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반 고흐, 내 영혼의 자서전 - 개정판
민길호 지음 / 학고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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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학교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하다 모르는 아이에게 "얘, 너 그렇게 쉬엄쉬엄 달리면 오히려 살이 더 쪄."하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피했다. 날씬하지도 못하고, 그애에게 상관 말라고 대꾸도 못한 내 자신이 창피했다. 잘난 데가 하나도 없고 소심하기만 한 내 자신이 한심했다. 게다가 그때 학교에는 내 마음을 터놓을 친구도 거의 없었다. 


기분 전환을 하러 자주 들르던 동네 서점에 갔다. 그 때 눈에 띈 책이 이 책이었다. 고흐 관련 다른 책들과 달리 반 고흐의 자서전 형식으로 쓴 책이었다. 물론 반 고흐 자신이 쓴 자서전이 아니라 한국인 작가가 반 고흐 자신이 서술하는 방식으로 쓴 평전이었다. 반 고흐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느낌이어서 책에 빠져들어서 읽었다. 그러면서 반 고흐도 나처럼 자신이 못나게 느껴져서 힘들고, 외로웠구나, 하고 생각했다. 반 고흐와는 공통점이라고는 없는 먼 나라의 아이가 반 고흐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위로를 받았다. 그때부터 나는 반 고흐를 사랑하게 되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반 고흐의 이야기가 듣고 싶고 그의 그림이 보고 싶을 때는 이 책을 펼쳤다. 반 고흐에 대한 다른 책들도 읽어보면서 이 책의 저자가 자기 상상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반 고흐에 대한 나름대로의 조사와 연구를 바탕으로 반 고흐의 삶을 촘촘히 재구성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록들 사이의 비어 있는 부분은 "반 고흐라면 이렇게 생각하고 느꼈을 것이다"라는 가정으로 채워지지만, 저자가 반 고흐가 되어 그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헤아리려는 노력을 느낄 수 있었다.


빈센트 반 고흐, 유리잔에 꽂힌 활짝 핀 아몬드꽃 가지, 1888. 


봄기운을 담뿍 머금고 활기차게 뻗은 가지에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맺은 아몬드꽃. 저를 보며 희망의 손짓을 하는 듯, 활짝 핀 꽃송이들은 저의 미래를 약속하는 천사의 미소 같습니다.

푸른색으로 그 꽃이 담긴 유리잔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기쁨과 희망을 뜻하는 노란색이 잔을 받치고 있습니다. 또 저의 영혼의 움직임은 한 줄의 빨간색으로 표현했습니다. 이제 저는 자유인입니다. 철창에 갇힌 새가 아닙니다. 

맘껏 날개를 펴고 푸른 하늘을 끝없이 날렵니다. 어떠한 고통이 오더라도 제가 가고 싶은 그곳을 향하여 두 날개가 다 찢어져 바람에 날리는 그때까지 쉬지 않고 날아갈 겁니다.

서명은 왼쪽 윗부분에 했습니다. 빨간색으로 빈센트(Vincent)라고 썼습니다. 제 영혼의 약속입니다.

 저자는 반 고흐의 작품을 묘사할 때 미술적 기법에 대한 설명이나 단순한 작품 감상에 그치지 않고 그림을 그려나가듯이 그림을 이야기한다. 작가 자신이 반 고흐가 되어 그림을 그려가는 거니까. 사실은 저자의 목소리지만 반 고흐가 직접 자신의 작품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아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묘사는 이 부분이다. 단순한 작품 묘사가 아니라 반 고흐의 설렘과 희망을 느낄 수 있고, 그 설렘과 희망이 내게도 전해지는 것 같아서. 


