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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바비즌 - 여성의 독립와 야망, 연대와 해방의 불꽃이 되다
폴리나 브렌 지음, 홍한별 옮김 / 니케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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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1929년 출간된 수필집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에서 여성이 사회적 역량을 발휘하려면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하며 자기만의 독립적 공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자기만의 방』이 출간되기 1년 전부터 1981년까지 53년 동안 오직 여성들에게만 자기만의 방을 제공한 여성 전용 호텔이 있었다. 『호텔 바비즌』은 뉴욕에서 여성 전용 숙박 시설로 명성이 높았던 ‘호텔 바비즌’과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들, 그들을 둘러싼 시대를 망라하는 역사책이다.

호텔 바비즌이 문을 열었던 1920년대는 미국이 1차 세계대전의 전쟁 특수로 경제적 번영을 누렸던 호황기였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많은 여성들이 일하기 위해 대도시로 몰려왔다. 도시로 나간 딸이 여성 전용 호텔에서 묵는다고 하면 부모들은 안심했고, 도시로 온 여성 본인도 여성 전용 호텔에서는 안전한 자기만의 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수요 때문에 대도시에는 여성 전용 호텔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호텔 바비즌도 그중 하나였다. 시대적 상황이 변화하면서 다른 여성 전용 호텔들은 하나둘 문을 닫았지만, 호텔 바비즌은 50여 년 동안이나 여성 전용 호텔로 건재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여성 전용 숙박 시설로 존재할 수 있었을까? 호텔 바비즌은 젊고 매력적인 여성들이 머무는 공간이라는 이미지 때문이었다. 젊은 여성들은 독립을 향한 열망과 더 빛나는 존재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뉴욕으로 올라와 바비즌에 머물렀다. 배우 그레이스 켈리부터 타이태닉호 사고 생존자이자 여성 참정권 운동가인 몰리 브라운, 작가 실비아 플라스까지 한 시대를 빛낸 유명 여성 인사들이 한때 바비즌에서 살았다. 결국 이름을 널리 알리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각자의 꿈을 품고 뉴욕으로 왔던 수많은 여성들도 바비즌에 머물렀다. 저자는 투숙객 한 명 한 명의 일상부터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 시대적 상황까지, 미시사와 거시사를 넘나들며 20세기 미국 여성들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이 책은 바비즌에 도착해서 프런트 데스크를 통과해 자기 방에 들어가는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 뒤로 각자 다른 야망을 품었지만 같은 희망을 품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누군가의 딸이나 아내, 어머니로 머무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이 이곳에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다. 비서학교의 학생들부터 모델, 배우, 여성 잡지의 객원 편집자들까지 호텔 바비즌에 머물렀던 여성들은 각자의 분야에 자리 잡는 것을 넘어서 더 큰 명성과 성공을 얻기 위해 분투한다. 각자 분투하는 것을 넘어서, 고민을 들어주고, 성공을 축하하고, 실패를 위로하며 연대한다. 감정적인 연대를 넘어서서 일자리를 찾아주거나 함께 사업체를 세우며 실질적으로 힘을 더해준다. 부제 그대로 호텔 바비즌에서 일어났던 ‘여성의 독립과 야망, 연대와 해방’의 드라마가 독자들의 눈앞에 다시 펼쳐진다.

그러나 저자는 호텔 바비즌에 머물렀던 여성들의 희망만을 그리지 않는다. 희망만을 이야기하기에는 그녀들을 둘러싼 현실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경제 대공황 시기(1929년~1939년)에는 여성들이 남성 가장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며 눈총을 받았고, 1950년대에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백인 남성들이 권력을 휘두르면서 결국 여성의 종착지는 가정이라고 압박했다. 여성들의 평균 혼인 연령은 낮아졌고, 여성들 자신도 결혼이 안정적인 삶을 보장하는 길이라 믿었다. 바비즌의 투숙객 중에도 바비즌에 머물면서 자기 일을 하는 시기를 단지 결혼생활 전의 과도기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자신의 삶에서 가장 빛나던 시기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결혼하고 나서 다시 가정에 얽매이고 야망이 꺾인 투숙객들의 후일담은 독자들을 슬프게 한다. 저자는 그렇게 시대의 구속과 한계에 부딪히고 좌절해야 했던 여성들을 기리는 데 한 챕터를 할애한다. 이 챕터에서 그녀들을 향한 저자의 깊은 애정과 슬픔이 느껴진다.

