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2005년의 번역 트렌드(인문학)

한 해를 정리하는 12월에 들어서 교수신문(www.kyosu.net)에서는 '학문분야별 번역트렌드 점검'이라는 기획특집기사를 냈다. 인문학과 자연/사회과학으로 나누어 두 차례 기사가 게재되었는데, 시의적절한 내용이어서 옮겨놓고 몇 마디 보태본다. 먼저 옮기는 '인문학' 트렌드는 이은혜 기자의 12월 02일자 기사이다.   

 

 

 

 

-서양철학 쪽의 올 한해 번역물들을 훑어보면, 그간 해당전공자들이 전집, 선집번역을 비롯 한 사상가의 사상을 모두 번역해내겠다는 의지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작업들이 많았다. ‘니체 전집’의 완간(2, 6, 9, 12, 19권은 올해 출간)이 대표적인 예이고, 하이데거의 번역(<이정표>, <사유란 무엇인가>)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베르그손 저서도 두권(<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 번역됐고 헤겔(<정신현상학 1~2>, <청년헤겔의 신학론집>) 역시 시장에서 인기가 별로 없는 것과는 별도로 꾸준히 번역되는 중이며, 칸트(<윤리형이상학 정초> 외)도 마찬가지로 전공자들이 나서서 완성된 그림을 위해 내달리는 중이다.

이 원전 번역서들의 특징은 기사에서의 지적대로 '해당전공자'들의 노작이라는 점이다. 칸트, 헤겔, 니체, 하이데거, 베르그손(베르그송) 등 사유의 거장들의 주저들이 계속 한국어로 옷을 갈아입고 있는 추세는 말할 것도 없이 반가운 일이다. 다만, <정신현상학>의 경우, 노학자가 세 차례나 개정 번역서를 내는 동안에 젊은 전공자들이 한번도 손을 거들지 못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면서 의아한 일이다. 우리는 아직 우리 세대의 정신현상학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기에 그러하다(가질 필요가 없는 것일까?).   

 

 

 

 

-그런 가운데, 최근 붐을 이루려는 조짐을 보이는 것이 발터 벤야민의 저술 번역이다. 올해 드디어 그의 주저인 <아케이드 프로젝트>(조형준 옮김, 새물결) 1차분 2권이 번역되어 나온 것. 벤야민은 1980년대 초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소개되면서 국내에서 연구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 무렵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현대사회와 예술> 등 몇 권의 역서가 출간된 바 있다. 하지만 중역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얼마 후 이러한 번역작업도 뚝 끊겼다. 이후 벤야민의 저서보다는 2차 연구서들이 소개되기에 바빴다. 즉 국내에선 미국을 통해 들어온 벤야민을 맛봐야 했으며, 모더니티 담론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에도 신비스럽고 난해한 이론가로 취급됐었다. 그러던 차에 올해 벤야민이 “나의 투쟁, 나의 모든 사상의 무대이다”라고 말한 13년간의 역작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나온 것. 더불어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김남시 옮김, 그린비)와 2차 연구서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그램 질로크 지음, 노명우 옮김, 효형)도 출간됐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번역의 質이다. 사실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번역자는 벤야민 전공자가 아니며, 영어전공자라는 점에서 연구자들의 신뢰를 얻고 있지 못하다. “영어중역의 혐의가 제기되며 향후 번역 논쟁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라는 게 몇몇 전공자들 견해다. 어쨌든 논쟁의 불씨를 안고 있는 가운데, 벤야민의 다른 주 저서들의 번역에 전공자들의 박차가 가해지고 있다. 현재 최성만 이화여대 교수, 윤미애 중앙대 강사, 김영옥 한국여성개발원 연구원이 뜻을 모아 주어캄프판 10권을 출간계획하고 있는데, 늦어도 내년 1월 내에 <일방통행로>와 <사유이미지> 등 3권이 도서출판 길에서 출간될 예정이라 한다. 이들은 아포리즘에 관한 벤야민의 주저로 파격적인 실험을 보여주고 있고 국내엔 처음 소개된다. 앞으로 1년에 3권씩 벤야민 번역서가 출간될 계획이다. 

