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슬람문화 체험기
최영길 지음 / 한길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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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 전문가 최영길 교수가 사우디아라비아 유학 시절부터 틈틈이 써 오던 일기와 기록을 바탕으로, 자신이 36년 동안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이슬람에 대해 정리했다. 나름대로 이슬람 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어봤더니 몰랐던 것들이 많아 흥미로웠다. 역시 그곳에서 직접 보고 듣고 겪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은 것 같다. 


작자 미상의 19세기 페르시아 세밀화. 막 창조된 아담에게 절하는 천사들. 이슬람교에서 아담은 천사들의 절을 받을 정도로 고귀한 존재였고, 에덴에서 추방당한 죄인이 아니라 신에게 지상을 다스릴 권리를 부여받은 사람이다.


  특히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가르침이나 성경 해석은 그가 고대 사람인 것을 감안했을 때 매우 합리적이라는 것이 흥미로웠다. 아내를 네 명까지 둘 수 있다는 이슬람 법은 아내를 재산 취급한 것이 아니라,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들과 아버지를 잃은 고아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여러 아내를 두었을 때 아내들을 모두 공평하게 대해야 한다고 규정해 놓았다. (물론 지금의 이슬람권의 일부다처제가 이런 선한 의도에서만 이루어진다고 보기 어렵긴 하다.) 무함마드는 아담은 원죄를 지은 벌로 천국에서 쫓겨났다는 기독교의 주장과 달리, 신에게서 지상을 다스릴 권한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을 원죄를 지고 사는 죄인에서 신에게 지상을 다스릴 권한을 받은 신의 상속자로 높인 것이다. 또한 자기 생각 없이 책 속의 지식을 그저 주입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책을 지고 가는 당나귀나 다름없다"고 하는 이슬람의 속담 등 무슬림이 아닌 사람들도 곱씹어볼 만한 가르침들도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 영화 '와즈다'의 한 장면. 여성은 운전을 할 수도 없어 운전사를 따로 고용해야 하고, 자전거를 탈 수도 없는 등(이 영화가 만들어진 이후에서야 여성이 자전거를 타는 것이 허용되었다.) 일상생활에서도 억압 받는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가 천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쿠란의 한 구절 한 구절을 그대로 실정법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여성의 권리에 있어서 그렇다. 무함마드가 코란을 쓴 당시는 여권이 지금보다 매우 낮은 때였기 때문에 코란으로 규정된 이슬람 법이 오히려 여성을 배려하는 편이었지만, 천 년하고도 수백 년이 지난 지금은 여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여성을 옥죄고 있다. 그리고 무슬림들은 자신들이 외적인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서구와 달리 내면의 아름다움을 중시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독실한 무슬림 여성은 노년에 세상을 떠나도 천국에 가면 생리도 하지 않는 아름답고 순결한, 젊은 아가씨로 변화한다는 이야기를 읽고, 생리를 불결한 것으로 여기고 아름답고 젊고 '순결한' 여성을 선호하는 무슬림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알라와 무함마드도 아름다움을 좋아하니 그 뜻을 따른 거라고 하지만 어쩐지 변명처럼 들린다. 그리고 생리를 불결하게 여긴다는 것 자체도 문화상대주의를 감안하더라도 여성에 대한 편견으로 보인다. 저자의 이슬람과 이슬람 문화에 대한 애정이 깊은 것은 알겠지만, 이슬람 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전혀 없는 점은 아쉬웠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최초의 이슬람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는데, 그 이야기가 더 자세히 나왔으면 했다. 부산 남도여중의  학생들과 최초의 이슬람 고등학교 알리고 학생들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이슬람교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장학금 혜택이 있다고 해도 술도 마실 수 없고 돼지고기도 먹을 수 없는 등, 일상생활에서도 지켜야 할 규칙들이 많은데 학생들이 선뜻 이슬람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계기가 자세히 나오지 않아 궁금했다. 그리고 무슬림이 되고 나서도 자신의 원래 생활습관과 교리 사이의 충돌 때문에 힘들어하는 학생들은 없었을지 궁금하다. 그저 우리나라에도 이런 이슬람 학교가 있었다는 정도의 설명으로 끝난 것이 아쉽다.


