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 한국사 : 15세기, 조선의 때 이른 절정 - 조선 1 민음 한국사 1
문중양 외 지음, 문사철 엮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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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이후, 1398년 1차 왕자의 난, 1400년 2차 왕자의 난이 이어지는 등 우리의 15세기는 시작부터 파란만장했다. 피바람을 몰고 온 태종의 왕권 강화 작업 뒤에 온 세종의 치세는 평안했지만, 세종이 승하한 지 불과 3년 뒤인 1453년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 김종서, 안평대군 등 정적들을 몰아내고 실권을 잡는다.  한편으로 15세기는 수백 년 뒤인 현대의 한국인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한글이 만들어지고 과학기술이 발전했으며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이 잡혀가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 책은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복잡하고도 역동적인 시대였던 우리의 15세기를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등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본다. 또, 세계사라는 더 넓은 맥락에서 우리의 15세기를 살펴보고 있다.

  '용의 눈물', '왕과 비', '뿌리 깊은 나무' 등 그 동안 보아 왔던 조선시대 사극 덕분에 조선 초기 정치사의 대강의 흐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한 인과관계, 세부적인 사실은 잘 몰랐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머릿속에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이전의 통설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태도로 사료를 꼼꼼히 검토하려는 필자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훈구와 사림은 서로 대립 관계에 있었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이 책은 그런 통설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 중에서도 『양문양공 외예보(梁文襄公外裔譜)』라는 족보를 통해 훈구와 사림이 서로 적대적인 정치 세력이었는지를 검토해 보는 내용이 인상 깊다. 이 족보는 세조 때의 대신 문양공 양성지의 외손 계열 후손들만을 모아 놓은 독특한 족보이다. 정조가 규장각을 거쳐 간 관원 중 30명이나 양성지의 외손 계열 후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기념해 만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실린 30명 중에는 세도정치의 발원으로 평가되는 김조순도 들어 있다. 중앙의 대지주 출신인 훈구파와 지방의 중소지주 출신인 사림파가 정치적 갈등을 벌인 끝에, 사림파가 훈구파를 몰아내고 역사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이 이제까지의 통설이다.  

  하지만 외예보』에 실린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인물들, 사림의 후예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은 훈구파의 주요 인물인 양성지의 외손들이었다. 기존의 통설에서는 새로운 사회 세력으로 여겨졌던 사림파였지만, 실제로는 사림파 중에서 새로 등장한 가문 출신은 드물었고, 대부분 기존의 주요한 가문 출신이었다고 이 책은 밝힌다. 성종 대 중앙 정치의 새로운 한 축으로 등장했던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을 통틀어 일컫는 말. 국왕에게 간언하고 모든 관리들을 감찰하는 역할을 했다.)는 현실적이고 보수적인 대신들과 달리 이상과 원칙에 입각한 비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했다. 하지만 이런 상반된 태도는 훈구와 사림의 대립 때문이라기보다는 각자가 맡은 임무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또 성종 대 삼사 출신으로서 주요 관직에 오른 대신들의 수가 많았다는 사실을 통해, 삼사에 근무할 때 탄핵과 간쟁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던 인물이 대신으로 승진한 후에는 관직에 맞는 현실적인 태도를 나타낼 가능성이 컸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조선의 지배 세력 풀은 우리의 통념보다도 훨씬 더 폐쇄적이고 한정적이었던 것이다. 꼼꼼한 사료 검토를 통해 도출한 결론은 조선 초기 정치사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집는다. 


사극 '뿌리 깊은 나무' 속 세종(한석규)의 모습. 그는 "임금이 태평한 태평성대를 보았느냐? 내 마음은 지옥이기에 그나마 세상이 평온한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고충을 이야기한다.