머리가 크고 나서 더 이성적으로 이 책을 보게 되면서, 이 책의 근본적인 한계를 깨닫게 되었다. '반 고흐 자신이 이야기하는 반 고흐'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저자가 이야기하는 반 고흐'인 것이다. 반 고흐 자신이 남긴 기록들과 그에 대한 연구 결과를 충실히 반영했지만 결국은 작가 자신의 추측과 주관적인 의견으로 만들어낸 반 고흐의 모습이다. 지금 다시 보면 지나치게 감상적인 부분들과 지나치게 반 고흐의 기독교 신앙을 강조한 부분들도 적지 않다. 거기에 거부감을 느끼고, 저자가 보여주는 반 고흐의 모습에 공감하지 못하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 고흐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형식은 제3자인 저자가 반 고흐의 삶을 설명하는 형식보다 독자들에게 편안하게 다가간다. 그래서 어린 나도 반 고흐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기분이 되어 책에 빠져들 수 있었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반 고흐의 모습이 실제 반 고흐의 모습과 완벽히 같을 수는 없겠지만, 반 고흐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어린 시절과 달리 감정적인 거리를 어느 정도 두고 보니 허점도 군데군데 보이지만, 반 고흐를 사랑하게 만든 책이라는 점에서 나는 이 책을 아직도 많이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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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
계승범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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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사극에서 본 선비들은 멋있고 존경스러운 사람들이었다. 어린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게 대항한 사육신들, 개혁을 추진하지만 훈구파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쳐 뜻을 이루지 못한 조광조는 내 어린 시절의 영웅이었다. 그런 내게 국사 선생님이 물었었다. "사육신이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해 난을 일으킨 게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 그 사람들이 성공했다면 조선이 더 나아졌을까?" 어린 시절에는 그 사람들의 진정성이 의심받는 거 같아 내가 다 분했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니 나도 그 점이 의문이다. 또, 조광조가 누구를 위해서 개혁을 추진했는지, 그 개혁이 조선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것이었는지 따져보면 그의 개혁이 실효성이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이 책은 그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시작한다. "선비가 권력을 잡으면 과연 나라가 좋아질까?"


사극 '여인천하(2001)' 속 중종(최종환)과 조광조(차광수)의 모습. 조광조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관청 소격서를 철폐하라고 강력히 주장하고, 결국 뜻을 이루어낸다. 하지만 소격서 혁파가 조선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저자는 유교 정치 이념의 근간인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이론 자체의 가치는 인정한다. 수신(身), 즉 개인의 도덕적 수양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인류가 추구한 지고의 가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수신과 제가, 치국을 모두 제대로 이룬 선비는 얼마나 될까다. 수신도 제가도 이루지 못한 채 치국에는 더더욱 무능했던 반례가 더 많다고 저자는 꼬집는다. 

 또한 저자는 덕치와 교화라는 유교 정치의 이상의 허구성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유교 정치는 힘이 아닌 덕으로 다스리는 정치, 덕치(德治)를 추구한다. 선비들은 먼저 덕을 쌓은 뒤 자신의 덕으로 백성들을 교화함으로써 사회를 유지하려 했다. 하지만 개인의 모범적인 행동을 통해 사회를 교화하는 것은 고도의 국가 체제에서는 현실성이 전혀 없는 일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유교에서 말하는 덕의 개념은 현실 정치에서 적용되기에는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2010)'에서 정약용(안내상)은 여자도 제자로 인정하고, 제자들에게 편견에 갇혀 있지 말라고 가르치는 개방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러나 실제 역사 속에서 그는 공노비 해방이 국가 기강을 무너뜨리는 조치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서 저자는 선비들이 나라를 이끈 결과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낱낱이 폭로한다. 18세기 후반부터 노비 제도는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해, 마침내 1894년 갑오개혁으로 완전히 폐지된다. 그러나 노비 제도가 폐지되는 데 선비들은 어떤 기여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우리에게 선구자라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정약용조차 1801년의 공노비 해방이 국가의 기강을 무너뜨리는 조치였다며 비판했다. 선비들은 노비들에게 측은지심을 보이기는 했지만 노비제도를 포함한 신분 질서는 끝까지 고수했던 것이다. 양반도 군포(軍布, 군역 대신 세금으로 나라에 바치는 베)를 내는 호포제(戶布制)는 양반들의 반대에 부딪쳐 결국 실행되지 못했고, 정약용조차 호포제 실시를 주장했을 뿐 양반들도 군복무를 해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기득권, 자신들이 살아가는 시대 의식을 넘어서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하지만 국가의 지배층인 선비들 중에 그런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는 것이 조선의 문제였다. 

 또한 우리가 국사 시간에 견제와 균형의 정치로 배웠던 붕당 정치에 대해서도 저자는 회의적이다. 당쟁의 폐해는 일본 학자들이 악의적으로 언급하기 전에 이미 조선 내부에서도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고 개탄하는 문제였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려면 상대에 대한 존중과 공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조선의 붕당들에는 그러한 자세가 없었다. 오히려 한쪽이 권력을 독점하고 한쪽은 몰락하는 치열한 정권 쟁탈전만이 계속됐다. 그 쟁탈전을 통해 더 건설적인 의견이 나와 조선 사회를 발전시키는 일도 없었다. 

