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순한 여인 / 우스운 사람의 꿈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정아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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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소설 「온순한 여인」과 영화 <당신과 함께, 당신 없이>의 스포일러 포함

지금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스리랑카 영화전을 진행하고 있다. 스리랑카는 내 친구가 몇 년 동안 봉사 활동을 하다 온 나라라 나도 마음이 쓰이는 곳이다. 스리랑카 영화전에서 어떤 영화를 볼까 영화 시놉시스들을 살펴보다, <당신과 함께, 당신 없이>라는 영화의 줄거리에 끌렸다. 스리랑카는 정부군과 소수 민족인 타밀 족 반군이 1983년부터 2009년까지 26년 동안이나 내전을 벌였는데, 이 영화는 타밀 족인 아내가 남편이 내전 당시 정부군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생기는 일을 그렸다는 거다. 게다가 원작은 도스토옙스키의 단편 「온순한 여인」이라니 더 궁금해졌다. 백수십 년 러시아의 이야기를 21세기 스리랑카라는 배경에 어떻게 맞추어 각색했을까. 그래서 영화를 보러 가기 전 도서관에서 「온순한 여인」이 실린 책부터 읽어봤다.

살인자를 찾는 데 주력하는 전개의 영화 장르를 '후던잇(Who done it)'이라고 하는데, 이 단편은 아내가 왜 자살했는지 주인공이 그 이유를 찾아가는 소설이니 '와이던잇(Why done it)'이라고 할 수 있다. 남편이 자신과 아내가 겪어온 일들을 생각하며 아내가 자살한 이유를 추론하지만, 결국은 진실을 밝혀내지 못하니 추리 소설이라기보다는 심리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속 아내가 왜 죽었는지 이해하려면 우선 소설 속 이야기를 파악해야 한다. 주인공은 퇴역한 마흔한 살 군인으로, 제대하고 나서는 전당포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전당포에 작은 패물들을 자주 맡기러 오는 젊은 여인에게 연민을 느끼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그녀에 대해 뒷조사까지 하다, 그녀가 부모를 잃고 숙모들에게 얹혀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숙모들은 입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그녀를 부유한 홀아비 노인에게 시집보내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청혼했고, 원하지 않은 결혼에서 벗어날 방법이 달리 없었던 그녀는 그와 결혼했다. 퇴역하고도 군인답게 엄격하고 절제된 생활을 하는 주인공은 아직 열여섯 살밖에 안 되는 아내에게도 검약하고 절제된 생활 방식을 강요했고, 아내에게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하지도 않았다. 남편의 사랑을 바랐던 아내는 남편의 냉담하고 엄격한 태도에 반항하게 되었다. 부부의 관계가 날로 악화되던 와중에, 남편의 옛 군인 동료가 찾아와 남편이 군에서 불명예스러운 일로 제대했다는 것을 이야기해 버렸다. 그러자 아내는 남편을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다 남편이 잠든 사이 권총을 남편의 관자놀이에 댔다. 이미 잠이 깬 남편은 아내의 그런 행동을 덤덤하게 넘겨버렸지만, 자신이 아내의 행동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키려 아내의 침상을 자신의 침상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아내가 노래를 부르는 것을 발견하고 그녀가 자신을 용서했다고 생각해 아내에 대한 사랑이 마음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남편은 아내에게 열정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며 화해하려 했지만, 아내는 남편이 자리를 잠깐 비운 사이 창문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다.

많은 비평가들은 그녀가 남편의 엄격한 제도와 정신적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자살했다, 또는 남편의 냉대에 지쳐 자살했다고 해석한다. 남편이 진심을 다해 같이 새롭게 시작해 보자고 했지만, 그녀 자신은 그런 남편에게 깊은 동정심 외에는 다른 어떤 감정으로도 답할 수 없었다고. 반면 지만지판의 한국어 번역자는 그들의 해석이 모두 틀렸다고 한다. 그들은 남성이어서 여자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라고. 남편은 그녀를 용서했고 그녀는 남편을 용서했지만, 그녀는 남편을 비난하고 총구까지 겨누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고, 남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편의 진심 어린 사랑을 확인해 행복한 마음으로 자살했다고.