 또한 이 책에서는 국방과 농업, 천문, 예악 등 15세기 조선의 다양한 측면들을 살펴보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놀라웠던 것은 세종이 그 다양한 측면 모두에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었다. 한 사람이 그렇게 다양한 분야의 일을 동시에, 그것도 각각 십여 년이 넘도록 준비하고 수행했다. 그런데 그 모든 분야의 일을 훌륭하게 수행했다는 것이 경이로울 정도였다.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속에서 "임금이 태평한 태평성대를 보았느냐? 내 마음은 지옥이기에 그나마 세상은 평온한 것이다."라며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는 세종의 모습이 현실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또한 이 책을 통해 세종이 고집했던 한글 표기 방식(받침이 어떻게 발음되든 상관없이 항상 고정된 형태로 표기할 것, 체언이나 용언 어간에 모음으로 시작되는 조사나 어미가 붙을 때 어간의 받침으로 고정해 적을 것(예) 숲이( O), 수피(X))이 세종대 당시에는 적용되지 못했지만 현대의 한글 맞춤법의 원칙이 되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여기서 세종의 혜안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지 느끼게 되었다.  


최부의 표류 여정


  이 책은 15세기 조선 내부의 역사도 충실하게 전하고 있지만, 거기에서 더 눈을 넓혀 15세기 세계사도 함께 살펴 보고 있다. 이슬람과 유럽 세계가 나침반, 화약, 인쇄술을 바탕으로 더 넓은 세상으로 뻗어가고 있을 때, 거대 제국 원의 부마국으로서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던 고려는 조선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세계의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변화와는 무관하게 농업과 성리학을 근간으로 하는 안정된 국가 체계를 세워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표류라는 뜻밖의 어려움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을 보게 된 사람들도 있었다. 이 책은 제주도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표류당해 중국 남부까지 견문하게 된 표류민 최부의 경험을 8페이지에 걸친 부록으로 전하고 있다. 지도와 사진 자료, 도표가 각자의 자리에 짜임새 있게 배치되어, 그의 여정을 시각적으로,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18세기 왕의 귀환'에 이어 두 번째로 읽는 '민음 한국사' 시리즈였는데 이 책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중고등학생 때 국사 공부를, 그리고 학부 때 전공 공부를 이 책과 함께 했다면 더 쉽고 즐겁게 공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학부 전공이 역사였는데도 역사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은데, '민음 한국사' 시리즈 나머지 책들도 읽으면서 한국사 통사를 머릿속에 정리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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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철학을 만나다 - 문학과 영화로 철학하기
장병희 지음 / 까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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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다크 나이트> 스포일러 있음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악당 조커(히스 레저)는 죄수들이 탄 배와 일반 시민들이 탄 배에 폭탄을 설치하고, 각각의 배에 상대쪽 배를 폭발시킬 수 있는 기폭장치도 함께 놓는다. 두 배는 운항 중 엔진 고장으로 멈추게 되고, 조커는 두 배에 탄 사람들에게 자정이 되기 전에 상대쪽 배를 폭발시키는 기폭장치를 누르면 그 배는 살려주겠다고 말한다. 자정까지 남은 시간은 30분이고, 두 배에 탄 사람들은 패닉 상태에 빠진다. 두 배에 탄 사람들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두 배에 탄 사람들 모두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폭탄이 설치된 두 배에 탄 승객들. 상대쪽 배를 폭발시키는 기폭장치를 누르면 살려주겠다는 조커의 제안 앞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갈등과 고민 끝에 두 배 모두 기폭장치를 누르는 것을 포기한다. 조커는 양쪽 모두 기폭장치를 누르지 않자 직접 기폭장치를 작동시키려 한다. 하지만 첨단 감청 장비로 조커의 위치를 파악한 배트맨(크리스찬 베일)이 조커를 제압하고 사람들을 구한다. 자신들을 희생하려 한 양쪽의 결단이 결국 서로를 살린 것이다.

