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말로 좋은 날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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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소설의 유쾌함. 그걸 기대하면서 그의 소설을 읽는다. 대부분 그의 소설은 화려한 입담에 기대어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한다. 유쾌한 반전, 풍자 등 읽으면서 즐거워진다.

 

제목도 그러하다. "참말로 좋은 날"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내용이 아니다. 제목과 따로 놀고 있다. 제목이 소설의 내용을 더욱 증폭시켜 주고 있다. 제목과 어울리지 않는 작품들이 모여 있는데, 이 소설집의 소설들은 칙칙한 내용들이 많다.

 

소설은 문제적 시대에 문제적 개인을 다룬 작품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그만큼 현대사회는 순수를 잃은 사회이고, 이 사회에서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순수하고는 거리가 먼 인간들이 등장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 인물들을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 현대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문제적 개인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성을 지닌 인간이라면? 과연 문제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소설은 거기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 비극적인 결말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등장인물들의 죽음이나 또는 제대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들을 이 작품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첫작품부터 그러한 내용이 전개되는데, 마지막 작품인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에서 정점을 이룬다.

 

김소월의 '산유화'에서 따왔음직한 제목을 달고 있는 이 단편은(중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사회의 비루함에 속하지 못하고 순수함을 지키려고 하는 모습이 오히려 비루함이 되는 그러한 사람을 다루고 있다.

 

미대에 나와 작품전에도 수차 입선했음에도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겠다고 하다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자 떨어져 나올 수밖에 없었던 주인공. 그런 주인공이 전세로 든 집이 경매로 넘어가자 겪게 되는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가족간의 갈등 중에서 돈이 차지하는 비중이 80%정도가 된다고 하는데, 돈이 없는 가정이 어떻게 파탄이 나는지를 이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처절할 정도로 무능한 주인공이 청력을 잃어가는 아내와 점점 자신의 현실을 비관하는 딸, 그리고 더이상은 어찌해볼 수 없는 경제적, 사회적 무능력 속에서 파탄되어 가는 모습.

 

이것이 어찌 소설 속 현실이겠는가.

 

심심찮게 뉴스에 나오는 모습 아니던가.

 

기껏 없는 돈을 내어 전세를 얻었는데, 그 집이 경매에 넘어가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는 사람들. 이런 일이 현실에서는 부지기수로 일어나는데...

 

이 현실을 소설 속에 담아내어 그 비극성을 도드라지게 표현해내고 있는데...

 

저만치 떨어져 피어 있네에서 저만치... 결국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함께 하지 못한다는, 그래서 파멸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제목과 달리 유쾌함을 얻지는 못했지만, 지지리도 어두운 현실을 깨달았다고나 해야 할까... 아직도 진행중임을...

 

이제는 의료민영화까지 되면 도대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라고 하는지...

 

언제 "참말로 좋은 세상"이 올지... 정말.

 

그나마 그래도 비극적으로 끝나긴 하지만, 웃음을 유발하는 작품이 '고귀한 신세' 정도일 것이고, 나머지 작품은 제목과는 다르게 주변부로 계속 밀려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삶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집이다.

 

그래서 현실성을 확보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소설 속 현실이 실제 현실이 아니었으면 하는 마음... 제목따라 '참말로 좋은 세상'이 왔으면 하는 마음이 들게 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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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기본소득을 - 21세기 지구를 뒤흔들 희망 프로젝트 기본소득 총서 1
최광은 지음 / 박종철출판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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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과 장미 또는 빵과 장미.

 

밥이나 빵이 최소한의 생계를 뜻한다면 장미는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생활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생계를 넘어 생활을 해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데,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했다는 현대에 밥조차 해결이 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역설적이다.

 

적어도 인류가 생산해내는 물질로는 굶주리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나와서는 안되는데, 그렇지 않은 현실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밥에 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기본소득"이다.

 

누구에게나 조건없이 모두 동등한 소득을 보장해주는 제도. 그것이 바로 기본소득이다. 신고니 심사니 할 필요없이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라도 일정한 소득을 보장해주는 일. 기본소득.

 

그리 많은 액수일 필요는 없다. 밥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이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더불어 장미라고 할 수 있는 생활에 필요한 제반 조건들의 충족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지만.

 

선별적 복지가 사람들에게 위화감 조성 및 막대한 행정력으로 인한 자금 소비를 초래한다면, 기본소득은 그러한 절차가 없고 모두가 동등하게 받기 때문에 위화감이 생길 여지가 없다.