여성인 번역가는 도스토옙스키를 잘 알고, 한 번이라도 진정한 사랑을 해본 적이 있고, 아내의 심리를 잘 따라가다 보면 이 해석만이 그녀의 자살에 대한 유일한 해석임을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같은 여성인 나는 비평가들의 해석이 더 납득이 간다. 자신에게 용서를 비는 남편을 보는 아내의 모습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해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던 일이 이뤄져서 행복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나 당황해하는 것으로 보였다. 번역가는 아내가 창문에서 뛰어내리기 전 하녀에게 보인 미소가 진정으로 행복해하는 미소였다며 사랑받는 여인의 미소였다고 봤지만, 그녀의 마지막 미소를 죽음으로써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기에 지을 수 있던 미소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살아 있는 한 그녀는 남편의 변덕에 운명이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열렬히 사랑 고백을 해도 나중에 또 언제 마음이 변할지 모른다. 소설 속에서 아내의 목소리는 남편이 기억하는 몇 마디의 대화밖에 나오지 않지만, 서술과 상황으로만 봐도 남편이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것이 보인다. 그런 남편을 아내가 믿고 의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편과 헤어져도 친정에는 그녀를 애물단지 취급하는 숙모들밖에 없고, 결혼 전에도 스스로 직업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취업할 길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19세기 러시아에서 이혼한 여성이 살길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으니, 그녀가 죽음을 해방구로 여길 만했다. 그래서 나는 번역가와 같은 여성임에도 이전의 남성 비평가들처럼 「온순한 여인」 속 아내는 새롭게 시작할 의지도 힘도 방법도 없다고 느꼈기에 자살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당신과 함께, 당신 없이>의 감독은 아내가 자살한 원인을 무엇으로 보았을까? 영화를 보기 전 이 점이 가장 궁금했다. 영화는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 스리랑카의 상황에 맞게 내용을 각색했기 때문에 아내의 자살 동기가 원작과는 어느 정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큰 틀 안에서는 한국어판 번역가보다는 비평가들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본다. 남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도, 새롭게 시작할 수도 없었기에 자살했다는 것.

<당신과 함께, 당신 없이> 속 남편 사라트시리(샴 페르난도)와 아내 셀비(안잘리 파틸)가 찍은 결혼 사진

영화는 생각보다 원작의 세세한 설정과 상황까지 충실하게 따른다. 남편이 퇴역 군인 출신의 전당포업자라는 것, 아내는 결혼하기 전 남편의 전당포에 작은 패물들을 자주 맡겼다는 것, 부모를 잃고 남의 집에 얹혀살면서 취업하기 위해 애썼지만 잘되지 않았고, 결국 집주인들의 등쌀에 떠밀려 늙은 부자의 재혼 상대가 될 위기에 놓였다는 것. 그래서 남편과 결혼했지만 남편의 엄격하고 차가운 태도에 상처를 받았다는 것, 남편의 옛 군인 동료 때문에 과거의 진실이 밝혀져 이들의 관계에 더 큰 위기가 생겼다는 것까지.

그런데 영화에는 스리랑카의 민족 갈등이라는 요소가 더해져, 오히려 원작보다 아내의 자살 원인은 더 뚜렷하게 읽힌다. 타밀 족인 아내는 정부군의 손에 부모님과 두 오빠를 잃었다. 그래서 스리랑카의 주류인 싱할라 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편을 경계했지만, 늙은 부자와 결혼하는 것은 더 싫었기 때문에 남편과 결혼했다. 원작처럼 나이가 훨씬 더 많긴 하지만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었으니. 그래서 마음을 열고 남편과 다정하게 지내려 했지만, 남편의 옛 군인 동료가 나타나면서 남편이 정부군이었다는 것을 알고 큰 충격을 받는다. 남편 같은 정부군이 가족들의 원수였으니까. 그래서 남편이 서랍장에 숨겨둔 권총으로 남편을 죽이려고까지 했지만, 결국 죽이지는 못했다. 그런데 화해를 요청하는 남편은 자신이 정부군에 복무하던 시절 찾아온 친구를 포함한 전우들이 타밀 족 여인을 성폭행했는데도, 그것을 숨겨주려 위증했다고 고백한다. 그것이 남편이 차마 밝히지 못했던 과거였다.

