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으로 이미지를 보는 법 - 사진에서의 구성. 색감. 그리고 디자인 포토 라이브러리 1
브라이언 피터슨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디지털 카메라의 대중화, 개인 블로그의 확산으로 사진 찍기는 르네상스를 맞이한 듯 하다. 디카의 판매량은 급증했고, 유적지, 소풍, 기념일에만 찍어댔던 사진은 술집, 식당 심지어 찜질방까지 구석구석을 찍어대고 있다.

흔적 남기기. 일상의 모든 것을 담아내기.
이것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사회적 영역 표시’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을 공유하여 공감의 영역을 확대시키려는 욕망의 분출구가 되었다.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기에는 자아의 본색은 너무나 개성적이여서일까. 그러나 이미지의 범람은 무릇 빈번함을 낳고 빈번함은 복제 또는 모방 또는 재생산만을 남긴다. 거기가 거기 같고, 봤던 것 또 보는 것 같다.

욕심이 난다.
나는 다른 것을 보고 싶다.
나는 다른 것을 찍고 싶다.
이 책의 제목은 이러한 욕구를 알고 있다는 듯이 자리잡고 있다.

이 책에는 퀄리티가 상당한 사진들이 배치되어 있다. 종이와 판형은 잡지 같고, 내용은 사진을 막 좋아하기 시작한 사람부터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이 읽기에 딱 좋은 것 같다.
저자가 유명한 사진가라고 하는데, 사진을 보니 그런 것 같다. 게다가 1988년 초판에 이어 2003년에 다시 출간됐다고 하는데 역시 내용도 좋다.

‘보는 방법을 바꾸면 당신의 사진이 달라진다.’

이 명쾌한 명제를 받쳐주는 목차를 봐도 체계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렌즈의 특성에 따른 효과와 창조적 시도들, 다지인적인 요소들, 빛과 구도 등 나 같은 초보자들에게는 부족하지 않은 내용들이다. 사진만 봐도 훌륭한 교과서가 될 것 같다. 재밌는 사진도 많고…

물론 이 책이 ‘창조성의 정석’은 아닐 것이다. 다만 가능성의 눈을 뜨게 할 자극으로써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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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희망 유재현 온더로드 6
유재현 지음 / 그린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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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 되게 인상적이다.
형식은 자유로운데 편집은 많이 부자연스럽다.
공간은 많고, 그 공간을 메울 내용은 부족하니, 글자를 키웠나 보다.
그렇다고 가려지나.

글자의 크기가 뭐가 중요하랴…  라고 반문한다면
‘읽기 불편해’, ‘정신 사나워’, ‘성의 없어 보여’, ‘분량 늘리려는 꽁수 같아’라고 말하겠다. 어차피 개인적인 느낌이니 아닐 수도 있고, 아닌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내용도 싱겁다. 라면 두개를 끓이면서 스프 하나를 덜 넣은 것 같다. 읽다 보면 그게 다야? 더 없어? 사진만 보라고?
라고 책과 대화하게 된다. 여행 에세이, 사진집, 여행 가이드 북… 조금씩은 있는데, 조금씩 아쉽다.

왜 싱겁나?
저자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고 싶었던 것만 이야기한다.
물론.
그것은 저자의 특권이다.
그래서 독자의 특권으로 불만을 늘어 놓고 있다.

슬라이드 사진을 넘기듯 넘기다 보면 시간이 50년 전에 멈춰 버린 듯한 이국적인 정취, 사람들의 모습에서 친근함을 느낀다. 쿠바에 대한 신비감, 막연한 동경 그런 것들이 묻어 난다. 제목 그대로 저자는 ‘희망’을 보아서 그럴까.

지속 가능한 사회라…. 물자는 부족해도 모두가 비슷해도 삶의 여유는 넉넉해 보이는 정경들…
도시인들이 시골에서 느끼는 연민(?)같은 것은 걷어 내야 한다. 그들의 무상의료, 무상교육 시스템에 놀라움을 느끼며 우리가 바라는 이상 사회의 일면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쿠바의 혁명은 진행형인 것이다.

여행이란 그런 것 같다. 그곳에서 이곳, 그들에게서 나를 발견하는 작업.
저자는 그곳에서 ‘그런 희망’을 발견했지만, 나는 ‘어떤 희망’을 발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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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킹 2006-09-30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당한 느낌으로 읽으셨나 봅니다. 삶의 여유를 보신듯 하네요...
 
이현주 목사의 대학 중용 읽기
이현주 지음 / 삼인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대학, 중용…
옛날 선비들이 밥벌이는 아내에게 맡기고 골방에서 ‘열독’하던 책?
하지만, 쾌쾌한 냄새가 날 것은 이 책은 왠지 묘한 궁금증을 준다.
취업을 위해서는 영어 점수가 있어야 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해서는 재테크와 자기계발을 강요 당하는 이 시대에 어떤 의미를 줄 것인가?도 궁금했지만, 저자가 이현주 ‘목사’라는 점이 더 흥미로웠다.

