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 - 치즈가 좋아서 떠난 영국 치즈 여행기 유유자적 1
이민희 지음 / 크루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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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부터 표지의 선명한 노란색에 눈길이 갔다. '치즈'라는 책 제목처럼 애니메이션 속 생쥐가 좋아하는 치즈 같은 노란색이다. 게다가 나도 치즈를 좋아하니 언젠가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만 하고 잊고 있던 와중에, 얼마 전에 읽은 『베트남 간식』과 이 책이 같은 시리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의 부제는 '치즈가 좋아서 떠난 영국 치즈 여행기'다. 하지만 다양한 치즈를 맛보며 느긋하게 즐기는 식도락 여행기는 아니다. 저자가 직접 영국에 어떤 치즈 농가들이 있는지 찾아보고 하나하나 방문 허락을 받고, 한 곳 한 곳 방문해 치즈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기록했으니 '나의 영국 치즈 답사기'라고 할 수 있다. 책의 대부분은 각 치즈의 역사와 현황, 저자가 보고 듣고 경험한 제조 공정과 거기서 알게 된 것들이다. 책 속 사진들도 대부분은 완성된 치즈가 놓여 있는 선반이나 치즈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찍은 것이다. 그러니 화려한 치즈의 향연을 기대한 사람들은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이건 여행이 아니라 견학이잖아?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즐기러 간 것이 아니라 배우러 간 것이고, 치즈의 소비보다는 생산에 더 관심이 많으니 견학이 맞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것은 치즈의 소비가 아닌 생산이다. 생산 공정과 그 공정 하나하나에 공을 들이는 사람들이다.


  사실 이 책에 등장하는 치즈들은 큰 틀에서 보면 비슷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우유를 준비하고, 거기에 산을 넣어 단백질을 응고시키고, 응고된 덩어리를 건져내 수분을 빼내고 모양을 잡고, 저장고에서 숙성시키면 완성. 그러나 치즈에 넣는 산의 양이나 소금의 비율부터 수분을 빼는 방법, 제조 작업에 사용하는 도구까지 각각 조금씩 다른데, 그 작은 차이가 치즈의 개성을 만들어낸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각 치즈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하고, 각각의 과정이 치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한다. 그저 촬영하고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치즈 제조자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치즈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려야 하는지 실감한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치즈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잠든 이른 새벽에 일어나 온몸의 힘을 써야 하는 중노동을 하고, 좋은 우유를 만들 수 있도록 소들까지 돌본다. 이런 고된 일이지만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고 즐겁게 일한다. 저자가 찍은 이들의 모습에는 자기 일을 사랑하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위엄과 품위가 있다.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줄 안다. 자신들이 만드는 치즈에 관심을 갖고 배우고 싶어 한다는 이유만으로 일면식도 없는 이방인인 저자를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처럼 따뜻하게 환대한다.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은 어떤 차이나 경계도 뛰어넘는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책날개에서 저자는 이 책을 '느리고 깊게 만난 그동안의 나의 치즈 이야기'라고 요약한다. 그 말대로 이 책은 이곳저곳 바쁘게 움직이며 최대한 많은 치즈를 맛보고 그 맛을 현란하게 묘사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라'는 말처럼, 저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치즈의 근원을 찬찬히 파헤쳐 나가고, 그 뒤에서 묵묵히, 성실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명을 비춘다. 저자는 10년 전의 여행을 책으로 내기 위해 분투하다 결국은 출간해 냈으니, 좋은 치즈를 만들기 위해 수십 년 동안 매일 성실히 노동하는 치즈 제조자들만큼이나 인내심이 강하다. 좋아하는 것에 대한 우직한 이 기록은 천천히 씹으면 그 풍미를 느낄 수 있다는 데서 치즈와 닮았다.


P. S. 『베트남 간식』처럼 큰 판형에 사진들도 큼직하게 넣고 잡지 같은 감각적인 느낌으로 디자인했다. 속표지까지 선반에 놓인 치즈 사진으로 채우고, 치즈 외의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치즈 더하기' 코너와 에필로그는 잘 익은 치즈 같은 레몬색을 바탕색으로 한 데서 치즈 이야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외형을 만들어내려 고심한 것이 느껴진다.