 

문제는 기본소득에 대해서 동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하고, 이를 정책에 반영해야 한다는 점인데, 이미 브라질에서는 시민기본소득법을 통과해 실시하기도 했고, 또 미국의 알래스카 주에서는 석유 판매로 남은 돈으로 주민들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해주고 있다고 하니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세계적으로도 '기본소득네트워크'가 결성되어 국제적인 연대도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기본소특한국네트워크가 결성이 되었고, 세계기본소득네트워크에 가입이 되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 않다는 점과 이를 거대 정당들이 자신들의 정책으로 연구하지 않는다는 점... 책 뒤에 나오지만 우리나라에서 기본소득에 관심을 가진 정당은 이 책이 나온 2010년을 기준으로 '사회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밖에 없었다.

 

정책적으로 큰 힘을 발휘하는 새누리당은 보편적 복지에 부정적인 입장이 많고(그들이 무상급식에 반대했던, 또는 어쩔 수 없이 찬성했던 그런 모습은 익히 잘 알려져 있으니), 그만큼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도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별 말이 없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더 활발해지고 정치 쟁점이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활동들이 필요한데, 정책적 실현을 위해서는 선거제도 개혁이 함께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처럼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가 아닌, 비례대표제를 대폭 확대하고, 중대선거구제로 전환하여 다양한 정당들이 국회에 진출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런 제도가 마련된다면 기본소득과 같은 문제는 각 정당들이 연구 검토하여 자신들의 정책으로 내걸 수 있게 될 것이고, 국민들은 좀더 다양한 정당들에 대해서 사표가 하닌 투표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기본소득 문제도 각 정당들이 연구하게 되지 않을까 한다. 아직은 멀기만 한 기본소득이지만, 불과 몇 년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무상급식이 실현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 기본소득도 마찬가지다.

 

멀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리고 많은 연구자들이나 활동가들이 기본소득에 대해서 논의를 하고 있고, 다양한 논의를 통하여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가장 먼저 공격하는 재원 마련 방안에 대해서도 나름 대책을 세워가고 있으니... 기본소득제도의 도입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이 책은 2010년에 나왔다는, 벌써 4년이 지나서 시일이 지난 감이 있는 내용도 있지만, 기본소득에 관해서 기초적인 정보와 내용을 제시해주고 있다.

 

기본소득에 관한 역사, 내용, 쟁점, 그리고 우리나라 현황까지 구체적으로 소개해주고 있어서 기본소득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처음에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좋다는 생각이 든다.

 

더 많이 읽어서 더 많이 기본소득에 대한 생각이 퍼져 나가길 바란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민들레 씨앗처럼 많은 곳으로 퍼져나갈 것이다.  

 

이 책의 작은 제목이 '21세기 지구를 뒤흔들 희망 프로젝트'다. 희망의 씨앗이 이미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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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도 목이 마르다 - 이원규 시집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76
이원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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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의 해설을 보면 이원규 시인을 '길'의 시인이라고 한다. 그가 걸은 거리만도 엄청날텐데, 단지 걸은 길이 길다고 해서 길의 시인이라는 말을 붙이지는 않았으리라.

 

길은 과정이다. 끝이 아니다. 계속 되어야 하는 진행형. 그러나 계속 가야만 하는 쉬임이 없는 움직임이 아니다. 길은 자체로 쉼터이다. 움직임이자 쉼터. 그것이 바로 길이다.

 

하여 길은 움직일 때 움직이고, 쉴 때 쉰다. 길이 이 역할을 못할 때 그 길은 죽은 길이다. 이미 길이 아니다. 길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똑같은 길이 아니다.

 

쉼이 없는 길. 곧 떠오르지 않는가. 바로 지금 우리들이 가고 있는 길이다. 삶의 길이기도 하고, 문명의 이기를 통해 가는 길이기도 하고.

 

이런 쉼이 없는 길은 곧 막힌다. 끝에 도착하기 때문이다. 계속 이어지지 않고 어디선가 멈춰야만 한다. 이것이 현대의 길이다. 현대인의 길이다.

 

이 시집을 읽으며 이 시집은 첫번째 실린 시로 됐다고 생각했다. 그 시에서 맘이 딱 멈췄다. 나머지는 길이다. 가다 쉬고 쉬다 가고 또 가고 쉬고 하는 길.

 

하여 이 시집은 하나의 길이 된다. 시를 읽는 사람에게.

