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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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미쳤다는 걸 아는건 너무 쉽다.

그냥 오늘자 기사 검색만 해보면 미친 짓이 도르르르 끝도 없이 펼쳐진다.

비단 정치만 그런게 아니다. 그냥 선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것 같은 일반인들도 자신의 작은 불편이 걸리기만 해도 얼마나 이상한 미친듯한 사람들로 변하는지....

2주째 우리 아파트 엘리베이터 교체 공사로 인해 계단으로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택배 노동자들 엘리베이터 사용을 금지시켰다는 어떤 아파트 주민들을 생각하며 또 욕을 퍼붓는다. 사람들이 말이야 미친게 아니고서야 짐들고 이걸 오르라고 한다고???

연일 벌어지는 아동학대의 참혹한 현장을 보면서는 이게 도대체 사람이 맞긴 한건가라며 같은 인간이라는 종으로서 자괴감을 가지게도 하고....

미친 세상을 이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매일 하는 나날들이다.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방법>이란 제목의 원제는 <파페 사탄 알라페>,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말이라는데 사실 아무도 그 뜻을 모르고 그저 세상의 온갖 나쁜 짓을 이르는 말로 쓰인다고 책 소개에 나와있다.

책을 읽고난 지금 한글 제목과 묘하게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책의 시작은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사회> 개념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한다.

종교나 신, 국가, 공동체 등 거대 서사가 사라진 인간 존재의 불안의 시대-이 시대의 전형적 특징은 분노를 동반한 항의운동인데 문제는 그 운동이 자신이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는 알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르는데 있다는 것이 에코의 일침이다. 또한 우리가 이런 유동사회를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런 사회를 이해하고 극복하려면 새로운 수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면 된다고 얘기하고 있다.(16쪽) 

그 새로운 수단은 무엇일까?

그 전에 지금의 세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보고 바뀌어야 하는 지점을 포착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던져준다.

 

나무랄 게 없으면 자기 일을 잘 해낸 사람이다. 나는 좋은 교황이라든지 정직한 자카니니 라든지 하는 말을 들으면 항상 마음이 좀 불편하다. 그런 표현은 다른 교황은 모두 나쁘고 다른 정치인은 정직하지 않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교황 요한 23세와 자카니니는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뿐이고, 그래서 그들이 특별히 칭찬받아야 할 이유는없다. - P22

 

어떻게 보면 세상을 제대로 사는것이 딱히 어렵지는 않은 것이 자신이 할일을 모두가 성실하게 하는 것 아니겠는가?

정치인이 모략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봉사라는 자신의 원칙을 고수하며 성실하게 해내고,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해가는 삶.

그런데 역사와 실제 사회는 한번도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유동사회>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기를 쓰고 사생활을 포기하고 자신의 모습을 포장해 어떡해든 눈에 띄기 위해 온갖 엉뚱하고도 바보같은 일들을 저지르고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자신을 과시하지 않으면 안되는 듯이 살고 있다.

타인의 고통의 현장에서도 그를 구하거나 연민의 눈물을 흘리는 대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고 그것을 알림으로써 자신을 과시하는 것에 집착하는 세상이 올 줄 우리가 과거에 어떻게 알았을까?

심지어 마피아 조차도 배신자의 입에 돌 대신 핸드폰을 박아넣는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에 대해 에코는 누군가가 <야, 어제 너 텔레지번에 나온거 봤어!>하고 말한다면 그건 단순히 네 얼굴을 알아봤다는 것이지, 너를 알아준다는 뜻은 아니라고 일침을 놓는다.

 

유럽 곳곳에서 이슬람들에 의해 일어나는 테러를 보는 시각은 거장답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소위 언론과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타 종교와 그 지도자들을 지나치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희화화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백인 유럽인으로서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결과로 이슬람들의 끔찍한 보복살해가 있어 먼저 누가 잘못했는가는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더 큰 범죄가 큰 무례와 모욕을 엎은 형국이다.

이슬람의 테러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비판하지만 에코는 그것을 유발하는 백인들의 타 인종과 종교에 대한 무례함도 결코 좌시하지 않는다.

또한 그렇다고 모두가 서로의 종교에 대해서 말하지 않거나 비판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분명 아니라고 말한다.

학교교육에서는 모든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로가 서로를 알 수 있어야 하고, 모욕과 유머, 문학적 표현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게 해야 한다.

