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가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심지어 책 제목조차 <아주 오래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이다. 백수린 작가의 이 에세이 속에서 작가는 반려견 봉봉이 나에게 온전한 신뢰를 주는구나라는걸 느끼며 봉봉과 온기를 나누는 그 순간 그렇게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고 느낀다. 산다는건 정말 별거 아닌 날들의 연속이지만 그 나날들 중 어느 한 순간은 빛이 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담담하지만 찬란하게 포착해내는 작가의 글이 너무 좋아서 연이어서 2권의 책을 읽었다. 사실은 소설 <봄밤이 모든 것>을 먼저 읽었다. 그리고 백수린 작가의 이야기가 너무 좋아서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너무 궁금해 에세이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읽었다. 2권의 책을 같이 읽으면 소설과 에세이가 하나로 섞인다. 에세이로 풀어내는 작가의 생활이 그대로 소설이 되었구나, 소설조차도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로 느껴지는 그런 느낌까지.....
원래는 나는 뭐라고 할까? 순한 맛 책이라고 할까? 너무 착한 사람들만 나오는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음식은 순한 맛을 좋아하고, 사람도 순한 사람을 좋아한다. 사람에 대해서는 내가 딱히 순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지 정말 순한 사람이 좋아요라고 말하면서 양심이 조금 찔리긴 한다. 책을 읽는 이유야 백 개 천 개도 댈수 있겠지만 그 중 중요한 것 하나는 현실의 세계와는 다른 사람, 다른 세계를 만나는 맛이니까... 어쨌든 그래서인지 순한 맛의 책보다는 차라리 매운 맛이 좋다. 뭐 그렇다.
그래서인지 요즘 인기있는 한국 작가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격찬을 하는 책이 내게는 취향이 아니었던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알라딘 서재 친구 책나무님 추천덕분에 이 책을 선택하고 소설 앞쪽 몇 페이지를 읽으면서 이 책도 취향이 아닌것 같아 살짝 머뭇거렸는데 첫 작품 <아주 환한 날들>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는 작가에게 폭 빠져버렸다. 어쩌면 나는 사랑에 빠진걸지도 몰라.....
<아주 환한 날들>은 혼자 사는 나이든 여성이 주인공이다. 남편은 먼저 떠났고, 딸과는 어디서부터인가 어긋나서 소원하다. 하루의 일정을 정하고 꼬박꼬박 운동하고 문화센터 강연도 듣고 흐트러지지 않은 생활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그리고 자신이 외롭다는 것을 잊고자 하는 그런 노년의 여성에게 어느 날 사위가 와서 앵무새 한 마리를 맡긴다. 새를 돌볼 생각도 없고 방법도 모르는 여성에게 사위는 한 달만 봐 달라고 사정사정하며 어린 앵무새를 맡기고 간다. 그리고 뻔하게도 여성은 앵무새와 사랑에 빠진다. 이토록 뻔하고 통속적인 이야기는 작가의 빛나는 문장으로 뻔하지 않은 이야기가 된다. 이 짧은 단편은 다음 문장으로 끝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 봄밤의 모든 것 36쪽
내가 지금 새로운 사랑에 빠지고싶은 것도 아닌데 나는 사랑에 빠진 노년의 그녀에게, 사랑에 빠지는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그녀에게 완전히 감정이입 해버렸다.
<빛이 다가올 때>에서도 마음을 사로잡는 문장은 계속된다.
한 번도 자신만의 욕망을 가져본 적 없던 언니가 그 때 어떤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는 걸 나로 하여금 마침내 깨닫게 했다. 그건 얼마나 달콤한 일이었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 이미 오래전 지나왔으나, 그런 시기가 틀림없이 내게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언제 누구에게 찾아오든 존중받아야 마땅했다. - 71쪽
에세이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읽다 보면 작가의 생활이라고 딱히 나와 다르지 않다. 내가 매일 출근하고 묵묵히 내 일을 하고, 퇴근해서 저녁을 먹고 죽지 않기 위해 운동을 나가고, 그 사이 사이 주변 내가 사랑하는 이들로 인해 웃고 우는 것처럼 작가도 매일의 생계를 위해 고민해야 하고, 규칙적으로 글을 쓰고 반려견 봉봉이와 산책을 하고 주변 사람들과 웃고 울고 그렇게 살아간다. 가끔은 내가 술안주가 맛있는 집을 찾아 돈버리고 몸버리는 쓸데없는 술집 탐방을 하듯, 작가는 아름다운 병에 든 꿀에 매혹되어 미세한 맛의 차이에 매혹되는 자신에게 실망하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한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사실상 평범하고도 지리한 일상에 때로 허무해질 때가 많다. 이렇게 사는게 사는건가? 내 삶은 너무 평범하지 않은가? 내 삶은 무슨 의미가 있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도 한편으로는 내일 또 출근해야 하는데 빨리 자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머리 한 켠을 꽉 채우고 있는 동시에 매일 같은 출근을 참 지겹게도 매일 싫어하는 나에게 또 실망하고....
그러니까 같은 일상에 매일 실망하는 내게 백수린 작가는 당신의 삶의 어느 순간은 분명히 아름다웠다고 얘기해준다. 그리고 그것은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말해준다. 심지어 그 아름답고 존중받아야 하는 순간이 그렇게 드물지 않았다고 그래서 우리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거 아니겠느냐라고 말해 주는 것이다.
소설은 소설로, 에세이는 작가의 소소하지만 아름다운 일상으로.... 내가 표현하지 못한 나의 일상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음을 잔잔히 잔잔히 얘기해주는 것이다.
봄밤도 여름의 밤도 모든 계절의 밤이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