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나의 개미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33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 민음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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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오랜 기간 거북이를 잡으려고 노력하던 표범이 마침내 한적한 길에서 거북이와 우연히 마주쳤지요. 표범이 아하, 마침내 외나무다리에서 만났군! 이제 죽을 각오나 하시지 하고 말했어요. 그러자 거북이가 날 죽이기 전에 한 가지 청을 들어주실래요? 하고 애원했답니다. 표범은 부탁을 들어줘도 될 것 같아 그러라고 했지요. 하지만 표범이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거북이는 길에 가만히 서 있는 대신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하는데 글쎄 미친 듯이 두 손 두 발로 땅을 긁어대며 모래를 사방으로 뿌려댔답니다. 어째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당황한 표범이 물었죠. 거북이는 내가 죽은 후라도 여길 지나가는 누군가가 '그래, 어떤 친구가 여기서 상대편과 격렬한 투쟁을 벌였구나.'라고 말해 주기를 바라서요 하고 답했답니다.  

 

 작가의 고국 나이지리아에서 따온 듯한 모습을 한, 가상의 서아프리카 국가 캉안. 주인공 이켐의 고향 마을 아바존 사람들은 대통령 샘의 종신 집권을 위한 총선거에 협조하라는 정부의 명령을 거부한다. 그 대가로 정부는 우물을 파기 위해 시추한 물구멍들을 막아버리고, 심한 가뭄이 들자 아바존 사람들은 식수 부족에 시달리게 된다. 대통령에게 도움을 청하러 수도까지 찾아온 아바존 사람들이나, 신문 사설로 독재 정치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신문사 편집장 이켐이나 샘에게는 눈엣가시다. 온갖 핑계를 대며 아바존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대통령 때문에 수도까지 찾아온 보람도 없었지만, 그래도 고향 사람들에게 그들을 위해 투쟁했다고 말할 수 있다며 아바존 마을의 노인은 이 거북이와 표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켐은 대학교에 강사로 초청되어 학생들에게 거북이와 표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제국주의나 자본주의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면서 제국주의자들에 이어 또 다른 억압자가 된 정부와 노조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는 입학 요건을 낮추는 등 자기 이익을 확보하는 데 몰두하거나 학문이라는 벽에 숨는 학생들의 모습 또한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자신을 정화하고 행동거지를 바로 하길 요구한다.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은 거북이처럼 모든 것에 비판의 칼날을 세우며 투쟁한다. 


 그러나 그는 강연의 한 대목을 문제삼은 정부 기관에 끌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한다. 이켐을 보호하고 정부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 가려 했던 이켐의 친구이자 공보부 장관 크리스는 이켐의 부당한 죽음을 해외 언론에 알린다. 하지만 그도 정부를 피해 도피하다 허무한 죽음을 맞는다. 그들의 압제자였던 샘조차 쿠데타로 목숨을 잃는다. 샘이 쿠데타로 축출되었다고 해서 캉안에서 독재 정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캉안의 모델인 나이지리아는 작품의 시대적 배경인 80년대부터 지금까지 독재 정치와 종교, 민족 간의 갈등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이켐과 크리스의 투쟁은 실패로 끝났다. 작품 마지막에서 이켐의 딸 아마에치나는 남은 사람들의 희망이 되지만, 아마에치나가 그 뒤의 투쟁에서 승리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지금의 나이지리아 상황을 보면 승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늘 평화와 진보를 위해 투쟁했던 독일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다. "투쟁하는 자는 패할 수 있다. 그렇지만 투쟁하지 않는 자는 이미 패했다." 그의 말은 자신이 지고 잡아먹힐 것을 뻔히 알면서도 치열하게 싸운 흔적을 남기려 했던 거북이의 정신과 통한다.  그와 거북이가 말하듯이, 싸우다 패하는 것은 싸우지 않는 것보다 낫다. 그래서 이켐의 후예들의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것이고, 세상의 다른 곳들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고 있는 투쟁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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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마지막 70일
바우터르 반 데르 베인.페터르 크나프 지음, 유예진 옮김 / 지식의숲(넥서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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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난뱅이, 우울증 환자, 알콜 중독자, 사회 부적응자, 인정받지 못했던 천재. 이 책은 지금까지도 반 고흐에게 붙는 수식어들을 부정하며 시작한다. 그는 미치광이도, 사회부적응자도 아니며,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았고 그의 그림 역시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를에서 살던 시절 그의 친구가 되어 주었던 우체부 룰랭이 한 달 월급으로 135프랑을 받을 때 그는 동생 테오에게서 200프랑을 생활비로 받았다. 아내와 세 아이를 둔 가장보다 더 많은 생활비를 혼자 사용하며 여유로운 환경에서 작업했던 것이다. 테오를 통해 그의 그림을 접한 몇몇 사람들은 이전의 미술과는 다른 그의 신선한 그림에 감탄했고, 『메르퀴르 드 프랑스』 지에는 그의 그림에 찬사를 보내는 비평이 실렸다. 또한 반 고흐는 자신의 그림에 믿음이 생긴 뒤로는 오히려 그림을 파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자신의 그림이 많은 사람에게 진정으로 인정받는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는 생전에 단 한 점의 작품이 아니라 모든 작품을 팔았다. 화상인 동생 테오에게. 

