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누의 집 이야기
이지누 지음, 류충렬 그림 / 삼인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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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이야기를 한다고?
담, 마당, 지붕, 마루, 부엌, 창문, 우물, 변소 등의 용도 외에 더 알아야 할 것이 과연 있을까?
건축관련 서적도 아닌데, 무슨 할말이 더 있겠어.
현대인에게 오직 실용성과 편이성만을 강조하는 요즘에 구들과 벽창호, 기와를 이야기 한다니 어떤 의미가 있지?
홈 네트워크, 홈 시큐리티, 홈 오토메이션, 집안 어디서든지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디지털화 된 유비쿼터스 주거 시대가 곧 다가오는데 왠 복고풍!
어차피 인간의 주거문화는 기술과 환경에 따라 변하기 마련 아닌가 … 라고 생각했었다.
과거에 대한 향수에 젖어 있는 듯한 이 책의 구성과 내용에 의문을 가질 만한 부분이다.

다분히 이 책은 과거 지향적인 면이 있다. 유년의 추억, 친환경적인 생활, 선인들의 지혜가 담겨 있는 것들을 보여줌으로써 ‘과거엔 이랬으나 요즘은 그렇지 않다.’라는 식으로 전개된다. 무엇이 좋다, 나쁘다를 판단하는 것은 접어둔다. 다만 현재의 삶에 의문을 던질 필요는 있다고 본다. 읽으면서 많이 놀랐다. 풍수지리에 따른 배치, 삶의 철학이 담긴 생활의 소소한 모습들에서 이상적인 삶의 모습들이 언뜻언뜻 보였기 때문이다.

자연과 호흡하고, 가족간의 친밀함을 유지하며, 이웃과의 온정이 오고 가는 모습들은 ‘기술’이 줄 수 없는 너머의 영역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인간이 살아가는 집이 삶의 질에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것을 어떻게 만들고 결정해야 하는가에 대한 중요성을 점점 잊어간다.
기술이 주는 편리함은 인간에게 새로운 구속력을 강제하여, 스스로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한다. 현대인의 질병, 비만은 그 대표적인 현상일 것이며, 웰빙은 그것의 대안으로써 붐이 일었었다. 새집증후군처럼 인간에게 오히려 해를 끼치는 집에서 살아야 한다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획일화 된 주거문화의 대표격인 아파트가 신도시라는 투기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집은 또 한번 변질 되었다. 집에 사는 것이 아니라, 집에 묶여 살고 있다니… 10년을 모아도 자기 집을 구하기 힘든 이 세상에 집은 경쟁적으로 인간을 속박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고 만들어 가는 집이란, 진정한 의미로써의 집이란 무엇일까. 이 책은 집을 해부하듯이 보여주려 한다. 그 의미는 유효하며, 우리 삶의 질적 향상에 대한 고민과 방향을 잡아가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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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7 1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5-13 1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진과 유진 푸른도서관 9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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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 아동 성범죄에 관한 뉴스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범죄의 심각성보다는 수치심(?) 또는 정절(?)에 대한 병적인 집착 때문에 감추었던 예전과 사뭇 달라진 모습들이다.
이전에는 무관심이나 부모의 그릇된 가치관으로 인해 그대로 방치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넘어가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어야만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보 제공, 경각심 같은 계몽적 성찰에 있다. 전문가 집단의 도움을 받아 적절한 방안을 모색하고, 피해자의 적극적인 대응을 이끌어내는 것은 건전한 사회를 위한 기초적인 노력이다. 
이제는 피의자의 부모들이 아이들이 받았을 정신적 외상의 심각성 및 그에 맞는 적절한 치유와 관심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고, 가해자의 재범 위험성을 사회적 이슈화하여 또 다른 피해자를 막기 위해 적극적인 대응을 하고 있다.

