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화란 어떤 그림인가
조용진, 배재영 지음 / 열화당 / 200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양미술사를 공부했지만 시각의 폭을 넓히기 위해 한국미술사나 동양미술사에 대한 기본 지식도 갖추어야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미술사와 중국미술사 강의도 들었지만 몇 년이 지나니 잊어버린 게 많아, 한국미술사, 동양미술사에 대해 기본 지식을 다시 쌓고 싶었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이 책 『동양화란 어떤 그림인가』였다.


(위) 박수근, <소와 유동(遊童)>, 1962, 캔버스에 유채. (아래) 박래현, <작품 8>, 화선지에 채색.


  이 책은 동양화에 대한 백문백답을 통해 동양화에 대한 기본 지식을 전달한다. 저자들은 우선 '한국화가 어떤 그림인가'를 정의한다. 토속적인 소재를 다루었지만 서양 회화의 재료인 캔버스와 유화 물감을 사용한 박수근의 작품과, 서양의 추상화와 비슷한 모습이지만 한국화 재료인 화선지를 사용한 박래현의 작품 중 어느 것이 한국화일까? 한국인이 한국 고유의 정서에 따라 그렸다면 재료의 종류와 상관 없이 한국화로 볼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지만, 저자들은 한국화의 전통 양식 특성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회화 재료와 도구를 사용하면서 한국적 정서를 표현한 작품을 한국화로 본다고 말한다. 저자들의 분류에 따르면 박수근의 작품은 서양화, 박래현의 작품은 한국화이다.

  또한 '동양화'는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조선미술전람회>의 전통 회화 부문을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 조선화로 부르기 꺼림칙했기 때문에 만들어냈던 신조어라는 것을 밝힌다. 60년이 지난 1982년부터 '한국화'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지만, 아직 한국적 그림 양식이 자리잡히지는 못했다는 것도 짚고 넘어간다. 이 책은 한국화뿐만 아니라 한국화에 영향을 준 중국 미술, 동양 미술 중 독특한 자기 영역을 지니고 있는 일본 미술도 같이 다루고 있기 때문에 '동양화'란 어떤 그림인가라는 제목이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위) 책의 아랫변보다 윗변이 더 길게 그려진 책거리 그림. 원근법에 맞지 않게 그려져 있다.

(오른쪽) 마인데르트 호베마, <미델하르니스의 가로수길>, 1689. 정확한 원근법을 따라 그려졌다.


  이 책에서는 서양화와의 대비를 통해 동양화의 특성들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미술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시각이 서양 미술 쪽에 치우쳐져 있기 때문에, 동양화는 동양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저자들은 멀리 있는 사람이 더 크게 그려져 있는 등 서양화의 원근법에는 어긋나게 그려진 동양화는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실제 사물을 관찰하고 원근법과 명암법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서양화와 달리, 동양화는 화가가 생각한 것이나 아는 것, 관념을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양화는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 자식이 많은 것을 상징하는 석류 등 상징성을 지닌 소재들을 조합해 뜻을 전달하기 때문에 읽는 그림이라고 한다. 서양화에도 시간을 상징하는 낫을 든 노인, 허영을 상징하는 거울처럼 상징적인 도상들로 이루어진 알레고리화가 있다. 그리고 구도나 색감, 데생력 등 미적인 요소로 동양화를 감상하는 것이 그림 속 상징들을 통해 그림을 읽는 전통적인 안목이 크게 훼손된 것이라고 하는데, 동양화도 '미'술에 속하는데 미적인 요소로 감상하지 않을 수 없다. 다소 이분법적인 느낌이 들긴 하지만, "(동양화가 서양화와 퓨전을 이루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 문화적 흐름에 적응한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양화와 서양화가 서로 개성 없이 같아진다면 이 얼마나 재미없는 일이겠는가."라는 저자의 말에서 동양화만의 개성과 전통을 지키려고 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동양화에 대해 미술사적 지식만 알고 싶은 사람으로써는 문방사우 장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종이, 붓, 먹, 벼루부터 표구용 풀까지 어떤 재질로, 어떤 공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 보관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 하나 하나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동양화를 직접 그릴 생각도 없는데 왜 이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하지만 동양화를 직접 그리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실용적인 부분일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동양화를 이해하는 또 다른 방법이 될 것이다.