벤야민에 대해서라면 한 해 동안 남못지 않게 주절거린 터여서 군말을 덧붙이기가 쑥쓰럽다.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경우 아직 나머지 절반이 출간되지 않았지만 올해의 '사건'이라고 할 만한 번역이다. 중역본 논란을 전공자들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일 텐데(원전역이라고 해서 무조건 '질'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내년에 출간예정이라는 벤야민 전집에 기대를 걸어본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건 번역의 문제점을 제기한 '전공자'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 번역이 그 만한 수준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영어를 직접 옮길 게 아니라 독역본을 중역했어야 했을까?).  


 

 

  

-고대철학 부문에서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김인곤 외 옮김, 아카넷) 번역 역시 국내 학계에 ‘반가운’ 소식이었다. 애초에 플라톤전집을 번역하려고 모였던 정암학당 멤버들이 우선 단편선집부터 선보인 것. 워낙 번역이 쉽지 않은 분야임에도 김재홍 서울대철학사상연구소 연구원 등 3명이 <니코마코스 윤리학> 원전번역을 진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2006년 학술진흥재단 번역과제로 김남두 서울대 교수가 플라톤의 마지막 대화편 <법률(Nomoi)편>을, 조대호 연세대 교수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맡게 됐다. 하지만 몇몇 아쉬움을 나타내는 목소리도 있다. 김주일 성균관대 강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피지카(Physica)>도 중요 저작인데 아직 번역서가 없으며, <정치학>의 재번역이 나오지 않는 것도 아쉽다”라고 말한다. 롱 앤 새들리(Long & Sedley)의 것도 “교양적 수준’에서 반드시 번역되어야 할 책들”이라는 의견들이 제기된다. 이들 역시 헬레니즘 철학을 위한 증언과 단편 모음들인데, 유럽에는 포켓판으로 널리 공급되고 있다는 것. 그 외 장 볼락(Jean Bollack)의 엠페도클레스 단편 모음 및 고대 그리스 자연철학에 대한 개괄서인 <엠페도클레스(Empedocle 1~3)> 역시 “번역됐으면” 하는 저서로 꼽히기도 한다. 어쨌든 현재 플라톤 전집조차 완간되지 못한 서양고대철학계의 부끄러운 현실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플라톤의 <국가>만 십 수종 번역된 데서 알 수 있듯이 특정 인기종목에만 번역이 편중된 탓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조대호 교수의 <형이상학> 번역은 작년에 나온 발췌역을 가리키는 것인가? 한가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연초에 나온 <범주론/명제론>(이제이북스)이다. 어쨌거나 서양 고대철학 분야에서도 전공자들이 분발하고 있다는 소식이니 고무적이다. 현재 나와 있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이나 <정치학>을 업그레드한 번역서의 등장은 나 또한 고대하고 있고. 더불어 문학 전공자로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 또한 번역되기를 기대한다. 참고로, 아리스토텔레스 입문서로 추천할 만한 만화책이 최근에 출간됐다. 루퍼트 우드핀의 <아리스토텔레스>(김영사). 이 역시 전공자의 번역이므로 믿을 만하겠다.  

 

 

 

 

-들뢰즈 서거 10주년을 맞아 올해 들뢰즈 관련 번역도 화려했다. 저서로는 <중첩>(허희정 옮김, 동문선), <비물질노동과 다중>(서창현 외 옮김, 갈무리)이 번역됐고, <들뢰즈와 맑스주의>(니콜래스 쏘번 지음, 조정환 옮김, 갈무리), <들뢰즈와 정치>(폴 패튼 지음, 백민정 옮김, 태학사), <들뢰즈 커넥션>(존 라이크만 지음, 김재인 옮김, 현실문화연구), <싹트는 생명-들뢰즈의 차이와 반복>(키스 안셀 피어슨 지음, 이정우 옮김, 산해),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데이비드 노먼 로도윅 지음, 김지훈 옮김, 그린비) 등 2차 연구서도 번역돼 들뢰즈 연구가 풍부해진 한해였다. 원래 ‘10주년’이란 타이틀이 그러하듯 때맞춰 준비해뒀다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것이지만, 사실 국내 철학계는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가 과도한 트렌드를 이루고 있다”라는 일부 학자들의 우려를 염두에 둔다면 과도한(?) 붐을 이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출간된 책들의 종수로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국내에서 들뢰즈는 '트렌드 중의 트렌드'이다. 내 기억에, 90년대 사회주의 몰락 이후에 마르크스주의 이후, 혹은 또다른 마르스크주의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알튀세르-푸코-들뢰즈는 차례로 한국의 지식분자들 사이에 '냄비'가 되었다(니들이 들뢰즈를 알어?). 그 긍정적인 효과는 이들의 책들이 단기간에 대거 소개된 것이며 그 부정적인 결과는 상대적인 편식에 따른, 사회적 관심의 불공정한 분배이다('과유불급'은 동양의 오랜 격언이다).