 이렇게 기존의 질서와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태도에서 벗어난 선비들이 개혁을 제대로 이루어낼 리는 없었다. 조선 후기 청과 일본이 상공업의 발달로 부를 쌓아가고 있을 때, 선비들은 근검절약만을 강조하며 국가의 부를 키울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들이 신경쓴 것은 새로운 부의 창출이 아닌 한정된 부의 분배 문제였다. 선비들이 권력을 잡은 16세기 후반부터 조선과 일본의 경제적 격차는 급격하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선비들이 만든 나라의 실상이었다.

 책의 논조가 너무 과격해 반박하고 싶기도 했지만, 하나 하나 따져 보면 다 맞는 말이라 반박할 수 없었다. 나는 역사 지식이 짧아 저자에게 반론을 제기할 만한 반례를 알지 못한다. 존경하고 우러러봤던 선비들과, 그들이 만든 나라의 한계를 보니 씁쓸했고, 부디 저자에게 반박할 수 있는 반례 하나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럼에도 자신과 시대의 한계 속에서 최선을 다했던 선비들도 있지 않았을까, 환상을 깨고 본 선비들의 실상이 우리들의 반면교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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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이성형 지음 / 까치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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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나는 마드리드, 파리, 베네치아, 피렌체, 로마, 나폴리, 아테네를 발견했다. 이미 1947년에 나는 뉴욕을 발견한 바 있었다. 1956년에는 런던, 안트베르펜, 브뤼셀을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쓴 시와 엽서 몇 편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흥미로운 발견을 이야기하고 있는 텍스트를 보지 못했다. 아마도 내가 이 유명한 도시들을 처음 방문했을 당시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숙연한 침묵으로 이끄나보다.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태어났고 살고 있는 대륙에 몇몇 유럽인들이 도착한 것을 우쭐대며 부르는 소위 '아메리카의 발견'이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구나.

 

  쿠바의 작가 레타마르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이렇게 비꼬았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국가와 문명을 세우고 살아가고 있는 대륙을 자신이 '발견'했다고 주장한 콜럼버스. 이 '발견'이라는 말 자체가 폭력의 언어였다. 이 말이 아메리카 대륙에 살고 있던 사람들과 그들이 세운 문명의 존재 자체를 은폐하고 지워버렸다. 아메리카 대륙은 실제로는 수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인도로 둔갑했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은 정복되고 교화되어야 할 야만인이 되었다. 


 콜럼버스의 '발견'은 유럽인들에게 눈부신 발전의 시작이었지만 아메리카인들에게는 거대한 비극의 시작이었다. 콜럼버스 이후 유럽을 세계 체제의 중심, 그 밖의 지역을 주변으로 규정하는 유럽 중심의 세계사에 맞서 이 책은 "정치적으로, 지정학적으로 좀 더 공정한 역사"를  이야기하려 한다. 중심도 주변도 없는 역사, 중심에서 주변으로 뻗어나가는 역사가 아닌 각 지역의 역사가 화음을 만들며 진행되는 역사를.

 유럽은 콜럼버스 이후 자신들만이 경제적 발전을 거듭하고 아시아는 경제적으로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던 것처럼 주장해 왔다. 그런 유럽의 주장과 달리, 아시아 또한 아메리카에서 유출된 은괴의 수혜자였다고 이 책은 밝히고 있다. 은의 유입으로 상업화는 더 빠르게 진행되었고, 생산성도 인구도 증가했다. 중국 남부와 인도의 벵골은 세계 시장의 일부가 되어, 그곳에서 활발한 무역 활동이 이루어졌다. 1750년 당시 세계 GNP의 80퍼센트를 생산한 곳은 아시아였다. 


아이티의 독립 영웅 투생 루베르튀르 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투생 루베르튀르(2011)'의 한 장면. 말을 타고 있는 루베르튀르의 모습이다.


 또한 저자는 정치적으로도 유럽은 계몽 사상을 토대로 한 민주주의가 발전했고, 그 외의 지역은 전제군주제나 봉건제도에 머물러 있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고 말한다. 프랑스 혁명의 인권 선언에 영향을 받은 흑인 지도자들은 수 년간의 독립전쟁 끝에 1804년 독립국 아이티를 건설했다. 하지만 백인이 아닌 인종이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데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던 유럽인들은 아이티 혁명을 철저히 외면했다. 미국 남부의 백인 노예주들은 그들이 일으킨 혁명이 전파될까 두려워했고, 그들의 두려움은 아이티의 이미지를 좀비와 흑마술, 미신이 창궐하는 나라로 왜곡시켰다.