 

족필(足筆) 

 

노숙자 아니고선 함부로

저 풀꽃을 넘볼 수 없으리

 

바람 불면

투명한 바람의 이불을 덮고

꽃이 피면 파르르

꽃잎 위에 무정처의 숙박계를 쓰는

 

세상 도처의 저 꽃들은

슬픈 나의 여인숙

 

걸어서

만 리 길을 가본 자만이

겨우 알 수 있으리

발바닥이 곧 날개이자

 

한 자루 필생의 붓이었다는 것을

 

이원규, 강물도 목이 마르다. 실천문학사. 2011년 초판 5쇄. 11쪽

 

이 시다. 첫번째 시가.

 

우리의 인생이 발로 쓴 삶이라는 사실. 결국 내가 걸어온 길이 내 삶의 길이었음을 시는 이야기하고 있는데... 발로 걸어서 가는 길. 그것은 어느 하나도 소홀히 여길 수 없는 길이다.

 

길 가에 있는 풀꽃부터 시작하여 발바닥에 닿는 흙, 돌멩이까지, 그리고 눈으로 보는 머언 별들까지도 다 길 위에서 만날 수 있다.

 

하여 우리는 길에서 살고 길에서 죽는다. 이 길에 대한 생각. 발로 쓴 글... 발로 쓴 삶.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 나아가 생각해 보니 세상은 온통 길이다. 길로 이루어져 있다. 길이 없으면 그것은 죽음이다. 아니, 죽음조차도 길로 이어져 있다. 우리는 죽음을 끝이라 하지 않는다. 다른 길로 갈 뿐이라고 한다.

 

이런 길을 가로막는 길이 있으니, 그것은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길이다. 탐욕으로 자연을 막고 있다. 자연스럽지 않다. 어색하다. 그러니 다시 길을 내기 위하여 걸어야 한다. 길은 걸어야 한다. 길에 발바닥이 닿아야 한다. 발바닥이 닿지 않는 길, 문명의 길, 탐욕의 길을 벗어나야 한다.

 

한 때 언론에서 일본인들이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산 곳곳에 박아두었다던 철침을 뽑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다. 우리나라 길들을 막는 철침. 그것에 우리는 분노하고,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고들 했었다.

 

그런데 철침보다도 더 무서운, 더 안 좋은 것들로 길을 가로막고 있는 지금의 현실은 무엇인가. 그것은 탐욕에 가려져 진보로 인식되기만 하는데... 결코 그것이 아님을 이 시집을 읽어보면 알 수 있게 된다.

 

시집의 말미에서 이문재 시인은 이원규 시인을 일컬어 시보다 큰 삶을 사는 시인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나라 군 단위의 길들을 거의 다 걸었다고 한다. 걸으면서 자연과 하나되는 삶, 인간 탐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그는 깨달았으리라.

 

그렇다고 이 시집이 현대 문명을 비판만 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일들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연과 하나되는 삶을 보여줌으로써 현대 문명의 탐욕에 더 도드라지게 만들고 있다.

 

자연스레 한 쪽을 비판해서 다른 쪽에 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쪽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런 삶을 살 수 있음을 은연중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래서 이 시집을 읽으면서 마음이 포근해졌다. 마치 고요한 산 속에서 맨발로 산자락을 걸으며 자연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벽소령 안개 사우나'나 '탁좆'이라는 시를 보라. 웃음이 머금어지면서도 마음이 편해진다. 그리고 지리산의 바람이 내 몸을 스쳐지나가는 듯 시원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게 이 시집의 매력이다.

 

시집을 덮고 생각해 보니, 우리 몸 자체가 길이다. 우리 몸이 온갖 길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스러운 길들. 그 길들이 막힐 때 그것이 바로 암이다. 온갖 현대질병이다. 그러니 세상의 길은 곧 우리 몸의 길이다.

 

암세포가 주위를 고려하지 않는, 자신의 기억을 잃은 세포라면 현대인의 탐욕은 바로 이런 암세포와 같다.

 

암세포가 어떻게 우리 몸의 길을 파괴하고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암세포의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거나, 또는 없애려고 한다.

 

'길'도 마찬가지다. 길은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 길이 자신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 길에서 우리는 가다 쉬고 쉬고 가다를 해야 한다. 그게 바로 길도 살고 우리도 사는 길이다.

