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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돌바람 > 나의 병역거부 소견서 - 김훈태

나의 병역거부 소견서

- 저의 꿈은 좋은 선생님입니다


경기도 평택시 군문초등학교

교사 김훈태



1. 저는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저는 아이들과의 생활 속에서 교육의 목적이 평화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게는 평화주의의 신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들이 제게 가르쳐준 삶의 자세입니다. 남을 미워하지 말 것, 그리고 더 나아가 모두를 사랑할 것. 미워하는 마음에서 폭력은 시작됩니다. 제 뜻대로 아이들이 따라 주지 않을 때, 저는 화가 나고 미워지고 폭력을 사용하고 싶음을 느꼈습니다. 상대방을 자기보다 낮게 깔보고 모욕적으로 낙인찍으며 미워하지 않는 이상 폭력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평화를 가능케 합니다. 아이들은 사랑받기 원했고, 저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그것은 폭력의 두려움이 없을 때 비로소 가능했습니다. 어느 누구든 미워하지 말고 사랑할 것. 저는 제 자신이 다치거나 상처받고, 심지어 죽는다 해도 다른 이를 해칠 수 없다는 신념이 있기에 집총을 거부합니다.


2.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면 세상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집총거부를 마음먹기 전부터 채식을 했습니다. 고기를 몹시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고기가 저처럼 기쁨과 슬픔, 아픔을 느끼는 생명의 죽은 몸이라는 사실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그 뒤로 고기를 먹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소, 돼지, 닭과 같은 육고기를, 나중에는 생선과 우유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군사훈련과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군사훈련은 저와 똑같은 사람임이 분명한 ‘적’을 빠르고 정확하게 죽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전쟁은 곧 대량살육임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그 말들 속에 숨어있는 증오와 폭력을 오랫동안 생각했고, 결국 총을 들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제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 역시 또 하나의 폭력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저는 아이들이 좋습니다. 교육대학 시절 이 길이 진정 나의 길인지 고민에 빠졌을 때 저에게 길을 보여준 것은 아이들이었습니다. 3학년 첫 실습 때 만났던 아이들의 환한 웃음과 꾸밈없는 사랑은 제 모든 것을 교직에 걸게끔 이끌어 주었습니다. 서툴고 부족한 교생 선생을 아이들은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였고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감격적인 경험이었습니다. 당시 2학년이었던 아이들은 제 주위로 다가와 눈을 반짝이며 말을 걸었고, 자기들끼리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아이들은 먼저 마음을 열고 다가왔습니다. 발령을 받아 만나게 된 우리 아이들 역시 기쁨과 사랑으로 저를 반겨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솔직하고 또 그만큼 여려서 기쁘면 크게 웃고, 슬프거나 억울할 때는 처절하게 울곤 합니다. 하지만 지나간 일은 금세 잊고 다시 웃으며 어울려 지금을 삽니다. 아이들의 그런 모습이 저는 참 좋습니다.


4. 저는 사랑하는 아이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계속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의 군대가 징병제가 아니라 모병제라면, 제가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솔직히 평화주의의 신념을 갖게 되었음에도 저는 오래도록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도저히 총을 들 수 없다고 결심한 뒤에도 번민을 내려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신념과 현실 사이의 먼 거리에 있었습니다. 저는 올해로 교단에 선지 5년째가 됩니다. 이제 조금쯤 수업에도 자신감이 생기고 나름의 교육철학도 갖게 된 지금 아이들 곁을 떠난다는 것은 큰 아픔이자 슬픔입니다. 그러나 제가 굳이 신념에 제 삶을 거는 것은 평생 평교사로 지내시다가 일찍 세상을 뜨신 아버님의 가르침 때문입니다. 제 아버님은 고등학교 윤리 교사로 학생들과의 생활을 진심으로 즐거워하셨고, 말년에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가입하실 정도로 진보적인 분이셨습니다. 암으로 투병하시던 아버님은 당시 교육대학 졸업을 앞두던 저에게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제대로 살아라. 아버님은 당신의 삶을 후회하셨습니다. 더욱 치열하고 더욱 용기 있게 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제 미래였고, 당신의 죽음은 제게 적당히 타협하며 비겁하게 사는 삶을 단호히 뿌리칠 수 있는 태도를 갖게 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쉰둘이라는 젊은 나이에 가족과 동료와 수많은 제자들의 눈물 속에서 눈을 감으셨습니다.


5. 고백하자면, 저는 평화라는 이름 앞에서 결코 떳떳할 수 없습니다. 초임 시절 저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거친 말을 하거나 매를 든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화가 나서 꿀밤이라며 주먹으로 머리를 때리거나 손바닥으로 등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책을 바닥에 내리치거나 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폭력은 쉬운 선택이었습니다. 공부하지 않는 아이나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게 당장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역시 폭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쉽고 편하다 해도 가르치는 도구로 폭력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 역시 저와 동등한 인격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폭력적인 상황에서의 교육은 아이들을 수동적이고 공격적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결코 체벌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 깊이 다짐한 뒤 비폭력의 방법을 찾아보았습니다. 그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 비폭력의 방법은 사랑이었습니다. 자기극복이었습니다. 끊임없는 탐구였습니다. 제 모든 마음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협동을 바탕으로 한 학급운영이었습니다. 집착하지 않고 불안을 내려놓으며 관심을 쏟는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저는 조금씩 아이들과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저 자신도 교사로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참회와 수행의 연속이었습니다.


6. 위아래가 분명한 유교적 문화에 오랜 일제 식민지 경험, 그 군국주의의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독재정권의 병영문화와 이러한 악습을 철저히 청산하지 못한 민주화 시대를 거친 현실에서 학교는 근본적으로 그 교육철학이 바뀌지 않는 한 폭력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학교에서 군사주의와 국가주의는 아직도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월요일이면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국기에 대해 맹세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차렷과 열중쉬어의 부동자세로 교장선생님의 훈화를 듣고 이열종대로 교실에 들어가야 합니다. 경쟁과 발전을 당연시하고 정당한 전쟁론을 옹호하며 비장애인과 이성애자를 정상인으로 여기게 하는 교과서도 성찰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 가치는 요원하기만 합니다. 문제의 실마리는, 사회의 억압 구조를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인간은 누구나 동등한 인격체이며 내가 피해를 당했다고 해서 똑같이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그렇게 하는 이유를 살피고 이해하는 평화 정신과 그 실천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 대중에게 보여준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라고 믿습니다. ‘사랑 앞에 적은 없다’라는 불가의 가르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연장선에서 저는 전쟁과 군대를 생각합니다.


