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가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심지어 책 제목조차 <아주 오래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이다. 백수린 작가의 이 에세이 속에서 작가는 반려견 봉봉이 나에게 온전한 신뢰를 주는구나라는걸 느끼며 봉봉과 온기를 나누는 그 순간 그렇게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고 느낀다. 산다는건 정말 별거 아닌 날들의 연속이지만 그 나날들 중 어느 한 순간은 빛이 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담담하지만 찬란하게 포착해내는 작가의 글이 너무 좋아서 연이어서 2권의 책을 읽었다.  사실은 소설 <봄밤이 모든 것>을 먼저 읽었다. 그리고 백수린 작가의 이야기가 너무 좋아서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너무 궁금해 에세이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읽었다. 2권의 책을 같이 읽으면 소설과 에세이가 하나로 섞인다. 에세이로 풀어내는 작가의 생활이 그대로 소설이 되었구나, 소설조차도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로 느껴지는 그런 느낌까지..... 


 원래는 나는 뭐라고 할까? 순한 맛 책이라고 할까? 너무 착한 사람들만 나오는 책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음식은 순한 맛을 좋아하고, 사람도 순한 사람을 좋아한다. 사람에 대해서는 내가 딱히 순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지 정말 순한 사람이 좋아요라고 말하면서 양심이 조금 찔리긴 한다. 책을 읽는 이유야 백 개 천 개도 댈수 있겠지만 그 중 중요한 것 하나는 현실의 세계와는 다른 사람, 다른 세계를 만나는 맛이니까... 어쨌든 그래서인지 순한 맛의 책보다는 차라리 매운 맛이 좋다. 뭐 그렇다. 


그래서인지 요즘 인기있는 한국 작가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격찬을 하는 책이 내게는 취향이 아니었던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알라딘 서재 친구 책나무님 추천덕분에 이 책을 선택하고 소설 앞쪽 몇 페이지를 읽으면서 이 책도 취향이 아닌것 같아 살짝 머뭇거렸는데 첫 작품 <아주 환한 날들>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는 작가에게 폭 빠져버렸다. 어쩌면 나는 사랑에 빠진걸지도 몰라.....


<아주 환한 날들>은 혼자 사는 나이든 여성이 주인공이다. 남편은 먼저 떠났고, 딸과는 어디서부터인가 어긋나서 소원하다. 하루의 일정을 정하고 꼬박꼬박 운동하고 문화센터 강연도 듣고 흐트러지지 않은 생활을 유지하려 노력하는 그리고 자신이 외롭다는 것을 잊고자 하는 그런 노년의 여성에게 어느 날 사위가 와서 앵무새 한 마리를 맡긴다. 새를 돌볼 생각도 없고 방법도 모르는 여성에게 사위는 한 달만 봐 달라고 사정사정하며 어린 앵무새를  맡기고 간다. 그리고 뻔하게도 여성은 앵무새와 사랑에 빠진다. 이토록 뻔하고 통속적인 이야기는 작가의 빛나는 문장으로 뻔하지 않은 이야기가 된다. 이 짧은 단편은 다음 문장으로 끝난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작지만 분명한 놀라움이 그녀의 늙고 지친 몸 깊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나갔다. 수없이 많은 것을 잃어온 그녀에게 그런 일이 또 일어났다니. 사람들은 기어코 사랑에 빠졌다. 상실한 이후의 고통을 조금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되고 마는 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 봄밤의 모든 것 36쪽


내가 지금 새로운 사랑에 빠지고싶은 것도 아닌데 나는 사랑에 빠진 노년의 그녀에게, 사랑에 빠지는데 나이를 먹는 일 따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그녀에게 완전히 감정이입 해버렸다. 


<빛이 다가올 때>에서도 마음을 사로잡는 문장은 계속된다.


 한 번도 자신만의 욕망을 가져본 적 없던 언니가 그 때 어떤 시기를 통과하고 있었다는 걸 나로 하여금 마침내 깨닫게 했다. 그건 얼마나 달콤한 일이었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 이미 오래전 지나왔으나, 그런 시기가 틀림없이 내게도 있었다. 그리고 그건 언제 누구에게 찾아오든 존중받아야 마땅했다.  - 71쪽


