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이야기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0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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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타계한 영국의 소설가 윌리엄 트레버가 말년에 발표한 단편 열 편을 묶어서 펴낸 소설집이다. 윌리엄 트레버의 소설로는 소설집 <밀회>와 장편 소설 <펠리시아의 여정>을 읽었는데, 단편이 장편보다 훨씬 좋았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을 읽고 다시 한 번 윌레엄 트레버는 단편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열 편 중에 열 편 모두 좋을 수가. 한 편을 읽을 때마다 직전에 읽은 단편보다 더 좋을 리가 없다고 일부러 흥분을 절제하면서 읽었는데도 매번 감동했다. 


윌리엄 트레버의 이름으로 출간된 마지막 책이라서일까. 이 책을 읽는 동안 윌리엄 트레버의 작가 소개와 연혁에 유독 오랫동안 눈길이 머물렀다. 윌리엄 트레버는 1928년 아일랜드의 프로테스탄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학교를 열세 군데나 옮겨 다녔고,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 졸업 후 영국으로 이주해 교사로 일하면서 소설가로서의 경력을 쌓았다. 두 번째 소설 <동창생들> 이후 전업 작가가 되었고, 영국 남서부 데번으로 이주해 평생 그곳에 살았다. 


가톨릭 국가의 개신교도, 다수의 전학 경험, 영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인이라는 '아웃사이더'적인 정체성 때문일까. 그의 소설에는 가족, 직장, 이웃 등의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거나 공동체로부터 소외, 배척당하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 책에도 장애인, 고아, 집시, 과부, 노숙인, 가사도우미 등의 '외부인'이 나온다. 이들은 사회적으로 주류가 아니고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지만, 적어도 자신의 삶에선 어느 영화 못지 않은 드라마틱한 상황 속 주인공이다. 


예를 들어 맨 처음에 실린 <피아노 선생님의 제자>의 주인공 미스 나이팅게일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같이 사는 사람도 없고, 피아노를 배우러 집으로 찾아오는 학생들 외에는 만나는 사람도 없는 비혼 여성이다. 남들은 그가 단조롭고 외로운 일상을 보내리라고 짐작하지만, 사실 그는 천재가 아닐까 싶은 한 제자 때문에 흥분되고 혼란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남들이 알아차리기 힘들고 본인도 인식하기 어려운 섬세하고도 복잡한 감정의 결을 묘사하는 작가의 솜씨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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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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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마부키 사토시 주연 영화 <한 남자>가 곧 개봉할 예정인데, 원작이 2020년에 출간된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이라는 말을 듣고 뒤늦게 구입해 읽었다. 원작을 읽어 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영화 줄거리 자체에 대한 흥미보다도 주인공 '기도'가 재일 교포 3세인 것으로 굳이 설정한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일본에서 히라노 게이치로 정도 되는 유명 작가가 재일 교포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전례가 있던가. 히라노 게이치로 정도 되는 작가는 재일 교포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을까, 등등이 궁금해서 읽었고, 결론부터 말하면 아주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1975년생 재일 교포 3세 변호사인 기도 아키라는 몇 년 전 이혼 소송을 담당했던 옛 의뢰인 리에로부터 또 다른 의뢰를 받는다. 리에는 이혼 후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만난 다이스케라는 남자와 재혼하고 딸 하나를 두었는데, 사고로 남편이 죽고 신변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남편이 가짜 이름, 가짜 신분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남편이 가짜 이름, 가짜 신분으로 살아온 이유는 무엇인지, 그의 진짜 이름, 진짜 신분은 무엇인지 알아봐 달라는 리에의 부탁에 기도는 변호사로서의 의무 이상의 흥미를 느끼고 파고들기 시작한다. 


