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소녀들의 숲
허주은 지음, 유혜인 옮김 / 미디어창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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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배경은 조선시대. 아직 명나라에 여인들을 공녀로 바치던 시대. 공간적 배경은 제주도.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도 외딴 곳으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던 곳. 


제주도에서 열세 명의 소녀들이 사라진다. 그리고 그 실종사건을 수사하던 민 종사관도 실종이 된다. 실종된 아버지를 찾아 제주도에 오는 민환이로부터 사건은 시작된다. 환이에게는 제주도에는 남겨두었던 동생 민매월이 있다.


도대체 왜 소녀들이 사라진 것일까? 누가 사건의 주범인가? 누가 환이와 매월을 도와줄 수 있는가? 두 자매를 중심으로 유선비라는 술주정뱅이와 문촌장과 죄인 백씨, 그리고 매월을 키워주고 있는 노경 심방. 촌장의 딸과 죄인 백씨의 딸. 환이의 고모, 제주 목사가 등장한다.


처음부터 환이는 난관에 봉착한다. 도대체 누가 범인이란 말인가? 단서는 없다. 그러다 하나하나 단서를 찾고 문제를 풀어가게 된다. 결국 범인을 찾아내고 사건을 해결하는데... 이 과정에서 조선이, 그 전 나라였던 고려가 겪었던 여인을 공녀로 바쳐야만 했던 역사적 비극이 나타난다.


이런 비극을 힘을 모아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제주 목사는 실종이 아닌 가출로 판단하고 수사를 하지 않고, 촌장 역시 손을 놓고 있는 상태. 


이것은 '나만 아니면 돼'라는 태도이고, 이런 태도는 오히려 지배층에서 더 잘 나타난다.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딸을 대신 보내려는 사람들. 사건의 중간 쯤 가면 사라진 소녀들은 누군가의 딸을 대신해서 끌려갔음을 짐작하게 된다. 힘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딸을 지키기 위해서 저지른 일.


힘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지 못한다. 단지 힘있는 자들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내륙이 아닌 제주도에서 소녀들을 구한다. 왜냐하면 지배층들이 자신의 딸을 대신하여 공녀로 보내려는 소녀를 내륙에서 구한다면 이는 사건이 공론화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은 제주도에서 소녀들을 구해 대신 보내려 한다. 


제주도. 내륙에 비해 차별을 받는 곳. 여기에 제주도 여인들은 더한 차별을 받으니, 이중 차별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하층민들의 삶은 더더욱 그렇다. 비밀을 밝히려는 소녀들은 죽음에 이르고, 이를 지배층들은 무마하기만 하고.


돈과 권력과 개인의 이익이 결탁했을 때 피해를 보는 사람은 하층민들이다. 이 하층민들은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다. 슬퍼하고 슬퍼하고, 좌절하기만 할 뿐.


그러다 환이가 등장한다. 아버지를 찾는 과정에서 문제를 알아가는 환이. 나라가 겪는 비극을, 힘없는 나라에서는 여인들이 더욱 수난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환이를 통해서 작가는 잘 보여주고 있다.


아름답게 태어났다는 사실이 죄가 될 수 있는 나라. 자신의 의지보다는 부모의 의지에 휘둘려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인들. 환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으로만 살아왔던 환이.


환이의 세상은 아버지의 세상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실종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환이는 자기 세상을 만나기 시작한다. 자신과 비슷한 여인들이 겪는 어려움도 알게 되고. 


약한 자신을 의식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하지만 옳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옳음을 포기하지 않는 길이 자신과 동생 매월이를 지키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고.


범인은 결국 지배층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제주도에서 지배층이라고 해야 내륙에서는 보잘것없는 직위겠지만, 그럼에도 제주도에서는 나름 돈과 권력을 쥐고 있다. 물론 제주 목사로 내려온 사람처럼 자포자기하는 관료도 있지만, 토착민으로서 촌장의 지위에 오른 자는 강한 권력을 쥐고 있을 수밖에 없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환이는 문제를 해결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사라진 소녀들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찾는 과정이기도 하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수사 일지를 바탕으로 자신의 일지를 써나가는 환이. 그런 환이를 도와주는 매월. 두 자매가 갈등하며 서로를 알아가고 의지해가는 과정을 통해 이들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된다.