이 소설은 성추행으로 정신적 외상을 겪은 아이에 관한 성장 소설이다. 성장하는 아이들이 겪는 심한 내적 갈등을 아이들의 시선으로 섬세하게 묘사하였다. 작위적인 설정(동일한 사건을 겪은 동명이인), 식상한 구도(두 명의 화자를 번갈아 이야기하는)가 인상적(?)이지만, 무거운 주제인 아동 성추행에 관한 사회적 문제제기를 재미있으면서도 호소력 있게 이야기 하는 것을 장점으로 들 수 있겠다.
또 다른 장점을 들자면, 이 소설의 두 주인공의 캐릭터가 활력적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말투, 그들의 고민, 학교 생활 등 세대차를 느낄 수 있는 것들의 간격을 좁히기 위한 작가의 세심함을 엿볼 수가 있다. 어쩌면 내가 겪었던 과거일 수도 있지만, 작은 차이일지라도 한껏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 좋았다.

상처 받은 자들에게 치유란, 관심과 정성을 넘치게 주는 것이다. 소설 속에 비유된 '깨진 그릇'처럼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깨지기 쉬운 그릇을 다루듯이 아이들 곁을 지켜줘야 하는 것이 어른들의 의무가 아닐까. 유진과 유진, 같은 이름, 다른 사람이지만 하나의 목소리로 어른들의 반성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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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4-30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 읽고 싶은데 아직 못 읽었어요.

라주미힌 2006-04-30 14: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하늘바람님이 좋아하실 책인데...

석란1 2006-05-07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적극적으로 추천합니다. 우리 가족은 돌려가며 다 읽었습니다. 중3아들 중1딸이 참 괜찮다고 친구들에게도 많이 권하더군요.

반딧불,, 2006-05-08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의 입장에서 이 책은 어떻던가요? 궁금합니다.
이런 상투적인 리뷰 말구요. 어떤 점이 좀 그렇더라 하는 점 말여요.

라주미힌 2006-05-08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남자의 입장이란 것이 어떤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위에 쓴것처럼,
작위적인 설정(동일한 사건을 겪은 동명이인), 식상한 구도(두 명의 화자를 번갈아 이야기하는)가 인상적(?)이었습니다. (3년전에 읽었다면 어땠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다지 새로운 얘기를 했다고 볼 수도 없지만, 얼마나 편안하게 이야기 하는가가 주요했다고 봅니다 저자가 학생들하고 많이 이야기를 나눠봤구나라는 느낌은 받았어요. 없는 얘기가 아니라 진짜 얘기.
저처럼 학생들하고 대화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아이들 생각도 엿볼 수도 있고.. 그런면은 좋았어요.

반딧불,, 2006-05-08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점은 한계지요. 그래도 참 잘 쓴 책이긴 했어요.
표면으로 떠오르게 한 점도 그렇구요.
이금이님이 아니면 절.대. 못 건드릴 주제라고 해야할까요??
아쉽지만...
제가 묻고 싶은 점은 님도 어느 만큼의 동의를 하게 되는 면이 있는가거든요.
여성의 문제로만 몰리는 면이 강하니깐요.
하하..죄송. 이 책 읽으면서 계속 궁금했었어요.

라주미힌 2006-05-08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남성의 문제도 여성의 문제도 아니라고 봅니다. 어른과 아이의 문제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원하는 대답이 아닐수도 있을거에요 ^^; 소설 속의 어른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아이들과 소통을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성별 구분의 의미가 없다고 판단되거든요.
이런 주제를 다룬 책이 그 동안 별로 없었나보죠?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의미가 있었던 것 같고요. 간격 좁히기라고 해야하나, 아이의 목소리로 전하는 상처의 깊이를 그리고 그것의 치유를 어른들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소설이라 생각합니다. 남자라서 뭐 특별히 다를 건 없습니다. 어른들의 책임과 관심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 정도...
저는 이 정도 밖에 더 떠오르는게 없네요 ^^;;

반딧불,, 2006-05-08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음, 정확히 꿰뚫어 보셨군요. 바로 그거지요.
인간이니까.
집요한 질문 해서 죄송해요...^^;;

