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니카, 피카소의 전쟁 -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는 거장의 반전 메시지
레셀 마틴 지음, 이종인 옮김 / 무우수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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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1937, 국립 소피아 왕비 미술관, 마드리드.


저 오래된 비극을 묘사하는 흑백 캔버스 위에서 피카소는 인간의 암울한 운명을 알리는 편지를 쓴다그 운명은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곧 사라질 것이라고 예고한다우리는 그 운명에 맞서기 위해있는 힘을 다하여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모두 모아 영원의 아름다움을 창조해야 한다마치 숭고한 작별을 준비하는 심정으로.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처음 공개되었을 당시초현실주의 시인 미셸 레리스(Michel Leiris)는 <게르니카>에 대해 이렇게 썼다. <게르니카>가 그려진 지 80년이 지난 지금의 우리로서는 시인이 느꼈던 절박함과 비통함을 느끼기 어렵다나치군이 스페인의 게르니카 마을을 공습했고피카소는 그에 분노해 게르니카를 그렸다이 단편적인 사실만으로는 이 그림에 대해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이 책 게르니카피카소의 전쟁은 <게르니카한 작품에 집중하면서, <게르니카>가 그려지게 된 이야기와 <게르니카>라는 그림이 겪어온 이야기들을 풀어낸다이 책을 읽고 나면 우리는 시인이 <게르니카>를 통해 느꼈던 비통함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될 것이다.

 

  게르니카 사건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936년 2스페인 총선에서 인민전선은 승리를 거두고 공화 정부를 세웠다민주적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무정부주의자들의 연합 세력인 인민전선은 스페인이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나라가 되기를 바랐다하지만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파시스트 세력은 스페인을 인민전선의 손에서 빼앗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프랑코는 스페인을 차지하기 위해 외세인 독일의 나치 세력과 협력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나치 군은 프랑코의 반군을 도와 스페인의 여러 지역을 인민전선의 공화국 정부에게서 빼앗았고게르니카가 있는 바스크 지역도 반군에게 포위되었다바스크 사람들은 포위되었지만 반군에게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고프랑코는 그런 바스크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게르니카에 공습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1937년 4월 26프랑코의 사주를 받은 나치 공군은 7천여 명이 사는 산골 마을 게르니카를 폭격했다


폐허가 된 게르니카와 주민들의 시신


  평화로웠던 마을은 불길에 휩싸였고사람들은 폭격이나 나치 공군이 난사하는 총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시신들이 폭발의 충격으로 지붕으로 날아가거나 벽에 달라붙었다대피소에 숨은 사람들은 숨죽여 이 모든 상황이 지나가길 기다렸고살아남은 사람들은 실종된 가족을 찾아다니며 울부짖었다며칠 되지 않아 피카소가 머물고 있는 파리의 언론들도 이 참혹한 사건을 보도했다그럼에도 프랑코 측은 범인은 자신들이 아니라 인민전선의 공산주의자들이라며 뻔뻔스럽게 발뺌했다마침 얼마 뒤 파리에서 개최되는 세계박람회의 스페인관에 들어갈 벽화를 제작하려 했던 피카소는 그 벽화 속에 게르니카의 비극을 담기로 했다피카소는 인민전선의 공화국을 지지하고 있었고스페인을 파시스트 국가로 만들기 위해 자국 국민의 생명도 가볍게 여기는 프랑코를 증오했다.

 

 <게르니카>에는 잔혹한 나치 군의 모습비행기폭탄폭격을 당하는 집들 대신 황소와 말전구 등 알 수 없는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나치와 프랑코의 만행을 직접적으로 가리키지도참상을 사실적으로 전하지도 않았다며 <게르니카>를 이해하지 못했다지금도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 이 작품이 게르니카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피카소가 그리려 한 것은 구체적인 사실이 아닌사람들이 겪은 폭력과 고통죽음 그 자체였다특히 투우장에서 볼 수 있는 동물인 황소와 말은 이 그림 속에서 투우장 안에 예정되어 있는 죽음처럼 스페인 내전 안에 예정된 끔찍한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그리고 <게르니카>가 주는 시각적 충격은 사람들에게 인간의 잔인함으로 인해 죽어가는 존재들의 절망과 고통공포를 생생하게 느끼게 해 주었다. <게르니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관객조차 그림을 볼 때 "자신이 푸줏간의 고기처럼 토막쳐지는 기분이 든다."고 말할 정도였다


  피카소는 <게르니카>로 얻은 수익을 스페인 구호 모금에 내는 등 공화국을 돕기 위해 애썼지만결국 스페인은 1939년 프랑코의 파시스트 정부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다피카소는 <게르니카>를 공화국 정부에 팔았기 때문에프랑코가 지배하는 스페인으로 <게르니카>를 돌려보내는 것을 거부했다프랑코의 독재는 수십 년 동안 이어졌고, 1943년 뉴욕 현대미술관에 보내진 <게르니카>는 수십 년 동안 스페인에 돌아오지 못했다