  그 밖에도 먹으로만 그리면 수묵화이고 색을 사용하면 채색화인가, 민화에는 왜 낙관이 없을까, 동양화의 여백은 다 그리고 난 나머지로서의 여백인가 등 흥미로운 질문들이 독자들을 동양화에 대한 기본지식으로 이끈다. 다채로운 동양화들의 도판들은 읽는 재미에 보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그림과 함께 읽는 동양화의 기본 지식 백과사전 역할을 충실히 하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른 방식으로 보기
존 버거 지음, 최민 옮김 / 열화당 / 201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모나리자>, 1503.


 르네상스 미술사 강의를 들을 때 교수님은 우리에게 매주마다 그림 하나씩을 지정해 주시고, 그 그림을 자기 눈에 보이는 그대로 설명하라는 과제를 내 주셨다.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과제 주제로 나왔을 때, 나는 그림 속 여인은 초록색, 갈색 등 여러 가지 색 옷을 입고 있다고 설명했다. 교수님은 여인이 입고 있는 옷이 상복이라는 학자들의 해석대로 보지 않고, 내 눈에 보이는 그대로 본 것을 칭찬해 주셨다. 교수님은 아무리 권위 있는 학자의 작품 해석이라도 그대로 믿지 말고, 스스로 작품을 보고 해석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이 책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 또한 기존의 권위적인 해석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으로' 보자고 제안한다. 번역된 제목이나 원제 '보는 방식들(Ways of Seeing)'이나 미술 작품을 보는 하나의 표준 방식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들도 공존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영국의 비평가 존 버거(John Berger)가 40여 년 전인 1972년 BBC TV에서 강의한 내용을 모은 이 책은, 미술 작품을 신성시하고 예술은 어떤 다른 것과도 구별되는 특별한 영역으로 보는 기존의 시각에 도전한다.

  버거는 1장에서부터 이전의 미술사학자들이 미술 작품에 대해 늘어놓았던 미사여구를 걷어내려고 한다. 그는 소득이 낮을수록 미술관을 교회 같은 신성한 장소로 생각하게 된다는 통계 결과를 제시하면서, 작품이 감동적이고 신비스러워진 것은 비싼 가격 덕분이라고 말한다. 복제 기술의 발달로 어디서나 작품의 이미지를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미술 작품의 진품은 부자들의 것으로 인식되고, 불평등을 고상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고 지적한다. 미술 작품이 지닌 권위 덕분에 미술 작품 진품을 가질 수 있는 계층의 사람들은 자기 권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진품 자체의 가치를 완전히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진품에 남은 화가의 흔적이, 화가가 그 그림을 그렸던 순간과 우리가 그 그림을 보는 순간을 이어준다고 이야기한다. 미술 작품 진품은 그 작품이 그려졌던 당시의 역사적 순간을 간직해 우리 눈앞에 보여주고 있다.


(위) 한스 폰 아헨(1552-1615), <바쿠스, 케레스, 큐피드> (아래) 현대의 향수 광고


  그는 또한 미술 작품들뿐 아니라 사진, 광고 등 현대 사회를 가득 채우고 있는 다양한 이미지들까지 시야를 넓힌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 속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응시의 대상이 되는지 포착한다. 남성이 다른 사람에게 행사하는 능력으로 자기 존재감을 드러낸다면, 여성은 자신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자기 존재감을 드러낸다. 여성 자신조차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항상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버거는 벌거벗은(naked) 몸을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으로, 누드(nude)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자신을 전시하는 것으로 구분한다.  한스 폰 아헨의 작품 <바쿠스, 케레스, 큐피드>에서 케레스는 연인과 함께 있으면서도 연인이 아닌 그림 밖의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그 관객은 자신이야말로 그녀의 진짜 연인이라고 생각하는 남자, 즉 그림의 소유주이다. 현대의 광고 이미지 속 여성도 이미지 밖의 관객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이와 같이 누드 이미지에서 관객은 보통 남자이고 응시의 대상이 되는 이미지 속 인물은 보통 여자이다. 버거는 이런 불평등한 관계가 지금까지도 많은 여성들의 의식을 형성한다고 말했는데,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현실은 그가 말한 모습 그대로다.