커피 원두를 고르고 있는 멕시코 농민들. 멕시코를 포함한 라틴아메리카 지역은 세계 최대의 커피 생산지이다.


  유럽이 아닌 각자의 지역에서 발전을 이루어낸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지역의 발전 아래 희생된 사람들도 있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자기 손으로 자기 땅에서 나는 은을 캐서 아무 대가 없이 유럽 정복자들에게 바쳐야 했다. 그들의 희생으로 유럽과 아시아의 경제는 은 중심으로 바뀌었다. 아프리카 대륙의 흑인들은 갑자기 고향에서 머나먼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와 사탕수수 농장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그들 덕분에 유럽인들은 달콤한 설탕으로 만든 디저트와 초콜릿을 즐길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세계는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 멕시코 농민들은 생산비용의 반에도 못 미치는 낮은 커피 수매 가격(물건을 사들이는 가격. 여기에서는 농민들에게서 커피 회사들이 커피 원두를 사들이는 가격.) 때문에 게릴라 세력이 되거나 그들을 지원하는 불만세력이 된다. 우리는 그들의 희생 위에서 커피를 즐기고 있다. 

  이 책은 콜럼버스 이후 아메리카의 역사뿐만 아니라, 15세기에서 21세기, 아메리카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까지 다양한 시간과 공간을 오가면서 좀 더 다양한 역사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독자들은 수만 킬로미터의 거리와 수백 년의 시간을 넘나들며 여행하는 듯한 즐거움을 느낄뿐만 아니라, 전에는 듣지 못했던 좀 더 다양한 역사 이야기를 듣게 된다. 13년 전에 나온 책이기 때문에 수정되고 보완되어야 할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 유럽 중심의 세계사 속에 묻혀 있던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의 역사, 정복자의 이야기 아래 묻혀 있던 정복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귀를 기울이고 기억할 가치가 있다. 우리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때 "지리적으로 공정한 세계사"가 완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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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온도 - 지극히 소소하지만 너무나도 따스한 이덕무의 위로
이덕무 지음, 한정주 엮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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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의 온도. 최근에 베스트셀러가 된 에세이집 『언어의 온도』를 벤치마킹한 듯한 제목이다. 제목만 들으면 젊은 작가의 에세이집 같지만, 사실 이 책은 조선의 실학자 이덕무(1741~1793)의 글을 모은 문집이다. 하얀 바탕에 노란 복숭아 하나가 놓여 있는 산뜻한 표지도 조선시대 문인의 문집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책 소개 플랫폼 '소행성 책방'의 홍보 웹툰도 이 책을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맛이 있다.', '이덕무의 인간적인 모습이 드러나 마치 SNS 같다'며 친근한 느낌을 부각시킨다. 표지의 '지극히 소소하지만 너무나도 따스한 이덕무의 위로'라는 홍보 문구까지 보면, 출판사는 조선시대 문집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낡고 딱딱한 느낌을 지우려고 애쓴 것 같다.

 책 소개를 보고 '힐링 에세이'를 기대했는데, 그냥 조선시대 문집이잖아, 라고 느낄 수 있다. 이덕무는 실학자이고 이 책은 그가 20대 시절에 쓴 글들을 모은 것이지만, 그는 조선시대 선비다. 성리학에 얽매이지 않는 실학자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공자, 맹자와 백만 광년 떨어져 있는 사람은 아니다. 공자와 맹자의 말도 꽤 많이 인용되고, 선비답게 자기수양을 강조하는 글들이 많다. 명예와 권세에 집착하지 말라, 군자가 될 수 있도록 정진하라, 이런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이 많은데도 훈계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이덕무가 자기답게, 자연스럽게 사는 삶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 굴리기를 좋아할 뿐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용 또한 여의주를 자랑하거나 뽐내면서 저 말똥구리의 말똥을 비웃지 않는다."(p. 35.)

 사람들이 보기에는 여의주가 말똥보다 훨씬 귀하다. 하지만 말똥구리는 용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말똥구리로서는 자신의 말똥이 여의주보다 못하다고 여길 이유가 없으니까. 누군가 자기보다 잘났다고 부러워하지도 않고, 자기보다 못났다고 비웃지도 않고 그저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이다. 

