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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메쉬
옌스 하르더 지음, 주원준 옮김 / 마르코폴로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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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국제도서전의 외국 출판사 부스들을 돌아다니다 종종 보석 같은 책을 발견한다. 이 책도 그런 책들 중 하나였다. 2019년 도서전에서 독일어도 모르면서 독일 출판사의 부스들을 둘러보다 이 책을 발견했다. 4000여 년 전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국가 우루크의 왕이었던 길가메시의 신화를 그린 그래픽노블인데, 모든 컷이 고대 메소포타미아 부조를 본뜬 형태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언젠가 이 책의 한국어판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내가 만들지 못한다면 누구라도 한국어판을 만들어줬으면 했는데, 5년이 지난 지금 한국어판이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도서관에 신청했고, 마침내 읽게 되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부조같이 그렸다'는 말은 아래의 본문 이미지를 보면 바로 이해될 것이다. 한 컷 한 컷이 한 장의 토판처럼 온통 흙빛으로 되어 있고, 인물과 사물들은 토판 위에 도드라져 있는 부조처럼 그려졌다. 배경에는 갈라진 틈까지 조금씩 그려 오래된 토판 같은 느낌을 더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부조들처럼 인물들은 주로 옆모습으로 나타나는 정형화된 모습이지만, 자세히 보면 표정과 움직임이 살아 있다. 작가는 단순히 과거의 것을 모방하지 않고 과거의 것을 오늘날과 연결시키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기 위해 그는 고대 부조와 현대 만화의 스타일 사이에서 고민했고, 원근법이나 동적인 움직임 같은 현대적인 미술 기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렇게 고심한 덕분에 고대 부조 속에서 인물과 동물, 자연 속 사물들이 꿈틀거리는 듯한 독특한 효과가 탄생했다.


  워낙 오래된 토판이라 중간중간 부서진 부분이 많기 때문에 이야기의 공백이 많다. 그런 데다 고대인의 감성과 문화에서 나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현대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다. 지금 네이버에서 연재되고 있는 웹툰 <홍끼의 메소포타미아 신화>는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 사이사이의 공백을 상상으로 메우고, 현대인의 감성에 맞게 이야기를 각색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반면 이 책의 작가는 원문의 내용을 그대로 컷에 올리고, 이야기의 연결 고리가 빠져서 갑자기 다른 이야기로 도약하는 부분은 컷과 컷 사이의 경계선을 점선으로 표시한다. 책 속 문장 하나하나도 원전을 그대로 옮겨 온 것이다. 작가는 현대인에게는 문장 자체가 어색하게 보일 수 있더라도 그 시대의 요소를 문장에 넣고 싶었다고 한다. 한국어판 번역가도 그 어색한 느낌을 그대로 살려서 번역했다고 한다. 대사도 현대인의 감성과 유머 감각에 맞춘 웹툰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간 셈이다. 그렇기에 웹툰과 이 책이 길가메시 신화를 어떻게 표현하는지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원전을 최대한 그대로 살리면서 만화적인 효과도 살리려는 작가의 의도는 끝까지 계속된다. 열두 번째 토판에서 저승에서 올라온 엔키두의 영혼은 길가메시에게 저승에서 본 것들을 이야기해 준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을 보면 분명히 이렇게 끝날 이야기가 아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문장이 아니라 엔키두가 저승에서 본 인물 중 한 명의 모습을 묘사하는 말이 마지막 문장이기 때문이다. 이걸 그대로 살리면 마무리가 애매할 수 있는데, 작가는 토판에 새겨진 길가메시와 엔키두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져 가다 마지막 컷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결말이 사라진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잊힌 것들에 대한 예우로 마무리함으로써, 작가는 책을 읽고 있는 우리까지 수천 년의 세월 속으로 사라져 간 신화 속 영웅들을 그리워하게 한다.

P. S. 작가의 작업 후기와 준비 스케치, 스토리보드에 참고 사진 자료들까지 실린 부록도 알차다. 번역자도 독일에서 고대 근동을 공부한 학자로 섭외했으니, 원래의 독일 출판사나 한국 출판사나 공을 꽤 많이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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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의 러시아 - 러시아의 굴곡진 현대사와 독재자의 탄생
대릴 커닝엄 지음, 장선하 옮김 / 어크로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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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이 악랄한 독재자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악행들을 저질렀는지는 알지 못해 그의 행적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 필요했다. 이 책은 그래픽노블이고 페이지도 160페이지밖에 되지 않아 가볍게 읽을 수 있겠다 싶었다. 실제로 이 책을 다 읽는 데 세 시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세 시간 동안 푸틴이 태어난 1952년부터 2020년 12월까지 60여 년 동안의 상황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할 수 있었다.

