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그날이다. 바로 벌초 가는 날. 조금전 8시쯤 저녁에 미리 출발한다고 우리집 서방 집을 나섰다.

결혼전 친정에서야 나야 딸이어서 그런지 별로 벌초 따라오란 말도 없었고, 어쩌다 따라가도 할아버지 할머니 같이 나란히 놓여있는 무덤 두개 달랑 아버지 엄마가 벌초하고 나는 싸간 도시락 맛나게 먹고, 그리고 오랫만에 자연산회로 배 빵빵 불리고 돌아오는게 다였다.

근데 결혼하고 첫해 시집의 이 벌초라는걸 따라갔었다.

우리 시집은 장손집이다. 시아버님이 8대 장손이고, 시아버님 형제만 9남매다. 그것도 지질이도 없는 집안에 장손이라는건 이익될 건 하나도 없고 지질이도 고생만 한다는 이야기다. 그나마 시골에 땅이라도 좀 있고 그런대로 살만하다면 모르겠지만, 우리 시집은 정말 가난했다. 그리고 사실은 지금도 가난한데 그나마 다행히도 엇나간 자식없이 다들 제자리 잡고 사는 바람에 그런대로 지금은 지낼만해졌다고나 할까...

어쨌든 장손이니 뭐니 이런거에 아무 생각이 없던 나에게 결혼하고 첫 벌초행은 일종의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 전날 밤에 가서 시골 작은 할아버지 댁에서 잠시 자고, 새벽 5시면 일어나 간단하게 아침밥먹고 일을 시작하더라.  그 때 벌초 따라간 사람만 해도 남자만 10명, 집안 대 출동이다. 예초기 들고 낫들고 새벽부터 시작한 벌초가 끝날 기미가 안보였다. 나는 무덤마다 가서 절하고, 그 다음에는 구석에서 놀란다. 낫질해봤자 도움도 안돼고.... 그래서 역시 도움안되는 시삼촌 한분과 밤줍고 놀았다.

무덤이 한군데 모여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 저기 산마다 흩어져있는걸 이동해가며 하는데, 지금은 그래도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는 길이 다 새로 나서 덜 힘든거란다. 한 2년 전만 하더라도 차가 못들어가는 곳이 대부분이어서 진짜 산 몇개씩 넘어 다니며 했단다. 그때는 예초기도 없었고....

어떤 무덤에 갔더니 옛적에 참판 벼슬까지 지내면서 잘나갔던 분이란다. 당연히 자리 좋은 곳에 무덤이 놓여있겠지.... 세상에 무덤이라고 갔는데 안보인다. 그냥 조그만 동산이다. 그 동산 전체의 풀을 다 베고 나니까 비로소 무덤의 형체가 보인다. 옛날에 잘나갔으면 후손들한테 좀 잘해주시지... 무덤자리 너무 양지바른데 해서 벌초가 장난아니다.

이날 내가 한 일, 밤 무지 많이 줍고 군데 군데서 감도 따먹고, 그리고 벌초한 무덤 갯수 세기. 모두 29개였다.

벌초 마치고나니 해는 뉘엿뉘엿.... 부산까지 갈일이 아득해진다. 하지만 전부 다음날 출근이니 그래도 바로 출발...

그다음부터 나 벌초 절대 안따라간다. 그리고 혼자서 벌초가서 땡볕에 생고생할 서방을 불쌍해 할 뿐....

요즘은 시댁어른들도 모두 연세들이 많으시고, 또 형제들도 이래 저래 빠지는 일이 잦아지면서 갈수록 일손은 줄어드는데 벌초할 무덤은 안 줄어들고....

근데 참 대책이 없다. 이미 오래전부터 해오던 일이고 여전히 조상 모시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큰일이라 믿는 시부모님이 계신한 이 벌초는 아마도 계속되리라. 그리고 그 후라 하더라도 요즘 보기드문 효자에다 장손의 의무에 충실한 시아주버님 역시 한번도 군소리 안하고 이 일을 하고 계신다. 늘 궁시렁거리는건 막내인 우리집 서방뿐.... 하지만 우리 시집처럼 위계질서가 확실한 가정에서는 우리집 서방의 궁시렁은 그저 철없는 소리일뿐 아무도 안 먹어준다.

