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와 여우 - 우리는 톨스토이를 무엇이라 부르는가
이사야 벌린 지음, 강주헌 옮김 / 애플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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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 P. S. 에 전쟁과 평화 결말 스포일러 있음

 '고슴도치와 여우'라는 제목만 읽고 이 책이 톨스토이와 그의 작품 <전쟁과 평화>에 대한 책이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톨스토이와 <전쟁과 평화>를 분석한 이 책에 '고슴도치와 여우'라는 제목이 붙여진 이유는, 저자 이사야 벌린이 톨스토이를 '고슴도치가 되고 싶어 했던 여우'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저자가 말하는 고슴도치와 여우는 무엇일까? 고대 그리스의 시인 아르킬로코스는 "여우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고슴도치는 하나의 큰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사야 벌린은 이 말을 사상가들을 나누는 기준으로 사용하는데고슴도치는 모든 것을 하나의 뚜렷하고 보편적인 원리, 궁극적인 진리로 환원하려는 사상가들을 말한다. 반면 여우는 서로 관계없고 모순되기까지 하는 다양한 목표를 추구하며 생각의 범위를 넓혀가는 사상가들을 말한다. 

 이사야 벌린 이전의 해석들은 톨스토이를 고슴도치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전쟁과 평화>의 방대한 이야기들이 '그리스도적 사랑과 러시아 민중의 영적인 각성이 나폴레옹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적 야심에서 러시아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하나의 주제로 모인다고 해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벌린은  전통적 해석이 톨스토이의 역사관에서 여우적인 측면을 간과했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오히려 톨스토이가 러시아가 승리한 원인을 어떤 일원적 원리로 설명하려고 하는 시도에 반발했다고 말한다. 그에게 역사적 사건은 아주 작은 원인들이 쌓여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 같은 몇몇 영웅들이 역사를 이끌어나간 것으로 설명하는 낭만주의적 역사가들에게 톨스토이는 러시아 전쟁사에 대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사실을 찾아내면서 반박했다. <전쟁과 평화> 속 한 장면으로 예를 들자면, 니콜라이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사령관 중 한 명인 바그라티온 장군을 목격한다. 바그라티온 장군의 등장이 전투 자체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다만 장군의 의연한 모습과 존재 그 자체는 부하들에게 용기를 준다. 전투 이후 쓰여진 공문에서는 전투의 공을 바그라티온 장군에게 돌리지만, 그가 이름 없는 미천한 군인들보다 전투의 과정과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름 없는 군인 한 명 한 명이 지금 전세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볼 수 없으면서도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웠다. 그 한 명 한 명의 싸움이 전투의 결과를 만들어냈다. 


2016년 BBC 드라마 버전 전쟁과 평화의 한 장면. 니콜라이(잭 로던)는 전투에 참여하면서도 전황을 전혀 파악할 수 없어 혼란스러워한다.


 또한 러시아 민중의 애국심이 나폴레옹에게서 러시아를 구했다는 통념과 달리,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1812년 전쟁 당시 개인적인 안위와 이익을 찾는 데 몰두하는 모스크바 시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살기 위해 정신 없이 피난 가고, 그 와중에 약탈을 하기도 하고, 전쟁 전에 해 오던 일을 계속 해 나가기도 한다. 러시아를 구하기 위해 자기 한 몸을 희생하겠다는 영웅적인 감정, 자신이 역사의 변화에서 주역이라는 생각도 없이 이렇게 평소대로 자신의 일에 충실하려는 사람들이 국가에 더 필요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반면 역사적 사건의 전반적인 흐름을 주도하면서 역사의 변화에 동참하려 한 사람들, 영웅처럼 행동하면서 극적인 사건에 참여한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가장 무익한 존재였다고 말한다. 

