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출판가는 ‘삼국지 전쟁’  [04/11/24]
 
거침없는 작가 장정일(42)이 10권짜리 ‘삼국지’(김영사·각권 8900원)를 냈다. 이에따라 출판가에 ‘삼국지 열풍’이 거세질 조짐이다.

●숨겨진 인물복원 ‘우리식 판본’

5년여의 산통 끝에 나온 장정일 버전의 ‘삼국지’는 나름의 차별점을 찍고 있다. 기존의 ‘삼국지’들이 ‘나관중본’ ‘모종강본’ 등을 재해석한 번역판본이었다면 이번엔 영웅 중심에서 벗어나 숨겨진 인물들을 복원시켜 소설에 가깝게 이야기를 재구성했다는 대목에서다.“춘추사관, 춘추필법, 한족 중심의 중화주의에서 벗어난 ‘우리 판본’”이라고 출판사측은 강조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출판가 안팎의 시각이 환영일색만은 아니다.“돈벌이 기획출판”이라고 대놓고 비판의 화살을 꽂는 목소리도 있다. 한 출판사 대표는 “유명 작가 몇몇의 삼국지가 국내 양대 메이저 출판사를 먹여살리다시피 하는 현실 아니냐?”며 꼬집었다.“기획출판에 순발력 있기로 소문난 김영사로서도 그런 계산이 없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도 덧붙였다.

실제로 국내 서점가를 평정한 대표 삼국지는 이문열의 ‘삼국지’(민음사·전10권)와 황석영의 ‘삼국지’(창비·전10권).1988년 출간된 이문열의 것은 지금까지 무려 1500만부를 팔아치웠다. 지난해 6월 나온 황석영의 것도 현재 100만부 판매실적을 올린 상태. 민음사 정대용 영업부장은 “IMF사태 여파로 95년 이후 판매량이 떨어지던 것이 지난해는 100만부까지 올라갔고, 올해는 60만부 판매가 가능할 것 같다.”면서 “지난해 황석영 삼국지의 가세로 오히려 시너지 효과를 봤다.”고 말했다.

●“돈벌이用 기획출판” 비난 목소리도

삼국지 출판시장 규모는 지난해의 경우 약 200만부. 유행에 민감한 여타 출판물들과는 달리 삼국지 시장은 끊임없이 신규독자들을 포섭해내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박종화 김구용 김홍신 이지함 조성기 등 ‘버전이 다른’ 삼국지들이 그야말로 백화제방(百花齊放)이다.

시장이 혼전양상을 띠다 보니 이래저래 괴담성 뒷말도 무성하다.“어떤 책은 서문을 쓴 이가 진짜 평역자이고, 그 작가는 이름만 빌려줬다더라.”는 식의 허탈한(?) 소문까지 나돌 정도다.

국내 서점가의 ‘삼국지’ 유형은 크게 둘로 나뉘어진다.‘나관중본’‘모종강본’을 원전삼아 번역에 충실한 ‘정역’, 필요한 부분을 변형·재구성한 ‘평역’이 그것. 김구용·조성기 버전은 전자에, 이문열·황석영 버전은 후자에 들어갈 만하다. 이들 책을 요리조리 뜯어 오류를 지적하거나 설명을 붙인 해설서도 한 흐름을 이룬다.

●우리시대 대표판본 어디에

그러나 독자들의 삼국지 감상 취향은 몇몇 인기작가들의 작품 쪽으로 지나치게 편향돼 있는 게 현실이다. 삼국지를 수십년 연구했기로 유명한 김구용의 정역 삼국지를 펴낸 솔출판사 관계자는 “작가의 독특한 세계관과 색깔을 담아낼 수 있다면 삼국지는 얼마든지 다시 쓰여져도 좋을 것”이라면서 “그러나 지금까지의 사례로 보면 삼국지가 오락적 책읽기의 한 텍스트로 활용된 경향이 짙다.”고 주장했다. 지난 2000년 솔출판사에서 3차 개정판으로 나온 김구용의 삼국지는 한문의 고졸한 언어감각을 충실히 살린 책으로 꼽힌다. 현재는 인터넷 무료 다운으로 e북으로 볼 수 있게 해 사실상 시장판매는 포기한 상태다.