"걸리고 얽힌 것을 잘 운용하는 사람은 비록 천 번 제지당하거나 만 번 억압당해도 그 걸리고 얽힌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다. 또한 그 걸리고 얽힌 것에 노예가 되어 부림을 당하지도 않는다. 때에 따라 굽히기도 하고 펴기도 하면서 제각각 그 마땅함을 극진히 하면 걸리고 얽힌 것이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나의 온화한 기운 역시 손상되지 않아 자연스럽고 순조로운 경계 속에서 움직일 수 있다."(p. 276.)

 세상에는 우리 자신을 제약하는 것들이 너무 많고, 때로는 우리 자신조차 자기검열을 한다. 그러나 유연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자유롭게, 자연스럽게 살아가려고 애쓴다면 자신다운 모습을 잃지 않고,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도덕적 수양을 강조해도 훈계로 느껴지지 않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그가 솔직하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도 음덕을 베풀지 못하지만 마땅히 하려고 하고, 자신도 다른 사람의 잘못과 실수를 언급하지만 마땅히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솔직히 인정한다.(p. 351.) 그리고 겨울날 집에 있던 책들을 이불 위에 펼쳐 추위를 막았다는 등, 자신의 가난한 처지도 솔직하게 드러낸다. 

"우산이 떨어져 우뢰를 맞으며 깁고, ...새들을 문하생으로 삼고, 구름을 벗 삼아 산다. 세상 사람들은 이와 같은 형암(이덕무의 호)의 생활을 두고 '편안한 삶'이라고 한다. 우습고 또 우습구나!(p. 265.)

 안빈낙도하려고 애쓰면서도 가난한 삶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는 것도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가난에 시달리며 살아간 데다, 서얼 출신이라는 신분의 한계 때문에 자기 재주와 역량을 마음껏 펼치지 못했다. 그는 『논어』 속의 온화하고 기쁜 글을 읽으면서 거칠고 추한 마음을 없애고 평온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공자가 아니었다면 내가 거의 발광해 달아나 버렸을 것이다."(p. 273.) 자기 가능성을 펼칠 기회가 없어 답답한 마음을 책으로 달래는 모습에 깊이 공감했다. 

  그리고 조선의 유학자라는 시대적, 사상적 경계를 넘어 내가 그에게 공감할 수 있던 것은 책에 대한 사랑이었다. 그는 책을 2만 권이나 읽었다고 한다. 요즘처럼 공공도서관도 없었지만 그는 온갖 서적을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책을 빌려서 읽었다. 살면서 읽은 책이 아직 천 권도 안 되는 나는 그에 비하면 "단지 마시고 먹고 잠이나 자는" 사람이지만, 책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와 같다. 누군가에게서 온갖 훈계를 들어도 "감히 말씀하신 대로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순순히 받아들이던 그가, "서책에 대한 기호를 버려야 한다."는 말에 "서책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라는 말입니까?"라고 정색을 한다. 그리고 눈병이 나도 책을 하루도 떠나보낼 수 없다고 말한다. 사방이 막혀 있는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그의 모습이 나와 겹쳐 보였다. 

  이덕무가 "수고했어, 오늘도", "괜찮아, 잘될 거야" 라고 직접적으로 위로하지는 않는다. 표지에서는 위로라고 했는데 훈계만 많은데?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난하고 가능성이 막혀 버린 삶 속에서도 끊임없이 책을 읽고 글을 썼던 그의 모습, 솔직하고 자유롭게, 자연스럽게 살아가려 했던 그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그렇게 우리는 2백여 년 전 조선 선비 이덕무에게 공감하고, 우리 자신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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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의 정치 민음 생각 1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지음, 김남우 외 옮김 / 민음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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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판인 여러분, 저는 이 책을 통해 키케로가 저를 설득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이 책의 저자이자 로마의 정치가인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연설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누구보다 능했던 사람입니다. 연설의 수천 년 역사 속에서 연설의 전범(典範)을 만든 사람입니다. 그런 그의 연설 중에서도 가장 설득력 있고 감동적이고 신뢰감을 주는 연설문 일곱 개를 모았는데, 설득되지 않았을 리 없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책에 실린 연설 일곱 개 모두가 저를 설득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모든 이야기에 설득되기엔 그와 저 사이의 2000여 년이라는 긴 세월과 그로 인한 사고방식의 차이가 너무나 컸습니다. 그 동안 제목만 들어 보았던 「카틸리나 탄핵 연설」은 소문대로 명문장이었습니다. 문장 하나 하나에 힘이 흘러넘쳐 수천 년 뒤의 독자인 저까지 압도했습니다. 제가 당시의 원로원 의원이나 로마 시민이었다면 , 그의 연설을 글이 아닌 육성으로 직접 들었다면 설득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시 로마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미래인으로서 저는 그의 연설에 설득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가 말하는 것만큼 카틸리나가 극악무도한 반역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카틸리나는 다만 키케로와 정치적 견해가 달랐고, 궁지에 몰려서 과격해졌던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카틸리나가 죽은 뒤에도 로마 빈민들은 부채 전액 탕감이라는 과감한 그의 공약 때문이었는지 그를 역적으로 보지 않고 그를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에 대한 우호적인 평가는 어느 정도 유지되었고 키케로조차 그가 악과 함께 미덕도 겸비했다고 평가했습니다. 게다가 키케로는 절차와 원칙, 법을 중시하는 자신의 신념도 어기고 무리하게 카틸리나를 처형했습니다. 