그나마 난 내가 아들이 없음을 감사한다. 딸의 의무나 이런거에 대해서는 우리 시집은 정말 기대하는 것이 없다. 딸은 시집가면 남이라 생각하고, 우리 시어머님도 시집의 행사는 사돈의 팔촌까지 챙기게 하시면서, 지난번 시외할머니 돌아가셨을때는 '너희들이 출근해야지 어찌 오겠냐, 안와도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다. (물론 남편과 나는 말도 안된다고 직장에 특휴내고 장례식장에 가서 나는 이틀있다가 아이들때문에 돌아왔고 남편은 삼일장을 다 치르고 왔다. 아버님의 어머님께 할 도리가 있다면 당연히 어머님의 어머님께도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게 우리 생각이지만 이 부분에서 시집의 생각은 도저히 내가 뚫을 수 있는 벽이 아니다.)

우리집 두 딸은 우리 시집의 이런 의무에서 자유로울수 있을테니 그나마라도 감사해야지 하지만 시집의 달마다 돌아오는 제사와 벌초와 묘사라는것 등 온갖 전통이라는 이름의 부담들은 며느리인 내 입장에서는 정말로 부담일뿐.... 그리고 그런 것들에 대해 바꿔나가야 한다고 생각만 하는 우리집 서방에게도 부담이 될 뿐인데....

결혼 몇년 후 직장동료 중에 한 분이 자기가 아는 사람이 장손집 며느리였는데 정말 제사가 너무 싫어서 이민갔다는 얘기를 하는걸 들은 적이 있다. 솔직히 처녀때였다면 그래도 좀 심하군 생각했겠지만 그 때는 그 심정이 솔직히 이해가 갔었다.

그렇다고 내가 이민까지 가고싶다는 건 아니지만.....

그저 대책없는 넋두리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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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5-09-03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초하는거 불쌍해서 저는 나중에 죽으면 화장하려고 생각하고 있다는...^^;;

바람돌이 2005-09-03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저도 뺀질뺀질 대마왕입니다. 그러면서 불평불만은 많은.... ^^
날개님 /아마 우리 세대는 다 그러겠지요. 하지만 부모님 세대는 여전히 생각이 많이 다르시더라구요.

urblue 2005-09-03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저희 집은 단촐해서 벌초는 거의 서너시간이면 끝났거든요.
아버지 돌아가실 때 화장해 달라고 말씀하신 것도 자식들 나중에 고생할까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chika 2005-09-03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들없는 집은 딸들이 벌초가던데요...
우리집은 아들놈들이 모두 외지에 있어서 늙으신 아버지가 여전히 벌초하러 가십니다. 실은 아까도 두분이서 내일 도시락 반찬에 대해 얘기하시더라구요.

아영엄마 2005-09-03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우리 서방님도 내일 벌초간다고 오늘 막차타고 시댁에 갔어요. 작년까지인가는 시부모님 두분이서, 어떨 때는 시숙부님댁에서 하곤 했어요. 이제 힘에 부치시니 아들들보고 올 수 있으면 와라~ 하시네요. 저는 안 따라 갔어요..^^;; 그리고 저도 예전에 어릴 적에 친척어른들께서 벌초 하는데 따라 간 적이 있는데 진짜 산 넘고 넘었던-한 곳 하고 또 이동하고..- 기억이 납니다. 이후로 저도 안 따라 다녔죠..하하~

울보 2005-09-04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결혼전에는 친정아빠 산소를 나랑 동생이 ㅇ했는데 이제는 제부가 주로 하지요,시간이 되면 우리식구랑같이요,,

조선인 2005-09-04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윽, 처녀적 벌초의 악몽이... (여자라고 놀게 놔두지 않습니다. 일일이 음식도 올려야하거든요. ㅠ.ㅠ)
근데 시댁에선 오라고 안해요. 아버님도 둘째, 옆지기도 둘째. 히히낙락?

