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행복한책읽기 작가선집 2
케이트 윌헬름 지음, 정소연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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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와도 새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들판과 숲, 습지에는 오직 기묘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사과나무에 꽃은 피었지만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벌이 없어 수분이 일어나지 않아 열매를 맺지 못했다. 예전에는 그토록 아름답던 길가에는 마치 불길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갈색으로 시든 식물만이 서 있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물이 떠나간 그 자리엔 고요함만이 자리했다. 죽음의 그림자는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우리 곁에 슬그머니 다가와 있으며, 상상 속의 이 비극은 너무나도 쉽게 진짜 현실이 되어 우리 눈 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 새는 더 이상 노래하지 않았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은 이렇게 시작한다.
케이트 윌헬름의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는 ‘침묵의 봄’ 이후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새는 더 이상 노래하지 않고, 인간은 번식이 중단되었다. 봄(생명)을 알리는 속삭임이 사라진 것이다.

이 책들이 출판하던 시기에 대중의 심리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은 홀로코스트의 기억들이다. 그리고 전쟁 이후의 냉전, 핵무기, 방사능, 화학물질에 의한 오염 등 60~70년대에 벌어진 일들은 심각한 생명의 위협으로 다가 왔을 것이다. 포스트홀로코스트를 다룬 이 작품의 태생적 배경은 사회적 불안과 대중의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SF 소설 또한 현실문제와 인간 사회에 대한 고민이 한껏 묻어 있음을 되새길 수 있는 작품이다.

생명, 생명이란 무엇이고 그것의 가치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생명공학이 사회적 이슈가 된 요즘 시대의 물음이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귀는 닫혀 있다. 철학 없는 과학과 자본 사회가 만들어 낸 ‘비이성적’인 카니발을 쫓아 스스로에게 종속성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오로지 배아복제, 줄기 세포, 유전자 조작들이 가져올 혜택들이 일종의 광맥처럼 비춰지고 있다는 점 때문에 가까운 미래 혹은 먼 미래의 인류에게 재앙으로 다가올 것이다. 기술의 진화는 언제나 편리함 이상의 희생을 치렀다는 역사적 진실이 우리 앞에 놓여 있지 않은가.

이 책은 인간 복제를 다룬다. 번식을 하지 못하게 된 인류 중 극소수의 사람들이 인간 복제를 통하여 종을 유지해 나간다. 하나를 복제해 농구팀 정도 만들고, 야구팀 정도를 만들다 보니 분대단위 수준까지 마구 찍어낸다. 자연과 격리된 그들의 생존력은 마을을 벗어나지 못한다. 클론들은 독립된 활동을 할 수 없는 나약한 군집일 뿐이다. 한정된 시간과 자원만으로 자기 복제만을 하다가 소멸될 미래만을 기다리는….

개체성의 상실, 마치 개미마냥 노동과 복제로 하루 하루를 보내는 그들의 일상은 그로테스크하다. 클론 생산이 가능한 ‘선택받은 여성’은 복사기 뚜껑처럼 쉼 없이 다리를 열고 닫는다. 난교와 기계적인 결합, 쌍쌍바처럼 늘 붙어서 다니는 클론들의 의식에서는 생명을 느낄 수 없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인류의 모습 3대를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 인류, 클론 1세대, 클론 2세대. 이 책 소개에 보면 원래 한편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하나씩 추가 된 것이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속도감 있게 읽혀진다. 더 재미있는 것은 각 세대에서 피어난 아슬아슬하고 비극적인 사랑, 운명적인 대물림이 책을 아름답게 장식한다는 점이다.