 같은 이유로 「무레나 변호 연설」도 저를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무레나는 실제로 선거법을 위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무레나를 카틸리나를 막을 수 있는 대항마이자 자신의 정책을 이을 정치적 후계자로 보았기에, 키케로는 무레나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돕게 됐습니다. 그는 무레나에 대한 탄핵에 "정도를 넘어서 경직된, 진리나 인간 본성이 감당하기에는 다소 완고하고 가혹한 원칙들이 덧붙여져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 원칙을 지키기 위해 무레나를 탄핵한 사람들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로마가 갈리아 등 외부 세력의 침입에 노출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를 비롯한 로마의 지배층들이 반란에 더 민감했다는 것, 그가 로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지켜야 했다는 것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자신의 원칙까지 어겨가며 누군가를 탄핵하거나 변호하는 것이 정당성 있는 행동이라고 설득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인정되는 절대적인 정의를 위해서 그가 한 연설들에는 설득되었습니다.  「로스키우스 변호 연설」은 아직 20대 후반이었던 그가 누구도 보호해 주지 않는 약자를 위해 했던 연설이었습니다. 로스키우스의 아버지의 재산을 노린 친척들은 아버지를 죽이고 그에게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씌웠습니다. 하지만 친척들이 당시의 최고 권력자 술라의 측근 크리소고누스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로스키우스를 변호하러 나서지 않았습니다. "충분한 변호를 제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그가 완전히 버림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라는 말에서 어떤 사람도 법과 정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그의 정의감과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의 변호 덕분에 로스키우스는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정작 그는 크리소고누스와 술라의 보복이 두려워 2년 동안 외국에 나가 있었다는 사실에서, 현실은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약자를 위해 정의를 지키려는 그의 정신은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습니다.

 또한 독재자 안토니우스를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에 빗댄 「필리포스 연설(안토니우스 탄핵 연설)」도 제게 남기는 바가 있었습니다. 그는 카이사르 사후 처음에는 독재관직 폐지를 약속했지만, 점차 원로원과 민회를 무력으로 탄압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법률을 통과시키는 안토니우스의 전횡에 맞서 이 연설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안토니우스의 전횡을 막는 데 실패했고, 오히려 안토니우스가 보낸 병사들에게 살해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이 준엄한 비판은 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저런 갈채를, 특히 선동가들로 인한 경우, 늘 경멸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상류층, 중류층, 하류층, 요컨대 모두가 하나같이 갈채를 보내고, 앞서 인민의 동의를 얻곤 하던 자들이 쫓겨나는 것을 보면서, 저는 그것은 단순한 갈채가 아니라 심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대중들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변하기 쉬운 존재인지를 알고 있었고, 누구보다 중우정치를 두려워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도 모두가 하나같이 누군가에게 갈채를 보내거나 누군가를 쫓아내는 것은 하나의 심판이라고 인정합니다. 저는 이번 선거를 보면서 그의 말에 더욱 더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심판인 여러분, 그는  수천 년 전의 사람입니다. 노예가 있는 것도, 재판을 위해 노예가 고문을 당하는 것도 당연시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정의와 공공의 이익, 도덕적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그의 신념은 수천 년을 뛰어넘어 지금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저는 설득되었습니다.  그의 신념이 심판인 여러분들 또한 설득하기를 바라며 저는 그의 말로 제 변론을 마치려고 합니다.

"심판인 여러분, 이 나라에서 이런 잔인함을 몰아내십시오. 이 나라에서 이제 이런 잔인함을 용납하지 마십시오. ... 매 순간 잔인한 행위를 보고 듣는다면, 본성상 아무리 온순할지라도 우리는 끊임없는 고통 가운데 인간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로스키우스 변호 연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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