서양 종교가가 동양의 유학자들이 수 백년 전에 읽던 책을 21세기 요즘에 출판하다니, 동서고금을 크로스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재미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오직 진리인 ‘기독교’적인 믿음을 어떻게 유지하면서 이 책을 썼을까… 혹시 대학, 중용으로 포교하려는 ‘흑심’이 담겨 있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으로 책을 집어 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전에 아는 사람에게서 불교 유적에서 발췌한 ‘예수’ 비슷한 한자로 이 땅에서의 기독교의 역사성을 발견해내는 ‘놀라운 노력’을 본적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학문과 종교, 동서양을 아우르는 통섭적 지혜가 엿보이는 책이다. 진정한 구도가의 모습도 엿볼 수 있었다. 저자는 종교적 영역의 한계를 극복하고 선인들의 가르침을 가슴으로 받아들인다. 권위에 오만하고, 진리에 겸손한 자세는 성숙한 인간의 표본이며, 진리를 탐구하는 지식인의 참된 모습을 보여준다. 선인들의 가르침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현재에 얼마만큼의 ‘실효성’이 있는지 의구심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과 사회를 관통하는 근원의 근원을 탐구하여 얻은 진리가 자본주의적 가치와 비교될 수 있을까? 절대로 같은 기준으로 비교할 수 없으며,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얼마 전에 인문학의 위기라고 걱정하는 학자들이 사회면을 장식한 적이 있었다. 사회의 요구는 점점 집요하게 화폐적 가치로 환원할 수 있는 것과 그것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구조화 시킬 수 있는가에만 역점을 두려고 한다 . 투자한 만큼 뽑아낼 수 있는 것만을 대접하는 이 시대에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자본주의의 잣대는 세상을 막무가내로 저울질한다. 인문학의 위기는 그러한 요구에 맞춰 대학이 학문을 하는 곳이 아니라, 취업훈련소로 스스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의 완성이 ‘대학진학률’이라면 대학의 완성은 ‘취업률’이다. 어떤이가 주장하길, 민주-자본주의사회라는 외부의 환경에 적응하는 과도기적 단계이고, 경쟁력 강화만이 살길이라고 했는데, 인문학의 경쟁력이란 무엇일까. 제대로 된 인재를 양성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은 ‘경제성장의 기여도’가 우승열패의 운명을 가르고 마는 것인가.
 
집중과 선택의 결과로써 쓸모 없는 것들은 넘쳐나게 되었다. 단기성 효과와 ‘쓸모’라는 명제 앞에 무시되어 온 것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가 된 것 같다. 한자어가 많이 나온 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내용-문장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진짜 어려운 것은 그것을 체화하고 삶에 흡수하는 것일 것이다.
'무엇을 해야하는가'가 화두인 시대에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알려주는 책.
저자의 성숙한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고, 그의 깨달음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과정 또한 참되다.
대학, 중용을 읽고서도 ‘대학’ 갈 수 있다면, 취업할 수 있다면 해방된 인간, 확장하는 인간으로써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작년부터 이 나무를 관찰했다.
유난히 잎이 없었던 나무. 
그래도 여름인데, 초록으로 물들겠지 하는 바람으로 이번 여름을 기대했건만...
여전히 잎사귀는 희한하게도 일부에서만 자라나고 있었다.

문제는 뿌리다.

세상의 문제라면  그 근본은 개인에게 있다.
대학 중용은 그런 가르침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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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8 0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주미힌 2006-09-28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저거 맨날 햇갈려요... ㅠㅠ;

저 나무.. 제가 좀 이상하게 찍어서 잘 안나왔는데요. 실제로 보면 가지가 쫙 펼쳐진 것이 너무 예뻐요.
 
마르크스의 자본론
벤 파인.알프레도 새드-필호 지음, 박관석 옮김 / 책갈피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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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분야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어서 ‘자본론’을 읽는 것에 심한 부담감을 안고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 체제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에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이 쌓이고 있는 바, 약간의 도전심으로 택한 책이 벤 파인, 알프레도 새드-필호 공저의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다. 자본론을 다 읽을 수 없는 처지(?)를 잘 아는 학자들이 친절하게도 전체적인 흐름, 용어, 개념들을 정리를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적 해석과 의미를 이해 시켜주려 한다.