인간과 과학, 개체와 군집, 인간성과 기계성의 배치와 긴장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희망적인 결말로 생명과 인간의 본성을 담아낸 작가의 시선을 통해서 우리의 미래를 그려보는 작업은 흥미롭고도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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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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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 역사를 남기는 쪽은 미화되고, 남기지 못한 쪽은 사라지거나 왜곡되어 진다. 문자 의존도가 낮은 유목민에 대한 악의적인 채색은 그런 식으로 ‘역사적’인 것이 되었다. 예를 들면 흉노(匈奴)는 ‘시끄러운 종놈’, 돌궐(突厥)은 ‘날뛰는 켈트족’, 몽고(夢古)는 ‘아둔한 옛 것’처럼 그것은 지칭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에 무엇보다 가까워야 할 역사 해석은 누가 그것을 썼는가를 따지는 것에서부터 방향이 갈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계의 정복자, 파괴자로 오랫동안 칭기스칸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좀 억울한 면이 있다. 과연 그가 정복과 파괴만을 일삼았을까? 이 책에서 주로 다룬 ‘몽골비사’는 몽골인들이 남긴 유일한 기록으로서 역사의 균형추로 작용한다.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이론과 실천)란 책에서 역사에 대한 집요한 열정과 독특하고도 흡입력 있는 접근 방식을 보여주었던 잭 웨더포드는 이 책에서도 징기스칸과 중앙 유라시아와 유럽을 휘젓던 몽골족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준다. 칭기스칸의 출생에서부터 그가 정복해 나간 땅과 사람들, 친족과 부하, 적들, 제국의 여명과 황혼, 그리고 그에게 닥친 시련과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쉽고 선명하게 그려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제국을 완성한 그들의 ‘힘’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절대적인 군사력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땅은 쉽게 점유할 수 있을 지언정, 인간을 굴복시키는 것은 지배가 아닌 공존이라는 커다란 틀을 형성했을 때에 가능하다. 칭기스칸은 18세기의 착취와 억압의 제국주의와는 다른 개념의 지배 방식을 보였다. 복속된 문화와 인간에 자율성을 부여하고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였다. 그리고 물자의 이동을 원활하게 하여 풍족함을 나누어 갖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것은 흡사 군림보다는 경영에 가까웠다.

로마 교황이 보낸 자에게 ‘그대에게 그대의 신을 믿을 자유를 주겠노라’ 라고 말한 칸의 태도를 보면 그들의 글로벌리즘을 엿볼 수 있다. 종교의 자유, 신분의 자유, 열린 사회는 그 잠재력을 측정할 수 없는 사회로 나아간다. 그것이 제국의 너비이고, 중세의 유럽에 근대성을 깨우는 자극이 되었던 것이다.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
- 돌궐의 톤유쿠크

닫힌 사회와 열린 사회에 관한 통렬한 비문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정체성에 경계를 두르고, 그것에 안주하는 사회는 썩을 수 밖에 없다. 혹한(조드)과 가뭄(강)이라는 자연재해, 부족한 물자와 사방의 적들로 인하여 생존을 보장 받을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배운 것은 끈끈한 공동체 의식이었을 것이고, 냉엄한 자연의 법칙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총력전, 정보화, 표준화, 공존, 활발한 교류, 능력주의, 물자의 배분은 저절로 제국의 원리가 되었다.

21세기,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제국의 너비가 아니다. 힘에 의한 정복도 아니다. 그들이 생존을 위해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가져갔느냐 하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과 종교, 문화를 융합하고 조화를 이끌어 내는 칭기스칸의 방식은 역사가 주는 값진 교훈이다.

팍스 몽골리카의 끝은 페스트라는 질병, 교류의 단절, 기승 군사력의 한계가 전부일까. 복종과 지배, 죽음과 생존의 치열함 속에서 공존의 균형을 잃었고, 그 힘의 소진이 제국의 소멸로 이어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외에도 몽골의 전통, 친족 살해, 미망인들의 치세, 지역 분할, 쿠데타, 병법, 혁신 적인 지배구조 등 야만이라는 괄호 안에 묶여 있던 유목민의 역사를 다시 보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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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9-19 1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다원적인 문화를 추구했던 몽골 제국. 전혀 몰랐던 일이군요. " 우리 집안은 힘이여, 어쩔 것이여!" 할 것만 같았는데..언젠가 소수 북방 유목민들을 만나러간 취재팀이 서로 우스개소리를 합디다만, 칭기즈 칸이 유럽을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순수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나, 라더군요. 끝없이 이어진 산을 양파껍질 벗기듯 넘고 또 넘으면서 도대체 저기엔 무엇이, 어떤 존재가 있는 것일까, 하고 가다보니..중원이 떡. 중원을 치고 달리다보니 유럽이..

