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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우샤오러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2년 10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해당 책과 『우행록』의 스포일러 포함
얼마 전 대만을 여행하면서 몇 년 전에 읽었던 대만 소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이 떠올랐다. 작가 자신이 겪은 성폭력을 잘 빚어진 문장으로 그려내, 추악한 내용과 아름다운 문장의 대비에 마음이 더 쓰라렸던 책이다. 오랜만에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으로 검색해 보다 『미스테리아』라는 추리 소설 전문 잡지의 최근 호에서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과 이 소설을 비롯한 중국어권 소설들을 다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중국어권 문화에 빠져 있어 해당 호를 사고 싶어졌다. 서평에는 그 책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기 쉬우니 칼럼에 소개된 책들을 미리 읽어보기로 했다. 그중 한 권이 이 책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였다.
갑자기 사라진 아내를 찾아 나서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사람들은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를 떠올린다. 그러나 책 전체의 구조나 중심 소재는 『화차』보다는 『우행록』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 전체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인물이 자기 시점에서 바라본 상황을 풀어나가는 것, 성격이 아주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인물이 품고 있는 비밀이. 본문 뒤의 작가 인터뷰에서는 행방을 감춘 아내와 얽힌 도입부의 미스터리가 한국 드라마를 연상시킨다고 했지만, 소설 전체는 잘 쓰인 일본 스릴러 소설과 닮았다. 독자가 끝까지 책을 읽어나갈 수밖에 없도록 이야기를 흥미롭게 진행하면서 서스펜스가 소설 내내 유지되는데, 등장인물들이 겪은 사회적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은 서늘하다는 점에서.
작가는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과 그 밖의 성폭력을 다룬 책들에서 영감을 받아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거기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성폭력을 겪은 사람들이 성폭력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 작가가 제기하는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자와 친밀한 관계고 성폭력 이후에도 가해자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가졌다면, 우리는 성폭력 피해 자체를 의심해야 하는 걸까.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내린 답은 분명하다. 아니라고. 친밀한 관계에서 폭력이 발생했다면 그것은 명백한 폭력이다. 그동안 쌓아온 관계 때문에 생긴 감정이 그 폭력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런데도 사람들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면 '거봐, 아무 일도 아니었잖아'라고 판단해 버리곤 한다. 이 소설 속 핵심 인물의 비극은 그런 판단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 비극이 삶을 얼마나 망가뜨렸는지, 망가진 삶 속에서 핵심 인물은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면서 독자들은 탄식하게 된다.
하지만 찜찜한 점이 남는다. 핵심 인물과 그 친구가 한 행동은 절박한 처지에서 서로를 돕기 위해 한 것이었지만, 이것을 두고 '거봐, 무고하는 사람도 정말 있잖아'라는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 아직 세상에는 무고당할 수 있다는 공포가 실제 피해자의 고통보다 크다고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이 점이 계속 마음에 걸린다. 거기에 가정 폭력을 다루는 태도 또한 마음에 걸린다. 사라진 아내의 남편은 결말에서 전처에게 폭력을 휘두른 것이 맞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럼에도 그는 법의 심판을 받지도 않고 새 아내와 무사히 재회하며 새 아내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전처는 재벌집 딸이라 사치스럽고 남편을 제멋대로 휘두르려 하는데, 새 아내는 검소하고 차분하며 전처가 낳은 딸도 자기 친딸처럼 아끼는 현모양처다. 전처에게 폭력을 휘두를 때 불안정했던 남편의 정신 상태는 새 아내의 차분하고 온화한 성품 덕분에 안정을 찾는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이 폭력을 휘두른 것은 전처가 그런 폭력을 당할 만한 사람이었다, 폭력의 원인은 전처에게 있다고 몰아가기 좋다. 여성 작가가 성폭력에 대해 꼼꼼하게 조사하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쓴 작품이지만, 한계와 문제점이 없지는 않다.
그럼에도 이 작품과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을 다룬 『미스테리아』의 칼럼 저자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는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한계가 있더라도 더 많은 이야기가 나와야 한계를 넘어서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의 작가 린이한은 "이렇게 많이 썼는데도 난 아무도 구하지 못했어요."라고 말하고 목숨을 끊었지만, 용기 내어 꺼낸 이야기들이, 그 이야기에 힘을 주기 위해 쓰인 이야기들이,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모여 세상의 폭력에서 우리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