7. 군대의 목적이 평화를 지키는 데 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매년 수많은 청년이 국방의 의무를 자발적으로 이행하는 것 역시 가족과 이웃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병제가 시행되지 않는 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저에게도 그 의무는 피할 수 없는 길이고 피해서도 안 됨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저는 그 방법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며, 다른 방법으로 우리의 평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해 저는 집총을 거부할 뿐이지 ‘병역’ 그 자체를 기피하거나 거부할 뜻은 없습니다. 이미 우리나라에는 산업기능요원, 전문연구요원, 공익근무요원, 공중보건의, 의무소방, 의무경찰, 해양경찰, 상근예비역과 같은 대체복무가 있으며, 이를 통해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젊은이도 20여만 명입니다. 제가 이와 같은 대체복무를 마다하는 이유는 4주간의 기초군사훈련 때문입니다. 상식적인 판단에서 ‘그깟 4주 훈련’은 별 것 아닐 수도 있겠으나 저를 비롯한 많은 집총거부자에게 그 4주는 ‘결코 건널 수 없는 강’입니다. 총검술을 배우고 사람을 대신한 과녁에 사격을 하는 일련의 훈련은,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생명을 해치진 않겠다는 평화주의에 정면으로 위배됩니다. 그 기간은 신념을 송두리째 무너트리는 시간인 것입니다. 현역병의 그것과 비교하기는 힘들겠으나 만일 더 어렵고 더 위험하며 더 긴 조건의 대체복무라 해도 신념에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기쁘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군사훈련만이 아니라면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는 각오가 저에게는 있습니다. 감옥에 가야한다 해도 당당하게 가겠지만, 그보다 더 사회에 봉사하고 헌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8. 제 꿈은 좋은 선생님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배운 평화와 사랑을 말이 아닌 몸으로 실천하며 성장해 가고 싶습니다. 제게는 평화의 신념이 있습니다. 그 신념은 비겁하고 무기력한 것이 아닌, 깨어있는 마음과 적극적인 사랑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온화하고 너그러우나 분명하고 단호한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지금은 비록 아이들 곁을 떠나게 되겠지만, 이 행동이 진정한 의미의 죄(true crime)가 아님을 알고 있으며,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 아이들 앞에 설 수 있음을 확신하므로 마음은 어둡지 않습니다. 제 작은 행동을 통해 이 땅의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평화와 신념의 의미를 되새기고 어떤 물음을 갖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도 저마다 다른 신념을 갖고 꿈을 키워갑니다. 군인이 되겠다는 아이도 있고 종교인이 되고 싶다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 아이들의 신념과 꿈에 간섭하고픈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저마다의 신념을 소중히 여기고 다른 이의 신념 역시 존중하며 함께 평화롭고 행복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9. 한 남자가 오래된 온천을 촛불을 밝힌 채 건너고 있습니다. 천장에서는 물이 쉼없이 쏟아지고 촛불은 금세 꺼질듯 위태로워 보입니다. 남자는 손우산으로 촛불을 소중히 가리며 조심스레 걷습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그는 온천을 무사히 건넙니다. 그리고 혼절하고 맙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노스탤지어>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요근래 자주 떠오르는 이미지 중 하나입니다. 본래 영화에서는 이 장면이 구원에 대한 메타포로 사용되지만 저는 그것이 깨어있음에 관한 은유처럼 여겨집니다. 우리는 저마다 촛불을 한 자루씩 갖고 있는 게 아닐까요. 환하게 타오르던 촛불은 우리의 무지와 게으름으로 인한 일상의 황폐 속에서 시나브로 사그라지는 건 아닐까요. 어느 날 문득, 꺼진 촛불을 바라보는 우리의 멍한 눈동자를 생각해 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틱낫한 스님의 시를 한 편 소개하며 두서없는 글을 마칠까 합니다. ‘나의 촛불이 꺼지지 않기를, 그리고 이 밝고 따스한 빛을 나눌 수 있기를.’


10. 권  유  - 틱낫한

약속하세요, 약속하세요.

지금 이 순간 내게 약속하세요.

하늘 한가운데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동안

내게 약속하세요.


누군가 태산 같은 증오와 폭력으로

당신을 산산이 부수더라도

한 마리 벌레를 대하듯

당신의 삶을 짓밟더라도

당신의 사지를 절단하더라도


형제여, 기억하세요.

그 사람은 당신의 적이 아니란 걸.

오로지 당신의 사랑과 자비만이

스러지지 않고

멸함이 없으니

증오로는 결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날

당신이 홀로 잔악함과 마주할 때

당신의 불굴의 용기와

사랑으로 가득한 고요한 눈동자와

크나큰 고통을 이기고 외딴 곳에 홀로 피어난

한 송이 꽃과 같은 당신의 미소를

아무도 알지 못하더라도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삶과 죽음을 거듭하면서

여전히 당신을 지켜볼 것입니다.

또 다시 혼자되어

당신의 사랑이 영원함을 기억하며

나는 머리를 숙인 채 계속 걸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아무리 멀고 험난할지라도

내 발걸음을 비춰 주는 해와 달은

여전히 그 곳에 있을 것입니다.

 

2006년 03월 22일

 

>>아, 이런 일이 있었군요. 양심적 병역거부 어떻게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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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정욱식 대표의 편지]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안녕하십니까? 평화네트워크 대표를 맡고 있는 정욱식입니다.

지난 7년을 돌아보면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한반도 안팎에 많은 일들이 발생해 경황없이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단체 내부적으로도 처음 3년간은 저 혼자 상근을 하다시피 했는데, 점차 일하는 분들이 늘어 지금은 저를 포함해 4명의 상근자가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눈치 빠른 분들은 아시겠지만, 여러분께 이렇게 편지를 드리는 이유는 도움을 요청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평생회비를 납부한 분들을 포함해 현재 평화네트워크에 회비(후원회비 포함)를 보내는 분들은 300명 정도입니다. 대부분의 수입을 회비에 의존하다보니, 재정 상황이 크게 열악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현재 매달 200만원 가량 적자가 생기고 있는데, 다행이 예전에 모아둔 돈이 있어 그럭저럭 버티고 있습니다. 여러분께 이러한 사정을 말씀드리며, 몇 가지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회원이 아닌 분들께 여러분께 회원가입을 부탁드립니다.

클릭! 회원가입하기

다음으로 기존 회원분들 가운데 여력이 있는 분들께서는 회비를 인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클릭! 회비 인상 메일 보내기(network@peacekorea.org)

아울러 주위 분들에게도 평화네트워크 회원 가입을 권해주시면 감사 드리겠습니다.