작가는 별다른 기교 없이 단순한 형태와 색상, 사실들로 꽉꽉 채워 넣은 텍스트로 푸틴이 평생 동안 전 세계에 끼친 해악을 전달한다. 말풍선도 별로 없고, 웃음기는 거의 없다. 오직 차분한 문장과 간결한 이미지로 사실을 충실히 전달한다. 독자들의 감정을 움직이는 것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방대한 푸틴의 범죄 목록 그 자체다. 그가 고의로 살해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의 안일함과 무능함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세상에 그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을 텐데도 그가 여전히 태평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책이 진행되는 내내 차분히 사실을 전달하던 작가는 결말에서 힘주어 말한다. 세계는 더는 푸틴 정권이 정상적인 정부라도 되는 듯 방관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으면 푸틴은 온 세계를 더 강하게 거머쥘 것이니, 행동해야 러시아 내부의 민주주의를 일깨울 수 있고, 푸틴 정권의 부패와 해악이 러시아 밖으로 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민주주의인가, 독재인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행동은 우선 아는 것에서 시작되니, 이 얇은 책으로 문제를 알게 되고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시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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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독일인입니다 - 전쟁과 역사와 죄의식에 대하여
노라 크루크 지음, 권진아 옮김 / 엘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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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 포함


  방현석 작가의 단편 소설 랍스터를 먹는 시간에서 주인공은 베트남인 부하 직원의 고향 마을에 가게 된다그날 밤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하필이면 그날은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이 그 마을 사람들을 학살한 날이었던 것이다. 1년 중에서도 한국인이 방문하면 안 될 바로 그날에 그곳을 방문한 주인공은 형용할 수 없는 중압감을 느낀다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내가 가해국 국민의 입장에 설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분명 내가 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지만 속죄해야 할 과거를 물려받는다는 것나를 살게 했고 내가 사랑하는 이들나라가 다른 누군가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는 것그 무게를 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독일계 미국인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노라 크루크는 평생 동안 과거의 독일이 저지른 짓에 대한 죄의식을 안고 살아왔다어린 시절 나치의 강제수용소 기념관들에 견학을 가서 나치 독일이 저지른 만행을 기록한 흑백 사진들을 봤고학교 역사 시간에 독일에 나치 정권이 들어서고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가게 된 과정 하나하나를 꼼꼼히 공부했다또다시 극우 민족주의에 빠지게 될까 독일의 전통이니 애국심이니 하는 것들은 기피하게 되었다하지만 나라가 아니라 바로 내 가족내 조상이 당시에 어떤 일을 했는지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그래서 친가와 외가의 가족들이 나치 통치 시기에 무슨 일을 했고 어떻게 살아갔는지 추적하게 되었고그 과정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알게 된 것들을 그래픽노블로 기록한 책이 나는 독일인입니다이다.


  나치 통치 시기를 살아간 가족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그 시절을 살아간 가족 중 그나마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은 너무 어린 시절에 겪은 일들이라 온전히 기억하지 못한다손주인 작가 자신에게는 조부모이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그분들이 자기 부모이기에객관적으로 그들의 행적을 기억하고 평가하기 더더욱 어렵다작가가 가장 먼저 찾은 과거의 흔적은 집 안 서랍장 한켠에 들어 있던 큰아버지의 옛날 사진들과 그가 초등학생 때 썼던 공책들이다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헨젤과 그레텔이 빵 부스러기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듯작가는 과거의 파편들을 따라 자신이 몰랐던 과거를 더듬어간다.


페이지마다 작가가 그린 일러스트와 가족사를 조사하면서 모은 사진 자료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은 가려졌던 과거를 따라가는 여정에서 얻은 것들을 모아놓은 스크랩북과 같다그래픽노블로 분류되지만 만화라기보다는 그림책또는 그림일기에 가까운 저자의 기록에 가족들이 간직하고 있던 사진과 편지들도서관에서 구한 사진 자료들아버지의 고향과 어머니의 고향에 찾아가 직접 찾아본 공문서들이 여기저기 붙어 있다한 권의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작가에게는 자신의 핏줄들이 살아간 흔적들의 박물관이고먼 나라의 독자들에게는 나치 정권 시기 평범한 독일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박물관이다.