좀 더 나은 사람, 좀 더 나은 세상이 되는 방법에 대해 에코는 부단히 질문하고 대답한다.

 

신문에 기고한 짧은 에세이라는 글의 성격상 심도있는 논의를 펼칠 수는 없지만 그의 짧은 글에서도 인간과 역사에 대한 애정, 불합리를 날카로운 유머로 통찰해내는 에코의 시선은 절묘하다.

이 책을 한 권 읽는다고 이 미친 세상을 단번에 이해하게 되지는 않겠지만, 무엇이 문제인지를 하나 하나 짚어가다보면 그래도 좀 더 나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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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1-03-15 09: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상식과 예의를 넘은 풍자는 비판이라 할 수 없어요. 그런데 대부분 사람은 이를 옹호하기 위해 ‘표현의 자유’를 언급해요.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주장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자유’라는 단어를 오용하고 남용해요.

바람돌이 2021-03-15 15:08   좋아요 1 | URL
맞아요. 다른 사람을 짓밟는게 풍자나 비판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에코가 말하는 것도 그것이고요.
요즘은 풍자가 아니라 원색적인 비난과 쌍욕이 너무 많아서 좀 욕도 품격있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mini74 2021-03-15 09: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짓과 선동의 기사가 많은 이들의 눈과 귀를 막는 것도 한 몫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에코의 시선과 이야기가 더 고마운지도. 살포시 장바구니에 넣어봅니다 *^^*

바람돌이 2021-03-15 15:10   좋아요 2 | URL
신문기사 같은 건 정말 조금만 신경 써서 보면 이상한데가 한두군데가 아니예요. 얘들이 무슨 목적으로 이렇게 기사를 썼지 싶은..... 에코 돌아가셔서 이제는 이런 글을 더이상 못본다고 생각하니 아쉽네요.

희선 2021-03-16 0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뉴스에는 안 좋은 일이 나오지만 그런 데 나오지 않는 좋은 일도 있겠지요 그렇다고 믿고 싶기는 한데... 뉴스는 거의 안 좋은 일만 알려줘서 이 세상이 무섭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렇다고 좋은 것만 말하는 것도 안 좋을 듯하네요 세상을 잘 보려고 저마다 스스로 애써야겠군요 자신이 맡은 일만 잘해도 좋을 텐데...


희선

바람돌이 2021-03-16 11:04   좋아요 2 | URL
주변을 둘러보면 또 그렇게 나쁜 사람은 없어요. 그게 더 진실에 가까운거겠죠? 그래서 이 세상이 안 망하고 유지되는 거구요. 오늘 하루도 화이팅하세요. 희선님.

파이버 2021-03-16 1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친구가 정치사회 뉴스를 잘 안본다는 말을 듣고 의아하게 생각했었는데 요즘은 저도 잘 안보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부단히 질문하고 대답한다는 것이 더 대단하게 느껴져요...

바람돌이 2021-03-17 10:47   좋아요 1 | URL
정치 사회 뉴스 볼때마다 혈압만 오르죠. 우리 사회를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하기 위해서는 정치가 나아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걸 부정할 수 없으니까 화가 더 나는 것 같아요.

감은빛 2021-03-16 2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움베르토 에코의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면서 화내는 법] 이 떠오르게 하는 책이네요. 왠지 비슷할 것 같은 느낌이예요.

바람돌이 2021-03-17 10:48   좋아요 0 | URL
이 책 세상의 바보들에게와 같은 신문에 연재한 칼럼을 모은거예요. 세상의 바보들 이후 신문 연재한 칼럼들이예요.
 

적에 대한 증오는 국민과 신도를 하나로 묶어 동일한 불꽃으로 활활 타오,
르게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몇몇 사람을 향해서만 내가슴을 따뜻하게 하지만, 증오는 수백만 명의 사람이나 한 국가, 한 인종, 다른 피부색이나 다른 말을 쓰는인간 집단들을 향해 나와 내 이웃의 가슴을 분노의 불꽃으로 뜨겁게 한다. - P176

학교란 전통을 폐지하는 곳이 아니라 반대로 그 어떤 전통이라도 존중해야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른 인종의 아이들이 평화롭게 함께 생활하기를 원한다면 학교는 각 집단의 아이들이 다른 집단의 전통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따라서 성탄절이 되면 구유를 만들어야 하고, 다른종교나 민족의 중요한 축제일에는 그들만의 상징을만들고 제식을 치르게 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은 각자 어떤 식으로건 다른 축제에 참여함으로써 서로 다른 전통과 신앙 형식의 다양성을 접하게 된다.  - P189