하지만 불황으로 맥빠진 출판가에 어떤 계기로든 운동이 일어난다는 건 반가운 일이다. 개성있는 세계관을 담아 작가의 이름값을 해주는, 명실공히 ‘우리시대 판본’으로 남을 삼국지를 또 기다려볼 일이다.


(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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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를 다시 읽는 밤 [04/11/23]
 
[시론] 체 게바라를 다시 읽는 밤

지난 12일 오후 3시. 카이로에서 30여만명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야세르’를 연호하며 투쟁의 구호를 외치는 시간, 나는 신촌의 한 영화관에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보고 있었다. 아니 체 게바라와 아라파트와 빈 라덴을 떠올리고 있었다.

영화 상영을 기다리다 친구에게 문자 메시지를 날렸다.‘체 게바라, 아라파트, 그리고 빈 라덴의 공통점은?’ 응답 메시지가 즉시 달려왔다.‘잘 모르는 자들임! 약한 자들을 위해 노력하신 분들임!’ 내게도 그렇지만 특히 그 친구에게 체 게바라는 모택동, 호치민, 파농 등의 이름 한가운데서도 가슴 설레는 가장 빛나는 오라(aura)를 내뿜었던 인물이다.

꿈과 이상의 무한지점을 향해 가열차게 나아갔던 이름, 체 게바라. 그는 이제 우리에게 향수 어린 혁명가이자 몽상가이자 모험가이자 이상주의자이자 낭만주의자의 이름이기도 하다. 끝내 이루어질 수 없는, 결국은 미완으로 끝날 그 무엇을 향해 한 시대의 억압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했던, 그리하여 시인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메시아를 기대한 마지막 세대’가 아니었을까?

21세기에 들어서도 지구촌 도처에서 전쟁과 테러와 납치와 암살과 음모와 억압과 착취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더욱 강력해지고 교묘해지고 있다. 명분 없는 이라크 전에서는 무수한 병사와 민간인들이 죽어나가고 있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는 끊임없는 보복전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폭력에 총과 혁명으로 대항했던 게바라와 달리 비폭력으로 대항했던 간디는 ‘일곱 가지 사회적 악’을 다음과 같이 열거한 바 있다.

원칙이 없는 정치, 노동이 없는 부, 의식이 없는 쾌락, 인간이 없는 지식, 도덕관념이 없는 거래, 인류가 없는 과학, 희생이 없는 신앙. 주변을 둘러 보라.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 아닌가!

우리는 바오바브나무와 같은 이 폭력과 악의 뿌리는커녕, 잎 혹은 가지들이라도 제대로 눈치채고 있는가. 긴 안목으로 우리 사회의 흐름을 앞서 볼 줄 아는 진정한 혁명가, 아니 지식인들조차 설 땅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은 아닌지….

진정한 혁명 혹은 지식은 지금 체제순응주의로 개종중이다. 실용과 정보와 취미에 묻혀 상품으로 소비되고 향수로 추억될 뿐이다. 영화 밖에서 게바라는 내게 묻고 있었다. 우리가, 내가, 정말 한때 혁명적 삶을 꿈꾸기는 했던 것일까. 우리는, 나는 너무 쉽게 우리의 적(敵)을 닮아버렸다.

게바라는 이렇게 말했었다. 세계 어디서든 불의가 저질러지면 그것에 깊이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고. 이것이야말로 혁명가가 가진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고, 완전한 혁명에 도달하는 유일하고도 가장 확실한 길은 끊임없이 내부의 혁명에 충실하는 것이라고.

정직하게 분노할 줄 아는 한 우리는 여전히 혁명을 꿈꿀 수 있다. 정직하게 분노할 줄 알아야 나는 비로소 시인일 것이다. 혁명을 원치 않는 사회일수록, 시가 위기인 사회일수록 우리가 혁명과 시를 논해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의 적은 늘 우리의 내부에 뿌리깊이 자리잡고 있고, 나는 나에게서부터 분노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게바라를 다시 읽는 가을밤이 아련하고 소슬하다. 영화 속 젊은 게바라는 천식으로 쉴 새 없이 기침을 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김수영의 시 ‘눈’의 한 구절을 떠올리곤 했다.“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눈을 바라보며/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마음껏 뱉자.”


