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평점 :
얼마 전 한국을 싫어하는 일본인의 글을 읽었다. 그가 말하길, 한국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위안부 문제를 통해 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자신의 할아버지가 2차 대전에 참전했는데 한국의 역사 교과서가 그의 할아버지처럼 2차 대전에 참전한 일본인을 나쁘게 말한다는 것을 알고 한국을 싫어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것이 인간인가. 나는 그 글을 읽고 얼마 전에 읽은 프리모 레비의 책 제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2차 대전이 어떤 전쟁이고 그 전쟁에서 일본이 어떤 악행을 저질렀으며 자신의 할아버지가 어째서 전쟁에 끌려갔는지도 모르는 무식함은 차치하더라도, 자신의 이익이나 명예가 우선인 나머지 타인의 아픔이나 인류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그의 '인간답지 않음'에 소름이 돋았다. 바로 이런 '인간답지 않은 인간'들이 종군위안부라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사죄 한 번 제대로 하지 않고, 유대인이라면 아이부터 노인까지 죄다 잡아들여 학살하는 죄악을 저지른 게 아닐까.
<이것이 인간인가>는 프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에 이송되어 1945년 토리노로 돌아오기까지 10개월간 겪은 일들을 담고 있다. 1919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태어난 프리모 레비는 1941년 토리노 대학 화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하지만 졸업장에 유대인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었기 때문에 명망 있는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반파시즘 부대에 가담했다가 파시스트 경찰에 붙잡혀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아우슈비츠에 들어선 그는 더 이상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다. 이름 대신 문신처럼 팔뚝에 새겨진 번호로 불렸고, 번호가 불렸을 때 큰 소리로 대답하지 않으면 구타를 당했다. 수용자들은 모두 똑같이 옷이 벗겨지고 머리를 깎였으며, 매일 같은 시간 같은 행동을 하도록 강요당했다.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한 채 노역에 끌려가고, 부과된 노역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매질을 당했다. 오로지 침묵만 허용될 뿐 질문이나 말대답을 하는 경우 가차없는 응징을 당했다(어째 한국의 군대나 학교와 비슷하다).
이 책에는 나치가 수용자들에게 어떤 가혹행위를 했는지 자세히 적혀 있지만, 저자가 책을 쓴 목적은 오로지 나치의 죄상을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다. 저자는 대부분의 사회와 마찬가지로 아우슈비츠 역시 소수의 지배자가 다수의 피지배자를 관리하는 체제였으며, 대부분의 사회가 그러하듯 피지배자 내에도 다양한 유형이 존재했다고 설명한다. 이를테면 어떤 수용자는 조금이라도 나은 대우를 받기 위해 기꺼이 나치에 협력했으며, 어떤 수용자는 다른 수용자를 착취하고 물품을 갈취하길 꺼리지 않았다. 필요한 물건을 수용자 간에 매매하는 지하경제도 존재했다. 사람이 죽으면 슬퍼하기는커녕 덕분에 잠 잘 자리가 넓어지고 먹을 양식이 늘어난 것을 기뻐했다.
저자는 나치로부터 가혹한 대우를 당하고 수용자들의 비인간적인 행태를 보면서 자신 또한 인간이길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씻기를 포기하고 남의 음식을 탐내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명으로부터 귀를 막고자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저자는 인간답게 살고자 노력하는 일부 수용자들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전직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인이었던 수용자는 마실 물조차 귀한데도 아침마다 몸을 씻으며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지키고자 했다. 저자는 그를 보며 씻기를 포기하고자 했던 마음을 접었고, 두 사람은 결국 아우슈비츠에서 살아서 나갔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구타를 하는 인간과, 구타를 당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살아가는 인간은 같은 인간일까. 아침에 몸을 씻고 저녁에 죽임을 당하는 인간과, 저녁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아침에 몸을 씻는 인간은 같은 인간일까. 이들 모두는 인간일까. 인간이란 무엇일까. 인간답게 산다는 건 무엇일까. 인간답게 산다는 건 - 나를 지키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고, 누가 아플 때 위로해주고 힘들 때 손잡아주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하지만 세상에는 인간답게 살지 않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 세월호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비명으로부터 여전히 귀를 닫고 있는 인간들,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맺힌 절규를 거짓으로 여기는 인간들, 침략전쟁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하는 인간들, 이 모든 걸 알면서도 무시하고 지나치는 인간들 말이다. 나 역시 알면서 무시하는 문제, 보고도 지나치는 문제들이 많기에 이들을 무작정 비난할 수 없다. 대체 나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선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까. 지금으로선 아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