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그 이후 매스터마인즈 3
돈 큐피트 지음, 이한우 옮김 / 해냄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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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큐피트는 자신의 사상적 근간으로 니체를 말하기를 꺼리지 않는다. 그는 니체가 언명 하였듯이 종교와 플라톤의 종말을 선언하고 붕괴된 실재론적 이원론 이후 인류에게 필요한 종교를 재건하고자 한다.(1997년)

그가 만들고자하는 종교의 방향은 죽은 조상이라 하더라도, 죽었다는건 알지만, 기리고 섬기듯이 신을 항상 염두에 둔 조심스런 삶, 그리고 결국 삶이란 아무것도 아니고 죽으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인정하고 가벼웁게 미련없이 살아가는 것, 그리고 존재란 결국 표출하기 위해 사는 것이므로 미친 듯이 어떤 일에 열중하며 자기를 소진시켜 나가는 것. 거기에 덧붙여서 니체의 폭격 아래에서 논리적 신학의 자리는 없으므로 시와 같은 예술적 형태의 신학을 만들기, 이런 반실재론적 기반 위에 결국 모든 종교적 어휘를 아우르는 세계종교를 그는 만들자고 제안한다.

그의 말을 따르자면 결국 인간이 스스로의 종교성을 파헤쳐 발견한 것은 힘의 의지이며 에너지의 팽창일뿐이다. 인간은 자기밖에는 의지할 곳 없는 절대고독의 존재로 살아야 하는 존재. 그리고 스스로는 믿지 않는 신을 만들어야 하는 일을 묵묵히 해내야 하는 존재다. 언뜻 돈 큐피트가 제안하는 비실재론적 융합종교를 듣다보면 신세기 에반겔리온이나 나우시카 혹은 원령공주의 목소리를 듣는 듯하다. 여러신들과 어울려 空을 공유하며 장인의 이상을 위해 미친듯이 살며, 이웃과 조상신을 두려워하는 세계, 그러나 결국 아무 의미도 없는... 오타쿠의 나라. 혹 서양인들이 일본에 대해 갖는 환상들이 서양인 머리 어딘가 섞여들어 이런 결론에까지 다다른것인가. 아니면 망가 애니메이션속에서 폼 하나로 죽어가는 프랑스 아방가르드의 오타쿠적 변형이 포스트모던의 대세인 때문인가. 오타쿠(달인)가 삶의 목표가 되어가는건 사실 그 근본에 있어서 종교적 문제라는 걸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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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바지 오세곤 희곡번역 시리즈 3
장 아누이 지음, 오세곤 옮김 / 예니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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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를 우익적 무정부주의자로 여긴 아누이의 1978년, 여성해방운동에 대한 조롱투의 희극 극본이다. 그리스의 아리스토파네스 희극과 유사성은 보수적 관점 뿐 아니라 이야기의 비현실성과 그 안에서의 나름 흐름을 엮어내는 솜씨이다. 반바지는 남성중심적 사회에서의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을 상징한다. 아누이가 대변하는 것은 이런 억압계급이라고 불리워지는 남성, 자본가, 보수언론이다. 그는 여성이 정권을 장악한 미래를 보여주며 여성의 해방이란 것이 인간의 본성과 자유, 남녀간의 사랑, 아버지와 아들, 부부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고 있다고 고발한다.
 
약자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인생은 나름 각 사람의 살 의미가 있다는 안정지향적 관점을 담은 우스갯소리에 가까운 작품이다. 연극이라는 것이 관객들의 마음 속에 공감을 주는 억압된 의견의 한 통로라면 분명 여성운동이 거세게 일던 당시의 한 배출되지 못한 남성의 심리적 위축을 표현하고 있다.
 
30년전의 프랑스 연극이 놀랍게도 오늘 우리 보수와 진보라는 싸움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인간해방과 약자의 보호는 분명 억압자의 제어와 이익의 분배를 요구한다는 면에서 명분을 갖는다. 하지만 그 명분이 드러나 현실이 된 순간, 인간의 관계를 위협하고 이론 속에서 실속은 없어지고 천박하고 서로를 인간이하로 취급하는 진흙탕으로 들어가고 만다. 이건 아니었는데 왜 진보의 이론과 이상주의의 꿈은 항상 우리를 배반하고, 보수의 목소리는 정당하고 현실성이 있어 보이는가?
 
[오늘의 무능한 지도자는 어제의 불평 많은 반항자였음]을 이제 우리는 이 책이 아닌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도 알고 있다.  불만 속에서 사회를 질타하던 우리들이 도리어 정권으로 근사한 일은 제대로 못하고, 또 다른 불만을 생산해 내고만 있다. 이제 다시 서로를 비난하며, 지리한 진보-보수 이야기로 엮기보다 [내일의 유능한 지도자는 오늘 말없이 자신의 일을 해내는 사람]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그리 아깝지 않은 수업료를 낸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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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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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죽음을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특히 자신의 죽음이라면... 처음에 거부하고 분노하다가 점차 죽음 자체를 받아들이고 체념하고 화해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죽어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누구나 이런 과정을 겪으며 죽음을 겪게 되겠지만 모리는 죽음에 이르는 비상한 과정을 보여주며 살아있는 사람에게 삶을 사는 방법을 깨닫게 해준다.