  이 책 『예술, 철학을 말하다』에서는 '다크 나이트'의 이 장면으로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존재론을 설명한다. 결정의 순간 직전까지 배에 탄 사람들은 평범한 일상의 그들(das Man)이었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그들'은 일상에서 평균적인 기준에 의존하면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실존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인간이 원하는 미래의 자신의 존재 방식)을 위해 매 순간 주어진 문제를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하고 해결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 실존에 대한 고민 없이 타인의 가치판단에 의존하고 평균적인 삶을 지향한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귀속'이라고 하고 귀속하면서 살아가는 삶 '비본래적 삶'이라고 한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행동을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존재 방식을 스스로 결정하게 된다. 자신의 양심을 따른 것이다. 여기에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양심은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일반적 의미의 양심이 아니라, 남들을 모방하는 삶이 아닌 자신의 고유한 삶, 실존적인 삶, 본래적인 삶을 살도록 요구하는 내면의 목소리이다. 그들은 타인을 존중하는 실존적 선택을 함으로써, 타인에 대한 인도적 행위를 실천하는 진정한 세계-내-존재(세계 안의 다른 존재들과 다양하고 구체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존재. 서로 연결된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해 '-'을 넣었다.)이자 고유한 자신이 된다. 배 안의 사람들은 일상적인 세계에서 용기 있게 자신의 존재 방식을 결정하는 실존을 증명한 것이다. 

  이 책은 어렵게만 느껴지는 현대 철학의 개념과 이론을 이렇게 영화, 시, 소설, 희곡 같은 예술 작품의 구체적인 내용에 적용하면서 풀어나간다. 이전의 철학이 인식, 진리, 본질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추구해 왔던 것과 달리 현대 철학은 개별적 존재, 즉 현실 세계 속의 개인과 구체적인 현실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 작품 속에 그려진 인간의 구체적인 현실에 현대 철학의 개념과 이론들이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현대 철학은 결코 인간의 실제 삶에서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책을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다.

  저자는 말한다.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거나 삶의 현실을 초월하는 절대적 가치나 보편적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살아가면서 내가 체험하는 고뇌는 살아 숨 쉬는 현실이고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이고, 철학적 사고는 그런 현실 자체를 인정하고 수용함으로써 나 자신의 존재를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이라고. 저자는 고뇌로 가득한 삶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철학자들의 고민을 예술 작품을 통해 설명한다. 철학자들의 실존적이고 실제적인 고민들, 그리고 그 고민들 끝에 나온 개념과 이론들을 보면서 우리는 삶의 고민과 고뇌도 끌어안으면서 스스로 고민하고 결정하고 해결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예술과 철학의 만남뿐만 아니라 철학과 현실의 만남을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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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바나의 개미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33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 민음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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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오랜 기간 거북이를 잡으려고 노력하던 표범이 마침내 한적한 길에서 거북이와 우연히 마주쳤지요. 표범이 아하, 마침내 외나무다리에서 만났군! 이제 죽을 각오나 하시지 하고 말했어요. 그러자 거북이가 날 죽이기 전에 한 가지 청을 들어주실래요? 하고 애원했답니다. 표범은 부탁을 들어줘도 될 것 같아 그러라고 했지요. 하지만 표범이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거북이는 길에 가만히 서 있는 대신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하는데 글쎄 미친 듯이 두 손 두 발로 땅을 긁어대며 모래를 사방으로 뿌려댔답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당황한 표범이 물었죠. 거북이는 내가 죽은 후라도 여길 지나가는 누군가가 '그래, 어떤 친구가 여기서 상대편과 격렬한 투쟁을 벌였구나.'라고 말해 주기를 바라서요 하고 답했답니다.  

 

 작가의 고국 나이지리아에서 따온 듯한 모습을 한, 가상의 서아프리카 국가 캉안. 주인공 이켐의 고향 마을 아바존 사람들은 대통령 샘의 종신 집권을 위한 총선거에 협조하라는 정부의 명령을 거부한다. 그 대가로 정부는 우물을 파기 위해 시추한 물구멍들을 막아버리고, 심한 가뭄이 들자 아바존 사람들은 식수 부족에 시달리게 된다. 대통령에게 도움을 청하러 수도까지 찾아온 아바존 사람들이나, 신문 사설로 독재 정치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신문사 편집장 이켐이나 샘에게는 눈엣가시다. 온갖 핑계를 대며 아바존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대통령 때문에 수도까지 찾아온 보람도 없었지만, 그래도 고향 사람들에게 그들을 위해 투쟁했다고 말할 수 있다며 아바존 마을의 노인은 이 거북이와 표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켐은 대학교에 강사로 초청되어 학생들에게 거북이와 표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제국주의나 자본주의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면서 제국주의자들에 이어 또 다른 억압자가 된 정부와 노조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입학 요건을 낮추는 등 자기 이익을 확보하는 데 몰두하거나 학문이라는 벽에 숨는 학생들의 모습 또한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자신을 정화하고 행동거지를 바로 하길 요구한다.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은 거북이처럼 모든 것에 비판의 칼날을 세우며 투쟁한다. 