주체적인 여성으로 서게 되는 환이의 이야기라고 해도 좋은데, 그 과정에서 공녀라는 역사적 비극을 생각하게 되고, 그러한 비극 앞에서도 계층에 따라 비극의 강도가 달라지고 있음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캐나다에 살고 있다고 하는데, 영어로 쓰인 소설을 번역했다고 하지만 번역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작가에 대한 소개가 없이 또 책 표지에 옮긴이를 밝히지 않았다면 그냥 한국에서 한국어로 출판한 소설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로 매끄럽게 진행된다.


때때로 다른 길로 들어서는 환이의 모습에 안타까워 하기도 하고, 단서를 해석하면서 사건의 본질에 다가갈 때는 응원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여기에 같은 여성으로서 알게모르게 도와주는 다른 인물들을 통해, 약자들의 연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사건이 해결되는 과정까지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사건 해결 후에는 환이가 어떤 삶을 살지, 주체로 서게 되는 환이의 모습이 후일담으로 나와 흐뭇한 마음으로 책을 덮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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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긴 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 역시 시를 좋아하는 태도는 아니겠지만.


  시는 짧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길면 굳이 왜 시로 쓰나 하는 생각도 하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길어야 하는 시도 있다. 짧게 끝날 수 없는 시들.


  김혜순 이번 시집은 길다. 시들도 길지만, 시가 계속 연결이 되고 있다. 그렇다고 소설처럼 인물, 사건, 배경이 뚜렷하지도 않다.


  흐릿한 가운데 긴 시를 읽어나가야 한다. 시를 읽다가 길을 잃기도 한다. 당연한 일이다. 시인이 써놓은 시들이 독자에게 다가갈 때 어떤 시들은 곧장 다가오고, 어떤 시들은 빙빙 에둘러 다가오고, 어떤 시들은 아예 다가오지 못할 때도 있다.


이번 시집, 그냥 흐릿하다. 명확하지 않다. 그럼에도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게 한다. 무엇을 생각하게 할까? 두 단어에서 생각이 더 나아가지 않았다. 


두 단어에서 시집을 관통하는 무엇을 얻고자 했으나 역시 길을 잃었을 뿐이다.


두 단어는 '새하다'와 '환상통'이다.


'새하다' 무슨 뜻인지 모른다. 새는 동물,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는 날개 달린 동물을 의미한다. 그런데 보통 새가 되다라는 말을 쓰지, 새하다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되다라는 수동형을 하다라는 능동형으로 바꾸었다.


그렇다면 새처럼 자유롭지 못한 삶을 거부한다는 의미로, 주체적으로 새 삶을 찾겠다는 의미로 '새하다'라는 말을 썼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새하다'라는 말을 했음에도 시집에는 능동적, 주체적인 강함을 느끼기 보다는 상실, 아픔 등을 느끼게 된다. (나만 그런가?)


그래서 자연스레 '환상통'이란 말에 끌리게 된다. 환상통이란 있던 것이 사라졌을 때, 없는 데도 마치 있는 것처럼 통증을 느끼는 증상을 말한다. 날개 환상통이란 날개가 없음에도 마치 있는 것처럼 통증을 느낀다고 볼 수 있다.


날개가 있었다? 새하다 이전에 이미 새였다는 말이다. 새였다가 날개를 잃었다. 그리고 그 날개를 잃었기에 환상통을 겪는다. 자신이 날개가 있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있으므로.


날개가 있다는 것은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 날개를 잃었다는 것은, 환상통으로 말해지듯 속박 상태에 머물렀다는 것.


이럴 때 환상통을 느끼면 자신이 날개 있었던 시절을 깨닫고, 그 날개 없음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인식한다는 말이다.


날개 없음이 당연하지 않다면 날개를 달아야 한다. 다시 새가 되어야 한다. 새해야 한다. 그렇게 결핍의 상태에서 충만의 상태로 나아가고자 한다.