 톨스토이는 역사학자들이 논리정연하고 깔끔하게 정리한 역사는 현실의 아주 작은 세부를 놓쳐버리고 만 가공의 삶이라면서, 개인과 공동체의 실제 삶을 그리기 위해 역사소설을 썼다. 그에게는 역사와 현실 속의 아주 작은 세부들, 개개인이 실질적으로 경험하는 일상의 삶이 실제의 삶이었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소설 형식이기 때문에, 그는 논문이 아닌 역사소설로 자신의 역사관을 제시하려 한 것이다.


2016년 BBC 드라마 버전 전쟁과 평화의 한 장면. 모스크바 시민들은 프랑스군이 온다는 소식에 황급히 피난가고 있었다.


 역사와 삶 속에서 일어나는 아주 세밀한 일들도 놓치지 않는 뛰어난 관찰력과 묘사력 덕분에,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 에서 귀족에서부터 황제, 군인들, 평민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실제처럼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현실들이 역사를 이룬다고 보기 쉽지만, 톨스토이에게 삶을 이루는 진정한 요소는 개인의 경험, 개인과 개인과의 사사로운 관계, 사랑, 질투, 증오, 열정 같은 개인의 감정, 일상의 나날들, 이런 모든 것이었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인간의 개인적인 삶에 대한 기록만으로는 역사를 움직이는 힘, 역사의 흐름을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전쟁과 평화>를 집필하면서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에서, 독자들이 등장인물들의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 약간의 음모와 하찮은 대화까지 그럴듯하게 묘사하는 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고 마지못해 인정했다고 한다.(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같다. 본인도 독자들이 전쟁 파트보다는 평화 파트, 그 중에서도 로맨스와 막장 드라마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나도 그래서 톨스토이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이런 이야기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개인의 삶이 갖는 특징들만이 진실이라고 믿으면서도, 그런 특징들의 분석으로는 역사의 흐름을 설명할 수 없다는 원칙을 지니고 있는 것이 톨스토이의 모순이었다. 

 톨스토이는 역사와 인간사를 꿰뚫는, 역사와 인간사 속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의 원칙을 찾으려 애썼다. 그는 역사와 인간사 속 다양하고 구체적인 요소들을 찾아내 분석하고, 각 요소의 핵심까지 파고드는 데는 천재적이었다. 하지만 끝내 그 모든 것들을 연결시키는, 역사와 인간사의 모든 것을 꿰뚫는 궁극적인 원리가 무엇인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 벌린은 톨스토이를 고슴도치가 되려고 했지만 여우적인 성향의 한계에 갇혔던 여우로 보았다. 하나의 큰 지혜를 보는 고슴도치가 되려 했지만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다양한 것을 추구하는 성향 때문에 여우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처럼 이 책에서 분석하는 것은 <전쟁과 평화>라는 작품 자체보다는 <전쟁과 평화> 속 톨스토이의 역사관이다. 이 책은 톨스토이가 그리스도적 사랑, 러시아 민중 특유의 강인함과 생명력 같은 뚜렷한 주제로 작품을 썼다는 통념을 깬다. 톨스토이는 하나의 뚜렷한 진리나 원칙을 가지고 살아간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으로는 많은 모순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역사관도 많은 모순을 지니고 있어, <전쟁과 평화>에서 드러나는 그의 역사관을 독자들이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자신들의 이론에 맞추어 역사 속 아주 일부의 요소만 취사선택한다고 역사학자들을 비판하면서 개인들 각자의 삶을 빠짐없이, 세부적으로 그려냈지만, 역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자신도 역사와 인간사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도 역사와 인간사를 꿰뚫는 보편적인 원칙을 찾는 데는 실패한다. 