 그러나 그는 강연의 한 대목을 문제삼은 정부 기관에 끌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한다. 이켐을 보호하고 정부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가려 했던 이켐의 친구이자 공보부 장관 크리스는 이켐의 부당한 죽음을 해외 언론에 알린다. 하지만 그도 정부를 피해 도피하다 허무한 죽음을 맞는다. 그들의 압제자였던 샘조차 쿠데타로 목숨을 잃는다. 샘이 쿠데타로 축출되었다고 해서 캉안에서 독재 정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캉안의 모델인 나이지리아는 작품의 시대적 배경인 80년대부터 지금까지 독재 정치와 종교, 민족 간의 갈등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이켐과 크리스의 투쟁은 실패로 끝났다. 작품 마지막에서 이켐의 딸 아마에치나는 남은 사람들의 희망이 되지만, 아마에치나가 그 뒤의 투쟁에서 승리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지금의 나이지리아 상황을 보면 승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늘 평화와 진보를 위해 투쟁했던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투쟁하는 자는 패할 수 있다. 그렇지만 투쟁하지 않는 자는 이미 패했다." 그의 말은 자신이 지고 잡아먹힐 것을 뻔히 알면서도 치열하게 싸운 흔적을 남기려 했던 거북이의 정신과 통한다.  그와 거북이가 말하듯이, 싸우다 패하는 것은 싸우지 않는 것보다 낫다. 그래서 이켐의 후예들의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것이고, 세상의 다른 곳들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는 투쟁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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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마지막 70일
바우터르 반 데르 베인.페터르 크나프 지음, 유예진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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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난뱅이, 우울증 환자, 알콜 중독자, 사회 부적응자, 인정받지 못했던 천재. 이 책은 지금까지도 반 고흐에게 붙는 수식어들을 부정하며 시작한다. 그는 미치광이도, 사회부적응자도 아니며,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고 그의 그림 역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를에서 살던 시절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던 우체부 룰랭이 한 달 월급으로 135프랑을 받을 때 그는 동생 테오에게서 200프랑을 생활비로 받았다. 아내와 세 아이를 둔 가장보다 더 많은 생활비를 혼자 사용하며 여유로운 환경에서 작업했던 것이다. 테오를 통해 그의 그림을 접한 몇몇 사람들은 이전의 미술과는 다른 그의 신선한 그림에 감탄했고, 『메르퀴르 드 프랑스』 지에는 그의 그림에 찬사를 보내는 비평이 실렸다. 또한 반 고흐는 자신의 그림에 믿음이 생긴 뒤로는 오히려 그림을 파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자신의 그림이 많은 사람에게 진정으로 인정받는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생전에 단 한 점의 작품이 아니라 모든 작품을 팔았다. 화상인 동생 테오에게. 

  동생에게서 생활비를 넉넉히 받아서 생활이 여유로웠다고 해도, 여전히 그의 마음은 무거웠을 것이다. 먹여살릴 처자식이 있는 동생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는데 생활비가 부족하든 넉넉하든 마음이 가벼울 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동생에게 보낸 그의 편지들에서 죽을 때까지 그가 자신의 그림이 팔릴 수 있을지, 인정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불안해했던 모습을 보았다. 또 동생에게 모든 작품을 판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작품을 인정 받고 판매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저자들의 의견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반 고흐에 대한 편견들을 걷어내고 그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저자들의 취지에는 동의한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오로지 증명된 사실들만을 다룬다. 반 고흐가 동생 테오를 비롯한 가족들, 친지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통해, 그가 파리 근교의 작은 마을 오베르에서 생애 마지막 70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촘촘하게 복원한다. 저자들은 이전에는 소개되지 않았던 반 고흐의 네덜란드어로 쓴 편지까지 새롭게 소개한다. 날짜를 적지 않은 편지들을 내용에 따라 순서대로 정리하고 그 편지를 쓴 날짜를 추정했다. 70일 동안 그가 그린 그림들도 모두 이 책에 도판으로 실었는데, 그림에 표현된 자연 풍경의 모습을 분석해 그 그림이 그려진 날짜를 추정하는 수고까지 해냈다. 