원작에서 주인공이 불명예 제대한 원인은, 군대에서 하극상을 벌인 후임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하극상이라는 것도 상사에게 불손했던 거지 군 내외의 인명을 살상하거나 군사 시설을 파괴하거나 적에게 중요한 군사 기밀을 빼돌리는 등의 중대한 과실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니 현대인 독자로서는 왜 그렇게 사소한 일로 제대당한 건지, 아내는 왜 그런 사소한 이유로 남편을 죽이려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영화 쪽에서 아내가 남편을 죽이려 한 이유가 더 이해하기 쉬웠다. 자기 부모형제를 죽인 자들과 전우였던 남편이 죽일 만큼 증오스러웠다는 것은 납득이 가니까.



영화에서 남편 사라트시리는 아내 셀비에게 먼저 다가가 새롭게 시작하자고 하지만, 셀비는 그의 마음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데 21세기 스리랑카는 전쟁의 충격으로 아직도 혼란스러운 상태지만, 19세기 러시아보다는 이혼한 여성이 살 길이 더 넓게 열려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왜 자살했을까? 영화에서도 남편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었잖아. 그랬다면 나는 당신을 웃으면서 보내줬을 거야." 남편의 기억 외에는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원작 속 아내와 달리, 영화 속 아내는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은 내게 온전한 사랑을 바랐지만, 나는 그걸 줄 수 없었으니까." 마음에는 남편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다 해도, 아내는 자신의 가족들을 죽인 자들의 전우이자, 자신의 동포가 강간당하는 것을 방치했던 방관자를 사랑한다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랑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 그런 자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그를 사랑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웹툰 <낮에 뜨는 달>에서 자신의 부모를 죽인 적국의 장군을 사랑했지만 결국 그에 대한 양가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를 죽였던 여주인공 한리타의 마음이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한리타는 자신이 아닌 상대를 죽였다는 것이 다르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영화 속 아내가 자살한 원인은 뚜렷하게 읽혔다.

「온순한 여인」은 <당신과 함께, 당신 없이>가 만들어지기 전에 1969년 프랑스, 2014년 베트남에서 이미 영화화된 적이 있다. 그 두 영화에서는 아내가 죽은 원인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궁금해진다. 어느 쪽이든 나는 한국어판 번역자가 단언하는 것과 달리, 단 하나의 진실로 명확하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성의 마음으로 생각해 봐도 나는 비평가들과 같은 방향으로 그녀의 죽음을 해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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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 한가람 대본집 1~2 - 전2권
한가람 지음 / 시공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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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 드라마 스포일러 포함

드라마는 5년 전에 끝났고, 이 대본집도 5년 전에 샀다.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시간은 이 드라마의 시간적 배경일 뿐만 아니라 서사의 중심축이기도 하다. 오랜 겨울 속을 살아가다 봄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니까. 그래서 매년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무렵에 읽겠다고 해놓고서, 5년 만에야 이 책을 다 읽었다. 1권은 2월에, 2권은 바로 며칠 전에. 달력으로는 봄이 된 지 이미 한 달이 넘어서야 다 읽었지만 봄은 이제야 온 것 같으니 적절한 때에 다 읽은 것 같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다. 4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단행본 한 권을 16부로 만들기 쉽지 않았다고 드라마 작가는 서문에서 하소연한다. 그런데 드라마 작가가 고심해서 만든 결과는 꽤 괜찮았다. 남주인공 은섭의 양부모와 양여동생, 은섭의 친구 장우의 첫사랑, 여주인공 해원의 이모 명여의 오랜 연인까지 드라마 작가가 새롭게 만들어낸 캐릭터들은 원작 속 캐릭터들과 이질감 없이 어울린다. 실제로 북현리(드라마의 주요 배경)에서 살고 있는 인물들처럼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캐릭터들과 부딪히고 함께 울고 웃으며 더 풍성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16부작이니 원작에 있던 등장인물들에게도 새로운 이야기와 새로운 대사들, 행동들이 많이 덧붙여졌는데, 원작에서도 당연히 그렇게 행동하고 말했을 것처럼 원작의 결을 그대로 가져왔다.

