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세스지 지음, 전선영 옮김 / 반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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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영화는 잘 못 보면서 나폴리탄 괴담은 좋아한다. '나폴리탄 괴담'은 일본의 '공포의 나폴리탄'이라는 괴담에서 유래했는데, 주인공이 일본식 스파게티인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먹으려고 했는데 그 나폴리탄 스파게티의 정체를 알아채고 공포에 휩싸였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정작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끝까지 밝히지 않는다. 이렇게 무엇인가를 굉장히 미스터리하고 공포스러운 존재로 묘사하지만, 정작 그것의 정체는 확실히 밝히지 않는다. 누락된 정보 때문에 그 존재는 듣는 사람의 상상 속에서 더욱 불가사의하고 무시무시한 존재가 된다.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보다 더 큰 공포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우리의 상상일지도 모른다.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도 정보를 일부러 누락시킴으로써 더 큰 공포를 불러오는 전략을 사용한다. 한 사람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쭉 이어나가는 보통의 소설들과 달리, 이 소설은 일본의 긴키 지역(수도였던 교토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옛 수도권 지역)에서 일어나는 괴이한 현상들에 대한 온갖 (가상의) 자료들을 모아놓은 모습이다. 공포 전문 잡지 기사와 인터뷰 녹취 기록, 인터넷 게시판에서 그대로 긁어 온 글과 댓글까지 자료의 출처나 형식도 다양하고 시점도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그렇기에 진상은 직선적인 스토리라인을 따라 밝혀지지 않는다. 각 자료에 담긴 단서들이 퍼즐 조각처럼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져 간다. 퍼즐이 완성되기 전에 어떤 진상이 숨겨져 있는지 알기 어렵기에 더 공포스럽다.

또 하나 공포감을 더하는 것은 긴키 지방이 우리에게 낯선 지역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긴키 지방이 자신이 사는 곳이라 이야기를 상상하기 쉬웠고, 이 지방 사람이 아닌 사람들도 수학여행으로 한 번은 와봤을 곳이기에 친숙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괴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곳도 주택가나 노래방, 회사처럼 일상적인 곳이기에 공포가 일상으로 파고드는 것을 노렸을 것이다. 번역가는 일본에 자주 여행을 간 한국인에게도 긴키 지방은 친숙할 것이기에 작가의 이러한 전략이 유효할 것이라고 본다. 반면 '긴키'라는 지역명을 이 책으로 처음 들을 정도로 일본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 긴키 지방은 낯선 곳이다. 일본은 한국보다 더 덥고 습하고, 더 무성하고 깊은 숲과 산으로 가득하다. 게다가 원한이 풀리면 천도되는 한국의 귀신과 달리, 일본의 귀신은 아무나 자기 영역에 들어오면 해쳐서 희생자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이런 일본 괴담 특유의 밑도 끝도 없는 악의가 낯설고 무섭다.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의 귀신들도 이런 무차별적인 악의를 퍼뜨리는 존재들이기에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없어 더 두렵다.

하지만 소설이기에 진상은 결국 밝혀질 수밖에 없다. 결말까지 오면서 커진 공포감은, 결말에서 진상을 알고 나면 그 모든 재앙의 원인이 너무 하찮아 식는다. 이 책을 다 읽은 날 밤 이상하게도 바람이 유난히 세게 불어 더 무서웠는데, 이 책 속 만악의 근원이 된 존재를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무서운 마음이 가셨다. 세상에 결혼 못 한 게 자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를 안 만나주는 여자들을 죽인 놈 달래준다고 신사까지 세워줬는데. 몇십 년 동안 제물도 받아 먹고 죄 없는 여자들도 홀려서 신부로 데려와 놓고선, 이제 자기를 잊어버리고 제사를 안 지내준다고 저주를 퍼뜨린다. 그렇게 여자들을 많이 홀리고도 만족을 못 하는지 남녀가 결혼하고 뭘 하는지도 모르는 초등학생 여자애를 납치해 '신부'로 삼는다. 이런 치졸하고 추잡한 귀신을 봤나. 이 책을 읽고 밤에 무섭다면 책 속 귀신의 하찮음을 생각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래도 결말까지 조각난 단서들이 서서히 맞춰지면서 그 사이의 공백을 독자 스스로 상상으로 메꿔 가면서 공포를 키워가게 유도하는 실력이 뛰어나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나서도 끈적끈적한 악의가 읽는 나에게서도 떨어지지 않는 듯하다. 본문 뒤에 실린 (가상의) 문서, 사진들은 어떤 것은 현실감이 있어서, 어떤 것은 조악해서 오히려 더 불쾌감과 공포감을 일으킨다. 이 책이 곁에 있는 것 자체가 꺼림칙하게 느껴질 정도다. 여러모로 영리하게 공포를 만들어내는 책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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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용의자
찬호께이 지음, 허유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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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호께이의 모든 작품을 챙겨 읽을 정도로 그를 좋아하지는 않고, 아직까지는 그가 『13.67』을 넘는 작품은 쓰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전반적인 완성도는 아쉬운 작품들도 재미 하나는 확실히 있어서 차기작이 나오면 관심을 갖게 된다. 『고독한 용의자』는 3년 만에 나온 그의 신작이고, '20년 동안 방 밖으로 나오지도 않던 은둔형 외톨이가 방에서 자살했는데, 그의 방 옷장에서 토막 난 시신이 든 표본들이 발견됐다'는 시놉시스만으로 흥미로웠다. 도서관에 신청하고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도서관에 비치돼서 읽게 됐다.