 또한 사진 자료들이 모두 흑백 사진이어서 시각적인 면에서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 어려운 점이 아쉽다. 내용은 정말 알찬데 내용으로 진입하는 통로인 시각적인 부분이 아쉽다. 그래서 한길사 편집자가 꼽은 "많이 알려지지 못해서 아쉬운 책"으로 선정되기도 한 것 같다. 시각적인 면과 이슬람에 대한 좀 더 냉철하고 균형 잡힌 시각이 보완되어 개정보완판이 나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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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파시즘 - 선(禪)은 어떻게 살육의 무기가 되었나?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 지음, 박광순 옮김 / 교양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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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신의 뜻을 따른다는 명분으로 종교가 폭력을 부추길 때가 있다기독교의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이슬람교의 일부 근본주의자들의 테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그런데 자비를 강조하는 종교인 불교마저도 부처의 뜻이라는 명분으로 폭력을 부추긴 적이 있었다이 책은 일본 군국주의에 영합해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하고 부추겼던 일본 선불교의 어두운 역사를 폭로한다.


자비를 강조하고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와 살생을 할 수밖에 없는 군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저자는 중세시대에 일본의 무사와 병사들이 선불교의 금욕적이고 극기심을 키우는 수행 방법이 의지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선불교를 가까이 하면서 둘이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군국주의가 일본을 지배하기 이전인 17세기에 이미 선사 다쿠안 소호가 "치켜든 칼에도칼을 휘두르는 사람에게도 자신의 의지는 없고 텅 비어 있다"선불교의 교리를 교묘히 이용해 무사들의 살생을 정당화했었다.


저자는 이어서 일본 선불교가 세계대전 기간 동안 어떻게 일본 군국주의에 영합해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해 왔는지를 낱낱이 폭로한다. 자원입대해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적군들을 죽인 제자와, "부처님께서 사회의 화합을 깨뜨리는 자를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며 제자의 입대를 말리기는커녕 격려한 스승 선사도 있었다세계대전 당시 선불교의 지도자들은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선불교의 교리를 천황과 국가를 위해서는 기꺼이 자아를 버릴 수 있다는 방식으로 해석해일본의 수많은 군인들과 민간인들을 전쟁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도록 몰아갔다. 교리를 교묘하게 해석하며 살생과 폭력을 정당화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선사들의 모습은 독자들의 치를 떨리게 한다.


후기에서 저자는 뒤늦게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일본 선불교 지도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것이 선불교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첫 단계라고 말한다일본 선불교 승려로서 일본 선불교의 지도자들의 과오들을 폭로하고 고쳐나가길 바라는 저자의 용기와 객관성은 이 책의 가치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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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교회 - 권력에 중독된 한국 기독교 내부 탐사
김지방 지음 / 교양인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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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시장 재직 당시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겠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새 정부에 자신이 다니던 교회 출신 인사들을 등용해 또 한 번 논란을 빚었었다. 그뿐만 아니라, 개신교계는 사립학교법 개정,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하는 등 국가의 입법 활동에도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여 왔다. 또 보수 성향의 거대 교회 목사들이 설교 시간에 공공연히 대선에서 개신교인 후보를 지지하라고 주장하고, 자신들이 직접 주축이 되어 정당을 세우기도 하는 등 한국 교회는 매우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 왔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 교회의 절대 다수를 이루고 있는 보수 교회의 정치 참여를 비판한다. 그는 기독교인이지만 보수 교회들의 권력을 향한 투쟁이 교회의 본분을 잊고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는 보수 교회의 정치적 정체성이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먼저 짚어본 뒤, 한국 교회 안의 정치적 성향을 다섯 갈래로 분류하고, 그 중에서 보수 교회의 정치 활동들과 그 문제점들을 살펴보고 있다. 여러 입장과 여러 가지 쟁점이 복잡하게 뒤얽힌 문제지만 체계적인 분석과 간결하고 명쾌한 문장으로 이해하기 쉽게 정리했다. 또한 교회의 비뚤어진 권력욕에 대한 냉철하고 날카로운 비판은 그 동안 한국 보수 교회의 신앙을 빙자한 권력욕에 염증을 느끼던 독자의 마음을 후련하게 한다. 