오든의 싯구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파멸하리라]. 가족과 친구, 제자와 동료인간에게 마음 한 가운데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과 관심, 있는 것을 나누어주는 데서 오는 인생의 의미와 기쁨을 느끼며 살기를 그는 권한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는 친절은 [자기와 닮은 것에 대해 동정하고싶은 욕망]의 정의에 불과할지 모르나 모리에게는 친절과 사소한 관심은 죽음 앞에 선 유일한 삶의 의미와 존재유지의 길이다.

모리의 죽음이 아름다운 것은 그가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의 삶은 마음을 기울여, 주위의 생활방식, 사고의 틀, 문화에 휩쓸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 노력한 열매였다. 그런 사람의 죽음은 보내는 사람을 마음 안타깝게 하고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다. 자식에게 친구에게 과연 나는 삶을 함께 해주는 사람인가? 나는 사람을 수단의 하나로 보는 문화에 습관처럼 살고 있진 않은가? 혹 여전히 아무 의미도 없이 죽음과 함께 사라질 것들에 삶이라는 아름다운 기회를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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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보여주는 손가락
김치샐러드 지음 / 학고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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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치 샐러드 윤명진씨의 손가락은 나에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살표이다. 어느 보여주고자 하는 부분을 콕 찝어 자세히 설명해 주는 역할과 함께, 이 손가락은 온라인에 존재하는 손가락이다. 16세기 극장 연극이라는 당시로는 천박한 전달방법으로 다가간 셰익스피어의 인간이해, 20세기초 아무런 머리회전을 요구하지 않는 영화라는 친절한 설명방법이 가졌던 대중에 대한 영향력, 이제 21세기 초입에 인터넷 만화라는 돈도 노력도 필요없는 방법이 대다수에게 와닿게 전달되는 의사소통을 가능케 한다. 짤방(짤림방지)의 최대방법은 이미지를 늘리고 텍스트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만치 않은 흡입력있는 친절하고 감칠 맛나는 대사들(짧은 문장에 깊이를 담기는 대사가 최고다). 이 손가락은 독자로 부담없이 그 앞에 다가와 아귀와 같이 앉아있게 하는 힘을 갖는다.

 다른 손가락은 윤명진만의 주제, 방향제시다. 지난 30년간 우리의 대중문화는 무엇을 담았는가? 연탄난로를 때던 만화방에서는 억압과 강자 앞에 선 약자들의 승리가 있었다. 구영탄, 설까치와 외인구단, 며느리 밥풀꽃, 또 많은 우리의 만화 속 동지들은 나의 삶의 짖눌린 부분들을 인식하게 하고, 새로운 용기로 삶을 바라보게 했다. 그것은 우리들의 잔다르크이며 워싱턴이고 링컨이며 가르발디,아더이고 샤를마뉴이며 로빈훗이었다. 저항과 적에 대한 복수, 응징과 승리를 우리는 그들을 통해 누릴 수 있었다.그리고 찾아온 멀티플렉스의 시대. 자유를 누릴때까지 누려보고파 했던 자유로운 개인의 극대화의 단계. 각종 음지를 굴러다니던 욕설과 폭력,동성애와 마약 심지어 인종주의의 자유까지를 대형화면에 쏟아내는 시절이 왔다. 우리만의 계몽혁명의 자유이고 히피이며 반항의 계절이다.

 과연 다음에는 무엇이 올 것인가? 민족주의의 바람이 불고 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 [손가락]이 있다. 윤명진의 주제는 사뭇 무거운 것이다. 이제 인터넷 만화는 무엇을 전달하기 시작하는가. 루소의 이성절대, 개인폭발의 세계에서 괴테의 시대로, 볼테르의 저항에서 까뮈의 회의로 가고 있는가? 삶의 무의미에 대한 회의와 절망,예술에 대한 목마름, 의미에 대한 갈구라는 주제들이 이런 쉬운 방법으로 대중에게 호소력있게 다가간다. 이제 OTL의 희화된 삶의 무의미성, 절망감과 기존사회와 대중의 무관심 속의 고독, 자살의 시도와 비겁한 새로운 삶의 시작, 찾아지지 않는 해답과 궁극적 대답을 줄수 없는 화자에 대한 실망은 즐거운 놀이처럼 다가와 진지한 자기성찰을 대중에게 묻는다.

 “사람들에 둘러싸여 이번 작업이 실패하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서 좌절이 더욱 잘 표현된 것 같다."

