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 - 카이에 소바주 1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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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인류 최고의 철학이라 최고라고? Best? 아니군 자세히 보자. 最古의 철학이구나. 인문대생은 정의라는 단어에서 Justice의 의미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공대생은 Definition으로 인식한다는 우스개 소리가 생각난다. 알게 모르게 작용한 우열에 관한 가치 판단은 이미 내 주위를 포위한 환경이 내뱉은 배설물이었다. 환경은 늘 우리 주위에서 서서히 우리의 의식을 지배한다,라고 뇌까리지만, 그 근본을 느끼기에는 한참 부족한 무딘 감각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그런 무딘 감각에 의존하여 자아를 구원하려는 인류의 위대한 노력은 태고적 기억을 잊어가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망각을 깨워라. 마치 이렇게 외치듯이 이 책은 인류 최초의 사고(사건이 아닌), 레비 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를 찾아 신화 속으로 지적 탐험을 떠난다. 잊어버린 과거, 인류의 원형을 찾아 떠나는 것은 의무에 가깝다. 그러나 탐험의 스릴, 신기함, 새로움은 독자에게 훌륭한 동반자가 되어 주니 든든하면서도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저자의 강의를 책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생명력까지 더한다. 훌륭한 강의는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때로는 유연하게 그러다가도 거침없이 흐르는 물처럼 수강생들의 호흡을 느끼며 함께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책에서는 독자, 수강생들의 흥미를 잡아 끄는 데에 있어서 전 세계에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펼쳐놓음으로써 극을 달린다.

 

어렸을 때에 외국 동화와 우리 나라의 전래동화가 비슷한 것이 많은 이유가 궁금했는데, 그 이유를 치밀하게 추적하여 보여준다. 그것 뿐만 아니라,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의 의미와 오이디푸스와의 연관성을 이끌어내는 등 대단한 통찰력으로 신화의 가치를 입증한다. 신화는 종교와 다르게 현실의 구체성과 가상의 확장성을 연결하는 중간자적인 위치를 지니고 있어서 인간의 사고를 풍요롭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현대의 문명은 이러한 균형을 상실해 가고 있다. 대중매체는 현실을 가상으로 포장함으로써 점점 더 현실을 멀어지게 한다. 장 보르드라야르 시물라시옹에서 말하는 허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존재들의 사유에 있어서 신화는 커다란 의미로 작용될 듯 싶다. 이 책은 그것을 말하고 싶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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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 책 2007-08-01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카이에 소바주 읽고 있어요..그래서 리뷰 쭉 보고 있는데, 라주미힌님이 쓰신게 나와서 반갑네요..토요일에 나오시나요? 그때 또 뵈요^.^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공선옥 지음 / 당대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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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란 사회적 소수자 혹은 인간 개개인의 현실에 깊은 공감할 수 있는 능력’ 김규항의 B급좌파 중에서

소설가의 산문에서는 당연히 문학적 감수성이 묻어날 것이라는 생각이 무너졌다. 한 진보주의자의 진보적인 글들만 가득하니 좀 의외였다. 소설가 공선옥씨에게 무슨 주의자라는 말을 붙이기 뭐하지만, 인간의 삶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한 아줌마의 진솔한 생각들은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우리 또한 치열한 삶을 감내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당연하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또한 평범함, 그 평범함이 치명적인 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무관심, 지독한 무관심.

아무개씨는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다. 매일 지하철로 출퇴근하고, 박봉으로 자녀들을 가르친다. 사회적 불평등에 불만이 많고, 정치적, 경제적 부정 부패, 부조리, 도덕적 해이에 대한 분노를 알고 있다. 그런데 어느날 지하철 노조의 파업이 신문, 방송을 장식한다. 경제도 어려운데 파업으로 서민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한다. 아무개씨 또한 같이 분노한다. 정부가 아닌 노동자에게 가시눈을 뜬다. 파업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또 어느날 장애인들이 이동권 보장을 외치며 지하철 운행을 막아 지옥철이 되어 버렸다. 역시 정부, 사회가 아닌 장애자에게 가시눈을 뜬다. 남한테 피해를 주면서 자신들의 주장만을 한다고 또다시 분노한다. 아무개씨는 불편에 대한 분노로 가득하다. 그들의 노동 환경, 파업의 이유보다는 단 며칠의 불편함이 우위에 있다. 그들의 생존보다 단 몇 시간의 불편함이 우위에 있다. 아무개씨는 사는데 있어서 자신에게 닥치는 불편과 부도덕, 불공정에만 ‘깊은 공감’을 하는 평범한 서민일 뿐이다.