  동생에게서 생활비를 넉넉히 받아서 생활이 여유로웠다고 해도, 여전히 그의 마음은 무거웠을 것이다. 먹여살릴 처자식이 있는 동생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는데 생활비가 부족하든 넉넉하든 마음이 가벼울 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동생에게 보낸 그의 편지들에서 죽을 때까지 그가 자신의 그림이 팔릴 수 있을지, 인정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불안해했던 모습을 보았다. 또 동생에게 모든 작품을 판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작품을 인정 받고 판매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저자들의 의견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반 고흐에 대한 편견들을 걷어내고 그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저자들의 취지에는 동의한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오로지 증명된 사실들만을 다룬다. 반 고흐가 동생 테오를 비롯한 가족들, 친지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통해, 그가 파리 근교의 작은 마을 오베르에서 생애 마지막 70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촘촘하게 복원한다. 저자들은 이전에는 소개되지 않았던 반 고흐의 네덜란드어로 쓴 편지까지 새롭게 소개한다. 날짜를 적지 않은 편지들을 내용에 따라 순서대로 정리하고 그 편지를 쓴 날짜를 추정했다. 70일 동안 그가 그린 그림들도 모두 이 책에 도판으로 실었는데, 그림에 표현된 자연 풍경의 모습을 분석해 그 그림이 그려진 날짜를 추정하는 수고까지 해냈다. 



반 고흐가 오베르에서 그린 <별 하나가 빛나는 하얀 집(1890)>(위)과 생레미에서 그린 <별이 빛나는 밤(1889)>. 저자들은 반 고흐가 알퐁스 도데, 월트 휘트먼, 빅토르 위고가 쓴 글들 중에서 별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글을 읽으며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려 했다고 설명한다. 밤 하늘이 현실과 지나치게 동떨어지게 표현됐다며 정작 빈센트와 테오 형제는 생레미의 <별이 빛나는 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흥미롭다. 저자들은 오베르의 별이 생레미의 별들보다 생기 있지만 동시에 정적이며 한층 더 평온하게 빛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 책에 실린 편지들 속에서는 오베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의욕적으로 작업을 시작해, 끊임없이 그림에 대해 고민하고 그림을 그렸던 그의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과로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 중압감 때문에 힘들어하는 테오와 건강을 잃은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더 이상 현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된다. 이 책은 그가 가난하거나 미치광이이거나 모두에게서 버림을 받았다고 여겨 자살했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이러한 요소들이 그의 죽음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반 고흐가 삶에 대한 희망을 잃고 불안해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는 이전의 의견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의견이다. 하지만 마지막 70일 동안의 그의 행동과 생각들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꼼꼼하게 복원하려는 시도는 성공적이다. 또한 마지막 70일 동안 그린 모든 작품의 도판을 싣고, 작품 하나 하나마다 사용된 기법과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 작품의 배경 지식까지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덕분에 그의 마지막 70일 동안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듯 생생하고 디테일하게 살펴볼 수 있다. 


빈센트 반 고흐를 평생 경제적으로 지원해준 동생 테오 반 고흐(왼쪽)와 그의 아내 요안나 반 고흐, 조카 빈센트(오른쪽).