하지만 그 길은 결코 쉽지 않다. 날개를 이미 잃었기 때문이다. 날개가 있었을 때보다 더욱 힘든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새할 수가 있다. 이것이 누구의 삶인가?


새하는 존재를 찾아가는 여정. 새하는 존재들이 있음을 보여주는 여정. 그것이 바로 김혜순의 시집일 수 있다. 


첫시 제목이 '새의 시집'이고, 첫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시집은 책은 아니지만 / 새하는 순서 / 그 순서의 기록' 

...

결단코 새하지 않으려다 새하는 내가

결단코 이 시집은 책은 아니지만 새라고 말하는 내가


이 삶을 뿌리치리라 / 결단코 뿌리치리라


물에서 솟구친 새가 날개를 터는 시집

(김혜순, 날개 환상통, 문학과지성사, 2023년 초판 8쇄. '새의 시집'에서)


내게는 여전히 흐릿한 시집이다. 시들이다. 많은 말들 사이에서 길을 잃은 시집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길 잃음 속에서 두 단어를 지향점으로 삼아 나아간다.


'새하다'와 '환상통' 


잃어버렸음을 깨닫는 일. 잃어버렸으므로 다시 찾아야 함을 아프게 꼬집는 시. 김혜순의 '날개 환상통'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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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없는 노동 - 플랫폼 자본주의의 민낯과 미세노동의 탄생
필 존스 지음, 김고명 옮김 / 롤러코스터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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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노동(microwork)'이라는 말이 나온다. 마이크로(micro)를 작다는 뜻의 미세라는 말로 번역을 했는데, 주를 보면 이 용어에 대한 통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microwork는 아직 우리 사회에 합의된 용어가 마련되지 않았다. 이 책에서는 '미세노동'이라고 번역한다-옮긴이. 12쪽)


그런데 미세노동이라고 번역을 해서인지 이 의미가 잘 들어오지 않는다. 아주 작은 또는 세세한, 아니면 사소한 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아주 작은 단위로 잘라서 전체를 볼 수 없게 만든 노동이라고 해야 한다. 


즉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일을 왜 하는지, 그 일이 누구에게 어떻게 필요한지, 쓰임새는 어떠한지를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동이라는 말이다. 그냥 주어진 대로 아주 간단한 일을 짧은 시간에 해내야만 하는 노동. 그것도 적절한 보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적은 액수의 보수만을 받을 뿐이다.


왜 이런 노동이 만연하게 되었는지 두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우선 플랫폼 자본주의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운영하는 플랫폼 기업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수많은 정보를 얻어야 한다.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사업을 운영한다.


다만 정보를 얻은 다음 그 정보들을 분류해야 한다. 이 분류된 정보들을 바탕으로 자동화, 또는 인공지능, 로봇들을 활용할 수가 있다. 자동화된 기계들이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이런 정보를 분류하고, 라벨링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확보할까? 두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로 잉여 인력의 양성이다. 자동화로 실직한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로 전락시킬 작업을 한다. 실직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먹고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은 적은 보수에도 일을 할 수밖에 없다.


플랫폼 노동은 이렇게 잉여 인력을 기반으로 운영이 된다. 미세노동 역시 잉여 인력이 없으면 유지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화, 기계화로 인해 실직한 사람들이 다시 그런 자동화, 기계화를 강화하는 일에 투입이 되는 것이다.


자신들의 처지를 더욱 열악한 환경으로 몰아가는 일을 자신들이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 책에서는 잘 지적하고 있다.


