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자 X의 헌신 -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현대문학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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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추리소설에서는 범인이 나중에 밝혀지는데, 이 추리소설은 초반부터 사건의 발생, 과정을 통째로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마치 현장을 지켜보는 ‘당신도 공범’이란 듯이 모든 것을 펼쳐보인다. 어떻게 완전범죄로 몰고 가느냐, 알리바이를 어떻게 성립하고, 해피하게 범행을 마무리 짓느냐가 주된 내용인 것처럼 진행된다. 그리고 결국엔 반전과 함께 용의자의 ‘헌신’의 실체가 밝혀지는데…

스릴러 영화에서도 자주 보여지듯이 책 전체의 분위기는 초반에 숨어있다.
57p 유가와 마나부가 처음 등장하는 ‘체스 씬’.
이 책은 하나의 체스게임에 가깝다. 상대의 수를 읽고 다음 수를 생각하는 과정의 연속인 것이다. 작가가 만든 문제와 답의 덫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독자 자신의 모습을 즐길 수 있다. 이 책에 나오는 두 명의 머리 좋은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매력적이다.

솔직히 마무리는 납득할 수가 없다. 알리바이가 있고,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논리적 연결성만으로 수 많은 가능성을 배제한 체 용의자를 좁혀서, 아니 초반부터 지목하고서 ‘끼워맞추기’ 수사를 하다니… 마지막에 그 논리적 연결고리를 증명하더라도 그것을 답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무리하게 환경조건을 제거했다. 그것은 느슨한 논리임을 감추기 위한 트릭임을 부정할 수 없게 한다. 그래서 이 소설은 그 느슨함을 메우기 위해 감성과 육감을 차용하게 된다.
해결을 맡은 천재 유가와와 문제를 맡은 천재 이시가미는 캐릭터 성격상 상당한 논리와 추론의 달인들 아니던가. 초반에 보여주었던 치밀한 지적 대결과 다르게 후반에서 급격히 그 논리선상을 벗어난다. 동정과 사랑이라는 인간적 고뇌가 이성을 넘어서는 순간에 이미 이 소설은 비극을 예고한다.

한 여자의 비극, 한 남자의 비극,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한 남자의 슬픈 시선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아마도 유가와는 헌신의 실체를 목격한 최초의 목격자로써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눈을 한탄하고 있을지도…

 

ps. 책에 오타가... 오타가 나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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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6-08-17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ps에 더 눈길이 가는 까닭은...
(책에 나오는 오타 땜시 늘 기분나쁜 비연의 심정과 같은 듯 하여..ㅠㅠ)

라주미힌 2006-08-17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꼼꼼하게 읽는 편은 아닌데도 보이더라구요 크흑.
이야기 자체만으로는 시간때우기로 좋습니다. 후다닥 읽혀요.
 
차도르를 벗겨라
베흐야트 모알리 지음, 이승은 옮김 / 생각의나무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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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지 않는 자는 내게 속한 자가 아니다. 알라여!"

문화의 다양성과 특수성으로 구분 지을 수 있는 기준은 명확하지 않다. 개를 먹건, 벌레를 먹건, 벗고 다니건, 목에 쇠스랑을 끼고 다니건 간에 그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나름대로의 전통과 존중 받아야 할 가치를 가지고 있다. 지역적 특수성, 역사적 정통성은 외부의 시선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권에 관해서는 문제가 다르다. 인간의 생명, 존엄, 평등 등의 기본적인 정신은 최소한 불변의 가치를 지니고 있고, 그것의 보존을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누구만을 위한 것이 아닌 모두를 위한 것이지 않은가..

이 책은 이란의 두 여성의 삶을 통하여 차별과 억압의 실태를 고발한다. 마치 한 여성이 거울 보고 말하듯 두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는데, 양지와 음지처럼 양극의 상황 대비가 묘한 호소력과 카타르시스를 남긴다. 저자는 비교적 개방적인 가정에서 풍요로움의 혜택을 받고 성장한다. 고등교육을 받아 변호사가 되었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회를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반면에 빈곤한 가정에 태어나 이슬람 근본주의에 돌돌 말아진 것 같은 삶을 비틀어 짜듯이 살아가는 ‘타라’는 극단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이 두 여성은 국선변호사와 피의자라는 관계를 초월하여 ‘여성’이라는 공감대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해한다. 그러나 그 한계 또한 인지하고, 도전한다. 과연 둘은 서로 다른 삶을 살았을까?