 이 책은 교회의 정치 참여는 권력을 향한 질주가 아닌 권력에서 소외된 이들을 향한 섬김의 활동이 되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옳은 이야기이지만 원론적인 결론이고, 교회의 정치 참여에서의 문제점들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 방법을 제시하지는 못하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문제점에 대한 의견은 기독교 외부에서의 원색적인 비난이나 기독교 내부에서의 무조건적인 옹호가 대부분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기독교 내부에서 이만큼 체계적이고 냉정한 자기비판이 나왔다는 것은 긍정적인 점이다. 

 그런데 이런 내부 비판을 한국교회가 받아들이고 문제를 개선해 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 책이 출간된 뒤 11년이 지난 지금도 교회의 정치 참여가 소외된 이들을 향한 섬김의 활동보다는 권력을 향한 질주에 가깝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얼마 전 총선에 출마한 어느 기독교 정당 후보의 공약집에는 비기독교인들, 성소수자들, 무슬림 이주자들에 대한 편견이 가득했다. 그러면서 소외된 이들을 돕겠다는 공약을 내세우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그 후보가 모든 한국 교회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소수자들에 대한 편견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면서 출마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한국 교회의 문제 아닐까. 예수가 강조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사랑이었다는 것을 정치에 참여하려는 한국 교회들이 기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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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아이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9
나지브 마흐푸즈 지음, 배혜경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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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포함

 나홍진 감독은 자신의 영화 '곡성'이 신에게 질문하는 영화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선입니까, 악입니까. 진짜 존재는 합니까. 존재한다면 왜 방관합니까. 그 질문을 '곡성'을 통해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이집트의 작가 나지브 마흐푸즈의 소설 『우리 동네 아이들』 속 등장인물들도, 그들을 지켜보는 독자들도 같은 질문을 하게 된다. 작품 내 분량은 적지만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인물 자발라위는 신을 상징한다. 자발라위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 아드함(아담을 상징)이 이복형 이드리스(사탄을 상징)의 음모로 아버지의 대저택(에덴 동산을 상징)에서 쫓겨난 이후, 아드함과 이드리스의 후손들은 대저택 아래에 마을을 형성한다. 작품의 주요 배경인 이 마을은 이 세상의 축소판이다. 마을 사람들은 권력자들과 그 하수인들의 폭력과 억압 속에서 힘겹게 살아간다. 고단한 삶 속에서 마을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자발라위의 정의가 이 마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억울한 일이 있을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신 대신 자발라위의 이름을 부르지만, 자발라위는 아드함이 쫓겨난 이후로 수백 년 동안 대저택 안에서 나오지 않는다.

  자발라위가 나오지 않는 대신, 수십 년, 또는 수백 년마다 구원자가 나타난다. 그들은 자발라위나 그가 보낸 하인을 만나 마을에 정의를 펼치라는 계시를 받는다. 그들은 다른 마을 사람들보다 훨씬 강한 능력과 의지로 압제자들을 몰아내고 마을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온다. 하지만 그들도 인간이기에 한계가 있다.  자발(모세를 상징)은 자신들을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른 구역 사람들이 도움을 요청해도 외면했고, 리파(예수를 상징)는 너무나 순수한 나머지 현실감각이 부족했다. 카심(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를 상징)은 압제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들의 개혁은 일시적인 것일 뿐, 이들이 죽고 세월이 흐르면 마을은 원래의 비참한 모습으로 돌아간다. 이들의 한계를 보면서 묻게 된다. 자발라위, 즉 신은 왜 불완전한 인간들에게 정의를 실현하라고 맡기고 자신은 방관하고 있을까?

