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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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다시 대학에 다닌다면 사회에 나와서는 하기 힘든 공부를 하고 싶다. 이를테면 라틴어라든가. 라틴어는 서양 언어의 뿌리이고 유럽에서 출발한 여러 학문의 원전을 이루는 중요한 언어인데도 제대로 배울 기회는커녕 대략적인 특징을 알 기회조차 없었다. 듣기로는 라틴어 자체는 배우기가 매우 어렵지만 일단 한번 배우면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은 식은 죽 먹기라 하던데. 


<라틴어 수업>의 저자 한동일은 교황청립 라테라노 대학교에서 교회법학 석사학위를 최우등으로 수료하고 라틴어로 진행되는 사법연수원 3년 과정을 마쳤으며 동아시아 최초로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를 역임한 라틴어 및 교회법학 전문가이다. 이 책은 저자가 서강대학교에서 2010년부터 2016년까지 했던 초급 라틴어와 중급 라틴어 수업 내용을 엮은 것이다. 


실제 강의 내용을 엮은 책이기는 하지만, 이 책의 주된 내용은 라틴어 단어나 문법이 아니라 라틴어를 둘러싼 교양 수준의 지식과 저자의 경험에서 비롯된 인생의 교훈이다. 라틴어의 체계, 라틴어에서 파생한 유럽의 언어들,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화, 사회 제도, 법, 종교, 오늘날의 이탈리아에 대한 이야기 등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만큼 각각의 이야기의 밀도는 낮다. 이 책 한 권으로 라틴어를 마스터하거나 라틴어의 모든 것을 알게 되길 기대해선 곤란하다.


이 책은 차라리 라틴어라는 낯선 언어를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감행하고 학문이라는 고된 길을 묵묵히 걸어온 인생 선배가 들려주는 조언집이라고 보는 편이 낫다. 유학 시절 이탈리아어와 영어, 라틴어가 뒤섞인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고생했던 경험,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피살당한 장소가 기숙사 근처라는 사실도 모른 채 공부에 파묻혀 지냈던 나날들, 처음 대학에서 강의를 맡았을 때는 수강생이 스무 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이백여 명이 듣는 인기 강의가 되어 기뻤던 일 등을 읽고 있노라면 저자처럼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모두가 영어, 중국어 같은 소위 '돈 되는' 언어를 공부하기에 급급하고 인문학조차 스펙의 일환으로 간주하는 세상에서, 라틴어를 공부하고 성서를 연구하고 교회법학을 익힌 저자의 노력과 열정은 분명 귀감이 될 만하다. 저자를 보면 나는 과연 내 삶의 축으로 삼을 만한 언어와 학문을 가지고 있는가 되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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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다 과장의 삼시세끼
시노다 나오키 지음, 박정임 옮김 / 앨리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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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 한 장 보면 그 날 먹은 음식을 기록한 식사 일지에 불과하지만, 이십여 년치를 모아서 보면 저자의 성격과 개성이 드러난다. 기록의 힘을 새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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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다 과장의 삼시세끼
시노다 나오키 지음, 박정임 옮김 / 앨리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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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공이라는 노인이 매일 지게로 흙을 날라 산을 옮겼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어리석어 보이는 일도 꾸준히 우직하게 하다 보면 이룰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여기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이 먹은 것을 기록하다 책까지 낸 남자가 있다. 시노다 나오키는 1990년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에 후쿠오카로 전근을 가면서 식생활을 흐트러뜨리지 않기 위해 매끼 먹은 음식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간략하게 메모를 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점점 그림을 덧붙이기도 하고 그림에 색을 입히기도 하면서 기록의 완성도를 높였다. 그렇게 완성된 노트가 모두 45권(2013년 기준). 2012년 오십 세가 되던 해에 그의 이야기는 텔레비전에 소개되었고 책으로도 나왔다. 


스물일곱 살 때부터 쉰 살이 될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끼 먹은 음식을 기록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음식을 사진으로 찍어서 사진을 보면서 그림을 그린 게 아니라 오로지 '눈과 혀와 위장의 기억'에 의존해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 놀랍다. 뿐만 아니라 음식의 생김새, 재료의 배치, 색상 등을 정확하게 구체적으로 재현하고, 음식의 맛에 대한 감상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렇게 하루치 기록을 완성하는 데 들인 시간은 고작 퇴근 후 30분. 회식을 하고 술에 잔뜩 취한 날에도 기록만큼은 잊지 않았다고 하니 노력과 열정이 대단하다. 


