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면 그건 정말 대단한 단지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세계의 끝이랄 수는 없지만, 조선의 끝이나 다름 없는 곳이고,
그런 데서 사내들이 모여서 손가락을 자르는 발가락을 자르는이 세계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게 뻔하다. 그런데도 그들은 손가락을자른 것이다. 만약 안중근이 이토를 죽이지 못했다면, 그 손가락은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연해주 벌판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이다. - P140

조직은 인간을 난쟁이로 만든다는 것, 고독은 우리의 성장판이라는 것,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해야 할 일을 할 때 인간은자기보다 더 큰 존재가 된다는 것. 비록 나는 안중근의 손가락은 찾지못했지만, 그의 여정이 내게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P141

죽음을 앞둔 폐결핵 환자 카프카는 베를린 그루네발트 길을 걷다가 울고있는 소녀를 만났다. 카프카가 우는 이유를 묻자, 소녀는 아끼던 인형을잃어버렸다고 말했다. 카프카는 "네 인형은 그냥 여행을 떠난 거야"라고말했다. 소녀가 그 말을 믿지 않자, 그는 "네 인형이 나한테 편지를보냈는걸" 하고 대답했다. 정말이냐고 소녀가 물었다. 그렇다고 카프카가대답했다. "지금은 안 가져왔지만, 내일 여기 오면 내가 줄께." 그리고전영애 교수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렇게 그때 카프카와 함께 산책을 했던 도라 디아만트는 전한다. 어떻게그날부터 카프카가 그 고유한 창작의 열의를 쏟아 인형의 편지를 써갔으며,
하루하루, 아직 글을 읽지 못하는 소녀에게 읽어주었는지를, 인형이 이곳저곳여행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마침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그리하여 이제 옛 소녀에게로 돌아갈 수 없음을 설득력 있게 전하는 삼십여 통의편지를 썼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팔십여 년이 지난 몇 년 전, 한 카프카 연구가가이제 와서 그 편지를 찾아보겠다고 나서면서 화제가 되었다.
- P171

이 일은 두 가지 부작용을 갖고 있다. 우선 오만해지고 독선적인 사람이된다는 것. 이를 선지자 콤플렉스라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남이 못 보는것을 꿰뚫어보는 자는 자기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하는 자를 낮춰볼수밖에 없다. 싱클레어가 낮과 밤을 나눴듯이 선지자 콤플렉스에 빠진사람 역시 세상을 이분법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어떤 이분법을펼쳐도 자신은 좋은 쪽에 속한다는 것이 함정이다.
- P188

두 번째 부작용은 음모론 콤플렉스라고 말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세계를 불신하기 때문에 어떤 현상도 바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므로분석이 필요하다. 분석이라고 썼지만, 선지자 콤플렉스와 결합되면 이는
‘관심법, 즉 다른 사람의 속셈을 훤히 꿰뚫어보는 일을 뜻한다. 한 사람을둘러싼 리얼리티는 그의 성장 과정과 가치관에 따라 선별적으로재구성된다. 그러므로 같은 리얼리티 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각자의리얼리티는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같은 교통사고를 목격해도 목격담은달라질 수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그간 예술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여러 번 증명됐다. 그러므로 관심법으로 알 수 있는 타인의 마음은없다는 게 자명하다. 그럼에도 자꾸만 알아내고자 할 때 문제가 생긴다.
- P188

기억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만든다. 포토샵이 사진의 노출을보정하듯 기억은 과거에 관한 판단을 보정한다. 좋았던 시절은 더또렷하게, 나빴던 시절은 더 흐릿하게 혹은 그 반대로, 그제야 우리는어떤 삶을 살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삶을 바라보느냐, 더 나아가서어떻게 말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P235

여행의 목적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세계를 바꾸는 데 있다는 걸, 그러므로 여행자란 움직이는 사람이아니라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이다. 바뀐 풍경은 낯설다. 새롭고 또신기하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돌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상대적인 이야기다. 나를 둘러싼 풍경만 낯설고 새로운 게아니라 그 풍경 속의 나 역시 낯설고 새로운 존재, 즉 이방인이다.
- P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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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일개 서커스단으로서는 코끼리의 먹이를구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운반하기에도 상당히 버거웠을 것같다. 하루키 소설에서 코끼리는 점점 줄어들다가 마침내 사라지는것처럼 그려지는데, 먹이 문제를 생각하면 어쩐지 코끼리에게는 그런소멸 방식이 어울리는 듯하다.
- P111