혹시 정기적으로 회비를 납부하기가 어렵지만 평화네트워크를 돕고자 하는 분들께서는 연회비 일시불이나 평생회비를 납부해주셔도 좋습니다. 또한 소액이라도 후원금을 보내주시면 평화네트워크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후원금 보낼 계좌: 조흥은행 325-04-581037 (정욱식-평화네트워크)

흔히 평화운동을 가리켜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합니다. 나름대로 노력해왔지만, 북핵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고, 한미동맹은 미국 패권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으며, 사람들 먹고사는 문제는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는데 국방비는 매년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이 말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평화네트워크의 존재 이유는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무모한 일일지라도 '反 평화의 바위'를 깨뜨리는 일은 멈출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에게는 그 바위를 깨뜨릴 수 있는 계란이 필요합니다. 바위에 구멍을 만들고 갈라지게 하는 낙수가 필요합니다.

모쪼록 도움을 주시어, 이제 막 걸음마를 뗀 평화네트워크가 건강하게 자라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주저하지 마시고 회원가입과 회비인상, 그리고 후원금 보내기에 나서주십시오. 열심히 활동해서 보답하겠습니다.

2006년 2월 28일 정욱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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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인권활동가 박래군, 조백기를 석방하라!

"두 인권활동가 구속은 '정치적 구속'" 박래군 조백기 석방촉구 기자회견
출처 : 민중의소리 2006-03-22 18:23 | VIEW : 220

"두 인권활동가 구속은 '정치적 구속'"
282개 시민사회단체, 인권활동가 박래군ㆍ조백기씨 석방 촉구

민중의소리 서정환 기자    

"두 인권활동가를 즉각 석방하고 평택미군기지 확장 계획을 철회하여 농민들에게 평화롭게 살 권리를 보장하는 것만이 정부, 경찰, 국방부의 자멸을 막는 길임을 명심하라"

  지난 15일, 인권활동가 박래군, 조백기 씨를 황새울에서 폭력적으로 연행한 경찰과 정부에 대해 282개 시민사회단체들이 던진 경고이다.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 인권단체연석회의, 전국민중연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평택미군기지확장저지 범국민 대책위, 장애인차별철폐연대 등에 소속된 이들 각 사회ㆍ시민단체들은 22일 오전 9시경 안국동 느티나무 까페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은 각 시민사회 단체 회원들과 취재진이 몰려 기자회견장의 모든 좌석과 통로 등이 발디딜 틈도 없이 메워진 상태에서 진행되었다.
  
  각계 시민ㆍ사회단체들은 "박래군, 조백기씨에 대한 구속은 평택 주민들의 삶이며 생명인 평택 평야를 지켜내는 운동에 쐐기를 박고, 앞으로 강제수용을 강행하겠다는 의도에 따른 '정치적 구속'"이라고 주장하며 평택미군기지확장 계획과 두 활동가의 구속을 강력히 규탄했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통해 "인권활동가들은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의 권리가 박탈 당하는 현장에 함께 해야 할 숙명적 책임이 있으며, 유엔 총회는 1998년, '세계적으로 인정하는 인권 및 기본적 자유를 증진, 보호하기 위한 개인, 단체, 기관의 권리와 책임에 관한 선언문(결의안 53/144)'을 채택하여 인권활동가들의 활동을 국제 규범으로 명문화 하고 있다"면서 구속된 인권활동가 박래군, 조백기씨 석방과 함께 평택미군기지 확장과 강제 토지수용 중단, 평택주민들의 평화적 생존권 보장 등을 요구했다.
  

△회견문 낭독 중인 김지태 팽성대책위 위원장 ⓒ민중의소리  
  
또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는 "세계 100여개 나라, 10만여명에게 전달되어, 인권침해 당사자에 대한 격려와 정부에 대한 탄원서를 보내는 활동을 불러올 '긴급구명호소'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두 인권활동가의 석방뿐만 아니라 '한반도 평화를 여지 없이 무너뜨리는 전략적 유연성의 물질적 토대이자, 총 806만 8천평의 거대 부지가 전쟁기지로 건설되는 평택 미군기지확장 저지'도 강력히 촉구했다.
  
  이들 단체들은 기자회견 이후 '인권활동가 박래군, 조백기 석방을 위한 긴급행동(긴급행동)'을 구성하여 '매일 오후 6시 부터 8시까지 광화문 앞에서 대시민 캠페인 진행', '국가인권위원장과 면담', '560일이 넘는 평택 대추리 촛불집회를 서울로 확산시키는 첫 촛불문화제 개최' 등의 향후 계획도 밝혔다.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 팽성대책위 김지태 위원장은 보도자료를 낭독하기 전, "수 십년을 농사 짓고 살아온 사람들을 내 쫓으면서 그 땅을 미군에게 넘겨 주려고 밀어 붙이는 것은 '공권력'이 아니라 '공폭력'이며, 이 공폭력에 의해 4분의 할머니들이 중상을 입는 것을 본 젊은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몸을 던져 할머니들과 팽성의 농지를 지키려 할 것"이라며 구속된 박래군, 조백기 씨의 행동을 옹호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난 후, 일단의 인권 활동가들은 박래군, 조백기 씨 구속에 항의하는 서한을 청와대에 전달키 위해 청운동 동사무소로 이동하여 별도의 기자회견을 가졌다.
      
  
△청와대 인근 청운동 사무소 앞에 임시로 열린 2차 기자회견 ⓒ민중의소리

  인권실천시민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은 "면회를 갔더니 박래군씨가 '20년 만에 유치장에 들어와 보니 많이 좋아졌다. 우리가 놀고 있었던게 아니구나'라며 인권운동가로서의 관찰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며 "그러나 박래군, 조백기 씨에 대한 검찰의 공소장을 보니 '반미운동을 직업으로 삼는 일단의 불법 집단이 평택 주민을 꼬득여 반미 집회를 선동하고 평택을 불법 지역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법의 이름으로 심판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86년 이후와 하나도 달라진게 없는 극우, 공안적 시각의 소장이다"라고 규탄했다.
  
  
△구속된 조백기 씨의 조카와 함께 기자회견에 참석한 조 씨의 동생 선희씨 ⓒ민중의소리
  
91년, 노태우 정권 타도와 학원자주화를 위한 시위 도중 백골단의 폭력으로 사망한 강경대 열사의 부친 강민조 유가협 이사장은 "누가 뭐래도 노무현 정권은 지금 구속된 이 두분들과 같은 양심적인 운동가들 때문에 정권을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며 "이제 2년 밖에 남지 않은 권력을 역사의 오점으로 남기지 말라"고 경고했다.
  