라주미힌 2006-05-08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뇨... ㅎㅎㅎ 리뷰만 쓰고 땡~이면 재미없어요. 이런 저런 얘기가 오고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ㅎㅎㅎ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 김봉석의 일본 문화 퍼즐 48
김봉석 지음 / 한겨레출판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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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정책은 일본 문화를 전염병 취급하듯 예민한 거부반응으로 일관했지만, 대중 침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다. 특히 에니메이션 쪽은 거의 대부분 일본 것이었고, 각종 오락 쇼프로그램은 일본 것 그대로를 모방한 경우도 많았었다. 시간이 꽤 흘러 일부를 개방하였지만, 이런 책이 나왔다는 것은 아직도 일본 문화는 미답의 세계라는 것을 반증하는 듯 하다. 민족감정에 의한 반감 때문일 수도 있지만, 문화적 괴리감과 호기심은 잠재적 시장성을 반영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의 흡수와 전파, 그것이 자본력과 결탁하여 세계의 흐름을 휘어잡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문화 소비욕구는 의도적이건, 타의적이건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주류 흐름 속에 놓여져 있고, 우리는 어쨌든 소비의 한 축을 담당해야만 한다. 일본 문화는 그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쇼핑 카달로그 같은 책이 된다. 대중은 문화 소비자이고, 무엇을 소비할 것인가에 대한 대중적인 정보를 필요로 한다. 이 책은 그 정도의 요구에 부합하거나 미치지 못하는 리스트에 가깝다. 목록이 있고, 그것에 대한 간략한 소개 정도에 머무르는 이 책은 미안한 얘기이지만, 트렌드라 불리기 미흡한 정보 수준을 갖춘 소프트 카피에 불과하다. 40여편의 작품으로 트렌드를 말한다? 300페이지도 안되는 분량으로? 제목이 너무 컸다.

저자가 일본 문화를 많이 접했다는 느낌이 글에서 풍기지만, 깊이가 있다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저자의 독특한 해석도 없을 뿐더러, 생산적인 컨텐츠도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개인적인 감상 또는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는 정보들 뿐이다. 트렌드를 말하려면 최소한 ‘작품의 내용’만을 이야기 해서는 안된다.
만화, 애니, 영화는 중간자적인 매체로서, 문화의 배경과 수용, 영향에 대한 심오한 탐구가 있어야 한다. 그 시대 일본 대중과 어떻게 호흡을 했으며, 사회를 어떻게 투영했는지, 사람들의 사고의 변화를 집어낼 수 있어야 한다. 문화적 현상, 사회적 고민을 성찰하지 않은 감상적 편린들을 쭈욱 읽는다는 것은 흔해빠진 평범성에 머무르는 지극히 심심한 과정일 뿐이다.

차라리, 일본 영화나 에니메이션을 보는 것이 이 책을 읽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이 책의 구성의 특징을 보자면, 만화보다는 애니메이션이, 애니메이션 보다는 영화를 다루는 부분이 질적으로 좋다.(뒤로 갈수록 좋다는)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글의 질이 고르지 못하다. 어떤 글들은 (직업상) 억지로 쓴 듯한 느낌마저도 들게 한다.

오타도 많다. 오타에 신경을 잘 안 쓰는 본인의 눈에 걸리다니… ‘뮤라카미 류’는 심했다. 그 문장의 5줄 밑에 무라카미 류는 또 뭔가? 아마도 성의가 부족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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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엘이 엄선한 소프트웨어 블로그 베스트 29선
조엘 스폴스키 지음, 강유.허영주.김기영 옮김 / 에이콘출판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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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북로그가 인터넷 서점계에서 이슈가 되고 있다. 이 시점에서 그것의 사촌쯤 되는 ‘조엘 온 소프트웨어’라는 책이 개발분야 쪽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었다. 그의 2번째 책인 이 책은 북로그의 형제쯤 되는 책으로서 유명한 사람들 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괜찮은 블로그의 글들을 모아 놓았다.

조엘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권위가 느껴진다. 여하튼 그가 엄선했다니 읽어 볼만하다. 초반부의 번역이 상당히 좋지 않다. 하지만 참을 인으로 극복하고 나면 후회하지 않을 글들이 우수수 나온다. 대체적으로 이 책의 논지는 기술보다 인간관계에 방점을 찍는다. 인간들의 요구와 사용을 위한 기술은 인간의 관계 속에서 유지되고, 형성되어야 할 운명인 것이다.