음, 그러나 컴퓨터가 더 중요해졌다는 건 인정해야겠다. 당시김정흠 교수는 컴퓨터의 도움으로 초등학교 5학년 학생도 대학교1학년과 비슷한 수준의 교양을 갖추리라고 예언했는데, 틀린 말도아니다. 스마트폰을 붙잡고 종일 예능 프로그램과 드라마, 게임에몰두하느라 대학교 1학년의 교양 수준이 초등학교 5학년 정도로 떨어진것 같으니까.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인 셈이다.  - P113

여행의 교훈은 내가 보는 세상이 이처럼 상대성의 원리로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인지도 모른다. 빈민이 많은 저개발국을여행하고 돌아오면, 미안하지만 한국에서 사는 게 참 행복하게느껴진다. 하지만 유럽 여행 뒤에 바라보는 한국은 전생에 나쁜 일을하다가 죽은 이들이 오는 곳 같기도 하다. 당연히 한국은 천국도,
지옥도 아니다. 한국은 그저 한국이다. 여행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두 지역을 한데 놓고 비교하는 어리석음을 피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래야 여행이 가능하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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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라는 약한 존재가 되고 난 뒤에야 나는 사람의 선의에기대는 법을 익히게 됐다.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은 여행자에게는근처에 있는 호텔을 찾아가는 게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일이겠지만, 그 동네 주민에게는 산책만큼 쉽다. 그러므로 그 여행자에필요한 행운은 단 한 사람, 그 호텔의 위치를 아는 현지인을 만나는일이다. 대단한 사람이 아니어도, 대단한 결심이 아니어도 괜찮다.
서로가 약간의 용의를 내기만 하면 된다.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용의.
선뜻 도와주겠다는 용의, 여행지의 행운이란 이런 두 사람이 만날 때일어나는 불꽃 같은 것이다.
- P5

여행이란 가지 못한 길에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라고, 그러고 보면 여행을 통해 나는 비정함을익혔다. 눈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그토록 찬탄하던 곳과 작별하는 법을알게 됐으니까. 이젠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 P31

2009년 캐용고는 글로벌 소프 프로젝트 Global Soap Project 를설립했다. 그 단체는 호텔 체인과 연계해 한 번 쓰고 남은 호텔 비누들을회수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설립 3년째인 2012년에는 60 만개가 넘는 재활용 비누를 만들어 제3세계 아이들에게 나눠줬고,
2013년에는 200만 개가 넘는 비누를 만들 계획이라고 한다. 여행하는내내 나는 그 많은 호텔 비누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건 마치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 질문처럼 느껴졌다.
심각하고 복잡해진다면, 정답일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그 많은 호텔 비누는 제대로 씻지 못해 질병에 시달리는 제3세계아이에게 간다. 정말이지 이건 내가 상상하지도 못한 멋진 정답이다.
비누는 계속 청결의 상징이 되어야겠다.
- P35

 20년 전의 나는하루라도 빨리 늙어버리고 싶은 20대였고, 이제야 그 소원을성취해나가고 있으니까. 하지만 젊음은 소중하다고 남들이 말하거나말거나 기필코 낭비하고 마는 그 무모함만은 부러웠다.
- P38

그래서 여행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젊은이가 되는데, 이 젊은이란 사실실제적인 나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낯선 도시에 처음 발을 디딘사람이라면 누구나 ‘여행자 또는 젊은이‘가 될 수 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너무나 서툴러서 태연하게 황당한 실수를 저지르는 자신을감당해야 한다. 만약 그게 힘들다면, 당장 여행을 포기하는 수밖에.
물론 예외는 있다. 잘 짜인 패키지 관광을 떠나는 방법도 있지만,
이쯤이면 왜 효도 관광은 예외 없이 패기지로 떠나는 것인지 알겠지.
여행은 그렇다 치고, 그게 인생이라면 어떨까? 서투른 자신을 보는 게싫다고 패키지 인생을 선택한다면? 이번 여름 여행지에서는 이 질문을자신에게 던져보자.
- P39

자유는 남들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한이해에서 비롯한다. 더 많은 사람의 관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볼 수있을 때, 나는 더욱더 자유로워진다. 그런 점에서 나는 모든 사람이되고 싶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래서 세상에는 이토록 많은 책이있는 게 아닐까? 원한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라도 될 수 있다. 이 자유를만끽하고 싶다.
- P75

