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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정영목 옮김 / 사계절 / 2005년 2월
평점 :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 역사를 남기는 쪽은 미화되고, 남기지 못한 쪽은 사라지거나 왜곡되어 진다. 문자 의존도가 낮은 유목민에 대한 악의적인 채색은 그런 식으로 ‘역사적’인 것이 되었다. 예를 들면 흉노(匈奴)는 ‘시끄러운 종놈’, 돌궐(突厥)은 ‘날뛰는 켈트족’, 몽고(夢古)는 ‘아둔한 옛 것’처럼 그것은 지칭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에 무엇보다 가까워야 할 역사 해석은 누가 그것을 썼는가를 따지는 것에서부터 방향이 갈라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계의 정복자, 파괴자로 오랫동안 칭기스칸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좀 억울한 면이 있다. 과연 그가 정복과 파괴만을 일삼았을까? 이 책에서 주로 다룬 ‘몽골비사’는 몽골인들이 남긴 유일한 기록으로서 역사의 균형추로 작용한다.
‘야만과 문명, 누가 살아남을 것인가’(이론과 실천)란 책에서 역사에 대한 집요한 열정과 독특하고도 흡입력 있는 접근 방식을 보여주었던 잭 웨더포드는 이 책에서도 징기스칸과 중앙 유라시아와 유럽을 휘젓던 몽골족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준다. 칭기스칸의 출생에서부터 그가 정복해 나간 땅과 사람들, 친족과 부하, 적들, 제국의 여명과 황혼, 그리고 그에게 닥친 시련과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쉽고 선명하게 그려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커다란 제국을 완성한 그들의 ‘힘’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절대적인 군사력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땅은 쉽게 점유할 수 있을 지언정, 인간을 굴복시키는 것은 지배가 아닌 공존이라는 커다란 틀을 형성했을 때에 가능하다. 칭기스칸은 18세기의 착취와 억압의 제국주의와는 다른 개념의 지배 방식을 보였다. 복속된 문화와 인간에 자율성을 부여하고 그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였다. 그리고 물자의 이동을 원활하게 하여 풍족함을 나누어 갖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것은 흡사 군림보다는 경영에 가까웠다.
로마 교황이 보낸 자에게 ‘그대에게 그대의 신을 믿을 자유를 주겠노라’ 라고 말한 칸의 태도를 보면 그들의 글로벌리즘을 엿볼 수 있다. 종교의 자유, 신분의 자유, 열린 사회는 그 잠재력을 측정할 수 없는 사회로 나아간다. 그것이 제국의 너비이고, 중세의 유럽에 근대성을 깨우는 자극이 되었던 것이다.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 남을 것이다.'
- 돌궐의 톤유쿠크
닫힌 사회와 열린 사회에 관한 통렬한 비문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정체성에 경계를 두르고, 그것에 안주하는 사회는 썩을 수 밖에 없다. 혹한(조드)과 가뭄(강)이라는 자연재해, 부족한 물자와 사방의 적들로 인하여 생존을 보장 받을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배운 것은 끈끈한 공동체 의식이었을 것이고, 냉엄한 자연의 법칙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총력전, 정보화, 표준화, 공존, 활발한 교류, 능력주의, 물자의 배분은 저절로 제국의 원리가 되었다.
21세기,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제국의 너비가 아니다. 힘에 의한 정복도 아니다. 그들이 생존을 위해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가져갔느냐 하는 것이다. 다양한 사람과 종교, 문화를 융합하고 조화를 이끌어 내는 칭기스칸의 방식은 역사가 주는 값진 교훈이다.
팍스 몽골리카의 끝은 페스트라는 질병, 교류의 단절, 기승 군사력의 한계가 전부일까. 복종과 지배, 죽음과 생존의 치열함 속에서 공존의 균형을 잃었고, 그 힘의 소진이 제국의 소멸로 이어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외에도 몽골의 전통, 친족 살해, 미망인들의 치세, 지역 분할, 쿠데타, 병법, 혁신 적인 지배구조 등 야만이라는 괄호 안에 묶여 있던 유목민의 역사를 다시 보게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