"좌절의 순간 자신을 돌아보고 사랑하라는 뜻밖의 교훈을 얻었다." (윤명진 인터뷰)

 그는 대중에게 다가가는 어두운 표정을 화장뒤에 감춘 삐에로와 같은 손가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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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행에 집중하라
래리 보시디 외 지음, 김광수 옮김 / 21세기북스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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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같은 동기로 이 책을 읽은 사람도 있을까? 도산 안창호 때문이다. 도산은 나로 정말 심각하게 실행의 문제를 고민케 한 사람이다. 그가 본 1920년대의 우리의 문제는 한마디로 전략의 부재와 실행의 부재였다.갑론을박에 빠지다보니 점점 더 해버리면 될 것, 하고 지나가야 할 것들은 해 놓지 못하고 일본에게 먹히고 말았다. 일본이 악한 까닭도 있지만 우리가 약한 까닭을 놓치지 않았던 도산의 통찰은 우리 민족을 강하게 하는 것으로 무엇보다 [힘]을 꼽았다. 힘은 재력에서, 지력에서, 사랑에서 나온다고 본 그에게 [올바른 뜻]만큼 중요한 것은 [실행]이었다.  
 
도산의 길을 따라 읽은 이 책은 나에게 [조직으로서의 실행력]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개인의 실행력은 어느 누구보다 뛰어난 우리 민족이 아니던가? 이 책은 조직 실행의 3대프로세스로 인력, 전략, 운영을 들고 이 프로세스는 행동수칙을 준수하는 리더와, 정의로우며 의견의 자유가 보장된 문화와, 적합한 인재의 배치라는 방법을 통해 올바로 실현될 수 있다고 말한다. 특히나 가장 최종점인 운영에서조차 그 요체는 리더의 책임감과 헌신, 그리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공유코자 하는 마음이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우리가 좋은 리더를 많이 갖지 못하고 훌륭한 일을 힘모아 이루지 못하는 까닭이기도 하다. 우리의 약점은 결국 개인적 실행이 아닌 조직적 실행이다. 웃음의 실행, 정직의 실행, 겸손의 실행, 검소의 실행 이것이 조직의 것이 되지 못함이 또한 우리 실행의 현주소이다. 조직적 실행은 인력을 전략을 운영을 필요로 하며 반성과 동의와 확인과 지속성과 점검과 자신의 지속적 변화를 필요로 한다.
 
사회적 실행력이 일시적 감정과 분위기에 의한 것이기 쉬운 우리가 이제는 냉정한 현실에서도 사회적 실행력을 길러야할 때가 왔다. 감정적 신바람 경영은 단기적 응집력이 있지만 지속성을 갖지 못하고 학습되어 발전해 나갈 수 없다. 반복되는 우리의 역사는 늘상 어느정도 살게되면 서로간의 싸움질과 소모적 흠내기로 주저앉고 말지 않았던가? 우리는 감정으로 일이 되므로 상대를 감정으로 알고 감정으로 대하길 좋아한다. 혹 회식의 음주가무와 서로의 약점알기를 통해서가 아닌 서로의 꿈과 아름다운 마음들을 알아감으로 같이 일할 수 있다면 지금껏 감정으로 알던 상대보다 더 훌륭한 새로운 동료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우리는 더 이상 길거리에 부딪히는 사람에게도 저놈은 또 어떤 더러운 생각을 가진 놈인가하는 마음보다 저 사람안에는 어떤 꿈, 어떤 희망, 어떤 고귀함이 들어있을까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볼 수 있게 되진 않을까? 월드컵의 대한민국이 아닌 자랑스런 민족정신의 대한민국이 도산이 꿈에도 그려 그의 뼈와 살을 갈아바친 이 땅위에 생겨나길 바란다. 서로를 자랑스러운 한국사람으로 여기는 우리들이 되길 원한다.
 
이 책은 나의 생각과는 달리 살아가는 목적이 이윤이라는데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배척할 것만은 아니다. 나는 물론 이윤이 선이라 믿지 않고 이윤의 창출이 삶의 목적, 인류의 공헌할바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선이 삶의 목적, 이윤은 경영의 목적일 것이다. 하지만, 선을 경영함에 있어 조직적이고 전략적이라면 선을 더 잘 이룰 수있지 않을까? 문제는 목적지를 잊지않음에 있다, 이윤은 목적이 될 수 없고 업적도 목적이 될 수 없다. 드러커는 결국 비영리단체와 같은 경영기법으로 전략적 접근을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람은 진정한 목적에만 삶을 헌신한다. 결국 자신에게 돌아가는 이윤의 극대화가 동기라면 이것은 이미 17,8세기에 형성된 로크와 스미스의 세계관의 틀 안에 있을 뿐이다. 공자는 먼저 배불리 먹이고 도를 가르치라 했다. 도를 따르는 자는 배골치 않는 것에서 너무 나아가서 그것을 목적으로 삼게 되선 안된다. 더욱이 진정한 협력과 상대방(고용자,동업자 혹은 경쟁자)의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삶과 그 와중에 낀 각 개인의 영혼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그에게 이윤적 미끼가 아닌 의미를 발견케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균형은 이윤과 의미를 동시에 갖는 것일지 모른다.  이것은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닌 도리어 의미를 통해 열정을, 열정을 통해 실행을 얻어낼 수 있다. 도산과 공자가 생각하는 실행이란 결국 의미를 고려하는 실행이다. 기계론적 실행은 파국에 치달음은 살아보지 않아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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