  하지만 파편들은 파편들일 뿐이다아무리 과거의 파편들을 그러모아도 그들의 진짜 삶진짜 모습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작가는 알고 있다작가는 가족들의 기억과 증언에서 비어 있거나 모순되는 부분을 상상하거나 추론해 보고그들 자신이 남긴 서류들의 행간을 읽는다그 과정에서 작가는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나치당에 가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외할아버지는 전쟁 이후 자신이 생계를 위해 나치당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고 당에서 어떤 직책도 맡은 적이 없었으며 자신이 나치의 국가사회주의와 거리가 멀었다는 증언들까지 내놓았다외할아버지의 말은 진실일까정말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까작가 자신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다.


  외할아버지가 나치주의 신봉자가 아님을 증언해 준 증인 중 한 명의 아들과 연락이 닿았을 때그는 작가에게 죄의식을 갖지 말라고 말한다작가는 그의 말에서 따뜻함을 느끼지만 그것으로 쉽게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개인의 속죄는 수백만 명의 고통을 지울 수 없고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다만 어떤 것이든 모든 과거를 끌어안고 앞으로 자신을 이어갈 새로운 세대인 아이를 품은 채 계속 나아갈 뿐이다.

 

  가해국의 후손 세대들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라며 이전 세대들이 남긴 과거들을 회피하기 쉽다과거는 아예 잊어버려야 새 삶을 살 수 있다며 왜 이렇게 과거에 집착하냐고 하기까지 한다하지만 가장 강력한 접착제로도 갈라진 틈 자체는 없애지 못하듯과거의 상처는 완전히 지울 수 없다자신의 전 세대들이 남긴 죄와 상처까지 모두 끌어안고 앞으로 나아가는 저자의 태도는 우리의 마음속에 큰 울림을 남긴다. 과거를 제대로 돌아보지 않는 나라를 이웃으로 둔 사람으로서는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역사에 깊은 상처가 남은 피해국이자 또 다른 나라에게는 가해국인(이것을 인정하고 문장으로 쓰는 것조차 내게는 아직 쉽지 않다. 분명 누군가는 이 말에 반발할 것이다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어떻게 직시하고 끌어안아야 할까곰곰이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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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중동, 만들어진 역사 - 중동을 읽는 자가 세계를 읽는다! 만화로 보는 교양 시리즈
장피에르 필리유 지음, 다비드 베 그림, 권은하 옮김, 김재명 감수 / 다른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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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9월 11난데없이 두 개의 빌딩으로 돌진하는 비행기들이 뉴스 화면에 나타났던 기억이 생생하다. 9·11 테러가 일어난 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아프가니스탄(2001)과 이라크를 침공했다(2003). 이라크에 주둔한 미군들이 이라크인 포로들을 학대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중동 지역의 반미 감정은 더 거세졌다그 이후로도 미국과 중동 사이에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는 뉴스를 수도 없이 들었다.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미국과 중동 사이의 갈등은 어디서 시작된 걸까왜 점점 심해져만 가는 걸까중동에 나름대로 관심이 있었지만 워낙 많은 나라와 이해관계가 엉켜 있어 미국과 중동 사이의 갈등이 어떻게 진행되어 온 건지 머릿속에 정리가 되지 않았다그래서 읽게 된 책이 만화로 보는 중동만들어진 역사프랑스의 역사학자이자 중동 전문가인 장피에르 필리유가 글을 맡고프랑스 만화가 다비드 베가 그림을 맡아 미국과 중동 사이의 외교사를 만화로 정리한 책이다.

 

  이야기는 2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미국과 중동이 처음 외교 관계를 맺게 된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18세기 후반 대서양을 지나는 무슬림 해적들에게 미국 상선들이 납치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에미국은 중동의 지방 제후들과 평화조약을 맺어야 했다그때만 해도 미국의 패권이 중동을 압도한 것은 아니었다미국은 이제 막 독립한 신생국가였고중동의 해적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중동의 제후들은 당신들의 돈이 평화를 가져오긴 했지만 유지할 만큼은 아니라며 미국인 포로들을 풀어주는 대가로 막대한 몸값을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은 19세기 말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영토와 국력을 키웠고서서히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석유가 전쟁을 치르는 데 중요한 자원이 되면서 미국은 석유를 보유하고 있는 중동 국가들의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친미 독재 정권에게서 안정적인 석유 공급을 보장받고 정권의 안보를 보장하는 유착 관계를 이어왔고석유 이권을 되찾으려는 정치 세력이 있으면 정치 공작으로 몰아냈다이란은 미국이 챙겨가던 석유 이권을 되찾아온 대가로 40여 년 동안 경제 제재 등 미국의 여러 압박 정책을 받고 있다.