다만 치즈 전문점 닐스 야드 데어리의 매장 구조도(53페이지)는 영어판 그대로 넣지 말고 텍스트들을 한국어로 번역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책들에서 원어 표기하는 데 흔히 쓰이는 위첨자를 덧붙이는 말에도 쓰는 것은 『베트남 간식』에서와 마찬가지인데, 문장이 길 때는 가독성이 떨어진다. 독특한 시도이긴 하지만 독자에게는 가독성이 먼저이니, 그냥 문장 바로 뒤에 다른 본문들처럼 처리하거나 괄호 안에 넣는 게 더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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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간식,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만난 작고 다정한 것들 유유자적 2
진유정 지음 / 크루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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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답답할 때는 먼 나라의 이야기나 예쁜 사진들이 가득 실린 책을 읽으며 기분 전환을 한다. 그런 책을 찾으러 도서관의 실용 분야나 여행 서적 코너 앞에 서서 책등이나 표지, 제목만 봐도 끌리는 책을 펼친다. 이 책도 그렇게 발견한 책이었다. 앞으로 가보려는 나라 중 베트남은 1순위가 아니었지만 베트남 음식 전체도 아니고 '간식'만 다루고 있다는 데 호기심이 갔다. 베트남의 간식거리 중 내가 아는 건 하나도 없으니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는 게 설렜고, 책을 훑어보니 예쁜 음식과 풍경 사진들이 많아 보면서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그러니 실제로 베트남 여행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분 전환을 위해 이 책을 선택했다.

이 책은 그런 내 선택에 맞는 책이었다. 베트남의 어디에 어떤 맛집이 있고 거기에선 어떤 음식을 팔며, 어느 요일 몇 시에 문을 열고 문을 닫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저자가 간 곳 중 몇 곳은 이제 문을 닫아 갈 수 없다고 한다. 이 책은 베트남 간식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려주기보다는, 저자가 베트남에서 먹었던 간식들과 그에 얽힌 추억들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새벽과 아침 사이, 아침과 점심 사이, 점심과 저녁 사이, 저녁과 밤 사이 이렇게 간식을 먹는 시간대별로 챕터를 나누었지만, 꼭 특정 시간대에 먹어야 하는 음식도 없다(가게가 문을 여는 시간에는 맞춰서 가야겠지만). 저자가 마침 그 시간대에 먹었을 뿐. 하지만 그 순간에 그 음식을 먹었기에 그 순간도 그 음식도 저자의 기억 속에는 특별하게 남아 있다. 이른 새벽부터 할머니 바리스타가 내려줬던 달콤하고 따뜻한 연유 커피부터 밤비 내리는 밤에 동네 디저트 가게에서 만든 투박한 간 케이크(베트남어로는 '반간'인데 간을 넣어서가 아니라 생김새와 색이 간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까지. 베트남에 발 한 번 들여놓은 적이 없는 나도 글과 사진을 보면서 그 순간을 공유한다.

반미와 야채 절임, 달걀 프라이와 잠봉, 파테(간이나 자투리 고기를 간 것에 밀가루 반죽을 입혀 구워낸 프랑스 음식), 볶은 양파, 베트남식 소시지를 함께 먹는 음식 반미짜오

사실 이 책에 실린 베트남 간식 중 내가 알거나 먹어봤던 음식은 하나도 없다. 그나마 베트남식 바게트 반미와 다른 음식의 조합인 '반미씨우마이', '반미짜오', '반미팃씨엔느엉'은 반미를 먹어봤으니 반은 먹어봤다고 할 수 있을까. 연두부에 코코넛 밀크와 떡 같은 고명을 넣어 먹는다는 음식 '따오퍼'는 대만의 또우화와 비슷한 맛일 것 같은데, 나는 또우화를 한국에서 버블티에 얹힌 고명으로만 먹었으니 따오퍼와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모든 음식의 맛은 저자의 설명과 묘사, 사진으로 짐작하고 상상해 보았다. 새우, 돼지고기, 라이스페이퍼, 숙주나물 등 맛을 아는 재료들로 만들어졌고 저자의 묘사도 생생하니 왠지 아는 맛일 것 같다. 그래도 직접 맛보고 싶다. 이런 상상을 하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그리고 그 음식을 먹었을 때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담백하면서도 감각적인 문장으로 풀어놓아, 내가 베트남 어느 작은 도시 어느 작은 가게의 플라스틱 목욕탕 의자에 앉아 일회용 접시에 담긴 간식을 먹는 기분이 들었다. 밖에서 밝아오는 하늘이나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간접적으로라도 여행하고 싶은 마음을 달랬다. 현실 도피지만 어느 드라마 제목처럼 때로는 도망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리고 언젠가는 정말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때는 책에 나온 베트남 간식들과 그것을 먹었을 때 나의 감상을 쌓아갈 수 있겠지.

P. S. 1. 한국학술정보에서 낸 책이라 학술 서적 같은 투박한 느낌의 디자인일 줄 알았는데 표지도 본문도 잡지 같은 느낌의 감각적인 디자인이다. 다만 책 판형이 꽤 큰 데 반해 각주와 사진 설명, 쪽 번호의 글씨 크기는 너무 작아서 불편하다. 글씨가 작은 게 디자인의 측면에서는 더 예쁘다고 해도 6포인트는 너무 작다.