지문마저 원작처럼 결이 곱다. 수채화 물감을 묻힌 붓으로 한 터치 한 터치 그려나가듯, 매일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눈이 내리고 서서히 봄이 오는 북현리의 풍경을 한 문장 한 문장 그려나간다. 엄마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부터 까르르 웃으며 걸어가는 학생들, 시장에서 각자 열심히 일하는 상인들까지 배경 속의 엑스트라로 나오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모습도 빠뜨리지 않는다. '이 글을 쓰는 동안은 북현리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했다'는 작가의 말이 허언은 아니다.

책의 만듦새도 드라마의 내용에 맞게 곱고 해사하다. 원작 소설을 출간했던 시공사에서 드라마의 대본집도 만들었는데, 원작 소설처럼 표지와 속표지, 본문도 파스텔 톤의 색들로 꾸몄다. 본문은 그냥 흑백으로만 인쇄해도 될 텐데, 등장인물 소개와 차례, 본문의 장면 번호, 대사, 지문을 모두 다른 색으로 인쇄했다. 본문의 글씨 색깔들도 모두 파스텔 톤이라 어느 것 하나 튀지 않는다. 드라마 전체의 톤에 맞춰 세심하게 만든 것이 보인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새롭게 만들어낸 캐릭터 중 명여를 질투하는 베스트셀러 작가 심영춘은 자신의 성적 매력만 내세우는 납작한 캐릭터가 되었고, 주인공들의 친구 민지연은 워낙 등장인물들이 많아 본방에서는 사실상 이름도 없는 친구 1이 되었다. 게다가 은섭과 친삼촌의 관계를 마무리하기 위해 정작 책방 주인인 은섭이 책방의 첫 이벤트에 참여도 못 한 것으로 각색한 것은 아쉽다. 은섭의 책방이 원작과 드라마에서 갖는 의미를 생각하면, 은섭이 빠져서는 안 됐다. 무엇보다 가정폭력범인 아버지의 죽음의 진실을 알고 나서 해원이 외친 대사 '그래도 아빠잖아!'는 지금 봐도 어이가 없다. 아무리 자신에게는 다정했다 하더라도 엄마와 이모에게 어떤 폭력을 가했는지 다 들었는데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평소에는 원작을 그다지 따르지 않지만 이번에는 원작에 충실하려 했다고 드라마 작가는 말했는데, 각색을 하다 삐끗한 지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원작 소설뿐만 아니라 이 드라마 또한 사랑하는 이유는, 드라마 전반에 인간에 대한 애정과 믿음이 진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떤 상처를 입었어도 그 사람이 행복을 찾길 바라는 애정, 겨울이 아무리 춥고 길었어도 언젠가는 봄이 올 거라는 믿음. 행복은 애쓰고 애써야 겨우 얻을 수 있으며 쉬이 곁에 있어주지도 않지만, 살아간다면, 노력해 간다면 행복한 날이 올 수 있을 거야. 해원과 은섭의 이 마지막 내레이션과 '당신은 묵묵히 오늘을 살아가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는 제작진의 마지막 인사는 5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있다. 드라마 작가는 '이 드라마가 이 모든 겨울에 떠오르는 드라마이길, 겨울이 오면 이 드라마가 떠오르고 저뿐만 아니라 이 드라마를 보시는 모든 분들이 그러하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나는 겨울마다 이 드라마를 떠올린다. 그리고 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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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월; 초선전
박서련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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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삼국지』를 좋아했던 터라 『삼국지』의 2차 창작들에도 눈길이 갔다. 그러다 발견한 게 중국 작가가 제갈량 휘하의 촉나라 첩보 조직을 상상해서 쓴 『풍기농서』와 이 소설 『폐월 초선전』이었다. '폐월(閉月)'은 달조차 그 아름다움에 부끄러워져 얼굴을 가려버렸다는 뜻으로, 『삼국지』 최고의 미녀 초선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국 작가 박서련은 초선을 한 인간으로서 그려내고 싶었다면서 이 소설을 썼다. 초선의 1인칭 주인공 시점, 그녀 자신의 목소리로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것이다. 설정만 들어도 흥미롭지만, 과연 이 소설은 초선을 한 인간으로서 그려내겠다는 원래의 목적을 이루었을까.

