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스트라우스 -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
박성래 지음 / 김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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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럼스펠트가 짤렸다.
국제사회에서 도륙질을 일삼다가 수렁에 빠진 미국의 외교정책의 숨고르기가 시작되었다. 공화당은 중간선거에서 패함으로써 막가파식 일방주의의 한계와 실패를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판을 갈지 않으면, 아무리 고기를 갈아도 고기는 타게 된다고 외치던 노회찬 의원 말마따나, 사람 몇 명 갈았다고 미국이 변하랴?
하지만, 부시 행정부의 정치 철학과 정책 결정의 책사쯤 되었던 네오콘의 몰락과 국제 정세의 변화는 결코 불가분의 관계가 아님을 우리는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전 세계가 덤벼도 미국을 잡을 수 없는 현실은 깊은 좌절감을 안겨준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옛말은 그야말로 옛말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일단은 적을 알아야 한대라도 덜 맞을 것 아닌가. (비굴모드)

그런데 네오콘이 뭐야.
신보수주의(neoconservative·)이다.
그런데 보수주의는 뭐고 신보수주의는 뭘까.

미국의 보수주의의 중심적인 특징은 사회적인 책임이 개인 또는 관행과 집단에 있다고 믿으며, 사유재산을 강조하고, 강한 종교적 믿음으로 도적적, 문화적 표준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더 세부적으로 보수파를 나누면, 구보수파 또는 전통적 보수파, 기독교 우파, 온건 공화당원, 신자유주의자, 그리고 네오콘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구보수파는 미국 남부의 전통 보수주의 성향이 강하고, 일방적이고 힘을 앞세운다. 딱 부시의 성격이다.(부시는 네오콘이 아니다. 전통 보수주의자다.) 그리고 국제 문제 개입을 꺼리는 고립주의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익이 눈 앞에 있으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는 거… 온건 공화당원은 실용주의적 중도파이다. (대표적으로 콜린 파월, 매들린 올브라이트, 아버지 조지 부시) ‘힘을 사용하지만,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패권을 추구하지만, 동의를 구한다.’는 식이다. 신자유주의자는 시장 경제를 중시하고, 복지국가 해체와 규제 완화에 적극적이다. 따라서 군비 확대 노선과 전통적 보수주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기독교 우파는 보수적인 기독교 세력이며, 마지막으로 네오콘은 구보수파를 비판하며 등장한 ‘신제품’이다. 미국의 이익을 전 세계로 확대시키고자 등장하였다.
(<미국을 파국으로 이끄는 세력에 대한 보고서> 김지석 지음, 교양인 참고하였음.)

네오콘의 원년 멤버는 트로츠키주의자 같은 좌파에서부터 민주당 지지자까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60년대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들은 레오스트라우스의 사상을 대동맥에 투여 받고서, ‘강력한 질서’를 들고 나왔다. 태생적 배경부터 범상치 않다.(마치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다스 베이더로 전향했듯이) 게다가 오색찬란한 보수파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정신 세계를 가졌다. 이 책이 재미있는 이유는 네오콘의 사상적 배경을 대중적인 언어로 해부했다는 데에 있다. 행위는 목적을 두고 있고, 목적은 사상에 기반하고 있을 테니까. 그들의 ‘정신적 지주’ 레오 스트라우스의 사상을 엿보는 일은 정말 특이한 경험이다.
 
그들의 사상을 짧게 요약한다면 이렇다.
현대 사회, 문화의 위기는 근대 이성에 있다. 상대주의와 허무주의가 질서를 교란시키고, 세상을 위협으로 몰고 가고 있기 떄문이다. 신이 없는 이 세상에서 도덕적 질서를 유지시키는 것은 엘리트의 몫이고, 멍청한 대중은 이들을 따라야 잘 먹고 잘 살게 된다. 진리가 사라진 세상, 철학자들은 ‘고귀한 거짓말’을 만들어내어 대중이 그것을 믿게 만들어야 한다. 엘리트의 이러한 의무와 권리는 자연권이다. 그런 식으로 탄생한 좋은 레짐을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려서는 안 된다.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얼마나 유용한가이고, 목표는 오직 승리일 뿐이다.