  구속된 조백기씨의 조카를 업고 온 조씨의 동생 선희(33)씨는 "오빠는 평생 친구와 다툼도 없이 평화롭게 살던 사람이고, 법학 공부를 하며 뜻한 바가 있어 인권운동에 뛰어 들었다"며 "이번 구속이 '폭력이나 공무집행방해'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일이라는 걸 안다. 모두의 노력으로 구속된 오빠와 박래군씨를 석방시키자"고 말했다.
  
  항의서한을 전달한 각계 대표자들은 경찰측의 제지로 도보가 아닌 차량을 이용하여 청와대 측에 항의서한을 전달하러 갈 수 있었다. 시민단체 회원들은 차량을 이용한 이동 과정에도 경찰측과 차에 탄 사람들의 수 등을 놓고 실갱이를 벌여야 했다.
  
  항의서한을 든 대표자들을 청와대로 보내고 난 후 기자회견 참가자들은 '올해도 농사 짓자'라는 구호를 평택에서 생산된 쌀로 쓰는 상징의식을 가졌다.
  

△항의서한을 보내고, 남은 기자회견 참가자들이 상징의식을 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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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한홍구 - 현대사 공부하지마 다쳐!

현대사 공부하지마 다쳐!

그들은 대한민국을 비하하기 위해 지워진 역사를 찾아가는 열정을 불태웠을까… <인식>과 <재인식>논란을 계기로 더듬어보는 70~80년대 ‘한국사 연구’의 추억

요즘은 대학입시 수석 합격자를 인터뷰하는 관행이 사라졌지만, 과거 우리는 판에 박힌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과외는 받지 않았고, 오직 학교 수업만 충실히 했다고…. 가물에 콩 나듯 그런 성실한 학생도 있었겠지만, 들리는 소문은 그와는 정반대인 경우가 많았다. 학교 수업만 성실히 받았다는 말만큼이나 믿기 어려운 말이 ‘아무런 정치적 의도가 없었다’는 말이다. 지금 “어떤 현실정치적 함의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자임하는 책이 세간의 화제가 되고 있다.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이 바로 그 책이다.

친일문제 다시 거론하기도 힘들어

이 책의 머리말에서 박지향은 “1980년대에 출간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하 해전사)을 읽고 ‘피가 거꾸로 흘렀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언급을 지면을 통해 접하고, 우리 사회의 역사 인식을 이대로 두고 본다는 것은 역사학자의 ‘직무유기’라는 생각이 들”어 이 책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 군사독재가 판을 치던 1970~80년대의 현대사 연구는 지워진 역사를 찾아가는 작업이었다. 1987년 4월28일 검찰이 압수한 이념서적들. (사진/ 보도사진연감)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노무현 대통령이 이런 발언을 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8월25일 독립유공자와 유족 초청 오찬에서 “반민특위의 역사를 읽은 많은 젊은 사람들이 거역할 수 없는 어떤 시대적인 흐름 때문에 직접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아무 실천은 못하지만 가슴속에 불이 나거나 피가 거꾸로 도는 경험을 다 한 번씩 한다”고 언급했다는 것이다. 누구 피가 거꾸로 돈 것인지, <재인식> 편집위원은 역사학자의 기본인 사실확인에서부터 오류를 범한 셈이다.

대단히 공격적인 머리말과 권말의 대담, 그리고 몇 편의 뉴라이트 경향의 논문이 문제이긴 하지만, <재인식>에 실린 다수의 논문은 가벼이 볼 수 없는 논문들이다. 역사가 짧은 현대사 연구의 깊이와 폭을 더한 글들로, 이 논문들의 문제제기는 학계에서 진지한 토론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편집진의 과도한 ‘사명감’과 수구언론의 호들갑으로 인해 이 책이 뉴라이트나 수구 진영의 성전처럼 포장되면서 정작 이 책에 논문의 재수록을 허락한 몇몇 필자들은 불편한 심경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임대식이 <역사비평> 2006년 봄호 머리글에서 적절하게 평한 것처럼 <재인식>은 뉴라이트와 탈근대론의 부적절한 만남의 산물이라고 할 것이다. <재인식> 자체에 대한 비판은 임대식의 글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이미 나왔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 처음 나온 1970년대 후반 이래의 현대사 연구가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한국에서는 현대사와 근대사를 칼같이 구분하지만, 우리가 애써 구분해보아야 영어로는 둘 다 ‘modern history’가 된다. 현대사를 ‘contemporary history’라고도 하지만, 이는 우리가 쓰는 의미의 현대사라기보다는 ‘당대사’ ‘동시대사’라는 뜻이 더 강하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근대와 현대의 구분에 대해서도 고찰을 해보아야겠지만, 한국에서 유달리 근대와 현대의 구분에 집착하는 것은 분단과 전쟁과 학살의 현장인 한국에서 현대사 연구가 태생부터 지녀야 했던 정치적 숙명인지도 모른다. 이른바 ‘국사 찾기’를 하는 사람들이 흔히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란 말을 쓰지만, 군사독재가 판을 치던 1970·80년대의 현대사 연구는 정말 지워진 역사를 찾아가는 작업이었다.


△ 현대사 연구의 기폭제가 된 것은 1980년 5월의 광주가 준 충격이었다.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살아남은 모두를 해방 직후로 이끌었다. (사진/ AFP연합)

1970년대의 한국은 ‘에비’가 지배하는 사회, “묻지 마, 다쳐”가 선배가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교훈이었던 사회다. 이 난을 통해 여러 번 강조했지만, 전쟁을 치르면서 어찌나 확실하게 죽여놨던지, 친일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것도 몹시 힘들었다. 제주 4·3 사건처럼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사건을 입에 담아서도 안 됐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이 보여주는 것처럼 현대사의 비극적 진실은 그저 삶을 가위 누르는 악몽이었다.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도 못하는 처지를 그린 <순이 삼촌>도 판금도서 목록에 올라야 했다.

그래도 문학이 조금 자유로웠던지 <창작과 비평>에는 더러더러 해방 직후의 상황을 다룬 소설들이 실리곤 했다.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1974년에 나오고, 송건호의 <민족지성의 탐구>가 이듬해에 나오면서 이른바 ‘의식화’(아직 의식화란 말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전이었을 것이다) 교재가 풍성해졌지만, 우리 자신의 역사를 다룬 책은 별로 없었다. <창작과 비평> 등에 실린 논문을 복사·제본해 <현실인식의 기초>라는 학생운동 진영의 기초 세미나 교재를 처음 만든 것이 1979년이었다. 학생운동 진영이 처음으로 ‘커리’(커리큘럼)를 만들어 의식화 교육을 시작할 무렵, 대학가에서는 아직도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존 롤스 같은 보수 사상가의 <정의론>, 얼마 뒤 전두환의 비서실장이 되는 이규호가 쓴 <사람됨의 철학> 등이 세미나 교재로 이용됐다.