<들뢰즈 커넥션>을 읽은 걸 계기로 해서 (아직 미뤄둔 페어퍼들이 많지만) 나도 들뢰즈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참견을 해왔다. 그리고 <중첩>을 빼고는 올해 나온 책들은 모두가 몇 장이라도 책장을 넘겨본 책들이다. <비물질노동과 다중>은 편역서로서 '정동(affect)'에 대한 들뢰즈의 강의를 포함하고 있지만 들뢰즈의 '저작'은 아니다. <들뢰즈 맑스주의>와 <들뢰즈와 정치>는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이며, <들뢰즈의 시간기계>는 물론 올해 2권이 마저 출간된 <시네마>와 같이 읽어야 하는 책이다. <싹트는 생명>은 들뢰즈의 <베르그송주의>를 바탕에 깔고 있는 책. 해서, 들뢰즈를 읽는 것만으로도 한 해가 모자랄 지경이다. 어쩌다가...   

 

 

 

 

-한나 아렌트의 저서들 역시 번역의 물살을 꾸준히 타고 있다. 올해에는 <과거와 미래사이>(서유경 옮김, 푸른숲)가 출간됐는데, 이로써 아렌트 저서가 8권이 번역출간 됐다. 곧이어 <전체주의의 기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정치(학)의 약속> 등도 번역될 예정이라 하는데, 아렌트 주저가 거의 완간을 눈앞에 둘만큼 번역이 활발한 수 있었던 건 1995년 즈음 아렌트 재조명이 해외에서 이뤄지면서 국내에서도 관심을 끌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이들이 곧 아렌트 번역에 부지런히 뛰어들었던 것. 물론 서유경 경희대 교수 등은 “일본은 아렌트 학회도 있고 저술도 1970년대 이미 다 번역됐다”라면서 국내 상황이 매우 뒤쳐졌음을 질타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2차 연구서번역에는 전공자들도 손길을 뻗치지 못하고 있다. <아렌트와 하이데거> 등 주요 연구서 한둘은 나왔지만, 그 외 중요한 연구가인 벤하비브, 번슈타인, 카노반 등의 연구물들이 국내에 소개돼 아렌트 연구를 한 단계 끌어올리려면 시간을 좀더 두고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작년에 <혁명론>과 <정신의 삶>(1권)이 출간된 데 이어서 아렌트 번역은 "물살을 꾸준히 타고 있다." 개인적으로 반갑다(나는 아렌트의 책들을 준-전공자 수준으로 갖고 있다). 아렌트에 대해서도 많이 주절거린 바 있으므로 새삼 소개하는 건 번잡스럽다. 그녀의 주저들이 곧 마저 출간된다고 하니까 기다려볼 일이다. 주요 연구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언급된 번슈타인은 '리처드 번스타인'을 말하며, <현대정치사회이론>(나남, 1988), <존 듀이 철학 입문>(예전사, 1995),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보광재, 1996) 등의 저작이 번역돼 있다(<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는 번역도 아주 훌륭한 책이다).

 

 

 

 

-철학 쪽에선 재탕삼탕 번역돼 출판시장을 불균형하게 만드는 단골메뉴들이 있는데, 이를테면 쇼펜하우어의 저서들도 그에 속할 테고,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명상록>은 올해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의 역서(숲 刊)가 나옴으로써 “오랜만에 제대로 된 번역이 나왔다”는 평을 얻고 있다.(*천병희 교수는 올해만 해도 여러 권의 역서를 출간했다. 후학들의 귀감이 될 만하다.)