당신은 예술가가 어떤 존재라고 생각합니까화가라면 눈만으로음악가라면 귀로시인이라면 마음의 모든 방의 운율로권투선수라면 근육으로만뭐 이런 것들을 가지고 벌어먹는 멍청이라고 생각합니까아닙니다그것은 아닙니다예술가라면 마땅히 정치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그가 속한 세상에서 벌어지는 가슴 아픈 일정열적인 일기쁘고 즐거운 일을 늘 의식하면서 그런 일들의 이미지에 따라 자신을 형성해 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다른 사람의 일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니 그게 될 법이나 한 말입니까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게 가져다 준 저 풍성한 생활로부터 초연히 이탈해 구름 위의 존재처럼 노닐 수 있단 말입니까아닙니다그림은 그런 게 아닙니다아파트의 거실을 장식하기 위한 것은 더 더욱 아닙니다그림은 투쟁의 수단입니다."

 1945년 인터뷰에서 했던 이 말과 같이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통해 불의와 맞섰다피카소는 프랑코보다 2년 앞서 세상을 떠났고프랑코가 197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프랑코의 독재 정부는 건재했다그러나 프랑코가 후계자로 지목했던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프랑코의 꼭두각시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민주주의를 지지했다프랑코의 뒤를 이어 철권 정치를 계속하려던 프랑코의 심복 블랑코 총리는 바스크 지하 단체 조직원에게 살해당했다드디어 프랑코의 독재 정치가 끝난 것이다그리고 6년 뒤, <게르니카>는 그려진 지 44년만에 처음으로 스페인에 돌아오게 되었다. <게르니카>는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지 못했다하지만 독재 정권보다도 오래 살아 남아 독재 정권의 악행을 지금까지도 증언하고 있다. <게르니카>를 통해 피카소는 최후의 승자가 된 것이다이것이 예술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피카소와 게르니카가 겪어 온 이야기들을 읽으며독자들은 게르니카라는 그림 하나에 얼마나 많은 슬픔과 피눈물이 담겨 있는지 조금이나마 실감하게 될 것이다이 모든 일들을 지켜 본 사람들만큼 깊은 감정과 의미를 느끼지 못하더라도그것은 책 속의 한 스페인 사람의 말처럼 더 좋은 일일 수 있다. "이제 세월이 많이 지나서 <게르니카>가 거대한 캔버스 위에 물감을 배열해 놓은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게 되었으니"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게르니카>를 통해 인간의 잔혹성을 기억하고 이런 일이 지금도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고앞으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절대 사라질 것 같지 않는 불의는 언젠가 사라지고무력해 보이는 예술은 언제까지나 살아남아 목소리를 낼 것이라는 것도.


P. S. 이 책은 <게르니카>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 제작 과정, 전시 당시의 비평과 대중들의 반응들까지 꼼꼼하게 전달하지만, 아쉽게도 <게르니카> 외의 다른 도판이나 사진 자료는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특히 <게르니카>를 위해 어떤 모습의 습작들을 그렸는지 자세히 설명하면서도 그 습작들의 도판 하나 없다. 이것이 이 책을 읽으면서 유일하게 아쉬웠던 점이었다. 그래서 책에서는 설명되었지만 도판이 실리지 않은 <게르니카>의 습작들의 도판 몇 점을 여기에 함께 올린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를 위한 습작, 1937년 5월 2일.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를 위한 습작, 이 습작 또한 1937년 5월 2일에 그려졌다.


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를 위한 습작, 1937년 5월 8일


도판 출처:  Rachel Wischnitzer, "Picasso's "Guernica", A Matter of Metaphor", Artibus et Historiae, Vol. 6, No. 12 (1985), pp. 153-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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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1 펭귄클래식 128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윤새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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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 2012년 영화, 전쟁과 평화 스포일러 있음

  어릴 때부터 '안나 카레니나'라는 제목은 익숙하게 들어왔지만, 그저 불륜 이야기라고 생각돼서 별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올해 들어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푹 빠지면서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전쟁과 평화에서 내가 가장 사랑한 인물인 피에르를 닮은 레빈이라는 인물이 또 하나의 주인공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커플인 피에르와 나타샤의 사랑과 결혼생활이 전쟁과 평화에서 아주 간략하게만 묘사된다는 점이 늘 아쉬웠던 나는, 레빈과 키티에게서 피에르와 나타샤의 모습을 발견하고 싶었다. 이렇게 애초부터 내 관심은 안나와 브론스키보다는 레빈과 키티에게 있었다.

  역시 나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안나가 남편에게 권태를 느껴가는 과정은 생생하게 묘사되지만, 의외로 브론스키에게 빠지게 된 과정은 제대로 그려지지 않는다. 브론스키에게 철벽을 치던 안나가 어느 순간 갑자기 브론스키와 밀회를 갖고 있고, 브론스키의 아이를 가졌다는 고백을 하고 있으니 당황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생기발랄하고 매력적이던 한 여자가 식어가는 사랑 때문에 몰락하는 과정은 섬세하고 생생하게 그려져, 읽는 사람이 몰입하게 만든다. 

