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만화로 보는 중동, 만들어진 역사 - 중동을 읽는 자가 세계를 읽는다! ㅣ 만화로 보는 교양 시리즈
장피에르 필리유 지음, 다비드 베 그림, 권은하 옮김, 김재명 감수 / 다른 / 2019년 11월
평점 :
2001년 9월 11일, 난데없이 두 개의 빌딩으로 돌진하는 비행기들이 뉴스 화면에 나타났던 기억이 생생하다. 9·11 테러가 일어난 뒤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아프가니스탄(2001년)과 이라크를 침공했다(2003년). 이라크에 주둔한 미군들이 이라크인 포로들을 학대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중동 지역의 반미 감정은 더 거세졌다. 그 이후로도 미국과 중동 사이에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는 뉴스를 수도 없이 들었다.
도무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미국과 중동 사이의 갈등은 어디서 시작된 걸까. 왜 점점 심해져만 가는 걸까. 중동에 나름대로 관심이 있었지만 워낙 많은 나라와 이해관계가 엉켜 있어 미국과 중동 사이의 갈등이 어떻게 진행되어 온 건지 머릿속에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만화로 보는 중동, 만들어진 역사』다. 프랑스의 역사학자이자 중동 전문가인 장피에르 필리유가 글을 맡고, 프랑스 만화가 다비드 베가 그림을 맡아 미국과 중동 사이의 외교사를 만화로 정리한 책이다.
이야기는 2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과 중동이 처음 외교 관계를 맺게 된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18세기 후반 대서양을 지나는 무슬림 해적들에게 미국 상선들이 납치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에, 미국은 중동의 지방 제후들과 평화조약을 맺어야 했다. 그때만 해도 미국의 패권이 중동을 압도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이제 막 독립한 신생국가였고, 중동의 해적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중동의 제후들은 “당신들의 돈이 평화를 가져오긴 했지만 유지할 만큼은 아니라”며 미국인 포로들을 풀어주는 대가로 막대한 몸값을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은 19세기 말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영토와 국력을 키웠고, 서서히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석유가 전쟁을 치르는 데 중요한 자원이 되면서 미국은 석유를 보유하고 있는 중동 국가들의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친미 독재 정권에게서 안정적인 석유 공급을 보장받고 정권의 안보를 보장하는 유착 관계를 이어왔고, 석유 이권을 되찾으려는 정치 세력이 있으면 정치 공작으로 몰아냈다. 이란은 미국이 챙겨가던 석유 이권을 되찾아온 대가로 40여 년 동안 경제 제재 등 미국의 여러 압박 정책을 받고 있다.
하지만 자국의 이권이나 패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미국은 아랍 내 분쟁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며” 발을 뺐다. 시리아의 독재자 아사드 대통령이 2011년에서 2013년 사이 화학 무기로 민간인들을 살상할 때에도, 오바마는 아사드의 만행을 규탄하기만 할 뿐, 적극적으로 아사드를 막거나 정권을 교체하지 않았다. 이렇게 미국이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위해 중동 국가들을 이용해 오고, 그로 인해 갈등을 빚어 온 200여 년의 역사를 300여 페이지의 만화로 압축했다.
많지 않은 분량 안에 200여 년을 담다 보니 이야기는 숨 가쁘게 진행된다. 중동과 미국의 외교사, 전쟁사를 주요 사건과 그와 관련된 인물들, 각 진영의 입장, 진행 과정 위주로 빠르게 훑어나간다. 한 주제, 한 사건이 짧으면 2, 3페이지, 길어도 10여 페이지 정도로 간략하게 다뤄진다. 미국과 중동 내 다양한 세력들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에, 머릿속에 큰 흐름을 정리해 두려면 꼼꼼히 읽어두는 것이 좋다.
(위)호메이니를 둘러싼 민중들
(아래) 2003년 후세인이 생화학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발언하는 콜린 파월 국무장관
수많은 인물들과 세력들, 사건들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은 단순하지만 강렬하게 다가오는 그림이다. 부패한 친미 왕정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은 이란의 종교지도자 호메이니가 민중들의 소용돌이에 둘러싸인 모습, 근거 없이 이라크의 후세인이 생화학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발언한 콜린 파월 국무장관의 눈, 코, 입, 귀에서 해골들이 흘러나오는 모습 등 각각의 컷은 강렬한 이미지로 사건의 의미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잔혹한 묘사 없이도 국제관계의 냉혹함과 잔인함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흑백으로만 표현되어 더욱 강렬하다.
마지막 두 페이지를 가득 채운 중동 사람들의 얼굴은 독자를 압도한다. 미국과 중동의 갈등으로 일어난 전쟁과 기근, 유랑, 테러로 고통받는 사람들이다. 책 밖의 독자를 바라보듯 하나같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의 얼굴 위에서 작가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미국은 항상 좋은 의도로 중동 문제에 개입한 것도 아니며 언제나 최악의 순간에 문제에서 빠졌다.” 미국은 이들의 고통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이들의 고통을 더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기는 한 것일까? 미국과 중동의 복잡한 갈등과 이해관계로 인해 생겨난 참상들이 우리와 미국 사이의 관계에서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이 책에 나오는 수많은 사실들을 하나하나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이런 의문들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P. S. 이 책은 3권으로 된 원서를 한 권으로 합친 것이다.(이 책의 1, 2, 3부는 원서의 1, 2, 3권이다.) 원서의 1권은 2013년 미메시스에서 『최악의 동반자』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지만 지금은 절판되었다. 미메시스판에 비해 여러 모로 공을 들인 것이 보인다. 원문만 그대로 번역한 미메시스판과 달리, 다른판은 국제 분쟁 전문 기자 김재명의 추천사를 통해 책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고 보충 설명을 했다. 또한 1, 2, 3부의 주요 인물들을 본문 앞에 따로 정리했다. 역주도 미메시스판보다 더 꼼꼼히 달아, 단순히 주요 용어와 인물을 단순히 설명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서 그리는 역사적 상황까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번역도 다소 딱딱하고 장황한 미메시스판보다 자연스럽고 명쾌하게 읽힌다.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알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직 알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들이지요. 이러한 것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넓고 험하다는 것이지요. 세상은 험하고, 부정과 조작이 만연합니다.(미메시스판 8페이지)
“하지만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것도 있지요.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이 넓고 험하다는 것입니다. 거짓과 조작이 만연한 세계지요.”(다른판 18페이지)
“2004년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에서 길가메시의 서사시나 <탐욕의 묘비>를 알지 못하는... 하지만 성경과 그리스도교를 통해 동일한 역사를 공유하는 후손들이 미국 군인들이...포로들을 겹겹이 쌓아 놓고 사진을 찍었다.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의 고문 사진은 우리 시대의 탐욕의 묘비이다.”(미메시스판 14페이지)
"2004년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미국 병사들이 포로를 쌓아 놓고 석판과 똑같은 사진을 찍었다. 길가메시 서사시나 독수리 전승비는 모르지만 기독교 성경을 통해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후손들이 한 일이다. 이 사진은 우리 시대 또 다른 독수리 전승비인 셈이다.”(다른판 24페이지)
다만 미메시스판은 프랑스어 번역가가 프랑스어 원서를 직역한 것인 반면, 다른판은 영어판을 중역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절판된 미메시스판보다 구하기 쉽고, 미메시스판에 없는 2, 3권까지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으니 다른판을 읽는 것이 여러 모로 나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