라주미힌 2005-09-19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암스트롱의 표정과 복돌님의 표정이 오버랩이 됩니당 6^^
이 책 무지 재미있어요. 잭 웨더포드의 다른 책도 그렇고.. 이 사람이 글을 흡입력 있게 잘 쓰네요. 번역을 잘한건가 ㅎㅎ

비로그인 2005-09-22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 너무 리뷰가 멋져요. ^-^ 근데 너무 어려워요. 으흐흐흐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아. 역사공부좀 해야지. =_=

라주미힌 2005-09-22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장이 너무 뻑뻑해서 그런가보오 ^_^;

날개 2005-10-26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좋은서평 이벤트에서 우수리뷰로 뽑히셨네요..

라주미힌 2005-10-26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 감사합니다 ^^;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 세상을 뒤바꾼 위대한 심리실험 10장면
로렌 슬레이터 지음, 조증열 옮김 / 에코의서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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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은 ‘본성’인 것 같다. 자의식, 운명과 미래에 대한 불안과 바람은 자신에게 늘 비추고 있는 거울을 있게 한다. 거울 보기, 거울 안과 밖, 거울 속 사람들, 거울 속 나의 모습에는 수 많은 진리가 숨겨져 있으리라.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 이 책에는 인간 탐구를 위한 무시무시한 10가지 심리 실험들이 담겨져 있다. 두개골을 열어 뇌를 빨대로 빨아내는 수술 같은 것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인간의 행동과 생각, 기억, 판단의 근원을 찾아 내려는 실험들이라서 무시무시하다. 인간을 안다는 것, 그것은 위험하고도 은밀한 접근을 필요로 한다. 인간 자체가 대상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병적인 집착과 파괴적인 접근을 하였기에 세상의 비난과 멸시를 받았다. 스키너 박사의 경우에는 무지막지한 파멸적인 삶이 던져졌다. 그러나 ‘헨리의 기억’를 지워버린 비윤리성조차도 그 실험의 의미와 영향을 지울 순 없다고 이 책은 밝히고 있다.

인간에 대한 10가지 심리 실험의 내용은 무척이나 충격적이다.
엑스페리먼트(The Experiment)라는 영화의 소재이기도 스탠리 밀그램의 전기 충격 실험은 이라크의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저질러진 학대 장면과 흡사하다.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것은 환경의 권위가 주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인데, 이 실험의 아이러니는 죄악에 대한 면죄부를 심어주는 실험으로 비춰질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밝히기 위함보다는 합리화의 수단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유태인 학살 전범 아이히만이 그러지 않았는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라고… 

이외에도 인간의 행동이 보상과 처벌에 의해 좌우된다는 스키너의 상자 실험을 소개하면서 그의 억울한 사연도 풀어준다. 일본 실화를 소재로 한 ‘완전한 사육’이라는 영화가 떠오르는데, 스키너 박사가 자기 딸을 처벌과 보상 실험을 위해 ‘사육’했다는 것이다. 물론 가족들을 찾아가서 잘못된 사실을 가려내는 저자의 수고스러움이 빛나는 부분이다. ‘나는 스스로 가치 있는 사람인지 궁금하다’라는 철학적 물음을 아는 박사에게 너무나 가혹한 누명이 씌워져 있었던 것이다.