이 책은 호소문에 가깝다. 저자의 글은 절박한 인권의 낭떠러지를 경험하게 함으로써 일종의 SOS를 세계에 알린다.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라고 말하려고 한다. 인종, 성, 젠더, 민족, 국가, 계층 간에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차별과 억압은 먼 곳의 얘기가 아니라고 한다. 중심에서 주변으로 주변에서 딴 세상의 이야기처럼 치부하고 있을 뿐이다.

두려움, 공포에 치를 떨게 하는 그들의 폭력적인 정치적 의도에 질려 버린다. 왜 제목이 ‘벗어라’가 아니라 ‘벗겨라’일까. 그들에게 질문하고 답을 기다리는 것은 구경꾼의 시선처럼 가혹해서가 아닐까?

“나는 이란을 떠나온 이후로 한 번도 되돌아간 적이 없다. 나는 여전히 두렵다. 여성의 기본적인 권리를 무시하는 권력의 손아귀에 잡힐까봐서이다.”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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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6-09-23 0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권의 문제라고 이해하면 참 좋은데 아직도 명예살인 등을 문화상대주의라는 이유로, 방관시 하는 분위기가 있어 참 씁쓰름 합니다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줘야 하는 문제인데 말이죠

라주미힌 2006-09-28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이죠...

나그네 2006-10-21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관을 넘어서 옹호하기까지하니 문제죠
무조건 서구의행동은 나쁘고 소위제3세계의행동은 옹호되야한다는 그런 경직된사고가 화가납니다.
 
꿈꾸는 책들의 도시 1
발터 뫼르스 지음, 두행숙 옮김 / 들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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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판타지 모험극인줄 알았더니, 출판산업, 독자, 작가와의 관계에 대한 총체적 풍자극이었네.
출판된 책, 출판될 책에 미치는 환경의 지배력을 막강하게 행사하는 부흐하임의 군주 ‘스마이크’가 ‘자본’이 아니면 무엇일까..

“문제는 돈을 벌기 위해서는 흠 없는 훌륭한 문학은 필요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평범한 것, 덤핑 책, 파본, 대량 서적들이란 말이다. 많이, 점점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이다. 점점 더 두꺼우면서도 내용은 별 것 없는 책들 말이다. 중요한 건 잘 팔리는 종이지 그 위에 쓰여 있는 말들이 아니거든.” 227p 스마이크의 말

‘루모의 어둠 속의 기적’에서는 머리 좀 쓰는 상어구더기인줄 알았더니, 되게 나쁜 놈으로 나온다~! 나쁜 놈!!!

순수한 열망으로 (엄청난 모험, 자본의 위험 또는 매혹을 뚫고서)작가의 길을 걸어가려는 주인공 공룡은 저자(발터 뫼르스)의 모습을 얼핏 보여준다. 순수창작에 대한 고뇌가 곳곳에 드러나는 것을 볼 때마다 안쓰럽기까지 하다.

특히 책 수집광의 두 부류, 부흐링과 책사냥꾼은 열광의 두 가지 면, 중독성과 파괴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오름, 그것은 등 뒤에서 한 걸음 너를 놓칠 수도 있고, 번개 치듯 네 몸속으로 파고들거나 혹은 네 뱃속을 뒤틀리게 할 수도 있다. 너의 머릿속에서 뇌를 잡아 뜯어냈다가 다시 집어넣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한밤중에 네 가슴속에 들어와 앉아 네게 끔찍한 악몽을 꾸게 한 다음 거기에서 다시 네 소설이 구상되어 나오게 할 수도 있다. 나는 그것을 느꼈다. 오름을.” 316p

오름, 이것은 ‘독서삼매경’을 서양식으로 부른 것일 테고… 오르가즘의 변형어라는 느낌이 든다.

이렇듯 상징과 은유, 풍자와 상상이 넘실거리는 책이다. 다른 분의 리뷰를 보니, 이 책에 나오는 책과 인용문 또한 패러디가 있다고 하는데 나는 무식해서 잘 모르겠다.

작가는 현실을 탐욕과 물신, 파괴적인 소유욕이 지배하는 또 다른 세상을 모방하는 데에 재주가 있는 것 같다. 그가 그림자의 제왕이 되어 잃어버린 균형, 원래의 의미를 찾기 위한 힘에 갈망하듯 독자는 꾸준하고도 의식있는 독서를 지향해야겠다. 잘 팔리는 책에 휩쓸리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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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르수 우잘라 - 시베리아 우수리 강변의 숲이 된 사람
블라디미르 클라우디에비치 아르세니에프 지음, 김욱 옮김 / 갈라파고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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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뭘까?”
“저기 별 떴다. 보면 된다.”
“달은 대체 뭘까?”
“눈 있는 사람, 달 본다. 저게 달이다.”
“하늘은 어떤 의미일까?”
“환할 땐 파랗다. 캄캄해지면 까맣다. 비 올 때 흐리다…
다 볼 수 있어. 근데 대장은 맨날 묻는다. 대장 눈 나빠?”
122p