  이 책의 또 한 가지 장점은 반 고흐가 세상을 떠난 이후의 동생 테오와 제수 요안나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준다는 점이다.  반 고흐가 세상을 떠난 지 세 달 후인 1890년 10월, 테오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며 이성을 잃었다.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세 달 뒤인 1891년 1월 세상을 떠난다. 테오의 주치의가 남긴 의료 기록도 이 책에 함께 실었다. 감정적인 묘사는 전혀 없는 진찰 기록이지만, 이성을 잃고 자신의 아내도 알아보지 못하는 그의 모습은 읽는 사람을 슬프게 한다. 

1890년 11월 28일, 이등실에 입원.
1891년 1월 25일, 84번 환자 사망.
테오도러스 반 고흐.
원인: 유전, 만성질환, 과로, 슬픔.

  테오의 사망 일시와 사인을 적은 이 짧은 기록 중, 사인 중 하나가 '슬픔'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더 슬프게 한다. 


소녀였을 때 나는 완벽하게 행복한 1년을 보내는 것이 같은 양의 행복을 평생에 걸쳐 나누어 느끼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곤 했다. 이제 내 소원은 이루어졌다. 내 몫의 행복을 만끽한 이상 이제 책임만이 남아 있다.
  테오가 세상을 떠난 뒤, 어린 아들 빈센트(큰아버지 빈센트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과 단 둘이 남겨진 아내 요안나. 요안나는 테오와 함께 보냈던 날들이 완벽하게 행복한 날들이었고 이제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면서, 평생 동안 반 고흐의 그림들을 지킨다. 요안나는 반 고흐의 그림들을 활발하게 사람들에게 선보였고, 반 고흐의 편지들을 날짜별로 정리했다. 그리고 자비를 들여 반 고흐가 테오와 주고받은 편지들을 정리한 책을 출간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반 고흐의 그림을 만지는 것을 내버려 둘 정도로 그림에 무지했었던 그녀였지만, 그녀의 노력 덕분에 사람들은 반 고흐의 진가를 알게 되었다.

  이 책은 반 고흐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고 그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한다. 덕분에 우리는 빈센트와 테오, 그리고 남겨진 요안나의 더 생생하고 진실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이제까지 많이 알려진 빈센트와 테오의 편지 외에도 테오가 오베르의 시골 의사 가셰 박사에게 형을 부탁하는 편지, 아내 요안나에게 보낸 러브레터, 입원 당시 테오의 진료 기록, 요안나가 빈센트를 칭찬했던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에게 보낸 편지까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기록들, 잘 알려지지 않은 오베르에서의 빈센트의 작품들까지 만날 수 있다. 반 고흐 관련 책들을 많이 읽어서 이제 반 고흐에 대한 웬만한 사실들은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새로운 이야기들을 많이 알아갈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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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역사 눈의 미학 임철규 저작집 1
임철규 지음 / 한길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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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감각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많은 정보를 주는 것은 시각이다. 본다는 것은 인식과 지식의 근원이고, 볼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에서는 감각 중에서도 시각을 가장 가치 있는 감각으로 여겼었다. 서구는 그리스의 시각 중심적인 전통을 계승했고, 시각은 서구의 사유를 특징짓는 대표적인 감각이 되었다. 이 책은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까지 서구 문화에서 눈과 시각에 대한 관점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살펴본다. 종교와 철학, 역사, 미술사, 신화, 문학까지 눈과 시각과 관련해 이 책이 다루는 문화적 요소들은 매우 폭넓고 다양하다. 