  기대했던 대로 확실히 재미있었다. 책을 읽는데 넷플릭스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일하느라 계속 읽을 수 없다는 게 안타깝고 그 뒤의 이야기가 일하는 내내 궁금했다. 퇴근하면 이제 다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게 기뻐 퇴근하면서도 퇴근하고 나서도 쉬지 않고 읽었다. 그래서 평일인데도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이틀 만에 다 읽었다. 진상이 밝혀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고, 새롭게 밝혀진 진상도 사실은 진실이 아니었다. 이렇게 이야기의 흐름을 능수능란하게 바꾸면서 끝까지 읽게 만드는 솜씨는 여전했다. '망자의 고백'과 칸즈위안의 미발표 소설에서 발췌한 내용이 중간중간에 섞여 있는데, 이 두 부분이 교차되면서 진실이 서서히 드러나다 마지막 망자의 고백에서 완전히 드러났을 때의 전율은 잊을 수 없다.


  하지만 밝혀진 진상이 너무 억지스러웠다. 한 독자가 '은둔형 외톨이라는 설정을 너무 편의적으로 사용한다'고 했는데 내 생각도 그렇다. 은둔형 외톨이었다는 이유로 사람이 바뀐 것을 친어머니도 모른다는 것이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다. 녹음된 목소리는 어떻게 하든 실제 목소리와는 다르고, 살아 있는 실제 사람이 내는 목소리라면 녹음된 목소리처럼 매번 똑같을 수가 없는데,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는 게 이상하다. 20년 동안 도대체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건지 확인도 하지 않고 계속 그 상태로 살아오다니. 셰바이천의 어머니가 아무리 소심하고 겁이 많다고 해도. 그리고 장례를 치르려면 고인의 머리도 수염도 이발해서 단정한 상태로 만들었을 텐데, 그러면 바이정환의 얼굴도 드러났을 것이다. 입관하거나 화장하기 전에 유가족이 고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는 절차가 있고. 시신이 셰바이천이 아니라 바이정환인 것을 숨기기 위해 머리카락과 수염이 마구 자라 덥수룩한 채로 장례를 치렀다는 것인가? 마지막 반전을 위해 다소 억지스러운 설정을 만들어낸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칸즈위안이라는 캐릭터의 매력이 이 작품을 이끌어 가고, 그의 서사는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칸즈위안은 반듯한 외모에 중고등학교 때 전교 1등이었을 뿐만 아니라 경찰들보다 더 뛰어난 추리력과 행동력으로 복잡한 사건을 풀어나간다. 또 다른 주인공인 쉬유이 경위는 공무원으로서 개인이 공무에 끼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지만, 칸즈위안의 교묘한 수에 번번이 당하다 결국 그와 공조하게 된다. 마치 사마의를 농락하는 제갈량을 보는 것 같다. 거기에 작가로서의 문학적 재능까지 갖추었다. 그런데 그에게는 뭔가 숨기는 것이 있는 듯하다. 그가 숨기고 있는 것이 그에게 그늘을 드리우는데, 그 그늘이 그를 더 신비하고 매력적으로 만든다.


