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개주막 기담회 케이팩션
오윤희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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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미야베 미유키의 역사 소설 『외딴 집』을 재미있게 읽었고, 최근에는 중국 작가 마보융의 삼국지 2차 창작 소설 『풍기농서』와 박서련의 삼국지 재해석 『폐월 초선전』을 읽었다. 그러고 나니 한국 작가가 한국 역사로 쓴 소설이 읽고 싶어져 이 책을 선택했다. 조선 후기(박지원과 이덕무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들이 활동했던 영조, 정조 재위기로 짐작된다) 마포나루 근처에 있던 '삼개주막'이라는 가상의 주막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이 주막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들려주는 기이한 이야기들이 이 책을 구성하고 있다.

궁금했던 건 이야기의 재미와 디테일이었는데, 이야기는 딱 어린 시절에 봤던 <전설의 고향>만큼 재미있었다. <첩의 환생>은 계모의 손에 죽은 아이가 계모의 친자식으로 환생했다는 괴담("엄마, 또 나 밀 거야?")의 조선 버전이구나 싶었고, <열녀>는 <전설의 고향>에서 많이 보던 이야기였다. 열녀문 때문에 시댁 식구들에게 살해당하고 자살로 위장된 과부 혼령의 복수 이야기. <옹기장의 꿈>은 무섭지는 않지만 우리 옛이야기 특유의 정이 느껴지는 이야기고, <그림 그려주는 노인>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놓지 못하다 파멸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유괴된 아이>는 실제로 조선 시대에 기록된 일화를 바탕으로 해서인지 이야기가 가장 탄탄하고 섬뜩하면서도 가슴 먹먹해지게 했다. 특히 동굴에 갇힌 아이가 죽어가면서 부모가 자신을 구하러 오는 모습을 환상으로 보면서 행복해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과거 보러 가는 길>은 평화로워 보이는 장면들에서도 불길한 단서들이 조금씩 엿보이다 경악스러운 진상이 드러나기까지의 과정이 꽤 탄탄했지만, 마지막 반전이 좀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전반적으로는 <전설의 고향>의 여러 에피소드들을 글로 읽은 느낌이다. 이야기의 구조가 아주 치밀하거나 참신한 것은 아니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는 있을 정도.

시대상의 디테일은 작가가 신경 쓴 것이 보인다. 그 시대의 문물을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넣으려고 한 것이 보이고, 그중 독자들에게 낯선 것들은 부연 설명한다.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 역사 소설의 압도적인 디테일에 비하면 그렇게 세밀하지는 않고, 마보융처럼 주막 안의 훈훈한 온기와 국 냄새까지 느껴질 정도로 그 시대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포착하는 것은 아니다. 딱 이야기의 밀도만큼의 디테일이다. 그리고 '그녀'라는 호칭 등 조선 후기에 쓸 법하지 않은 말이 튀어나오거나, 뒷간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잠자는 방과 같은 건물에 있는 등 시대에 맞지 않는 표현이나 묘사가 나와 몰입이 깨질 때가 있었다. 그러니 독자들의 허를 찌르는 기발한 이야기나 미칠 듯한 디테일을 기대했다면 아쉽겠지만, 쉬면서 가볍게 읽기에 좋다.

P. S. <과거 보러 가는 길>에서 주인공 세진이 사실 지박령 일가의 막내 아들이었다는 반전은 억지스럽다. 지박령 일가 중에서 적어도 아버지는 세진이 자기 아들인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아버지라면 자기 자식이 원수의 자식이 되었더라도 진실을 모르고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랐을 것이다. 그것도 세진이 자기 의지로 가족들을 배신하고 원수의 자식이 되어 호의호식한 게 아니라, 어린 나이에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원수의 양자가 된 게 아닌가. 가족이라면 자식이, 막내 동생이 지박령이 돼서 그 외딴 집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부유하고 안락하게 평생을 보내길 바라지 않을까? 이것은 반전을 위한 반전이라고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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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카페 멋집 - 머물고 싶은 공간 훔치고 싶은 디테일
공상찻집 도라노코쿠 지음, 김슬기 옮김 / 북폴리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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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토익은 마침 도서관 근처에서 봤다. 토익을 마치고 도서관에서 잠시 쉬고 있었는데, 도서관에 있으면서 책을 읽지 않는 게 눈치가 보였다. 두 시간이나 시험을 보고 나니 머리 써야 하는 책이 아니라 예쁜 풍경들이 가득한 책을 보고 싶었다. 그런 책은 여행 서적이다. 나 홀로 대만 여행을 잘 마치고 돌아오니, 그다음에는 일본 여행에 도전하고 싶어졌다. 일본은 바로 옆 나라이고 일본어도 꽤 오래 공부했는데 평생 한 번도 간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신간 코너에서 골라 온 책이 이 책이었다.