  이 책은 서론에서부터 "눈은 위험하다"고 선언한다. 눈은 대상의 부분밖에 파악하지 못하면서 그 부분을 전체라고 규정하기 때문이다. 눈으로 파악하지 못한 부분은 배제하면서 눈이 본 부분만이 전체인 것처럼 절대화하는 것은 인식의 폭력이다. 또한 본 대상을 욕망이나 억압, 또는 지배의 대상으로 만드는 타자화도 인식이라는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폭력이라고 말한다. 이런 악한 눈이 있는 한 인간에게 구원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눈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타자를 인식할 수 있을까? 눈이 있기에 타자에게 다가가고 손을 내밀고 교류할 수 있는데 너무 단정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4세기 프랑스 트루아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 스테인드글라스는 글을 모르는 신자들에게 성경의 말씀을 알려주면서 시각적 아름다움으로 그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눈의 위험성을 이야기하는 서론을 지나, 저자는 눈과 시각에 대한 장대한 문화사를 펼쳐나간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고대 그리스인들은 보는 것을 인식과 지식의 근원이라고 생각했고, 감각 중에서도 시각을 최고의 가치를 지닌 감각으로 여겼다. 로마도 그리스의 전통을 이어 신전 등의 웅장한 건축물, 검투사들의 피 튀기는 검투 경기 등 스펙터클(볼거리) 문화, 시각중심적인 문화를 지녔다.  시각에 적대적이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과 달리 중세 기독교 문화도 눈과 시각을 적대하지 않았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 인간의 눈에 보이도록 인간의 몸을 입은 것, 즉 예수의 육화가 기독교의 핵심 교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와 성모,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삶을 보여주는 성상, 스테인드글라스, 프레스코 벽화가 널리 이용되었다. 원근법과 망원경, 현미경 등 시각적인 도구들이 발명되었던 르네상스도 시각문화가 번성하던 시기였다. 다 빈치에게 눈은 내적 자아와 외부 세계를 연결해 주는 영혼의 창이었고, 데카르트에게 생각하는 주체는 보는 주체, 보고 사유하는 주체였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피터르 얀스 산레담의 <위트레흐트의 뷔르커르크>. 이 그림에서처럼 종교개혁 이후 신교도들의 교회에는 성상,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화려한 시각적 요소들이 배제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가들은 이성에도, 이성의 상징인 시각에도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신은 이성으로도, 시각으로도 파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가들은 성상을 우상으로 간주하고 파괴했고, 청각적인 설교 말씀만을 강조했다. 시각적인 요소들은 눈에 음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간주했다. 


일리노이 주에 있었던 원형교도소. 중앙의 감시탑에서 모든 감방을 감시할 수 있다. 인간을 통제하는 시각적 장치 중 대표적인 것이다.


  그러나 시각의 영향력은 아직도 강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여전히 성상 등의 시각적 이미지가 성서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화려한 종교 미술을 꽃피웠다. 이후 18세기, 계몽주의는 모든 감각 중 최고의 감각은 시각이고, 모든 지식은 감각에서 나온다는 신념을 토대로 인식의 전제조건이 되는 시각을 중시했다. 그러나 18세기는 지배 세력이 시각 장치들을 피지배 세력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중앙의 감시탑에서 감옥의 모든 곳을 감시할 수 있게 고안된 판옵티콘(원형 교도소)이 그 예이다.


 19세기의 낭만주의는 눈의 독단적인 힘에 반발했다. 낭만주의자들은 눈이 지배하는 세계, 억압하고 틀 안에 가두는 이성의 세계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낭만주의의 존재 이유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육체적인 눈은 진정한 실체를 보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상상력이 눈이 빼앗은 살아 있는 사유, 틀 안에 갇히기 전에 사유를 복원한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눈먼 예언자 테아레시아스에게 통찰력을 준 것은 물리적인 눈이 아니라 상상력의 눈이라고 했다. 


프랑스의 리얼리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의 <채석장의 일꾼들(1849)> 그는 "나는 천사를 그릴 수 없다. 한 번도 천사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눈으로 본 현실만을 그대로 그려냈다.


  이에 반해 눈을 긍정하고 시각의 전통적인 권위를 회복시키려 한 것은 리얼리즘이었다. 리얼리즘은 상상력과 예술이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다는 낭만주의의 주장을 현실 문제를 직면하지 않는 자기기만으로 보았다. 리얼리즘은 눈으로 지각할 수 있는 물리적 실체, 구체적인 사물들, 인간의 구체적인 삶, 눈에 보이는 세상을 포착했다.  19세기 초에 발명된 사진도 현실의 한 순간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점에서 리얼리즘 정신을 대변했다. 