도입부부터 후원 연못을 둘러싼 사건까지는 『삼국지』에 없는 부분인데, 딱 그 부분까지는 원래의 목적에 충실하다. 작가가 초선이라는 인물을 마음대로 만들어낼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그리는 초선은 열 살도 안 된 어린 나이에 거짓말로 자기 신분을 속여 상대에게 호감을 살 정도로 영악한 성품을 타고났다. 그녀는 어린 시절 자신이 굶어 죽지 않게 구해주고 돌봐줬던 거지 동료도,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가차없이 버린다. 작가는 밀도 있게 당시의 생활상과 생활감을 그려내기보다는 필요한 장면만 슥슥 스케치하듯 묘사하지만, 초선이 살아갔던 비정한 시대와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비정해져야 했던 초선이라는 인물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후반부에서는 『삼국지』의 서사 안에서 초선의 이야기를 풀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2차 창작 작가에게 원작은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여 갈 탄탄한 뼈대가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자신이 새롭게 풀어가고 싶은 내용을 다 풀지 못하게 하는 틀이 될 수도 있다. 『폐월 초선전』의 경우에는 원작이 뼈대가 아니라 틀이 되었다. 초선은 양부 왕윤의 뜻에 따라 동탁과 여포 사이를 오가며 이간질해, 동탁이 파멸하게 만들었다. 이 서사의 틀 안에서 인간 초선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 소설의 작가는 어떻게 했을까? 초선을 왕윤에 대한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애정으로 움직이는 인물로 설정하고, 초선이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하던 시기는 초선이 동탁, 여포와 어떻게 성관계를 가졌고 거기서 어떤 것을 느꼈는지를 중점으로 묘사한다. 사람에 따라 취향이 다를 수는 있겠지만, 초선이 자신보다 서른 살은 많을 왕윤을 아버지가 아니라 연정의 상대로 애정을 쏟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동탁이나 여포나 잘못 건드리면 자신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아버지와 나라까지 파멸시킬 인물들인데, 그들 사이를 오가던 위태로운 시기의 초선에 대해 할 이야기가 오직 성밖에 없는가? 본문 뒤의 해설에서 평론가는 초선이 동탁과 여포와의 성관계에서 쾌락을 느낀 것을 주체성의 회복으로 보던데, 왕윤의 목적을 위해 이용당하고 동탁과 여포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상황에서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조차 가질 수 없는데 그 상황에서 주체성을 회복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작가의 이 두 가지 선택은 초선을 한 인간으로 되살려 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본다.

작가의 마지막 수는 초선에게 주는 결말이다. 전해지는 초선의 결말은 여러 가지다.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자결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여포의 아내가 되었다가 여포가 훗날 조조의 손에 죽자 여포를 따라 자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작가가 초선에게 준 결말은, 왕윤의 동반 자결 제의를 거절하고 혼자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는 것이다. 초선은 자신에게 같이 죽자고 하는 왕윤을 보고 나서야 그에게 자신은 언제까지나 이용할 도구일 뿐이고, 그와 함께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렇게 사랑했던 왕윤을 버리고서라도 살아남았다. 소설 전반부에서 묘사된 것처럼 영악하고 비정한 초선이라는 캐릭터가 할 수 있는 선택이기는 하고, 동탁과 여포와의 성관계에서 쾌락을 느낀 것은 그 상황에 대한 초선 자신의 방어 기제일 수도 있다. 그게 작가가 『삼국지』라는 틀 안에서 초선에게 줄 수 있던 최대한의 주체성이었을 것이다. 초선이라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았을 때부터 가질 수밖에 없던 한계였지만, 그 한계를 돌파할 다른 방법은 없었을지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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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사원 풍요의 바다 3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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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작품, 『봄눈』, 『달리는 말』의 스포일러 포함


한국어로 읽을 날이 과연 오기는 할까 했던 『새벽의 사원』이 두 달 전 드디어 나왔다. 이 책이 속한 <풍요의 바다> 시리즈는 다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이제 세 권을 읽었으니 4분의 3까지는 온 셈이다. 민음사가 언제 마지막 권을 낼지는 모르겠지만 4분의 1만 남았으니 급할 것은 없다.

