한 메카니즘 규명)을 이룰 것을 예언하기도 한다. 실제 이후 의학은 이 과정을 거쳐 지금은 네트워크형 확률이론으로서의 생명시스템 이해(객관주의, bioinformatics)로까지 와있다. 어쩌면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교대와 인식이해 확대의 나선형 진행이 인간과학이 나아가고 있는 방향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의학이 모두의 오랜 노력으로 도달한 그 경로가 과연 [인간과학적 철학]이 눈여겨 보고 따라야 하는 방향이라는건 심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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