반 고흐가 오베르에서 그린 <별 하나가 빛나는 하얀 집(1890)>(위)과 생레미에서 그린 <별이 빛나는 밤(1889)>. 저자들은 반 고흐가 알퐁스 도데, 월트 휘트먼, 빅토르 위고가 쓴 글들 중에서 별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글을 읽으며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려 했다고 설명한다. 밤 하늘이 현실과 지나치게 동떨어지게 표현됐다며 정작 빈센트와 테오 형제는 생레미의 <별이 빛나는 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흥미롭다. 저자들은 오베르의 별이 생레미의 별들보다 생기 있지만 동시에 정적이며 한층 더 평온하게 빛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책에 실린 편지들 속에서는 오베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의욕적으로 작업을 시작해, 끊임없이 그림에 대해 고민하고 그림을 그렸던 그의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과로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중압감 때문에 힘들어하는 테오와 건강을 잃은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더 이상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 이 책은 그가 가난하거나 미치광이이거나 모두에게서 버림을 받았다고 여겨 자살했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요소들이 그의 죽음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반 고흐가 삶에 대한 희망을 잃고 불안해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는 이전의 의견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의견이다. 하지만 마지막 70일 동안의 그의 행동과 생각들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꼼꼼하게 복원하려는 시도는 성공적이다. 또한 마지막 70일 동안 그린 모든 작품의 도판을 싣고, 작품 하나 하나마다 사용된 기법과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 작품의 배경 지식까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덕분에 그의 마지막 70일 동안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듯 생생하고 디테일하게 살펴볼 수 있다. 


빈센트 반 고흐를 평생 경제적으로 지원해준 동생 테오 반 고흐(왼쪽)와 그의 아내 요안나 반 고흐, 조카 빈센트(오른쪽).


  이 책의 또 한 가지 장점은 반 고흐가 세상을 떠난 이후의 동생 테오와 제수 요안나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준다는 점이다.  반 고흐가 세상을 떠난 지 세 달 후인 1890년 10월, 테오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며 이성을 잃었다.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세 달 뒤인 1891년 1월 세상을 떠난다. 테오의 주치의가 남긴 의료 기록도 이 책에 함께 실었다. 감정적인 묘사는 전혀 없는 진찰 기록이지만, 이성을 잃고 자신의 아내도 알아보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읽는 사람을 슬프게 한다. 

1890년 11월 28일, 이등실에 입원.
1891년 1월 25일, 84번 환자 사망.
테오도러스 반 고흐.
원인: 유전, 만성질환, 과로, 슬픔.

  테오의 사망 일시와 사인을 적은 이 짧은 기록 중, 사인 중 하나가 '슬픔'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더 슬프게 한다. 


소녀였을 때 나는 완벽하게 행복한 1년을 보내는 것이 같은 양의 행복을 평생에 걸쳐 나누어 느끼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곤 했다. 이제 내 소원은 이루어졌다. 내 몫의 행복을 만끽한 이상 이제 책임만이 남아 있다.
  테오가 세상을 떠난 뒤, 어린 아들 빈센트(큰아버지 빈센트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과 단 둘이 남겨진 아내 요안나. 요안나는 테오와 함께 보냈던 날들이 완벽하게 행복한 날들이었고 이제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면서, 평생 동안 반 고흐의 그림들을 지킨다. 요안나는 반 고흐의 그림들을 활발하게 사람들에게 선보였고, 반 고흐의 편지들을 날짜별로 정리했다. 그리고 자비를 들여 반 고흐가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들을 정리한 책을 출간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반 고흐의 그림을 만지는 것을 내버려 둘 정도로 그림에 무지했었던 그녀였지만, 그녀의 노력 덕분에 사람들은 반 고흐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반 고흐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고 그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한다. 덕분에 우리는 빈센트와 테오, 그리고 남겨진 요안나의 더 생생하고 진실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이제까지 많이 알려진 빈센트와 테오의 편지 외에도 테오가 오베르의 시골 의사 가셰 박사에게 형을 부탁하는 편지, 아내 요안나에게 보낸 러브레터, 입원 당시 테오의 진료 기록, 요안나가 빈센트를 칭찬했던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에게 보낸 편지까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기록들, 잘 알려지지 않은 오베르에서의 빈센트의 작품들까지 만날 수 있다. 반 고흐 관련 책들을 많이 읽어서 이제 반 고흐에 대한 웬만한 사실들은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새로운 이야기들을 많이 알아갈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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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역사 눈의 미학 임철규 저작집 1
임철규 지음 / 한길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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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각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많은 정보를 주는 것은 시각이다. 본다는 것은 인식과 지식의 근원이고, 볼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감각 중에서도 시각을 가장 가치 있는 감각으로 여겼었다. 서구는 그리스의 시각 중심적인 전통을 계승했고, 시각은 서구의 사유를 특징짓는 대표적인 감각이 되었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까지 서구 문화에서 눈과 시각에 대한 관점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살펴본다. 종교와 철학, 역사, 미술사, 신화, 문학까지 눈과 시각과 관련해 이 책이 다루는 문화적 요소들은 매우 폭넓고 다양하다. 