광주의 충격이 현대사 연구를 이끌다

나는 1978년 계열별로 대학에 입학해 1979년 국사학과에 배정됐는데, 당시 국사학과에는 ‘현대사’라는 과목은 아예 교과목으로 개설되지 않았다. 현대사는커녕 독립운동사조차 강의가 개설되지 없었고, 아마 ‘한국최근세사’라는 제목하에 의병투쟁에 대해서는 배웠던 것 같다. 서울대가 특히 사정이 나쁜 것이었지만, 다른 대학도 형편이 좋았다고 할 수는 없다. 1979년은 마침 3·1운동 60주년이 되는 해인지라 국사학과를 중심으로 학생들끼리 심포지엄을 하자고 해서 준비했던 기억이 새롭다. 역사가 지워진 시대이다 보니 자료도 많지 않았다. 1977년에 지식산업사에서 그동안의 일제시대에 관한 논문을 모아 세 권으로 엮은 <한국근대사론> 정도가 그나마 쉽게 구해볼 수 있는 책이었다.


△ <한국민중사>는 88올림픽을 앞두고 시행된 운동권 사냥의 희생양이었다. 다행히 6월 항쟁이 터져 발행인이 석방됐다.(사진/ 한겨레)

<해전사>가 나온 것은 바로 이런 때였다. 초판 발행일이 1979년 10월15일로 되어 있으니, 박정희가 죽기 10여 일 전에 나온 것이다. 정말 유신 말기에 나온 책이다. <해전사>는 1989년 제6권까지 나왔지만, 처음부터 시리즈로 기획된 것은 아니었다. 왜 분단이라는 비극이 우리 민족과 국토에 닥쳐왔는지를 “논리적으로 인식”하고 이 시대에 대한 해명을 통해 “그 이후의 우리 자신에 대한 사회과학은 비로소 맥락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하에 “하나의 시도 내지 입문서”로서 나온 책이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유신정권에 의해 죽고 남베트남 정권이 붕괴되던 1975년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언론인들이 대거 해직당한 해이며,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된 해이기도 하다. 많은 언론인이 신문사에서 쫓겨난 뒤 호구지책으로 출판사를 차렸고, 긴급조치로 쫓겨난 학생들은 선배들이 차린 출판사의 직원이 되었다. <해전사>도 이렇게 만들어진 출판사 중 하나인 한길사에서 나온 것이다. 박정희의 갑작스런 죽음이 가져온 허탈감과 기대 속에서 많은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 <해전사>를 읽기 시작했다. 생생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대부분 여기저기 이전에 발표된 글을 모은 책이었지만, 10·26 직후의 상황은 8·15와 4·19에 뒤이은 또 하나의 전환기가 아니었던가? <해전사>로 새롭게 만난 8·15와 20주년을 맞게 되는 4·19. 그러나 ‘서울의 봄’은 속절없이 끝나고 말았다.

군사독재가 강화된 1970년대 후반부터 우리 문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것은 분명했지만, 현대사 연구의 기폭제가 된 것은 역시 1980년 5월의 광주가 준 충격이었다.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자연스럽게 살아남은 모두를 해방 직후로 이끌었다. 불행하게도 <해전사>는 깊이 있게 다루지 못했다. 1982년 말 돌베개에서 <한국현대사의 재조명>이 나오고, 이어 1983년 초 일월서각에서 <분단 전후의 현대사>가 나왔으며, 1984년에는 사계절에서 <한국 현대사, 1945∼1975>이 나왔다. <해전사>가 철저하게 국내 필진의 글을 모은 것이라면, <한국 현대사의 재조명>은 영어와 일어로 쓰인 주요 논문이나 연구서의 한 부분을 번역해 모은 것이고, <분단 전후의 현대사>도 국내 필자의 글이 2편 실려 있지만, 기본적으로 해외 연구자들의 성과를 모은 것이다. <한국 현대사, 1945∼1975>는 미국의 진보적 한국 연구자들이 펴낸 의 번역본이었다. 이 세 책에는 모두 브루스 커밍스의 글이 실려 있는데, 1981년 미국에서 간행된 그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번역 출간되기 전부터 널리 읽혀졌다.

초기 현대사 책의 출간에서는 현재 열린우리당 소속인 유기홍 의원이 당시 학내 시위로 실형을 살고 나와 출판사에 다니며 큰 구실을 했다. 나도 그 무렵 군대에 끌려갔다 온 뒤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1960년대>(거름출판사), <진보당>(지양사) 등을 선후배들의 도움을 받아 편집했고, 돌베개에서 이정식·스칼라피노의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1∼3을 번역하면서 현대사 공부를 시작했다.


△ 50대의 대학교수들이 친일파나 독재자들에겐 너그러우면서, 과거청산에 대해서는 자학사관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회 과거사법 발의 장면. (사진/ 한겨레 이종찬 기자)

망망대해에서 목말라 하는 연구자

현대사 공부에는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았다. 보통 고대사는 해당 시대의 자료를 다 쌓아도 무릎을 넘지 않고, 고려사는 문집을 합쳐도 키를 넘지 않는데, 조선시대는 방 하나 가득이 되어 자료가 넘쳐나기 때문에 고려시대사를 연구하는 방법으로 조선시대를 연구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조선시대 자료가 방 하나 가득이면 현대사는 그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자료가 많아서 취사선택에 고민해야 한다. 그러나 정작 현대사 공부를 하겠다고 나선 우리는 마치 사방을 둘러봐도 물뿐인 망망대해에서 목말라하는 사람들처럼 자료 부족에 허덕였다. 주변에 책 빌려주었다가 문제가 되어 징역을 살고 고문당한 사연을 심심치 않게 듣는 마당이니, 자료를 가진 사람들도 빌려주는 것은 고사하고 여간해선 자료를 보여주려 하지도 않았다. 도서관에 해방 직후에 간행된 자료가 있어도 대부분 특수자료로 분류해 보여주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는 자료를 구해서 읽은 시간보다 헌책방 뒤지거나, 어디에 무슨 자료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어떻게 빼낼까 궁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나 싶다.

