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을 묻다 - 박정희 시대의 문화정치와 지성
권보드래.천정환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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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인 지금 왜 "1960년을 묻다"란 책이 나왔을까? 그게 의문이었다. 이 의문점에 대해서 이 책의 작가들은 여는 글에서 답을 하고 있다.

 

1960년대는 지금 우리를 규정하는 시원이라고... 따라서 1960년대를 보면 지금의 우리를 알 수 있다고.

 

  우리는 '좋은 전설'로 아직 살아 있는 1960년대와, 우리들 삶과 마음속의 어두운 망령인 1960년대를 함께 성찰하고 한꺼번에 벗어나야 한다. 사실 그럴 만한 때가 되지 않았는가? 여는 글에서 7-8쪽

 

1960년대는 무엇으로부터 시작하는가? 바로 4·19다. 그리고 이 4.19는 5.16으로 끝나게 된다. 민주와 자유를 우리에게 알려주었던 4.19. 그리고 이런 4,19를 계승했다고 표방하면서 오히려 4.19를 무덤으로 끌고 가버린 5,16.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5.16에 침묵하거나 찬성을 했고, 이를 바탕으로 군사독재의 길로 들어가게 되는 1960년대.

 

1960년대의 문화, 사회, 정치 등 다방면에 걸쳐서 연구한 결과물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용이 너무도 전문적이어서 학자들이나 또는 전공자들이나 보아야 하는 책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전문적인 연구서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대중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표현방식을 택하고 있어서, 50년 우리 사회가 궁금한 사람이 읽으면 재미있게 읽거나 또는 모르던 사실을 알게 되는 재미를 맛볼 수 있는 책이다.

 

작은 제목이 '박정희 시대의 문화정치와 지성'이라고 달고 있어서 박정희라는 개인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 하는 점을 제목에 부각시키고 있지만, 이 책 내용에서는 박정희 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다만 그로 인해서 문화가 어떻게 왜곡되거나 변질되었는지를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서 살피고 있을 뿐이다.

 

하여 '1960년을 묻다'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1960년대 중에서도 정치사와 경제사는 빠지게 된다. 문화를 중심으로 1960년대를 살핀 책이라고 보면 된다.

 

4.19이후 단 1년 만에 5.16이라는 군사쿠테타로 인해 자유는 저 멀리 사라지고, 민주 역시 역사의 뒤안길에 머물러 있게 되고, 문화는 군사정권의 논리에 의해 왜곡되기 시작하고, 국민들은 그전의 삶과는 다른 삶을 맛보기 시작한 때.

 

알게 모르게 경제 논리가 사회에 침투해  자유와 민주를 경제가 서서히 밀어내기 시작하는 때. 그런 전환점. 그래서 1960년대는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의 시원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과정과 비슷한 일을 우리는 겪지 않았던가.

 

1980년대 민주화 투쟁을 거쳐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헌... 그러나 지금은 다시 한계에 봉착하고 1990년대의 아이엠에프를 거쳐 우리 삶을 장악한 경제논리.

 

결국 경제논리에 의해 다른 것들이 다 묻혀버린 지금 이 시대를 1960년대는 미리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1960년을 묻는 행위는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를 묻는 행위와 같다고 할 수 있다. 60년대를 거쳐 암울한 70년대, 그러나 곧 80년대가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는데...

 

인간은 밥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우리들이 '신자유주의'의 논리에 갇혀 오로지 경제논리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지금... 어쩌면 지금은 1960년대의 쌍생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쌍생아는 아니다. 우리는 이미 한 번 겪었다. 알고 있다. 이 알고 있음을 행위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도 다시 1960년을 물어야 한다. 묻는 행위, 이것은 행동하겠다는 표현에 다름 아니다.

 

같은 길을 가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그리고 답을 찾았으면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의미가 있다.

 

덧글

 