메멘토(Memento)에 나왔던 단기 기억 상실증이라는 장애를 뇌 수술실험을 하다가(하다보니까) 만들어냈다면? 인간의 기억 메커니즘 연구를 위해 뇌를 이리저리 헤집어 놓은 의사가 과연 의사일까? 그렇지만, 그의 실험으로 인하여 시냅스와 뉴런, 뇌의 각 부위의 특성에 대한 영감을 에릭 칸델에게 주었다면, 그래서 ‘싱싱한 해삼’의 뇌가 그 대용품으로 쓰이게 된 역사는 긍정적인 것일까 부정적인 것일까.

정신병을 가진 ‘비정상인’과 정신병을 가진 것처럼 행동한 ‘정상인’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는 정신 진단의 한계를 낱낱이 파헤친 로젠한의 실험과 약물에 중독된 인간을 치유하기 위해 인간을 치유해야 하는가, 약물에 의존하게 만드는 사회를 치유해야 하는가를 밝힌 브루스 알렉산더의 약물 연구는 인간 사회의 사회학적 측면의 질문까지도 던져준다.

믿음과 행동의 불일치를 연구한 페스팅거의 인지 부조화 이론이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곳은 정치판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을 한다면 혀와 뇌의 부조화라고 해야 할 것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미국과 한국의 시끄러운 대통령들일 텐데, 자기 생각과 행동의 불일치를 끊임없이 현실 왜곡과 자기 합리화로 일관하는 그들의 행보는 정말 뇌만큼이나 미스터리하다.
강간 살인을 방관한 38명의 심리를 내리친 달리와 라타네의 연기 실험은 가장 무시무시하다. 방관자의 삶, 시선은 집단 속으로 쉽게 내면화 될 수 있다니… 전문용어로 ‘허걱’이다.

사실 위에 열거한 실험들은 모두 위험한 결론과 방법론을 보여준다. 일반화 할 수 없는 것이고, 대부분 치명적인 오류를 지니고 있다. 인간이 어찌 하나의 명제 아래 똑같겠는가. 그러한 논란 속에서도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너무나 창백하고 강렬했다.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을 거울 속에서 발견했다는 느낌은 자조감을 준다. 인간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나를 보여주는 실험들. 우리 모두에게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는다.

위대한 실험들 그것이 남긴 오류와 치적을 콕콕 찔러주는 저자의 균형감각은 책에 대한 신뢰를 높여 준다. 대중적인 책을 표방했기에 읽기에 부담이 없으면서도 ‘여성’의 감수성이 묻어나는 부분들이 인상적이다. 특히 여성, 어머니, 아내의 인권과 생명에 대한 부분들에서 너무나 살가운 냄새가 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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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9-22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이 책 꼭 읽어봐야겠네요. 심리학을 전공하고. 행동심리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런 책도 읽지 않고 있다니.. ;;;; 으흐흐흐흑!
사실. 제가 하는일이 동화를 읽어야 하는 일이라. 그쪽 분야 책만읽다보니..
시간이 많이 나질 않아요. 나도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싶은데. ^-^;;
그래도 동화를 공짜로 많이 읽을 수 있어서 좋답니다. ㅋㅋ
전공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전문용어들이 등장하니. 정신이 없네요. 가물가물 -_-;
형!! 다음에 이 책 읽고, 생각을 나눠보아요, 제가 질문 할꼬예요. 으흐흐흐흐

라주미힌 2005-09-22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리학 전공이구낭... 관심법 좀 하십니까? ㅎㅎㅎ
 
끝나지 않는 신드롬 - 친일과 반일을 넘어선 식민지 시대 다시 읽기
천정환 지음 / 푸른역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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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씌어진 역사와 우리의 기억은 가장 단조롭고 앙상한 뼈다귀에 불과하다.’ 머리말 중에서