2005-09-04 09: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야클 2005-09-04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벌초 가야되는데 일 핑계대고 땡땡이 중. -_-;;

바람돌이 2005-09-04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urblue님/훌륭한 아버님이시네요. 근데 저희집은 양가가 다 아주 완고한 분들이라 전혀 그럴일은 없을 것 같네요...
chika님/요즘 많은 집들이 그렇죠. 그러다가 안돼면 돈주고 사람사서 하게되고... 근데 저희 시댁은 무덤수가 장난이 아니라서 돈주고 하다가는 집안 거덜나겠습니다. ^^
아영엄마님/저와 비슷한 처지.... 저도 다행인건 여자들보고는 따라오라는 소리도 안한다는 시댁...^^ 휴~~
울보님/딸 둘인 집안이시가 봐요. 저희 친정은 아들 하나 있지만 멀리 있다보니 친정 벌초도 우리집 서방 몫이 될때가 많죠.
조선인님/그런 땡재수가... 에구 약올라라~~ 이거 결혼을 다시 할 수도 없고..쩝~~
수선님/정말 맞아요. 우리집 서방이나 시댁의 남자들 봐도 남자라서 행복한거 별로 없는 것 같던데.... 의무만 댑따 많았지.. 근데 아직도 아들은 꼭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은 도대체 무슨생각으로 사는걸까요. 죽어서 먹는 제사밥이 그리 맛있을까요? 이 다음세대 아이들이 제사라는걸 지내게 될 것 같지도 않은데...^^
야클님/총각 때 땡땡이 많이 즐기세요. 결혼하면 것도 힘들어요. 우리나라 어른들 총각때는 어른으로 안치다가 결혼과 동시에 어른으로 취급해준다는 거 아닙니까? 그러면서 의무에 대해 아주 엄격해지시죠. 뭐 일반적으로 그렇단 말입니다. ^^
 
 전출처 : 히피드림~ >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출처:http://blog.naver.com/jangkong2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고종(高宗)과 후궁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이 회갑연에 얻은 딸로,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하였다



                                           돌을 맞은 덕혜옹주



5살 무렵의 모습



고종은 고명 딸인 덕혜옹주를 매우 사랑하여 최상류층의 어린 여아들을 모아 덕수궁 내에 유치원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어 일본의 학습원을 마친 뒤,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英親王)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증세는 조발성 치매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다.



 동경학습원 시절의 덕혜옹주

 

 

  1931년 5월 대마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해 딸 마사에(正惠)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에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이후 계속 병상생활을 하다가 1953년 다케유키와 이혼하였다. 유일한 혈육인 딸마저도 결혼에 실패하고 자살하는 비극을 겪었고, 1962년 1월 26일 귀국할 때까지 조선의 마지막 황녀로서 비극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결혼식 때의 덕혜옹주



덕혜옹주 부부의 다정했던 한 때. 1931년 10월~11월에 대마도를 방문하여 이즈하라에 있는 고등가(古藤家)의 정원에서 찍은 사진으로 옹주는 이때 한번 대마도를 방문했다고 한다.   

 



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는 오랜 이국 생활을 마치고 창덕궁 낙선재로 귀환했다. 수 십년을 병상에 있었던 옹주는 낙선재에 들어서자 눈물을 주르르 흘렸으며, 조선 마지막 왕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 윤씨에게 황실 예법에 맞게 절을 올렸다고 한다.(믿을까? 말까?)

 


 

  한국에서의 생활도 순탄하지 않아 귀국 20년 만인 1982년이 되어서야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1989년 4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회갑을 맞은 덕혜옹주.  정신질환 외에 중풍을 앓아 옹주의 노년은 고달프기만 했다. 좌측 할머니는 어린시절 덕혜옹주를 키운 유모이다. 

 

 

  남편이었던 소다케유키도 1985년에 사망하여 그의 무덤은 봉축비가 있는 곳에서 위쪽으로 곧장 가면 있는 만송원 뒷산의 종가 무덤(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종씨 선산) 위쪽 부분  맨 안쪽에 있다. 

 

  대마도주가 살던 곳인 긴세끼죠(金石城) 가는 길 입구에 서있는 현재의 봉축비는 결혼 당시에 세워진 것이 아니고 근래에 들어와 세운 것이다. 2001년 11월에 부산과 대마도 간에 정기 여객선이 취항하면서 새로 만들어 세웠다고 한다. 어찌보면 한국 관광객 하나라도 더 유치하기 위한 대마도의 술수라고 할 수 있겠다.(하기사 이런 일은 세상 어디에나 있으니 뭐라고 할 수는 없겠다. 일본 관광객 하나라도 더 끌어들이기 위해 춘천에 조잡한 욘사마 동상까지 세우려고 한 것을 보면` ` `)  1931년에 만들어진 본래의 것은 현재 것보다 작고 있던 곳도 계곡 안쪽이었는데 도로 공사로 철거되어 깨진 채 방치되었다고 한다.    