 

 

 

 

-한편, 알려진 명성에 비해 정작 저서들은 별로 소개되지 않아 연구자들의 아쉬움을 사는 사상가들도 있다. 비트겐슈타인도 그런 예다. 최성만 이화여대 교수는 “비트겐슈타인 논문이나 해설서는 많은데 정작 저서들이 많이 번역되지 않고 있다”라며 아쉬움을 털어놓는다. 또 프랑스 철학자 중 “자크 랑시에르나 필립 라부-라바르트의 책들이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는 건 이상하다”라는 의견도 있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책들은 댓 권 정도가 번역돼 있다. 물론 많은 수는 아니지만('노트'들을 제외하면 그가 많은 책들을 썼나?), 소위 '주저'라는 책들은 소개돼 있는 형편이다. 연구서들은 더 많이 나와 있지만. 무엇이 더 번역되어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자크 랑시에르나 라쿠-라바르트('라부-라바르트'는 오타이다) 알랭 바디우, 장-뤽 낭시와 더불어 '데리다 이후'의 프랑스 철학을 이끌고 있는 철학자들이며,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이다. 랑시에르의 책들은 대개가 짧기 때문에 번역/소개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듯하다.

 

 

 

 

-신화학에선 드디어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임봉길 옮김, 한길사) 1권이 번역돼 나왔다. 총 4권인데 내년에 2권이 출간될 예정. 그간 레비-스트로스는 <슬픈열대>, <야생의 사고> 등이 널리 읽혀왔지만, 사실 이들은 그의 사유과정 중에 나온 저서들이며,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이 집약된 가장 중요한 책은 <친족의 기본구조>와 <신화학>이다. <신화학>은 아직 일본에서도 번역되지 못했으며, <친족의 기본구조> 역시 너무 어려운 작업이라 국내에선 번역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 올해 레비-스트로스의 사유들이 담긴 <보다-듣자-읽다>(고봉만 외 옮김, 이매진)도 번역돼 나왔는데, 어쨌든 이러한 주변적 저서들을 맛보며 주요 저서 번역은 좀 기다려야 할 상황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학>이 모두 출간된다면 이 또한 '사건'이 될 것이다. 그의 국가박사학위논문인 <친족의 기본구조>가 그의 주저이긴 하지만, 김형효의 <구조주의의 사유체계와 사상>(인간사랑)에 잘 정리돼 있으며, 일반 교양서로 읽힐 수 있는 건지는 의문이다. 제대로 레비스트로스를 읽자면,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부터 읽어야 한다. 이 또한 상당한 견적을 자랑하는 일이다. 일반 독자들로선 대담 자서전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강, 2003)로 대강 카바하는 수밖에.  

 

 

 

 

-종교학에서는 엘리아데의 역작 <세계종교사상사 1~3>(이용주 외 옮김, 이학사)가 빛을 보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종교학계의 거장 엘리아데의 사상은 국내에 거의 다 소개된 셈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과제는 사상의 ‘다양성’을 맛보여줘야 한다는 것. 그간 국내에선 엘리아데가 우뚝 솟아있었고, 그 주위로 윌리엄 페이든과 니니안 스마트 정도의 저서만이 번역 소개됐을 따름이다. 그러던 차, 올해 처음으로 반갑게 접한 얼굴이 브루스 링컨이다. 그의 <거룩한 테러>(김윤성 옮김, 돌베개)가 출간됐는데, 엘리아데의 제자이면서 그와는 다른 이론적 입지를 구축한 저명한 종교학자임에도 그간 국내에선 번역된 바가 없었던 것. 김윤성 한신대 교수는 “종교학과 학부생들이나 대학원생들에겐 기본 커리큘럼에 속하며, 인문학적 관심사에서도 읽어봐야 할 책인데 그동안 번역상황이 너무 척박했다”라고 덧붙인다. 사실 그의 이론적 입지를 잘 보여줄 수 있는 주저로는 ‘Discourse and the Construction of Society’와 ‘Authority’를 꼽을 수 있는데, 이는 향후 종교학계가 해결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엘리아데의 <세계종교사상사> 출간은 물론 '사건'에 속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 기사에서 개인적으로 유익했던 건 브루스 링컨에 대한 정보. 그가 엘리아데의 제자였다는 것. 확인해보니 링컨은 시카고대학 종교학과에서 학위를 받고 현재 교수로 일하고 있다. 엘리아데는 종교학에 있어서 '시카고 마피아'의 태두였다. 링컨의 책들도 더 번역되기를 기대해본다.  