(정끝별 명지대 국문과 교수· 시인)=서울신문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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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新풍속도  [04/11/23]
 
[문화산책―김병종] 언어의 新풍속도

종이 위의 언어가 전부이던 시절과 이동전화 컴퓨터의 언어가 대세를 이루는 오늘의 언어문화는 사뭇 달라져버렸다. 법정 스님이 근래 쓴 책을 소개하는 글에 ‘폭력의 시대…. 적게 보고 적게 듣고 적게 말하라’는 구절이 있었다. 건강 서적 같은데서 ‘적게 먹으라’는 말을 자주 접했지만 ‘적게 보라’ ‘적게 들으라’ 그리고 ‘적게 말하라’는 권유는 참 인상적이었다.

유학서는 학문에 입문하는 자에게 필수로 많이 보고 많이 생각하라고 권유하고 있는데 이 시대에는 이미 많이 보는 것도 많이 듣는 것도 모두 미덕이 아닌 것 같았다. 그만큼 볼 것,들을 것이 많은 것 같은데 실상은 보아서 좋은 것,들어서 유익한 것이 많지 않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 글을 읽으면서 문득 말의 값어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산 속에 혼자 사는 스님은 TV도 휴대전화도 없는 적막 속에서,그러나 소음 속에서는 들을 수 없는 영혼의 모음(母音)을 듣는다고 했다. 현대인들이 놓쳐버리는 대자연의 신비하고 아름다운 소리들을 듣는 것이다. 사람의 입으로 토해지는 말 대신 나무와 바람과 새들과 산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동전화의 발달과 함께 말의 홍수시대가 왔다. 하루 종일 말 속을 부유하는 느낌이다. 광장과 골목과 자동차와 지하철과 사무실 그 어디서고 수많은 말들과 부딪친다. 본디 말에는 말씀이라고 높여 한자로도 말씀 언(言)이라 했건만 오늘날의 말 값은 말씀 언을 달기가 무색할 정도이다.

얼마 전 한 잡지를 보니 어느 교수 한 분이 휴대전화 없이 사는 것이 화제처럼 떠올라 있었다. 교수 일 외에 지역에서 많은 일에 종사하는 그 분이 휴대전화 없이 지낸다는 것은 신선했다. 초기에는 공인이 그럴 수 있느냐고 비난이 빗발쳤지만 이제는 다들 그러려니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휴대전화 없이 사는 삶의 정신적 여유와 넉넉함이 매우 소중하여 자신은 약간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휴대전화는 가질 맘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도 암중모색처럼 그 요망한(!) 기계를 없애버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청하지 않았는데도 지겹게 또 올라오는 성인광고의 문자 메시지들로부터 시작하여 열에 아홉은 불필요한 전화,받기 싫은 전화이니 참 짜증이 난다. “아아! 휴대전화만 없다 해도 훨씬 평화로울 텐데” 하는 생각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나만 없앤다 해서 해결날 사항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대중목욕탕 하고도 사우나에 들어와서까지 휴대전화를 받는 세상이니 말이다. 어느 의과대학 교수 분 얘기로는 산부인과에 진료받으러 와서 진료대에 누워서까지 휴대전화를 받는다니 손들지 않을 수 없다. 말이 많다보면 쓸 말이 별로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도 말이 많은 세상이 된 것일까.

어떤 글에 보니 인간 소외현상의 하나라고 하였다. 문명의 가속화 현상으로 점점 인간이 소외되고 그 소외와 공허가 견딜 수 없어 말을 많이 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서로 끊임없이 말을 주고 받음으로써 존재를 인정하고 인정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언어적 확인으로 실존을 확신해야 안심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말 없이 서로의 눈빛만을 보고 돌아서도 정이 변치 않던 그런 시대는 이제 소설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이 가을 열흘쯤만이라도 휴대전화 울리지 않는 곳에서 살고 싶다. 나도 한번 가랑가랑 울리는 풍경소리와 소슬한 바람소리들 속에 밤을 맞고 싶다. 후두둑 나뭇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깨고 싶다. TV와 컴퓨터 불빛이 없는 곳에서 어스름 저녁 빛을 맞고 싶다. 휘영청 떠오른 달빛을 보고 싶다. 새벽 미명 속에 깨어나는 나무와 풀들을 보고 싶다. 말 없음 속에 자연의 말들을 듣고 싶다. 아무도 해하지 않은 그 무욕한 말들을.

