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 - 원고지를 앞에 둔 당신에게
금정연 지음 / 어크로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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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가 금정연은 책 읽기 싫다, 글쓰기 싫다는 말을 자주 한다. 최근에는 진행하는 팟캐스트에서 글쓰기가 너무 싫은 나머지 웹툰 작가로 전업할까 생각 중이라는, 우스갯소리로 넘기기엔 진심이 느껴지는 말을 하기도 했다. 


서평가란 사람이 책 읽고 글 쓰는 게 싫다는데도 그 말이 듣기 싫지 않고 외려 믿음이 가니 우습다. 한 해에 책을 수천 권씩 읽는다는 자기계발 강사, 글쓴이의 고뇌가 느껴지지 않는 글을 '찍어내는' 작가들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일까. 금정연의 볼멘소리는 차라리 솔직해서 좋다. 그만큼 힘들게 책을 읽고 괴롭게 글을 쓴다는 의미라고 여기게 된다.


그만큼 힘들게 읽고 괴롭게 쓰는 사람이 직접 읽고 소개하는 책이라면 한 번 읽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니 서평가로서도 좋은 전략이다(로베르토 볼라뇨에 대해 말할 때마다 웃음기를 띠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언젠가 볼라뇨를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덕분에 언제부터인가 서평집을 읽는 시간에 책 한 권을 더 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 나도 금정연의 서평집만큼은 전부 읽었다(그래봤자 세 권이지만. 그가 소개한 책을 다 읽었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다). 


신간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은 금정연이 이제까지 낸 서평집 중에 가장 읽기 쉽고 재미있다. 그의 문장이 전보다 말랑말랑해진 건지, 아니면 일부러 대중적인 글만 골라서 엮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작들은 한 편씩 끊어 읽었다면 이 책은 단숨에 읽었다. 몇몇 대목에선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병원 검사 때문에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해진 저자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더니 얼마 후 딱 그 '얼마'만큼의 돈이 들어와 "론다 번과 이지성이 옳았단 말인가!"라고 절규하는 대목은 그중에서도 압권이다. 


그렇다고 마냥 웃기기만 한 건 아니다. 쌓여가는 택배 상자를 보며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 인터넷 서점을 들락날락하며 구매 버튼을 누르는 모습은 웃기기보다 웃프다. 책 읽는 시간이 아쉬워 이불 속에서도 책을 읽었던 소년이 글쓰기를 밥벌이로 택한 죄(?)로 책장을 펼칠 때마다 한숨을 푹푹 쉬는 어른이 되었다는 이야기나, 대학 시절 조별 발표를 피하기 위해 조원들의 밥값을 대신 냈던 그가 서평가란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강연과 행사 진행 같은 일을 해야 하는 현실은 짠하기까지 하다. 


서평가 금정연을 애정하는 사람으로서 그가 꾸준히 서평을 써줬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그는 서평가로 머무르기보다 소설가가 되고 싶은 모양이다. 인터넷 서점 MD를 그만둔 것도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라고 하고, 지금도 꾸준히 습작을 하는 듯하고. 책 읽기 싫다, 글쓰기 싫다는 볼멘소리는 사실 책 쓰고 싶다, 내 글 쓰고 싶다는 뜻을 품고 있는지도 ^^ 서평이든 소설이든 그가 쓴 글이라면 덮어놓고 읽을 테니 지금의 유머러스함과 시니컬함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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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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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할 때 태아는 산모가 겪는 고통보다 수십 배는 더한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안전한 자궁을 벗어나 불안하고 수상한 세상으로 나온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일지, 한때 태아였던 자로서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만약 태아에게 성인만큼 온전한 정신과 감각이 있어서, 자궁안에 있으면서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느끼거나 알 수 있다면 어떨까. 하필이면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란 게, 어머니와 삼촌이 불륜 관계이고 조만간 태아의 아버지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 것이라면. 