 

 

 

 

한편, 엘리아데와 마찬가지로 루마니아 출신의 걸출한 염세주의자 에밀 시오랑의 책들이 올해엔 소개되지 않은 게 유감이다(작년엔 <독설의 팡세>가 나왔었다. 원제는 <고난의 삼단논법> 혹은 <고뇌의 삼단논법>). 올해는 들뢰즈 사망 10주년이기도 하지만, 시오랑(1911-1995) 사망 10주년이기도 하다. 이 해가 가기 전에 시오랑에 대해서 몇 마디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05.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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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문화 제국주의


10월 20일 유네스코는 ‘문화 다양성 협약’을 가결시켰다. 이 협약은 1999년 유네스코 총회에서 처음 발의되었는데, 주로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이 미국문화의 범람에 맞서 자국문화를 지키자는 취지에서 제안된 것이다. 생물에 종(種)의 다양성이 있듯이 문화도 민족, 언어, 지역에 따라 그 성격이 다양한 것이고 이러한 다양성은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협약의 취지이다.

그런데 148개의 회원국 중 미국과 이스라엘 두 나라만 반대했다고 한다. 이스라엘이야 미국이 하자는 대로 따르는 나라이니 언급할 필요도 없거니와. 미국이 이 협약에 반대한 사실은 깊이 검토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이 협약에 반대했다는 것은 “각국은 자국문화에 대하여 보호 조치를 취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협약의 규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문화의 획일주의에 반대한다”는 협약의 근본정신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세상 만물은 다르게 태어난다

이 세상 만물은 원래 다르게 태어났다. 같은 꽃이라 해도 빨간 꽃도 있고 노란 꽃도 있다. 같은 나무라 해도 침엽수도 있고 활엽수도 있으며 키가 큰 나무도 있고 작은 나무도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피부가 흰 사람도 있고 검은 사람도 있으며, 잘생긴 사람도 있고 못생긴 사람도 있다. 또 야구를 잘하는 사람도 있고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세상이다.

국가도 마찬가지이다. 지역과 언어와 민족의 풍속에 따라서 나라마다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다양성은 그 나름의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것대로 인정되어야 한다. 유네스코가 우리나라의 판소리와 강릉 단오제를 세계 무형 문화유산으로 지정한 것도 각국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판소리와 강릉 단오제는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적 개성인데 이것을 보호,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렇게 각기 다른 다양한 문화가 공존함으로써 세계의 문화가 더욱 풍성해질 수 있는 것이다.

영화만 봐도 그렇다.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과 장예모 감독의 「붉은 수수밭」이 세계인의 주목을 받은 것은 각각 한국과 중국의 독특한 문화적 개성을 표현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지금 미국의 헐리우드에서 제작되는 영화 편수는 전 세계 영화의 10분의 1에 불과한데 이 10%의 미국 영화가 세계 영화 수입의 85%를 장악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각국의 스크린 쿼터 제도에 대하여 미국이 집요하게 압력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국가는 문화적 주권을 가지고 있다. 모든 국가는 헐리우드식의 획일적 영화문화에 맞서 자국의 문화를 보호할 권리가 있다. 그렇게 해야 「취화선」이나 「붉은 수수밭」같은 개성적인 영화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다양해서 가치 있는 것, 다름을 인정해야

다시 말하거니와 나라마다 문화는 다양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모든 나라의 문화가 획일적이면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각국의 문화가 다르다는 것을 다름으로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문화적 개성을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국의 문화를 타국에 강요한다면 이것은 ‘문화 제국주의’ 또는 ‘문화 전체주의’에 다름이 아니다.