책 속의 여성들이 시대의 한계에 부딪혔다면, 저자는 호텔 바비즌 자체의 한계에 부딪힌다. 호텔 바비즌은 여성 운동 단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업 시설이었기 때문에, ‘젊고 매력적인 백인 중산층 여성’을 주 고객으로 삼고 그중에서도 성공한 유명인사들로 호텔을 홍보했다. 그러니 이 책에서 다루는 여성 중 대부분이 젊은 백인 중산층 여성일 수밖에 없다. 그 한계를 넘기 위해 저자는 젊지 않거나 백인이 아니거나 가난한 투숙객들의 삶도 적은 분량으로나마 다루고 있다. 여성지 『마드무아젤』의 객원 편집자 공모전 지원자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스펙을 지니고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선발되지 못할 뻔했고, 선발되고 나서도 미묘한 차별을 겪어야 했던 바버라 체이스의 사례를 통해 미국 역사 속에서 지워진 비백인 여성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호텔의 이름을 빛낸 유명 투숙객들과 달리 혼자 쓸쓸히 방 안에서 자살한 투숙객들과, 어떤 성취도 이루지 못하고 노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구석의 작은 객실에 머무는 투숙객들은 호텔 바비즌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희망도 야망도 잃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투숙객들처럼 호텔 바비즌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쇠락했다. 새로운 여성 운동은 여성을 격리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여성 전용’은 낡은 개념이 되어 1981년부터 남성 투숙객을 받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 들어 바비즌은 콘도미니엄으로 재개장했지만 바비즌이 상징했던 한 시대는 분명히 끝났다. 호텔 바비즌은 지금 ‘여성 전용 숙박 시설’로서의 정체성을 잃었고, 가장 빛나던 시기에도 (주로) 백인 여성에게만 자기만의 방을 내어주었다는 한계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여성들이 자기만의 방을 갖고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주도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여전히 여성들에게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기에, 호텔 바비즌은 여성이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의 좋은 선례로 기억되고 후대의 여성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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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로운 역사 콘서트 - 역사가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 50
그레그 제너 지음, 서종민 옮김 / 상상스퀘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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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책의 제목이 왜 『경이로운 역사 콘서트』일까요?

A왜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 정확한 이유는 한국어판 편집자와 번역자와 출판사가 알겠지만, 저는 짐작이라도 해보겠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역사학자에게 물어보세요(Ask a Historian)』입니다. 부제는 '역사가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 50'으로 영어 부제 '당신이 알고 싶었던 것에 대한 50개의 놀라운 답(50 Surprising Answers to Things You Always Wanted to Know)'과 비슷합니다. 부제로 이 책의 정체를 알 수 있죠. 영국의 대중 역사가인 저자가 사람들에게 받은 역사 관련 질문 중 50개를 가려서, 그에 대한 답변들을 모아 책으로 만든 겁니다. 사실 원제에도 '콘서트'라는 단어는 없고 딱히 '콘서트'라는 단어를 넣을 이유도 없는데 제목을 'ㅁㅁ 콘서트'로 짓는 책들이 너무 많다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전작의 북 콘서트를 열려다 코로나 팬데믹이 오는 바람에 취소하고, 온라인 설문으로 받은 질문들을 토대로 이 책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북 콘서트 대신 만든 책이니 '역사 콘서트'라는 제목을 붙이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Q. 이 책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A무엇보다 재밌다는 겁니다. 내용이 흥미로운 거냐, 그 내용을 전달하는 저자의 입담이 좋은 거냐, 묻는다면 둘 다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후자가 가장 큰 매력이자 강점입니다. 저는 제가 영미권 유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걸어다니는 어원 사전』과 『이상한 나라의 여행기』에 이어 이 책에서도 저자가 웃으라고 쓴 문장마다 빵빵 터졌으니 사실은 제가 영미권 유머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니면 머나먼 한국까지 번역 출간될 정도면 자국에서부터 책을 꽤 많이 판 저자일 테니, 저자의 글 솜씨와 유머 감각이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을 정도로 뛰어나다고 봐야겠죠. 다른 번역자가 번역한 전작 『소소한 일상의 대단한 역사』(와이즈베리, 2017)는 한국인 독자들로부터 '쓸데없는 농담'에 '영국인만 웃길 것 같은 유머'라는 평을 얻었는데, 저자의 유머 감각이 몇 년 사이에 일취월장했거나 이 책의 번역자의 센스가 좋은 것 같습니다. 전작과 달리 이 책은 이야기하는 듯한 경어체로 번역돼서 문화적 차이로 생기는 이질감을 완화해 준 것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반말로 하면 불쾌할 이야기도 정중한 말투로 하면 좀 나으니까요. 사적인 얘기도 꽤 많이 하는 편인데(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어머님이 프랑스인이고 저자의 사춘기 시절 중2병 때문에 꽤 고생하셨다는 것과 저자의 어린 딸이 유인원처럼 음식을 바닥에 내리쳐 먹는 걸 좋아한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자가 멜 깁슨을 무척이나 싫어한다는 것도요) 그게 꽤 웃긴 데다가 역사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거슬리지 않습니다. 남의 애 얘기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는 저에게도 거슬리지 않았지만,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을 것 같긴 합니다. 일단 저는 호입니다.