   그리고 의외로 안나에게 공감했던 부분이 하나 있었다. 차라리 솔직한 안나보다 더 위선적이면서 안나를 따돌리는 사교계 사람들의 모습에서 내게 쏟아졌던 주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다시 느꼈다. 내가 속한 공동체의 사람들은 자신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점이 있으면 그것을 뒤에서 쑥덕거리고 비웃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신들이 보기에 그 생각이 비정상은 아닌지 검증하려 들었다. 나는 그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사실 그 사람들에게 죄책감이나 부끄러움따위는 가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족쇄처럼 느껴졌다. 나는 안나의 사랑에 공감하지는 못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주는 압박감과 그럼에도 애써 의연해지려 하는 모습에는 충분히 공감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안나에게 마음이 가지 않았던 것은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 뒤에 가려진 카레닌의 사랑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2012년 영화 이전의 각색물들에서는 카레닌이 위선적이고 체면만 중시하는 인물로 나온다. 하지만 원작을 읽으면서 나는 카레닌이 안나를 마음 깊이 사랑하면서도 자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느꼈다. 그 마음을 표현할 줄은 더더욱 모르는 사람이었고. 경마장에서 브론스키가 사고를 당하자 정신줄 놓고 흐느끼는 안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창피를 당하지 않도록 자신의 몸으로 가려주고, 안나를 브론스키에게 데려가 주겠다고 하는 모습, 불륜남과 아내의 핏줄인 아냐를 자기 딸처럼 예뻐하는 모습에서 카레닌의 사랑을 느꼈다. 

  그럼에도 카레닌은 배우자에게 배신당한 사람이 못난 거라는, 세상 사람들의 이상한 편견에 시달려야 했다. 그때 유일하게 자신을 위로해 주던 리디아 백작부인 때문에 카레닌은 광신도가 되어버린다. 그렇게 이성적이고 냉철하던 카레닌이 영매에 홀린 사이비 광신자가 된 모습은 나를 슬프게 했다. 그 모습이 작품 속 카레닌의 마지막 모습이라는 게 나를 더욱 슬프게 했다. 게다가 세료자는 아버지에게서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부드럽고 약한 모습은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자기 아버지 같은 사람으로 자라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2012년 영화에서 카레닌의 마지막 모습을 세료자, 아냐 남매와 소풍을 나온 모습으로 바꿔준 것이 고마웠다. 적어도 영화 속 카레닌은 세료자와 아냐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어주었을 것이고, 광신에 빠지는 대신 아이들에게 사랑을 쏟으며 살아갔을 테니까.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바람둥이 남편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여주인공 테레사는 변함없이 충직한 애완견에게 '카레닌'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테레사도 나처럼 카레닌의 사랑이 마음에 밟혔던 것은 아닌가 싶다. 

  예상외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이 카레닌이라면, 예상대로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은 레빈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레빈과 피에르는 서로 닮은 점이 많은 캐릭터들이었다. 둘 다 작가인 톨스토이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캐릭터들이니까. 하지만 레빈에게서는 피에르에게서 느꼈던 것만큼의 애정과 친밀함을 느끼지는 못한다. 우선 레빈은 남의 말을 죽어라 안 듣는다. 레빈과 형들, 친구들의 대화를 읽어보면 레빈과 반대 입장인 사람들의 의견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그런데도 레빈은 끝까지 자기 말이 옳다고 우기기만 한다. 그리고 늘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한다. 자기와 띠동갑인 어린 키티가 피 한 방울 안 섞인 시아주버니를 같이 간호하러 가겠다는데도, 그저 자기와 같이 있고 싶어서 떼를 쓰는 거라도 멋대로 판단해 버린다. 상대방에게 친절하게 대하다가도 작은 일로 심통이 나면 상대방에게 예의없이 행동한다. 피에르는 레빈처럼 자기 의견만 밀어붙이지 않았었다. 그리고 첫번째 아내 엘렌의 외도나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힘들 때도 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배려했다.  톨스토이는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들까지 작가 자신의 실제 모습을 피에르보다는 레빈에게 더 많이 반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기대했던 대로 레빈과 키티 부부의 사랑과 결혼은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었다. 전쟁과 평화에서 사랑 이야기는 양념에 불과했지만, 안나 카레니나에서 사랑과 결혼은 중심소재이다. 덕분에 1700여 페이지나 되는 전체 분량 중에서 수십 페이지도 안 되는 피에르-나타샤 부부의 이야기와 달리 키티-레빈 부부의 이야기는 아주 디테일하게 그려진다. 전쟁과 평화에서는 나타샤가 피에르를 다시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져 사흘 만에 서로 마음을 고백하고, 둘이 결혼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살았다, 라고 짧게 언급만 되고 바로 7년 뒤로 타임워프해 버린다. 반면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키티와 레빈의 고백 장면 이후 레빈이 어떻게 키티의 부모에게서 결혼 승낙을 받았는지, 양가에서 결혼 준비를 어떻게 진행했는지, 결혼식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키티가 임신해 있는 동안 레빈과 친정식구들이 어떻게 키티를 돌봤는지, 키티의 출산 과정, 육아는 어땠는지까지 둘의 결혼 과정과 결혼 생활이 아주 디테일하게 나온다. 결혼식 장면을 통해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 결혼식 절차를 하나 하나 상세하게 알 수 있을 정도다. 전쟁과 평화에서 피에르-나타샤의 사랑 이야기가 간략하게 그려진 이유는 잘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 디테일하게 쓸 수 있는 양반이 전쟁과 평화에서는 바로 7년 뒤로 타임워프해 버리다니, 하고 배신감까지 들었다.(그래서 지금 쓰고 있는 전쟁과 평화 속편(이라기보다는 팬픽에 가깝지만)에서는 키티와 레빈 부부의 이야기를 참고해서 그 7년 사이의 피에르와 나타샤의 결혼 과정과 결혼 생활을 채워넣고 있다.)