이 책은 일본의 카페 전문 인플루언서 네 사람이 도쿄와 인근의 카페 중 독특하고 매력적인 곳 75개를 소개하는 책이다. 한 곳에 1, 2페이지 정도만 할애해 한국어 번역판으로도 148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주소와 영업 시간, 간판 메뉴, 구조, 영업 방침까지 필요한 정보는 알차게 적어놓았고, 소개 글에서 각각의 카페에 대한 애정과 그곳만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커피를 비롯한 음료수를 잘 마시지 않고 혼자 돌아다니거나 여행할 때도 카페는 거의 들르지 않는 내게도 이 책이나 책에서 소개하는 곳들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다른 여행서에 비해 특출나게 뛰어나다거나 내용이 풍성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도쿄와 인근을 여행할 때 들고 다니면 꽤 유용할 듯하다. 여행하지 않을 때 따뜻한 커피나 차, 또는 다른 음료를 마시면서 몇 시간 동안 가볍게 읽기도 괜찮다. 책 속 카페들과 거기서 파는 음료들, 음식들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카페에 앉아 잠시 쉬어 가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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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난 골목 노포 산책 - 낭만이 깃든 작고 오래된 가게 노포 탐방기
천구이팡 지음, 심혜경 외 옮김 / 페이퍼스토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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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에 타이베이에 다녀왔다. 2박 3일의 짧은 여행이었고 마지막 날은 집에 돌아오는 데 다 썼기 때문에 타이베이도 충분히 돌아보지 못했다. 아쉬움을 달래려고 대만 여행과 관련된 책들을 찾아보다 이 책을 발견했다. 타이베이도 잘 모르면서 대만의 고도(古都)라는 타이난에 호기심을 품었고, 작가가 직접 그린 삽화가 정겨워 보여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타이난 출신의 대만 삽화가가 타이난 곳곳의 노포들을 취재하고 그곳의 모습을 글과 그림으로 그려낸 책이다. 가장 역사가 짧은 곳도 3, 40년은 운영해 온 곳이다. 음식점부터 잡화관, 수리점, 영화관까지 업종은 다양하지만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은 어느 곳이나 같다. 저자가 고향 사람이어서 그런지 가게 주인들은 마음속 이야기까지 더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들의 진솔한 이야기와 미화 없이 그려낸 그들의 얼굴, 그들이 일하는 모습은 사람 냄새를 물씬 풍긴다. 잘 쓴 여행 서적은 그 지역의 민속지나 다름없다고 하는데, 이 책이 바로 그렇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가게들 하나하나를 구글 지도에서 검색해 봤더니 한두 군데 빼고는 이 책의 원서가 출간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영업하고 있다. 자식이나 손주가 가게 일을 돕고 있다, 가게 일을 이어갈 것이라는 가게들이 많았는데, 전통을 이어가려는 그들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한국인 리뷰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찐 로컬 가게들임을 확인할 수 있다. 하긴 냄비나 가전제품 수리하는 가게나 명절에 쓰는 전통 종이 공예 파는 가게에 찾아갈 관광객이 얼마나 있겠는가. 이 책은 외국 관광객을 위한 가이드라기보다는 대만 사람들, 특히 타이난 사람들을 위한 책, 지금도 계속되는 타이난의 어제에 대한 기록으로 느껴진다. 이방인인 나는 대만 사람들이나 타이난 사람들, 이 모든 것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작가만큼 이 가게들을 사랑하지는 못하겠지만, 책으로나마 그들과 그들이 살아온 시간을 만나 반갑고 정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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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죽어도 힙합
정재환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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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 살인마 이웃을 잡으려는 다단계 판매원, 촬영 소품이 바뀌는 바람에 조연이 죽자 범인이 주연 배우일 것이라고 의심하는 단역 배우, 식인귀가 인간 세상을 멸망시키고 있는 와중에 짝사랑하던 남자에게 고백하려는 양궁 선수. 뒤표지에 실린 각 단편의 한 줄 요약만 봐도 흥미롭다. 뒤표지에는 '웃음과 서스펜스로 중무장한 요지경의 상상력'이라는 수식어도 적혀 있다. 정말 이 문구처럼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은 웃음과 서스펜스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았을까.

일단 웃긴 것은 사실이다. 화자의 서술이나 등장인물의 대사, 상황이 만들어내는 유머는 타율이 꽤 좋고 불편한 데도 없다. 이 장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은 첫 번째 단편 「네 이웃을 사랑하라」다. 이 단편에서 다단계 우수 판매원인 1인칭 주인공은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독자에게 설명하면서도 불쑥불쑥 자기가 파는 상품의 우수성을 설명한다. 미국 식품의약국에 세계 바리스타 대회 우승자, 인도의 현자까지 들먹이지만 다 그럴듯한 얘기를 갖다 붙인 거라는 건 뻔하다. 작품 밖 현실 속의 다단계 상품들이 그렇듯이. 현실을 풍자하지만 누구도 불쾌하지 않게 선을 지키는 감각 덕분에 끝까지 유쾌하게 각 단편들을 읽을 수 있다.