미국 대통령 부시의 얼굴은 ‘중앙집권형’이다. 즉 두 눈과 코가 얼굴 중앙에 몰려 있다. 자기의 얼굴모양과 마찬가지로 부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세계문화의 구축을 기획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기획이 ‘문화’와는 거리가 먼 ‘야만적’ 기획이라는 사실을 미국과 부시는 늦기 전에 깨닫기 바란다.


글쓴이 / 송재소
·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 저      서 <다산시선> 
               <다신시연구> 
               <신채호 소설선-꿈하늘> 
               <한시미학과 역사적 진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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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문화혁명, 한류(韓流)와 일류(日流)


얼마전 일본의 후지TV와 인터뷰를 했다. TV는 원체 소질이 없어 잘 나서지를 않는 편인데 그 취지가 흥미로워 수락했다. 요지는 이렇다. 왜 일본소설이 한국소설시장을 석권하고 있는가?

리포터는 야마다 아까네(山田あかね)라는 40대 후반의 일본 여성작가다. 그녀는 TV쪽에서 오래 일했다. 1995년에 등단해서 작년에 첫 장편 『베이비 샤워』를 출간했다. 그런데 자신의 처녀장편을 번역하겠다는 한국쪽의 연락을 받고 너무나 놀랐다는 것이다. 무라까미 하루끼(村上春樹) 같은 유명작가라면 모를까 무명에 가까운 일본작가의 작품을 과감하게 선택하는 한국의 사정에 큰 흥미를 느끼게 되어 그 방면을 조사해 보니 놀랍게도 현재 한국에서 일본소설이 대유행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차, 이 문제를 다루어 볼 필요에 직접 이렇게 나섰다, 대충 이런 얘기다.

통역을 맡은 북코스모스의 김수경씨도 거든다. 하루끼붐도 요즘은 옛날일이란다. 요즘 한국소설시장에서 일본소설은 오히려 젊은 작가의 새 작품들이 더욱 인기라는 얘기다. 김수경씨가 아는 여성작가가 있는데 그녀도 친구들이 자기 소설은 읽지도 않고 최근 유행하는 일본소설 이야기만 해서 난감해 한단다.

한국 소설계는 일류(日流)가

나도 내심 저으기 놀랐다. 일본소설을 비롯해 외국소설들이 한국소설시장에서 강세라는 것을 듣고는 있었지만 이 지경에 이를 줄은 몰랐던 터다. 뒤에 어느 자리에서 만난 탁석산씨에 의하면 요즘 학생들이 아는 한국문인의 상한은 김승옥(金承鈺), 그 이후 한국문학에 대해서는 까막눈 신세란다. 김승옥도 알고 싶어 안다기보다 교과서에 실려 있는 덕분인데, 학생들이 즐겨 찾아 읽는 작품들은 거의 일본소설이라니, 한국의 대중문화가 일본에서 한류(韓流)로 자리를 잡고 있는 사이, 한국소설계에는 일류(日流)가 채를 잡고 있는 것이다.

아다시피 최근 출판계, 특히 문학분야는 전반적으로 독자의 격감을 실감하고 있다. 문학출판의 중심은 소설이다. 때로는 최영미(崔英美)처럼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된 경우가 없지 않지만 이는 예외적인 경우이고 문학시장을 주도해 온 것은 소설이다. 그런데 한국소설을 변함없이 지지해 온 독자들이 지금 급속히 분해중인 것이다. 그 동안 이 현상을 영상언어의 발달에서 원인을 찾아왔다. 영화 드라마 그리고 IT의 발달로 독서시장이 위축일로를 걸어왔던 게 사실이다. 이처럼 독서층이 얇아져 가는 추세 속에 그 남은 파이를 일본소설이 점유해 들어가고 있다니 한국소설은 현재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시달리는 형국이 아닐 수 없다.

왜 한국의 젊은 독자들은 일본의 젊은 소설에 매료되고 있는가? 이는 명백히 한국소설에 대한 거절이다. 독자들은 한국소설의 무엇에 대해 반란하고 있는가?