(위)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식사>, 1863. (아래) <풀밭 위의 점심식사>를 패러디한 배달 앱 광고


  버거는 또한 다른 회화 형식과 달리 그림 속 대상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처럼 표현해 내는 유화의 특성 덕분에 유화는 자신이 지닌 재산을 과시하는 형식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미지 속 대상의 물질적인 특성을 생생히 전달한다는 공통점으로 유화와 광고를 연결시킨다. 물론 광고는 종종 사람들에게 익숙한 명화 작품의 언어를 빌려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신을 각인시킨다. 하지만 단순히 유화 작품의 언어를 빌리는 것을 넘어서서,  자신이 이미지 속 물건들을 얻은 것처럼 생생하게 느끼게 해 준다는 점에서 광고는 유화와 연결된다. 유화가 자신의 현재 상태를 과시한다면, 광고는 광고 속 물건을 얻으면 더 나아질 미래의 상태를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화가 현재 시제로 그려져 있다면, 광고 이미지는 언제나 미래 시제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버거는 이전의 미술사 논의에서 배제되었던 젠더 문제, 경제적 문제 등을 함께 고려하며 다른 방식으로 미술 작품을 보자고 제안한다. 그는 서구 유화의 전통을 현대 소비 사회의 광고와 연결짓는 등, 미술 작품에서 더 나아가 다양한 이미지들을 포함한 시각 문화를 살펴본다. 미술사, 미학이라는 범주에 국한되지 않고 문화 속 다양한 시각적 체험과 요소들을 살펴보는 시각 문화 연구가 시작된 지 이미 30여 년이 지난 지금, 그의 이야기는 이제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권위를 지닌 기존의 해석과 미술 작품이 지닌 권위에서 벗어나 새롭게 보는 방식의 단초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다른 방식으로 보기(Ways of Seeing)』는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이다. 

* 이 책의 도판은 모두 흑백으로 되어 있다. 열화당 쪽에서는 컬러 도판으로 교체할 수 있었지만 이곳저곳에서 컬러 도판을 가져오다 보면 도판들의 톤이 통일되지 않고 들쭉날쭉해져서 흑백 도판으로 통일하는 쪽을 택했다고 답변했다. 인쇄 기술을 사용해 도판들의 톤을 서로 비슷하게 조절할 수도 있지만, 모두 흑백 도판을 쓰는 쪽이 더 일관성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도판들의 톤이 서로 맞도록 조절하면서 컬러 도판을 싣는 쪽을 더 좋아하지만, 어느 쪽이 더 좋은지는 독자들 각자의 생각과 취향에 따라 다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우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9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송상기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숨은글에 스포일러 포함. PC에서는 숨은글 기능이 적용되지만 모바일, 앱에서는 숨은글 기능이 적용되지 않으니 모바일이나 앱으로 글을 보시는 분들 중에서 스포일러를 피하시는 분은 처음부터 글을 읽지 않으시면 됩니다.


 학교 국어 시간에 1인칭, 3인칭 소설에 대해 공부할 때 한 번씩은 이런 의문을 갖게 된다. '그러면 2인칭 소설은 없을까?' 멕시코의 소설가 카를로스 푸엔테스가 쓴 이 소설 『아우라』가 바로 2인칭 소설이다. "너는 광고를 읽어. 이런 광고는 날마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너는 곱씹어 읽어 보지. 바로 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한 광고야." 화자가 2인칭 '너'라고 부르는 인물은 주인공인 젊은 역사학자 펠리페 몬테로이다. 작가는 왜 이렇게 독특한 서술 기법을 사용했을까?


  작품 뒤의 해설에서는 주인공을 '너'라고 부르는 화자가 주인공의 또 다른 자아라고 설명한다. 화자는 다른 사람의 내면은 전혀 설명하지 않지만 주인공 펠리페가 어떤 것을 보고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빠짐없이 이야기한다. 소설 속의'너'를 모두 '나'로 바꾼다면 이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바뀌게 된다. 1인칭 주인공 시점과 이 소설의 2인칭 시점은 어떻게 다른 효과를 줄까?