 

 

 

 비극적인 삶을 다간 덕혜옹주

  덕혜옹주의 남편인 소다케유키(宗武志)는 한국에 알려진 것처럼 난폭하고 무식한 사람이 아니라 일본 동경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수재로서 대마고등학교 교가를 작사, 작곡하고 대마도지에 시를 기고하였고 유화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등 시·서·화에 두루 재질을 보인 사람이었다.



소다케유키가 그린 그림으로 현재 나가사키현립 역사자료관 입구의 우측 벽면에 걸려있다.


 

  덕혜옹주의 비극에 대한 소문은 옹주가 소다케유키와 결혼하기 직전부터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그 진원지는 구 조선왕실의 상궁나인들이라 할 수 있다. 금지옥엽 조선옹주가 일본의 섬 백작과 결혼한다는 소문이 나자 조선 왕실은 발칵 뒤집혔고 1930년 이미 4년 전에 이복 오빠인 순종황제가 돌아가시고 나선 일본정부에 정식으로 항의할 사람마저 없었던 때에 이루어진 이 결혼식에서 상궁나인들은 상당한 치욕과 옹주를 동정하는 마음에 섬 백작에 관한 진실을 곡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백작이 애꾸에 곱추에 난폭하고 배운 것 없는 농장 주인인데 일본정부가 옹주와 결혼시키기 위해 편법으로 백작으로 만든 거라는 소문이 떠오르기 시작하고, 아무도 정정을 해주지 않자 조선 내에서는 사실로 굳어져 버렸다. 하지만, 사실 종무지 백작은 애꾸도 곱추도 난폭하지도 배운 것 없는 농장주도 아니었다. 소유게(宗家)는 대대로 대마도를 통치한 집안으로 종무지는 그 후손으로 대마도를 상속받았지만 명치유신으로 폐번치현(번이 없어지고 현으로 바뀌면서 번주의 자치가 사라지고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제가 시작됨)이 되자 황실에서 도주의 작위를 폐하고 백작의 작위를 하사한 것이다.


  종무지의 후원자는 다이쇼천황의 부인인 사다코 황후로 종무지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자 조선왕가의 딸로 지참금이 상당했던 덕혜옹주를 맺어주어 그 재정난을 덜어주려고 하였다. 사다코의 중신으로 맺어진 두 사람은 다분히 정략적인 결혼이었지만, 초반에는 행복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 황실로부터 백작위를 하사받은 종무지는 대학교수로 훗날 태어난 딸 마사에도 상당히 사랑하여 손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고 한다.


  훤칠한 키에 전형적인 일본의 고운 마스크를 지닌 그는 덕혜옹주와 결혼 후 대마도가 아닌 도쿄에 저택을 두고 그곳에서 생활을 했다. 결혼 2년 뒤 둘은 딸을 낳았지만, 딸 출산 후 덕혜옹주가 다시 정신병이 재발하게 되었다. 덕혜옹주의 정신병은 꽤 오래된 것으로 아버지의 죽음 후 일본으로 강제로 끌려와 일본인 귀족학교에서 이지매를 당하면서 향수병과 함께 커졌고, 어머니인 양귀인의 죽음 이후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당시 정신병은 신체장애와 함께 상당히 부끄러운 질병 가운데 하나였고, 특히 귀족인 덕혜옹주의 정신병은 당시에는 상당한 가십거리였었다. 종무지는 이를 꺼려해서 덕혜옹주를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할 생각을 못하고 집안에 가둬두는 것으로 대신하였고, 옹주가 자꾸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집밖을 나가려고 하자 발목에 족쇄를 채웠다고도 한다.


  태어나자마자 옹주의 정신병 재발로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옹주의 딸 정혜(일본명 마사에)는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더 사랑했고,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마사에의 죽음에 대해서도 어머니의 결혼생활 못지않게 말이 많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이 현해탄 투신자살 설.

  해방 후 조선 왕족을 감당하지 못한 종가 사람들에 의한 살해설.

  마사에는 해방 후 20대 초반의 나이에 일본인과 결혼하게 되는 데 연애결혼이었음에도 이에 적응하지 못하였고 얼마 후 가출을 하게 되었는데 가족들은 그녀를 애타게 찾지만 결국 야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고 전해진다. 정확한 사인은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다.