 마을 사람들 중 유일하게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직접 나선 사람은 마법사 아라파였다. 마법사라지만  그가 실제로 하는 일은 약과 폭약을 만드는 것이다. 의약과 무기를 개발하는 과학자를 상징하는 것이다. 과학자답게 그는 의문에 대한 답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선다. 그는 대저택에 잠입하지만 자발라위의 하인에게 들키고, 당황한 나머지 그를 실수로 죽이고 만다. 하인의 죽음으로 충격이 컸는지 수백 년을 살아왔던 자발라위는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다. 

 '자발라위를 죽인 자'라는 아라파의 비밀을 알고 있는 권력자는 그를 보호해 주는 조건으로 아라파의 폭약 비법을 독점한다. 아라파의 폭약을 이용해 권력자는 무자비하게 정적들을 숙청하고, 마을은 피로 물든다. 마을 사람들의 원한을 사 아라파는 권력자의 보호 아래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되고, 마을을 구원하겠다는 원래의 포부도 잃은 채 무기력하게 살아간다. 그런데 어느 날 그에게 자발라위의 하녀가 찾아와 뜻밖의 말을 한다. 자발라위는 아라파가 한 행동에 흡족해하면서 죽었다는 것이다. 

 형의 꼬드김으로 자기 유언장을 보려고 했던 아드함은 내쫓고 수십 년 동안 돌아보지도 않았으면서, 자기 하인을 죽이기까지 한 아라파의 행동에는 흡족해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가능성은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자발라위는 마을 사람들 중 유일하게 자신을 직접 찾아올 생각을 한 아라파의 의지 자체를 보고 흡족해한 것일 수 있다. 아니면, 하녀 자체가 아라파의 환상일 수도 있다. '너는 자발라위를 죽이지 않았고, 나는 네 의도가 선했다는 것을 안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아라파의 환상. 아라파뿐만 아니라 이 책의 다른 주인공들도 모두 환상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자발라위나 그의 하인을 만났고, 그들이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들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후자가 더 납득이 간다. 전자가 진실이라고 해도 묻고 싶어진다. 흡족해하기만 하고 돌아가시면 어쩌란 겁니까. 왜 지금까지 후손들에게만 정의를 실현하라고 맡겨놓고 있었는지, 방관하고 있었는지 한 마디 대답도 없이요. 

 자발라위의 죽음으로 마을 사람들은 영영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신도 죄 없는 자신에게 갑자기 고난이 닥친 이유를 묻는 욥에게 "네가 신의 섭리를 어찌 알겠느냐"라고만 말할 뿐, 이유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신마저 죽고 사라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또 다른 구원자가 나타나길 기다릴 뿐이다. 그들이 구원하는 구원자가 나타나도 구원은 일시적인 것일 뿐, 사람들은 그를 잊어버리고 폭력과 억압은 계속될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신이 왜 인간의 고통 앞에서 방관하는지에 대한 답은 내놓지 않는다. 다만 신의 방관 속에서도 신을 믿으며 살아온 사람들, 신이 죽고도 또 다른 구원자를 기다리며 희망을 놓지 않는 사람들을 보여줄 뿐이다. 신의 답을 알 수는 없더라도 신이나 또 다른 누군가의 구원은 반드시 온다는 믿음이 있기에 그들은 살아갈 수 있다.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도 우리는 신의 답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구원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붙잡고 묵묵히 살아갈 것이다. 소설 속 마을 사람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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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예루살렘
기 들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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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예루살렘에 갔을 때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은 내가 상상했던 예루살렘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아래 사진처럼 바위돔 사원의 거대한 황금색 돔이 보이는 예루살렘 성의 모습이다. 실제로 예루살렘에 가면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이 풍경이 예루살렘의 전부는 아니다. 



건너편에서 바라다 본 예루살렘 성벽 안 구시가지. 이슬람의 성지 중 하나인 바위돔 사원의 황금색 돔이 보인다. 성벽 아래에는 수많은 무덤들이 있는데, 유대교의 전승에 따르면 메시아가 오는 날에 성벽 아래 무덤들에 묻힌 사람들이 모두 부활한다고 한다.


