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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자전거여행 - 전2권 ㅣ 자전거여행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아무개가 거듭 군령을 어기기로 베었다. 바다는 물결이 높았다."라는 식의 문체를 보인다. 2권 172쪽
위의 인용문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의 한대목이다.
놀랍도록 김훈의 문체와 닮았다.
나는 <난중일기>를 읽지 않았으니 <난중일기> 전체의 문장이 이러한지, 아니면 작가 김훈이 자신의 문체와 똑 닮은 이 부분을 일부러 떼온건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건 김훈의 문체가 저 문체를 똑 닮았다는 거다.
김훈은 왠만해서는 감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자신이 보고있는 것, 보여지는 것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역사를 이야기하고 풍광을 이야기하고 또는 사람들의 얘기를 하다가 그때서야 발견한듯 시선을 옆으로 돌린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이 뜬금없는 장면의 전환에 늘 김훈이라는 인간의 마음이 전해져온다.
기쁘다 슬프다 표현하지 않아도 절절하게 그 마음이 와닿는 것이다.
이 마을 염부 권호원씨(67)는 14살 때 아버지를 따라 피란왔다. 아버지와 함께 등짐으로 돌을 날라 둑방을 쌓았다. 그 염전에서 권씨는 지금도 소금을 거둔다. "이제는 염전일을 할 젊은이가 없다. 염전은 결국 저절로 없어질 것"이라고 권씨는 말했다. 1세대의 둑방은 아직도 튼튼히 바다를 막고 있다. 고무래를 미는 권씨의 굽은 등 위로 서해의 폭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1권 256쪽
권씨의 굽은 등 위로 폭양이 내리쬐는 모습은 사실 그 자체일 뿐이지만 그 모습에서 나는 그가 살아온 노동의 세월과 삶의 신산스러움과 한 세대가 저물어감을 동시에 느낀다.
고무래를 미는 권씨의 모습에서 굳이 굽은 등을 찾아낸 것, 그리고 그 순간 그를 스쳐간 바람이든 바다내음이든 그 무엇이 아니라 내리쬐는 폭양으로 그의 모습을 설명한 것에서 내가 김훈에게 느끼는 건 소름이다.
구구절절히 풀어내야만 할 것같은 모든 장면을 단 하나의 스틸컷으로 압축해내는 이 능력이라니....
김훈의 글을 이끌어가는 가장 강력한 힘은 그의 짭고도 강렬한 문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그건 단순히 문체의 힘이 아니라,
세상의 가장 본질적인 장면을 포착해내고, 그것을 하나의 명징한 장면으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그의 사유의 깊이의 힘이라는 것을......
김훈의 글은 자연을 빌려 인간을 얘기함에 탁월하다.
그의 글의 예리함은 그의 애정서린 눈길과 오랜 사유에서 나오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 예리함이 사람을 베지 않고 자연을 베지 않는 것은 또한 대상에 대한 애정이깊기 때문일터이다.
늘 피고지는 꽃들에서 꽃을 보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
돌산도 향일암 앞바다의 동백숲은 바닷바람에 수런거린다. 동백꽃은 해안선을 가득 메우고도 군집으로서 현란한 힘을 이루지 않는다. 동백은 한 송이의 개별자로서 제각기 피어나고, 제각기 떨어진다. 동백은 떨어져 죽을 때 주접스런 꼴을 보이지 않는다. 절정에 도달한 그 꽃은, 마치 백제가 무너지듯이, 절정에서 문득 추락해버린다.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져버린다.
..... 매화는 잎이 없는 마른 가지로 꽃을 피운다. 나무가 몸속의 꽃을 밖으로 밀어내서, 꽃은 뿜어져나오듯이 피어난다. 매화는 피어서 군집을 이룬다. 꽃 핀 매화숲은 구름처럼 보인다...... 매화는 질 때,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고 꽃잎 한 개 한 개가 낱낱이 바람에 날려 산화한다. 매화는 바람에 불려가서 소멸하는 시간의 모습으로 꽃보라가 되어 사라진다.....
.... 산수유는 다만 어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는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1권 15~17쪽
때때로 자연을 보는 사유의 눈은 더 깊이 인간의 자연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김훈이 자전거 풍륜과 함께 넘는 산은 옛적 누군가의 산이기도 했을 것이다.
김훈은 유가의 산이 다르고 도가의 산이 다름을 이야기하며, 또한 등산객들의 산이 다르고 산에 깃들인 삶을 사는 이들의 산이 다름을 얘기한다. 어쩌면 산은 거기 있을 뿐인데 인간들이 다르다하는 것이겠다.
또한 나무의 나이테 하나에서도 나무를 살아있게 하는 것은 새로 생겨난 나무둥치의 바깥면이지만, 나무를 나무답게 올곧게 지탱하는 것은 이미 죽은 중심부임을 얘기하며 건강한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지의 원형을 배우고자 한다.
자연과 인간은 결국 이 우주의 원리에 올곧게 부응할 때 가장 아름다울 수 있음이니,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우주의 원리를 끊임없이 묻고 답하고자 했던 그 태도가 어떤 것이었나를 김훈의 글속에서 발견한다.
김훈의 글을 읽는 또하나의 즐거움은 이토록 탁월하고 자유롭게 우리말과 한자어를 운용하는 작가를 어디서 다시 볼 수 있을까?
한글은 소리글자 답게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는 글임이 김훈의 글을 통해 알게된다.
숲이라고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 자음 'ㅅ'의 날카로움과 'ㅍ'의 서늘함이 목젖의 안쪽을 통과해나오는 'ㅜ'모음의 깊이와 부딪쳐서 일어나는 마음의 바람이다. 'ㅅ'과 'ㅍ'은 바람의 잠재태이다. 이것이 모음에 실리면 숲 속에서는 바람이 일어나는데, 이때 'ㅅ'의 날카로움의 부드러워지고 'ㅍ'의 서늘함은 'ㅜ'모음쪽으로 끌리면서 깊은 울림을 울린다....숲은 글자 모양도 숲처럼 생겨서, 글자만 들여다보아도 숲속에 온 것 같다. 1권 59쪽
한자는 뜻글자답게 사유를 펼치고 사람의 사는 길을 표현함에 거침이 없다.
더불어 온갖 고전에 대한 김훈의 해석은 그의 어휘의 풍부함으로 한껏 빛난다.
우리말과 한자의 어우러짐으로 김훈의 글은 늘 간절하게 들린다.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으로 간절하고 자연과 세상과의 소통을 희구하는 마음 또한 간절함이다.
그의 말대로 간절한것은 아름답다.
그리고 그 간절함의 끝에 사람이 있다.
소금밭을 가는 염부의 굽은 등, 차를 덖음질하는 이의 구부러진 손마디, 소를 매질하는 농부, 80년 광주의 사람들, 도자기를 굽는 도공의 마음.....
그들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그의 글은 지극히 건조하지만, 그 건조함으로 오히려 간절하다.
또한, 그러므로 눈물겹게 아름답다.
보고 좋은 책, 즐거운 책, 생각하게 하는 책은 많고도 많지만,
늘 곁에 두고 읽고 또 읽고 음미하고 싶은 책은 그리 많지 않다.
내게는 김훈의 이 책이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