  이 책은 서론에서부터 "눈은 위험하다"고 선언한다. 눈은 대상의 부분밖에 파악하지 못하면서 그 부분을 전체라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눈으로 파악하지 못한 부분은 배제하면서 눈이 본 부분만이 전체인 것처럼 절대화하는 것은 인식의 폭력이다. 또한 본 대상을 욕망이나 억압, 또는 지배의 대상으로 만드는 타자화도 인식이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이라고 말한다. 이런 악한 눈이 있는 한 인간에게 구원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눈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타자를 인식할 수 있을까? 눈이 있기에 타자에게 다가가고 손을 내밀고 교류할 수 있는데 너무 단정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4세기 프랑스 트루아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스테인드글라스는 글을 모르는 신자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알려주면서 시각적 아름다움으로 그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눈의 위험성을 이야기하는 서론을 지나, 저자는 눈과 시각에 대한 장대한 문화사를 펼쳐나간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고대 그리스인들은 보는 것을 인식과 지식의 근원이라고 생각했고, 감각 중에서도 시각을 최고의 가치를 지닌 감각으로 여겼다. 로마도 그리스의 전통을 이어 신전 등의 웅장한 건축물, 검투사들의 피 튀기는 검투 경기 등 스펙터클(볼거리) 문화, 시각중심적인 문화를 지녔다.  시각에 적대적이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과 달리 중세 기독교 문화도 눈과 시각을 적대하지 않았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 인간의 눈에 보이도록 인간의 몸을 입은 것, 즉 예수의 육화가 기독교의 핵심 교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와 성모,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삶을 보여주는 성상, 스테인드글라스, 프레스코 벽화가 널리 이용되었다. 원근법과 망원경, 현미경 등 시각적인 도구들이 발명되었던 르네상스도 시각문화가 번성하던 시기였다. 다 빈치에게 눈은 내적 자아와 외부 세계를 연결해 주는 영혼의 창이었고, 데카르트에게 생각하는 주체는 보는 주체, 보고 사유하는 주체였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피터르 얀스 산레담의 <위트레흐트의 뷔르커르크>. 이 그림에서처럼 종교개혁 이후 신교도들의 교회에는 성상,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화려한 시각적 요소들이 배제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은 이성에도, 이성의 상징인 시각에도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신은 이성으로도, 시각으로도 파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가들은 성상을 우상으로 간주하고 파괴했고, 청각적인 설교 말씀만을 강조했다. 시각적인 요소들은 눈에 음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간주했다. 


일리노이 주에 있었던 원형교도소. 중앙의 감시탑에서 모든 감방을 감시할 수 있다. 인간을 통제하는 시각적 장치 중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나 시각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여전히 성상 등의 시각적 이미지가 성서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화려한 종교 미술을 꽃피웠다. 이후 18세기, 계몽주의는 모든 감각 중 최고의 감각은 시각이고, 모든 지식은 감각에서 나온다는 신념을 토대로 인식의 전제조건이 되는 시각을 중시했다. 그러나 18세기는 지배 세력이 시각 장치들을 피지배 세력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중앙의 감시탑에서 감옥의 모든 곳을 감시할 수 있게 고안된 판옵티콘(원형 교도소)이 그 예이다.