  마지막에 밝혀진 칸즈위안의 사연은 그의 캐릭터에 입체감과 인간미를 더하면서 그라는 인간 자체를 연민하게 만든다. '고독한 용의자'는 사실 그였다. 셰바이천이나 바이정환은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친구가 있었기에 불행한 삶을 살다 떠나도 고독하지 않았다. 하지만 칸즈위안에게는 이제 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 오랜 세월 동안 거의 모든 것을 혼자 감당했는데, 이제는 혼자 뭔가를 지키는 일에서 자유로워졌지만 그래서 더 외로울 것이다. 그래도 새롭게 얻은 자유 속에서 그가 또 다른 소중한 것,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길 바란다. 이 작품도 추리 소설로서의 완성도나 문학성이나 『13.67』에는 못 미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마음속에 여운이 남는다. 칸즈위안처럼 감당하기 힘든 일을 혼자서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해오고 있는 친구를 지켜보는 것이 어떤 마음인지 알기 때문이다.


P. S. 1. 중국어 원제는 '숨은 용의자(隱蔽嫌疑人)'이고 영어판 제목은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 제목에서 따 온 'The Loneliest Guy'(이 노래는 소설 본문에서도 셰바이천이 좋아하던 노래로 언급되며 여러 장면에서 배경음악으로 깔린다)인데, 한국어판 제목인 '고독한 용의자'는 아무래도 한국에서도 인기 있는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셋 다 같은 사람을 가리키고 있고 '고독한 용의자'도 가장 중요한 그 인물을 한마디로 요약한 표현으로 적절한 데다 '고독한 미식가' 덕분에 입에 잘 붙으니 문제는 없다.


P. S. 2. 데이트하러 가려고 차려입은 칸즈위안을 '한국 배우같이 입었다'고 묘사하고, 바이정환과 궈쯔닝이 대화할 때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가수 중 하나로 BTS가 언급되는 것을 보면 한류가 아시아에서 확고한 흐름으로 자리 잡은 게 맞는 것 같다. 찬호께이가 딱히 한국을 의식하고 쓰지는 않은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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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53회 나오키상 수상작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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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에서의 등장인물 이름 표기가 중국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와 다르다. 현행 중국어 표기법이 실제 중국어 발음과 차이가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우선은 중국어 표기법에 따른 등장인물들의 인명 표기도 정리해 놓는다. 서평에서의 등장인물 이름은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했다.


한자 표기

책에서의 표기

중국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

葉秋生

예치우성

예추성

趙戰雄

자오잔숑

자오잔슝

葉明泉

예밍첸

예밍취안

許宇文/葉宇文

슈위우원/예위우원

쉬위원/예위원

高應翔

가오잉썅

가오잉샹

曲宏彰

취홍장

취훙장

王文明

왕우원밍

왕원밍

余元介

위옌지에

위위안지에

夏美玲

시야메이링

샤메이링

馬大軍

마다준

마다쥔

許二虎

슈알후

쉬얼후

王覺

왕쥬에

왕쥐에


이 소설은 대만의 근현대사를 소재로 하고 있고 주요 인물들이 대만인이나 중국인이다. 하지만 대만 소설이 아니라 일본 소설이다. 대만인이었던 작가가 다섯 살까지는 대만에서 살다 그 이후로는 쭉 일본에서 살며 활동했기 때문이다. '히가시야마 아키라'라는 일본식 이름도 필명이다. 원래 대만인이었지만 현재는 일본인으로 사는 작가가 일본어로 이 작품을 썼다는 것이 이 소설만의 독특한 성격을 만들어냈다.

광대한 영토에서 장대한 역사를 거쳐와서인지 중국어권 소설들에서는 특유의 호방한 기세가 느껴진다. 워낙 험한 역사를 겪어왔기 때문에 웬만한 일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훌훌 털어버리는 대인의 풍모라고 할까. 그런데 이런 대륙적인 느낌이 가벼운 일본식 문체와 만나면서 무게감이 떨어진다. 번역 후기만 빼도 470여 페이지에 이르는 소설로 적지 않은 분량이다. 단순히 분량만 많은 것이 아니라 서사와 거기에 실린 메시지의 무게가 꽤나 묵직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묘사도 탄탄한데, 이상하게 가볍고 밀도가 떨어진다. 주인공의 치기 어린 10대와 20대 시절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그때의 감성을 일본 청춘물처럼 그려서일까.