이런 부산 말고 다른 부산은 없을까? 그러자 부산을 잘 아는사람이 가야시장 맞은편으로 가서 186번 버스를 타보라고 말했다.
다음 날 나는 186번 버스, 그것도 운전수 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알지 못하던 부산으로 떠나는 여행의 시작이었다.
피난지 부산의 삶과 애환을 담은 노래만 있으면 최고였는데. 그러니다음에는 노래까지 준비해서 다시 타봐야겠다.
-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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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에서 중요한 것은 감각과 관련된 매개체인데 주로 빛이나 색 같은 시각적인 정보를 이용한다. ‘봄은 봄을 본다‘는 알 듯 말 듯한 시각적 지각 외에도 바람, 소리, 향기, 질감 등 ‘만짐은 만짐을 만짐이다‘라는말처럼 다양한 감각으로 확장하여 공간에 장소로서의 의미를 부여하는도시 건축적 작업이 건축현상학이다.  - P81

오래된 역사의 한 부분인 로마 시대 유적지 위에 현대 건축 양식의박물관을 지으면서 내부 바닥은 유적지를 그대로 보존하고 그 위에지그재그 형태의 동선을 넣고 외부에서 벽돌 벽의 틈새로 빛을 비춰서 마치 유적지를 탐사하는 듯한 분위기를 극대화하여 도시 역사를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했다.  - P102

건축에서 현상학적 공간을 만드는 매체로는 단연코 빛이 최고다. 밝음과 어두움을 이용하여 극적인 공간을 연출한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현상학적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이용되는 것이 현대 건축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건축 재료인 유리 그리고 자연에서 가져온 수공간이다. 유리와 물의 특징을 이용해 공간을 투명하게 만들고 주변 환경을 비추고 굴절시키고 반사시켜서 기존의 관념을깨는 뒤집힌 공간을 만드는 건축가들의 작품을 대하면 저절로 그들이 창조한 공간에 빠져들게 된다.  - P106

서울 도심부는 서울의 역사가 층층이 쌓여 있는 장소로 그 역사를 보여주는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들이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그런 다양성이 시간의 총체성을 나타내듯이 한 공간에 압축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공간을 지나는 사람들은 현대사회를 살지만 건축물들이 보여주는 시간을 인식하면서 새로운 경험을 할 것이다.  - P134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의 건축적 가치는 충분하다. 자세히 보면외부 공간 절반을 그대로 비운 것이 아니다. 오른쪽 건물은 뮤직라이브러리라는 기능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면서 왼쪽의 비워진공간과 지붕 프레임으로 연결되고 있다. 그 결과 왼쪽 광장은 바닥,
벽, 지붕의 형태는 있으나 가운데 공간은 비워진 박스 형태가 된다.
이것이 ‘관통‘이라는 현대 건축 개념이다. 이태원과 한강으로 나누어 한쪽만 사용하던 기존 공간에 도넛처럼 구멍을 뚫어서 양쪽 공간이 하나로 엮이는 새로운 위상학적 공간을 만든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이태원에서 한강 쪽을 보고 숨을 쉬게 되었다.
- P154

무주의 종합운동장은 건축가 정기용의 애정이 담긴 프로젝트이다. 종합운동장의 햇빛 아래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관람하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로 등나무를 심어 그늘막을 만드는 것은 간단하고 단순한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무주 종합운동장 같은 그늘막은 없다. 이것이야말로 건축가가 어떻게 사회를바라보고 고민하고 애정을 가져야 하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되는 프로젝트이다.  - P163

생물학을 통한 디자인 방법론은 생체의 형태와 기능 등을 모방하여건축을 만들어내는 새로운 방법이다. 재닌 베뉴스 Janine Benyus는 자연에대해 배우기보다는 자연으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바이오미미크리라는 개념을 처음 도입했다. 지금까지 인간에게 정복 대상에 불과했던 자연은 이제 스승이 된다.  - P192

현대 건축은 기존의 건축에서 볼 수 없었던 강력한 기하학적 형태를 하고 있고 그로 인해 시각적인 지각을 하여 형태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체험 공간이다. 한번 경험한 사람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곳이다. 그러나 그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인 강제로 움직여야 하는강제동선, 거대한 장벽 같은 벽체, 콘크리트 같은 인공 재료 등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새 시대의 건축가들은 이러한 문제점들을섬세하게 파악하여 각자의 디자인 방법을 동원해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 과정은 현재진행형이라 더욱 관심이 간다.
- P194

근대 건축에서 돔-이노 구조의 특징인 바다 슬래브와 기둥의 존재가 절대적이었다면 현대 건축은 그마저 사라지게 하고 싶어 한다. 바닥과 기둥 그리고 천장의 상호의존성이 있어야 하는 건축구조와 공간을 더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이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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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를 위한 나의 첫 고전읽기 수업 나의 첫 수업 시리즈
박균호 지음 / 다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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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보면서 굉장히 인상깊었던 대목이 있었다.