웃기는 책이어서 흥미 위주의 엽기적이고 선정적인 일화들만 모아놓은 책일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알찹니다. '시대 이름은 누가 정하나요?'라는 질문에서는 역사학의 방법론에 대해 꽤 진지하게 고찰하고, '영화 속에서 역사적으로 잘못된 점이 보이면 짜증이 나시나요?'라는 질문에는 "정확성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대중 문화를 검열해서는 안 되지만, 백인 우월주의와 신나치주의 같은 해악을 낳을 수 있는 위험한 역사 왜곡은 경계해야 된다"는 균형 잡힌 답변을 제시합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들 중 가장 부자였던 사람은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에는 당시의 재화 가치뿐 아니라 당시 개인의 평균 수입, 국가 전체 GDP에서 그 사람의 재산이 차지했던 비율 등 다양한 기준으로 재산을 추정해 보는 등, 신중하고 꼼꼼하게 답변을 도출해 내고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영국사와 서양사 위주로 답변하고, 잘 모르는 동양사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 자세도 좋다고 봅니다. 공자님도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과거에 사람들이 어떤 억양으로 말했는지 알 방법이 있나요?'에 대한 답변에서는 영어의 변천사를 꽤 훌륭하게 요약 정리했습니다. 제1세계의 백인 남성, 대영 제국의 후예치고는 자국과 유럽 국가들이 저지른 과실도 여과 없이 드러내고 비난하고, 정치적 올바름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맘 편히 읽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죠.

Q. 이 책의 아쉬운 점은 무엇인가요?

A많이 거슬린다기보다 '이건 좀'이라고 느낀 부분이 몇 군데 있습니다. 하나는 일본의 '오하구로(이를 검게 물들이는 풍습)'를 이야기하는 부분인데, "게이샤를 비롯한 특권층 여성이 하얗게 칠한 얼굴과 검게 물들인 눈썹, 붉게 칠한 뺨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게이샤를 비롯한 특권층 여성"이라뇨. "게이샤와 특권층 여성들"이겠지요. 일본의 게이샤나 한국의 기생이나 사회에서는 특권층은커녕 낮은 계층이었지만 남성들을 접대하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특권층 여성들만큼이나 화려하게 치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관한 글을 쓸 때는 전치사 하나도 조심해서 써야 합니다.

그리고 봉화는 사실상 직접 불을 질러 울리는 화재 경보기나 다름없었고, 봉화로는 한 가지 소식밖에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 후한 시대에는 불의 개수에 따라 5단계로 적의 수와 현재 위치를 알렸고, 조선의 봉수 체계에서도 1개부터 5개까지 불의 개수로 평상시/적군 출현/적군 국경 접근/적군 국경 침입/적군과 교전 중이라는 다섯 가지 상황을 알렸습니다. 동양사여서 저자가 잘 몰랐다고 하기에는 서양에서도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플리비오스가 알파벳을 보낼 수 있는 봉화 체계를 만든 예가 있습니다. 저자나 이 책을 감수한 다른 역사학자들이나 이 점을 놓친 것 같은데, 신도 책의 모든 오류를 잡아낼 수는 없다니 이해는 합니다.