  덕혜옹주의 병이 점점 심해지자 종무지는 그녀를 병원에 입원 시켰고, 1951년 사다코 황후가 사망하자 이혼하게 된다. 그 후 종무지는 일본인 여성과 재혼하지만, 해방 후 1962년에 덕혜옹주가 한국으로 귀국하고 나서는 한번 보고 싶다고 찾아 왔던 적도 있었다고 하지만, 옹주의 충격을 염려한 측근에 의해 거부당했다고 한다.


덕혜옹주와 소다케유키는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 소설의 주인공 같은 삶을 살다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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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키노 > 어린이 동요모음 (가사포함)


어린송아지

사과같은 내얼굴

둥글게둥글게

얼룩송아지

숫자놀이

그대로멈춰라

햇볕은쨍쨍

곰세마리

학교종

악어떼

똑같아요

나비야

저금통

주먹쥐고

귀여운꼬마
 

내 동생

화가

종이접기

꼬부랑 할머니

아기염소

하늘나라 동화

여우야 여우야

코끼리 아저씨

잘잘잘

오빠생각

엄마돼지 아기돼지

꼬까신

겨울 물오리

우리 집에 왜 왔니

썰매

산토끼

꼬마 눈사람

동물농장

짝짜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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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 천년의 여행 - 신화에서 역사로
주경철 지음 / 산처럼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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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가끔 우리나라의 콩쥐 팥쥐가 신데렐라 이야기와 너무 비슷한걸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근데 어느 책에선가 콩쥐팥쥐는 우리 나라 근대기에 일본에서 읽혀지던 서양 신데렐라 동화책을 개작해 만든거라는 이야기를 읽고 의문이 풀렸었다. 근데 이 책을 읽다보니 이 이야기가 다시 나오는데 콩쥐팥쥐 이야기가 그렇다는 것도 하나의 설이라고 한다. 그냥 진짜는 어떤건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건 없다나....

이 책에서 그렇게 말하는건 신데렐라의 이야기가 약간 이러저러한 형태로 변형되어 존재하는게 19세기 후반에 콕스라는 여자가 모은것만 345종이란다. 어떻게 이렇게 비슷한 이야기가 전세계에 퍼져 있는것일까라는 의문에서 이 책은 시작한다. 사실 나 역시 궁금하다. 아무리 인간의 사는 모습이 거기서 거기라지만 비슷한 이야기들이 어찌 이리 많은걸까?

제1부 1장에서는 신데렐라 이야기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페로판본과 그림형제 판본을 주로 분석하면서 동화와 민담이 어떤 기능을 했는지를 얘기한다. 민담이 인생의 여러가지 어려운 측면에 닥쳤을 때 그것을 어떻게 내적 성숙을 통하여 해결해나가는가를 제시해주는 역할을 했다는 것인데 그것이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인 페로판본으로 가면 주인공의 내적 성숙은 어딘가로 가버리고 오로지 외부 - 즉 왕자의 구원에 의해 신분상승의 이야기로 전락해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극단에까지 간 것이 바로 디즈니의 신데렐라이다.  이 책 2부에 각종 신데렐라 이야기들이 수록되어있는데 책과 함께 해당 이야기를 읽으면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근데 페로 판본 뒤에는 아주 친절하게(?) 이야기의 교훈까지 담겨있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아주 귀한 보물

우리는 결코 거기에 물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귀한 것, 무한한 가치의 즐거움은

우리 모두 찬미하는 매력이다.......(매력? 무슨 매력? 성적 매력?)

근대로 올수록 여성이 더 수동적이어야 되고 그 수동성으로 말미암아야만 여성은 구원받을 수 있다. 그데 이런 개떡같은 철학이 오늘날에와서 디즈니에 의해서 끊임없이 확대재생산 되다니.... 그리고 거기에 어린 시절의 내가 열광했다니....

2부에 수록된 14개의 신데렐라 이야기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건 세번째 이탈리아의 고양이 신데렐라 였다. 이것은 유럽에서 문자로 기록된 신데렐라 이야기 가운데 가장 빠른 시기의 것이다. 17세기에 출판된 것인데 그만큼 당시 사람들의 자유로운 생각이 덜 검열되어 훨씬 자유로운 구술문화의 흔적을 보여준다. 흔히 지식층의 세련된 언어(?)가 덜묻었다고나 할까? 훨씬 솔직하고 담대한 표현들이 무척 재밌다. 그리고 주인공 역시 남의 손에 구원을 맡기는 바보 신데렐라가 아니라 훨씬 주체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바꿔나간다. 물론 초반에 잘못된 선택으로 고생을 하기는 하지만....(그리고 2부에는 세계 각지의 신데렐라 이야기들이 실려있다. 물론 그중에는 서양에서 전래된 얘기를 각색한게 아닐까 의심이 가는 것들도 있다지만....)