대중의 도덕적 타락을 막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한다는 이 대단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네오콘이다. 이런 가르침은 플라톤 같은 고대 철학에 담겨 있다고 한다. 플라톤의 말과 글을 네오콘식으로 해석하는 장을 보면 아주 흥미롭다. 거짓말의 원조가 플라톤이다~! 이라크를 침공했던 명분인 대량살상 무기를 발견하지 못했음에도 뻔뻔했던 이유는 다 나름대로의 철학적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사회 통합과 질서 유지를 위해서 끊임없이 외부의 적을 생산해내야 하는 그들의 임무는 거룩한 느낌마저도 들게 한다. 게다가 이들의 믿음은 밀교적인 성향이 있다고 하니 레오 스트라우스 패밀리는 다단계 만큼이나 굳건하다. 세계를 기만할만한 파워를 가졌고, 그런 사람들이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레짐으로 모든 것을 바꾸려고 한다.
‘레짐 체인지’라는 용어를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한반도의 평화와 직결되어 있으면서도 이것은 국제적인 문제이다. 그들이 원하는 변화는 그들이 변하지 않기 위한 최악의 도전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다를 수가 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가끔은 존재한다.
정권의 정당성이 부족한 부시는 네오콘의 강력한 정치 철학이 필요했고, 네오콘은 권력을 얻었으며, 기독교 우파는 그들의 강력한 지지세력이 되었다. 적(테러리스트)의 편이 될 것인가 그 반대 진영에 설 것인가. 부시의 협박으로 인하여 지구는 고통스럽다.

럼스펠트가 짤렸다.
네오콘 핵심 멤버, 세계은행 총재 폴 울포위츠도 짤렸고, 루이스 리비 전 부통령 비서실장, 더글러스 페이스 국방부 차관 등이 부시 행정부를 떠났다. 그 자리를 대체한 새 국방장관 로버트 게이츠와 공동의장 베이커가 아버지 부시의 측근들이라고 세상이 조용해질까…
네오콘 이론가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이라크 전쟁 이후로 네오콘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나섰다고 한다.
미국 대외정책의 대안으로 '소프트 파워'(Soft Power)와 '다다자주의'(multi-multilateralism)를 대안으로 제시했다는데, 과연…. 그것이 진심일까. ‘고귀한 거짓말’일까

그들은 거짓말하는 엘리트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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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아바
키란 데사이 지음, 원재길 옮김 / 이레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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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은 누군가의 모방으로 가득 차 있다. 당신의 머리스타일을 하고 있는 자가 백만명, 당신의 패션은 누군가의 패션이고, 당신의 일은 어제의 일이고, 당신의 의견은 다른 사람의 의견이다. 개성은 자기만족의 한치 앞에 있을 뿐 대중성에 파묻혀 살아간다. 습관화된 평범성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며, 조금의 변화에도 불안을 느끼게 하는 사회일수록 개인은 작아져 간다. 아니 작아져야만 한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작아질수록 커지려 하는 이율배반적 상황에 놓여있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행동에 지독한 관심을 가지며 살아간다. ‘세상에 이런 일이’를 가끔 보면 ‘세상엔 구경거리’처럼 보인다. 누군가가 돌을 씹어먹는다면 ‘구경거리’가 되는 세상인 것이다. 다른 사람을 발견하는 작업은 TV의 쇼비지니스의 영역에서 다뤄지는 부분이 된 것이다.
동질성의 안정과, 이질성의 불안을 동시에 느끼기 위해서. 그럼으로써 누군가는 더더욱 가까워질 것이고, 누군가는 더더욱 멀어질 것이다. 세상과 하나가 될 것인가, 또 다른 세상을 창조할 것인가. 결과는 ‘거룩’하거나 ‘코미디’가 된다.

이 소설은 두 가지를 모두 보여준다. 결국 웃기는 세상인 것이다.
나무에 올라간 남자를 구경거리를 만들고, 그것에 신성한 코미디를 부여한다. 특이함에 기이함을 더하니 신성이 된다. 작가는 그리고서 사회와 대중의 반응을 오히려 구경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성자의 나라, 종교적 가르침이 생활 속에서도 마구 일어날 것 같은 나라(누군가의 에세이의 역할이 컸다.), 인도의 실상을 검열 없이 벗겨버리는 소설인 셈이다.