  레빈과 키티는 말하자면 서브주인공들이지만, 안나와 브론스키와 대비되면서 어떻게 살아가고 사랑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레빈의 농지 경영, 그리고 농지 경영과 러시아 사회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해 레빈이 형들과 친구들과 나누는 대화는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각각의 인물들의 개성이 탄탄하게 구축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대화가 계몽을 위해 억지로 끼워넣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인물들이 각각 내세우는 의견이 '그 인물이라면 당연히 이런 말을 하겠지'하고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인물들의 길고 긴 대화 속에 당시 러시아의 사회상과 러시아인들이 고민했던 문제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내게는 레빈과 형들, 친구들의 다양한 사상과 고민들이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보다 흥미롭게 다가왔다. 

그리고 레빈과 키티의 결혼 생활은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처럼 극적이고 강렬하지는 않지만 강인하고 성장해 가는 사랑을 보여준다. 레빈과 키티는 사랑이 동화책에 나오는 것처럼 늘 완벽하고 이상적일 수는 없다는 것, 서로에게도 어느 정도의 거리는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서로가 다르다는 것, 그래서 서로에게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길 수밖에 없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했기에 레빈과 키티는 사랑을 지키고 성장할 수 있었다. 반면 안나는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에 던지고, 브론스키가 자신에게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토록 매력적이고 완벽해 보이던 안나와 브론스키의 삶과 사랑은 점점 겉껍데기만 남은 공허한 것이 되어버리고, 그들에 비해 서툴고 어설픈 모습이었던 레빈과 키티의 삶과 사랑은 굳건해졌다. 안나가 죽은 뒤에도 레빈은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고 사랑할 것이다. 소설에 나온 것 이후의 삶에서도 여전히 아내와 싸우거나 유혹이나 권태감 때문에 넘어지는 일은 계속 일어났을 것이다. 그럼에도 레빈은 다시 일어나 더 선하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절망과 증오, 후회만 남긴 안나의 죽음을 보면서 씁쓸해지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레빈의 삶은 강인한 생명력과 희망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이 책의 마지막은 안나의 죽음이 아닌 레빈의 다짐이다.

실제 톨스토이는 이후 부인과 극심한 불화를 겪으면서 결혼을 완전히 회의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는 안나만큼이나 결혼과 사랑에 절망과 회의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저 묵묵히 사랑하는 카레닌과, 서로 부딪치고 갈등해도 함께 이겨내는 레빈과 키티 부부의 사랑을 보면서 사랑을 믿는다. 그리고 때로는 실수하고 때로는 비겁해지고 악해질지라도 선하게 살려고 계속해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믿는다. 살아가다 보면 나도 톨스토이처럼 변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도 계속해서 살아가고 사랑할 것이다. 

P. S. 박형규 교수님의 번역본이 많이 추천되지만, 개인적으로는 윤새라 교수님의 번역본의 문장이 더 깔끔하다고 느껴져서 이 번역본으로 읽었다. 박형규 교수님은 러시아 문학 번역의 권위자이지만 80이 넘은 연세이기 때문에, 교수님의 번역문 문장은 지금 세대 사람들의 문장에 비하면 좀 오래된 느낌이 든다.(특히 젊은 캐릭터들 사이의 대화는 젊은 사람들의 말투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문장이 조금 장황하고 늘어지는 느낌도 든다. 새로운 세대에는 새로운 번역이 필요하다는 말에 공감해서 러시아 문학은 꼭 박형규 교수님 번역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톨스토이는 어법이 정확하고 깔끔하고 정돈된 문장을 썼다고 하니,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의 윤새라 교수님의 번역문으로 읽는 것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러시아계 미국인 학자들이 쓴 펭귄클래식 영문판의 주석들을 함께 실은 것도 펭귄클래식판의 장점이다.(본문은 영어판 중역이 아니라 러시아어 원문을 번역한 것이다.) 러시아 출신답게 러시아인들의 작명법부터 당시의 사소한 풍습, 시대상까지 꼼꼼하게 주석으로 달아서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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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
석영중 지음 / 예담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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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작년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푹 빠지면서 러시아 문학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대륙 국가의 문학답게 러시아 문학에서는 웅장함과 다듬어지지 않은 야성, 깊은 사색이 느껴진다. 그해 내내 집안에 틀어박혀 논문만 써야 했던 내게 러시아는 언젠가는 꼭 가고 싶은 광대한 세상이었다. 게다가 먹을 것뿐만 아니라 음식 이야기도 좋아하는 나에게는 이 책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가 맞춤형 책처럼 느껴졌다. 이 책에 소개된 러시아 문학과 러시아 음식들을 통해 내가 알지 못했던 러시아의 다채로운 면들을 만날 수 있어 즐겁고 흥미진진했다. 대중 교양서로도 학술 서적으로도 볼 수 있는 책이라 문체가 딱딱하다는 평도 있지만전공자들만 읽어야 할 정도로 전문적이고 어려운 책은 아니다여기에 소개된 문학 작품 중 읽어본 작품은 몇 편 안 되고러시아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은 나도 소설책 읽듯이 술술 읽었다. 아쉽게도 책에는 러시아 음식들의 사진이 한 점도 실리지 않아서, 음식 사진들은 따로 검색해 봐야 했다. 