의미가 있는 곳에 시선이 간다. 시선이 가는 곳에 의미가 있다. 목적을 위해 인류가 나아가는 방향은 언제나 옳았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기술의 진보는 늘 전면에 나섰고, 성장과 팽창의 논리로 저항을 잠재웠다. 합리성, 그 무엇이라도 삼켜버릴 듯한 무한한 욕망 앞에 보이는 것들은 무엇이든 침묵을 강요당했다. 억눌린 소통은 결핍을 낳고, 결핍은 더 큰 욕망을 부르고 있다.

악의 순환… 무정지 시스템 속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은 그래서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과 문명이라는 신앙에 광신적으로 집착하는 지금을 불행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끊임없는 계산이 요구되는데 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인간과 인간이 만나는데도 계산적이라고 생각해 보라. 단계가 많을수록 층위가 깊을수록 본래성은 멀어지게 마련이다.

이 복잡한 세상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그것은 문명이라는 자기기만적 오류에 기인한다. 걷는 것 보다는 2만 여개의 금속세포로 구성된 기계를 선호하고, 자연 ‘풍’보다는 전기 ‘풍’을 원함으로써 문명 스스로를 드러내려고 한다. 세련됨, 자연과 멀어짐으로써 더욱 문명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위대한 착각’.

편리함, 이것은 불편함을 제거하기 위해 그 무엇으로부터 착취하는 것이다. 자연에게서, 동물에게서, 사회적 소수에게서, 역사의 변방에서…
착취가 언젠가는 고갈을 불러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을까. 자연과의 소통을 구걸해야 하는 문명인들의 미래를 알고는 있을까.

“나 이제 나이 58개야. 눈 나빠. 잘 안 보여. 사향사슴 쏴. 루바슈카 안 맞아. 나무 쏴. 안 맞아. 중국 사람. 이제 나한테 사슴뿔 안 사. 나, 겨울에 할 거 없어. 이제 뭐하지, 대장?”
272p

데르수 우잘라가 노안으로 고민하는 장면에서는 서글픔이 흐른다. 숲사람인 그가 ‘문명인’과 닮지 않았기에 그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사라져 가는 것들의 슬픔을 안고서 사라져 갈 운명…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은 금세 공중으로 퍼져 사라지지만, ‘더러운 물’(잉크)이 담긴 병에서 나온 말은 종이를 타고 멀리까지 간다. 337p

한 인간의 삶을 엿봄으로써 얻는 것은 말보다는 가볍지는 않을 것이다. ‘더러운 물’에서 나온 말이 이미 100년이 지나 이곳까지 흘러왔으니까.

Ps. 이 책은 연해주를 탐사한 20세기 초의 기록이다. 탐사라 하면 아마존, 남북극, 사막, 초원을 연상케 하는데,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의 ‘역사’와 ‘문화’를 살갑게 접할 수 있다는 점이 반갑다.
탐욕스러운 조선인도 까메오로 출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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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오드리 설킬드 지음, 허진 옮김 / 마티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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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역사'와 '역사 속의 개인'의 관계를 유기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특정 집단에 의해 왜곡되었던 과거를 '역사 바로 세우기', '인물의 재평가' 등으로 재정립하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요구이다. 왜냐하면 거짓으로 점철되고, 왜곡으로 얼룩진 진실은 비정상적인 관계를 지속시키고, 우리의 미래를 변형시키기 때문이다. 가령 친일파 후손이 일제 때 수탈했던 재산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라던가,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했던 민중들의 억울함 같은 것을 보아도 과거의 문제는 오늘날의 문제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물론 한계는 분명히 있다. 현재는 ‘그 때’를 재현할 수 없으며 ‘그 때’를 기억하는 사람들조차도 그 기억에 대한 객관성을 확보하기는 힘들다. 객관적인 사실에 접근해야 하지만, 객관적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진실은 과연 누구 편을 들어줄 것인가? 역사는 기록되었지만, 그 기록은 개인의 역사를 담고 있지 않은 경우도 허다하지 않던가? 과오를 역사를 통하여 본다면 어떤 기준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재평가는 그렇기 때문에 조심스러워야 하며, 단정지을 수 없는 불가지의 영역에 있음을 전제해야 한다고 본다. 정황과 심증만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은 없다. 단지 접근할 뿐이다. 접근방법의 개방성과 포괄성만이 우리를 진리로 이끌 것이다.