이언 매큐언의 신작 <넛셸>은 바로 그와 같은 상황에 놓인 태아의 이야기를 그린다. 작가는 출산을 앞둔 며느리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태아의 고요한 존재감을 강렬하게 인식했고, 얼마 후 셰익스피어의 명작 <햄릿>을 읽으면서 삼촌에 의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빼앗긴 햄릿의 고뇌를, 삼촌과 어머니의 불륜을 목도하고 이들이 아버지를 살해한 사실을 알면서도 세상으로 나와야 하는 태아의 갈등으로 치환하는 기발한 발상을 떠올렸다. 


주인공 햄릿은 만삭인 어머니의 뱃속에서 어머니 트루디와 삼촌 클로드가 아버지 존의 눈을 피해 만남을 가지고 몸을 섞는 것을 지켜본다. 햄릿은 어머니가 이미 한 남자와 결혼해 그의 아이를 밴 몸인데도 음주를 즐기고 삼촌과의 정사를 받아들이는 것을 증오하면서도, 어머니의 몸에 기생하는 한 어머니의 선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고, 심지어는 어머니가 마시는 와인의 맛을 같이 즐기는 독특한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이래서 임신 중 음주가 위험하다고 하는 걸까). 


햄릿은 어머니와 삼촌이 아버지의 재산을 가로채고 떳떳하게 사람들 앞에 나설 요량으로 아버지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는 것을 알게 된다. 햄릿은 아무것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할 아버지에게 경고하고 싶지만 어머니 뱃속에 있는 태아에게는 아무런 힘도 방법도 없다. 결국 아버지는 죽음을 맞게 되고, 햄릿은 부정한 어머니와 음험한 삼촌이 기다리는 세상 밖으로 나와야 할 처지에 몰린다. 햄릿에게 남은 선택은 단 하나.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와 음모로 얼룩진 가족 관계 속으로 들어가 사느냐, 아니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죽느냐.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셰익스피어의 명작 <햄릿>을 이언 매큐언의 스타일로 각색한 것이 재미있고, 어머니와 삼촌의 불륜, 아버지의 죽음을 어머니의 뱃속에서 목도한 태아가 품을 법한 생각들을 시시콜콜한 것까지 상상해낸 작가의 능력이 놀랍다. 이언 매큐언의 대표작 <속죄>처럼 한숨에 읽을 만한 소설은 아니지만, 끝까지 읽고 문장들의 의미를 곰곰 생각해본다면 색다른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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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라 : 달빛 드레스 도난 사건 - 제1회 No.1 마시멜로 픽션 대상 수상작 마시멜로 픽션
박에스더 지음, 이경희 그림 / 고릴라박스(비룡소)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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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 나는 어른들의 삶을 다룬 이야기보다 내 또래의 아이들이 나오는 이야기에 열광했다. 나처럼 호기심 많고 책 읽기를 좋아하는 여자아이가 나오는 <빨간 머리 앤>도 좋아했고, 나처럼 성적 때문에 좌절하고 친구 관계 때문에 고민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언플러그드 보이>도 좋아했다. <꽃보다 남자>도 <해리 포터>도, 그들이 속한 세계와 나의 세계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지만, 주인공이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닌다는 이유로 제멋대로 공통점을 찾고 한없이 빠져들었다.


요즘 학생들은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이야기에 열광할까. 최근 학생들 사이에서 반응이 '핫하다'는 책이 있길래 읽어보았다. 제목은 <미카엘라 : 달빛 드레스 도난 사건>. 제목만 보면 미국이나 영국에서 왔을 것 같지만, 박에스더가 글을 쓰고 이경희가 그림을 그린 '순수' 한국 문학이다. 국내 최초 초등학교 고학년 여학생 타깃의 문학 작품 공모전인 No.1 마시멜로 픽션 대상 수상작이며, 초등학교와 중학교 여학생 101명으로 구성된 걸스 심사위원단이 직접 읽고 심사를 했다. 