자본론은 헤겔의 변증법,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유기적으로 발전시킨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물질과 사회 현상의 관계를 밝히고자 했던 대작이라는 수식어도 있지만, 케인즈주의, 주류경제학이 자주 비판하는 교조주의적이고 환원론적인 상상이라는 꼬리표도 달려 있다. 그 비판의 근거로는 소비에트의 붕괴, 중산층의 탄생 같은 계층의 다양화, 자본주의의 몰락(공황)을 극복한 케인즈, 가치 창출이 노동뿐이라는 보는 단순성의 무모함, 산업-기술 발전에 의한 일자리 창출, 자본에 의한 가치 획득 등이다. 한마디로 마르크스주의는 실패했고, 자본주의는 여전히 건재하다. 그의 이론은 과학적 엄밀성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그 비판은 마르크스주의의 남용에서 발생된 오해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다고 한다. 마르크스 조차도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 했다 하지 않은가. 또한 자본주의의 불확실성과 파괴성, 노동과 자본의 관계가 역사적-사회적인 발전 과정 속에서 조직되어 진다는 점은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남긴다.
추상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관계를 이끌어내는 과정은 자본주의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이해에서 출발한다. 역사, 철학, 인간과 사회를 아우르는 마르크스의 이론은 진리는 아니다. 하지만, 주류 경제학의 모순과 대안을 모색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한다. 자본주의의 태생, 발전, 모순, 한계, 그리고 변혁이라는 흐름을 노동과 자본이라는 구조 속에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역사와 삶을 노동과 자본, 계급의 갈등, 은폐된 착취구조를 통하여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모든 가치는 노동에서 발생하고 이윤은 그것의 착취에 기인한다는 마르크스의 이론은 무모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양극화와 신자유주의가 화두인 이 시대에 그의 목소리가 과연 공허한 울림으로 치부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이 책이 자본론의 입문서라고 하지만, 그냥 읽기엔 어렵다. 확장된 지식을 필요로 한다. 공황의 발생, 국가의 역할, 다양한 노동계층과 자본의 발달, 파괴적인 경쟁과 이기적인 이윤획득활동, 축적에 따른 이윤율 하락 등 그 범위는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그에 따른 경제학 이론들이 줄줄 이어지기 때문이다. 세세한 부분들의 유기적 관계를 파악하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할 것 같다. 각 단락마다 ‘토의 주제와 추가 독서 목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은 독자들이 원하는 답과 질문이 무엇인지를 이미 서로가 알고 있는 듯 하다.

이 불안정한 세상, 모순과 갈등과 경쟁이 당연한 요구가 되었고, 그것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현실….

“상품은 화폐를 사랑하지만, 진정한 사랑의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119p
인간은 화폐를 사랑하지만, 진정한 행복의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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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1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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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에 투옥된 사람들, 공감할 수 없는 공간에 갇힌 사람들, 그들이 겪는 ‘현대인의 고독’은 스스로 만들어낸 경계를 풀지 못하고, 끊임없는 방어기제로서 서로의 관계를 의심하면서 일어선다. 신뢰는 금전적인 가치, 이해의 득실에 멀어져 간다. 그렇게 서로는 멀어지고, 목마름은 커지고, 커지는 욕망의 입은 무엇이라도 삼킬 듯이 흉폭하다. 메마른 영혼의 영양 결핍을 무엇으로 보충 할 것인가… 무엇이 그 입을 잠재울 것인가…

우리가 누군가의 경험을 듣고 싶어하는 것은 생체항상성의 작용이 아닐까.
‘사연 들어주기’, 그것은 ‘경험의 확장’을 경험하게 한다. 네트웤이 지식의 확장을 이루듯이 소통과 공감의 신경을 이어주는 것이다. ‘독거의 종말’을 고하는 노력은 귀를 여는 것부터가 시작이다.

이 책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귀를 뚫어주는 절절한 사연과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생과 사의 경계에 선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서있는 사람들, 환자와 의사의 관계는 무엇보다 ‘생의 의지’로 끈끈하게 이어진다. 뿜어지는 피와 으스러진 조직을 회복하는 것만큼이나 인간적인 관계의 회복은 커다란 감동을 준다. 헌신과 희생만 보였다면 오히려 그것은 비현실적인 세계로 빠졌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분노와 기쁨, 그리고 삶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인간적인 고민에 휩싸인 모습은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 벌어지고 일임을 확인시켜준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그래서 안타까운 사연들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다. 책을 쥔 손에서는 힘이 빠진다.
"아픈 사연들을 많이 간직한 사람들은 엄청난 고통에 대해서도 아무런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마음은 어디 그러한가. 왜 이토록 고통은 평범하고 순박한 사람들을 비껴가지 못하는지…” 279p

끔찍하다. 살아가면서 겪어야만 하는 고통을 한 곳에 모두 모아 놓은 것처럼 각 페이지에는 피와 눈물이 베어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돈 잘 버는, 외형적 아름다움을 완성시키는 성형외과도 있지만, 죽음과 삶을 그 누구보다 가까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숭고와 감사가 묻어난다. 의사라는 종족은 인간의 살과 피에 무감각하지 않을까, 인간적인 감정은 도려내어서 어디엔가 쳐박아 두었을 것이라는 편견도 지운다.

죽음을 느낄 때 비로소 삶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내가 살아있음을 감사하고, 그들의 가치를 존중할 줄 알게 된다. 시골의사 ‘박경철’씨는 자신의 경험을 솔직한 글쓰기로 우리에게 다가와 살포시 그 의미를 내어놓는다. 귀를 여는 것은 독자의 몫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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