번역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로마 제국의 황후들이었던 아그리피나와 메살리나를 '황후'로 번역해야 하는데 '여제'로 번역한 부분, 무게 단위 '그레인'(1그레인=약 64.8mg)을 '밀알'로 번역한 것 같은 부분, 메리 1세가 다섯 명의 양어머니들을 거쳐야 했다는데 '계모'가 더 적절해 보이는 부분, '재산을 마 단위로 전시한다', '비밀 붉은 막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저자의 유머 감각을 대체로 잘 살렸으니 이런 소소한 오류들은 넘어갈 만합니다.

Q.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질문은 무엇인가요?

A '가장 고증이 잘된 역사 영화는 무엇인가요? 영화 속에서 역사적으로 잘못된 점이 보이면 짜증이 나시나요?'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역사학자들에게 하는 흔한 질문이긴 한데, 좋아하는 역사 드라마들이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일 때마다 고민했던 지점들을 저자가 명확하게 짚어줬거든요. 과거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영화가 <몬티 파이튼의 성배>라는 저자의 답변도 기가 막혔습니다. 중세 영국이 배경인데 살인마 토끼가 등장하고 평범한 농민이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논하는 황당한 영화인데, 저자는 일부러 틀린 이야기를 하려면 그에 앞서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영국인다운 유머 감각이 드러나는 선정이라고 느꼈습니다. 이런 멋진 답변을 이끌어 낸 질문이어서 마음에 듭니다.

Q. 이 책에서 가장 황당했던 질문은 무엇인가요?

A '앤 불린은 정말 유두가 세 개였나요?'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질문자의 역사 선생님이 이런 이유로 앤 불린이 재판에서 마녀 선고를 받았다고 했답니다. 아마 초중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이었을 텐데 아이들에게 이런 선정적이고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건가요. 저자는 확실히 앤 불린의 유두는 세 개가 아니었고, 살아생전 마녀로 몰린 적이 없다며, 앤 불린에 대한 편견과 낭설들을 반박하고 더 공정한 시각으로 그녀를 바라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칭기즈 칸은 정말 가는 데마다 나무를 심었나요?'라는 질문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듣고 한 질문인가 했는데, '칭기즈 칸은 친환경 군주'라는 농담을 듣고 오해한 것 같습니다. 칭기즈 칸은 나무를 심어서가 아니라 환경 파괴의 주범인 인간들을 수없이 죽여 '친환경 군주'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의 호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칭기즈 칸이 죽인 사람 수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칭기즈 칸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는 요소 하나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칭기즈 칸의 방식이 지구를 구하는 최선의 방법은 아닐 거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Q. 이 책에서 가장 유용했던 답변은 무엇인가요?

A'최초의 석기는 단순한 돌멩이와 어떻게 구분하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습니다. 저자는 석기가 돌멩이와 구분되는 특징을 여섯 가지로 정리해 주었습니다. 제가 고고학자는 아니지만 예전부터 저도 알고 싶었던 것이라 알게 되니 후련했습니다. 다음에 박물관에 갔을 때는 이 특징들이 석기에서 보이는지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Q. 저자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 있다면?

A "가족들과 이야기하다 역사에 관해 논쟁이 일어날 때 어떻게 해결하시나요?"입니다. 본문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했고, 사춘기 시절 아쟁쿠르 전투(백년전쟁 당시의 유명한 전투)를 놓고 어머니와 신경전을 벌였다고 했습니다. 아마 심정적으로는 영국 쪽에 기울어져 있는 거 같은데, 지금은 역사에 대해 어머니와 이야기할 때 어떻게 논쟁을 해결하는지 궁금합니다. 원만한 해결법이 있다면 한국과 일본 혼혈 가정처럼 역사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다문화 가정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 독자들을 위한 Q & A

이 책에 실린 질문들을 한국 버전으로 수정했고, 답변은 제가 자료를 찾아서 작성했습니다.

Q.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월요일은 언제였나요?

A요일로서의 월요일이라면 갑오개혁으로 태양력과 요일제가 도입된 1896년 1월 7일(1896년 1월 1일 수요일로 태양력과 요일제를 시작했습니다)이지만, 한 주기의 출근 첫 날로 따지자면 관료제가 시작된 삼국시대의 어느 하루가 아닐까 합니다. 관리 외의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 쉬었는지 알 수 없지만, 관리들은 회사원처럼 정해진 주기 동안 일하고 정해진 휴일에 쉬었으니까요. 조선시대 관료들은 매달 1, 8, 15, 23일에 쉬었다니 일주일에 한 번은 쉬었던 셈입니다.