이념과잉의 80년대 소설에 대한 반동으로 90년대 이후 한국의 작가들은 탈사회성으로 탈주하였다. 서사의 붕괴 속에 소설의 재미가 적어졌다. 일본소설의 강세를 90년대 이후 가속화한 탈사회적 한국소설에 대한 부정의 연장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일본소설은 한국보다 한술 더 뜬다는 점에서 이런 해석은 한계가 있다. 가라따니 고오진(柄谷行人)이 하루끼를 ‘학생운동세대가 흘러든 패션’이라고 비판한 데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일본소설은 일찍이 고도산업사회 안으로 포섭되었다. 그렇다면 최근 한국독자들의 일본소설 경도는 사회성이 강한 한국소설의 전통 전체에 대한 부정이라고 볼 수도 있다.

동아시아 공통의 문화를 재구축할 호기 아닐까

한국의 일류와 일본의 한류는 어쩌면 함께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의 한류가 전통적인 일본근대문화 전체에 대한 일본인의 거절이듯이 한국의 일류에도 한국의 현대문학 전체에 대한 강렬한 부정이 숨쉬고 있는 것일까? 중국의 한류까지 고려하면 현재 동아시아에는 일종의 문화혁명이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문화에 대한 욕구가, 차단되었던 이웃나라 문화 또는 문학에 경도로 분출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지금 진행되는 동아시아 문화혁명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새로운 접근이 절실하다.

동아시아에서 드물게도 문화교차 현상이 착종되고 있는 경향을 제대로 탄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에서 각 국민문화를 쇄신하면서 동아시아 공통의 문화를 재구축할 호기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꿈도 꾸게 된다.


글쓴이 / 최원식
· 인하대 문과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 서울대 국문학박사
· 민족문학사학회 공동대표
· 저서 : 한국의 민족문학론
           한국 근대소설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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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의 조건: 스웨덴의 경우


어려운 이웃들에게 복지 혜택을 늘리고, 경쟁에서 뒤떨어진 사람들을 위해서 사회 안전망을 더 넓고 튼튼하게 하자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무엇이 바람직한 복지이고 지속 가능한 사회 안정망인지에 대한 견해 차이에 있을 뿐이다.

사회 복지 지출이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어떤 나라는 복지병으로 경제 성장의 동력을 잃기도 했으나 어떤 나라는 성장과 복지의 조화가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장론자들은 전자의 경험을 강조하고, 분배론자들은 후자의 성공담을 내세운다. 분배론자들이 성공적 복지 국가로 흔히 예시하는 나라가 스웨덴이다. 스웨덴은 복지비 지출을 많이 하면서도 안정적 성장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스웨덴의 경험을 살필 때 유의해야 할 것은 복지비 지출의 구조와 재원조달의 원천이다.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에 중점을 둔 복지비 지출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복지비는 실업수당, 기초 생계비 지원, 노인연금 등이다. 그런데 스웨덴의 경우는 다르다. 스웨덴 복지 지출의 중점은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에 있다. 공교육, 직업 전환에 필요한 재훈련이나 실업자에 대한 직업 알선, 공중 보건, 공공 유아원 시설 등에 대한 지출이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스웨덴 복지 정책의 특징이다. 이러한 지출은 노동생산성과 노동의 이동성, 여성의 노동 참여율 등을 제고시킴으로써 경제성장에 도움을 주는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지출을 위한 비용은 어떻게 조달했는가. 스웨덴의 세입구조를 보면 근로소득세, 소비세 등에 높은 세율을 적용하고 있으며, 법인소득, 배당, 이자, 재산 등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세금을 부담시키고 있다. 이러한 세입구조는 세금이 기업활동에 주는 부담을 가볍게 해주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 세입구조 또한 성장지향형인 셈이다.

이러한 복지비 지출 내용과 세입 구조에 대해서 스웨덴의 노조(LO)는 반대의사를 표시했고 지배 정당인 사회민주당(SAP) 또한 불만스러워 했다. 그러나 해외로의 자본 이탈(Capital Flight)이 가져올 경제에 대한 파괴적 영향을 더욱 중요하게 인식한 스웨덴 국민들은 이러한 선택을 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현명했다.