기도가 이 사건에 흥미를 느끼는 개인적인 동기는 재일 교포 3세인 자신의 신분과 관련이 있다. 기도는 스스로를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란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진로를 결정하거나 결혼 승낙을 받는 과정 등에서 자신이 재일 교포임을 강하게 의식했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TV 방송을 통해 간토(관동) 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이 유언비어를 퍼트려 조선인 수만 명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불안감이 훨씬 커졌다. 일본인 아내와의 갈등, 아직 자신에게 조선인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어린 아들에 대한 죄책감도 심해졌다. 


리에의 남편의 진짜 이름과 진짜 신분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기도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타인의 것과 바꾸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들의 행위는 법적으로 사기에 해당하지만, 각자 범죄자의 자식이라거나 가족으로부터 부당한 요구를 받는 등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나 아닌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나로서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의 또 다른 얼굴이라는 것도 깨닫는다. 어쩌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변신' 또는 '변화'에 대한 욕망은 누구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는 사랑받기 힘든 현실의 결과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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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간 후 너는 죽는다 밀리언셀러 클럽 9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김수영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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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읽은 <13계단>, <제노사이드>의 작가 다카노 가즈아키가 2009년에 발표한 소설집을 이제야 읽은 건, 나의 최애 NCT 재현이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이 원작인 영화의 주연 배우로 캐스팅 되었기 때문이다. 다카노 가즈아키 하면 선 굵은 정통 미스터리 소설을 주로 쓰는 작가라는 인상이 있는 데다가, 책을 구입하기 전에 먼저 접한 카드 뉴스(https://naver.me/5LoR18Q1) 줄거리가 하도 섬뜩해 책을 읽기 전부터 잔뜩 겁을 먹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예상한 것보다는 내용이 훨씬 가볍고 분위기가 밝았다. 


책에는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표제작인 <6시간 후 너는 죽는다>의 등장 인물인 야마하 케이시가 다른 단편들에도 등장하고, 첫 번째 단편인 <6시간 후 너는 죽는다>와 여섯 번째 단편인 <3시간 후 나는 죽는다>의 내용이 연결되기 때문에 연작 소설로 볼 수도 있겠다. 


<6시간 후 너는 죽는다>는 스물다섯 살 생일을 하루 앞둔 미오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 번화가를 걷던 미오는 한 잘생긴 남자로부터 "6시간 뒤, 당신 죽어."라는 말을 듣는다. 작업 멘트 치고는 내용이 무섭다고 생각하며 무시했는데, 얼마 후 남자가 했던 또 다른 예언이 실현된 것을 보고 미오는 남자의 예언을 믿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죽는다면 사고일까, 아니면 급하게 발생한 병? 예언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려달라는 미오에게, 남자는 밤 12시 정각에 어떤 남자가 미오를 칼로 찔러서 살해하는 장면을 보았다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각 단편마다 각기 다른 (이름이 '미'로 시작하는) 평범한 20대 여성인 주인공이 어떤 계기로 미래를 볼 수 있는 야마하 케이시라는 남자와 만나고 그로 인해 인생이 바뀌는 경험을 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정통 미스터리보다는 일상 미스터리에 가깝고, 다양한 욕망을 가진 여성들이 예언이라는 초월적인 영역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고 또 다른 미래의 가능성을 따져 보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독특한 설정을 가미한 성장 소설 내지는 청춘물로도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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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지고 싶은 기분 - 요조 산문
요조 (Yozoh) 지음 / 마음산책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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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가의 에세이를 읽는 기분은 좋아하는 친구가 보내준 편지를 읽을 때의 기분과 비슷한데, 이 책을 읽을 때의 기분이 그랬다. 그동안 잘 지냈는지 안부가 궁금하기도 하고, 새롭게 만난 사람은 누구인지, 특별히 좋았던 일은 무엇인지 시시콜콜 묻고 싶고 듣고 싶은 기분...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 이후 1년 만에 출간된 이 책에는 뮤지션이자 작가, 방송인, '책방 무사'의 운영자', <아무튼, 떡볶이>를 쓴 자타 공인 떡볶이 마니아, 달리기 중독자, 채식 지향인, 제주와 서울을 오가며 생활하는 노마드인 저자의 일상이 반영된 글들이 주로 담겨 있다. 