  하지만 자국의 이권이나 패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미국은 아랍 내 분쟁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며” 발을 뺐다시리아의 독재자 아사드 대통령이 2011년에서 2013년 사이 화학 무기로 민간인들을 살상할 때에도오바마는 아사드의 만행을 규탄하기만 할 뿐적극적으로 아사드를 막거나 정권을 교체하지 않았다이렇게 미국이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위해 중동 국가들을 이용해 오고그로 인해 갈등을 빚어 온 200여 년의 역사를 300여 페이지의 만화로 압축했다.

 

  많지 않은 분량 안에 200여 년을 담다 보니 이야기는 숨 가쁘게 진행된다중동과 미국의 외교사전쟁사를 주요 사건과 그와 관련된 인물들각 진영의 입장진행 과정 위주로 빠르게 훑어나간다한 주제한 사건이 짧으면 2, 3페이지길어도 10여 페이지 정도로 간략하게 다뤄진다미국과 중동 내 다양한 세력들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머릿속에 큰 흐름을 정리해 두려면 꼼꼼히 읽어두는 것이 좋다.



(위)호메이니를 둘러싼 민중들

(아래) 2003년 후세인이 생화학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발언하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


  수많은 인물들과 세력들사건들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은 단순하지만 강렬하게 다가오는 그림이다부패한 친미 왕정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이란의 종교지도자 호메이니가 민중들의 소용돌이에 둘러싸인 모습근거 없이 이라크의 후세인이 생화학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발언한 콜린 파월 국무장관의 눈귀에서 해골들이 흘러나오는 모습 등 각각의 컷은 강렬한 이미지로 사건의 의미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잔혹한 묘사 없이도 국제관계의 냉혹함과 잔인함을 생생하게 전달한다흑백으로만 표현되어 더욱 강렬하다.

  마지막 두 페이지를 가득 채운 중동 사람들의 얼굴은 독자를 압도한다미국과 중동의 갈등으로 일어난 전쟁과 기근유랑테러로 고통받는 사람들이다책 밖의 독자를 바라보듯 하나같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얼굴 위에서 작가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미국은 항상 좋은 의도로 중동 문제에 개입한 것도 아니며 언제나 최악의 순간에 문제에서 빠졌다.” 미국은 이들의 고통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이들의 고통을 더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기는 한 것일까미국과 중동의 복잡한 갈등과 이해관계로 인해 생겨난 참상들이 우리와 미국 사이의 관계에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사실들을 하나하나 기억하지 못하더라도이런 의문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P. S. 이 책은 3권으로 된 원서를 한 권으로 합친 것이다.(이 책의 1, 2, 3부는 원서의 1, 2, 3권이다.) 원서의 1권은 2013년 미메시스에서 최악의 동반자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지만 지금은 절판되었다미메시스판에 비해 여러 모로 공을 들인 것이 보인다원문만 그대로 번역한 미메시스판과 달리다른판은 국제 분쟁 전문 기자 김재명의 추천사를 통해 책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고 보충 설명을 했다또한 1, 2, 3부의 주요 인물들을 본문 앞에 따로 정리했다역주도 미메시스판보다 더 꼼꼼히 달아단순히 주요 용어와 인물을 단순히 설명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서 그리는 역사적 상황까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번역도 다소 딱딱하고 장황한 미메시스판보다 자연스럽고 명쾌하게 읽힌다.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알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아직 알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들이지요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넓고 험하다는 것이지요세상은 험하고부정과 조작이 만연합니다.(미메시스판 8페이지)

 

하지만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도 있지요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우리가 사는 세상이 넓고 험하다는 것입니다거짓과 조작이 만연한 세계지요.”(다른판 18페이지)

 

“2004년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길가메시의 서사시나 <탐욕의 묘비>를 알지 못하는... 하지만 성경과 그리스도교를 통해 동일한 역사를 공유하는 후손들이 미국 군인들이...포로들을 겹겹이 쌓아 놓고 사진을 찍었다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의 고문 사진은 우리 시대의 탐욕의 묘비이다.”(미메시스판 14페이지)