'일본이라는 필터를 거쳤다'는 느낌은 일본식 문체 때문만이 아니다. 작가가 일본인 독자나 평단의 눈치를 본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대만의 근현대사는 백 년이 넘도록 대만을 식민 지배했던 일본과 떼어놓을 수 없는데, 이 책의 주요 독자는 일본인들이다. 그러니 역사 문제에 있어서 작가는 과거의 잘잘못을 분명히 가리기보다는 한 걸음 물러선다.

이 책의 중심 줄기는 주인공이 할아버지를 살해한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인데, 살해 동기는 대만과 중국의 근현대사와 밀접하게 얽혀 있었다. 수십 년 전 할아버지가 처단한 친일파 일가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 범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할아버지의 동지 쉬얼후의 아들이라고 정체를 속이고 할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그런 뒤 수십 년 동안 원수를 갚을 기회를 노리다 결국 할아버지를 죽였다. 이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나는 부분이 이 소설의 클라이막스다. 주인공은 친삼촌처럼 여겼던 사람이 할아버지를 죽인 진범이라는 것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범인은 원수의 핏줄인 주인공을 죽여야 할지 말지 갈등한다. 결국 가족으로 수십 년을 함께 살면서 쌓아온 사랑 때문에 주인공과 범인은 과거를 덮어두고 서로를 용서한다.

화해와 용서로 끝나는 결말에 감동을 받은 독자도, 평론가도 물론 있을 것이다. 국민당이든 공산당이든 친일파이든 반일파이든 서로 죽고 죽인 건 똑같다, 그럼에도 모든 원한을 끌어안는 사랑이 있었다는 것이 작가가 남기는 메시지일 것이고, 그 점이 일본 독자와 평단의 감동과 호평을 이끌어냈을지 모른다. 하지만 대만이나 중국처럼 일본의 제국주의적 폭력에 피해를 입은 나라 국민의 입장으로서는 찜찜하다. 사실 자신이 놓인 입장에서 선악을 판단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역사에서의 과오와 책임은 확실히 따져야 하지 않겠는가. 소설에서 범인도, 범인처럼 주인공 할아버지의 손에 친일파였던 가족을 잃은 사람들도 자기 가족의 친일 행적은 반성하지 않는다. 범인은 아버지가 일본인인 아내를 사랑해서 버릴 수 없었던 것뿐이라며, 자기 아버지가 친일파로서 동포들과 이웃들을 착취하고 해친 것은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다. 자신이 원수를 갚는 과정에서 할아버지의 동지 쉬얼후 일가를 죽인 것에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가 죽인 사람 중에는 열두 살 어린 소년인 진짜 쉬위원(게다가 범인은 수십 년 동안 자신이 죽인 그의 이름으로 살아왔다)과 그보다 더 어린 여동생들도 았었는데도. 오히려 할아버지가 자기 가족을 죽인 것을 반성하고 후회했을 거라고 말하는 태도는 적반하장이 따로 없다(할아버지는 친일파를 처단한 것에는 한 점 후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살생은 살생이니 자신이 그의 손에 죽는 것은 업보라고 생각했겠지). 온 가족을 잃은 원한이 깊겠지만, 자기가 죽인 쉬얼후 일가와 자기 아버지에게 핍박당한 사람들의 원한은 어떻겠는가. '왜 자기들끼리 흘려보내기로 결정하는지 모르겠다'는 어느 한국 독자의 평은 역사에 대한 반성 없이 사랑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결말에 대한 반감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소설이 수십 년의 세월과 대만, 중국 본토, 일본 세 나라에 걸친 장대한 서사를 펼치며, 파란만장한 대만 근현대사를 압축하며 평범한 대만 사람들의 생활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중국과 열대 지역을 섞은 듯한 대만만의 독특한 분위기는 텍스트만으로도 느껴진다. 이러한 장점들 덕분에 이 상은 심사위원 전원의 만장일치로 나오키상 대상에 선정되고 "몇십 년 만에 한 번 나올 만한 위대한 걸작"이라는 찬사를 들었을 것이다. 일본의 과오는 묻지 않아 일본 독자와 평단은 껄끄럽지 않았겠지만 한국 독자로서는 껄끄럽다. 그리고 주인공이 진범을 알아채는 과정에서의 논리적 비약처럼 설익은 부분도 보인다. 대만에 관심이 많은 독자로서는 대만의 근현대사를 훑어보면서 그 속에서 살아갔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보는 것은 흥미로웠지만, 나오키상 심사위원들이 보냈던 극찬을 보내기는 힘들다. 대만도 백 년이 넘게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기에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친일 성향이 강하기는 하지만, 일본어, 일본 문학이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은 대만 작가의 작품이었으면 어땠을까 한다.