 펠리페는 작품 속에서 자신이 도무지 알 수 없는 괴기스러운 상황 앞에 놓여 있다. 죽은 남편의 회고록을 정리하면 거액을 지불하겠다는 귀족 노부인 콘수엘로의 광고를 본 펠리페는, 연구비를 벌 생각으로 콘수엘로의 저택에 찾아갔다. 펠리페는 회고록을 정리할 동안 자신의 저택에 머물러 달라는 콘수엘로의 부탁도 흔쾌히 받아들인다. 낮에도 어두침침한 저택에서 펠리페는 존재하지도 않는 정원, 불에 타 죽는 고양이 같은 이상한 환상들을 보게 된다. 펠리페는 콘수엘로의 시중을 들고 있는 그녀의 아름다운 조카딸 아우라와 사랑에 빠지지만, 아우라는 때때로 이상행동을 보인다. 펠리페는 콘수엘로가 아우라에게 나쁜 짓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펠리페 자신이 이야기하는 1인칭이나 3인칭 작가가 말하는 것과 달리, 2인칭 시점은 펠리페의 머릿속 또 다른 자신이 펠리페에게 끊임없이 속삭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자신과 분리된 또 다른 자신이 자신을 지켜보는 것은 작품에 기괴하고 신비로운 느낌을 더하면서, 작품 자체의 결정적인 반전을 암시한다.

* 스포일러 부분 


접힌 부분 펼치기 ▼

 펠리페를 '너'라고 부르는 화자가 사실은 펠리페와 같은 사람, 펠리페의 또 다른 자아인 것처럼 콘수엘로와 아우라는 같은 인물이다. 아우라가 콘수엘로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하고,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양을 잡고 손질하는 모습, 회고록과 사진 속에서 아우라와 똑같은 모습으로 묘사되는 젊은 시절의 콘수엘로는 이런 반전의 복선이 된다. 콘수엘로는 젊은 시절 동물들까지 희생시켜 가면서 실험을 한 끝에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을 간직한 아우라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우라가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다. 콘수엘로가 펠리페에게 보여준 환상인지,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든 주술을 사용하든 자신이 조종할 수 있는 자동인형인지, 자신이 잠시 젊어지는 약을 마신 건지 알 수 없다.

 

펼친 부분 접기 ▲


  작품의 결말에서도 비밀의 진상은 완전히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비밀의 진상을 정확히 알고 싶었던 사람에게는 답답할 수도 있지만, 그 모호함이 작품을 더욱 더 괴기스럽고 신비스럽게 만든다. 흑백으로 된 고전 공포 영화를 볼 때와 같은 느낌을 주지만, 또 다른 자신이 머릿속에서 말하는 듯한 2인칭 시점은 영화로는 옮길 수 없는 문학만의 장치이다. 작품 뒤에 실린 작가 후기에서 작가는 "'너'라는 단어는 모든 시공간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넘나들며 유령처럼 움직일 때 나 자신이 된다.', '한 여성의 목소리로 젊음과 노년, 삶과 죽음을 분리할 수 없고, 젊음, 노년, 삶, 죽음이라는 이 네 가지가 서로를 부른다는 것을 증명해 냈다'고 말한다. 작가의 말처럼 정체성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확고하고 통일된 것이 아니라는 것, 욕망은 젊음과 노년의 경계도 뛰어넘어 자기만의 생명력을 얻는다는 것이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가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라말라를 보았다 - 팔레스타인 시인이 쓴 귀향의 기록 후마니타스의 문학
무리드 바르구티 지음, 구정은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라말라는 팔레스타인의 사실상의 수도이다. 팔레스타인은 예루살렘 중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하고 있지만, 동예루살렘도 사실상 이스라엘의 점령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사실상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는 도시이다. 그리고 라말라 인근의 작은 마을 데이르 가사나는 저자인 팔레스타인의 시인 무리드 바르구티가 30여 년 동안이나 돌아가지 못했던 고향이다.