입체주의 회화의 시작이 된 피카소의 <아비뇽의 아가씨들(1907)>. 여러 시점에서 본 대상들을 한 화면에 풀어놓아, 원근법으로 표현되는 사실주의적 공간을 해체하고, 현실은 관찰자의 인식에 따라 달라지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눈이 관찰한 것을 토대로 한 재현을 강조하는 리얼리즘의 예술 원리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눈에 대한 회의를 품고 눈에 보이는 대로 사물을 재현하는 것을 거부한 모더니즘이었다. 상징주의는 구체적인 대상을 재현하기보다는 그 대상이 상징하는 관념들을 묘사했다. 표현주의는 눈에 보이는 외면이 아닌 인간 내면을 표현하려 했다. 초현실주의는 물리적인 현실 아래에 잠들어 있는 무의식을 표현하려 했다. 무엇보다 혁명적인 것은 입체주의였다. 입체주의는 원근법이 재현한 사실주의적 공간을 해체하고, 여러 시점에서 본 대상을 한 화면에 풀어놓으며 현실의 얼굴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입체주의 회화는 절대적인 시간도 공간도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연결되며, 유일하거나 절대적인 현실은 없고, 현실은 관찰자가 어떻게 인식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눈과 시각이 가지고 있는 절대성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눈과 시각에 대한 긍정과 부정, 신뢰와 회의가 엇갈리며 발전해 온 서구의 시각 문화를 폭넓게 살펴본다. 눈과 시각이라는 하나의 주제로 수천 년의 서구 문화사의 흐름을 설명하는 저자의 통찰력은 감탄스럽다.  하지만 저자는 갑자기 '보는 눈', 즉 보이지 않는 것을 배제하고 보이는 대상을 욕망, 억압, 지배의 대상으로 타자화하는 눈에 맞서는 '눈물 흘리는 눈', 예수를 닮아가려는 '선한 눈'이 인간의 종말, 역사의 파국을 유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눈이 인식의 틀 안에 대상을 가둔다고 비판하면서 정작 저자는 기독교 윤리라는 틀 안에 인류의 운명을 가둔다. 눈은 상상력을 제약한다고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어서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사람이 상상할 수 있을까? 눈물 흘리는 눈도 고통 받는 대상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대상을 위해 눈물 흘릴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폭넓은 본론에 비해 다소 근거가 빈약하고 기독교적 윤리에 갇힌 결론이 아쉽다. 


* p. s. 시각과 미학에 관련된 책인데 본문의 설명에 해당되는 도판이 본문 앞에 배치되어 있거나 아예 없어서 불편했다. 독자들이 일일이 도판 이미지를 검색하면서 보기에는 불편하다. 이 책의 개정판이 나온다면 본문의 도판 설명 부분에 해당 도판을 배치하고, 없는 도판은 보강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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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와 편견을 넘어서 - 우리 시대 정치철학자들과의 대화 한길인문학문고 생각하는 사람 1
곽준혁 지음 / 한길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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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왜 정치철학이 필요할까?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모두들 민주주의를 이야기하고 있지만어떤 민주주의가 바람직한 것인지바람직한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가치들이 지켜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부족하다. 정치인들은 가치보다는 권력을 추구하고시민들은 가치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맹목적인 현실주의에 길들여져 있다.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이념이 좌인지 우인지부터 따지고, 상대방의 이념에 따라 편견을 가지고 상대방의 의견을 판단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과 자기반성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정치철학자 곽준혁 교수는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과 자기반성이 없이 이미 익숙한 사고방식대로 정치가 이루어졌을 때의 위험성을 지적한다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에 반영된 절박한 사회경제적 요구들이그 문제들에 얽힌 직접적인 이해관계에 가려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정치철학이 필요한 이유는, 이러한 상황을 개선해 갈 실마리가 정치철학에 있기 때문이다. 곽준혁 교수에게 정치철학은 정치가 상상하는 가능성의 경계를 확장하고, 현실과 편견이라는 장벽을 넘어서 많은 사람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는 것이다. 그는 정치에 대한 생각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정치철학계의 석학 다섯 명에게 질문을 던졌다그 대담을 모은 것이 이 책 경계와 편견을 넘어서이다.