공감에도 급이 있다. 일방 통행식의 공감은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그러한 기억을 되살리는 정도에서 머문다. 저런 것은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느낄 수 있는 정도의 감각과 기억의 공감이다. 외부를 향한 ‘구경꾼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그것이 자신의 현실로 다가올 때만 움직인다. 그런 식으로 사회에 불만의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단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함이다.
진짜 사회를 움직이는 공감은 저 수준을 훨씬 벗어나야 한다. 저들의 생존과 고통이 나에게도 해당될 수 있다는 것. 그럴 때 사회적인 공감이 형성되어야 하고, 이웃의 손길을 필요하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늘 사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시선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없는지,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고통 받고 있지는 않은지, 인권과 차별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내 안에서 뻗어나온 연대의식은 결국엔 자신에게 돌아와 커다란 힘이 되어줄 것이란 점을 안다면 우리 사회는 훨씬 살기 좋은 곳이었을 것이다. 늘 사회가 변하길 바라면서도 변하지 않는 원인은 바로 ‘깊고 넓은 공감’을 하지 못하는 데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아울러 이웃과 동료를 경쟁의 대상으로 세뇌시키고, 자본을 맹신하게 만드는 국가 조직의 폭압성과 개인성을 말살하고, 끊임없이 국민성과 민족성을 들먹이는 것들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의 고통으로 배를 채우고 있으니까. 그들은 우리 사회가 변하기를 바라지 않는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아닌가.

차라리 사는게 차라리 거짓말이라면 그나마 낫다. 부정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거짓말이다. 거짓말 같으니까 문제가 된다. 뭐뭐 같다라는 것은 뭐뭐를 대신하고 있기에 뭐뭐는 정말 뭐뭐가 되버린다. 그래서 제목에서는 사는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저항도 내포한다. 부정하면 끝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두 둔 똑바로 뜨고, 맞서야 할 삶인 것이다.

가난에 대한 공감, 고통에 대한 공감, 불평등에 대한 공감. 과연 어느 수준에서 머물고 있는지 이 책이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그래서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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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c2
데이비드 보더니스 지음, 김민희 옮김, 한창우 감수 / 생각의나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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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높은 곳에 올라가기를 좋아한다.(여기서 높다라는 의미는 아이의 시선을 기준으로 한다.) 그 짧은 다리로 끙끙대며 식탁, 책상, 침대 위에 오르고서 한껏 짓는 미소에서는 일종의 자기 만족과 기쁨을 느낄 수 있다. 무엇이 그들을 위치에너지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가? 혹시 가구의 인력? 그곳에 올라서서 보는 세상은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들에게 또 다른 세상으로 다가온다. 모든 게 높아보이는 익숙한 ‘낮은 세계’에서 벗어나, 모든 게 낮아보이는 낯선 ‘높은 세계’로의 탐험은 그래서 즐거운 것이다. 공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 자신의 세계관을 자극하는 감각적인 경험은 단 1m의 고저차에서도 느낄 수 있는 사소한 것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러한 것을 많이 잊어간다. 흔히들 나이 탓을 하지만, 이것은 나이의 문제가 아닌 태도의 문제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유명한 장면이 있으니, 책상 위에 올라 권위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는 부분이 있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서는 자신의 세상을 파괴해야 하듯이, 하나의 틀을 깨기 위해서는 그것을 밟고 올라서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기존의 권위와 인식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막대한 위험과 노력을 감내해야 한다. 선험적인 지식이 아니기에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지식은 바로 이러한 과정의 연속이었고, 바로 그것이 과학의 역사가 되었다. 절대 진리란 없다지만 절대 진리를 쫓는 그들에게는 자기 파괴, 부정의 역사를 갖고 있는 것이다. 나이 탓을 하는 자들은 이러한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가득 갖고 있다. 가진 것이 많으면 잃기를 주저하고, 아는 것이 많으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호기심은 그 나름의 존재 이유가 있다. 인간은 진리와 인생 그리고 불가사의한 현실의 구조를 직시할 때, 아무런 해답도 얻지 못한 채 오히려 두려움에 빠지곤 한다. 그저 매일 이 불가사의한 세계에 대해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걸로 족하다. 신성한 호기심을 잃어서는 결코 안 된다. –아인슈타인-