『새벽의 사원』의 도입부를 읽을 때는 글만으로도 이 책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도입부의 방콕 묘사는 읽는 것만으로 눈부신 햇살과 그 속에서 오색으로 빛나는 사원의 탑들이 눈앞에 있는 듯했고, 온몸을 내리누르는 열기가 느껴졌다. 출장지인 태국에서 기요아키와 이사오의 환생이라고 주장하는 태국 공주 잉 찬을 만난 후, 혼다는 휴가 겸 인도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 인도 여행을 서사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자세하게 그려서 뜬금없다고 생각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내게는 도입부의 방콕 묘사와 함께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었다. 콜카타 칼리 가트 사원의 피 냄새를 풍기는 성스러움, 바라나시 갠지스 강가의 혼돈, 그와 대비되는 아잔타 석굴의 더없이 맑은 고요를 나 또한 경험하는 것 같았다.

환생에 대한 고찰도 흥미로웠다. 친구가 두 번이나 환생했다고 믿는 혼다가 환생의 원리와 법칙을 알고 싶어 불교 교리를 더 자세하게 공부하게 되는데, 혼다가 찾아본 불교 교리 부분은 소설이라기보다 비문학에 가깝다. 불교 교리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잘 이해되지 않기는 했지만, 세상의 존재들은 자아나 주체가 아니라 '아뢰야식'이라는 의식을 통해서만 삶을 살아가고 세상을 체험하고 환생을 거듭한다는 대승불교의 유식론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신과 나라는 주체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기독교 교리에 익숙한 나로서는 주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낯설고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톨스토이의 소설들을 읽을 때처럼 새로운 사상을 소설로 접하는 것도 나름대로 유익한 경험이다.

그러나 이 책은 전편인 『달리는 말』과 같은 지점과 다른 지점에서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같은 지점은 미시마와 혼다가 매혹되는 순수한 이상, 순수한 일본에는 그 때문에 희생되는 사람들, 약자들에 대한 연민도 반성도 한 점 없다는 것. 혼다는 진주만 공습이 자기처럼 젊음을 지난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눈부신 행위'라고 생각하고, 전쟁이 끝난 직후 군인병원 뜰에서 어슬렁거리는 미군 부상병들을 보면서, 게이샤들은 그들이 입은 부상이 죗값을 치른 것이라고 수군거린다. 모든 일본 문학 작품이 일본의 과오에 대한 반성을 담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혼다나 그의 머릿속 생각을 쓰는 미시마나 순수한 일본성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을 인식하고 분명히 그것을 언급하면서도, 그것에 매혹되고 미시마는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 그토록 많은 사색과 상념 속에 일본의 전쟁으로 피와 땀을 흘린 사람들은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고, 인물들의 대화에서 '공산당과 함께 일본을 뒤엎으려는 위험한 자들'로 조선인이 두세 번 언급된다. 순수한 이상, 순수한 일본성이라는 허상을 향해 달려가면서 자신이 무엇을 짓밟는지는 의식도 못 하는 것이다.

다른 지점은 혼다의 관음증이다. 앞의 두 책에서 건실하고 성실하고 이성적인 인간으로 묘사되던 혼다는 『새벽의 사원』에서 추악한 이면을 드러낸다. 사실 그는 공원에서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을 한밤중에 몰래 엿보는 습관이 있었고, 경찰 단속이 심해진 뒤에야 공원에서의 관음 행위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자기 별장의 손님 방에 구멍을 뚫어놓고 손님들을 훔쳐보는 짓은 은밀히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다 열아홉 살로 성장한 잉 찬을 만나면서 그의 관음증적 욕망은 폭발한다. 혼다에게 잉 찬은 영원히 닿을 수 없어서 영원히 갈망하는 대상, 그래서 자신이 진정 살아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매개체다. 그러면서 자신의 온갖 환상을 그녀에게 투영한다. 후반부의 대부분은 혼다의 관음증적 욕망을 묘사하는 데 할애된다.