“거 큰소리 한번 내지 않을 수 있는 위대한 영도력의 비결이 뭡네까?”
”뭘 많이 멕여야지.”  (웰컴 투 동막골의 대사 일부분)

옮긴이의 글은 이처럼 인간사회에 대한 따뜻함, 평화로운 공동체, 인간과 인간이 보듬어 주는 사회에 대한 동경을 숨기지 않는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성찰을 말하기 위해 이 책은 또한 심리학, 사회학적 요소를 접목 시키고 있다. ‘집단에 대한 경험’ 이 부분에서 가장 큰 인상을 받았는데, 인간의 개인적 특성과 사회적 특성을 네커큐브를 적용하여 설명하는 부분으로서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지만, 한번에 두 가지 면을 볼 수 없는 모호한 경계 속에서 집단적 특성을 분석, 파악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것을 기술에 적용하는 엔지니어의 몫, 새겨들을 만하다.

이 책은 집단 속의 연대와 교류, 집단 외부의 적, 집단의 결속력 강화, 집단 속의 집단 등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적인 노력의 필요성을 일깨워 준다. 큰 소리 내지 않을 수 있는 ‘위대한 영도력’의 비결을 알아간다면 이 흥미롭고 벅찬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힘이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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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에서 보낸 1460일 - 사상 최악의 전쟁, 제1차 세계대전의 실상
존 엘리스 지음, 정병선 옮김 / 마티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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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적인 임무 완수, 사선에서의 전우애, 현대 과학기술의 파괴 미학 등 영화 속의 전쟁상은 가상 체험이라는 극적 효과에 목표를 두고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헐리웃 자본은 승부, 생존의 극적 긴장감과 환상의 이미지로 현실을 삼켜버리듯 잠식하고 있으며, 세상을 스크린으로 옮겨 놓았다. 여기에 미디어는 전쟁조차도 생중계로 전하면서 ‘당신은 안전합니다’라고 강조하고, 전쟁을 그들만의 생존게임으로 둔갑시켜버린다. 어느새 감각은 시신경만을 자극할 뿐이고, 우리는 현실과 복제의 경계에서 자기 중심의 세계를 만들어 그 안에 앉아 세상을 이해하려 한다. 우리가 세상을 제대로 보려면 알 속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인류의 가장 큰 도박은 전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대인 살상무기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보병 돌격전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양측은 깊은 참호를 파기 시작했고, 그 후 4년(1460일간)동안 구덩이 속에서 치열한 살육전을 펼치게 된다. 병사들은 지옥의 문턱에서 고통에 신음하고 죽어갔다. ‘승부’의 냉정함과 참혹함은 영국군 370만 사상, 프랑스 390만 사상, 독일군 1100만 소집인원 중 170만 사망이라는 역사적으로 최악의 군 사상자 기록을 내게 된다. 그러한 전쟁의 실상을 담은 이 책은 참전 군인들의 참호 생활과 생각을 세세하게 담아 매우 흥미롭게 읽힌다.

참호전은 파괴와 개보수, 위치 사수가 끝없이 반복되는 거대한 소모전이었다. 연합군은 1063만 8천자루의 삽으로 약 2만 4천 킬로의 참호를 팠다고 하니, ‘삽질’은 제1차 세계대전의 가장 주요한 ‘삽질’이었던 셈이다. 참호와 참호 사이의 무인지대에는 철조망을 설치하였는데, 수백미터에서 단지 6~7미터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책의 내용을 기반으로 하여 참호 생활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플랑드르 지방은 저지대라 조금만 땅을 파도 물이 나와 진흙탕이 되는 지역이다. 무릎까지 빠지는 진흙구덩이, 겨드랑이까지 차오르는 물속에서 며칠간 근무하기도 한다. 그런 상태로 오래 있으면 ‘참호발’에 걸려 발을 잘라내기도 하는데, 포탄 구덩이의 진흙에 빠져 죽는 병사들도 많이 있었다.