절제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한 즐거움은 인류의 가장 근원적인 욕망, 뇌가 커서 생길 수 밖에 없는 호기심에서 찾을 수 있다. 쿼크 같은 미시 세계에서부터 은하에 이르는 거시 세계에까지 우리 생활과는 전혀 상관없지만, 궁금한 것은 못 참겠다는 사람들에게 잘 어울리는 책이 될 것이다. 이 책이 담고 있는 놀라움은 E=mc2 이 간결한 공식에서 지금까지 발견한 가장 위대한 원리를 담았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독특한 설명방식으로 우리의 본능을 더욱 바짝 당기는 데에 있다.

에너지와 물질은 본래 하나라는 원리를 담은 저 공식은 간단하면서도 무척이나 난해하다. 무릇 일반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생각해내기 어려운데,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니 꽤 복잡해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은 대중적인 글쓰기로 독자의 본능을 충족시킨다. E=mc2가 탄생하기 전부터 시작해서 E=mc2가 핵폭탄을 낳기까지 아주 흥미롭게 전개한다. 상대성 원리라는 새댁의 핵폭탄 같은 딸의 출산일기라고 해야 하나, 독특한 방식으로 설명하기에 즐거움이 있다. 과학자의 일생, 과학자들의 시기와 질투, 전쟁 다큐멘터리 같은 중수 공장 폭파 작전 등 다채롭고, 풍요로운 이야기거리가 펼쳐진다. 물리학이란 학문이 대중에게 이렇게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아 보인다. 게다가 친절하게도 독서의 확장을 돕기 위해 저자의 추천 도서 목록까지 서비스한다. 재미있는 부분은 아이러니하게도 핵문제의 원인을 긍정으로 받아들이면서 핵문제에 대한 인류의 고민도 함께 담아 내고 있어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 또는 생색내기가 언뜻 보인다는 점이다. 과학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다룬다지만 사실 구색을 맞추려는 것에 불과해 보인다. 저자의 입장에서 보면 찬란한 역사의 탄생 앞에서 발생한 부작용은 상대적으로 사소해 보인다. 인류의 위협-위대한 발견, 광폭한 제국주의자-위대한 과학자. 종이 한 장의 차이에 불과한 이들의 묘한 관계를 보는 저자의 시각에서는 은근히 악취가 난다. 주제가 반핵이 아니니깐 이 부분은 넘어가기로 한다.