그 부분에 있어서 ‘좀’ 억울함을 호소할 만한 여성이 있다. 인종학살, 전쟁, 대중동원의 시대에 영화감독, 배우로 이름을 날렸던 ‘레니 리펜슈탈’.
"순간의 분위기에 완전히 몰입해버리는 열정, 인간의 육체를 보는 감식안, 호화로운 장관과 운동 경기에 매료되는 적극적인 근성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조건과 상황이 주는 즐거움을 그대로 영감으로 받아들이는 재능이야말로 진정한 그녀의 재능이었다.” 91p
그녀는 재능이 뛰어났다. 정열적이고, 거칠게 없었다.
"레니는 자신의 필터 없이 다른 사람의 견해나 지시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보다는 자신의 본능적인 감각을 굳게 믿으며 늘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114p
인간과 자연의 힘에 열광했고, 그 아름다움을 ‘산악 영화’, ‘다큐멘터리’로 그의 재능을 세상에 알렸다. 문제는 히틀러와 괴벨스의 정치적 수단으로써 그녀의 재능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프로파간다 영화로 널리 알려진 ‘의지의 승리’는 그녀의 전생애에 ‘나치’라는 꼬리표를 달게 해주었다.
괴벨스는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모든 스타들 중 그녀만이 우리를 이해한다.’” 236p


"대중의 수용력은 매우 제한적이고 그들의 지식은 아주 적다. 반면에 망각의 힘은 어마어마하다. 그러므로 효과적인 프로파간다를 위해서는 요점을 단 몇 가지로 간추려야 한다. 또한 요점은 슬로건의 형태로 만들어서 대중 한 명 한 명이 모두 당신이 이해시키고자 하는 내용을 이해할 때까지 그 슬로건을 되풀이해야 한다.” 257p
어찌됐든 그녀의 뛰어난 능력은 나치의 프로파간다로 훌륭하게 작용했다.

"레니는 강한 인상을 받으면 누구든 어느 때든 그 사람을 직접 만나냐 직성이 풀렸다. 일단 직접 만나서 대화를 시작하면 레니는 그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었고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레니는 이렇게 직접 부딪히는 방법을 통해 스스로에게 기회를 만들어주고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나간다고 믿었다.” 153p
어찌됐던 그녀의 열정은 그녀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이 책에서는 역사적 서사를 서술하고 과정을 살펴본다. 그것에 당사자들의 해명, 당대의 매체들의 반응, 대중들의 평가를 싣고 있다. 이것은 그동안 레니 리펜슈탈에게 달려있던 부정적인 평가에 다른 요소가 개입되지 않았는지, 얼마나 공정했는지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저자는
리펜슈탈은 거의 전 세계적인 공모에 의해 역사의 각주로 쫓겨났다. 프로파간다와 예술을 구분할 방법이나 구분하려는 의지는 어디에도 없는 듯했다. 그것은 공평한 일이었을까?” 35p
이러한 의문을 갖고서
"히틀러 정권과 같이 악명 높은 정권의 경우에는 선입견 없이 냉정한 평가를 내리기는 불가능했다. 그러한 예술이 표상하는 내용에 대한 혐오감, 또는 악명 높은 정권과 연루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또는 예술을  선동하던 무자비한 사람들에 의해 사상과 생계를 희생했던 사람들에 대한 존경 때문에 당시의 예술을 진지하게 연구할 길은 막혀 있었다.” 564p
라는 주장을 하며, 레니 리펜슈탈에 대한 정치성과 예술성을 분리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공과 업에 대한 평가를 좀 더 이성적으로 접근하자고 제안을 한다. 그것은 독자의 판단이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판단에 달렸다고 독자에게 선택권을 쥐어준다.

내가 판단하기로는 레니는 나치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도 않았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열정과 재능을 쏟은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잘못된 세상에 태어나 사회보다 자신에게 더 많은 시간과 애정을 가진 것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영화사에 남긴 예술성은 인정해 주되 정치적, 사회적으로 방관했던 도적적 책임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궁극적으로는 그녀 또한 피해자이다. 히틀러의 광기 속에서 그녀의 재능과 기회는 제한적이었으니까. 그녀의 예술적 과잉이 히틀러의 야욕에 이용되었다는 점이 그래서 안타깝다. 하지만 그녀는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그것으로 명성을 얻었다. 몰랐다라는 것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 역사의 무게 아니던가.


"예술은 전체주의 정권의 초기 목표다. "
"예술은 예술가를 넘어선다, 정치와 예술은 혼동 되어서는 안 된다.’"

아이러니한 위의 두 문장이 레니 리펜슈탈의 표상이다.
책 제목은 이렇게 바꿔도 될 듯 싶다.
레니 리펜슈탈의 ‘위험한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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