“쥐들이 가장 좋아했던 것은 시체였다. 특히 눈과 간을 좋아했다. 바르뷔스는 병사들이 시체 주위에서 항상 죽은 두세 마리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폭식 아니면 중독이었다.” 86p

자고 나면 팔에 붙어있는 70여마리의 파리들, 붉은 이, 하얀 이가 온 몸을 물어대고, 그것으로 인해 감염되는 질병 그리고 악취는 사는 것을 거짓말처럼 만들어 버린다.

“우리는 모두 시체들이 뿜어내는 악취에 짓눌려 있었다. 우리가 먹는 빵, 우리가 마시는 물, 우리가 손대는 모든 것에서 썩는 냄새가 났다.” 94p

정기적으로 참호 이동이 이루어졌다. 30~40킬로그램의 군장에 비가 오면 어찌나 흡수가 잘 되던지 약 10킬로그램 정도의 물을 더 얹고서 근무지로 향한다. 진흙구덩이는 더욱 발을 잡아당기고, 추위와 배고픔, 벌레와 질병, 폭격과 저격수는 늘 생명을 위협한다.

하루에 100만발이 쏟아지기도 했던 폭격, 전쟁기간에는 1억 7천만개가 사용되었다 하는데, 포탄충격에 빠진 병사들은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서 죽음의 전선에 배치되었다. 치명적인 독가스는 병사들의 눈을 멀게 만들고, 기관지의 점막을 녹여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고, 죽어가는데 며칠씩 걸리게 했다. .

이러한 최전선에 ‘보고 체계’는 필수. 그러나 황당하다.
격렬한 포격을 뚫고 전달되는 메시지의 내용
1)‘단추는 반드시 휘장 오른쪽 위에 꿰매어 달아야 한다.’
2)‘탑승 여부와 관계없이 장군의 깃발이 휘날리는 자동차에는 항상 경례 할 것”
3)‘장교님의 암말이 선역으로 고통 받고 있다’ 식이다.

게다가 지휘관들은 독일군의 기관총 앞으로 돌격하는 무식한 전술을 독려한다. 전멸, 해체되는 부대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예로 루스 전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하루 동안 잃은 병력보다 더 많은 병력을 잃기도 했다.

“조준할 필요가 없었다. 장전하고 재장전하기만 하면 됐다”

그러한 전술에 수긍한 사병들은 죽음보다 집단적 경멸, 겁쟁이가 되느니 죽는 게 낫다라는 집합적 의지를 갖고 있었다.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없이 전진했던 좀비들… 사는 것이 정말 거짓말 같았을 것이다.

전진하는 부대는 부상병 돌보는 것이 금지되었다, 부상병들은 방치되었기에 스스로를 치료해야만 했다. 부상병들 스스로 기어서 참호로 복귀하는 게 사는 방법… 진흙 속에서 부상병 후송하는 것도 쉬운 임무가 아니겠지만, 어쨌든 야전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하더라도 다른 부상자들을 위해 어느 정도 회복하면 바로 복귀되었다.

전쟁 말기

“1918년 말에는 총격전이 거의 없었다. 임무 수행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생략함으로써 전쟁이 중단되었다. “

부대 곳곳은 탈영, 항명, 와해된 사기로 인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정체된 전선, 그 안에 있던 병사들의 고통은 죽음의 위협만큼 끔찍했다. 그 참혹함이 인간을 잠식하고, 전쟁마저도 종식시킨 것이다. 거대한 중력수축에 의해 블랙홀이 되어버리는 초신성의 운명처럼…

그러나 지옥을 경험한 자들과 경험하지 않은 자들 간의 불신과 증오가 커져 갔다. 누군가의 경험이 누군가에게는 전혀 미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의 상황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심각한 분열과 장벽을 발생시킨다.

삶의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들의 전쟁을 방관하는 자들이 충돌하는 세계….

서부 전선 이상 없다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누군가의 희생에 침묵을 던지는 세계는 여전히 전쟁 중인 것이다.

우리의 전쟁은 그래서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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