Q. 20세기 이전의 한국 여성들은 생리를 어떻게 처리했나요?

A 조선시대에는 '개짐'이라는 천 생리대를 착용했다고 합니다. 개짐은 달거리포, 월경포로도 불리며 주로 하얀 광목 천으로 만들었습니다. 딸이 초경을 시작하면 어머니가 개짐을 물려주며 어떻게 사용하고 빨고 관리하는지 설명해 줬습니다. 그 이전에도 비슷한 생리대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한국에서 지금과 같은 형태의 일회용 생리대가 보편화된 것은 1970년대가 되어서였습니다.

Q. 한국에서 거울이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인가요?

A청동기 시대에 청동 거울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유리 거울은 1883년 인천에 판유리 공장이 설립되면서부터 사용되었습니다.

Q. 한국에서 청각장애인들이 수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인가요?

A이전에도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하긴 했지만 수어를 사용해 대화를 하기 시작한 건 1909년 최초의 농학교인 평양맹아학교가 설립되었을 때입니다. 미국의 선교사인 로제타 셔우드 홀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농아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홀은 한국인 이익민과 그의 조카를 중국 최초의 농학교인 체후농학교에서 연수하게 했고, 이익민과 조카는 농학교를 운영하며 수어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 뒤 1913년 조선총독부가 세운 농학교 제생원에서는 일본 수어를 사용했지만 1935년에는 이창호 목사가 평양에 개교한 평양광명맹아학원에서 학생들에게 조선 수어를 가르쳤습니다. 독립 이후에는 1982년 국내 최초의 표준 수화 사전이 만들어졌고, 1991년에는 교육부에서 한글식 표준 수화를 발행했습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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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보는 인류의 흑역사 - 세상에서 가장 불가사의하고 매혹적인 폐허 40
트래비스 엘버러 지음, 성소희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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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역사'는 아직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정식 한국어 단어는 아니고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일'을 의미하는 인터넷 속어다. 그래서 책의 제목만 보면 인류의 온갖 실수와 과오의 흔적을 담은 지도들이 담긴 책인가 싶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마흔 곳의 폐허는 누군가의 과오라기보다는 역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나 자연 환경의 변화 때문에 그 쓸모를 다 하고 버려진 곳들이 대부분이다. 학교에 무단 결석을 했다는 이유로 열네 살 소년이 50대가 될 때까지 가둬놨던 레녹스성 병원이나 가문의 이름에 먹칠을 했다는 이유로 젊은 여성들을 죽을 때까지 가둬놨던 아캄펜섬처럼 '흑역사'의 의미에 딱 맞는 장소들도 있긴 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것은 인류의 과오보다는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장소들의 쇠락이다. 원제도 '잊힌 장소들의 지도책Atlas of Forgotten Places'니 '흑역사'라기보다는 '쇠락의 역사''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아마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흑역사'라는 강렬한 어감의 단어를 제목에 넣은 것 같다.