비범한 어머니(비 오는 날에 머리에 꽃 한 송이가 잘 어울리는)에게서 태어난 ‘행운’이라는 뜻을 가진 ‘삼파드’의 비범함이 웃기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진정한 자유에 대한 욕망의 실패를 다시 보여줘야만 하기 때문이다. 결국 커다란 구아바가 되어  원숭이들의 세상으로 떠나버릴 수 밖에 없게 된다.

나른한 오후, 파리만 휘휘 날리고, 양은냄비처럼 달그락 거리는 일상, ‘인도’하고 거리가 먼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유쾌하게 그려낸 이 소설의 진정한 맛은 스스로를 연민하는 데에 있다. 하나 더 재미있는 부분을 추가한다면, 재치 있는 문장과 섬세한 묘사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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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 I
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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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최악의 야만행위로 비춰지는 것 중에 하나는, 2차 세계대전 중에 발생한 쇼아(홀로코스트, 제노사이드)이다.
그래서일까. 인류가 저지를 수 있는 극단의 야만성을 역사적 교훈으로 세뇌시키듯이 끊임없이 확인시켜주는 작업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 종교, 민족, 국경, 금은보화 등 이유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인류에 대한 인류의 저주’는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정의를 부르짖어야만 하고, 폭력적이기에 평화를 외쳐야만 하는 현 상황은 지독하게 소모적이고 순환적이다. 게다가 평화를 위하여 우라늄탄, 클러스터 폭탄, 기화탄, 학교와 병원만 골라 맞추는 초정밀 크루즈 미사일 등을 선물로 날려주시는 ‘아메리카 쫑쫑’들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겨버린 꼴은 가히 그로테스크하다.

이 책은 그런 점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 체험과 비체험의 만남을 주선한다. 시간의 장벽, 기억의 장벽을 넘기 위한 사다리를 놓는다.
네러티브는 다큐멘터리적이고, 이야기는 자서전 같고, 만화컷은 영화같고, 그림은 우화 같으며, 메시지는 역사적 증언만큼이나 묵직하다. 살아남은 자에 새겨진 피의 기록은 읽는 이에게 커다란 충격과 애환을 남긴다. 사실성이 주는 흡입력과 만화라는 장르적 편안함이 감성의 전이를 굵고 진하게 한다. 시대적 공감을 이끌어내기에 진실성만큼 좋은 재료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내용, 형식 다 좋아도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거….
살아남은 자들이 지금 뭘 하고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이 책은 커다란 혼란을 준다.
그들에게 쇼아의 피해자라는 면죄부가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침략국가 이스라엘의 인종주의적-반인륜적 범죄를 홀로코스트라는 ‘영원한 박해’ 속에 희석 시키고 있지 않은가?
아메리카 인디언, 제주도, 인도, 잉카, 난징, 나가사키-히로시마, 이라크, 테즈메니아 같은 곳에서 벌어졌던 야만적 행위보다 특혜(?)를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스라엘 건국 준비를 위해 그들의 희생을 침묵했던 이스라엘 지배계층의 정신 세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현실은 부조리를 내포하고, 세상을 향해 ‘나 여기 없어요~’(친절한 금자씨 버전)라고 외치는 듯 하다. 팔레스타인인들이 겪는 고통이 그들이 겪었던 고통과 질적 차이가 없음에도 똑같은 야만을 저지르는 것은 결국 그들이 나치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철저한 하나님의 역사이다.” 라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절대로 잊지 아니하신다(시편 137:5-6).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회복하사 역사가도 정치가도 그리고 유대인들 조차도 생각하지 못한 건국을 허락하신다. 이 건국은 이스라엘의 땅의 회복을 의미한다.” 라고
‘십자군 전쟁의 취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일부 기독교인들과 부시에게 지옥은 언제나 오픈 되어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트 슈피겔만이 하고 싶은 말들…
앞으로 결코 있어서도 용납되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쥐의 탈을 쓴 나치의 망령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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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6-11-14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 안그래도 종교전쟁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글을 보니, 조금 섬뜩하네. 어느 누가... 그 망령이라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
 
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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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에서 벗어나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된다.
집착, 불안, 두려움과 떨림. 미래의 허상, 과거의 유령이 현재를 흔든다. 깊게 패인 감성의 상흔은 젊음마저도 서서히 분해해 버리고 마는 것은 외부가 아닌 내부의 문제인 것이다. 정체성, 강렬한 자아의식이 몰아치는 청소년기의 하룻밤을 그려낸 이 소설은 젊음의 마찰음과 파열음 그리고 정화된 멜로디가 흐른다.