남의 음식 나의 음식


19세기 초 러시아에 초빙되었던 프랑스 셰프들이 만들어낸 퓨전 요리. (위) 오를로프 공작의 송아지 등심 구이 (가운데) 수바로프 꿩고기 (아래) 디저트의 일종인 샤를로트 뤼스


 『전쟁과 평화』 를 읽으면서 충격적이었던 것은 19세기 러시아의 귀족들이 일상생활에서도 모국어인 러시아어 대신 프랑스어를 사용했고심지어 프랑스어는 잘하는데 러시아어를 잘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19세기 러시아의 귀족들은 자국의 것을 낙후한 것으로 보고 서유럽특히 프랑스의 문물들을 선망했다. 이미 18세기부터 개혁군주 표트르 대제(1672-1725)가 행정과 군사산업교육화, 종교까지 러시아의 모든 것을 서유럽식으로 바꾸며서유럽에 비해 아직 낙후한 러시아를 개화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았었다이러한 서구화 정책으로 인해 러시아 문화에서는 나의 것과 남의 것이 충돌하고 융합하며 흥미로운 혼성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 책은 음식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이야기한다. 음식의 맛보다 양에 집착하고, 돼지처럼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던 러시아인들은 음식의 맛에 눈을 뜨게 되었고, 서유럽식 식사 에티켓도 익히게 되었다. 19세기에 이르러서 러시아인들은 오히려 서유럽 식문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세기 초 러시아에 초빙되었던 프랑스 셰프들은 프랑스식과 러시아식이 혼합된 퓨전 요리들을 만들어냈고,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식탁 위에 차리던 프랑스식 서빙 방법은 요리가 차례로 나오는 러시아식 코스 요리로 바뀌게 되었다. 저자는 러시아식 코스 요리에 뜨거운 음식이 식지 않도록 그때그때 내오는 실용성과, 차례대로 하나씩 나오는 음식들에 기대감을 갖게 하는 심리적인 면이 반영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코스 요리는 유럽에서도 식문화가 가장 발달했던 프랑스에서 기원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러시아에서 기원한 것이었다니 신선한 충격이었다. 


(위) 러시아식 국수 (가운데) 서유럽의 마카로니 (아래) 러시아 서민들의 음식인 양배추 수프


  하지만 '남의 것'과 '나의 것'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생각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두 갈래로 갈리게되었다. 문학, 예술, 사상에 있어서 서구 문물에 물들지 않은 러시아적인 것을 지키자 슬라브파와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여 러시아를 진보시켜야 한다는 서구파가 대립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슬라브파와 서구파의 전신이 '러시아국수파'와 '마카로니파'라고 이야기한다. 주로 닭고기 육수나 양배추 수프에 면발을 넣고 끓여 먹는 러시아 국수는 고급 레스토랑 메뉴에는 오르지 못하고 싸구려 음식점, 시골 여인숙에 딸린 식당에서만 취급되었다. 반면 표트르 대제의 개혁 이후 들어온 이탈리아 국수들은 파스타 대신 마카로니로 통칭되며 고급 레스토랑의 메뉴가 되었다. 19세기 내내 러시아 문학에서 러시아 국수처럼 농부들이 먹는 소박한 전통 음식과 마카로니처럼 세련된 서구 음식은 서로 대립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부도덕한 인간으로 나오는 스티바가 레스토랑에서 온갖 사치스러운 프랑스 요리를 주문할 때, 도덕적인 인물의 대표로 나오는 레빈은 농민들이나 먹는 음식인 양배추 수프를 주문하는 것이 그 예이다. 『전쟁과 평화』에서 이미 프랑스적인 것을 추종하느라 모국어조차 잊어버린 귀족들을 풍자했던 톨스토이에게 프랑스 요리는 타락과 부도덕의 상징이었다.