 에세이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읽다 보면 작가의 생활이라고 딱히 나와 다르지 않다. 내가 매일 출근하고 묵묵히 내 일을 하고, 퇴근해서 저녁을 먹고 죽지 않기 위해 운동을 나가고, 그 사이 사이 주변 내가 사랑하는 이들로 인해 웃고 우는 것처럼 작가도 매일의 생계를 위해 고민해야 하고, 규칙적으로 글을 쓰고 반려견 봉봉이와 산책을 하고 주변 사람들과 웃고 울고 그렇게 살아간다. 가끔은 내가 술안주가 맛있는 집을 찾아 돈버리고 몸버리는 쓸데없는 술집 탐방을 하듯, 작가는 아름다운 병에 든 꿀에 매혹되어 미세한 맛의 차이에 매혹되는 자신에게 실망하고 고통스러워하기도 한다.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사실상 평범하고도 지리한 일상에 때로 허무해질 때가 많다. 이렇게 사는게 사는건가? 내 삶은 너무 평범하지 않은가? 내 삶은 무슨 의미가 있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도 한편으로는 내일 또 출근해야 하는데 빨리 자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머리 한 켠을 꽉 채우고 있는 동시에 매일 같은 출근을 참 지겹게도 매일 싫어하는 나에게 또 실망하고....


  그러니까 같은 일상에 매일 실망하는 내게 백수린 작가는 당신의 삶의 어느 순간은 분명히 아름다웠다고 얘기해준다. 그리고 그것은 존중받아 마땅하다고 말해준다. 심지어 그 아름답고 존중받아야 하는 순간이 그렇게 드물지 않았다고 그래서 우리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거 아니겠느냐라고 말해 주는 것이다. 

소설은 소설로, 에세이는 작가의 소소하지만 아름다운 일상으로.... 내가 표현하지 못한 나의 일상도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음을 잔잔히 잔잔히 얘기해주는 것이다. 


봄밤도 여름의 밤도 모든 계절의 밤이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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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6-30 04: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언제든 뭔가를 좋아하기도 하겠지요 그게 동물일 수도 있고 다른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게 있기에 살아가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아주 큰일 없이 사는 게 좋기는 하겠습니다 뭔가 일이 있으면 더 안 좋을 듯해요 일상을 살아가는... 그런 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던 때도 있었네요 그 시간이 지나갔지만, 그런 때 또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겠습니다 지금 즐겁게 살면 좋겠네요

바람돌이 님 유월 마지막 날 잘 보내시고 칠월 반갑게 맞이하세요


희선

바람돌이 2025-06-30 09:45   좋아요 0 | URL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삶은 쓸쓸하겠지요. 사랑의 대상이 동물이든 사람이든 온기를 나눌 수 있고 신뢰를 함께 한다면 그리 다르지 않을거 같습니다. 삶이 평탄하기를 바라면서, 그 평탄한 삶의 소중함을 또 잊는게 우리 사람이니 잊지 말아야 할 소중한 것들을 이렇게 책을 통해 다시 깨닫습니다. 희선님도 오늘 마지막 6월의 날 편히 보내시고 칠월 반갑게 맞이하세요.
 
세상 멋져 보이는 것들의 사회학 - 그럼에도 불구하고 던져야 할 질문
오찬호 지음 / 북트리거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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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알고 있던 것들은 더 디테일하게, 몰랐던 것들은 새롭게...수세식 변기, 에어컨없이는 살 수 없는 우리가 어떤 불편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개인의 불편한 마음과 작은 실천이 다가 아님을 자각하는것 . 그리고 다음은? 어쨌든 마음이 불편해져야 변화의 첫발을 뗄 수 있음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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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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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이야기를 고통에 잠식 당해 가는 여자 영혜와 그 고통을 지켜보는 이들의 이야기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 하지만 영혜는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오로지 꿈 이야기를 할 때만 나레이션으로 처리된다. 등장인물들 대부분은 영혜의 고통이 무엇 인지에 관심이 없다. 독자도 영혜의 고통은 오직 그 나레이션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주인공 영혜가 자기 목소리로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 어쩌면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소설의 진행을 따라 가다 보면 영혜의 고통의 연원을 짐작할 수 있다. 가부장적인 가족 내에서 가장 만만한 대상이었던 영혜에게 끊임없이 쏟아진 아버지의 폭언과 폭력, 결혼 생활에서 아내의 생각, 생활에 전혀 관심 없는 그저 가정부 또는 남편이 요구할 때 성욕의 대상으로만 보는 남편과의 관계. 예술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성적 환상의 대상으로 영혜를 치환해버리는 형부. 이렇게 쓰다 보니 숨이 턱턱 막힌다. 그 모든 고통들에 대해서 한번도 영혜는 자신의 입으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오직 꿈으로 이야기할  뿐이다. 왜 말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분명하다. 아무도 들어줄 이가 없기 때문이다. 시시때때로 계속되는 아버지의 폭력은 그저 참고 참아야 하는 것이지 어떻게 저항할 지 알 수 없다. 언니와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 이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던 어린 영혜의 말이 유일한 저항이었을 것이다. 아무 힘없는 저항. 