  내가 묵고 있던 숙소가 있는 동예루살렘의 풍경은 이 두 번째 사진에 더 가까웠다.  이것이 사람들이 익숙하게 아는 예루살렘의 또 다른 모습이다. 다닥다닥 붙은 낡고 허름한 건물들, 길가에 아무렇게나 널린 쓰레기들과 건축자재들. 예루살렘이라기보다는 아랍권 국가의 한 가난한 동네로 보이는 황량한 풍경.


이 책의 작가 기 들릴도 국경 없는 의사회의 행정직원인 아내를 따라 동예루살렘에 왔을 때, 자신의 상상과는 다른 동예루살렘의  황량한 모습에 놀랐다. 내가, 그리고 그와 그의 가족들이 머물렀던 동예루살렘은 원래 아랍인들의 영역이었지만, 1967년 전쟁으로 이스라엘에 합병된 곳이다. 국제사회에서는 이곳이 팔레스타인의 서안 지구에 속한다고 보고, 이곳의 주민들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이스라엘 영토라고 주장한다.  가난한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사는 황량한 동예루살렘의 모습은, 중동이라기보다는 유럽의 도시처럼 보일 정도로 번화하고 깨끗한 서예루살렘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저자는 1년 동안 예루살렘에 머무르면서 이런 예루살렘의 다양한 모습을 만화로 기록했다. 그 기록이 이 책 『굿모닝 예루살렘』이다.

분리장벽 앞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주민의 모습. 이처럼 예루살렘에는 억압과 일상이 공존한다.


  이 책에서 작가는 예루살렘에서의 일상을 담담하게, 하지만 세밀하게 기록한다. 그가 본 예루살렘은 폭력과 일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공존하는 곳이다. 검문소에서 누군가 돌을 던지자 검문소를 지키던 이스라엘 군인들은 최루탄을 쏘아서 아수라장이 된다. 그 와중에도 빵 장수는 참깨빵을 팔겠다고 군중들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닌다. 작가는 유대인들의 불법 정착촌에 있는 대형마트에서 물건을 사려다 '정착촌에서 물건을 사는 것은 이스라엘의 점령을 인정하고 부추기는 행위'라는 국경 없는 의사회 직원의 말을 떠올리고 쇼핑을 포기한다. 그런데 막상 쇼핑을 포기하고 나오니, 정작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그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정착촌의 유대인 가족은 총을 메고 동물원 나들이를 한다. 너무나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폭력과 일상이 공존해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예루살렘의 일상을 작가는 유머러스하게 풀어간다. 


기 들릴이 작업실로 사용했던 아우구스타 빅토리아 병원 구내의 예수승천교회의 사진(위)과 만화에서 그려진 교회(아래). 그는 이 교회 목사의 양해를 구해 교회 안의 작은 방에서 이 만화를 그렸다.


 작가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과 억압을 목소리 높여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폭력과 억압 속에서도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보여줄 뿐이다. 그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논평하는 대신, 그곳 사람들이 그런 일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직접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가 보여주는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사람들의 모습은 내가 머물고 있을 때와 그렇게 달라지지 않아, 읽으면서 반갑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다.  그는 내가 머물고 있던 아우구스타 빅토리아 병원의 게스트하우스와 같은 구내에 있는 예수승천교회에서 이 만화를 그리고 있었다. 내가 예루살렘을 여행한 뒤 몇 년 뒤의 모습인데도, 만화 속 교회를 포함한 예루살렘 곳곳은 그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분리장벽과 검문소, 정착촌, 그 때문에 고통 받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그때와 같아 나를 슬프게 했다. 내가 예루살렘을 떠난 지 몇 년이 지난 뒤에도 예루살렘은 전과 같은 모습이었고, 그가 예루살렘을 떠난 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예루살렘은 전과 같은 모습일 것이다. 

 지금도 때때로 이 책을 보면서 예루살렘을 기억한다. 머물고 있으면서도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되기도 하고,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들을 보게 되기도 한다. 예루살렘에 갔던 사람들에게나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나, 이 책은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사람들, 그들이 겪는 폭력과 일상을 기억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가 망각과 무관심에서 벗어나 폭력 속에서도 일상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기억할 때,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사람들의 현실은 조금씩이라도 변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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