1986년 김남식 선생님과 함께 <한국 현대사 자료총서> 15권을 돌베개에서 묶어 낸 것도 거창하게 말하자면 자료 부족 때문에 현대사 연구를 할 수 없다는 패배주의를 깨버리자는 것이었지만, 자료 접근에 가해진 제약이 지긋지긋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동안 제목으로만 들었던 단행본, 좌익계 신문과 잡지의 주요 논문, 회의록, 팸플릿 등이 2만 쪽가량 쏟아져나와 해방 3년사에 관해서는 자료 부족 때문에 연구하기 어렵다는 핑계를 대지 못하게 되었다. 또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된 미군정 자료가 15권 분량으로 일월서각에서 영인본으로 간행됐다. 조선공산당 기관지 <해방일보>나 남로당 기관지 <노력인민>과 같은 자료를 모아서 내다 보니 당국의 단속이 우려됐지만, 다행히 무사히 넘어갔다.

주요 대학 사학과의 학부는 물론이고 대학원에도 현대사 강의나 세미나는 설치되지 않았다. 제목에 ‘현대사’라 되어 있어도 적당히 일제시대나, 심지어 어떤 대학에서는 현대사에서 대원군에 대한 강의를 하기도 했다. 현대사를 공부하겠다고 하면 워낙 험한 시대이다 보니 선생님들께서는 다친다고 만류하셨다. 정규과정에 근현대사 강의가 부족하다 보니 사학과 대학원생들이 밖에서 세미나팀을 조직했다. 1984년 망원한국사연구실이 문을 열었고, 여기서도 이듬해에 현대사 팀을 만들어 공부를 시작했다. 1986년에는 역사문제연구소가 만들어졌는데, 망원한국사연구실은 주로 한국사 전공의 석사과정 중심으로 모여 사명감은 충천했으나 논문을 집필할 만큼 성숙하지는 못한 반면, 역사문제연구소는 사학 전공자들에 비해서는 한결 몸이 가벼운 사회과학연구자들까지 포함해 모였고, 이미 연구 역량을 갖춘 장년층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적극 가담해 더 빨리 성과를 내었다.

운동권 사냥, <한국민중사>를 잡아먹다

1986년 아시안게임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자 군사독재 정권은 1988년 올림픽 이전에 운동권을 싹쓸이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1986년 건국대 사건으로 1천여 명의 학생을 잡아들이더니 1987년 초 박종철이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고문 살해됐다. 비단 학생운동뿐 아니라 노동, 농민, 종교, 문화 등 전방위에 걸쳐 군사독재의 공세가 시작됐고, 이런 분위기에서 출판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대 최고의 공안검사로 유명한 김원치에 의해 풀빛에서 간행된 <한국 민중사>가 표적이 되어 풀빛의 실질적인 발행인 나병식 등이 구속됐다. 민청학련 사건의 무기수인 나병식은 역사를 전공했고, 당시 후배들과 폭넓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한국 민중사>는 유기홍이 중심이 되고 도진순(현재 창원대) 등 대학원생과 제헌의회 사건의 핵심인 최민 등 서울대 국사학과 77·78학번들이 처음에는 정철영어에서 영어로 한국사를 내려 한다며 한국어 저본의 집필을 부탁받아 작업하다가 중간에 정철영어 쪽에서 포기하는 바람에 풀빛에서 내게 된 것이다. 유기홍, 최민 등이 각각 수배되는 등 사고가 생겨 현대 편이 마무리되지 못했는데, 윤대원(현재 역사학연구소)이 마침 군에서 제대해 마무리하여 책이 나왔다. 민중을 전면에 내세운 최초의 역사서는 당시 독자의 상당한 호응을 얻었지만, 공안당국은 더 뜨겁게 나왔다. 그동안 나온 현대사 관련 서적들이 모두 판매금지를 당해 금서 목록에 이름을 올렸지만, 발행인이 구속되거나 필자들이 잡혀가지는 않았는데, <한국 민중사>의 경우 출판사 사주가 구속된 것이다. 다행히 6월항쟁이 겹치면서 나병식은 석방됐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그의 석방을 위해 뛰어다니던 풀빛 주간인 문학평론가 채광석이 이 무렵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해전사>도 1985년에 강만길 선생을 대표저자로 하여 2권이 나왔다. 김광식이나 홍인숙 등 197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니면서 <해전사> 1권을 읽고 ‘피가 거꾸로 도는’ 충격을 받았던 사람들이 필자로 참여했지만, 여전히 40·50대 필자들이 주를 이루었다. 1987년 말에는 박현채 선생을 대표저자로 하여 3권이 나왔는데, 이번 <재인식>에도 논문이 수록된 이완범 등 젊은 필자들이 중심이 되었다. 1989년에는 4, 5, 6권 세 책이 무더기로 나왔다. 최장집 선생이 대표필자가 된 4권은 한국전쟁 이전의 빨치산 운동이나 4·3항쟁 같은 민감한 문제를 처음 다루었고, 김남식 선생이 대표필자가 된 5권은 통일부 장관이 된 이종석 등 젊은 필자들이 북한의 혁명전통과 인민정권의 수립을 주로 다루었다. 6권은 박명림ㆍ이완범 등이 연구사를 정리했다. 1979년 1권이 처음 나온 <해전사>는 이렇게 1989년 6권까지 나오면서 신진 필자들을 대폭 발굴해 국내의 연구성과를 집대성했다.

광주의 충격 속에서 현대사 공부를 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며 신문 쪼가리, 잡지 쪼가리를 모아 논문 목록을 작성해가던 것이 벌써 25년 가까이 지나버렸다. 노동‘현장’에 가는 대신 책상이 당시 현대사 연구를 마음먹은 사람들의 ‘현장’이었고,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공부가 세상을 바꾸는 지식이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선생님들은 이렇게 공부해라 가르쳐주는 대신, 현대사 공부하면 다친다고, 한국사에는 아직 연구되지 않은 주제들이 너무나 많이 기다리고 있다고 걱정하셨다. 공안당국은 <한국 민중사> 사건이나 <한국현대 민족해방 운동사 사건>에서와 같이 현대사 연구가 대중화되거나 운동과 결합할 경우 그냥두지 않았다.