 『는 라말라를 보았다』 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두 나라 정부에게 추방당하면서 30년 동안 망명 생활을 했던 저자가 담담하게 자신의 귀향을 그린 기록이다. 팔레스타인에서 이집트로 유학 와서 지내던 20대 시절인 1967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하게 되면서 저자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집트 대통령이었던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 1918-1981)는 친미, 친이스라엘 노선을 택하면서 이집트 안의 팔레스타인 망명자들을 추방했다. 그 때문에 1977년에 이집트인 아내와 5개월짜리 아들과 이집트에서 살고 있던 저자는 가족들과도 헤어져 17년 동안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녀야 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오슬로 평화협정이 체결된 지 3년 뒤인 1996년에서야, 저자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고향에 돌아온 기쁨을 요란스럽게 표현하지 않는다. 고향에 돌아온 것이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고향에 돌아왔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한 순간에 회복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추방은 당신이 속해 있던 장소에서 당신을 갑자기, 순식간에 확 잡아채 가는 것이다. 하지만 돌아가는 것은 느리기만 하다." 그가 없던 시간 동안 고향과 고향의 사람들은  각자의 시간을 살아 왔다. 이미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저자의 헝가리인 친구의 한 마디는 이런 현실을 정확하게 포착한다. "헝가리 속담이 하나 있어. 식은 양배추는 다시 데울 수 있지만 맛을 똑같이 살리진 못한다는 거지."


  그리고 그는 이미 뿌리 뽑힌 삶에 익숙해져 있다. 커피포트, 커피잔까지 잠시 머무는 곳의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고, 호텔 방에 놓인 꽃병의 물을 갈아주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서 저자는 자신의 뿌리 뽑힌 삶을 실감한다. 자신도 고향도 변해 버린 상황의 근본적인 원인이 이스라엘의 점령이라는 것을 그는 잊지 않는다. 그는 고향 마을의 과거를 그리워하지만, 과거의 추억에 집착하지 않는다. 점령 때문에 자신이 떠나기 전의 모습에서 전혀 발전하지 못한 고향의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마치 주인이 잃어버린 개나 장난감 강아지처럼...멀리 걷어차 더 나은 미래, 다가올 날들을 향해 내몰고" 싶어 한다.


 저자는 정치적인 문제보다는 호텔의 꽃병, 자신들과 친구들, 이웃들이 겪는 일상 속 기쁨과 슬픔, 고통을 더 많이 이야기한다. 그런 일상적인 이야기들 속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점령으로 인해 어떤 고통을 겪는지 드러난다. 가족들은 주변 여러 나라로 뿔뿔이 흩어져 있어 몇 년에 한 번 만나고, 한밤중에 갑자기 전화로 가족이나 친구가 살해되거나 '순교'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저자는 일기를 써 내려 가듯 그 모든 현실을 담담하게 기록한다. 그는 "고관들이 쓰는 웅장한 수식어나 현란하고 거짓된 말들을 모두 거부하고", 평범하고 일상적인 언어로 전쟁과 폭력 속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그는 자신이 정치 활동에는 소질도 없고, 집회에 참가해도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치거나 소리 높여 요구하는 일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다. 그는 평화협정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현실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고, '순교자'들만 늘어가는 현실을 애국심과 민족주의로 가리는 팔레스타인 언론들을 비판한다. "팔레스타인은 다른 나라, 다른 민족과 다른 기적의 민족이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TV 프로그램 진행자에게 모든 사람이 조국을 사랑하고 조국을 위해 싸운다, 다른 민족과 비교해 나을 것도 못할 것도 없다고 대답한다. 고국을 사랑하지만 애국심과 민족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희생된 이스라엘 국민과 군인들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스라엘 지도자의 발언에 대해, 가해자가 먼저 가해를 가한 첫 번째 이야기를 빼고, 피해자가 반격한 '두 번째 이야기'부터 시작하면, 피해자가 가해자로, 가해자가 피해자로 뒤바뀌는 현실을 지적한다. 세상은 억압 받는 사람들이 저항하면 그 저항을 폭력으로 규정하고, 반격을 당한 가해자들을 피해자로 규정한다.