생각해 보면 저자는 여러 히트곡을 낸 뮤지션이고 방송에도 종종 출연하는 연예인인데, 팬에게 사인을 해줄 때 눈여겨 보는 점이나 큰 공연의 진행을 맡았던 경험 등을 읽을 때에야 비로소 '아 맞다 이 언니 유명한 사람이지'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ㅎㅎ 그동안 저자의 책을 읽거나 팟캐스트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친근감을 쌓았기 때문일까. 


채식 지향인이지만 몇몇 고기 요리는 꿈에 나올 정도로 먹고 싶고, 사주를 안 믿는다고 말하면서 종종 사주를 보러 다니고, 책을 읽고 싶은 마음과 눈 건강을 지키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는 이야기 등을 읽을 때는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데도) 나와 같은 시대, 같은 나라에 사는 평범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택시에서 안 좋은 경험을 한 적이 몇 번 있어서 택시 타는 걸 꺼렸는데, 택시 에피소드를 읽고 택시에 대한 인상이 조금 바뀌기도 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과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일화도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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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토당토않고 불가해한 슬픔에 관한 1831일의 보고서 문학동네 청소년 60
조우리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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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사랑>을 쓴 조우리 작가가 2022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처음에는 <오! 사랑>을 쓴 조우리 작가가 사랑 아닌 다른 주제에 대해 쓰다니 신선하다, 라고 생각했는데, 읽다 보니 <오! 사랑>과 비슷한 면이 없지 않고, 돌이켜 보면 <오! 사랑>도 그저 로맨틱한 소녀들의 사랑 이야기였던 것이 아니라 각자의 원가족에서 상처를 받은 소녀들이 서로를 만나 상처를 딛고 자기 자신의 힘으로 살게 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중학교 2학년 남학생 현수는 '센터'에 다닌다. 아버지는 일 때문에 바쁘시고 어머니는 몸이 안 좋아서 현수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수네 가족이 이렇게 된 건 5년 전의 어떤 사건 때문이다. 여름 휴가로 찾은 호텔에서 여섯 살 여동생 혜진이 실종되었다. 현수의 부모는 바로 경찰에 신고하고 미아를 찾는 방송에도 출연하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딸을 찾았지만 여태 찾지 못했다. 그 여파로 아버지는 직장을 잃고 어머니는 정신을 잃고 현수는 가정을 잃었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현수네 가족을 가난하다고 무시하고,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혹시라도 불행이 옮을까 봐 피한다. 현수 또한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닫은 지 오래였다. 입만 열면 <서프라이즈> 내용을 읊는 센터장 선생님도, 자꾸만 따라 다니는 같은 반 여학생 수민에게도 절대 곁을 주지 않으려 했다. 그런 현수에게 어느 날 아버지가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한다. 더 이상 혜진을 찾지 않을 생각이니 현수 너도 그만 혜진을 잊으라고. 


아버지의 말에 '버튼'이 눌린 현수는 그 날부로 혜진 찾기를 다시 시작한다. 혜진이 다녔던 유치원 원장 선생님과도 만나고, 혜진이 실종된 호텔 매니저에게도 연락한다. 혜진의 친구와 친구 엄마와도 만난다. 그런다고 5년 동안 못 찾은 혜진을 바로 찾게 되는 건 아니지만, 덕분에 현수는 5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혜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고, 아직도 혜진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이해하고 도와주는 선생님과 친구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상실과 애도에 대한 책이나 영화가 많지만, 이 책만큼 나에게 위로를 준 책을 만나지 못했다. 제목이 너무 길고 외우기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책을 다 읽은 지금은 일부러 이런 제목을 지은 의미가 있구나(특히 1831이라는 숫자)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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