  '지도책'이라는 원제에 걸맞게 각 장소의 세부 지도는 꽤 꼼꼼하게 그려져 있다. 그 장소의 과거 구조와 현재 구조, 사라진 건물과 남아 있는 건물, 장소가 있는 곳의 지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특히 '루스벨트섬(구 블랙웰섬)'의 세 시기 지도를 나란히 놓아 이 섬에서의 변화를 직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한 페이지가 인상적이다. 각 장소의 현재 모습들을 담은 사진들에서는 폐허 특유의 스산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영미권 논픽션 저자들이 흔히 그렇듯 이 책의 저자도 유머 감각과 서정성이 섞인 문체로 쉽고 재미있게 책 속 폐허들에 얽힌 역사를 설명한다. 예쁜 외국 풍경도 보고 싶고 교양도 쌓고 싶다면 가볍게 읽기 좋다. 이 책의 원서가 2021년에 출간되었으니 팬데믹이 한창이었던 그 시기의 독자들로서는 여행을 못 가는 대신 이 책으로 대리만족을 했을 것이다. 이제 해외여행이 가능해졌으니 이 책으로 새롭게 알게 된 장소들에 가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다만 아주 풍부한 볼거리, 이야깃거리를 기대했다면 아쉬울 수 있다. 한국어 번역판 기준으로도 300여 페이지밖에 안 되는 책에서 마흔 곳이나 되는 폐허를 이야기하니 아주 깊이 있게 각 장소를 들여다보진 않는다. 텍스트만으로는 3, 4페이지 정도밖에 되지 않아 '이게 끝인가' 싶은 챕터들도 있고, 사진이나 지도가 기대한 것보다 그렇게 풍부하지 않다는 평도 있다. 제목을 보고 인류의 온갖 추악한 면모를 이 책으로 보겠다고 기대하거나 페이지마다 이야기와 풍경들이 넘쳐날 거라고 기대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읽는다면, 충분히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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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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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라고 하면 보통 전황이 변화해 가는 과정을 중심으로 그 전쟁을 분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사 책에는 전쟁 당사자 양쪽이 어디에 진영을 두었고 어느 방향으로 진격하고 후퇴했으며, 어디에서 승리했고 어디에서 패배했는지 표시한 지도들이 가득 실려 있다. 양쪽이 어떤 무기를 사용했으며 그 무기가 얼마나 강했는지, 어떤 전략이, 어떤 전투가 승패를 판가름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 근현대사 연구자 박태균 교수의 저서 베트남 전쟁에서 주목하는 것은 베트남 전쟁의 전황이 아니다.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게 만들고 지속되게 한 국내외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과 베트남 전쟁이 이후의 역사에 남긴 의미다.

 

저자는 왜 베트남 전쟁의 진행 과정보다는 베트남 전쟁을 둘러싼 역사의 큰 흐름과 베트남 전쟁이 역사에서 지니는 의미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을까? 베트남 전쟁에 관한 역사적 기억이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특정한 방향으로 남아 있어, 그 외의 중요한 기억들이 잊히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에게 베트남 전쟁에 관한 역사적 기억은 베트남 전쟁 특수가 한국의 경제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는 영광스러운 기억이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 실린 베트남 전쟁 관련 서술에서 전쟁 특수가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 베트남 전쟁을 전쟁 특수로 기억하는 것과 달리,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실패한 전쟁으로 기억한다. 잘못된 결정으로 시작해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전술로 싸워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패배한 전쟁. 이 두 역사적 기억의 간극에서 우리가 놓친 것은 무엇일까? 저자가 찾는 것은 우리가 놓친 중요한 기억들이다.

 

저자는 우선 베트남 전쟁이 시작될 당시의 미국과 한국의 국내외 정황을 살펴보면서, 미국이 왜 베트남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한국이 왜 베트남 전쟁에 파병하기로 결정했는지 각자의 동기를 분석한다. 그런 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의 지지부진한 공격과 미군과 한국군 내의 불평등, 참혹한 민간인 학살, 전쟁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보상 등 베트남 전쟁의 그림자를 살펴본 뒤, 베트남 전쟁이 이후의 역사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우리가 베트남 전쟁에서 얻어야 할 진짜 교훈은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참전자의 증언부터 관련 연구서, 논문부터 미국과 한국의 정부 문서에 이르기까지 10여 년 동안 모은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했고, 미국과 한국,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양쪽의 공과를 밝히고 있기에 이 책의 신뢰도가 높아진다. 베트남 전쟁 자체를 넘어서서 베트남 전쟁이 있게 한 역사적 흐름과 베트남 전쟁이 역사에 남긴 영향을 살펴보기에, 독자들은 베트남 전쟁이 일어났던 시기와 그 전후 시기의 한국사와 세계사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된다.

 