결론적으로 아인슈타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호기심에 호기심을 얹어 주니 과학 교양도서로는 흠집이 없는 책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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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엘 온 소프트웨어 - 유쾌한 오프라인 블로그
조엘 스폴스키 지음, 박재호.이해영 옮김 / 에이콘출판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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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함께 하고 있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고,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동일한 방향을 바라 보고 있다면 알게 모르게 상당한 연대의식을 느끼게 된다. 패거리주의가 아닌 절대 공감이라는 공통 분모는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주기도 하고, 누군가의 힘이 되게 하는 구심점으로 작용한다. 지식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커뮤니케이션과 협력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혼자서 움켜 쥐겠다고, 그것의 권한자로써의 지위만을 유지하려는 자에게는 퇴보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현대의 복잡성과 기술의 발전 속도를 혼자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활발한 소통은 난관을 해쳐나갈 수 있도록 해결점을 제시해 줄 것이며, 비전을 보여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블로그라는 1인 미디어의 위력을 이 책은 충분히 보여준다. 독창적이고, 풍부한 담론들이 광케이블의 전파 속도를 타고 전 세계를 휘젓는다. 결과적으로 먼 타국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의 글이 2만 2천원, 400페이지 가량의 두툼한 책으로 탄생되기까지는 국적과 온-오프라인을 넘나드는 수많은 블로거들의 지지와 관심, 도움이라는 화려한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구어체가 많고, 문화의 벽을 느끼게 만드는 많은 요소를 자연스러운 번역으로 문화 충격을 완화시키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장점 중의 장점이다. 그러한 사실은 책의 여러 곳에서도 확인 될 수 있고, 웹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많은 개발자들의 공감이 만들어 낸 작품이기 때문에 완성도는 한껏 높아졌다. 또한 책에서 느낄 수 있는 만족감은 절대 후회 없음이다. 일상의 활력을 불어 넣어줄 정도라면 설명이 제대로 될까.

어떤 글들이길래 이렇게 칭찬을 늘어 놓을까? 개발자의 시선이 담긴 에세이, 기술 동향, IT 비즈니스, 소프트웨어 개발, 관리, 시스템 운영 등 소프트웨어 개발 전반에 대한 통찰력, 해석, 정보가 담겨져 있다. 심지어 개발자 면접 방법, 명세서 작성법까지 방대하면서도 구석 구석을 이야기하고 있기에 CEO부터 말단 개발자까지 대상 독자층은 광범위하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소프트웨어 공학을 다루는 책들처럼 재미없어 보이지만, 차별성은 몇 페이지만 읽어도 느낄 수 있다. 딱딱하게 타버린 삼겹살 같은 소프트웨어 공학책이 절대 아니다. 재미가 장난이 아니다.

무슨 재미?
씹는 재미.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지적만큼 통쾌한 재미는 없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방법론을 제시해주는 것만큼 시원한 재미는 없다. 게다가 잘 알려지지 않는 사실을 드러내서 알려주는 미덕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그것과 같다. 특히 3년간 저자가 일했다던 MS사의 비화는 구경거리 중의 구경거리이다. MS사의 발전 역사와 현재의 MS사의 덜그덕거림에 대한 통렬한 비판은 개발자들의 관심을 바짝 당긴다. ‘MS사가 윈도우 API의 지배력을 잃고 있다’라는 한 문장만 봐도 다음 책장을 넘겨 보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저자가 느끼는 MS사에 대한 느낌은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표지의 그림처럼 ‘Anatomy of Melancholy이다. 우울의 해부학, MS사에 대한 상당한 배신감을 느낄 수 있다. 이용당한 느낌. 버림받은 느낌. 그것을 낱낱이 해부하여 까발리고 싶은 그 심정. 바로 그것이다. 이전 버전과의 호환성, 대중성의 조화라는 MS사의 최대 강점이자 발전 원동력을 폐기처분하고(얼마전에 떠들썩 했던 VB6.0의 지원 중단), 개발자와의 공생적인 관계를 깨버리는 독단적인 태도는 MS사의 몰락을 불러올 수도 있음을 은근히 내비친다.

저자의 글을 모두 받아들일 수 없더라도, 그러한 환경에 있지 않더라도 현재의 상황에서 최선의 시나리오와 알고리즘을 만들어 내는게 개발자 아니던가. IT노가다 업종에 종사하시는 분들에게 필독서가 될 듯 싶다. 영양가 있고, 맛도 있고, 즐겁게 요리 방법까지 알려주니 모자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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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픽스의 앵무새 - 세상 하나뿐인 앵무새 살리기
토니 주니퍼 지음, 이종훈 옮김, 박진영 감수 / 서해문집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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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기 주변에 살고 있는 동물들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보인다. 이런 관심은 다른 욕망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인간이 하고 있는 일에 다른 생물을 참여시키려는 욕구다. - 크리스토퍼 클라커 (동물원의 탄생 중에서)