서스펜스의 경우는 어떨까. 일단 이야기를 흥미롭게 이끌어 가는 것은 사실이다. 트릭 자체가 정교하거나 기발하지는 않지만 독자들이 끝까지 궁금해하면서 이야기를 따라오게 한다. 문제는 뒷심이 약한 것이다. 결말은 예측 가능하거나 다소 힘이 빠진다. 더 나은 결말을 맞을 수 있었는데 욕심 때문에 최악의 결말을 맞는 등장인물들을 보면서 교훈을 얻을 수 있지만, 교훈과 서스펜스는 별개니까. 짜릿한 서스펜스와 예상 못 한 결말을 너무 크게 기대하지 않고 가볍게 읽는다면 즐겁게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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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우샤오러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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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당 책과 『우행록』의 스포일러 포함

얼마 전 대만을 여행하면서 몇 년 전에 읽었던 대만 소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이 떠올랐다. 작가 자신이 겪은 성폭력을 잘 빚어진 문장으로 그려내, 추악한 내용과 아름다운 문장의 대비에 마음이 더 쓰라렸던 책이다. 오랜만에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으로 검색해 보다 『미스테리아』라는 추리 소설 전문 잡지의 최근 호에서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과 이 소설을 비롯한 중국어권 소설들을 다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중국어권 문화에 빠져 있어 해당 호를 사고 싶어졌다. 서평에는 그 책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기 쉬우니 칼럼에 소개된 책들을 미리 읽어보기로 했다. 그중 한 권이 이 책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였다.

갑자기 사라진 아내를 찾아 나서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사람들은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를 떠올린다. 그러나 책 전체의 구조나 중심 소재는 『화차』보다는 『우행록』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 전체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인물이 자기 시점에서 바라본 상황을 풀어나가는 것, 성격이 아주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인물이 품고 있는 비밀이. 본문 뒤의 작가 인터뷰에서는 행방을 감춘 아내와 얽힌 도입부의 미스터리가 한국 드라마를 연상시킨다고 했지만, 소설 전체는 잘 쓰인 일본 스릴러 소설과 닮았다. 독자가 끝까지 책을 읽어나갈 수밖에 없도록 이야기를 흥미롭게 진행하면서 서스펜스가 소설 내내 유지되는데, 등장인물들이 겪은 사회적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은 서늘하다는 점에서.

작가는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과 그 밖의 성폭력을 다룬 책들에서 영감을 받아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거기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성폭력을 겪은 사람들이 성폭력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 작가가 제기하는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자와 친밀한 관계고 성폭력 이후에도 가해자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가졌다면, 우리는 성폭력 피해 자체를 의심해야 하는 걸까.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내린 답은 분명하다. 아니라고. 친밀한 관계에서 폭력이 발생했다면 그것은 명백한 폭력이다. 그동안 쌓아온 관계 때문에 생긴 감정이 그 폭력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런데도 사람들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면 '거봐, 아무 일도 아니었잖아'라고 판단해 버리곤 한다. 이 소설 속 핵심 인물의 비극은 그런 판단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 비극이 삶을 얼마나 망가뜨렸는지, 망가진 삶 속에서 핵심 인물은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면서 독자들은 탄식하게 된다.

하지만 찜찜한 점이 남는다. 핵심 인물과 그 친구가 한 행동은 절박한 처지에서 서로를 돕기 위해 한 것이었지만, 이것을 두고 '거봐, 무고하는 사람도 정말 있잖아'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아직 세상에는 무고당할 수 있다는 공포가 실제 피해자의 고통보다 크다고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이 점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거기에 가정 폭력을 다루는 태도 또한 마음에 걸린다. 사라진 아내의 남편은 결말에서 전처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이 맞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럼에도 그는 법의 심판을 받지도 않고 새 아내와 무사히 재회하며 새 아내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전처는 재벌집 딸이라 사치스럽고 남편을 제멋대로 휘두르려 하는데, 새 아내는 검소하고 차분하며 전처가 낳은 딸도 자기 친딸처럼 아끼는 현모양처다. 전처에게 폭력을 휘두를 때 불안정했던 남편의 정신 상태는 새 아내의 차분하고 온화한 성품 덕분에 안정을 찾는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이 폭력을 휘두른 것은 전처가 그런 폭력을 당할 만한 사람이었다, 폭력의 원인은 전처에게 있다고 몰아가기 좋다. 여성 작가가 성폭력에 대해 꼼꼼하게 조사하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쓴 작품이지만, 한계와 문제점이 없지는 않다.

그럼에도 이 작품과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을 다룬 『미스테리아』의 칼럼 저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한계가 있더라도 더 많은 이야기가 나와야 한계를 넘어서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의 작가 린이한은 "이렇게 많이 썼는데도 난 아무도 구하지 못했어요."라고 말하고 목숨을 끊었지만, 용기 내어 꺼낸 이야기들이, 그 이야기에 힘을 주기 위해 쓰인 이야기들이,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 세상의 폭력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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