그 공부가 나라를 비하하기 위해서인가

그 질풍노도의 시대에 ‘묻지 마 다쳐’를 뿌리치고 현대사 공부를 시작한 우리는 다듬어지지 않은 20대였다. <재인식> 편집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민족지상주의와 민중혁명필연론으로 무장한 것은 아니지만, 민족과 민중을 소중히 여겼음은 틀림없다. 일제시대를 친일과 반일의 이분법으로 설명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은 당시에도 알았지만, 독립운동사 연구를 불온히 여기던 상황에서 연구영역의 확보를 위해서라도 치고 나갈 수밖에 없는 면도 분명히 있었다. <재인식>의 편집진이 주장하는 것처럼 과연 우리가 대한민국을 비하하기 위해 어렵게 현대사 공부를 시작한 것이었을까? 1989년의 <해전사> 단계에서는 아직 다가서지 못한 민간인 학살의 진실이 <재인식> 편집진이 “시민의 권리와 의무는 또 무엇인지를 모른 채 나라 만들기의 첫 삽을 뜬 우리 할아버지-아버지 세대”의 “암중모색에서 일어난 시행착오”에 불과한 것일까? 1980년대의 현대사 연구에 분명히 미숙하고 거친 부분은 있다. 그것을 현대사에 관한 한 선생님에게 배워본 적 없는 20대들의 소아병이라 불러도 좋다. 그러나 50대 대학교수들이 친일파나 학살자, 독재자들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워지면서, 현재의 과거 청산에 대해서는 독립군이 친일파를 미워하는 것보다 더 강한 격문을 내세우며, 동료 연구자들에 대해 자학사관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는 것은 어떻게 불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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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울보 > 집안의 모든 냄새잡기,,,,

집안냄새 0% 도전기.음식 썩는 냄새에서부터 신발 구린내까지
왠지 집 안에서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다면? 집에 있으면 갑자기 숨이 턱턱 막히고, 머리가 띵하면서 아프다면? 혹시 집 안의 악취가 원인인지 살펴보자. 전문가들은 집 안 냄새가 심하면 두통, 기억력 감퇴, 스트레스가 생길 수도 있다는데…. 쾌적하고 건강한 생활을 위한 집 안 냄새 0% 도전기!
 
이 냄새의 정체는 도대체 뭐지?
집 안에서 코를 찌르는 고약한 냄새가 진동한다. 원인이 뭘까? 주방, 욕실, 거실에서 냄새를 일으키는 원인을 찾아보았다.
 
1_주방 냄새는 음식물 찌꺼기가 원인
주방에서 나는 냄새는 주로 음식 때문이다. 특히 싱크대 주변에서 냄새가 잘 나는데, 배수구에 음식물 찌꺼기가 쌓이면서, 개수대에 설거지거리를 오랫동안 담가두면서, 개수대에 물때나 곰팡이가 생기면서 냄새가 나기 쉽다. 음식물 찌꺼기를 모아두는 쓰레기통에서도 냄새가 잘 난다. 음식물을 한꺼번에 버리기 위해 모아둔 찌꺼기가 썩으면서 냄새가 난다. 또한 주방 쓰레기통에 음식물 묻은 쓰레기를 버리면서 냄새가 나고, 싱크대나 가스레인지에 음식물 얼룩에서 냄새가 난다. 물에 젖은 행주나 앞치마를 그대로 두거나 요리한 후 주방을 환기하지 않아 음식물 찌든 냄새가 나기도 한다.
 
2_욕실 냄새는 변기에 묻어 있는 오물이 원인
욕실 냄새는 주로 변기에서 난다. 대소변을 본 후 변기 주변이나 커버에 오물이 묻으면서 냄새가 나는 것이다. 화장실 쓰레기통에 대소변 닦은 휴지를 오래 두면 좋지 않은 냄새가 나고, 배수구에 머리카락이 엉켜 있으면 썩은 물 냄새가 난다. 목욕 후 욕실을 잘 환기시키지 않아 물 냄새가 날 수 있고, 젖은 수건이나 걸레를 방치해 퀴퀴한 냄새가 나기도 한다.
 
3_거실 냄새는 생활 속 찌든 냄새가 원인
거실에서는 다양한 냄새가 섞이면서 요상한 냄새가 나기 쉽다. 소파나 카펫, 커튼에 먼지가 쌓이면서 퀴퀴한 냄새가 나고, 여기에 음식 냄새, 담배 냄새 등이 배어 구린 냄새가 날 수 있다. 현관 앞도 거실 냄새의 주범이다. 땀에 찌든 신발을 현관 앞에 이리저리 벗어놔 신발 냄새가 진동한다. 거실 벽이나 장판에 핀 곰팡이를 제거하지 않아 퀴퀴한 냄새가 날 수 있고, 화분 받침에 물이 고여 있을 경우에는 썩은 물 냄새가 나기도 한다.
 
 
 
집 안에 진동하는 고약한 냄새, 어떻게 없앨까?
집 안에서 나는 이 고약한 냄새를 어떻게 없애야 할까? 조금만 신경 쓰고 노력하면쾌적한 집 안을 꾸밀 수 있는 냄새 제거 청소법을 알려준다.
 
How to_1
주방과 욕실은 사용 후 반드시 환기한다
주방이나 욕실 냄새가 거실이나 침실까지 번질 수 있으므로, 사용한 후에는 적어도 10~15분 정도 환기시킨다. 거실도 하루에 한번은 환기를 해 나쁜 공기를 바꿔준다.
 
 
How to_2
배수구 그물망은 헌 칫솔로 구석구석 닦는다
배수구에 쌓인 음식 찌꺼기는 보이는 즉시 갖다 버린다. 배수구 그물망은 락스나 주방세정제로 깨끗이 닦는데, 그물망 틈 사이에 음식물 찌꺼기가 남지 않도록 헌 칫솔로 구석구석 깨끗이 닦는다. 배수구에서 올라오는 악취는 산소계 표백제를 흘려 보내면 효과적. 소독용 에탄올이나 뜨거운 물, 식초를 붓는 것도 좋다.
 
 
How to_3
깨끗이 씻은 음식물 쓰레기통은 햇볕 좋은 곳에 말린다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음식물 쓰레기통을 비우고, 비운 후에는 주방세정제나 락스로 깨끗이 씻어 햇볕 좋은 곳에서 건조시킨다.
 
 
How to_4
행주는 반드시 말려 사용한다
행주는 삶아 빤 뒤 햇볕 좋은 곳에 두어 바싹 말려 쓴다. 하지만 행주를 매일 삶아 쓰는 게 쉽지는 않으므로, 물 묻힌 행주를 전자레인지에 30~40초 정도 돌려서 소독하거나 행주를 삶지 않는 날에는 주방세정제로 깨끗이 빤 뒤 햇볕에 널어 말린다.
 
 
 
 
How to_5
가스레인지의 찌든 때는 맥주 묻힌 행주로 닦는다
가스레인지에 묻은 음식 얼룩은 행주에 주방세정제를 묻혀 깨끗이 닦고, 잘 닦이지 않을 때는 맥주를 묻힌 행주로 닦아도 효과를 볼 수 있다. 전자레인지에 배인 냄새는 오렌지 껍질이나 레몬 껍질을 넣고 2분 정도 돌리면 냄새를 없앨 수 있다.
 