 그리스도적 사랑과 러시아 민중의 애국심이 러시아를 구원했다는 이전의 해석은 이해하기 쉽고 명쾌하다. 하지만 이 책은  <전쟁과 평화>를 만들어낸 톨스토이라는 인물의 더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내면과 역사관, 그리고 그런 내면에 영향을 준 다양한 사상적 배경을 소개한다. <전쟁과 평화>라는 작품 자체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기대하고 보았다가는 톨스토이의 복잡한 내면과 역사관, 그것에 영향을 준 다양한 사상들과 맞닥뜨리고 당황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조금씩 곱씹어 읽어보면 이전 해석에서는 볼 수 없었던 톨스토이와 <전쟁과 평화>의 더 복잡한 면모와, 그것을 만들어낸 기반이 어떤 것이었는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P. S. 하지만 <전쟁과 평화>에 대해 우리가 몰랐던 사소한 사실들도 군데군데서 만날 수 있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가 <전쟁과 평화>라는 제목의 시초인 것 같지만, 사실은 톨스토이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프랑스의 사상가 프루동의 저서 <전쟁과 평화>에서 따온 제목이라고 한다. <전쟁과 평화>라는 제목의 진짜 시초는 프루동의 <전쟁과 평화>였지만, 지금은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압도적으로 인지도가 높다.