1부 2장에서는 유라시아 대륙에 산재해있는 신데렐라 이야기들이 얼마나 다양한 요소를 품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각 사회에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에 대한 해석에서는 저자 역시 지나치게 무리한 해석이 아닐까라는 의심이 드는 것도 있지만 비슷한 내용의 민담이라도 각 지역의 사회상황에 따라서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다.

3장에서는 신데렐라 이야기의 원천을 찾기 위해 신화의 세계로 들어선다.그리스 신화와 기독교 이전의 농민들의 전통신앙을 ?아가는데 사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실 수천년간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온 민담이라는 것 자체가 그 원형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이니 어차피 저자와 독자의 상상력 이외에 어떤 대안이 있으랴... 저자의 말대로 결론을 내려는 생각보다는 신화와 민담의 공통되는 기반이 뭘까를 찾아나가는 상상의 즐거움을 누리자....신데렐라형 존재의 근원을 신석기 시대까지 올라가 이승과 저승을 잇는 중간매개 기능을 하는 자로 상상할수도 있다는 것은 즐겁지 않을까?

책의 저자가 말하는걸 다 옳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고, 또 그러기에는 무리수가 많이 따르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민담의 그 풍부한 세계,- 더구나 내 어릴적 열광의 대상인 신데렐라가 아닌가 -를 이리저리 재보면서 책을 읽어나가동안이 참 즐거웠다. 그리고 부록인 2부의 세계의 신데렐라 이야기 역시 읽는 즐거움을 한껏 높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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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03 0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panda78 2005-09-03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지 재밌게 읽었어요. 베트남판 콩쥐 이야기가 제일 끔찍하더군요. ^^;

바람돌이 2005-09-03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님! 작업의 의미가 뭔가요. 무지하게 궁금해지는데 혹시 그쪽 관계 일을 하신다는 의미인가요? 궁금해요. 많이 많이요. ^^
판다님 맞아요. 특히 결말 부분이 끔찍하지요. 근데 중국이나 이 동아시아권 역사나 동화등을 보면 그런 대목이 시시때때로....에구 으시시....^^

아영엄마 2005-09-03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런 책도 있군요. 기회되면 한 번 읽어보아야겠습니다. ^^

바람돌이 2005-09-03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어요. 아영엄마님! ^^
 
 전출처 : 놀자 > 인터넷 TIP BEST 5

 

[1위] 동영상 끊김 없이 실시간으로 감상하기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 강의를 듣는데 버퍼링과 연결 해제가 반복되는 바람에 도무지 학습에 집중할 수 없다면? 인터넷 회선 속도가 느린 탓인가 싶어서 프리미엄으로 인터넷 서비스를 바꿔봐도 결과는 마찬가지라면?
실시간 동영상이 끊기는 이유는 회선 속도에서도 찾을 수 있지만 윈도 미디어 플레이의 설정이 잘못돼 화면이 끊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윈도 미디어 플레이어의 설정을 수정해 쾌적한 실시간 학습 환경을 조성하는 방법을 알아보자.


◀ 1. 윈도 미디어 플레이어를 실행하고 ‘도구’ 메뉴에서 ‘옵션’을 선택한다.


◀ 2. ‘옵션’ 창이 열리면 ‘성능’ 탭으로 이동한다. ‘연결 속도’ 항목에서 ‘연결 속도 선택’을 선택하고 드롭다운 목록을 열어 연결 속도를 ‘LAN(10Mbps 이상)’으로 설정한다. 그런 다음 ‘네트워크 버퍼링’ 항목에서 ‘버퍼링 시간’을 선택하고 입력란이 활성화되면 버퍼링 시간을 10초로 설정한다


◀ 3. 이제 ‘네트워크’ 탭으로 이동해 ‘프로토콜’ 항목에서 ‘UDP'의 체크 표시를 지우고 ‘스트리밍 프록시 설정’ 항목에서 ‘구성’ 버튼을 누른다. ‘프로토콜 구성’ 창이 열리면 ‘프록시 서버 사용 안 함’을 선택하고 ‘확인’ 버튼을 누른다.