러시아 문학의 거장들에게 음식이 지니는 의미


  이 책에서는 또한 러시아 문학 속 거장들에게 음식이 지니는 의미를 탐색한다. 우선 톨스토이는 젊은 시절 파리의 유명한 레스토랑들을 두루 섭렵하고, 나이 마흔에 과식 때문에 치아를 다 잃을 정도로 미식가이자 대식가였다. 그러면서도 톨스토이는 자신의 에세이와 소설들에서 미식과 탐식을 비판하고, 소박한 빵, 물, 야채처럼 생존에 꼭 필요한 기본적인 음식 이상의 것을 바랄 때 타락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소박한 음식은 생존의 필요조건이었고, 세련된 음식은 부도덕의 상징이었다. 톨스토이는 왕성한 성욕을 지녔으면서도 금욕과 도덕을 외쳤는데, 음식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위) 러시아식 사워크림인 스메타나. (아래) 스메타나를 넣은 러시아식 수프 보르쉬. 스메타나는 러시아 음식 어디에나 들어가는 만능 양념이다.


  한편 체호프는 음식들을 통해 평범하고 지루하고 진부한 일상을 이야기한다. 그의 단편소설「국어 선생」에서 평범하고 진부한 일상을 보여주는 음식은 러시아식 사워크림인 스메타나이다. 중학교 국어 선생인 주인공 니키틴은 사랑하는 마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막상 마냐와 결혼하고 안정적이고 평온한 삶을 살게 되자, 니키틴은 그런 삶이 하찮고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된다. 니키틴은 스메타나가 담긴 단지들을 보면서 일상의 답답함과 지루함을 느낀다. 스메타나는 수프, 샐러드, 만두, 팬케이크까지 어떤 러시아 요리에도 사용될 수 있는 만능 양념이다.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스메타나가 우리의 된장, 고추장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하니, 스메타나를 된장, 고추장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스메타나가 왜 지루한 일상의 상징이 됐는지 분명해진다. 누구나 매일 먹는 흔한 음식처럼, 자신의 삶도 특별한 줄 알았는데 남들과 다를 것 없는 흔한 인생이었던 것이다. 일상적인 음식에서 참을 수 없는 일상의 평범함을 포착하는 체호프의 예리함을 엿볼 수 있다. 


흰 눈 속 붉은 마가목 열매


  반면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는 러시아 특유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음식도 있다. 추운 겨울에도 붉은색을 발하며 열리는 마가목 열매이다. 마가목은 먹을 것을 구하기 어려운 한겨울에 러시아인들에게 마가목 열매 잼, 마가목 열매 술과 같은 음식을 제공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소설 『닥터 지바고』에서 추위에도 꿋꿋이 열매를 맺는 마가목의 생명력과 풍요로움, 아름다움과 아름답고 강인한 여주인공 라라를 연결시킨다. 소비에트 혁명의 광풍 속에서 파르티잔의 포로가 된 지바고는 흰 눈 속 붉은 마가목 나무 열매를 보면서 사랑하는 라라를 떠올린다. 라라의 기억으로 힘을 얻은 지바고는 파르티잔 부대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이렇게 러시아 문학의 거장들은 음식을 통해 러시아와 인생 속의 다채로운 면들을 포착하고 있다. 


혁명 이후의 음식


소비에트의 음식 포스터. 소비에트 정부는 소련에 기근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포스터에 풍성한 음식들을 넣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식량난으로 인해 수백만 명의 국민들이 죽어갔다.


  이 책은 19세기의 러시아 문학과 음식을 지나 1917년 소비에트 혁명 이후의 음식 또한 이야기한다. 소비에트 혁명은 '전 국민이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지만, 지독한 가뭄과 경제 붕괴, 식량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극심한 식량난으로 인해 무려 5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국민들의 식사를 공동화하려 했다. 1917년 이후 국가가 운영하는 공동 식당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과학자들은 인조 고기, 합성 지방, 합성 단백질 같은 대체식량을 개발하는 데 힘썼다. 하지만 유리 올레샤의 1927년 소설 『질투』는 이러한 소비에트 정부의 식량 계획이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인공 안드레이는 값싸고 맛있고 영양 많은 식사를 전 국민에게 제공하는 대형 국영 식당을 기획하지만, 국영 식당의 현실은 비전문가들이 싸구려 식재료로 만든 맛없는 음식과 비위생적인 시설이었다. 안드레이에게 반대하는 인물인 카발레로프는 값싸고 상하지 않는 이상한 합성 소시지를 미심쩍어한다. 실제로도 대체 식량 개발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사람들은 콩 단백질로 만든 맛없는 대체 식량을 외면했다. 