 또 톨스토이는 인간의 행위나 성격을 개인적인 성장의 틀에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했다는데, <전쟁과 평화>가 어떤 면에서는 피에르, 나타샤, 안드레이, 니콜라이, 마리아의 성장 드라마이기도 하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피에르가 프리메이슨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사실 톨스토이는 프리메이슨을 비롯한 신비주의를 배격하는 철저히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전쟁과 평화>에는 피에르가 외국의 프리메이슨 지부들을 여행하면서 연구한 개혁안을 프리메이슨 회원들이 거부하고, 피에르가 프리메이슨의 신비주의의 영향으로 자기 이름 철자로 자기 운명을 점쳐 보는 모습들이 나온다. 이런 묘사들이 톨스토이의 프리메이슨에 대한 회의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는 피에르가 젊은 시절과 달리 신비주의를 배격하게 됐다고 나오는 것을 보니, 피에르는 프리메이슨에서 탈퇴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초고에서 피에르는 데카브리스트가 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삶을 마치는 것으로 나왔다는 것. 지금 우리가 읽는 완성작 에필로그에서도 암시되기는 하지만 확인사살 당한 기분이었다. 그것을 보면 카라타예프의 소박한 신앙심도 피에르에게, 톨스토이에게 궁극적인 구원이 될 수는 없었다는 것으로 보인다. 카라타예프의 신앙심으로 피에르를 구원하게 두기에는 톨스토이는 너무나 현실적이고 복잡한 인물이었다.(하지만 나는 카라타예프의 가르침 덕분에 피에르가 시베리아에서도 행복하게 살아갔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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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1~4 세트 - 전4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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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포함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는 "남편 찾기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안에서 여주인공이 사랑하는 대상이 여러 번 바뀌어서, 끝까지 읽어야 여주인공의 남편이 누구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면서 누가 여주인공의 남편이 될 것인가를 예측해 보는 것처럼, 당시 독자들도 등장인물들 중 누가 여주인공의 남편이 될 것인가를 놓고 입씨름을 벌였을 거라는 이야기도 봤다. 책 앞쪽의 등장인물 소개 덕분에 나는 누가 남편인지를 미리 알고 책을 읽었다.(인간적으로 등장인물 소개에 스포일러는 넣지 말아 주세요, 출판사 분들.) 그래서 여주인공 나타샤가 보리스와 첫키스를 해도, 안드레이와 사랑에 빠져도, 아나톨리와 바람이 나도 나는 평안한 마음으로 계속 책을 읽었다. 결국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여주인공과 이어진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2016년 BBC 드라마 버전 <전쟁과 평화> 속 피에르와 나타샤.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온 끝에 마침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어차피 남편은 피에르였다. 2016년 BBC 드라마 버전 <전쟁과 평화>에서 남주인공 피에르 역을 맡았던 배우 폴 다노의 표현대로, "피에르와 나타샤는 수천 페이지에 걸쳐 서로를 찾아낸다." 오랜 시간 돌고 돌아온 끝에 이루어지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응답하라 시리즈 중에서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을 닮았다는 글을 읽고 동감했다. "응팔의 여주인공 덕선도, 나타샤도 사랑이 어떤 건지도 모르면서 자신에게 사랑이 오길 기다린다나타샤는 그저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에 첫사랑인 보리스와 첫키스를 하지만 곧 그를 잊어버린다." 그  나타샤는 왕자님처럼 잘생기고 멋있는 안드레이와 사랑에 빠져 그와 약혼하지만, 바람둥이 아나톨리의 유혹에 넘어가 파혼한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쳐 나타샤가 평생 동안 사랑하게 되는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항상 그녀를 지지하고 도와주고 곁에 있어준 피에르였다." (출처: 디시인사이드 기타 국내 드라마 갤러리 유저 ㅇㅇ님의 글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drama_new&no=6018928&page=덕선이 가벼운 첫사랑 선우, 예뻤던 풋사랑 정환을 거쳐,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곁을 지켜주었던 택을 평생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어린 시절부터 함께 쌓아온 유대와 신뢰가 낭만적인 감정을 넘어서는 굳건한 사랑이 된다는 설정, 오랜 시간을 돌아왔어도 서로에게 올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는 설정에서 <전쟁과 평화>는 응답하라 시리즈와 통한다. (또, 이번 BBC 드라마 버전은 나타샤가 다른 사람을 좋아할 때도 피에르를 의식하고 신경 쓰고 챙겨주는 모습들을 더 넣어서, 다른 사람을 좋아할 때도 늘 택을 의식하고 신경 쓰고 챙겨주었던 덕선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사랑 이야기 외에도 <전쟁과 평화>와 응답하라 시리즈 사이에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두 작품 모두 작품이 만들어진 당시보다 과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전쟁과 평화>의 시대 배경은 톨스토이가 집필하던 당시인 1860년대가 아니라 그보다 50여 년 전인 1805년에서 1820년이다. 작품 속 인간 군상, 사회상이 워낙 구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서 직접 보고 듣고 겪은 것을 바탕으로 쓴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집필 당시로부터도 5, 60여 년 전의 나폴레옹 전쟁사와 당시 러시아의 사회사에 대한 자료를 토대로 쓴 책이다.(다만 전쟁 묘사에는 톨스토이 자신이 크림 전쟁에 포병대로 참전했을 때의 경험이 많이 반영되었다고 한다.) 2010년대 현재에 6.25 전쟁 당시와 그 직후인 1950, 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썼다고 생각하면 와 닿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톨스토이가 집필하던 당시로부터도 50여 년 전의 이야기지만 그 시대의 청춘들의 모습은 지금의 우리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 프랑스와의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과 부딪치게 되지만, 그런 와중에도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으려 애쓴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 때문에 아파하기도 하고, 가난 때문에 꿈을 포기하기도 한다. 뭔가 해 보고 싶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헤맨다. 이것저것 시도해 봐도 이루어지는 건 하나도 없다. 


BBC 2016년 드라마 버전 전쟁과 평화 속 한 장면. 피에르(폴 다노)는 자신의 인생이 실수의 연속이라며 자조하고 있다.


  그런 청춘들의 고민과 방황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캐릭터는 주인공 피에르이다. 에르는 모든 것에 서툴고유혹에 잘 빠진다더 올바르게더 잘 살아보고 싶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헤맨다.  2016년 BBC 드라마 버전에서 피에르는 "내 인생은 실수의 연속이고, 사람들을 돕고 세상을 더 나아지게 하려고 했지만 하는 일마다 망치고 있다. 살면서 이룬 게 아무 것도 없다."고 한탄한다. 원작에서 피에르는 이런 말을 하지 않지만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결혼생활도, 농지 개혁도, 프리메이슨 활동도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고. 꿈에 있어서도 사랑에 있어서도 피에르는 실패자였다.