"2004년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미국 병사들이 포로를 쌓아 놓고 석판과 똑같은 사진을 찍었다길가메시 서사시나 독수리 전승비는 모르지만 기독교 성경을 통해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후손들이 한 일이다이 사진은 우리 시대 또 다른 독수리 전승비인 셈이다.”(다른판 24페이지)

 

  다만 미메시스판은 프랑스어 번역가가 프랑스어 원서를 직역한 것인 반면다른판은 영어판을 중역했을 가능성이 있다하지만 절판된 미메시스판보다 구하기 쉽고미메시스판에 없는 2, 3권까지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으니 다른판을 읽는 것이 여러 모로 나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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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러브 디스 파트
틸리 월든 지음, 이예원 옮김 / 미디어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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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평이나 영화평을 읽을 때 글쓴이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책(영화) 이야기를 읽고 싶은 건데 왜 내가 알고 싶지도 않은 글쓴이의 사생활 이야기를 읽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작품이어도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감상이 나오는 것은, 그 작품이 각자의 삶과 맞닿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간결해서 그만큼 각자의 삶과 맞닿을 여백이 많은 작품들이 있다. 미국의 만화가 틸리 월든의 만화 『아이 러브 디스 파트』도 그런 작품이다. 


 

 이 만화는 두 10대 소녀 레이와 엘리자베스의 사랑을 그리고 있지만, 독자들은 둘의 사랑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70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분량인데다 기승전결이나 시간 순서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둘이 서로 어긋나는 모습 뒤에, 엘리자베스가 레이에게 "네 연주 좋았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둘이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인지 둘이 화해하는 모습인지 모호하다. 대사보다 이미지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대사들도 대부분 짤막하다.  "너 나 좋아하니?""엄청.""다행이다, 나만 그런 거면 어쩌나 했는데." "널 어떻게 미워해." 일상적이고 단순한 대사지만 우리도 언젠가 누군가와 나눠봤을 대화들이다. 그 누군가 때문에 이 단순한 대사들이 마음에 파장을 남긴다. 간결하면서 서정적인 그림체와, 흑백과 보라색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색 구성이 둘의 한 순간 한 순간을 담백하면서도 감각적으로 전한다. 흑백 사이에 간간이 들어간 보라색이 달콤쌉싸름한 느낌을 더한다.


  독특하게도 이 만화에는 배경 건물에 비해 레이와 엘리자베스가 더 큰 모습으로 등장하는 컷이 많다. 배경의 건물이 미니어처이거나 둘이 킹콩이라도 되는 것처럼. 왜 이런 특이한 연출을 했을까? 둘의 세상에서 가장 큰 부분이 서로였기 때문이 아닐까. 서로가 있는데 등 뒤에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300미터가 넘는다는 것이 뭐가 중요할까. 제목인 '아이 러브 디스 파트',  엘리자베스가 레이와 이어폰을 한 쪽씩 끼고 음악을 듣다가 말한 한 마디 "이 부분이 제일 좋아"에서 '이 부분'은 음악의 한 부분일 뿐만 아니라 서로였을 것이다. 내 세상에서 제일 큰 부분도, 제일 좋은 부분도 바로 너라고 느끼지 않았을까. 



  나에게도 이어폰을 한 쪽씩 끼고 노래를 같이 들은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함께 들은 노래보다 함께 부른 노래와 서로에게 불러준 노래가 더 기억에 남는다.  미술관으로 함께 걸어가는 길에 그애가 나지막하게 성시경의 <내게 오는 길>을 불렀다. 둘이 등산을 하면서 김동률의 <출발>을 같이 신나게 불렀다. 나는 등산을 싫어하지만 그애와 함께 있는 게 좋았다. 그애가 잠 못 드는 밤에는 스탠딩에그의 <Little Star>를 그애에게 불러줬다. 그애는 우울해하는 나를 위해 메신저로 자기가 직접 기타를 치며 부른 노래를 보내주었다. 그애가 사는 집 앞 골목을 팔짱 끼고 함께 걸으면서, 가로등불 켜진 저녁 골목길을 함께 걷고 있는 이 순간을 그리워할 날이 분명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을 못 견디게 그리워한 날들도 있었지만 지금의 나는 그 순간을 아주 조금 그리워한다. 이 만화를 읽을 때는 아주 조금 더 많이 그 순간이 그리웠다.


참고기사: 「세계의 한 부분, 바로 너를」, 2018.10.25,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6745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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