다른 부분도 다 읽을 만하고 재미도 있지만 특히 4장 "내 귀에 도청장치"는 간첩을 다룬 이야기로서 지금 시대와 비교하면서 읽으면 참 생각할 것이 많다. 헤겔 철학의 권위자인 임석진이 어떻게 동백림 사건과 연결이 되는지, 그리고 그 과정을 송두율과 비교하면서 보여주고 있는 장면... 어쩌면 아직도 끝나지 않은 그 많은 간첩사건들... 1960년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이 4장에서는 처절하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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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 디테일로 보는 명작의 비밀 4
로라 톰슨 지음, 이수연 옮김 / 시공아트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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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라는 말은 어렵다. 말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우리나라에서도 초현실주의 작가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이상'이고 '이상'은 말 그대로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았으니 초현실주의가 쉽지 않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왜냐하면 초현실주의 자체가 현실을 넘어선다는 뜻이니, 현실은 우리의 의식에 파악이 되는 세계라면 초현실은 우리의 의식이 파악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세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초현실주의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대략 두 집단으로 분류할 수 있다. 자동기술법을 이용했던 이들은 무의식과 자아의 관계를 설명한 카를 융의 해석을 따랐다. 이 화가들은 브르통과 엘뤼아르가 실천했던 자동기술법을 자신만의 표현 기법에 응용하여 이미지가 캔버스 위에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와 반대로 사실 묘사적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꿈의 해석을 토대로 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무의식 연구를 지지했다. 이미지가 무의식의 언어라고 믿은 이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꿈과 환영을 토대로 하여 좀 더 형식적인 작품을 제작하고는 했다. (6-7쪽)

 

무의식을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표현해내면 우리는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해석하려고 하는데, 본래 감추어져 있던 무의식을 의식의 언어로 해석해내려고 하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미술은 조금 나으려나? 무의식을 이미지로 표현해내는 미술은 언어 자체가 감추고 있는 의미를 시각으로 드러내 주고 있으니 조금 낫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다만 그들의 표현에 놀라고 감탄할 뿐이다. 해석을 하기 전에 놀라움에 휩싸이게 된다. 그렇지만 이런 초현실주의도 어느 시기를 지나면 사라지고 만다. 초현실주의라는 것이 오랫동안 유지가 되면 이미 그것은 초현실주의가 아니라 현실주의가 되기 때문이다.

 

경이롭던 것도 자주 보면 경이성을 상실하듯이 무의식을 표현한다는 초현실주의도 지속되다보면 무의식이 의식으로 전환되어 현실주의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초현실주의는 역사적 시기의 산물이다.(7쪽)

 

이런 역사적 시기의 초현실주의 작품 20편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는 책이다. 이 시리즈의 다른 책들과 같은 편제를 택하고 있어서 개관과 작품 보기, 구체적인 설명이 반복되고 있다.

 

한참을 읽다보면 초현실주의 작품들을 감상하면서도 이들이 그림에 사용한 색채나 기법 등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이름인 달리나 마그리트가 나오고, 그밖에 처음 듣는 이름도 있지만, 이들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기괴하고 특이한 그림들이 우리들에게 다가오게 만든 것, 그것이 바로 초현실주의자들의 공로라고 해야겠고, 그렇다고 이들이 기본적인 미술적 기법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무의식은 의식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무의식은 의식을 통해 표현되기 때문에 이들의 초현실주의 작품들도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한 미술 기법 등을 통해 표현되기 때문이다.

 

'디테일로 보는 명작의 비밀'이라는 작은 제목 답게 세세한 부분까지 설명이 되어 있어서 미술에 문외한인 나같은 사람도 읽으면서 어느 정도 미술에 친숙해진 것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이론을 몰라도,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해도, 이들 그림을 보는 재미는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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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전에게 안녕을!

 

  이것이 특집의 제목이다. 대안교육을 표방하는 격월간지인 '민들레'에서 갑자기 웬 '원자력?' 할지 모르겠다.

 

얼핏 원자력과 교육은 관련이 없을 듯하지만, 이 특집에 해당하는 글 중에서 학교 교과서에서 표현하고 있는 '원저력'에 관한 내용을 보면(원자력, 착한 에너지?-교과서 톺아보기<이지언>) 원자력은 교육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교육이란 미래를 살아갈 사람들에게 현재에서 준비를 시키는 과정이라면, 현재의 문제점들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고민하게 하는 것이 바로 교육이다.

 

따라서 교육에 관련된 잡지라면 현재의 문제를 건너뛰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교육이 학교에 관련된 문제만이 아닌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라는 인식을 가지고 모든 쟁점이 되는 문제에 대해서 다루어주어야 한다.

 

'세월호' 문제가 아직도 진행중인 상태에서, 문제는 발생했으나 도대체 해결을 하려고 하지 않는 지배집단을 보면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교육"은 정말로 중요하다.