  사실 작가 자신도, 독자들도 인정하는 대로 피에르는 결코 유능하지 않다.  농지개혁이 실패했던 것은 피에르의 실무 능력과 추진력 부족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의 원정 때 모스크바를 지키기 위해 만들었던 민병대는 관리 소홀로 좀도둑떼로 전락했다. 정식으로 입대하지 않고 무작정 군대에 찾아갔다 그저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는 것밖에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전쟁을 일으킨 주범인 나폴레옹을 암살하겠다고 모스크바에 남았지만, 나폴레옹에게 접근하기는커녕 방화범으로 몰려 포로수용소에 갇혔다. 때때로 사람들을 돕기도 했지만 그것도 다소 서툴렀다

  결국 피에르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엄청난 업적을 남기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렇다 할 업적을 쌓은 것은 전쟁에서 활약한 안드레이, 니콜라이, 돌로호프이다. 그들은 머리도 명석하고 군인으로서의 능력도 뛰어나고 외모까지 수려하다. 반면 피에르는 실무 능력이 뛰어나지도 않고, 외모도 평범하다. 전쟁 속에서 활약하기는커녕 다른 사람들처럼 전쟁의 참화에 휩쓸린다. 그럼에도 끝까지 살아남고, 작가 자신과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은 피에르이다. 


BBC 2016년 드라마 버전 속 피에르. 농지개혁을 추진하던 때의 모습이다.


  피에르는 계속해서 살아가고, 계속해서 행동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작품 내내 피에르는 계속해서 뭔가를 하려고 한다. 되돌아보면 그것이 치기에서 나온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하더라도.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더 올바르게 살기 위해, 보람 있게 살기 위해, 그리고 세상을 더 나아지게 만들기 위해 계속 시도한다그는 자신의 시도가 계속 실패로 끝나고, 세상에 자신의 이상과 어긋나는 것들, 자신의 이상을 방해하는 것들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래도 계속해서 나아가기로 선택할 사람이다. 

  그런 피에르도 자신이 했던 모든 일이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은 포로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을 때는 모든 걸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는 농민 출신 병사 플라톤 카라타예프를 만난다. 어느 곳에서나, 어떤 조건에서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카라타예프를 보면서 피에르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을 배운다. 그런 가르침을 준 카라타예프 자신조차 결국은 허망한 결말을 맞았지만, 피에르는 그에게서 배운 것을 간직한 채 계속해서 살아가고, 나아간다.  포로 신세에서 구출되고 나서 피에르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절망에 빠져 있던 나타샤를 다시 만나게 된다. 삶의 의미를 깨닫고 변화된 피에르의 모습은 나타샤에게도 새로운 희망을 준다. 결국 피에르는 오래도록 사랑해 왔던 나타샤의 마음을 얻어 그녀와 행복한 가정을 이룬다.  특별한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어도 그토록 찾아헤맸던 삶의 의미를 깨닫고,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면서 사는 그의 모습은 더 없이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피에르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나타샤와 결혼한 지 7년 뒤인 1820년, 그는 나타샤와 아이들과 행복하게 살아가면서 한편으로는 비밀 정치단체 일을 하고 있다. 정치단체 일 때문에 집에 늦게 돌아와 나타샤에게 바가지를 긁히고, 열혈 왕당파인 니콜라이에게 반역의 무리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으면서도. 나타샤가 "카라타예프가 지금의 당신을 본다면 당신에게 동의할까요?"라고 물었을 때 피에르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카라타예프였으면 지금 이대로, 그저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아가라고 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에르는 황제가 몇몇 측근들 위주로 정국을 운영하는 당시의 상황이 그릇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과 가족들의 행복을 위협할 수 있는 일인데도 정치 활동에 뛰어든다.