한 장 한 장 보면 그 날 먹은 음식을 기록한 식사 일지에 불과하지만, 이십여 년치를 모아서 보면 저자의 성격과 개성이 드러난다. 저자가 먹은 음식과 감상을 쭉 보다 보면 저자는 같은 음식을 계속 먹는 걸 싫어하지 않는 무던한 성격이고, 일부러 질릴 때까지 먹는 집요한 면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자국 음식을 주로 먹지만 외국 음식도 이따금씩 즐기고(회사 사람들과 1박 2일로 한국을 방문해 한국 요리를 먹기도 한다), 여행사 직원으로서 해외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 낯선 음식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하루 세끼 먹는 일이 당연해서인지, 맛있는 음식이 넘쳐나서인지, 뭘 먹어도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그뿐이다. 저자는 이제 "식재료를 생산해주는 사람들과, 그것으로 요리를 해주는 사람들, 그 외에도 다양하게 얽힌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을 형태로 남기고 싶어 일기를 쓴다"고 한다. 어쩌면 나는 음식의 소중함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을 잊고 살아온 게 아닐까. 저자처럼 나도 식사 일지를 써야겠다, 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매끼를 소중하게 여기고 꾸준히 기록으로 남긴 저자의 자세는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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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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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을 싫어하는 일본인의 글을 읽었다. 그가 말하길, 한국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위안부 문제를 통해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자신의 할아버지가 2차 대전에 참전했는데 한국의 역사 교과서가 그의 할아버지처럼 2차 대전에 참전한 일본인을 나쁘게 말한다는 것을 알고 한국을 싫어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것이 인간인가. 나는 그 글을 읽고 얼마 전에 읽은 프리모 레비의 책 제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2차 대전이 어떤 전쟁이고 그 전쟁에서 일본이 어떤 악행을 저질렀으며 자신의 할아버지가 어째서 전쟁에 끌려갔는지도 모르는 무식함은 차치하더라도,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가 우선인 나머지 타인의 아픔이나 인류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그의 '인간답지 않음'에 소름이 돋았다. 바로 이런 '인간답지 않은 인간'들이 종군위안부라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사죄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 유대인이라면 아이부터 노인까지 죄다 잡아들여 학살하는 죄악을 저지른 게 아닐까. 


<이것이 인간인가>는 프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에 이송되어 1945년 토리노로 돌아오기까지 10개월간 겪은 일들을 담고 있다. 191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태어난 프리모 레비는 1941년 토리노 대학 화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하지만 졸업장에 유대인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기 때문에 명망 있는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반파시즘 부대에 가담했다가 파시스트 경찰에 붙잡혀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아우슈비츠에 들어선 그는 더 이상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이름 대신 문신처럼 팔뚝에 새겨진 번호로 불렸고, 번호가 불렸을 때 큰 소리로 대답하지 않으면 구타를 당했다. 수용자들은 모두 똑같이 옷이 벗겨지고 머리를 깎였으며, 매일 같은 시간 같은 행동을 하도록 강요당했다.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한 채 노역에 끌려가고, 부과된 노역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매질을 당했다. 오로지 침묵만 허용될 뿐 질문이나 말대답을 하는 경우 가차없는 응징을 당했다(어째 한국의 군대나 학교와 비슷하다). 


이 책에는 나치가 수용자들에게 어떤 가혹행위를 했는지 자세히 적혀 있지만, 저자가 책을 쓴 목적은 오로지 나치의 죄상을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다. 저자는 대부분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아우슈비츠 역시 소수의 지배자가 다수의 피지배자를 관리하는 체제였으며, 대부분의 사회가 그러하듯 피지배자 내에도 다양한 유형이 존재했다고 설명한다. 이를테면 어떤 수용자는 조금이라도 나은 대우를 받기 위해 기꺼이 나치에 협력했으며, 어떤 수용자는 다른 수용자를 착취하고 물품을 갈취하길 꺼리지 않았다. 필요한 물건을 수용자 간에 매매하는 지하경제도 존재했다. 사람이 죽으면 슬퍼하기는커녕 덕분에 잠 잘 자리가 넓어지고 먹을 양식이 늘어난 것을 기뻐했다. 


저자는 나치로부터 가혹한 대우를 당하고 수용자들의 비인간적인 행태를 보면서 자신 또한 인간이길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씻기를 포기하고 남의 음식을 탐내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명으로부터 귀를 막고자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저자는 인간답게 살고자 노력하는 일부 수용자들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전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인이었던 수용자는 마실 물조차 귀한데도 아침마다 몸을 씻으며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지키고자 했다. 저자는 그를 보며 씻기를 포기하고자 했던 마음을 접었고, 두 사람은 결국 아우슈비츠에서 살아서 나갔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구타를 하는 인간과, 구타를 당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살아가는 인간은 같은 인간일까. 아침에 몸을 씻고 저녁에 죽임을 당하는 인간과, 저녁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아침에 몸을 씻는 인간은 같은 인간일까. 이들 모두는 인간일까. 인간이란 무엇일까. 인간답게 산다는 건 무엇일까. 인간답게 산다는 건 - 나를 지키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누가 아플 때 위로해주고 힘들 때 손잡아주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하지만 세상에는 인간답게 살지 않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 세월호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비명으로부터 여전히 귀를 닫고 있는 인간들,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맺힌 절규를 거짓으로 여기는 인간들, 침략전쟁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하는 인간들, 이 모든 걸 알면서도 무시하고 지나치는 인간들 말이다. 나 역시 알면서 무시하는 문제, 보고도 지나치는 문제들이 많기에 이들을 무작정 비난할 수 없다. 대체 나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선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까. 지금으로선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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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 - 원고지를 앞에 둔 당신에게
금정연 지음 / 어크로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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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집 안 읽게 된지 오랜데 이 책은 재미있기도 하고 책 중독자로서 공감 가는 대목도 많아서 좋았습니다. 글 쓰기 싫다, 책 읽기 싫다는 말을 버릇처럼 하는 저자라서 추천하는 책들이 외려 믿음이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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