우리는 책을 읽어도 그 내용을 대부분 잊어버리고, 그런 다음에 그 책들이 말하고자 한 것보다 우리가 그중에서 기억하는 내용을 근거로 일종의 가상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특정한 책을 읽지도 않은 누군가가 책에 없는 구절이나 상황을 인용해도 우리는 그게 책에 있다고 바로 믿을 준비가 되어 있다.
- P227

나는 옛것만 고집하는 전통주의자가 아니다. 그래서 250기가바이트의 이동식 하드 디스크에 세계 문학과 철학사의 위대한 걸작들을 저장해 두고 있다. 단테의 작품이나 『신학 대전 Summa Theologica』에 나오는인용문을 몇 초 안에 불러내는 건 의자에서 일어나 높은 책장에서 두꺼운 책을 꺼내는 것보다 훨씬 간편하다. 하지만 나는 그 책들이 책장에 꽂혀 있다는 게 늘기쁘다. 언젠가 전자 기기들이 총기를 잃을 때를 대비한 확실한 기억 장치로서 말이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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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이 핸드폰은 자연스럽게 우리 육체의 일부가 되었다. 귀의 연장(延長)이고, 눈의 연장이고, 심지어 페니스의 연장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그의 핸드폰으로 질식시키는 것은 그의 창자로 목을 졸라 죽이는 것이나 진배없다. 자, 받아, 메시지 왔어!)하고 말이다.
- P82

1960년에 프랑스의 여러 대성당을 돌아다닌 직후내가 어떻게 갑자기 사진 찍기를 중단하게 되었는지는 이미 여러 자리에서 밝힌 바 있다. 그것도 틈만 나면 미친 듯이 세상의 모든 것을 렌즈에 담던 인간이 말이다. 사진을 찍고 집에 돌아가면 내 앞에는 나쁜 사진만 수북이 쌓여 있었다. 정작 내가 본 것들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뒤로 나는 카메라를 던져 버렸다. 이후의 여행에서는 내가 본 것들을 모두 마음에만담았고, 타인과 나 자신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기억하려고 마음에 드는 엽서를 사기 시작했다.
- P85

지금도 미국인의 달착륙이 텔레비전 스튜디오에서 조작된 것이라고 믿는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주장을 반박하는 논거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침묵의 증거다. 만일 미 우주선이 실제로 달에 착륙한 것이 아니라면 당시에 누군가는 그 사실을 말했을 것이다. 지구상에 그것을 검증할능력이 있는 누군가가 있었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 그누군가의 이익에도 부합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소련이다. 하지만 당시 소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엔 그것만큼 미국인들이 실제로 달에 착륙했다는 것에 대한 명백한 증거는 없어 보인다. 이것으로 논란 끝!
- P98

사람들은 왜 자신의 의무를 다했을 뿐인, 용감하고신중한 사람을 영웅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베르톨트브레히트는 『갈릴레이의 생애 Leben des Galilei」에서영웅이 필요한 나라는 불행하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왜 불행할까? 그 나라에는 묵묵히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보통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배를 불리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정직한 방식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사람들, 요즘에 이런 표현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프로 정신으로> 자기 일을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 P134

그렇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의무가 뭔지 몰라 일일이 지시 내려 주는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를 필사적으로 찾는 나라는 불행하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바로그것이 『나의 투쟁』에 담긴 히틀러의 이념이었다.
- P135

남은 문제 하나. 젬마는 단테에게, 헬레나는 데카르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역사가 입을 다물고 있는 다른 수많은 아내는 말할 것도 없다. 만일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이 진짜 그의 아내 헤르필리스가 쓴 것이라면?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남편들이 쓴 역사는아내들을 익명으로 숨겨 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P159

타인의 종교적 감정을 모욕하지 않는 것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적 원칙이다. 그 때문에 집에서는신을 모독하는 사람도 교회에서는 되도록 그런 말을삼간다. 슈피겔만도 무함마드를 희화화한 캐리커처를그리지 말았어야 했다. 보복의 위험 때문이 아니라 그자체가 무례한>(이런 예의 바른 표현을 쓰는 걸 고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미안하다) 일이기 때문이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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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랄 게 없으면 자기 일을 잘 해낸 사람이다. 나는 좋은 교황이라든지 정직한 자카니니) 라든지 하는 말을 들으면 항상 마음이 좀 불편하다. 그런표현은 다른 교황은 모두 나쁘고 다른 정치인은 정직하지 않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교황 요한 23세와 자카니니는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뿐이고, 그래서 그들이 특별히 칭찬받아야 할 이유는없다.
- P22