P. S. 주인공의 친구 자오잔슝이 모시는 조폭 두목 가오잉샹은 대만 사투리(대만에서는 표준 중국어와 대만어를 모두 사용한다)를 쓰는 인물이다. 한국어판에서는 그의 대만 사투리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사투리가 다 섞여 있는 지역 불명의 사투리로 번역됐다. 베이스는 전라도 사투리인 것 같은데, 번역자가 전라도 사투리로 번역하려 했지만 전라도 사투리에 익숙하지 않아 이렇게 된 것인지, 특정 지역에 대한 비하로 느껴지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여러 지역의 사투리를 뒤섞어 이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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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순한 여인 / 우스운 사람의 꿈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정아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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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소설 「온순한 여인」과 영화 <당신과 함께, 당신 없이>의 스포일러 포함

지금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스리랑카 영화전을 진행하고 있다. 스리랑카는 내 친구가 몇 년 동안 봉사 활동을 하다 온 나라라 나도 마음이 쓰이는 곳이다. 스리랑카 영화전에서 어떤 영화를 볼까 영화 시놉시스들을 살펴보다, <당신과 함께, 당신 없이>라는 영화의 줄거리에 끌렸다. 스리랑카는 정부군과 소수 민족인 타밀 족 반군이 1983년부터 2009년까지 26년 동안이나 내전을 벌였는데, 이 영화는 타밀 족인 아내가 남편이 내전 당시 정부군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생기는 일을 그렸다는 거다. 게다가 원작은 도스토옙스키의 단편 「온순한 여인」이라니 더 궁금해졌다. 백수십 년 러시아의 이야기를 21세기 스리랑카라는 배경에 어떻게 맞추어 각색했을까. 그래서 영화를 보러 가기 전 도서관에서 「온순한 여인」이 실린 책부터 읽어봤다.

살인자를 찾는 데 주력하는 전개의 영화 장르를 '후던잇(Who done it)'이라고 하는데, 이 단편은 아내가 왜 자살했는지 주인공이 그 이유를 찾아가는 소설이니 '와이던잇(Why done it)'이라고 할 수 있다. 남편이 자신과 아내가 겪어온 일들을 생각하며 아내가 자살한 이유를 추론하지만, 결국은 진실을 밝혀내지 못하니 추리 소설이라기보다는 심리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속 아내가 왜 죽었는지 이해하려면 우선 소설 속 이야기를 파악해야 한다. 주인공은 퇴역한 마흔한 살 군인으로, 제대하고 나서는 전당포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전당포에 작은 패물들을 자주 맡기러 오는 젊은 여인에게 연민을 느끼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그녀에 대해 뒷조사까지 하다, 그녀가 부모를 잃고 숙모들에게 얹혀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숙모들은 입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그녀를 부유한 홀아비 노인에게 시집보내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청혼했고, 원하지 않은 결혼에서 벗어날 방법이 달리 없었던 그녀는 그와 결혼했다. 퇴역하고도 군인답게 엄격하고 절제된 생활을 하는 주인공은 아직 열여섯 살밖에 안 되는 아내에게도 검약하고 절제된 생활 방식을 강요했고, 아내에게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하지도 않았다. 남편의 사랑을 바랐던 아내는 남편의 냉담하고 엄격한 태도에 반항하게 되었다. 부부의 관계가 날로 악화되던 와중에, 남편의 옛 군인 동료가 찾아와 남편이 군에서 불명예스러운 일로 제대했다는 것을 이야기해 버렸다. 그러자 아내는 남편을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다 남편이 잠든 사이 권총을 남편의 관자놀이에 댔다. 이미 잠이 깬 남편은 아내의 그런 행동을 덤덤하게 넘겨버렸지만, 자신이 아내의 행동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키려 아내의 침상을 자신의 침상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아내가 노래를 부르는 것을 발견하고 그녀가 자신을 용서했다고 생각해 아내에 대한 사랑이 마음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남편은 아내에게 열정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며 화해하려 했지만, 아내는 남편이 자리를 잠깐 비운 사이 창문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다.