  어린 시절 자신을 물었던 강아지를 잔혹하게 죽이고 탕을 끓여먹던 아버지와 주변의 모습에서 폭력을 폭력인줄 모르는 사회의 단면을 본다. 그것을 고스란히 지켜보던 영혜의 눈에 강아지와 자신은 하나로 오버랩되었을 것이다. 아 저항하면 저렇게 고통스럽게 죽게 되는구나 같은..... 


  소설은 개인 영혜의 고통과 절망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영혜라는 한 인간의 고통일까? 그 시절 아버지의 폭력은 이집 저집 할 거 없이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저 일상이었고, 동네 남자 어른들이 키우던 강아지를 산에 데리고 가 두들겨패서 탕을 끓이던 것도 매년 있던 연례행사였다.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속에서 가장 고통받는 이는 약하고 어리고 그리고 순둥이라고 불리는 또는 얌전하고 착하다고 불리는 아이들이었다. 영혜같은 아이들. 그들이 어른이 되며 정말 운좋게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누군가를 만나지 못한다면 그들은 분노와 절망을 몸 안에 차곡차곡 쌓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은 사실은 압도적인 폭력에 압도당하는 대중의 문제이기도 하다. 48년의 제주 4.3, 80년의 광주라는 거대한 폭력은 폭력의 대상이 된 사람들을 영혜처럼 만들었을 것이다. 채식주의자에서 작가가 영혜의 고통을 지독하도록 보여주는 것에서 다음 작품이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로 이행하는 것은 그래서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영혜가 자신을 구원하는 것은 결국 폭력의 산물인 육식을 거부하는 것에서 시작해 스스로 나무가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이행한다. 온 몸에 꽃을 그렸을 때 자신이 다른 존재로 피어나는 느낌은 그녀를 스스로 거꾸로 서서 땅을 짚은 손과 머리에서 뿌리가 자라고, 거꾸로 벌린 다리와 사타구니에서 가지고 솟아나오는 환상으로 이어간다. 폭력에 대한 개인의 저항은 이토록 무모하고 이토록 압도적인 슬픔을 자아낸다. 그것조차 실현되지 못할 것을 알기에....

 "기껏 해칠 수 있는 건 네 몸이지. 네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게 그거지.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지"(259쪽) 언니가 영혜에게 하는 이 말처럼 폭력에 대한 저항은 이토록 절망을 동반한다. 


  이 책을 읽으며 폭력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한 인간뿐 아니라 사회의 모든 약자에 가해지는 모든 폭력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세월호사건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 앞에 가해지던 그 무수한 폭력에 대해서, 산업재해라는 그럴듯한 말로 가려진 노동현장에서 죽어간 자식과 부모 형제를 위해 오열하던 가족들 앞에서 그들이 만신창이가 되도록 가해지던 폭력. 물리적 폭력만이 폭력이 아니다. 무관심도 외면도 협잡도 결국 모두 폭력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사회를 병들게 한다. 그래서 이 책 <채식주의자>를 읽는 시간은 우리 안의 폭력에 대해 다시 한번 재고하는 시간이 된다. 소설은 영혜가 그 절망에서 벗어날 길을 보여주지 않는다. 현실의 절망 역시 그렇게 쉽게 벗어나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더 절망스러울 수 있지만 그럼에도 폭력을 폭력으로 정확하게 응시하는 데서 우리는 시작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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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6-07 17: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때는 모두 그랬다는 말로 정리하는 사람도 있죠 그런 거 정말 싫은 말이네요 바람돌이 님이 영혜 마음을 들어줘서 영혜가 조금 낫지 않을까 싶군요 힘든 사람한테 뭔가 말하지 못해도, 그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희선

바람돌이 2025-06-07 21:11   좋아요 0 | URL
들어주고 같이 이야기해주고 공감해주는거 쉬운 것 같았는데 정말 어렵다는걸 매일 느껴요. 영혜를 만난다면 어린 영혜를 만나서 손잡고 도망치자 해주고싶었어요

페넬로페 2025-06-08 1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너무 이런 말을 많이 듣고 살았던 것 같아요. 남들은 다 받아들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데 왜 너만 호들갑이냐고요. 폭력의 허용과 방종이 여지껏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 소설도 재독하고 싶어요.
어릴 때 우리집에서 기르던, 제가 사랑했던 똥개도 ㅠㅠ