저자가 생각하는 베트남 전쟁은 시작부터 잘못된 전쟁이다.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통킹만 사건부터 사실은 전쟁의 명분이 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사건이었는데 더 큰 군사적 충돌로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 정부와 한국 정부는 공산주의로부터 자유세계를 지키기 위해, 한미동맹을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해, 국가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하고 파병했다고 하지만 베트남 전쟁으로 과연 그 목적을 이루었을까? 조목조목 짚어본 뒤 저자가 내린 결론은 아니다이다. 미국은 베트남 내의 정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전쟁을 시작했고 전쟁 중에도 잘못된 전술을 펼쳤기에 그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도 제대로 된 전공은 세우지도 못하고 철수했고, 한국은 조금이라도 더 이익을 얻어내려 철수를 미루다가 애꿎은 군인들만 희생시켰다. 양국에서 부유층, 고위층은 베트남전에 직접 참전하길 회피해 사회적으로 그보다 낮은 계층에 있던 사람들이 베트남으로 향하게 되었다. 고엽제 후유증과 PTSD에 시달리는 참전 군인들은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북베트남군의 포로가 되었는데도 한국군 중에는 포로가 한 명도 없고 실종자는 모두 탈영자들이라며 한국 정부가 외면했기에 고국으로 끝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까지 있다. 사회 한편에는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다. 그런데도 전쟁 당시부터 반전 여론이 거셌으며 베트남 전쟁을 하기로 한 미국 정부의 결정에 문제가 있었다고 대통령들이 인정한 미국과 달리, 아직 한국에서는 이러한 전쟁의 그림자들은 가려져 있다.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들의 수고와 희생, 그로 인해 얻은 국익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조국과 가족들에게 헌신했다. 그들만을 가해자라고 나무라는 것도 아니다. 그들을 전쟁의 가해자로 만든 것은 국가라고 저자는 분명히 말한다. 한국 정부는 이길 수 없는 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생명을 잃게 했기에, 그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참전자들에 대한 보상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고. 미국 대통령들은 미국 정부의 결정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정부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그곳에 갔던 모든 사람들은 애국자이며, 그들이 나라를 위해 한 노력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고, 이들에 대한 명예 회복과 보상을 위해 국가는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한국 정부는 공산주의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자주국방을 추구해야 한다고만 특별 담화에서 입장을 밝히고, 참전 군인들에 대한 명예 회복과 보상에 힘쓰지 않았다. 저자가 바라는 것은 베트남 전쟁의 그림자를 직시해 전쟁 특수에만 주목하는 반쪽짜리 기억을 온전한 역사적 기억으로 바꾸고,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이 저지른 과오를 철저히 반성하며 이러한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저자는 국민이 지키고 싶은 정부가 되는 것이 곧 안보라고 말한다. 또다시 냉전 논리와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지지 않고, 국민을 지켜주고 국민에게 신뢰를 주어 국민 스스로가 지키고 싶은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베트남 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진정한 교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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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아누운 한국사 - 요통부터 번아웃까지 병치레로 읽는
송은호 지음 / 다른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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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고 재미있는 역사책을 읽고 싶으시다고요. 그럼 이 책은 어떨까요. 열한 명의 역사 인물들이 앓았던 병을 진단하고 그에 대한 약을 처방하는 책입니다. 저자는 각 인물이 어떤 질병을 겪었는지, 그로 인해 역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를 살펴보고, 그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합니다. 책을 읽을지 말지 판단하시는 데 도움이 되도록, 이 책의 효능과 주의사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독서 시 효능

이 책의 효능을 한 마디로 말하면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두 가지입니다. 글 자체의 재미와 지식을 쌓아가는 즐거움이죠.


같은 이야기를 해도 재미있게 하는 사람과 재미없게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책의 저자는 전자입니다. 서문과 목차만 읽어도 무슨 이야기일까 궁금해지고, 각 챕터의 도입부는 소설처럼 이야기를 풀어내 독자들은 쉽게 글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각 챕터 앞에는 그 챕터에서 다루는 인물에게 주는 처방전이 있는데, 챕터의 내용을 명쾌하고 발랄하게 요약해 읽는 재미를 더합니다. 처방전 페이지를 약국에서 주는 약 봉투 모양으로 디자인해서 더 유쾌합니다.


각기 다른 두 분야를 접목시킨 책은 어느 한 분야로 치우치기 쉬운데, 이 책은 역사와 약학의 균형이 좋습니다. 역사가 약학에, 약학이 역사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어 역사 지식도 약학 지식도 함께 쌓을 수 있습니다. 각 챕터의 주인공과 같은 병을 앓았던 세계사 속 인물의 이야기도 챕터 끝마다 부록으로 넣어서 세계사 지식도 덤으로 얻어가게 되고요. 그런데 아무래도 저자가 약학 전공이다 보니 약학 부분이 좀 더 탄탄하긴 합니다. 저처럼 뼛속까지 문과인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병의 증상과 그 원인, 그 병을 치료하는 약과 치료법의 원리를 쉽고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작년에 나온 책이라 최근의 연구 결과, 신약 개발 현황 같은 최신 정보도 담겨 있고요. 시간이 지날수록 시의성이 떨어지긴 하겠지만 이건 어느 책이나 마찬가지겠죠.