미시사와 거시사는 아마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뼈와 살을 분리 해낸 활어의 잔해처럼, 뼈는 뼈대로 살은 살대로 서로의 유기성이 입맛에 따라 철저하게 단절되어 버린 그것.
그래서 본래의 기억, 형질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숭고하다. 그러나 너무나 흔해빠진 구호로 전락한 과거사 청산, 역사 바로 세우기는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역사의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이 책은 1926년 몰락한 봉건의 표상인 순종의 죽음, 1936년 손기정 베를린 마라톤 우승과 일장기 말소 사건이라는 방점을 두고 역사적 의미와 문화적, 대중적 흐름을 미시사와 거시사의 시선으로 아우른다. 지그재그처럼 거시와 미시를 넘나드는 이 책의 구성은 다소 산만하지만, 서사성과 저자의 재구성 능력(마치 드라마 제 5공화국 같은)은 나름대로 개성 있는 근대의 시선을 보여 준다. 게다가 상당히 독소적이고 냉랭한 문장들은 시니컬한 유머를 자아낸다. 예를 들면 난징 대학살에 대한 설명을 ‘그 학살은 최첨단의 살인 과학이 동원된 아우슈비츠와 히로시마의 학살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것은 개별적인 군인들 각각의 손노동으로 저질러졌다.’는 식의 표현이나 ‘은어’나 ‘속어’가 은근히 등장하여 적절한 재미를 준다.

이 책의 특징 중의 하나는 잘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를 선명하게 그려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손기정 선수의 금메달 획득을 두고 벌어진 언론사 기자의 민족주의적 보도 행태, 미디어 자본의 태동, 대중의 신드롬, 그것을 지켜본 일본의 정치적, 문화적 탄압의 과정 같은 것이 그 예이다. 큰 그림은 역사 교과서적이고, 작은 그림들은 드라마틱하다. 다시 말하면 픽션답다. 너무 딱딱하지도 너무 흐물흐물하지도 않은 것이 먹기는 좋은데 정리가 안 되는 것이 장점이면서 단점이다.

이상, 윤치호, 이광수, 함석헌, 심훈, 여운형 등 수많은 인물들이 저런 식으로 등장했다 사라진다. 그들은 그들 시대를 대표하면서 역사를 이어갔다. ‘너절한’ 부르주아 민족주의, ‘열렬한’ 친일, ‘순진’했던 독립 운동 등 근대성, 변태적 식민성, 탈근대성 등을 골고루 보여준다.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망탈리테는 그 흔적을 찾아가기에 매우 좋은 유물이다. 그런데 70년 전 유물이 아직까지도 발견되고 있다.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스포츠에서 보여진 국가에 대한 맹렬한 추종과 타국에 대한 적의를 보고 있자면 흔한 얘기로 하는 전쟁 대용물임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승리! 그것은 민족적 우열과 국가적 파시즘의 발판으로 손색이 없다. 파시즘과 민족주의가 권력과 자본에 의해 섬세하게 어떻게 조절되고 대중을 장악해 나갔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 책은 부단히 애쓴다. 추악한 형상이 드러나고 그것은 역시나 ‘앙상한 뼈다귀’였다..

역사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할 것 같다. ‘당신이 숨쉬는 그 순간에도 수 많은 역사의 소용돌이를 함께 들이키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수많은 인류의 죽음과 행복과 욕망을 공유하고 있음을 인지하라’. 의식하고 있던 안 하던 간에 개인은 이미 대중이라는 거대한 정체성으로 명명된다. 때로는 민족의 탈을 쓰고, 때로는 이데올로기의 바퀴를 달고, 널뛰듯 날뛰는 그것은 역사의 상흔만 남기고 잊어버린다.

잊는 것이 속편하긴 하다. 그런데 말이다. 윤치호가 초대 교장이었던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이미 내 주위에서 계속 발견되는 그놈의 역사가 자꾸 거슬린다. 그러고 보니 유도를 의무적으로 배웠던 기억은 일제 치하의 기억, 상무 정신, 우승열패의 신화의 맥을 이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애국조회로 국민성을 다지고, 청군 홍군 운동회로 체력을 국력으로 승화시키고, 월드컵 때 보인 붉은 물결의 집단성과 광적인 열광이 무지 거북하다. 타인의 시선에 걸려있는 나(우리)의 정체성이 너무 구질구질해지니까.