처칠을 허구의 인물로 여기는 영국의 골 빈 사람들과 15일이면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할 거라는 믿음으로 미군을 이라크로 보낸 부시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둘 다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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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아마도 - 김연수 여행 산문집
김연수 지음 / 컬처그라퍼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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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유는 남들이 바라보는 세계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한다 많은 사람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있을 나는 더욱더 자유로워진다그런 점에서 나는 모든 사람이 되고 싶지만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그래서 세상에는 이토록 많은 책이있는  아닐까원한다면 나는 어떤 사람이라도   있다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 - P75

 

책을 읽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제일 쉽게 대답할 수 있는건 재밌으니까요 정도?

하지만 뭔가 더 멋있는 말을 하고싶은 욕망은 분명히 있다.

가끔 잘난체 해도 될 듯싶은 대화에서는 한 번씩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나는

"책 특히 소설을 읽으면 내가 살아보지 못한 인물, 살아보지 못한 삶을 한번 살아보는 느낌이 들어요. 나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한번 바라보고 나면 내가 뭔가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된듯한 느낌이 들거든요. 그 느낌이 너무 좋아 자꾸 책을 찾는 것 같아요"라는 말을 몇번은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 된 느낌을 좀 더 확장하려면 인문학이나 예술쪽 책들도 좀 더 읽어줘야 할 것 같고요라는 대답까지는 한번도 한적이 없고 그냥 속으로만 생각하고 말았다.

 

김연수 작가의 여행에세이집인 이 책에서 작가가 책에 대해 하는 저 말을 읽으면서 "아 정말 내가 생각한 것과 똑같은데 어쩜 저렇게 멋있고 정확하게 표현했지"라고 감탄하면서 역시 작가는 작가구나라고 생각한다.

 

여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여행의 목적은 공간의 이동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꾸는  있다는 그러므로 여행자란 움직이는 사람이아니라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이다바뀐 풍경은 낯설다새롭고 또 신기하다한국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돌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상대적인 이야기다나를 둘러싼 풍경만 낯설고 새로운 게 아니라  풍경 속의  역시 낯설고 새로운 존재 이방인이다- P255

 

낯선 풍경과 낯선 사람이 된 나를 바라보면서 새롭고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여행의 즐거움은 책이 주는 즐거움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나와 대부분의 사람들은 쳇바퀴처럼 출근하고 퇴근하고 집을 치우고 밥을 하고 매일 매일 되풀이 되는 일상에 갇혀지낸다.

매일 매일 새롭고 스펙터클한 일이 터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말이다.

또한 일상에서 매일이 새롭고 스펙터클하다면 아 그건 그것대로 커다란 불행이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책과 여행은 안전하게 내가 매일이 새롭고 스펙터클해질 수 있는 길이었구나, 그래서 내가 이 2가지를 그토록 좋아하고 열심이었던거구나.

역시 책은 다른 세상을 보는 것 뿐만이 아니라 나의 일상을 새롭게 보게 하고 더 소중하게 여기는 힘도 있었구나 하면서 감탄하게 된다.

 

김연수작가는 5년동안 론리 플래닛에 여행에 관한 58편의 짧은 글을 연재했고, 그 결과가 이 책이다.

각 글의 길이는 3-4페이지 정도로 짧고, 여행이 주제라는걸 제외하면 딱히 공통적인 점이 없어 심심할 때마다 부담없이 들고 읽기에 좋다.

하지만 그런만큼 다양한 상황과 다양한 생각을 품고 있어 누가 읽어도 아 맞아 나도 같은 생각이야라는 문장 몇개 쯤은 얻어낼 수 있을 테고, 또는 그런 상황과 관련해서 나도 글을 한번쯤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게 한다.