  필립 페팃은 비(非)지배 자유, 즉 다른 사람의 자의적인 의지에 지배당하지 않을 자유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공동체주의에서 중시하는 공공선과 자유주의에서 중시하는 개인주의가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인 공화국을 꿈꾼다. 데이비드 밀러의 이야기는 다문화 사회로 막 접어든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그는  소수자 집단들이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잃고 흡수되는 동화와, 소수자 집단이 그 사회의 경제, 정치, 사회의 일부분으로서 충분히 역할을 다 하면서 그 사회 내의 다른 집단의 구성원들과도 사회적 접촉을 많이 하는 통합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을 뭉치게 하면서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를 지탱하게 해 주는 통합의 요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또한 왜 후손이 과거사까지 책임을 져야 하냐는 일본 우익들의 질문에 대답할 실마리를 준다. 후손들이 이전 세대들이 만들어낸 혜택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면, 그 혜택을 만들어내기 위해 과거에 다른 민족에게 부과했던 비용에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샹탈 무페는 다원성이 인정된 정치 사회에서 갈등은 불가피한 것이고, 잘 제도화된다면 민주주의의 실질적인 목표인 인민 주권 실현에 기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에이미 것만은 시민교육을 실질적인 정치 참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기회를 시민 개개인이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제도로 본다. 것만은 바람직한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갈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국가나 특정 집단이 좋은 사회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을 탄압하기 위해 시민교육을 이용하는 것을 경계한다. 마사 너스바움은 개개인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정치제도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면서, 가능성은 한 사회에서 개인이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실질적인 조건과 연관된다고 말한다. 지금의 우리 사회가 개인의 가능성과 개인이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실질적인 조건을 제대로 보장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부분이었다.

  자유와 공공선의 조화, 다문화 사회에서의 통합, 과거사 문제, 개인의 가능성과 선택의 자유에 대한 보장까지 그들이 이야기하는 주제는 우리 스스로도 깊이 고민해야 할 주제들이다. 이 문제들을 직면했을 때 우리가 어떤 가치를 지켜야 하는지, 어떤 절박한 사회, 경제적 요구에 귀기울여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감정이나 편견, 이해관계에 휩쓸려 그저 익숙한 방식대로 처리해버릴 것이다. 이 책의 다섯 명의 정치철학자들이 말하는 정치철학이 딱딱하고 무겁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고민과 대안은 우리가 우리의 한계와 편견을 넘어 생각과 가능성의 지평을 넓히고, 우리의 삶, 우리의 민주주의를 더 낫게 만드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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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제단 - 제6회 무명문학상 수상작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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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포함

 『달의 제단은 서안 조씨라는 가상의 양반 가문을 배경으로 가부장제의 폭력이 어떻게 인간을 억압하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다서안 조씨 가문에서 수백 년 동안 이어진 폭력의 가해자는 가부장들즉 남성들이었고피해자는 여성들이었다주인공 상룡은 남성이고 차기 가부장이 될 종손이지만가해자와 피해자로서의 입장 모두를 지니는 특수한 입장의 인물이다또한 서안 조씨 집안의 남성들 중에서 유일하게 가부장제의 폭력이 부당하다는 것을 인식하는 인물이기도 하다작품 안에서 이 특수한 인물이 집안의 가부장적인 폭력에 어떻게 대응하는지그의 대응이 서안 조씨 가문의 다른 남성들과 어떻게 다른지그리고 그를 통해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한다


TV 문학관으로 영상화된 '달의 제단(2006)' 속 상룡(김영재)의 모습. 상룡은 서자 콤플렉스와 종손으로서의 중압감을 지고 살아간다.


  서안 조씨 집안의 다른 남성들과 상룡을 가르는 근본적인 차이점은 그의 서자 콤플렉스이다상룡의 아버지는 가문이 정해준 배우자 해월당 유씨가 아닌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의 사이에서 상룡을 낳았다상룡은 서자이지만 상룡 아버지의 유일한 혈육이었기에 조부는 어쩔 수 없이 상룡을 종손으로 받아들인다서자인 자신이 종손이라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조부의 냉대와 종손으로서 느끼는 중압감 때문에 상룡은 자신을 억누르며 살아간다그리고 자신보다 약자인(식모의 딸인데다 다리에 장애가 있고, 추한 외모로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당한다.) 정실을 강간하고 그녀를 성적 욕구를 해소하는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또 다른 가해자가 된다가부장제의 폭력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상룡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가부장제의 폭력이 어떻게 대물림되는가를 보여준다.


TV 문학관 '달의 제단' 속 정실의 어머니 달실댁(사미자)과 정실(황정민). 두 사람은 상룡에게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애정을 쏟는다.