 

엘릭스가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을 읽었다면, 에이드리언은 카뮈와 니체를 읽었다. 나는 조지 오웰과 올더서 헉슬리를 읽었다. 콜린은 보들레르와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다. 어디까지나 도식화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그렇다. 당연히 우리는 허세덩어리였다. 달리 청춘이겠는가. 우리는 '벨탄샤웅'이니 '슈투름 운트 드랑'이니 하는 용어를 즐겨 썼고, '그건 철학적으로 자명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고, 상상력의 첫번째 의무는 위반하는 것이라고 서로에게 다짐하듯 확언했다.......그래서 콜린의 어머니는 내가 당신 아들의 '어둠의 천사'라고 여겼고, 우리 아버지는 내가 <공산당 선언>을 읽는게 엘릭스 탓이라고 했고, 엘릭스의 부모는 콜린이 미국 하드보일드 범죄소설을 읽는다고 콜린의 부모에게 일러바쳤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솔직히 시시껄렁한 그냥 흔한 영국의 고등학생들이다.

이들이 무슨 특별한 엘리트 학교(우리로 치면 각종 국제고나 자사고들)를 다니는 아이들이 아니란 얘기다.

나머지 이들의 대화를 보면 우리 나라 고등학교 애들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들은 허세를 정말 제대로 부릴 수 있는 아이들이다.(청소년기의 독서는 원래 허세로 시작한다. 나도 그랬다.)

철학과 고전으로 허세를 부리는 고등학생?

너무 멋지지 않은가 말이다.

이 책의 이 대목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우리 고등학교 아이들 중에서 철학이나 고전에 대한 이야기를 저렇게 낄낄거리고 얘기하면서 허세를 부릴 수 있는 아이들이 몇이나 될까?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도 나의 독서 허세를 받아줄만한 친구를 주변에서 찾기는 정말 어려웠다.

지금도 전교에 한두명쯤 있을까?

특정 분야에 덕후들은 제법 있지만 철학책을 읽고 질문하는 아이는 여태까지 딱 1명 만났다. 작년에.....

(너무 반가웠다. 특히나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던져줘서 속으로 무척이나 고마웠다. ^^)

 

영국이나 유럽의 교육은 저런 철학이나 인문학, 고전에 대한 이야기를 저렇게 막막 농담으로 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걸까?

유럽의 대학입시 자격시험을 생각하면 그럴법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수업시간에 끊임없이 저런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저렇게 자연스럽게 대화가 나오기는 힘들지 않을까?

 

그래서 이 책이 반가웠다.

독서교육에 대한 중요성은 늘 이야기되고 새로운 방법들이 시도되고 하지만, 결국 입시와 부딪히면 다 부질없는 게 되어버리고 마는 우리 현실속에서도 그래도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말이다.

입시교육의 아성은 너무도 단단하여 무너지기 힘들지만 그것이 무너져야만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것도 틀린 말이다.

구조를 바꾸기 위한 노력과 그 구조의 틈을 벌리기 위한 작은 노력들은 같이 가야 한다는것이다.

 

청소년이 어떻게 고전을 읽을 수 있을까를 제시하려면 일단 힘을 빼야 한다.

고전이라는 말이 주는 어렵고 심각하다는 느낌을 빼야 한다.

생각해보자. 안 그래도 어깨힘 빡 주고 큰 결심해야 고전이라걸 읽어볼까 싶은데 그 고전을 소개하는 책조차 무겁고 엄숙하다면 지레 겁먹는게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정말 힘 빼고 읽어도 된다.

 

고전에는 이렇게 인간과 사회에 대한 작가의 깊은 통찰이 담겨있습니다. 그 통찰이 당대 사회의 모습만 보여 주는 게 아니라 미래사회를 예견하기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변하지 않는 인간의 본성 때문입니다. 과거에도 인간은 행복과 자유를 추구했고 선과악을 품고 있었습니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항해사들의 모습이 요즈음 직장인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며, 그러한 인간의 모습은 먼 미래에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 P5

 

 

인용문에서 앞의 말들이 심각하지만 뒤의 예는 살짝 힘을 빼준다.

야 너희들이 직장 다니면 그냥 노예처럼 일하게 되는거야. 아빠 엄마 봐. 직장의 노예처럼 살고 있잖아. 뭐 이런 말을 하는 듯하다. 실제 본문에서는 이런 고전에 대한 힘주기와 힘빼기가 적절히 뒤섞여있다.