  피에르 자신은 모르지만, 톨스토이 자신도 독자들도 피에르가 또 다시 실패할 것을 알고 있다. 그가 몸 담고 있는 정치단체는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자유주의 사상을 받아들인 혁명가 데카브리스트들일 것이다. 그들은 입헌군주제와 농노 해방을 목표로 하고 5년 뒤인 1825년 다음 황제인 니콜라이 1세의 즉위식에서 반란을 일으키지만, 치밀하게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하고 진압당한다. 주모자들은 처형당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시베리아로 추방돼 평생 그곳에서 살아가게 된다. 피에르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초고에서 피에르는 데카브리스트이고, 시베리아로 추방돼 그곳에서 생을 마친다. 

  피에르가 꿈꾸었던 혁명은 실패로 끝날 것이고, 그의 뒤를 이어 혁명을 꿈꾼 사람들도 수없이 좌절하고 회의감을 느낄 것이다. 지금까지도 그들이 꿈꾸었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격차는 너무나 크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 덕분에 세상은 끊임없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나폴레옹 같은 몇몇 영웅이 아니라고 한다. 톨스토이는 묵묵히 전쟁에 나아가서 싸우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계속해서 살아간 한 사람 한 사람이 역사를 움직여 왔다고 보았다.  피에르도 그렇게 역사를 움직여 온 사람들 중 한 명일 것이다. 

  그들을 기억하며 톨스토이는 50여 년 전, 우리는 200여 년전의 그 시대, 그들에게 이야기한다. 그 시절을 잘 버티고, 잘 살아왔다고.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않았어도, 그렇게 살아간 것만으로 그들은 역사를 움직여 왔다고.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빛나는 사람들이라고. 들리는가, 들린다면 응답하라, 1812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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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 - 145년의 유랑, 20년의 협상
유복렬 지음 / 눌와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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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1년 마침내, 병인양요 때(1866년) 프랑스에 빼앗겼던 외규장각 의궤가 145년만에 우리나라에 돌아왔다하지만 반환이 아닌 영구임대라는 형식으로 돌아왔다이 점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하지만 왜 외규장각 의궤가 영구임대라는 형식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지그런 형식으로라도 돌아오게 하기 위해 누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 자세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이 책은 그 두 가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준다.

 

 저자는 외규장각 의궤 반환 협상에 직접 참여했던 외교관답게 반환 협상 과정을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전해준다반환 협상 과정에서 일어났던 한국과 프랑스 사이의 치열한 신경전은 직접 그 과정을 지켜보았던 저자가 아니었다면 그만큼 생생하게 전하지 못했을 것이다올곧은 학자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고 강경하게 반환을 주장했던 한상진 교수와 그에 팽팽하게 맞섰던 자크 살루아 위원다른 한국 유물과 의궤의 등가교환을 고집하는 프랑스 측에 대담하게 대가 없는 반환을 요구했던 박흥신 대사외규장각 의궤가 반환되는 순간까지 의궤에 대한 애착을 놓지 않았던 자클린 상송 프랑스국립도서관 사무장까지 다양한 개성과 신념을 지닌 인물들이 부딪치고 협상하면서 만들어내는 드라마는 흥미진진하다또 외규장각 의궤가 병인양요 당시 불타 없어지지 않고 프랑스에 남아 있다는 것을 최초로 발견한 박병선 박사프랑스의 배신자라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약탈한 문화재는 돌려주어야 한다는 신념에 따라 의궤의 반환을 도운 자크 랑 전 프랑스 문화부장관과 뱅상 베르제 교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그들의 헌신과 노고에 감사하게 된다.