P. S. 2. 더운 나라의 음식을 소개하는 책인데 시원한 음료, 빙과보다는 고기, 채소, 탄수화물로 이루어져 가벼운 한 끼로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많다. 흔히 간식으로 생각하는 단것, 과자보다는 정말 '삼시 세끼 중간의 끼니'라고 할 수 있는 음식들의 비중이 크다. 저자가 그런 간식을 선호하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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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카페 멋집 - 머물고 싶은 공간 훔치고 싶은 디테일
공상찻집 도라노코쿠 지음, 김슬기 옮김 / 북폴리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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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토익은 마침 도서관 근처에서 봤다. 토익을 마치고 도서관에서 잠시 쉬고 있었는데, 도서관에 있으면서 책을 읽지 않는 게 눈치가 보였다. 두 시간이나 시험을 보고 나니 머리 써야 하는 책이 아니라 예쁜 풍경들이 가득한 책을 보고 싶었다. 그런 책은 여행 서적이다. 나 홀로 대만 여행을 잘 마치고 돌아오니, 그다음에는 일본 여행에 도전하고 싶어졌다. 일본은 바로 옆 나라이고 일본어도 꽤 오래 공부했는데 평생 한 번도 간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신간 코너에서 골라 온 책이 이 책이었다.

이 책은 일본의 카페 전문 인플루언서 네 사람이 도쿄와 인근의 카페 중 독특하고 매력적인 곳 75개를 소개하는 책이다. 한 곳에 1, 2페이지 정도만 할애해 한국어 번역판으로도 148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주소와 영업 시간, 간판 메뉴, 구조, 영업 방침까지 필요한 정보는 알차게 적어놓았고, 소개 글에서 각각의 카페에 대한 애정과 그곳만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커피를 비롯한 음료수를 잘 마시지 않고 혼자 돌아다니거나 여행할 때도 카페는 거의 들르지 않는 내게도 이 책이나 책에서 소개하는 곳들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다른 여행서에 비해 특출나게 뛰어나다거나 내용이 풍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도쿄와 인근을 여행할 때 들고 다니면 꽤 유용할 듯하다. 여행하지 않을 때 따뜻한 커피나 차, 또는 다른 음료를 마시면서 몇 시간 동안 가볍게 읽기도 괜찮다. 책 속 카페들과 거기서 파는 음료들, 음식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카페에 앉아 잠시 쉬어 가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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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난 골목 노포 산책 - 낭만이 깃든 작고 오래된 가게 노포 탐방기
천구이팡 지음, 심혜경 외 옮김 / 페이퍼스토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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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에 타이베이에 다녀왔다. 2박 3일의 짧은 여행이었고 마지막 날은 집에 돌아오는 데 다 썼기 때문에 타이베이도 충분히 돌아보지 못했다. 아쉬움을 달래려고 대만 여행과 관련된 책들을 찾아보다 이 책을 발견했다. 타이베이도 잘 모르면서 대만의 고도(古都)라는 타이난에 호기심을 품었고, 작가가 직접 그린 삽화가 정겨워 보여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타이난 출신의 대만 삽화가가 타이난 곳곳의 노포들을 취재하고 그곳의 모습을 글과 그림으로 그려낸 책이다. 가장 역사가 짧은 곳도 3, 40년은 운영해 온 곳이다. 음식점부터 잡화관, 수리점, 영화관까지 업종은 다양하지만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어느 곳이나 같다. 저자가 고향 사람이어서 그런지 가게 주인들은 마음속 이야기까지 더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와 미화 없이 그려낸 그들의 얼굴, 그들이 일하는 모습은 사람 냄새를 물씬 풍긴다. 잘 쓴 여행 서적은 그 지역의 민속지나 다름없다고 하는데, 이 책이 바로 그렇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가게들 하나하나를 구글 지도에서 검색해 봤더니 한두 군데 빼고는 이 책의 원서가 출간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영업하고 있다. 자식이나 손주가 가게 일을 돕고 있다, 가게 일을 이어갈 것이라는 가게들이 많았는데, 전통을 이어가려는 그들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인 리뷰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찐 로컬 가게들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하긴 냄비나 가전제품 수리하는 가게나 명절에 쓰는 전통 종이 공예 파는 가게에 찾아갈 관광객이 얼마나 있겠는가. 이 책은 외국 관광객을 위한 가이드라기보다는 대만 사람들, 특히 타이난 사람들을 위한 책, 지금도 계속되는 타이난의 어제에 대한 기록으로 느껴진다. 이방인인 나는 대만 사람들이나 타이난 사람들, 이 모든 것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작가만큼 이 가게들을 사랑하지는 못하겠지만, 책으로나마 그들과 그들이 살아온 시간을 만나 반갑고 정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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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타지 없는 여행 - 환타 전명윤 여행 에세이
전명윤 지음 / 사계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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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동안 수도권을 벗어나지도 못하다 작년에야 수도권을 벗어나 남쪽 지방으로 국내 여행을 갔는데, 올해 코로나가 터졌다. 그저 여행 에세이나 TV 여행 프로그램으로 간접 여행을 할 수밖에 없다. 예쁜 사진들로 글의 부실함을 가리는 여행 에세이, 그냥 떠나라는 말만 되풀이하는 여행 에세이는 읽고 싶지 않았다. 그런 여행 에세이들은 서점에 차고 넘치니까. 여행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여행 에세이를 읽고 싶었다.