(김병종 화가·서울대 교수)=국민일보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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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펼치며] '정글'속의 책, 소박한 소망  [2004. 11. 23]

'1938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한 책이 있었습니다. 책은 스스로를 헤밍웨이나 스타인벡 급의 작품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만 노벨상 후보에는 한번도 올라보지 못했습니다. 6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오면서 책은 세 번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20세기가 끝날 무렵 책은 밀라노의 고서점에서 네 번째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서점은 그 해 여름 문을 닫을 예정이었고 그전에 누군가에게 구제되지 않으면 책은 재활용 폐지로 넘어갈게 될뻔했습니다. 책은 서점에 사람이 들어올 때마다 심장이 멎을 만큼 초조감을 느낍니다. 선택을 받아 떠나는 동료에 대해서는 부러움과 시기심도 교차합니다. 책은 수세기를 지나서도 살아 있는 책,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것이 꿈입니다. 그러나 책은 지금 그런 이상보다는 폐지로 변한 뒤 치즈와 샐러드를 담는 포장지가 되거나 아님 쓰레기통에 던져졌다 한 줌 재로 변하는 처지가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인용한 글은 안드레아 케르베이커가 쓴 '책의 자서전-어느 베스트셀러의 기이한 운명'의 주요 내용을 간추린 것입니다.

저자는 책을 영혼이 있고 감정과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가정한 뒤 1인칭 화자로 내세워 자신의 지나온 세월을 이야기 하게 합니다.

저자의 말대로 만약 책이 사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책은 과연 어떤 생각들을 할까요. 제가 추측하기로는 무엇보다 생존권을 요구할 것 같습니다. 출판사라는 어머니의 자궁을 떠난 뒤 서점에 진열됐다 그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한 채 소리없이 사라지는 가치없는 삶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벨상 등 굵직한 상을 받지는 못할지라도, 표지가 찢기고 군데군데 좀이 슬더라도 오래도록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서가에 꽂혀 있기를 바랄겁니다.

책은 또 현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원할 듯합니다. 책의 세계에도 정글의 법칙은 적용됩니다. 효용가치가 떨어져 찾는 사람이 없으면 가차없이 도태됩니다. 책의 처지에서는 지은이나 출판사가 애초부터 읽히는 책으로 만들어주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겠죠.

반세기전에 나온 책들은 라디오를 싫어했다지만 요즘의 책은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를 엄청나게 미워할 개연성도 큽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손에서 자신을 떠나게 만든 주범으로 인식을 한다면 말입니다.

'책답게 살 만한 권리'를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고물상까지 가지는 않더라도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을 주인으로 만나 이리저리 채이다 잡동사니 상자 속에서 암울한 생을 보내는 것은 죽기보다 끔찍한 일인 까닭입니다. 뜨거운 라면 냄비를 올려 놓는 받침대, 잠잘 때 쓰는 베개, 혹은 부부싸움 때 상대방에 던지는 흉기가 된다면 책은 태어난 것을 후회하며 복받치는 설움을 삼키고 있지 않을까요. 어차피 천년만년을 살 수 없다면 살아 있는 동안이라도 좋은 주인에게서 귀여움을 받기를 바라는 것이 소박한 책의 소망일겁니다.

오늘도 책들은 서점의 진열대에서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기를 원하고 먼지 덮인 집 서가의 구석진 자리에서 주인이 다시 한번 불러주기를 애타게 기원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를 끄고 자신을 꼭 안아주기를 갈망할 수도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은 책에게 어떤 주인이 되고 싶습니까.


(국제신문 염창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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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12. 2.


12월이 시작되었다. 2시- 9시, 3시-10시, 4시-11시, 5시 10시, 밤꼴딱, 또 꼴딱.


며칠을 그리 지내고 나니 12월이 와 버렸다.


피곤한 열흘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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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12-02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힘내세요

찬타 2004-12-06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말에 한참을 자고 일어났더니만, 힘이 솟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