 

 하지만 제목을 읽고 독자들이 기대하는 것과 저자가 의도한 것이 어긋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단점이다.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 이야기라는 제목을 보고 독자들이 기대하는 것은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의 의궤 반환 협상이야기이다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의도하는 것은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와 외교관(으로서의 나의 삶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저자는 외교관으로서 살아오면서 가장 많은 땀과 눈물을 바친 외규장각 의궤 반환 협상 이야기를 하면서자신의 외교관으로서의 삶 이야기를 함께 풀어나가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저자의 외교관으로서의 삶을 이야기하겠다는 의도를 감안하더라도외규장각 의궤 반환 협상 이야기가 주요 내용인 다른 장들과 달리외규장각 의궤 이야기가 전혀 없는 2장은 책의 전체 흐름을 끊어놓는 느낌이다.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가 이야기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독자로서는 저자의 외교관으로서의 개인적인 삶 이야기가 생각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당황할 수도 있다. 

 

 또 2005년부터 2009년까지의 반환 협상 과정이 거의 생략된 것도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저자가 2006년부터 2008년까지 튀니지에 부임해 그 기간 동안은 협상 과정을 직접 지켜보지 못했던 것, 2008년에서 2009년까지는 협상이 소강상태에 놓였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부록의 ‘2006년 9한국-프랑스 정상회담외규장각 의궤 문제 해결을 위해 양측이 모두 만족할 만한 방안을 모색하자는 입장을 재확인이라는 한 줄 문장만으로는 그 5년이 요약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그 시기 동안 MBC 프로그램 느낌표’ 제작진이 외규장각 의궤 환수 캠페인을 벌이고민간단체인 문화연대가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던 일도 언급될 만한 일이었는데거기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되지 않은 것이 아쉽다국제법과 외교에 능통한 외교관으로서 저자가 그들의 활동의 의의와 한계를 정확히 짚어줄 수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아쉬운 부분이다.

 

 이러한 아쉬운 점들이 있지만길고도 치열했던 외규장각 의궤 반환 협상과의궤가 돌아오게 하기 위해 분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한다는 것만으로 이 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뜨거운 열정과 차가운 이성신랄한 유머감각을 갖춘 저자의 필력 덕분에 협상 과정이 펼쳐내는 드라마는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20여 년에 걸친 협상 끝에 마침내 모든 외규장각 의궤가 한국에 돌아오는 마지막 장면은 독자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저자를 포함한그 순간이 오기까지 애쓴 모든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게 된다그리고 영구임대에서 더 나아가 언젠가는 완전한 반환이 되길그리고 아직 돌아오지 못한 우리 문화유산들이 우리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길 꿈꾸게 된다기나긴 협상의 종착점이었던 외규장각 의궤의 귀환이 더 많은 우리 문화유산들이 돌아오는 길의 시작점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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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와 홍대용, 생각을 겨루다 - 서연문답
김도환 지음 / 책세상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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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의 선구자인 홍대용과 개혁군주 정조두 사람이 만났다그 결과는 어땠을까그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줄 책이 이 책 정조와 홍대용생각을 겨루다이다홍대용은 왕세자의 수업인 서연(書筵)에 참여하는 관직에 있으면서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와 자신다른 서연관들이 9개월 동안의 서연에서 나눈 대화를 계방일기(桂坊日記)라는 책으로 남겼다이 책은 계방일기를 번역하고 저자의 해설과 논평을 함께 넣어한 편의 사극처럼 재구성했다.

서연이 진행되면서 정조는 홍대용의 깊은 학식을홍대용은 정조의 영민함을 알게 되고 두 사람의 대화는 깊어진다깊은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두 사람이 펼치는 논의는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과 지성들이 학문과 정치에서 어떤 것들을 고민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두 사람이 지향하는 바는 근본적으로 달랐다홍대용이 급선무로 생각한 것은 이용후생(利用厚生), 즉 학문에서 배운 것을 실천해 백성들의 현실의 삶을 이롭게 하는 것이었다반면 정조가 급선무로 생각한 것은 왕 스스로가 군자가 되어 보편타당한 의리를 세우고그에 따라 나라가 잘 다스려지는 것이었다이 지점에서 홍대용은 정조와 자신이 갈 길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시대에 동참하기를 포기한다