일하는 사람에 더 큰 혜택을 주는 생산적 복지

70년대에 스웨덴의 노조연맹은 기업 이윤에 대해 중과세해서 그 세입 자금으로 근로소득자 기금(Wage-earner's Fund)을 조성하여 기업들을 인수하려는 시도를 했을 정도로 강했다. 또한 스웨덴의 장기 집권당은 사회주의적 성향의 사회민주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지비 지출이나 세입구조를 설정함에 있어서 기업활동을 지원하고, 노는 사람보다는 일하는 사람에 더 큰 혜택을 주는 내용을 선택했다. 바로 이것이 생산적 복지 아닐까.

스웨덴 정부는 대기업들의 경영권 안정을 위해서 황금주를 인정하고 있고, 소유 집중을 문제 삼고 있지도 않다. 대기업이 국유지를 활용하여 사이언스 파크를 조성하는 것을 허용했고, 그 효율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하여 그 단지에 공과대학을 지어주기도 했다. 그래도 특혜논란은 없다. 스웨덴의 은행들 또한 유동성 위기에 처한 기업들을 구하는데 적극적이다. 이것이 복지국가 스웨덴의 사회 분위기이다.

성장지향형 복지제도와 기업지원형 사회 분위기가 성장과 복지의 병행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인 것이다. 이러한 원동력의 정착 없이 성장과 복지의 병행은 어렵다고 보며, 이런 관점에서 우리 사회의 시대적 상황과 집권 세력의 정책 이데올로기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요구된다.


글쓴이 / 김광두
· 서강대 교수 (경제학)
· 미국 하와이 주립대 경제학박사
· 한국은행,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위원  
· 국제경제학회 회장(현) 
· (사)국가경쟁력 연구원 원장(현) 
· 저서: <대외지향형 경제의 정책과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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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그러워야 뭇 사람을 얻는다

 

유교주의자였던 다산은 최종 목표로 언제나 요순주공(堯舜周孔)의 삶과 정치철학을 현실에 실현하려는 욕심을 갖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오학론(五學論)」이라는 논문을 읽어보면 자신이 살아가던 시대에 가장 큰 위세를 지닌 성리학·술수학·문장학·훈고학·과거학 등의 폐해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요순과 주공(周公)과 공자(孔子)의 철학에는 접근도 할 수 없다는 주장을 폈던 것입니다.

공자는 고위직에 있으면서 너그럽지 못하거나 예(禮)를 차리면서 공경스럽게 하지 않으면 무얼 볼 게 있겠느냐 하였고, “너그러우면 뭇 사람을 얻는다”(寬則得衆)라는 훌륭한 격언을 남겼습니다. 다산은 이런 공자의 말씀에 감동하면서 고위공직자들이 실천해야 할 인품으로 ‘너그러움(寬)’을 큰 덕목으로 강조하였습니다. (『목민심서』 율기(律己) 칙궁(飭躬)조)

일반 사람들은 높은 지위에 오르면 ‘매서움(猛)’을 숭상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훌륭한 정사(政事)를 펼 수 없다는 것이 다산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시경(詩經)』에 나온, “그대의 위의(威儀)를 공경히 하여 유가(柔嘉)하지 않음이 없도록 하라”(敬爾威儀 無不柔嘉)라는 구절을 반복해서 인용합니다. 유(柔)는 편안함(安)의 뜻이고 가(嘉)는 착하다(善)는 뜻으로 유순하고 착한 모습이 용맹스러운 모습보다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관(寬)과 유가(柔嘉)를 풀이하면서 마음은 너그럽게, 용모나 모습은 유가하게 지녀야지 사나웁거나 매서운 모습을 지닌다고 법이 제대로 집행되고 아랫사람들이 복종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을 한 것입니다. 

남의 잘못에 혹독한 비판이나 퍼붓고, 법집행에 가혹함만 보인다고 세상이 제대로 가지 않는다는 경고를 내렸습니다. 오히려 너그럽게 관용을 베풀고, 유순하고 착한 태도와 모습일 때 더 큰 위력으로 잘못을 바로 잡고 악한 짓을 못하게 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한 사람은 반드시 구속시켜야만 직성이 풀리고 관용을 베풀면 비난하는 요즘의 세태에서 『목민심서』의 이야기는 우리 마음에 너그러움을 심어줄 수 있으리라 믿어봅니다.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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