바람돌이 2025-06-09 09:46   좋아요 0 | URL
왜 너만 호들갑이냐? 너만 참으면 된다 이거 진짜 폭력적인 말인데 이걸 폭력인지도 모르고 우리는 써왔지요. 이런 부분에서는 우리 사회의 인식이 쬐끔은 나아졌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갈길이 머네요.
어릴 때 저희집은 강아지를 안 길렀는데 옆집에 사는 친구네 집 강아지는 해마다 바뀌었다는..... ㅠ.ㅠ

책읽는나무 2025-06-08 0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너무 힘겨워서 한강 작가의 소설을 좀 멀리했었던 것 같아요.
이젠 기억이 가물하기도 하지만 유명한 작품이 되었으니 다시 찬찬히 읽어 보려고 사다 놓긴 했는데 아직 재독은 못했네요.^^˝
어느 날 서점에서 어떤 젊은 커플이 채식주의자 책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걸 엿들었는데 여성이 이 책 읽긴 했는데 한 번 더 읽어야 할 것 같다며 남친에게 얘길 하더라구요.
저도 맞아, 맞아. 고개 끄덕였었죠.
폭력과 절망을 정면에서 맞닥뜨리는 건 너무나 힘든 일이지만 정확한 시선으로 응시해야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지 않나, 바람돌이 님 마지막 문장에 공감하게 됩니다.
덕분에 나중에 재독하게 된다면 예전보다는 좀 덜 힘들 것 같겠단 생각이 드네요.^^

바람돌이 2025-06-09 15:10   좋아요 1 | URL
정말 읽기 힘든 소설이었어요. 영혜가 자신이 어떻게 고통스러운지 조금이나마 얘기하는 장면이라도 나왔다면 독자가 읽으면서 느끼는 고통이 좀 적었을 것 같은데 이 책에서는 한번도 영혜는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잖아요. 그저 주변 사람들이 보는 영혜의 모습이 묘사될 뿐이지요. 그 말없음, 말못함이 진정한 고통인 것 같았어요. 나는 고통스러운데 누구도 그걸 힘들다고 인정해주지 않는 데 대한 반응이랄까? 아마도 그래서 더 힘들었던 듯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점이 한강 작가가 여성 일반이 지나온 고통의 시간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절한 고통 그 자체로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저는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는 뭐라고 평가한다는게 저한테는 주제넘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둘을 제외하고는 여태 읽은 한강작가님 소설 중 가장 좋았어요.

솔직히 재독하시면 예전보다 더 힘들거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저는 그럴것 같아서요. ㅠ.ㅠ
 

















장편 소설을 쓰는 일에는 특별한 매혹이 있었다. 완성까지 아무리 짧아도 일 년, 길게는 칠 년까지 걸리는 장편 소설은 내 개인적 삶의 상당한 기간들과 맞바꿈된다. 바로 그 점이 나는 좋았다. 그렇게 맞바꿔도 좋다고 결심할 만큼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 속으로 들어가 머물 수 있다는 것이.    - 12쪽


  노벨 문학상 수상 강연문 속의 이 문장이 나는 참 좋았다. 하나든 둘이든 어떤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한계까지 밀어부치는 힘이 부러웠고, 그럼으로써 달라진 자신을 만나는 작가가 경이로웠다. <소년이 온다>를 쓰는 동안의 가장 큰 기억은 압도적인 고통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말은 내가 그 책을 읽을 때 느꼈던 고통과 만난다. 내가 책을  다 읽는데 걸린 시간이래야 10시간 남짓. 물론 잔상처럼 남은 고통은 좀 더 시간이 들었지만 그런 고통을 1년 6개월동안 매일 느끼면서 책을 쓴다는 것은 어떻게 견뎌야 하는 일일까? 쳇바퀴 돌듯 별 다를것 없는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 치열함이 과연 어디서 오는지도 알 수 없고, 인간으로서 버틸 수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일상의 힘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세계가 무너지는 일이 일어나도 사람들은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오늘의 일을 묵묵히 해낸다. 압도적인 재난속에서도 누군가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을 위해 밥을 짓고, 텐트를 치고, 쓰레기를 처리하고..... 그리고 그 현장을 바라본다. 그리고 흐르는 시간과 함께 잊어간다. 그걸 어떤 경우에는 일상의 회복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일상의 회복이나 일상의 힘이라는 용어는 괴로움을 감당하기 힘든 사람들이 도피하는 곳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반복적인 일상 속으로 들어가며 나와 내 이웃에 일어난 일을 망각속으로 집어넣는 일. 비겁한 도피.