 

우리 사회를 배로 비유한다면 배를 침몰시킬 수 있는 여러 위험 요소 중에서 지금은 가장 위험한 것이 바로 '원자력'(앞으로는 "핵"이란 말을 쓰겠다. 원자력이 아니라 핵이 정확한 이름이라고 말을 하니까)이고, 이 문제를 간과하고서는 배가 침몰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핵"을 특집으로 이번 호 전면에 내세운 민들레는 교육잡지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셈이다.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 폭발사건이 터졌고, 그것이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고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자력 르네상스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핵발전을 더 하려는 정부의 모습에, 온갖 자금을 동원하여 핵발전을 옹호하려는 '원자력 문화재단'의 홍보 앞에 핵발전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현실.

 

이런 현실이 이대로 방치된다면, 배는 침몰할 수밖에 없다는 위기 의식. 그런 위기 의식을 다루지 않고서야 어찌 교육잡지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여 이번 민들레의 핵발전에 관한 특집은 유용하고도 시의적절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디 우리 사회라는 배를 침몰시킬 수 있는 암초가 '핵발전' 뿐이겠는가. 군대도 있고, 비정규직 문제도 있고 알려지지 않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

 

여기에 책임을 지지 않는 정치권, 아니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정치구조... 뽑을 수는 있는데, 현실적으로 내릴 수는 없는 이런 정치구조 자체가 심각한 암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회, 정치적인 문제도 다 교육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니 앞으로 민들레에서 다뤄줄 것이라 믿고.

 

이번 민들레를 읽다가 요즘 논쟁이 되고 있는 경기도 교육청의 9시 등교. 상벌점제 폐지가 떠올랐다.

 

도대체 왜 학생들의 9시 등교를 반대하지? 자연과 역행해서 사는 삶, 아침밥도 못 먹고 등교하는 삶. 이것이 바로 아침 일찍 등교하여 수업을 받아야만 하는 학교 현실에서 비롯된 것 아니던가.

 

적어도 어른이라면 아이들이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이른 새벽부터 지식을 머리 속에 억지로 집어넣는 그런 구조부터 바꾸려고 해야 하지 않나?

 

9시 등교가 맞벌이 부부에게는 아이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라면, 이것을 학교의 9시 등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근무형태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이 자랑이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 인구와 경제력으로는 6시간 노동만 해도 충분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직장의 근무 시간을 충분히 조정해서 아이도, 어른도 행복한 사회를 만들려는 쪽으로 방향을 돌려야 하는데... 엄하게 9시 등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마찬가지로 상벌점제도 마찬가지다. 이번 호에 나온 대안학교 성추행 사건에 대한 글(교육의 길을 묻습니다-박복선)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교육은 계량화된 매뉴얼대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은 사람과 사람이 관계맺고 있는 행위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각 상황에 맞게 다양한 대처 방법이 나올 수 있다.

 

또 처벌이 먼저가 아니라 그 일을 성찰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한다. 그러니 상벌점제는 편리성과 통제의 효율성만을 고려한 것이지, 교육을 우선시한 것은 아니다.

 

상벌점제는 학생에게 학생의 행위에 대해서 교육을 하기보다는 그냥 경찰서나 법원처럼 판결하고 처벌하는 방법일 뿐이다. 

 

이는 학교 현장에서 당연히 폐지되어야 할 것인데, 이게 논란이 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된다.

 

"민들레 94호"

 

학교 교육이나 대안 교육에 대한 글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교육이 무엇일까, 무엇이 교육되어야 할까.. 반대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어떻게 배워야 할까를 고민하게 만들어 주었다.

 

교육은 바로 삶임을 다시 한 번 깨우쳐주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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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과 현대시 교육
손예희 지음 / 역락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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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상상력은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다.

 

시는 언어를 짤막하게 압축한 문학이므로, 그 짧음 사이에 비어 있는 공간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채워나가야만 한다.

 

빈 공간을 채움... 상상력이 발휘되지 않으면 시를 즐길 수가 없다. 그냥 외우기만 할 뿐이고, 또 시험에 대비해서 배워두는 고통스러운 과정일 뿐이다.

 

그러나 시를 상상력과 결합시켜 자신의 상상력을 한껏 펼칠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본다면 시는 참으로 즐거움을 주는 대상이 된다. 상상력 시험의 장이 되기도 하고.

 

우리나라에 시인들이 참 많고, 시는 9년간의 의무교육과 3년의 고등학교 교육, 그리고 대학 교육에서도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배움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레 시를 접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시는 학창시절에 접하고는 끝인 경우가 많고 이 책에 나오는 연구 대상자와 같이 몇몇 사람들의 경우나 시를 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문학교육의 목표가 학생들로 하여금 문학을 향유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른이 되면 문학과 멀어지는 그런 교육이 행해졌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문학을 가르치는 목적 중에 하나가 학교를 벗어난 뒤에도 문학작품을 읽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는데 있다는데...그것이 실패했다는 증거 아닐까?