'지금 가난한 피박탈자들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그들의 공동체를 겁박하기 위해, 혹은 노동 과정에서 그들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들을 부지불식간에 훈련시키고 있다. 이른바 마르크스의 생생한 악몽보다도 더 악몽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 기계학습 시스템에 원료를 공급하는 것이 노동의 일차적 혹은 이차적 목적이 되는 세상이다. 따라서 미세노동은 매우 심각한 노동의 위기를 불러일으킨다고 볼 수 있다.' (128쪽)


이런 악순환을 어떻게 끊어야 할까? 당연히 노동자들의 단결이 필요하다. 단결을 통한 집단 행동이 필요한데, 미세노동은 노동자들이 모일 공간과 시간을 제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상황이 더욱 안 좋아지면 이들은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


이들과 더불어 이런 자동화-기계화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이것을 사람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쪽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찾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 사람들과의 연대를 통해서 미세노동은 인류의 생존에 필요한 일들을 최소한의 노동력을 투입하는 쪽으로 개선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노동을 적게 하면서 삶의 다양한 면들을 추구하는 생활이 가능해질 수 있다고 한다. 어쩌면 생산성이 발달해서 사람들의 생활이 최소한의 노동으로 최대한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바뀔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 '미세노동'이란 말은 긍정적인 의미로 쓰일 수 있을 것인데, 이는 바로 임금노동에서 벗어났을 때나 가능하다.


이는 사회가 임금 사회가 아닌 무임금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데, 이것이 가능할까? 저자는 희망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지만, 무임금 사회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기본소득이 보장되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최소한의 생활을 기본소득이 책임져준다면 그때는 임금노동에 목숨을 걸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임금노동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는 사회에서는 사회에 꼭 필요한 노동을 미세노동으로 만들어 한 사람이 4시간 할 일을 4사람이 한 시간씩 또는 40 명이 6분씩 할 수 있도록 하면 되지 않을까? 저자 역시 이런 노동방식을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저자는 지금 플랫폼 자본주의에서 보이지 않는 미세노동이 얼마나 많은지, 그것들이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는 쪽이 아니라 더욱 나빠지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근거를 들어서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을 토대로 저자는 미세노동이 반대로 사람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쪽으로 작동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되기 위한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겠지만, 이런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미세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단결이, 그들의 행동이 필요함도 간과하지 않는다. 이 책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우리의 편리 속에 다른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노동이 (혹은 노동력 착취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사회적 전환이 필요한 때임을 주장하고 있는데... 우선은 보이지 않는 면을 볼 수 있는 눈을 갖춰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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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세화 선생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어제 들었다.


  아직 더 살아계셔도 될 나이인데... 누군가가 '나이 70이 넘으면 자연사라고 할 수 있다'고.


  그러나 요즘 나이 70은 자연사할 나이가 아니다. 기대수명이 80을 훌쩍 넘은 이 시대에 70대에 세상을 뜨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로 다가오지 않는다.


  홍세화 선생도 그렇다. 1947년 생이라고 하니, 아직 더 이 세상에 있어도 좋을 나이다. 그런데도 무엇이 급하다고 세상을 떴는지.


'세화'라는 이름이 세계 평화의 줄임말이라고 하던데, 그러한 세계 평화가 오지 않고,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선생을 더욱 힘들게 했는지...


그동안 해온 마음고생들이 수명을 단축시키지는 않았는지, 저 세상에 가서는 마음 편히 지내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적어본다.


그의 책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읽었을 때 많은 충격을 받았다. 홍세화 선생이 살아온 이력도 그렇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던 부분을 프랑스를 통해서 생각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번째로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도 좋게 읽었다.


좌파와 우파라는 말이 프랑스혁명에서 나왔다고 하던데, 이런 좌파와 우파를 우리는 남북으로 갈라져 서로 갈등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은 좌파와 우파를 꼭 남북으로 가르지 않아도 되지만, 여전히 종북좌파라는 말이 살아 있으니, 좌우가 남북을 가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의 책에서 기억나는 말은 바로 '똘레랑스(관용)'이다. 이 똘레랑스를 지니는 것은 무조건 용서하라는 말이 아니다. 상대를 나와 같은 존재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런 자세를 지녀야 너와 나가 적이 아니라 함께 할 수 있음을 생각하게 했던 말.


좌우나 남북이나 서로가 서로를 밀어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접점을 찾아 공통분모를 점점 넓혀가는 것. 그것이 바로 '관용' 아닐까 하는데...