 살아갈수록 내 안의 비겁함을 끄집어 내는 책들을 읽을 때마다 생각만 많아진다. 생각만큼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안되는 이유를 따지는 것도 많아진다. 작가가 책을 쓰며 달라진 자신을 만난다면 독자는 책을 읽으며 달라지는 자신을 만나야 할테다. 그것이 나와 세계를 이어주는 한 줄기 빛이고 실이 될테다.


 <희랍어 시간>을 끝내고 작가는 빛과 따스함의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소설을 쓰겠다고 생각했단다. 마침내 삶을, 세계를 끌어안는 그 소설을 눈부시게 투명한 감각들로 충전하겠다고.(15쪽).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작가가 다음에 쓴 소설은 <소년이 온다>였다. <희랍어 시간> 속 말을 잃어가는 여자와 시각을 잃어가는 남자의 이야기는 세계와 연결되는 끈을 잃고 고립되어 가는 사람들이 한줄기 가느다란 실을 찾는 이야기였을까? 내가 세상과 단절을 당할 때, 또는 내가 세상 속 다른 고통들에 눈 감으로써 단절시킬 때 - 그게 아냐 눈을 떠봐, 입을 열어라고 말해주는게 문학의 힘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생각은 많아지는데 결국 고민은 나에게로 돌아온다. 


 표지 속 작가의 북향 집 작은 정원에 만들어진 여린 빛창을 두고 두고 보며 희망을 생각한다. 언젠가 저 작은 빛창이 작가에게 따스함으로 다가가는 작품을 만들어 주겠지. 아마도 그 때는 세상이 이토록 야만적이지는 않겠지라는 어리석은 희망을 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희망으로 살아낸다고 그렇게 생각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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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5-31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편한 독서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바람돌이 2025-06-01 23:48   좋아요 1 | URL
불편한 독서 맞네요. 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해주어서 저는 좋았습니다
 

 













작가는 어릴 때부터 다른 것인가? 정녕 떡잎부터 알아본다라는 말은 진리인 것인가? 이 책에서 한강 작가님이 8살 때 쓴 시라고 내놓은 걸 보니 이게 도대체 무슨 8살이야싶다. 그 무렵 나의 일기장을 보면 딱 4문장이다. "아침에 학교에 갔다. 그리고 집에 왔다. 저녁밥을 먹었다. 참 맛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은 저녁밥을 먹었다가 친구들과 놀았다로, 참 맛있었다가 참 재미있었다로 바뀌고 이 두가지 예제가 무한 반복 되는 것이었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아름다운 금실이지.


여기서 첫 번째 의문 과연 8살이 이런 의문을 가지고 시를 쓰는 것이 가능한가?

두 번째 의문 8살이 문장부호까지 야무지게 맞춰서 글을 썼다. (책 속에 한강 작가님이 사진 찍어서 올린 시집페이지가 있다. 정말 물음표 마침표 완벽하게 찍었다.) 


그러니까 어린 시절 시골 동네에서 혼자서 학교 입학하기도 전에 한글을 떼서 동네 천재 소리를 들었던 내가 

참 맛있었다와 참 재미있었다를 무한 반복하고 있을 때 한강 작가님은 고도의 추상 능력을 구사하며 사랑에 대해 논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 이 정도는 돼야 노벨 문학상을 받는것이구나. 작가가 되지 않기를 참 잘한거 같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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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05-22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 결론이 ㅋㅋㅋㅋㅋㅋㅋ

바람돌이 2025-05-23 15:50   좋아요 1 | URL
이 글은 의식의 흐름에 따라 쓴 글입니다.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이랄까요? ㅋㅋ

수박 2025-05-22 1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저도 동의하고 갑니다..

바람돌이 2025-05-23 15:52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가 작가가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아니면 문장의 결론이 이상하고 문맥에 맞지 않다 중 어느 것에 동의하시는 것일까요? ^^ 반갑습니다. 수박님

단발머리 2025-05-22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다른 결론이었으면, 바람돌이님 못 만났을 수도 ㅋㅋㅋㅋㅋㅋ화면으로만 만나는 사이? ㅋㅋㅋㅋ

바람돌이 2025-05-23 15:54   좋아요 1 | URL
다른 결론이었으면 제가 여기서 이런 글을 쓰지 않고 책을 팔고 있겠지요. 그래서 단발머리님을 알게 되어서 저는 좋습니다. ㅎㅎ

2025-05-22 2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5-23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25-05-24 0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포기하시고 곁에 계셔주셔 감사합니다.ㅋㅋㅋ

바람돌이 2025-05-25 21:32   좋아요 2 | URL
ㅎㅎ 역시 아름다운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