 
How to_6 변기는 오물이 묻은 즉시 청소한다
변기 바깥이나 커버에 오물이 묻으면 즉시 청소한다. 변기 전용 세제나 락스를 변기 안에 부은 다음, 30분 후에 변기 전용 솔로 닦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샤워기로 변기 전체를 깨끗이 씻는다.
 
 
 
How to_7
화장실 쓰레기통에 식초를 희석시킨 물을 뿌린다
화장실 쓰레기통에서 냄새가 날 때는 식초를 옅게 희석한 물을 뿌리면 좋다. 청소를 해도 화장실에서 특유의 냄새가 난다면 화장실 한쪽에 원두커피 찌꺼기를 두는 것도 방법.
 
 
How to_8
화장실 배수구에 락스를 붓는다
화장실 배수구 뚜껑에 얽혀 있는 오물을 제거한 다음, 헌 칫솔에 욕실 전용 세제나 소다수를 묻혀 닦는다. 배수구에서 올라오는 냄새는 락스를 부으면 덜하다.
 
 
How to_9
소파, 카펫, 커튼에 냄새제거제를 뿌린다
소파, 카펫, 커튼 등 천 소재 용품은 유난히 냄새가 잘 밴다. 거실을 자주 환기시켜 냄새가 배지 않도록 하며, 커튼은 한 달에 한 번 세탁하고 소파나 카펫은 환기가 잘 되는 옥상에 1시간 정도 놓아둔다. 페브리즈 등 냄새제거제를 뿌리는 것도 좋다.
 
 
How to_10
거실 곳곳에 허브 화분을 둔다
거실 곳곳에서 냄새가 난다면 작은 허브 화분을 키워보자. 식물은 실내의 오염물질을 흡수하는 효과가 있어서 집 안 냄새를 없애는 데 좋다. 실내 장식 효과가 있는 숯이나 양초를 둔다. 양초는 주위의 냄새를 흡수해 연소시키므로 집 안 냄새를 없앨 수 있다.
 
 
How to_11
곰팡이가 핀 곳은 선풍기로 말린다
곰팡이 때문에 거실 벽이나 장판에서 퀴퀴한 냄새가 난다면 물과 알코올을 4대 1로 섞은 액체를 뿌리면 도움이 된다. 곰팡이가 핀 부분을 통풍시키는 것도 중요한데, 선풍기나 헤어드라이어를 사용하면 빠른 시간에 말릴 수 있다.
 
 
How to_12
신발은 신발장에 보관한다
신발 냄새가 거실에 들어오지 않게끔 신발은 신발장에 보관한다. 신발장에서 냄새가 나는 것은 숯이나 베이킹소다로 없앨 수 있다.
 
 
 
 
직접 써보니 어때? 소문난 냄새 제거 용품 9
집 안 냄새를 없애준다는 소문난 방법과 용품을 모아보았다. 효과가 뛰어난 것도 있고, 생각보다 덜한 것도 있다. 집 안 냄새와 한창 싸우고 있는 주부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 원두커피 찌꺼기
냄새가 심한 곳에 원두커피 찌꺼기를 두면 냄새가 잦아들면서 은은한 커피 향이 난다. 그러나 원두커피 찌꺼기는 잘 두지 않으면 날리기 쉬우므로, 신문지에 싸서 보관하거나 음료수병에 넣어 사용한다.
 
•  쌀뜨물
싱크대 배수구에서 냄새가 올라올 때 쌀뜨물을 부으면 도움이 된다. 그러나 효과가 일시적이어서 냄새를 완전히 없애기에는 무리다. 김치 냄새가 나는 밀폐 용기에 쌀뜨물을 넣고 하루쯤 보관하면 냄새가 싹 없어진다.
 
•  활성탄 탈취제 엘트 프레쉬
활성탄은 목탄, 갈탄 등에 활성화제를 처리한 것으로 탈취 효과가 뛰어나다. 주방, 거실, 욕실 등 냄새나는 곳에 놓으면 집 안 냄새가 없어진다. 숯을 만질 때마다 손에 검댕이 묻어 사용이 불편했다면 대신 사용하기에 좋다.(인터파크, 9천9백원)
 
 
•  119세균제거제
소파나 쿠션, 베개 등에 바늘을 꽂아 눌러서 사용하면 된다. 인체에 유해한 세균을 없애주면서 은은한 향이 남아 일석이조의 제품이다. 그러나 향이 약한 편이어서 향을 오랫동안 남기고 싶다면 자주 뿌려주는 게 좋다.(LG생활건강, 6천원대)
 
•  내츄럴 쉐이커
싱크대에 내츄럴 쉐이커를 뿌린 후 물을 적신 수세미로 닦으면 물때가 말끔히 없어지면서 냄새가 제거된다. 벽, 가구, 바닥, 욕실, 냉장고를 청소할 때도 유용한 제품.(유한양행, 2천원)
 
•  욕조·타일 클렌저
고인 물 냄새가 나는 욕조, 타일, 세면대 등에 사용한다. 클렌저를 뿌린 후 걸레로 닦아주면 물때가 없어지면서 은은한 솔잎 향이 난다.(인터파크, 2개입 9천원)
 
•  페브리즈
천 소재의 용품에 페브리즈를 뿌리면 좋은 향이 나면서 냄새가 없어진다. 특히 고기를 구워 먹거나 곰국을 끓이는 등 냄새가 심한 주방일을 할 때 집 안 용품에 뿌리면 냄새가 배는 것을 막을 수 있다.(P&G, 4천원대)
 
•  뉴 아로마 방향제
자동 분사기에 아로마 향 캔을 넣은 후, 타이머를 맞춰두면 정해진 시간마다 상쾌한 향이 나온다. 향이 분사되는 간격이 너무 짧으면 향기 때문에 오히려 머리가 아플 수 있으므로 간격 조절을 잘 할 것.(인터파크, 9천9백원)
 
•  싱크대 자동개폐뚜껑
배수구 마개처럼 사용하면 된다. 배수구 냄새를 막아주는 데는 효과적이다. 단, 설거지할 때 물이 빨리 내려가지 않고, 음식물 찌꺼기가 개폐망 주위에 조금씩 남는다는 단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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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3-17 0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져갈게요

바람돌이 2006-03-19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님 요거 울보님 페이퍼 퍼온거걸랑요. 퍼가는건 원래 주인에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