아버지가 자신이 저지른 짓이 스트레스가 되어 위를 다친 것이며,
병이 난 것으로 용서를 받은 거라 생각할 셈이었던 것이며,
두 쌍의 처자를 남기고 혼자 이 세상에서 달아난 것이며,
그렇다, 달아난 것이다, 아버지는.
두 쌍의 모자를 지켜보는 것으로부터도, 혼자 처자식의 경멸을 견뎌가는 것에서부터도.
209p


죽어버린 한 아버지와 두 명의 어머니와 두 명의 자식.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에 반하는 불륜이 잉태한 아이들이 겪는 위기의식이 섬세하다. 거부할 수 없는 저질러진 운명, 거부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불분명한 지금의 문제를 누가 해결해 줄 것인가. 그들의 고민은 지극히 현시적이며 자기 중심적이며 폐쇄적이다. 하지만 고등학교의 마지막 축제를 통하여 서서히 친구들에게 열리게 된다.

성장통의 마지막이자 새로운 시작을 예고하는 보행제.
모든 상황은 그들의 삶에 집중된다. 은 외연을 가리고, 내연에 집중하게 한다. 피크닉은 현실을 벗어나 현실을 관망하게 한다. 보행제는 티벳의 오체투지와 같은 깨달음의 과정을 이끈다. 그렇게 인생과 자아에 대한 성찰은 새로운 시작을 약속한다.

지금 여기 있는 것은 저주 같은 의지뿐이다. 212p

인생이란 무작정 걷기.
오직 지독한 의지만이 현재를 있게 한다. 빠른 기록이 남는 것이 아니라, 오직 누구와 그 시간을 함께 했는가, 앞으로 함께 할 것인가가 중요할 뿐이다.
성장과 치유의 의식은 깊고 깊은 밤하늘 아래에서 새로운 역사를 준비한다.
보행제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는 친구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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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은 붉은 구렁을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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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람은 인간관계를 귀찮아 하면서도 또 고독에는 굉장히 약하지 않습니까. 그걸 해결하는 방법이 다 함께 똑같은 일을 하는 데 있는 셈이지요. 저 사람도 나하고 같은 일을 하고 있어, 그러니까 난 고독하지 않아. 그런 거죠.”  92p

‘일본사람’을 ‘현대인’으로 바꾸면 현대인의 고독과 대중의 집단적 몰취향에 대한 재미있는 해석이 된다.
재래시장의 살내음을 발라내고, ‘상거래’만 남은 인터넷, TV 쇼핑처럼 소홀한 관계를 동일한 행위로 채우는 것은 이미 현대인의 생활로 자리잡았다. 목적만 남고 과정은 생략된다.
과정은 비용이니까.
폭주하는 소비지상주의 속에서 이것은 합리적인 것이다.
“롤러로 밀듯이 한 색깔”로 칠해지는 세상의 불필요한 것들은 그렇게 늘어간다. 자유로워 보이는 강요로 가득차 있다.

저자인 ‘온다 리쿠’는 제한된 세상 속에서 무한히 확장하는 세상을 꿈꾸는 자임이 틀림이 없다.
이 소설에서도 이야기의 확장성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호접몽처럼 소설 속의 소설, 이야기의 이야기로 이어가는 흐름을 쫓아가다 보면 과연 끝은 있을까? 안과 밖의 경계는 있을까라는 물음을 맞닥뜨리게 된다. 물론 이 부분은 작가가 권력을 절대적으로 행사한 것에 기인한다. 힘없는 독자야 내어 놓은 길을 따라갈 뿐이지 않은가. 어쨌든 앞만 보고 쫓아가게 하는 이야기의 매력은 ‘진실은 저 너머에 The Truth is out there...’ (폭스 멀더 요원)’의 삶처럼 아리송한 것이다. 유한의 영역을 끊임없이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이 독자를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저자의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설이 된 이야기(소설 속의 삼월은 붉은 구렁을 처럼)’를 쓰고 싶어하는 그의 목표는 고독한 현대인에게 생략된 무엇인가를 채워줄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은 멈추질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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