이 책은 개혁군주로 널리 알려졌던 정조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그로 인해 홍대용과 정조가 엇갈리는 과정을 생생하고도 흥미진진하게 펼쳐내고 있다홍대용과의 논쟁에서 의견이 엇갈릴 때마다 자기 권위를 내세우며 미묘한 신경전을 펼치고이용후생에 대한 홍대용의 간언을 주의 깊게 듣기보다는 흥밋거리로 여기는 정조의 모습은 그의 개혁군주로서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정조와의 근본적인 관점 차이로 새로운 세상을 향한 홍대용의 꿈이 좌절되는 모습은 독자에게 안타까움을 남긴다하지만 저자는 그의 실학이 여전히 현재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며 그의 꿈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는 실마리를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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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미인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0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지음, 최세희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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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차갑지만 온 세상을 포근하게 감싸 안습니다그런 눈처럼 차가운 듯하면서도 외로운 마음다친 마음을 감싸 안는 소설이 있습니다. 7년 전에 개봉되어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던 공포영화렛미인의 원작 소설렛미인이 그 소설입니다.렛미인트와일라잇시리즈처럼 인간과 흡혈귀의 사랑을 그려내고 있지만인간과 흡혈귀의 사랑을 달콤한 로맨스로 그려낸트와일라잇시리즈와 달리그 사랑을 차분하고 담담하게 지켜볼 뿐입니다작가는 담담하다 못해 때로는 차갑고 건조하게 그 사랑을 바라보지만그 사랑은 온기를 품고 있고 그 온기가 읽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렛미인속 인간과 흡혈귀의 사랑은 낭만적이지도 않고 무작정 달콤하지만도 않습니다인간인 오스카르와 흡혈귀인 엘리는 서로 매우 다른 존재인 것 같지만둘 다 차가운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오스카르는 못생기고 뚱뚱하다는 이유로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하고집에서는 이혼한 부모 중 어느 쪽에도 기대지 못하는 외롭고 연약한 소년입니다오스카르와 달리 아름다운 외모와 인간보다 강한 힘을 지녔지만,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과 함께 사는 인간이 구해다 주는 피에 의존해야 하는 엘리도 작고 약한 존재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하지만 그 작고 약한 존재들이 우정과 사랑을 쌓아가면서 서로 온기를 나누고서로에게서 누구에게서도 얻지 못한 위안을 얻습니다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에게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했던 오스카르는 그들에게 맞설 용기를 얻고아무 감정 없이 그저 생존만을 위해 수백여 년을 살아오던 엘리는 오랜만에 천진한 동심과 따뜻한 우정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들의 우정과 사랑이 서로를 구원할 것이라고 확답을 내리지 않습니다흡혈귀이기에 엘리가 인간들의 생명을 빼앗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은 오스카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잔혹한 현실입니다소설은 영화에서는 미처 다 나오지 못했던 엘리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꼼꼼하게 풀어나가면서엘리가 오스카르에게는 좋은 친구이지만 희생자들에게는 자신이 살기 위해 그들의 삶을 짓밟은 가해자라는 것도 분명히 보여줍니다건조한 문체이지만 엘리와 그녀의 보호자 호칸이 벌이는 살인행위들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그 잔혹함에 질리는 독자들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스카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결정일까요엘리와의 우정이 과연 그에게 구원이 될까요아니면 또 다른 지옥 같은 삶의 시작이 될까요작가는 명쾌하게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하지만 잠시라도 내가 되어 봐'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겪어온 고통을 전하는 엘리를 이해하게 되고그녀의 잔혹함을 알면서도 그녀와의 우정과 사랑을 놓지 않는 오스카르의 모습은 우리에게 작은 온기를 전합니다이 소설은 사랑이 언제나 구원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차가운 세상 속에서 작은 온기를 나눌 수 있게 한다고 이야기합니다그래서 차가운 듯한 이 소설에서 우리는 오히려 따뜻한 위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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