『환타지 없는 여행』은 말 그대로 여행에 씌워진 환타지들을 걷어내는 여행 에세이다. 왜 '판타지'가 아니라 '환타지'냐 하면, 작가의 인터넷 닉네임 '환타'를 연상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여행에 대한 '상을 파'한다는 뜻의 닉네임처럼, 여행 가이드북 작가인 그는 사람들이 여행에 대해 품는 온갖 낭만적인 환상들을 걷어낸다. 그도 젊은 시절에는 다 버리고 무작정 떠나라고 사람들에게 추천했었지만, '떠나면 행복해진다'는 환상이 허상임을 깨달은 지금은 이렇게 말한다.

"돌아와야 할 이유를 찾고, 돌아올 날짜를 정해야 여행입니다. 돌아올 길을 불태우고 떠나면 그때부터 국제 거지가 되는 거예요."(p. 20.)

작가의 친구들은 늘 여행을 하고 있는 작가를 부러워하지만, 그들에게는 작가에게 없는 안정적인 직장과 편안한 집, 큰 차가 있다. 여행이 끝나면 돌아올 일상이 있어야 여행은 현실이 된다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무작정 떠나라는 말만 하지 않고, 삶을 지탱해 주는 일상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그에게 신뢰가 간다.

"누군가에게 가이드북은 여행지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고 수평선 너머의 풍경을 꿈꾸게 하는 책일지 모른다. 그러나 정보를 정확히 전달하고 제대로 안내해야 하는 나에게는 서바이벌 키트 혹은 만능 구급상자다. 그 책임감 때문에 내가 쓴 가이드북은 늘 잔소리로 넘쳐난다. 지도 밖은 위험천만한 곳이다. 현지인에게 당신이 특별한 이유는 당신의 지갑이 그곳의 지폐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에게 환상이 아닌 현실을 거듭 이야기하는 이유다."

(p. 72~73.)

그가 가이드북을 쓰는 이유는 여행에 대한 환상을 품고 떠난 사람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돕기 위해서다. 여행 작가들이 심어준 환상 때문에 제대로 사전 조사도 해 보지 않고 여행을 떠났다 낭패를 본 사람, 낭패 정도로 그치지 않고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계적인 여행 가이드북 『론리 플래닛』에서는 2019년 스리랑카를 '올해 여행해야 할 국가' 1위로 선정했지만, 그해 4월 스리랑카에서는 연쇄 자살 폭탄 테러가 발생해 여행을 온 외국인들이 여러 명 사망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늘 여행지 추천에 신중을 기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가이드북이 관광 명소, 맛집을 찾기 위해 뒤적이는 정보 모음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 잘 만든 여행책은 그 지역의 시대와 현실을 여행이라는 주제로 기록한 지역서이자 민속지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여행 에세이에서도 그는 사람들이 여행지에서 보지 못한 진실들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인도에서 소를 신성시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인도의 지방 유지들이 목 말라 죽어가는 사람들 대신 신성한 소에게만 물차를 보내 자신의 신앙과 부를 과시한다는 것은 잘 모른다. 주말마다 홍콩 거리를 가득 메운 외국인 가사도우미들을 보지만, 그들이 주5일 노동이라는 근로기준법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 주말에는 어쩔 수 없이 주인 가족들과 함께 사는 집에서 나와 거리에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은 보지 못한다.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오키나와 흑당 음료에는 일본 본토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으로 이용당하며 사탕수수 외의 다른 작물은 재배할 수 없었던 과거 오키나와의 아픔이 담겨 있다. 이런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내가 우리나라 밖의 이야기에 얼마나 무지하고 관심이 없었는지를 깨달았다. 나 자신이 다른 문화권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흥밋거리로만 외국 이야기를 소비할 뿐이었다.

코로나가 지나면 가까운 곳부터 하나씩 환상을 걷어낸 여행을 하고 싶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곳에서 찍히는 사람 얼굴만 다른 사진을 찍으며, 여행지 하나하나가 해야 할 숙제인 듯이 여행하지는 않을 것이다. 책이나 TV로 보는 것만으로는 겪을 수 없는 것들을 겪으면서 더 넓은 세상과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배우고 싶다. 지저분한 것도 고생스러운 것도 못 견디는 나는 실전에서는 결국 편안한 환상으로 돌아갈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도전해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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