  평범한 인민들이 굶주리거나 형편없는 공동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 권력자들은 혁명 이전 부르주아들이 즐겨먹었던 화려한 음식들을 먹었다. 미하일 불가코프는 장편소설 『거장과 마르가리타』와 중편소설 『개의 심장』에서 이러한 권력자들의 모습을 가차없이 풍자한다. 『거장과 마르가리타』에서 문단의 권력을 쥐고 있는 문인들은 문학보다는 맛있는 고급 요리에 더 관심이 많고 먹는 것에 집착한다. 『개의 심장』에서 러시아의 미래를 바꿀 과학자로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프라오브라젠스키 박사도 끼니 때마다 혁명 이전 귀족들이 먹었던 것과 같은 진수성찬을 만끽한다. 모든 국민의 평등을 추구했던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도 계급과 불평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는 것은 음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의 러시아 문학과 거기에서 묘사된 음식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서유럽의 선진 문물과 러시아의 전통 사이의 갈등, 미식과 탐식에 대한 경계, 러시아다운 강인한 생명력, 그리고 혁명으로 인해 달라진 식생활까지 음식을 통해 우리는 파란만장하고 다채로운 러시아의 역사와 문화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에 언급된 러시아 문학 작품들을 찾아 읽으면서 예전이라면 지나쳤을 작품 속 음식이 지닌 의미들을 되새겨 본다면, 러시아의 문학과 문화, 역사를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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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을유세계사상고전
토머스 모어 지음, 주경철 옮김 / 을유문화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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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이제 '이상향'을 가리키는 흔한 말이 되었다하지만 과연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라는 말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이상향을 뜻하는 말로 만들어낸 것일까유토피아라는 말을 탄생시킨 그의 소설 유토피아를 읽어보면그가 생각했던 유토피아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향과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에서 토머스 모어는 친구들과 함께 포르투갈인 선원 라파엘 히슬로다에우스에게서 유토피아라는 나라의 이야기를 듣는다유토피아에는 사유재산이 존재하지 않으며함께 노동해서 얻은 대가를 공평하게 나누어 가진다모두가 재화를 풍족하게 쓸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재화에 욕심을 내지 않고,보석은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취급을 받는다죄인에게는 신체에 가혹한 형벌을 내리는 대신 노동을 하면서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게 한다그리고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며 서로의 종교를 비난하거나 모욕하지 않는다.(그런데 정작 모어 본인은 종교재판에서 개신교도들을 화형시켰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이러한 모습들을 보면 유토피아는 이상적인 사회이다하지만 사회의 구성원들 모두가 사리사욕이 없는 인간일 때에야 실현 가능한 사회이다하지만 사리사욕이 전혀 없는 인간이 과연 존재할까? 모어 자신도 실현 가능성이 없는 사회라고 생각했기에 '어디에도 없는 곳(그리스어 ou(없는)와 topos(장소)를 합친 말)'이라는 뜻의 유토피아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그리고 유토피아 내부의 제도들 중에서도 합리적이지 못하거나 다른 제도나 관습과 모순되는 것들도 있다. 심지어 유토피아조차도 노예와 식민지를 거느리고 있다.(16세기의 인물인 저자의 한계로 볼 수 있다.)유토피아도 결코 완벽한 이상향은 아닌 것이다.

  모어가 유토피아를 저술했던 당시 유럽에서는 지배층들이 백성들을 착취했고지주들이 재산을 더 늘리기 위해 농경지를 목장으로 바꾸고 소작농들을 내몰았다. (이런 현상을 인클로저 운동이라고 한다. 인클로저 운동으로 인해 빈부격차와 실업율 증가, 빈민 문제 등의 사회 문제들이 대두되었다.) 이런 현실이 이 책에서는 "양은 온순한 동물이지만 영국에서는 인간을 잡아 먹는다."고 표현된다. 이런 영국의 현실에주인공 히슬로다에우스는 가난으로 고통 받고 도둑으로 전락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 모두에게 약간의 생계수단을 주자는 혁신적인 주장까지 한다. 이 책이 나온 지 6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런 기본소득제(재산이나 소득의 유무, 노동 여부나 노동 의사와 관계없이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최소한의 생활비를 지급하는 제도)의 도입을 두고 찬반 논란이 일어나고 있으니, 당시로서는 얼마나 파격적인 제안이었는지 알 수 있다. 