  그러나 작품 속 두 가지 요소로 인해 상룡은 다른 서안 조씨 집안의 남성들과 폭력에 다르게 반응하게 된다그 첫 번째 요소는 선산을 이장하다 발견된상룡의 10대 조모 소산 김씨가 남긴 언간(諺簡)이다언간을 해독하라는 조부의 명으로 상룡은 언간을 읽게 된다처음에는 친정할머니에게 시댁에서의 일상을 전하는 평범한 문안 편지인 줄 알았던 언간은 서서히 서안 조씨 집안의 추악한 진실을 드러낸다두 번째 요소는 상룡을 향한 정실의 사랑이다정실을 억눌린 분노와 욕구를 해소하는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상룡은 자신을 향한 무조건적인 정실의 사랑으로 인해 자신도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상룡의 10대 조모인 소산 김씨(이연경), 그녀가 남긴 한글 언간을 통해 상룡은 가문의 추악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서로 무관한 것으로 여겨졌던 두 가지 요소는 한 가지 사건으로 인해 하나로 얽히며 상룡에게서 가부장적 폭력에 대한 분노와가부장적 폭력의 피해자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이끌어낸다바로 정실의 임신이다정실의 임신으로 상룡은 자신의 혈육에 대한 사랑을 느끼게 되지만조부에게 그 사실이 발각되어 정실과 아이 모두 빼앗기게 된다그 때 상룡이 읽은 마지막 언간의 내용은 충격적인 것이었다남편을 잃은 소산 김씨는 가문의 유일한 희망인 아이를 낳았지만불행히도 아이는 아들이 아닌 딸이었다이에 소산 김씨의 시부는 갓 태어난 손녀를 짓밟아 죽이고 먼 친척의 아이를 데려와 소산 김씨가 낳은 손자로 위장한다앞으로 8만 8천 번 윤회하더라도 나무나 돌로 다시 태어날지언정 무엇이든지 암수 나뉘고 어미가 새끼 낳는 것으로는 다시 나지 않겠다(p. 271.)”는 소산 김씨의 마지막 절규는 상룡을 얼어붙게 만든다. “나는 언간에 매몰되었다나와 내 핏줄의 몸뚱이를 짓밟는 거대한 짐승의 발길아무런 저항 없이 바스라지며 여린 골격이 내뱉는 파쇄음뭉그러진 달팽이의 잔해를 지켜보아야만 하는 무력한 자의 공포그 모든 감각들은 의심할 수도 없을 정도로 생생했다.(p. 272.)” 상룡은 친조부에게 짓밟혀 죽은 소산 김씨의 딸과 조부에게 빼앗긴 자신의 아이를 겹쳐 보면서 가부장적인 폭력의 희생자인 소산 김씨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서안 조씨 가문을 이끄는 수장인 상룡의 조부(오영수).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에 매몰되어 진실을 외면한다.


  그렇기 때문에 언간의 진실 앞에서 상룡은 조부와는 다른 반응을 보인다조부는 가문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과 중압감에 매몰되어 진실을 외면한다하지만 상룡은 가문의 추악한 진실수백 년을 이어온 폭력을 직시한다자신과 자신의 혈육이 그 폭력의 대상이 되었을 때 여인들이 느꼈을 무력감과 아픔을 처절하게 공감했기 때문이다상룡은 언간을 불태워서 진실을 은폐하려는 조부를 막으려다 효계당에 불을 내게 되고조부와 함께 효계당에서 목숨을 잃는다.

  상룡과 조부 모두 효계당과 함께 불타는 결말은 비극이지만효계당에서 이어져 오던 가부장적인 폭력의 종말을 뜻한다상룡이 언간과 정실과의 사랑을 통해 폭력의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들에게 공감했기에 수백 년을 이어온 가부장제의 폭력을 끊을 수 있었다이 소설은 폭력은 강하지만 공감과 사랑으로 그 폭력을 끊어낼 수 있다고 절절하게 호소하고 있다.





나는 언간에 매몰되었다. 나와 내 핏줄의 몸뚱이를 짓밟는 거대한 짐승의 발길, 아무런 저항 없이 바스라지며 여린 골격이 내뱉는 파쇄음, 뭉그러진 달팽이의 잔해를 지켜보아야만 하는 무력한 자의 공포. 그 모든 감각들은 의심할 수도 없을 정도로 생생했다.(p.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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