많은 비평가들은 그녀가 남편의 엄격한 제도와 정신적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자살했다, 또는 남편의 냉대에 지쳐 자살했다고 해석한다. 남편이 진심을 다해 같이 새롭게 시작해 보자고 했지만, 그녀 자신은 그런 남편에게 깊은 동정심 외에는 다른 어떤 감정으로도 답할 수 없었다고. 반면 지만지판의 한국어 번역자는 그들의 해석이 모두 틀렸다고 한다. 그들은 남성이어서 여자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라고. 남편은 그녀를 용서했고 그녀는 남편을 용서했지만, 그녀는 남편을 비난하고 총구까지 겨누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고, 남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편의 진심 어린 사랑을 확인해 행복한 마음으로 자살했다고.

여성인 번역가는 도스토옙스키를 잘 알고, 한 번이라도 진정한 사랑을 해본 적이 있고, 아내의 심리를 잘 따라가다 보면 이 해석만이 그녀의 자살에 대한 유일한 해석임을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같은 여성인 나는 비평가들의 해석이 더 납득이 간다. 자신에게 용서를 비는 남편을 보는 아내의 모습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해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던 일이 이뤄져서 행복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나 당황해하는 것으로 보였다. 번역가는 아내가 창문에서 뛰어내리기 전 하녀에게 보인 미소가 진정으로 행복해하는 미소였다며 사랑받는 여인의 미소였다고 봤지만, 그녀의 마지막 미소를 죽음으로써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기에 지을 수 있던 미소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살아 있는 한 그녀는 남편의 변덕에 운명이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열렬히 사랑 고백을 해도 나중에 또 언제 마음이 변할지 모른다. 소설 속에서 아내의 목소리는 남편이 기억하는 몇 마디의 대화밖에 나오지 않지만, 서술과 상황으로만 봐도 남편이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것이 보인다. 그런 남편을 아내가 믿고 의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편과 헤어져도 친정에는 그녀를 애물단지 취급하는 숙모들밖에 없고, 결혼 전에도 스스로 직업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취업할 길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19세기 러시아에서 이혼한 여성이 살길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으니, 그녀가 죽음을 해방구로 여길 만했다. 그래서 나는 번역가와 같은 여성임에도 이전의 남성 비평가들처럼 「온순한 여인」 속 아내는 새롭게 시작할 의지도 힘도 방법도 없다고 느꼈기에 자살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당신과 함께, 당신 없이>의 감독은 아내가 자살한 원인을 무엇으로 보았을까? 영화를 보기 전 이 점이 가장 궁금했다. 영화는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 스리랑카의 상황에 맞게 내용을 각색했기 때문에 아내의 자살 동기가 원작과는 어느 정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큰 틀 안에서는 한국어판 번역가보다는 비평가들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본다. 남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도, 새롭게 시작할 수도 없었기에 자살했다는 것.

<당신과 함께, 당신 없이> 속 남편 사라트시리(샴 페르난도)와 아내 셀비(안잘리 파틸)가 찍은 결혼 사진

영화는 생각보다 원작의 세세한 설정과 상황까지 충실하게 따른다. 남편이 퇴역 군인 출신의 전당포업자라는 것, 아내는 결혼하기 전 남편의 전당포에 작은 패물들을 자주 맡겼다는 것, 부모를 잃고 남의 집에 얹혀살면서 취업하기 위해 애썼지만 잘되지 않았고, 결국 집주인들의 등쌀에 떠밀려 늙은 부자의 재혼 상대가 될 위기에 놓였다는 것. 그래서 남편과 결혼했지만 남편의 엄격하고 차가운 태도에 상처를 받았다는 것, 남편의 옛 군인 동료 때문에 과거의 진실이 밝혀져 이들의 관계에 더 큰 위기가 생겼다는 것까지.