[2위] 빠른 웹 서핑을 위한 익스플로러 환경 설정하기

웹 서핑을 할 때 링크된 그림이 보이지 않거나,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실행하면 프록시 설정을 구성하는 중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시작 페이지가 열리지 않는 때가 있다. 이런 경우 인터넷 속도를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자.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실행하고 ‘도구’ 메뉴에서 ‘인터넷 옵션’을 선택한다. ‘인터넷 옵션’ 창이 열리면 ‘고급’ 탭으로 이동한 뒤 스크롤 바를 아래로 내려 ‘탐색’ 항목을 찾는다. 여기서 ‘예약시 동기화할 오프라인 항목 표시’, ‘URL을 항상 UTF-8로 보냄’, ‘프록시 연결을 통해 HTTP 1.1 사용’ 항목의 체크 표시를 모두 지우고 윈도를 재시작하면 한결 빠르고 안정적으로 웹 서핑을 할 수 있다.


◀ 1. ‘탐색’ 항목에서 몇 가지 기능을 해제하면 보다 빠른 웹 서핑을 즐길 수 있다.

[3위] P2P 프로그램 사용을 방해하는 방화벽 없애기

윈도 XP에는 기본적으로 방화벽 기능이 활성화되어 있어 구루구루나 당나귀 같은 P2P 프로그램에서 파일을 교환할 때 파일 수신은 되는데 전송이 되지 않는다. 윈도의 방화벽 기능을 해제해 P2P 프로그램을 제대로 사용해 보자.
바탕 화면에서 마우스 오른쪽 버튼으로 ‘내 네트워크 환경’ 아이콘을 클릭하고 팝업 메뉴에서 ‘속성’을 선택한다. ‘네트워크 연결’ 창이 열리면 ‘로컬 영역 연결’의 ‘속성’ 창을 열고 ‘고급’ 탭으로 이동한다. 그런 다음 ‘인터넷 연결 방화벽’에서 ‘인터넷에서 이 컴퓨터에 액세스하는 것을 제한하거나 금지하여…’ 항목의 체크 표시를 지우면 방화벽 기능이 해제돼 P2P 프로그램 사용시 파일 전송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 1. 방화벽 기능을 해제하면 P2P 프로그램 사용시 파일 전송을 할 수 있다

[4위] 자동 완성 기능으로 사이트 주소 빠르게 입력하기

예전에 접속했던 사이트에 다시 접속하려는데 사이트 주소가 기억나지 않아 헤맨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럴 때 익스플로러의 자동 완성 기능을 켜놓으면 사이트 주소 중 처음 몇 글자만 알아도 해당 사이트의 주소를 금방 찾아내 접속할 수 있다.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실행하고 ‘인터넷 옵션’ 창을 연 뒤 ‘내용’ 탭으로 이동해 ‘개인 정보’ 항목의 ‘자동 완성’ 버튼을 누른다. ‘자동 완성 설정’ 창이 열리면 ‘자동 완성 사용 대상’ 항목에서 ‘웹 주소’를 선택한다. 이제 ‘확인’ 버튼을 누르면 웹 주소 자동 완성 기능이 활성화된다.


◀ 1. ‘자동 완성 사용 대상’ 항목에서 ‘웹 주소’를 선택한다.


[5위] 네트워크 속도 100% 즐기기(XP Pro)

윈도 XP에서는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네트워크 대역폭의 일정 부분을 여분으로 남겨두고 사용하지 않는다. 이것을 모두 사용할 수 있도록 설정해 인터넷 속도를 조금이라도 더 올려보자.


◀ 1. ‘시작→실행’을 선택해 ‘실행’ 창을 열고 ‘Gpedit.msc'라고 입력한 뒤 ‘확인’ 버튼을 누른다.


◀ 2. ‘그룹 정책’ 창이 열리면 왼쪽 화면에서 ‘컴퓨터 구성→관리 템플릿→네트워크→QOS 패킷 스케줄러’로 이동한다.


◀ 3. 오른쪽 화면에서 ‘예약 대역폭 제한’을 더블클릭해 ‘속성’ 창을 열고 ‘사용 안 함’을 선택한 뒤 ‘확인’ 버튼을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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