 

그러니 일개 서커스단으로서는 코끼리의 먹이를 구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운반하기에도 상당히 버거웠을 것같다하루키 소설에서 코끼리는 점점 줄어들다가 마침내 사라지는 것처럼 그려지는데먹이 문제를 생각하면 어쩐지 코끼리에게는 그런소멸 방식이 어울리는 듯하다.- P111

 

김연수 작가가 어릴 적 살던 동네에 온 서커스단에서 본 코끼리 얘기를 풀어놓고 하루키 소설을 이야기 하는 장면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조선 태종 때 느닷없이 우리나라에 왔던 코끼리를 생각한다. 일본에서 선물로 보내졌던 코끼리는 처음에는 모두가 신기하게 보고 했지만 어쩌다가 사람을 두명이나 밟아 죽이게 되고 결국 유배형에 처해진다.

전라도로 유배를 간 코끼리는 곧 그 지방의 큰 골칫거리가 되는데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너무 많이 먹어서였다.

지방의 없는 살림에 코끼리가 먹어대는 걸 감당할 수 없자 지방관은 중앙에 서신을 보내 제발 코끼리 좀 어떻게 해달라고 사정사정하게 되고 불쌍한 코끼리는 이 고을 저 고을을 떠돌게 되는데 그 코끼리의 마지막이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김연수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이 코끼리에 대해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소설을 쓸까? 에세이를 쓸까 잠시 고민했지만....

에휴~~ 내 주제에 무슨... 리뷰나 쓰지 뭐....

작가가 되고 안되고는 글감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또한 원래 글을 잘 쓰느냐 못쓰느냐라는 것도 아니고,

가장 중요한건 쓸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 이게 가장 중요한 거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아 나는 쓰는 사람이 아니라 읽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누군가 저 조선의 코끼리 좀 살려주면 안될까라는 생각도 막 하게 된다.

 

이런 부산 말고 다른 부산은 없을까그러자 부산을  아는사람이 가야시장 맞은편으로 가서 186 버스를 타보라고 말했다. 다음  나는 186 버스그것도 운전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알지 못하던 부산으로 떠나는 여행의 시작이었다.
피난지 부산의 삶과 애환을 담은 노래만 있으면 최고였는데그러니 다음에는 노래까지 준비해서 다시 타봐야겠다.-P103

 

또 하나 이건 것.

여행이 굳이 멀리 떠나는 것만은 아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를 다시 보고, 나를 다시 보는 것도 여행이다.

김연수 작가의 186번버스 부산 여행에 대한 짧은 글을 읽으면서는 그 186번 버스의 노선이 눈에 확 펼쳐졌다.

부산의 산복도로 곳곳을 휘감고 저 멀리 영도 태종대까지 가는 버스

좁고 가파른 길을 돌고 돌면서 여전히 너저분하고 어질러져있는 가난한 동네를 누비다가 어느 순간 멀리 부산항의 확 트인 바다를 보여주는 그 노선은 사실 부산의 속살같은 이야기들을 많이도 품고 있는 길이다.

오래 전 가끔 그 버스를 탈 때면 나는 '아 이런 곳도 사람이 사는구나'라며 더불어 그 동네들에 살고 있는 몇몇 친구들을 떠올리곤 했었다.

어느 여름 날 그 버스가 지나는 길에 살던 친구가 연락을 했었지.

집에 좀 와달라고...

혼자 자취하던 그 친구의 집이 아니라 방은 전날 내린 비로 천정의 벽지가 불룩하게 내려앉아 있었고, 벽을 타고 내린 물로 방은 엉망이었다.

그래도 젊었던 우리는 낄낄 대며 천정 벽지에 구멍을 뚫어 몇 바께스(양동이)나 되는 물을 밖으로 퍼날랐고, 청소를 하고 짐을 꺼내고 하면서도 그게 그렇게 비참하거나 하지 않았다.

우리는 계속 낄낄대고 있었고, 일을 마치고는 라면이었는지 짜장면이었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뭔가를 또 맛있게 먹었었던 것 같다.

이제는 지나치게 현대화되어버린 자갈치 시장에서는 느끼기 힘든 사람들의 오래된 묵은 그런 이야기가 아직도 그 길에는 남아있을 것이다.

그 길에 얽혀있는 이야기들을 써봤으면 좋겠다.

나 말고 김연수 작가가.... ㅠ.ㅠ

 

이 책을 읽으면서 에세이라는 장르를 다시 생각한다.

많은 종류의 글이 있지만 에세이라는 이 장르는 그만의 방법으로 나와 다른 사람, 다른 세상을 만나게 해주는 거였구나.