그러나 그런 그의 욕망이 어리석고 추악하다는 것을 작가는 직접 언급하거나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보여주면서 찬물을 끼얹는다. 사실 작품 속에서 묘사된 상황만 보더라도 잉 찬은 혼다에게 관심이 없고, 혼다가 접근해 오는 것을 혐오하는 것이 분명히 보인다. 게이코는 혼다의 잉 찬을 향한 욕망을 채워주는 데 협조하는 듯하지만, 결국에는 이제 그만두는 것이 좋다고 혼다에게 분명히 이야기한다. 그런데도 혼다는 욕망에 눈이 멀어 자기 발에 키스를 하면 잉 찬을 만나도록 도와주겠다는 게이코의 요구까지 들어준다. 그것이 게이코의 조롱이라는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한 채. 그는 게이코가 연 파티에서 잉 찬의 젊음과 대비되는 노부인들의 노쇠한 모습에 혐오감을 느끼지만, 그 뒤에서 작가는 아내 리에의 시선으로 젊은이처럼 입은 그가 얼마나 볼품없고 우스꽝스러운지 그려낸다. 파시즘에서는 그저 도취되기만 했던 작가가 그래도 관음증에 있어서는 제동 장치를 걸어놓은 셈이다. 그러나 적어도 자기 감정과 생각을 뚜렷이 드러내고 그에 따라 살아가고 죽었던 기요아키와 이사오와 달리, 잉 찬은 그저 욕망을 일으키는 대상일 뿐이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잉 찬과 게이코의 동성애는 잉 찬을 향한 혼다의 환상과 욕망을 산산조각 내지만, 그들의 동성애 성관계 묘사를 비롯한 에로티시즘은 잉 찬이 그저 욕망되는 몸이라는 것을 더 분명히 보여준다. 잉 찬의 관능적인 육체는 집요할 정도로 상세하게 묘사하지만 그녀의 내면, 그녀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전혀 묘사되지 않는다(그래서 잉 찬의 시점에서 『새벽의 사원』을 다시 쓰는 것도 해볼 만한 시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온갖 심오한 이론을 갖다 붙여도, 온갖 미사여구와 아름다운 환상을 씌워놔도 혼다가 미성년자에게 관음증적 욕망을 품는 인간이란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제 마지막 한 권 『천인오쇠』가 남았다. 그저 욕망의 대상이었던 잉 찬은 어떤 모습으로 다시 나타날까. 이 책에서는 어떤 이야기와 어떤 이론들이 독자를 기다리고 있을까. 이 책을 통해 미시마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이 마지막 책을 읽어보면 시리즈 전체에서 미시마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더 분명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P. S. 번역본의 문장은 『달리는 말』보다 훨씬 정돈된 것 같다. 관계사로 죽죽 이어지는 영어 문장 같은 문장들은 보이지만(『봄눈』의 번역자들이 원문이 영어 번역체가 심한 편이라고 했으니 아무래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문장 성분들이 뒤엉킨 비문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번역자가 이 시리즈에 적응해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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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말 풍요의 바다 2
미시마 유키오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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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해당 책과 『봄눈』의 스포일러 포함

민음사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풍요의 바다> 시리즈 첫 권 『봄눈』이 2020년에 출간되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같은 시리즈의 다음 권들을 기다렸다. 4년이나 소식이 없어 프로젝트가 중단됐나 했다. 그런데 작년 7월 두 번째 권인 『달리는 말』이 출간됐고, 지난 달에 세 번째 권 『새벽의 사원』이 출간됐다. 올해 안에는 마지막 권인 『천인오쇠』를 출간할 예정이라고 하니 <풍요의 바다> 시리즈 전체를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다.

『봄눈』을 읽으면서 순간순간의 미세한 감각과 감정까지 포착할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한 감성을 지닌 사람이 어떻게 폭력적인 제국주의에 경도됐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은 2년 뒤 다음 권인 『달리는 말』을 읽으면서 풀렸다. 『달리는 말』은 예상보다 작가의 극우 성향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소설이었다. 그가 빠져버린 파시즘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와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추구했던 순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봄눈』의 주인공 기요아키와 『달리는 말』의 주인공의 이사오는 겉보기엔 성향이 정반대다. 기요아키는 나라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자기 감정에만 집중해서 살지만, 이사오는 나라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내던진다. 혼다는 이사오가 기요아키의 환생이라고 생각하지만 둘이 같은 시대에 공존했다면 틀림없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자기가 생각하는 순수를 위해서 다른 것들은 다 내던져 버린다는 점에서 둘은 한 사람처럼 닮았다. 문제는 이사오가 추구하는 순수, 절대적인 가치가 천황제라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 추구하는 순수와 어긋나는 것들은 무조건 악으로 간주하고 배척하고 제거하려고까지 하면서, 그의 순수는 폭력과 파시즘으로 변질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사오는 정계와 재계가 유착해 부정부패를 일삼으면서 자기들의 배만 불리고, 서민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현실에 분개한다. 여기까지는 나라를 사랑하는 국민으로서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사오가 생각하는 해결책은 상식적인 현대 민주 시민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정재계의 부패한 인사들을 암살하고 계엄령(이사오 무리가 거사를 일으키기로 계획했던 날이 우연하게도 12월 3일이니 지금 이 시국을 헤쳐 나가고 있는 한국 독자로서는 더 섬뜩하지 않을 수 없다)을 선포해 사회를 청소하고, 천황을 중심으로 모두가 단결해 과거의 태평성대를 회복하자니. 그의 해결책은 시대 착오적일 뿐만 아니라 일본에는 애초에 그런 과거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허상이다. 허상을 순수한 가치이자 궁극의 아름다움이라고 믿었던 이사오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붙잡아도 허상을 향해 달려가다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자신이 바라던 최후를 맞는다.