또 하나의 효능은 공감입니다. 고름이나 이질, 결핵처럼 현대에는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으로 죽은 역사 인물들도 있지만, 지금의 우리도 쉽게 걸릴 수 있는 병에 시달렸던 역사 인물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거든요. 책을 읽으면서 생존을 위해 늘 긴장 상태로 살면서 불안장애와 불면증에 시달렸던 정조, 우울증으로 삶의 의욕을 잃었던 박지원, 스트레스 때문에 과민성 대장증후군에 시달렸던 순종 등의 역사 인물과 우리 자신을 겹쳐 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역사의 흐름을 결정지었거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위대한 인물들도 우리처럼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을 가진 인간이었고, 그래서 병에 걸리고 고통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결국 자신만의 업적을 남기고 역사를 만들었죠. 그 사실이 의학이 발달한 현대를 살면서도 현대인이어서 겪을 수밖에 없는 스트레스와 불안감, 운동 부족, 업무 과다 등으로 어떤 면에서는 병에 더 취약해진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걸 안다고 해서 우리에게 스트레스와 병을 안겨주는 환경과 요소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사람은 작은 위로로도 살아갈 힘을 얻어갈 수 있으니까요.

 

독서 시 주의사항

그런데 서로 다른 두 분야를 접목한 책을 읽을 때마다 걱정되는 건 저자의 전공 분야가 아닌 분야입니다. 이 책에서는 역사가 저자의 전공 분야가 아니죠. 역사의 경우 역사적 사실을 옛날이야기처럼 쉽고 재미있게 설명합니다. 역사 인물이 겪은 병과 그로 인한 역사의 비극, 그에 대한 안타까움을 감성적인 문장으로 풀어나가고요.


다만 기존의 잘못된 역사 상식들이 보이니 이 점은 주의해야 합니다. 저자는 노론이 사도세자의 정적이었기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이야기하면서 사도세자가 실제로 심각한 정신병 때문에 내관과 궁녀들, 심지어 자기 후궁까지 살해해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뒤에서는 정조가 사적인 원한에 사로잡히지 않고 탕평책을 고수한 것을 언급했는데, 여기에 정조가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와 주고받은 비밀 어찰 이야기도 했다면 정조와 노론이 대립 관계이기만 한 것처럼 보일 위험에서 더 확실히 벗어날 수 있었을 겁니다. ‘정적들의 암살 위협에 시달렸던 왕이라는 해당 챕터의 큰 그림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비밀 어찰 이야기는 넣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당시 정치의 전체 그림을 미리 짜놓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여야 하는 것도 정조의 수명을 깎아낼 만큼 고단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러니 비밀 어찰 이야기를 넣었어도 그 챕터에서 말하려는 바(정조는 살벌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평생 스스로를 채찍질해 불면증과 불안장애에 시달렸던 왕이었다)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태조 이성계가 태종이 보낸 차사를 모두 죽이거나 옥에 가두었다는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처럼 이야기하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태종에게 반기를 든 조사의의 난에 휘말려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태조를 만나러 간 사자들이 태조에게 죽었다는 이야기로 와전되어 함흥차사의 전설이 된 것이죠. ‘방석은 명석한 아들이었다고 이 책에서는 말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자 이방석이 남의 집 가축을 쏴 죽이고 궁 안에 기녀를 들이고 공부를 싫어하는 등 세자로서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고요. 조사 하나로도 맥락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역사 서술이고, 대중 역사서는 더 많은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더 주의 깊게 팩트를 체크해야 합니다. 그 팩트가 왜곡되어 전달되지 않도록 단순한 문장이라도 신중하게 써야 하고요.


그리고 조선 왕은 제후국 군주의 위치에 있는데 황제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인 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부분도 보이고, 문종이 아직 왕이 되지 않은 세자를 시호로, 그것도 수백 년 뒤에 숙종이 추존해서 올린 시호인 단종으로 부르는 부분도 보입니다. 작은 부분이지만 이런 작은 부분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책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집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효능과 주의사항을 체크해 보시면 내게 맞는 책인지 아닌지 판단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 글이 현명한 선택을 하시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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