 

학교 교육을 받음으로써 오히려 문학과 멀어지는 현상이 생기지 않았던가. 여기에 시는 더하다. 학교 교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를 더 받고, 무슨 말인지 난해한 시는 더욱 학생들에게 기피의 대상이 된다.

 

무슨 말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 난해함을 자신의 상상력으로 채워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어려워하게 되는 현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니, 제대로 상상력과 결부된 시교육을 하지 않아서일까?

 

이 책은 이런 점에서 시와 상상력의 관계를 다층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시 독자의 상상 공간 구성, 서술시(이런 시는 읽기 쉽다. 이해하기도 쉽다. 따라서 시를 읽으며 머리 속에 그 장면을 상상해내기가 더 쉽다)에 대한 공감. 맥락 도입을 통한 상상적 시읽기, 시 해석에서 상상력이 차지하는 위치, 시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독자의 체험, 이미지화, 창작과정에 대한 비판적 상상쳑, 이미지 이해 과정과 교육 내용 등으로 짜여 있는데... 

 

학술적인, 너무도 전문적인 내용도 있지만, 시와 상상력의 관계에 대해서 다층적으로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책이다.

 

여기에 작품을 들고 해설을 해주고 있어서 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도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사, 특히 시를 가르치는 교사들에게 필요한 책이다. 단지 시 이해를 위한 책이 아니라 시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시에 관심을 가지게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은 교사들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는 책.

 

하여 우리 사회가 정말 시를 즐겨서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시를 가까이 하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아무래도 공감 능력이 풍부한 사회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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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미술 디테일로 보는 명작의 비밀 3
수지 호지 지음, 서남희 옮김 / 시공아트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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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하면 참 오래된 문명 국가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라는 말을 학교 다닐 때 들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피라미드, 스핑크스가 떠오르는데...

 

그렇다고 이집트 미술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없었다. 그냥 미술책에서 지나가듯이 본 것과 다른 책을 읽다가 삽화나 사진으로 나온 것이 전부다. 피라미드나 스핑크스 외에는.

 

이 책은 이집트 미술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준다. 이집트 미술 중에서도 고대 미술이다. 20개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는데, 서기로 2세기에 나온 마지막 작품을 제외하면 모두가 다 기원전 900년 이전의 작품들이다.

 

멀고도 먼 작품들이라는 얘기이고, 우리나라로 따지면 삼국시대가 제대로 기능하기도 전의 고대 상고사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그러니 그들 작품에 대해서 알고 있지 않은 것이 비정상은 아니다. 세계적으로 문화재들이 많이 약탈이 되었고 고대 이집트 작품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작품이 남아 있고, 그 남아 있는 작품들 중에서 이집트 예술을 잘 보여주는 작품을 골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세부 사항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어서 고대 이집트 미술의 의미를 잘 파악할 수가 있고, 이 미술에 나타난 종교의식이라든지, 그들의 생활양식을 잘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주로 왕들에 대한 작품인데, 그도 그럴 것이 이집트의 왕은 파라오라고 하여 신성시되었고, 죽어서도 신이되었다고 믿었으니, 그들을 기리는 작품들이 많았을 것이 당연하다. 이런 작품들에서 어떤 표현들이 신성함을 드러내고 있는지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시대가 흐르면서 왕만이 아니라 귀족들에 대한 작품도 나타나는데, 이들의 작품은 주로 '사자의 서'를 통해 나타난다. 그들의 생사관을 볼 수 있는 그런 작품들을 소개해주고 있다.

 

그러다 갑자기 900여 년을 건너뛰게 되는데... 작품이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앞에서 다룬 작품들과 중복이 되기에 20편에 선정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없지만, 기원전에서 서기 2세기로 넘어간다.

 

그 다음에는 이집트만의 특이한 예술이 없다고 할 수 있다는 판단인지 이 책은 주로 고대 이집트 미술에 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아마도 미술의 중심이 그리스-로마를 거쳐 유럽으로 넘어갔기 때문이고, 이집트를 상징하는 미술품들은 고대에 주로 나타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까마득한 옛날 고대 이집트 미술에 대해 설명한 이 책을 읽으며 그들의 생사관, 신관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양념으로 이집트 신의 이름에 대해서도 몇몇 얻어들었다는 의미도 있고.

 

자기 나라만의 특성을 지닌 미술... 역사를 두고 우리 인류에게 소중한 자산임을 생각하게 해준 책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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