작가의 삶만으로 작품을 평가할 수는 없지만, 『달리는 말』 속 이사오의 모습을 작가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지 않을 수 없다. 운동이라고는 숨 쉬기밖에 안 하며 나라에는 관심도 없던 기요아키가 (혼다의 환생 이론이 맞다는 전제하에) 검도로 몸을 꾸준히 단련하며 애국심이 투철한 이사오로 환생한 것은, 작고 병약한 문학 소년에서 근육질의 극우 청년단 지도자로 변신한 미시마를 떠올리게 한다. 이사오에게는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아주었던 혼다와 사와 같은 어른들이 있었고, 미시마에게는 혼다와 작품 속에서 그가 말하는 논리들을 만들어낸 이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사오도 미시마도 그 모든 것을 뿌리치고 자신이 추구하는 절대적 가치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토록 꿈꾸었던 할복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들의 마지막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만큼 아름답지도 장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마음속에 떠올리는 상념과 감정의 단편들, 그 순간 그들을 둘러싼 주변의 모든 것들을 세밀히 포착하는 솜씨는 여전하다. 도입부에서 혼다가 바라보는 무미건조한 법원과 교도소 풍경 묘사조차 혼다의 복잡한 마음 한 구석 한 구석을 더 생생하게 보여준다. 참신한 비유와 날카로운 통찰로 그 순간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을 더없이 적확하게 묘사한다. 뭘 해도 결론은 할복인 이사오의 심리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기는 하지만, 그가 어떤 사고와 감정을 통해 그런 결론에 이르렀는지는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사오의 무모한 행보를 이성의 눈으로 지켜보지만 결국 그의 순수함에는 감동을 받는 혼다의 모습에, 결국 순수의 손을 들어준 작가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미시마는 천황제와 극우 사상을 향한 이사오의 열정을 진지한 마음으로 썼겠지만, 맨 정신으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한 치도 타협하지 않는 순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깨닫게 된다는 데 이 책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P.S. 『달리는 말』에서부터 번역자가 바뀌었고, 두 사람에서 한 사람으로 줄었다. 같은 시리즈의 전작인 『봄눈』과 번역의 톤을 맞추기 위해 출간이 늦어졌다고 한다. 『봄눈』에서 『달리는 말』로 이야기가 그대로 이어졌다고 느낄 수 있게 신경 쓴 것이 보인다. 그러나 『봄눈』과 달리, 문장 구조가 뒤엉킨 비문과 사람들이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난해한 한자어가 곳곳에서 보인다. 『봄눈』의 번역자들이 문장 구조를 정돈하고 생경하고 난해한 한자어는 풀어 썼는데, 새 번역자는 영어 번역체가 심하고 일본어의 일상적 화법에서 많이 벗어났다는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다 그렇게 된 걸까('대칭을 이루는'이라고 옮겼으면 좋았을 텐데 '시머트리컬한'이라고 영어 발음 그대로 음차한 부분에서는 좀 놀랐다). 내가 『봄눈』을 읽은 게 2년 전이니 내 기억이 정확하지 않고 원문과 비교하지 않았으니 더더욱 정확하지 않겠지만, 읽으면서 그렇게 느꼈다. 그럼에도 글의 아름다움은 남아 있지만, 유려하고 부드럽게 읽혔던 『봄눈』 번역본의 한국어 문장들을 생각하면 아쉽다. 『새벽의 사원』과 『천인오쇠』의 번역은 어떨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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