그런데 영화에는 스리랑카의 민족 갈등이라는 요소가 더해져, 오히려 원작보다 아내의 자살 원인은 더 뚜렷하게 읽힌다. 타밀 족인 아내는 정부군의 손에 부모님과 두 오빠를 잃었다. 그래서 스리랑카의 주류인 싱할라 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편을 경계했지만, 늙은 부자와 결혼하는 것은 더 싫었기 때문에 남편과 결혼했다. 원작처럼 나이가 훨씬 더 많긴 하지만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었으니. 그래서 마음을 열고 남편과 다정하게 지내려 했지만, 남편의 옛 군인 동료가 나타나면서 남편이 정부군이었다는 것을 알고 큰 충격을 받는다. 남편 같은 정부군이 가족들의 원수였으니까. 그래서 남편이 서랍장에 숨겨둔 권총으로 남편을 죽이려고까지 했지만, 결국 죽이지는 못했다. 그런데 화해를 요청하는 남편은 자신이 정부군에 복무하던 시절 찾아온 친구를 포함한 전우들이 타밀 족 여인을 성폭행했는데도, 그것을 숨겨주려 위증했다고 고백한다. 그것이 남편이 차마 밝히지 못했던 과거였다.

원작에서 주인공이 불명예 제대한 원인은, 군대에서 하극상을 벌인 후임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하극상이라는 것도 상사에게 불손했던 거지 군 내외의 인명을 살상하거나 군사 시설을 파괴하거나 적에게 중요한 군사 기밀을 빼돌리는 등의 중대한 과실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니 현대인 독자로서는 왜 그렇게 사소한 일로 제대당한 건지, 아내는 왜 그런 사소한 이유로 남편을 죽이려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영화 쪽에서 아내가 남편을 죽이려 한 이유가 더 이해하기 쉬웠다. 자기 부모형제를 죽인 자들과 전우였던 남편이 죽일 만큼 증오스러웠다는 것은 납득이 가니까.



영화에서 남편 사라트시리는 아내 셀비에게 먼저 다가가 새롭게 시작하자고 하지만, 셀비는 그의 마음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데 21세기 스리랑카는 전쟁의 충격으로 아직도 혼란스러운 상태지만, 19세기 러시아보다는 이혼한 여성이 살 길이 더 넓게 열려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왜 자살했을까? 영화에서도 남편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었잖아. 그랬다면 나는 당신을 웃으면서 보내줬을 거야." 남편의 기억 외에는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원작 속 아내와 달리, 영화 속 아내는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은 내게 온전한 사랑을 바랐지만, 나는 그걸 줄 수 없었으니까." 마음에는 남편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다 해도, 아내는 자신의 가족들을 죽인 자들의 전우이자, 자신의 동포가 강간당하는 것을 방치했던 방관자를 사랑한다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랑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 그런 자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그를 사랑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웹툰 <낮에 뜨는 달>에서 자신의 부모를 죽인 적국의 장군을 사랑했지만 결국 그에 대한 양가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를 죽였던 여주인공 한리타의 마음이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한리타는 자신이 아닌 상대를 죽였다는 것이 다르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영화 속 아내가 자살한 원인은 뚜렷하게 읽혔다.

「온순한 여인」은 <당신과 함께, 당신 없이>가 만들어지기 전에 1969년 프랑스, 2014년 베트남에서 이미 영화화된 적이 있다. 그 두 영화에서는 아내가 죽은 원인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궁금해진다. 어느 쪽이든 나는 한국어판 번역자가 단언하는 것과 달리, 단 하나의 진실로 명확하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성의 마음으로 생각해 봐도 나는 비평가들과 같은 방향으로 그녀의 죽음을 해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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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 한가람 대본집 1~2 - 전2권
한가람 지음 / 시공사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 원작, 드라마 스포일러 포함