 

따뜻하다. 이 시집. '길'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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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가 중학생이 되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우리 신화 1
최정원 지음 / 영림카디널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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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사무가라고 한다. 전문용어로. 즉 무당들이 굿을 할 때 읊조리는 이야기라는 뜻이다. 서사라는 말에는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고, 무가는 무당들의 노래라는 뜻이니, 사실 이러한 창세가는 굿을 접해보지 못한 요즘 세대들에게는 낯선 작품일 수밖에 없다.

 

낯설기만 하다면 다행이지만 아예 모르고 지내기 일쑤다. 그러니 우리나라에도 성경에 나오는 창세기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지낸다. 외국의 신화만 읽고 배우고 마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미륵과 석가의 내기에 관해서는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것이 굿에서 전해지는 '창세가'에 온전하게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이 창세가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음이 분명한데, 지금 세상이 이리도 혼탁한 것은 창세기에 석가가 속임수로 미륵을 이겼고, 그의 정당하지 못함이 이 현세를 이렇게 혼란에 빠뜨렸다고 하니, 당시의 사람들도 하느님이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왜 이렇게 싸움이나 도적질, 질투 등이 없어지지 않을까 고민을 했겠고, 그에 대한 답으로 이러한 창세가를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사무가만을 보면 분량이 짧다. 하긴 굿에서 무당이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하면 그 굿을 누가 하겠는가? 핵심만 간추려 이야기를 해야 할테니, 무가의 분량이 짧은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자라나는 세대에게, 또 무가를 잘 모르는 세대에게 무가의 원문만을 고집해서 그대로 전해 주다가는 그나마 남아 있는 '창세가'조차도 도서관이나 박물관에서 나오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많다.

 

하여 이 책의 저자는 창세가를 원문도 실어주고, 한글 풀이도 실어주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허구적인 내용을 첨가하여 한 편의 신화(소설)로 재탄생시켰다.

 

미륵이 세상을 창조하고, 이 때 미륵의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역할을 주기 위해서 메뚜기, 개구리, 생쥐를 등장시키고 있으며, 그 다음에 불과 물의 근원에 대한 해결이 있고, 인간들이 드디어 등장한다.

 

이러한 인간들이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중에 석가가 나타나 이 세상이 자신의 것이라고 하고, 미륵과 석가는 내기를 한다. 처음 두 번의 내기에서 미륵이 이겼으나 석가는 마지막으로 꽃을 피워내는(여기서는 모란이라고 한다) 내기를 하는데, 석가가 속임수를 써서 승리한다. 이에 미륵은 내세를 기약하며 현세를 떠나고 세상에는 온갖 악들이 창궐하게 된다.

 

현세불이 석가불이라면, 내세불은 미륵불이고, 세상이 혼란스럽고 어려울수록 옛날 사람들은 미륵을 찾았다. 우리나아에서 미륵은 후천개벽, 이 세상이 멸하고 새로운 세상을 불러오는 대상이었으니, 혁명을 이루려는 사람들이 미륵에 의탁한 것은 이 '창세가'에서 말미암았다고 할 수 있겠다.

 

짧은 분량의 '창세가'에 인물들을 설정하고, 성격도 만들고, 갈등을 형성함으로써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미륵-석가. 최초의 인간들. 그 자손들 중 석가의 편을 드는 반골(이름에서 이미 부정적인 특성을 읽을 수 있다), 미륵의 편을 드는 사필과 귀정(이 역시 이름에서 긍정적인 특성을 알 수 있고), 이들로부터 유래한 화전놀이. 

 

여기까지의 기원을 이 책을 읽으면 잘 알 수 있다. 그리고 미륵과 석가의 내기는 꼭 대별왕-소별왕의 내기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어, 우리나라에서 전해지는 창세기의 신화들에서 표현하는 이승과 저승 또는 현세와 내세의 모습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이 책에 나오는 현세의 모습과 비슷하다. 서로 속이고 죽이고 나만 위하고...

 

하여 우리도 이 현실을 벗어날 꿈을 꾼다. 옛날 사람들처럼 소박하게 미륵에게 귀의해 미륵이 환생해서 현세에 나타나기를 기원하지는 않지만, 이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온갖 노력을 다한다.

 

아직도 이 '창세가'에서 말하는 석가의 시대가 다하지 않았음인지... 하지만...이런 신화의 장점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반드시 온다는 것. 그런 믿음을 가지고 포기하지 말고 옳은 삶을 살아가라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길이라는 것. 바로 그것이니...