이러한 관용을 이야기한 지가 20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우리는 상대는 함께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밀어내야 할 존재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선생의 부음을 듣고 다시 '똘레랑스'를 생각한다. '똘레랑스'라는 말은 있는데, 이 말이 있음도 알고 있는데, 그런데도 상대를 배척하기만 하고 있는 현실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이 말이 우리 사회에 정착할 날이 언제일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간 선생이 우리 사회에 던져준 많은 화두를 이어받아 그것을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이 선생이 원하는 후배들의 모습이겠지 하면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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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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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SF소설이라고 하지 않는다. 자신이 쓴 소설을 STS(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SF라고 하고 싶다고 한다. 자신의 소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 이는 독자들에게 이런 식으로 읽어달라는 주문과도 같다.


즉, 자신이 쓴 소설을 과학과 기술이 사회와 맺는 관계 또는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중심으로 읽고, 그 소설을 통해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당신이 살고 싶은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라는 얘기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만큼 지금 과학기술이 곧 이룰 미래의 모습이 소설에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소설에서는 외계 생명체가 등장할 필요가 없다. 물론 이 소설집에서도 원소기호의 이름을 딴 외계에 사는 생명체 이야기가 나오기는 한다. 그것도 불멸(부활)과 독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만, 이는 독재정권에 대한 우화로 읽힐 수가 있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긴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소설 '아스타틴'(229쪽-360쪽)이다. 란타넘족 원소기호에서 이름을 따오고, 이들이 절대권력을 잡기 위해서 싸우는 장면을 무협이나 폭력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소설을 연상시키면서 전개하지만, 독재자가 영구 집권을 할 수 없음을,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존재가 나타남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한 편의 활극을 통해 독재정권의 말로를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소설을 예외로 하면 나머지 소설들은 모두 배경이 지구에 살고 있는 인간들이다.


제목이 된 소설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은 증강현실을 다룬다. 증강현실로 자신이 보고자 하는 면만 볼 수 있는 세상이 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소통할까? 내가 심한 욕을 해도 상대는 자신이 듣고 싶어하는 말로 번역해서 듣게 된다.


마찬가지로 비루한 현실을 보지 않고, 증강현실로 왜곡된 현실을 보게 된다.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실제와 일치할 필요가 없는 세상. 


모든 사람이 이러한 증강현실로 세상을 보게 되면 과연 그 세상은 어떻게 될까? 소통이 가능할까? 소통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불편한 진실을 보거나 듣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즉 자신에게 유리한 것들만 보고 들을 수 있는 세상에서 굳이 진실을 대면하려 하지 않는다.


이 소설을 다른 쪽으로 넘겨보면 '데이터 시대의 사랑'이 된다. 옛날에는 점쟁이를 찾아가 만남의 의미를 들으려 했다면 이제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통계 또는 알고리즘으로 무장한 통계로 만남을 예측하는 세상이 된다면.


이런 세상에서는 자신이 데이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는 데이터에 종속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데이터로 분석한 내 행동이 이러했기에,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데이터의 예측대로 행동하려는 경향이 강해지지 때문이다. 이는 증강현실로 현실을 왜곡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삶에는 불확실성이 존재하고, 이 불확실성으로 인해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작동한다고 볼 수 있는데, 데이터에 기반한다면 자유의지를 부정하게 된다. 이미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다는, 예정설로 회귀하게 된다. 이것이 증강현실 속 인간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그럼에도 장강명은 '데아터 시대의 사랑'에서 결말을 데이터 시대에서 인간의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시대로 끌어온다. 이게 인간이라는 듯이.


이 불확실성을 다른 면으로 살펴보면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이 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차용한 이 소설은 인간의 뇌에 다른 사람이 겪은 경험을 이식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악의 평범성'이란 말을 탄생시킨 아이히만에게 유대인이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을 경험하게 하는 기술이 있다면, 과연 그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상대의 경험을 자신의 뇌에 이식한다고 해서 그 경험이 온전히 자신의 경험이 될 수 있을까? 인간이 인간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이렇게 이식될 수 있을까?