드라마는 5년 전에 끝났고, 이 대본집도 5년 전에 샀다.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시간은 이 드라마의 시간적 배경일 뿐만 아니라 서사의 중심축이기도 하다. 오랜 겨울 속을 살아가다 봄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니까. 그래서 매년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무렵에 읽겠다고 해놓고서, 5년 만에야 이 책을 다 읽었다. 1권은 2월에, 2권은 바로 며칠 전에. 달력으로는 봄이 된 지 이미 한 달이 넘어서야 다 읽었지만 봄은 이제야 온 것 같으니 적절한 때에 다 읽은 것 같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다. 4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단행본 한 권을 16부로 만들기 쉽지 않았다고 드라마 작가는 서문에서 하소연한다. 그런데 드라마 작가가 고심해서 만든 결과는 꽤 괜찮았다. 남주인공 은섭의 양부모와 양여동생, 은섭의 친구 장우의 첫사랑, 여주인공 해원의 이모 명여의 오랜 연인까지 드라마 작가가 새롭게 만들어낸 캐릭터들은 원작 속 캐릭터들과 이질감 없이 어울린다. 실제로 북현리(드라마의 주요 배경)에서 살고 있는 인물들처럼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캐릭터들과 부딪히고 함께 울고 웃으며 더 풍성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16부작이니 원작에 있던 등장인물들에게도 새로운 이야기와 새로운 대사들, 행동들이 많이 덧붙여졌는데, 원작에서도 당연히 그렇게 행동하고 말했을 것처럼 원작의 결을 그대로 가져왔다.

지문마저 원작처럼 결이 곱다. 수채화 물감을 묻힌 붓으로 한 터치 한 터치 그려나가듯, 매일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눈이 내리고 서서히 봄이 오는 북현리의 풍경을 한 문장 한 문장 그려나간다. 엄마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부터 까르르 웃으며 걸어가는 학생들, 시장에서 각자 열심히 일하는 상인들까지 배경 속의 엑스트라로 나오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모습도 빠뜨리지 않는다. '이 글을 쓰는 동안은 북현리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했다'는 작가의 말이 허언은 아니다.

책의 만듦새도 드라마의 내용에 맞게 곱고 해사하다. 원작 소설을 출간했던 시공사에서 드라마의 대본집도 만들었는데, 원작 소설처럼 표지와 속표지, 본문도 파스텔 톤의 색들로 꾸몄다. 본문은 그냥 흑백으로만 인쇄해도 될 텐데, 등장인물 소개와 차례, 본문의 장면 번호, 대사, 지문을 모두 다른 색으로 인쇄했다. 본문의 글씨 색깔들도 모두 파스텔 톤이라 어느 것 하나 튀지 않는다. 드라마 전체의 톤에 맞춰 세심하게 만든 것이 보인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새롭게 만들어낸 캐릭터 중 명여를 질투하는 베스트셀러 작가 심영춘은 자신의 성적 매력만 내세우는 납작한 캐릭터가 되었고, 주인공들의 친구 민지연은 워낙 등장인물들이 많아 본방에서는 사실상 이름도 없는 친구 1이 되었다. 게다가 은섭과 친삼촌의 관계를 마무리하기 위해 정작 책방 주인인 은섭이 책방의 첫 이벤트에 참여도 못 한 것으로 각색한 것은 아쉽다. 은섭의 책방이 원작과 드라마에서 갖는 의미를 생각하면, 은섭이 빠져서는 안 됐다. 무엇보다 가정폭력범인 아버지의 죽음의 진실을 알고 나서 해원이 외친 대사 '그래도 아빠잖아!'는 지금 봐도 어이가 없다. 아무리 자신에게는 다정했다 하더라도 엄마와 이모에게 어떤 폭력을 가했는지 다 들었는데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평소에는 원작을 그다지 따르지 않지만 이번에는 원작에 충실하려 했다고 드라마 작가는 말했는데, 각색을 하다 삐끗한 지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원작 소설뿐만 아니라 이 드라마 또한 사랑하는 이유는, 드라마 전반에 인간에 대한 애정과 믿음이 진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떤 상처를 입었어도 그 사람이 행복을 찾길 바라는 애정, 겨울이 아무리 춥고 길었어도 언젠가는 봄이 올 거라는 믿음. 행복은 애쓰고 애써야 겨우 얻을 수 있으며 쉬이 곁에 있어주지도 않지만, 살아간다면, 노력해 간다면 행복한 날이 올 수 있을 거야. 해원과 은섭의 이 마지막 내레이션과 '당신은 묵묵히 오늘을 살아가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는 제작진의 마지막 인사는 5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있다. 드라마 작가는 '이 드라마가 이 모든 겨울에 떠오르는 드라마이길, 겨울이 오면 이 드라마가 떠오르고 저뿐만 아니라 이 드라마를 보시는 모든 분들이 그러하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나는 겨울마다 이 드라마를 떠올린다. 그리고 봄을 맞는다.

Posted by 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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