‘난 그녀를 사랑해. 영원히 곁에 둘 것이야. 박제로 만들어서라도 소유하고 말겠어.’ 이런 말을 거침없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접근을 삼가는 것이 육체적, 정신적인 건강에 이로울 것이다. 십중팔구 환자다. 이러한 만행을 짐승을 대상으로 하는 자들에게 같은 잣대를 들이댄다면 너무 지나친 일일까. 하지만 그들의 짓거리는 낭만도 사랑도 아닌 파괴의 행위이고, 집착의 배설물일 뿐이란 것을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가장 단순한 진리는 생명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것에는 결핍만이 풍족할 뿐이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외부의 것을 탐닉하고, 집착하여 자기화 하려는 욕망만을 불태우는 것이다. 소유욕, 그것은 욕망의 재앙만을 예고한다.

이 책의 표지에 세밀하게 새겨진 아름다운 파랑새(스픽스금강유리앵무)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또 다른 주인공은 인간이다. 인간은 재앙에 가까웠다. 재앙을 막으려는 노력은 무명의 설움처럼 펼쳐진다. 틸틸과 미틸은 행복을 찾아 파랑새를 찾아 나섰고, ‘스픽스의 앵무새’의 저자는 파랑새의 멸종을 막기 위해 나섰다. 결과는 참담하다. 그러나 희망이라도? 앞으로도 지독한 운명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멸종이란 단어에 서려있는 비극성은 사실 언뜻 다가오지 않는다. ‘세계자연보존연맹 1만 1167종의 희귀 동식물 리스트 발표’, ‘지난 50년간 멸종된 동식물 800종 넘어서…’, ‘산호 2030년까지 60% 파괴 예상’, ‘영국서 20년간 나비 개체수 71% 감소’. ‘네이처 2050년 지구의 생명체 25% 멸종 예상’. 이러한 기사들을 보면 의아스럽게도 수치의 사실성은 사라지고, 추상적인 숫자로만 들린다. 수치가 수치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도는 이유는 공감 능력의 결여, 감각의 후진성에 있다.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면서도 내 앞의 대상이 살아있음을 못 느낀다면 과연 제대로 살아있는 것일까. 신경, 감각 세포가 모두에게 이어져 있지 않다고 해도 개체로써의 존엄과 가치는 측정불가, 훼손불가의 성격을 가진다.

‘생명의 대안은 없다’라는 말은 흔한 구호가 아닌 절규에 가깝다. 지구상에 태어나서 수만 수십만 년의 세월을 이어온 생명체가 단 몇 십년, 몇 백년 만에 지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있다니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이다. 단지 소유하고 싶어서, 그렇게 얻은 만족감을 드러내기 위한 행위는 환경오염과 밀렵 같은 것 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도 은근히 내비친다.

주변을 살펴보자. 다른 생물을 소지품으로 여기는 것은 너무 흔한 풍경이 되었다. 시장 바구니의 야채처럼 담아서 다니고, 염색 시키고, 거세 시키고, 꼬리를 자르고… 단지 미용을 위해! 나의 생활에 참여 시키기 위해! 밥 주고, 쓰다듬어 준다고 자기 만족을 짐승의 만족으로 착각하는 부류들은 그나마 귀엽게 봐줄 만하다. 최소한 애정이라도 있으니...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부류들은 오로지 탐욕만을 보여준다. 자본 확대를 위한 도구이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상징에 불과한 소모품으로 희귀새들을 다룬다. 절박한 상황이 오히려 그들의 힘과 위치를 격상시키고 의존해야만 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도 연출한다. 이 책 한 권에 담긴 기다란 여정은 곡예를 타듯 출렁거린다. 한 마리의 죽음, 또 한 마리의 죽음.

징글맞은 내용이고, 슬픈 현실이다.
‘세상의 종말이 닥쳤을 때 당신은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자신과 같은 종이 없는 세상에서, 마지막 남은 번식 본능만이 꿈틀 거리는 자신의 모습에서, 그 어떠한 대안도 희망도 없는 지구상의 마지막 인간이 되어 보자. 깨달음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다. 아니면 파랑새는 영원히 날아갈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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