그래서 현재 진행형인 ‘끝나지 않는 신드롬’이다.
열강에 대한 무한한 동경, 자학적인 피해의식, 집단에 의해 개인은 쉽게 지워버릴 수 있는 이 사회에서 어찌 인간을 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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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싶다 2005-09-11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때로는 미시적인 사유가 거시 담론을 준비하는 유효한 무기가 된다는 생각도 들어요.

라주미힌 2005-09-11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넹... 살가운 맛도 좋고, 좀 더 다채로운 이해를 돕는데에 너무 좋다고 생각해용. ㅎㅎ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뉴욕 침공기 그랜드 펜윅 시리즈 1
레너드 위벌리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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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의 불균형이 관계의 불균형으로 이어지기가 일쑤다. 평등한 사회를 못 참는 것인지, 평화가 껄끄러운 것인지 잘 모르겠으나, 강자의, 강자에 의한, 강자를 위한 질서는 끊임없이 새롭게 태어나고 강요하고 사라진다. 받아들이는 것이 약자의 의무이고, 요구하는 것이 강자의 권리라는 원칙이 인간 사회에서 늘 작용했다. 조공과 책봉, 봉신과 봉토. 한일합방, 한미 군사 협정. 외교는 비슷한 덩어리들만의 정치 놀음인 것을 우리는 ‘외교’를 통해서 깨닫는 중이다.

냉전시대에 탄생한 이 책은 그 질서를 뒤집는 정치풍자 소설이다. 쥐가 고양이를 물듯이, 다윗이 골리앗을 헤드락 거는 과정을 그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러니까 소설이다.
그랜드 펜윅이라는 가상의 소국가. 인구수가 6000이니 소도시만하다. 게다가 20세기에 14세기 무기(장궁과 철퇴)가 정규군에 보급되어 있다. 정말 소설 같은 설정이다. 그래야 더욱 극적이지 않겠는가.
이런 국가가 미국에 전쟁을 선포한다. 이유는? 국가 수입원이 와인인데, 인구증가에 따른 재정의 압박을 받고 있던 중, 냉전시대에 벌어졌던 미국과 소련의 위성국들에 대한 원조는 특별한 경우(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요충지)에만 이뤄졌기에 특별해지기 위해서 전쟁을 계획한다. 그러나 여차여차해서 Q폭탄이라는 어마어마한 폭탄을 얻게 되어, 지원도 받게 되고, 냉전도 종식된다는 내용이다. 마지막 장면은 이 책의 하이라이트인데, 냉전시대의 허무함을 잘 보여준다. 강대국들의 위선과 논리를 가볍게 가루로 만든다.

그 당시에 가졌을 만한 생각이다. 강대국 틈에서 죽느니, 약소국들이 힘을 합쳐 평화의 권리를 찾겠다는 발상, 그것은 제 3세계의 등장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풍자 소설로서는 시간의 흐름으로 빛이 바래는 것을 막지는 못하는 듯 하다. 현재도 같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왜냐하면, 평화를 힘으로 쟁취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그들의 놀이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엄청난 위력의 폭탄으로 강대국들을 협박하여 얻은 평화가 진정한 평화인가? 긴장과 불신이 근본적으로 사라지지 않았는데 핵무기를 다 없앴다고 해결되는 일일까. 설령 그것이 기폭장치가 망가진 폭탄일지라 하더라도 힘으로 제압하겠다는 것은 이미 평화의 기본 룰을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절대 선이 절대 힘으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관념의 세계일 뿐이다. 이 책의 마지막 한 줄이 이 책의 전부라고 한다면 대단한 풍자극이라 할 수 있겠지만, 전체적인 흐름으로 봐서는 그것은 아닌 것 같다.(유럽을 날려버리겠다는 협박은 너무나 진지했다) 논리적인 헛점이 많은 소설이지만, 그것보다는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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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싶다 2005-08-26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라주미힌님, 킹 목사와 간디를 닮은... ㅎㅎ

라주미힌 2005-08-26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로는 다 하죠 ^_^;;;;

2005-08-27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