 

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게 아주 쉽게 잘 풀어 썼다. 때때로 해설도 옆에 곁들여 놓아서, 창조론과 진화론을 잘 융합시켜서 신화를 풀이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요즘 신화를 읽으면서 느끼는 건데, 최첨단의 과학기술로 치닫는 현대... 어쩌면 우리는 먼 과거의 이야기인 신화를 더 읽고 공부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런 창세가와 같은 작품을 옛날의 케케묵은 이야기라고 치부하지 말고 지금 우리의 삶을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이라고 생각을 하고 읽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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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어처구니들이 산다
성석제 지음 / 강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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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소설은 개정판이다. 초판은 읽지 못했다. 개정판에 있는 초판 서문에 보면 작가는 본래 시를 쓰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물론 나는 성석제의 시를 읽지 못했다. 나는 처음부터 그를 소설가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 '94년 여름에는 노래가 아닌, 무슨 말인지 나도 모를 시를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었다.'(8쪽)고 했다. 시가 노래가 되지 못하고, 무슨 암호처럼 유통되는 시대를 견디지 못했나 보다. 시를 견디지 못한 작가는 소설을 쓰기로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것 때문에 문(文)을 쓰려고 했다. 내게 들어 있는 산문, 산문성을 모조리 토해내면 노래만 남지 않겠는가 하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8쪽)고.

 

이 서문이 왜 중요하냐면 이 소설집은 우리가 생각하는 소설집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소설집을 생각하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가는 첫 장부터 낭패하기 십상이다.

 

이게 무슨 소설이야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처음 작품부터 읽는 사람을 당혹스럽게 한다. '웃음소리'에 대해서 모아놓은 생각을 펼치는 소설이라니...

 

하지만 소설을 말 그대로 소설(小說)이라고 생각하면, 또 작가가 서문에서 말한 文이라고 생각을 하면 이 작품을 이해 못할 것이 없다. 그냥 이야기다. 文이다. 이것이 바로 이 작품집이다.

 

작가의 내면에 있는 이야기들을 내뱉어 놓은 것. 이것이 바로 이 소설집이라고 하면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 '어처구니'(사전에는 상상보다 큰 사람이나 쿨건이라고 되어 있다고 한다)를 발견하게 된다.

 

내 삶이 소설로 쓰면 장편소설이라느니, 대하소설이라느니라는 말들을 많이 하는데, 바로 우리의 삶 속에도 이렇게 소설이 들어있는데, 이 작은 이야기들 속에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이 들어 있다.

 

이 작품집의 이야기들은 작지만, 그들은 그들 속에 '어처구니'를 갖고 있다. 이 어처구니들이 활동을 개시하면, 밖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이 된다. 그렇게 성석제는 이들을 '어처구니'로 풀어내기 시작했다.

 

성석제란 소설가를 우리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몇몇 작품을 읽었을 때 이러한 수식어가 그냥 붙은 것은 아니구나 하고 감탄을 하기도 했었고.

 

이 작품은 그 정도는 아니다. 사건과 갈등과 인물의 성격 등이 구체화되기에는 다들 분량이 짧다. 그냥 작가의 내면에 있던 이야기들을 밖으로 끄집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마음 속에 쌓아두고 있었던 수많은 이야기들을 남들도 알게 표현해 낸 책이 바로 이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의 이야기꾼으로서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주 잘 드러나고 있다. 때로는 짧은 분량 속에서도 이야기의 재치가 번뜩이고 있다.

 

우리 사회의 모습을 적절하게 풍자하고 있기도 하고, 이 소설집이 나온 지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유효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작품들도 꽤 있다. 어쩌면 한 때 유행했던 용어인 '엽편소설'이라는 말을 붙여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소설집이기도 하다.

 

그냥 예전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를 제외한 다른 산문을 모은 산문집이라고 해도 상관이 없을 듯하고.

 

많은 작품 중에 현실의 비루함을 비꼬거나 정치권력의 일방성을 풍자하거나, 또는 그런 권력에 추수하다 패가망신한 사람을 등장시키거나, 권력에 맞섰으나 자신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을 형상화하는 작품들은 이들 속에 '어처구니'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다른 작품들 속에서 이들이 어떻게 '어처구니'가 되었는지 알아보고 싶을 정도다.

 

아주 짤막한 작품들이 모여 있으니, 시간 날 때 한 편 한 편 그냥 천천히 읽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작품. 그 짧은 분량 속에서 우리가 '어처구니'를 찾아보는 재미도 느끼면 더욱 좋을 것 같은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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