 이 책은 20여 년 전인 1996년 팔레스타인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2008년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습, 2010년 팔레스타인 정치지도자의 암살, 2012년과 2014년의 가자 지구 공습이 이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팔레스타인도 그때의 팔레스타인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20여 년 전과 마찬가지로 일상은 계속되고, 저자와 같은 팔레스타인은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도 일상을 유지하려 애쓰고 그 일상을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뿌리 뽑힌 삶이라도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 이 책은 아랍어 원서를 직역한 것이 아니라 영역판을 중역한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 특유의 시적이면서 간결한 문체가 작품 전체에 시적이고 담백한 느낌을 준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침묵 믿음의 글들 9
엔도 슈사쿠 지음, 공문혜 옮김 / 홍성사 / 200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스포일러 포함

  몇 년 전 방효유(孺, 1357-1402)라는 명나라의 선비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방효유는 영락제(永樂帝, 재위 1402-1424)가 자기 조카의 제위를 찬탈하고 황제가 되었을 때 그의 신하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의 뛰어난 능력을 아깝게 여긴 영락제가 그를 회유하려 해도 방효유는 듣지 않았다. 이에 영락제는 방효유의 가족과 친척, 친구와 제자들까지 800여 명을 그의 눈앞에서 한 명씩 처형하며 그의 뜻을 꺾으려 했다. 그러나 방효유는 800여 명 모두가 처형될 때까지도 끝까지 자기 뜻을 꺾지 않았고, 마지막으로 자신도 처형되었다. 덕분에 방효유는 만고의 충신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생각했다. 자기 신념을 지키겠다는 이유만으로 그 많은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킬 권리가 과연 있을까? 그럴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래서 내가 방효유라면 역사에 변절자로 남더라도 사람들을 살리고 영락제에게 굴복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 에서 주인공 세바스티앙 로드리고 신부도 같은 딜레마에 놓이게 된다. 17세기 초 천주교에 대한 일본 정부의 탄압이 극심하던 시절, 로드리고 신부는 일본에 잠입했다 정부 관리들에게 체포된다. 그리고 배교를 하면 신자들을 살려줄 것이고, 배교를 하지 않으면 신자들을 죽이겠다는 정부 관리의 협박을 받게 된다. 동료인 프란시스코 가르페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순교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로드리고 신부는 신자들을 살리고 배교하는 길을 택한다. 

  어떻게 보면 변절자의 변명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신념이나 신앙도 사람에 대한 사랑보다 위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만고의 충신이라는 명예를 버리고 변절자가 되더라도 사람들을 살리고 싶었던 내 마음도, 배교자가 되어 파문당하고 본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되더라도 사람들을 살리려고 했던 로드리고 신부의 마음도 같다고 생각한다. 내가 더럽혀지더라도 그 덕분에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더러워지겠다는 마음, 그 마음은 자신을 낮추고 희생해서 인간을 구원하려 했던 예수의 마음과 통하는 데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로드리고 신부는 배교를 하는 순간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배교를 하고 일본식 이름까지 받은 뒤 일본인으로 살게 된 로드리고 신부와, 그가 오기 이전에 그와 같은 일을 겪고 같은 처지에 있던 페레이라 신부는 천주교를 믿는 주민들은 없는지, 다른 유럽의 선교사들이 일본에 잠입하지는 않는지 감시하는 일까지 맡게 된다. 그 모습이 네덜란드 선원의 눈에는 영낙없는 배교자, 경쟁 상대인 다른 유럽 국가들을 견제하는 이기적인 포르투갈인의 모습으로 보인다. 하지만 로드리고와 페레이라는 그 와중에도 발각된 천주교 신자들을 구명하려 애썼다. 그리고 외국인 선교사들을 고발하는 것도, 더 이상 그들로 인해 죽어가는 신자들이 없게 하려는 노력이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일본 정부에 영합하는 비루한 인생으로 보였겠지만, 신의 눈에는 그들의 진심이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천주교에는 수많은 순교 성인들의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하지만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명예와 사제로서의 삶까지 내려놓은 로드리고와 페레이라 역시 순교자들 못지않게 신과 사람들을 사랑했다고 생각한다. 로드리고는 마지막으로 말한다. 지금까지와는 아주 다른 형태로 그분을 사랑하고 있다고. 나의 오늘까지의 인생은 그분과 함께 있다고. 사랑을 위해서 신념을 꺾는 것 또한 많은 용기와 희생이 필요한 일이고 큰 사랑의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고, 내가 같은 상황에 놓였더라도 그들과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