 19세기의 낭만주의는 눈의 독단적인 힘에 반발했다. 낭만주의자들은 눈이 지배하는 세계, 억압하고 틀 안에 가두는 이성의 세계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낭만주의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육체적인 눈은 진정한 실체를 보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상상력이 눈이 빼앗은 살아 있는 사유, 틀 안에 갇히기 전에 사유를 복원한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눈먼 예언자 테아레시아스에게 통찰력을 준 것은 물리적인 눈이 아니라 상상력의 눈이라고 했다. 


프랑스의 리얼리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의 <채석장의 일꾼들(1849)> 그는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없다. 한 번도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눈으로 본 현실만을 그대로 그려냈다.


  이에 반해 눈을 긍정하고 시각의 전통적인 권위를 회복시키려 한 것은 리얼리즘이었다. 리얼리즘은 상상력과 예술이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낭만주의의 주장을 현실 문제를 직면하지 않는 자기기만으로 보았다. 리얼리즘은 눈으로 지각할 수 있는 물리적 실체, 구체적인 사물들, 인간의 구체적인 삶, 눈에 보이는 세상을 포착했다.  19세기 초에 발명된 사진도 현실의 한 순간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점에서 리얼리즘 정신을 대변했다. 


입체주의 회화의 시작이 된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1907)>. 여러 시점에서 본 대상들을 한 화면에 풀어놓아, 원근법으로 표현되는 사실주의적 공간을 해체하고, 현실은 관찰자의 인식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눈이 관찰한 것을 토대로 한 재현을 강조하는 리얼리즘의 예술 원리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눈에 대한 회의를 품고 눈에 보이는 대로 사물을 재현하는 것을 거부한 모더니즘이었다. 상징주의는 구체적인 대상을 재현하기보다는 그 대상이 상징하는 관념들을 묘사했다. 표현주의는 눈에 보이는 외면이 아닌 인간 내면을 표현하려 했다. 초현실주의는 물리적인 현실 아래에 잠들어 있는 무의식을 표현하려 했다. 무엇보다 혁명적인 것은 입체주의였다. 입체주의는 원근법이 재현한 사실주의적 공간을 해체하고, 여러 시점에서 본 대상을 한 화면에 풀어놓으며 현실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입체주의 회화는 절대적인 시간도 공간도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연결되며, 유일하거나 절대적인 현실은 없고, 현실은 관찰자가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눈과 시각이 가지고 있는 절대성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눈과 시각에 대한 긍정과 부정, 신뢰와 회의가 엇갈리며 발전해 온 서구의 시각 문화를 폭넓게 살펴본다. 눈과 시각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수천 년의 서구 문화사의 흐름을 설명하는 저자의 통찰력은 감탄스럽다.  하지만 저자는 갑자기 '보는 눈',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배제하고 보이는 대상을 욕망, 억압, 지배의 대상으로 타자화하는 눈에 맞서는 '눈물 흘리는 눈', 예수를 닮아가려는 '선한 눈'이 인간의 종말, 역사의 파국을 유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눈이 인식의 틀 안에 대상을 가둔다고 비판하면서 정작 저자는 기독교 윤리라는 틀 안에 인류의 운명을 가둔다. 눈은 상상력을 제약한다고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어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사람이 상상할 수 있을까? 눈물 흘리는 눈도 고통 받는 대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대상을 위해 눈물 흘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폭넓은 본론에 비해 다소 근거가 빈약하고 기독교적 윤리에 갇힌 결론이 아쉽다. 


* p. s. 시각과 미학에 관련된 책인데 본문의 설명에 해당되는 도판이 본문 앞에 배치되어 있거나 아예 없어서 불편했다. 독자들이 일일이 도판 이미지를 검색하면서 보기에는 불편하다. 이 책의 개정판이 나온다면 본문의 도판 설명 부분에 해당 도판을 배치하고, 없는 도판은 보강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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