  유토피아는 당시 현실의 완벽한 대안이 될 수는 없었지만현실의 불합리함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고민하게 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완벽한 이상향이라기보다는 당대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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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관하여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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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타인의 고통』에 이어서 두 번째로 읽는 미국의 예술 비평가 수전 손택의 책이다. 『타인의 고통』처럼 이 책도 사진에 관한 생각들을 담은 책인데, 『타인의 고통』(2003)보다 26년 전에 쓴(1977년) 책이다. 디지털 사진과 포토샵이 나오기 전에 쓴 책이고 거의 40여 년 전에 쓴 책이라 디지털 사진에 대한 논의는 없다. 그리고 이 책에서 내세웠던 주장이 『타인의 고통』에서 뒤집히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책 속 사진에 대한 손택의 비평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사진의 특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빈센트 반 고흐의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1887)의 도판. 이 작품의 실물은 반 고흐가 썼던 물감의 특성 때문에 점점 색이 바래어 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도판이 작품 실물보다 반 고흐의 색채를 더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 책에서 손택은 사진 덕분에 우리는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이미지를 소모한다 이야기한다. 디지털 카메라와 스마트폰 카메라가 널리 보급된 데다 인터넷과 SNS가 발달한 요즘은, 손택이 이 글을 썼던 40여 년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이미지가 소모되고 있을 것이다. 사진이 얼마나 현실을 생생하게 재현하는지 오히려 현실이 그 현실을 찍은 사진에 충실한지 검토될 정도다. 에펠탑이나 만리장성 같은 유명 관광지에 갔을 때, 그곳을 찍은 사진과 비교하면서 사진과 똑같은지 아닌지 비교해 보는 것, 사진으로만 보던 사람을 직접 만났을 때 실물이 사진과 같은지 비교해 보는 것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실물이 사진과 같지 않다며 감동을 느끼기는커녕 실망하기까지 한다. 또한 이제는 물감이 바랜 명화의 실물보다는, 예전의 생생한 색채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명화의 도판이 더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진 이미지가 오히려 현실을 압도해 버리는 것이다. 사진 이미지에 압도되는 현실을 손택은 이렇게 표현한다. 


이미지가 범람하게 되면 저녁놀조차 진부해져 보이는 법이다. 슬프게도, 오늘날 저녁놀은 사진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스테판 기자르드가 찍은 이스터 섬의 풍경. 우리는 사진을 통해 우리가 직접 접하지 못하는 현실들 대신 그 이미지를 소유할 수 있다.


 우리는 인터넷이나 SNS에서 우리가 가 보지 않은 멋진 여행지와 우리가 키우지 않는 귀여운 애완동물들, 우리와는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은 멋지고 예쁜 연예인들의 사진을 다운받고 소장할 수 있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우리가 접하지 못한 현실 대신 그 이미지들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거짓된 소유일 뿐이라고 손택은 말한다. 현실은 사진에 담겨 일종의 스펙터클(볼거리)이 되어버렸다. 이런 사진 이미지들, 볼거리들의 홍수 속에서 살다 보면, 정작 그 이미지들이 나타내는 현실을 봤을 때는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 이미지가 현실을 소모해 버리는 것이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의 한 장면. 손택은 이미지로만 이 전쟁을 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미지가 아닌 현실로 전쟁을 접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들은 실제로 고통당하고 있다고 27년 뒤의 저서『타인의 고통』에서 주장한다.


  손택은 30여 년 뒤에 쓴 『타인의 고통』에서 현실은 위신을 잃어버렸고, 재현만이 남게 된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과장이라고 말한다. 이 책에서 사진, 이미지가 현실을 소모하고 압도한다고 말했던 주장을 뒤집은 것이다. 그 이유는 현실이 일종의 스펙터클이 되어가고 있는 현상은 지구 일부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라는 것이다. 테러나 전쟁에 관한 뉴스를 볼거리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테러와 전쟁을 현실로 겪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버스 정류장, 지하철역 등 우리가 가는 곳마다 구매를 촉진하거나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이미지가 넘쳐난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가 구매를 촉진하고 계급, 인종, 성의 갈등이 빚은 고통을 마비시키는 오락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이미지에 기반한 문화를 필요로 한다는 손택의 주장은 지금의 현실에서도 유효하다. 또 자본주의 사회가 카메라를 통해 자원 개발, 생산성 증가, 질서 유지, 전쟁을 위한 정보를 무한정 수집하기에, 손택은 카메라를 잠재적인 통제의 도구로 본다. 카메라는 대중에게 스펙터클(구경거리)을 제공해 주면서 통치자들에게 감시 대상을 포착해 줌으로써, 자본주의 사회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오히려 디지털 카메라와 이미지 처리,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이런 현상은 손탁이 이 책을 썼던 40여 년전보다 더 심해진 것 같다. 특히 "다양한 이미지와 상품을 소비할 수 있는 자유가 자유 자체와 동일시될 것이다."라는 문장은 소비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느라 자신이 통제되고 있음을 깨닫지도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어서 섬뜩하기까지 했다. 

  어딜 가도 넘쳐나는 사진과 이미지들에 지칠 때가 있다. 손택의 표현처럼 지금의 나 자신도 "경험을 일종의 이미지, 일종의 기념품"과 맞바꾸면서 살아가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손택은 이후에 『타인의 고통』에서 현실이 이미지에 압도되는 것은 안전한 곳에서 사진 이미지를 소비할 수 있는 일부 지역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입장을 바꾸었다. 하지만 이 책과 『타인의 고통』 은 현실은 사진 이미지 밖에 있고, 사진 이미지에 매몰되어 현실을 잊지 말라는 관점에서 연결되어 있다. 손택이 이 책을 쓴 지 40여 년이 되었는데도 우리가 사진 이미지를 통해 이미지, 또는 거기에 담긴 현실을 소비하는 현상은 더 심해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40여 년이 지났어도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너무 일상적이어서 지나쳐 버렸던 사진과 이미지의 소비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더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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