주인공 미카엘라는 브링턴 아카데미 7학년생이다. 한국 나이로 치면 열세 살 또는 열네 살쯤일까. 운동선수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났고 펜싱과 수영이 특기다. 갈색 곱슬 폭탄 머리가 트레이드 마크이며, 운동을 좋아해서 외모 꾸미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남몰래 패션 잡지를 구독하고 예쁜 아이템을 수집하기 좋아하는 귀여운 소녀다(참고로 나는 미카엘라의 친구인 카밀라와 비슷했다. 학교 신문 편집장이었던 것도, 도서부원이었던 것도, 활자중독인 것도, 안경을 쓴 것도). 


개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미카엘라는 다른 학생들보다 먼저 학교 기숙사로 돌아온다. 브링턴 아카데미에는 7학년 여학생들만 참가할 수 있는 '두꺼비 잡기 대회'라는 것이 있어서 7학년이 되는 미카엘라는 이 대회 준비를 위해 미리 학교에 온 것이다. 펜싱 연습장에서 대회 준비를 하던 미카엘라는 브링턴 아카데미 8학년이자 학생회장인 유진이 꼭 나쁜 짓을 벌이는 듯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며 걸어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뒤를 쫓는다. 


미카엘라는 유진이 두꺼비 잡기 대회 우승자만이 가질 수 있는 보물 중 하나인 달빛 드레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유진이 달빛 드레스에 허튼 짓을 하지 못하도록 유진을 감시하기 위해 유진과 '짝꿍'이 된다. 짝꿍이란 두꺼비 잡기 대회 때 한 편이 되어 함께 미션을 수행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유진은 학교 최고의 퀸카이자 두꺼비 잡기 대회의 유력 우승 후보인 신시아로부터 짝꿍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고도 거절했는데 미카엘라의 요청은 받아들인다.


학교 최고의 퀸카이자 여왕 기질이 다분한 신시아는 미카엘라와 유진이 짝꿍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한다. 이로 인해 미카엘라는 두꺼비 잡기 대회 내내 신시아와 신시아를 추종하는 아이들의 모임인 팀 루나의 방해 공작에 시달린다. 하지만 미카엘라는 신시아와 팀 루나의 방해에 굴복하지 않고, 대회에서 우승하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지도 않으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옳은 길을 추구한 끝에 두꺼비 잡기 대회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보물보다 더 크고 귀한 보물을 얻게 된다. 


내가 만약 미카엘라 또래의 여학생이라면 이 책을 읽고 많은 용기를 얻었을 것 같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추구할 용기를. 경쟁에서 뒤처져도 자신이 걷고자 하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용기를. 자신의 단점과 타인의 장점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용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솔직하게 마음을 고백할 용기를. 이런 용기 있는 소녀를 또래 친구로 둘 수 있는 어린 독자들이 부럽다. 부디 미카엘라처럼 당차게 용감하게 살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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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의 아주 특별한 문학 강의
테리 이글턴 지음, 이미애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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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이 당대 최고의 문학 비평가라고 해서 호기롭게 구입했는데 읽기가 쉽지 않았다. 문학 이론을 전혀 모르거니와 언급되는 작품들도 죄다 영미권 작품뿐이어서 아는 작품에 관한 설명 위주로 띄엄띄엄 읽을 수밖에 없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은 것은 이동진 작가님이 <이동진 독서법>에 소개한 추천도서 500권 중 한 권이기 때문 ^^). 


몇 가지 수확이 있기는 하다. 첫째는 반드시 직접 경험했거나 알고 있는 사실을 작품에 담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직접 경험했거나 알고 있는 사실만 글로 쓸 수 있다고 믿으며,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작품에 나오는 일들을 직접 경험했거나 적어도 자세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오해한다. 저자에 따르면 "독신자가 인간의 성에 대해 세 번 결혼한 난봉꾼보다 더 섬세하게 묘사하지 못할 이유도 없다." 작가는 글을 쓰는 행위 너머의 그 어떤 경험도 하지 못할 수 있지만, 그가 하지 못한 경험을 글로 쓸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둘째는 독자 없이는 문학이 없으며, 작품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독자의 능력과 역사적 상황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처음 상연되었을 때 당대 영국인들이 복수의 도덕성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현대인들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한때 노처녀 노총각의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로 읽혔지만, 현대 여성들은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읽으며 비혼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편견과 압박, 가부장제의 모순과 폐해 등을 생각한다. 