작가의 글이 내게 와 나의 마음이 되는 순간, 바로 그 순간 때문에 에세이를 읽는구나

에세이를 읽는 동안 나는 작가의 마음에 들어가기도 하고,

그로 인해 잠시지만 내 글을 써보고 싶어지기도 하고, 누군가는 그래서 진짜 작가가 되기도 할테고,

역시 책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구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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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2-19 03: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연수 작가님도 써주시고, 바람돌이님도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바람돌이 2021-02-26 00:40   좋아요 0 | URL
하하하 그럼 김연수 작가님이 안쓰면 제가 쓰는걸로요. 비교라도 되면 다행인데 사실 비교도 말이 안되잖아요. ㅎㅎ

겨울호랑이 2021-02-19 04: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행의 목적이 나를 둘러싼 세계를 바꾼다는 말이 참 와 닿습니다. 자신을 잃지 않고 바라볼 수 있어야한다는 의미로도 생각되네요. ^^:)

바람돌이 2021-02-26 00:43   좋아요 1 | URL
저도 그 말이 인상적이었어요. 나의 자리를 바꿔보는 것, 그래서 뭔가 또 다른 시선으로 세상이나 사람을 바라보는 뭐 그런 말이겠죠? ^^ 책을 읽는 것도 여행을 가는 것도 결국 얻는 것들은 비슷한 것 같아요. ^^

scott 2021-02-19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님 말씀에 동감!!
186번 버스의 노선~부산의 산복도로 곳곳을 휘감고 저 멀리 영도 태종대까지 가는 버스~
광고에 휘황찬란하게 나오는 유럽 풍경이 아닌!!
부산,뿌산의 186번 버스, 바람돌이님에 그친구!
에피소드가 더 더 감동적임
오늘에 이페이퍼는 나와 다른 사람들 바람돌이님 김연수님의 여행지 에피소드로 만나게 되는 !
제임스 설터 옹이 쓰지 않으면 모든게 사라져버린다고
오로지 글로 기록된것 만이 진짜 ...모든건 꿈일뿐....

바람돌이 2021-02-26 00:45   좋아요 1 | URL
scott님 말씀 감사해요. ^^ 아 186번 버스 노선은 그냥 타봐야 돼요. 진짜 말로 설명하기 힘든 굉장히 다양한 감흥을 가져다 주거든요. 근데 이 버스 노선 무지 길어요. 진짜 날잡아서 맘먹고 타야 되는데요. ㅎㅎ
제임스 설터 옹이 그랬군요. 맞는 말 같아요. 이 글 쓰다가 아주 오래전 연락이 끊기고 지금은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는 그 친구 생각을 다시 살려냈기도 하고, 그 덕분에 전 그 친구를 잊지 않겠죠? ^^

희선 2021-02-26 00: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선 시대에 그런 코끼리가 있었군요 살던 곳을 떠나 모르는 곳으로 오게 되고 이리저리 가게 되다니... 그 코끼리는 나중에 어떻게 됐을지... 멀리 가지 않고 가까운 곳을 돌아보는 것도 여행이겠지요 어떤 사람은 밖에 나가는 게 다 여행이다 하더군요 그런 마음으로 다니면 즐거울 듯도 합니다 저는 다른 데 가는 거 안 좋아하지만... 실제로 안 가고 책으로 가죠


희선

바람돌이 2021-02-26 00:50   좋아요 1 | URL
아마도 동남아쪽에서 일본으로 선물을 보낸 듯한데 그걸 또 일본이 다시 조선으로 선물을 보낸거죠. 일본도 아마 코끼리 먹이 주는게 너무 부담스러워서 보낸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뭔가 새로운걸 발견하는 것, 새로운 감정을 느끼는 것은 모두 여행일수도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심지어 집밖을 안나서도요. 내방 여행하는 법이란 책도 있잖아요. ^^ 그러니 책을 통한 여행은 더 넓고 무한한 여행이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

scott 2021-03-05 2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람돌이님 이달의 당선 !
추카~*추카~*
바람돌이님의 추억의 여행기도 하나씩 풀어 놓셔야 할것 같아요 ㅋㅋ


바람돌이 2021-03-05 23:19   좋아요 1 | URL
scott님도 축하드려요. 그것도 두편이나.... 알라딘 적립금은 들어오기만 하면 또 더 보태서 무슨 책을 사나 고민하기 시작한다죠. ㅎㅎ

모나리자 2021-03-05 1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바람돌이님~ 모두 대단하시네요~ 주말도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바람돌이 2021-03-05 23:2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모나리자님도 행복한 주말 되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