다른 말로 하면 고전을 읽음으로서 느낄 수 있는 허세의 기쁨과 평범한 나의 삶과의 연결로 인해 가질 수 있는 친근함을 적절하게 섞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어떤 책은 어떤 아이들에게는 배신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함정이 있지만.... 예를 들면 장 그르니에의 섬이나 루소의 에밀, 다윈의 종의기원, 아 이런 책은 고전이 재밌다고 했던 작가를 향해 돌을 던지고 싶어질지도..... ^^)

 

이런 고전과 삶의 연결의 예들을 들어보자.

<레 미제라블>을 통해 빈곤을 대하는 태도와 난민 문제의 연결, 안톤 체호프의 단편 <내기>를 통해 우리 사회의 계속된 논쟁거리 중 하나인 사형제도의 존치 여부에 대해 묻는 식의 사회문제와의 연결이 1부에서 진행된다.

2부에서는 자연과의 공존을 묻는데 장 그르니에의 <섬>의 에피소드 한꼭지와 유기동물 안락사 문제를 연결시키고, <종의 기원>을 동물 복지 문제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집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아이들이 많은걸 생각해보면 이런 꼭지를 읽으면 저 책들을 읽고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3부와 4부에서 역시 다양한 고전들과 다양한 삶의 양태들을 연결시키려 시도하고 있다.

물론 이런 모든 연결이 완전히 적절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오셀로>에서 주인공 오셀로의 부인과 스마트폰을 필요불가결하다는 점 하나로 연결하는 건 좀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책은 고전의 심오함을 가르쳐주려는 책이 아니라 청소년이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게 고전에 접근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일종의 실용서다.

따라서 힘빼기는 무엇보다 중요하고, 책이 가볍다고 느껴질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힘빼기를 위한 노력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우리 아이들이 고전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것이 일단은 중요하지 않겠나말이다.

그래야 좋은지 안좋은지를 알지.....

요즘 책하고는 담쌓기 하고 있는 우리집 큰 딸에게 슬며시 이 책을 밀어넣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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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5 0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2-16 0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이 2021-02-15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스 저 책 읽은 거 같은데 왜 어째서 기억에 없을까요 🤔 따님에게 추천하신다니 제가 먼저 읽고싶어졌어요

바람돌이 2021-02-16 00:27   좋아요 0 | URL
그런 책이 한두권이 아닙니다. 저 책은 오래 전에 읽었는데 저 대목이 저에게는 너무 강렬했어요. 저 대목 찾는다고 책을 다시 뒤적였는데 내가 읽은 책인지도 가물가물하더군요. ㅎㅎ

stella.K 2021-02-15 1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균호님 팬이 되가시는 것 같습니다.ㅎㅎ

바람돌이 2021-02-16 00:28   좋아요 0 | URL
좋은 작가의 팬은 행복의 한 방법이죠. 그런 의미에서 전 점점 행복해지는거 같아요. ㅎㅎ

초딩 2021-02-15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아주 좋은 예 같습니다.
생각의 탄생처럼
고전을 읽다 각 고전이 연결되어 통찰이 생기고 이 것이 지식을 습득하는 아이들에게 내면의 눈을 뜨게 해준다면 정말 좋을 것 같습니다~!!!!

바람돌이 2021-02-16 00:29   좋아요 0 | URL
아이들이 고전까지는 아니라도 책좀 읽었으면 좋겠는데 참 어렵네요.

cyrus 2021-02-15 1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분야는 달랐어도 독서를 좋아했던 고등학교 친구 한 명이 있었어요. 그 친구는 한국사와 판타지 소설을 좋아했어요. 그때는 판타지 소설을 왜 읽느냐고 구박한 적이 있었는데 그 친구는 그저 재미있어서 보는 거라고 대답하면서 웃고 넘어가더라고요. 도서관에 같이 가면 저를 위해서 자기 회원증 카드로 책 몇 권 빌려줄 정도로 정말 착하고 좋은 친구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 녀석도 저랑 비슷한 덕후 기질이 있었을 같은데, 대학교에 다닌 이후부터 연락이 끊어졌어요. 만약 그 친구가 지금도 독서를 좋아하고, 저랑 계속 연락하면서 만나고 있다면, 과연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 궁금해요. 그 녀석이 제가 서평을 쓰는 것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도 궁금하고요.

바람돌이 2021-02-16 0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마 그 친구분은 여전히 책을 좋아하고 읽는 책의 범위는 더 깊어지고 넓어졌을 테고요. cyrus님이 그러듯 가끔 cyrus님을 떠올리며 그 친구는 지금 뭘 읽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