셋째는 비평 또는 평론의 역할이다. 비평가 또는 평론가는 문학 작품에서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보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보는 것을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도록 표현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이들 역시 창작의 주체이며 예술가의 반열에 들 만하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글은 <해리 포터> 시리즈와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비교한 글이다. 두 작품 모두 고아 소년이 주인공인데, 두 소년이 겪게 되는 상황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어떻게 다르고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책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분석 내용 자체도 훌륭하지만, <해리 포터> 시리즈와 <위대한 유산>을 전부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걸 보면 테리 이글턴이 확실히 대단한 사람이기는 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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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소음
줄리언 반스 지음, 송은주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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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일제 강점기에 살았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운 나쁘게 한반도 이남이 아닌 이북에서 태어났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정의와 자유를 위해 이 한 몸 기꺼이 바쳤을 것,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는 내가 그렇게 용감하지 않고 이타적이지 않은 인간이라는 것을 잘 안다. 기껏해야 부역자가 되는 것을 필사적으로 피하면서 목숨을 부지하는 데 급급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싶다. 


줄리언 반스의 신작 <시대의 소음>의 주인공이자 러시아의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떨친 쇼스타코비치가 처한 상황도 비슷하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두각을 보였으며 젊은 나이에 이미 천재 작곡가로 추앙받았던 쇼스타코비치는, 스탈린이 정권을 잡으면서 정권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만들거나 자신이 원하는 음악을 만들기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하는 궁극의 선택 앞에 놓인다. 결국 쇼스타코비치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음악가로서의 자존심을 꺾는 쪽을 택하고, 이후 권력과 양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삶을 살게 된다. 


어떻게 권력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어, 라고 비난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다. 쇼스타코비치가 처한 상황만 봐도 그렇다. 쇼스타코비치는 열아홉 살 때 스탈린 앞에서 연주를 하다가 단 한 번 실수했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겨우 목숨을 부지해 소비에트 대표단의 일원으로서 미국에 가지만, 자신의 우상을 자본주의의 하수인이라고 비판하도록 강요받는다. 마침내 명예를 회복해 금지된 곡들을 연주할 수 있게 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을 괴롭힌 공산당에 가입해야 한다. 어느 누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그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과거 러시아에서 쇼스타코비치처럼 고생한 문화 예술인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만, 수십 년 후 대한민국에서 얼마 전까지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못해 뜨악하다. 그 이름도 흉악한 블랙리스트다. 


정권에 충성하지 않거나 방해가 되는 문화 예술인들의 목록을 만들도록 대통령(과 비선실세)가 지시하고 관료와 공무원들이 정연하게 움직였던 것이 불과 몇 달 전까지의 일이다. 블랙리스트에 가담한 부역자들이나 정권에 납작 엎드리는 쪽을 택한 문화 예술인들 - 이른바 화이트리스트 - 에게도 그들 나름의 피치 못할 이유가 있겠지만, 양심과 자존심을 택한 대가로 입에 재갈이 물려지고 생계를 위협당한 블랙리스트 문화 예술인들을 생각하면 역시 용서하기 힘들다. 용서할 수 없다.


쇼스타코비치,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시대의 소음'과 맞서 싸우느라 고생했어, 라고 위로하자니 마음이 석연치 않다. 그렇다고 당신은 부당한 권력 앞에 복종했으니 예술을 말할 자격이 없어, 라고 비난하자니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 비겁하지 않은 내가 민망하고 부끄럽다. 그렇다고 쇼스타코비치처럼 기꺼이 자존심을 꺾거나 목숨을 바칠 만큼 소중한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대체 난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걸까. 새삼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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