그런 감정의 전이가 된다면 사람들이 서로 맺는 관계에서 불확실성이 없어질 것이다. 그런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일까? 저 사람이 무엇을 느끼는지 내가 똑같이 알 수 있다면? 또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 상대가 정확하게 느낄 수 있다면? 


그럼 인간 관계가 좋아질까? 오히려 더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관계에서는 틈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과 상대가 함께 채워야 할 틈. 거리라고 해도 좋다. 이런 틈과 거리가 바로 불확실성에서 비롯하고, 불확실성은 함께 노력하면서 틈과 거리를 채우는 역할을 하기에 인간 관계를 더욱 풍요롭게 한다.


우리는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해 하지만, 바로 그 불확실성 때문에 오히려 더 생동감 있는 관계를 맺게 된다. 이를 글쓰기에 적용해 보자. 작가들은, 굳이 작가가 아니라도 사람들은 글을 쓰다가 막히는 때가 있다. (사이보그의 글쓰기)


글이 도통 써지지 않을 때, 글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이 역시 자신이 하는 일이 불확실성에 빠지는 경우다. 그런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뇌를 자극하는 기계가 발명된다고 하자. 그 기계를 사용하면 이런 단절을 겪지 않아도 된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계에 의해서 글을 자동적으로 쓰게 된다면? 


이런 글에서 생동감을 느낄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자. 인간에게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무엇인가 하면 논쟁이 있겠지만 '뇌'가 빠지지는 않는다. 뇌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이니까.


따라서 뇌를 중요하게 여겨서 뇌만 남겨도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많은 작가들이 이러한 뇌에 대해서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뇌'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 작품과 비슷하게 뇌만 지니고 우주로 나아간 사람들 이야기가 있다. '당신은 뜨거운 별에'다.


뇌를 로봇에 장착해서 금성을 탐사한다.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그런데 그 뇌를 또 이익집단이 통제할 수 있다면? 자신의 뇌지만 자신을 고용한 사람들이 자극을 통해 뇌를 통제한다면 과연 그때의 나는 나인가? 오히려 남이 하라는 대로 하는 기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지니게 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점을 생각해야 한다. 뇌만 남은 인간, 아니 뇌를 다른 기계에 이식한 인간. 그리고 그 뇌를 다른 집단이 통제하도록 하는 인간. 이는 자유의지가 없는 인간이다. 자유의지가 없다는 말은 자신의 행동이 초래할 불활실성을 제거했다는 말이다. 그런 사회에서 사는 인간이 과연 행복할까? 작가는 인물이 탈출하는 것으로 그런 세상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우리에게 알리고 있는데...


여기까지 언급한 소설들은 지금 우리 시대에 개발을 하려 하고 있는 기술들이다. 이런 기술들이 실용화된다면 그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우리가 행복한 사회일까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작가의 말에 공감하게 된다. 그의 삼단논법을 보자.


1. 오늘날 과학기술은 나의 삶과 내가 사는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

2. 나는 좋은 삶을 살고 싶고, 좋은 사회를 만들고 싶다.

3. 그러므로 나는 과학기술을 통제해야 한다. (401쪽) 


이 삼단논법을 통해서 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술이 우리 삶과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까? 그 변화는 바람직한가?'하고 폭넓게, 적극적으로 따져 묻고 싶다. 우리가 어떤 기술에 대해서는 개발하거나 사용하지 말자고 혹은 사용을 제한하자고 합의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고 본다. 사실 우리는 이미 그런 일을 하고 있다.' (401-402쪽)고 말하고 있다.


작가가 이 소설을 쓴 이유다. 그리고 자신이 쓴 소설에 그냥 SF소설이 아니라 STS(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 SF라고 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작품집에 있는 소설들 읽으면서 현대 과학기술이 가고 있는 길에 대해서 생각해봐야 한다. 논의해야 한다. 우리는 계속 이 지구에서 살아가야 함으로.


읽으면서 역시 장강명이다 하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에게 잘 읽히는 소설을 쓰는 작가, 사람들이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작가 장강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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