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와 모델 - 화가의 붓끝에서 영원을 얻은 모델 이야기 명화 속 이야기 5
이주헌 지음 / 예담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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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다.

 

그 유한성이 우리를 현재에 매달리게 하는지도 모른다. 아니 유한성이 우리를 영원에 매달리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한하기 때문에 지금 잘 살기를 원하지만, 마찬가지로 유한하기 때문에 자신이 영원히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기도 하다.

 

영원히 남는 방법.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듯이 무언가 남겨야 영원을 얻는데, 이 책에는 그림으로 자신들을 영원히 남긴 화가와 모델이 등장한다.

 

화가는 모델을 그림으로써 그 그림으로 영원하게 되고, 모델은 그 그림 속의 인물로서 영원하게 되는데, 이런 화가와 모델의 관계를 세 부류로 나누어서 설명을 하고 있는 책이다.

 

1부는 정염의 거울에 그대를 비추다라고 하여 화가와 모델이 사랑하는 관계로 발전했으나 세상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관계가 된, 소위 말하는 불륜이 된 그런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모델이 화가의 앞에 서는데, 이것이 순간적인 것이 아니고 지속적일 때 어찌 사랑의 마음이 싹트지 않을까. 남녀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만남이 있다면 어떤 형태로든 사랑의 관계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사회적 통념과는 다르게 나타난 것이 바로 1부에 나오는 화가와 모델의 관계이다.

 

불꽃같은 사랑, 운명같은 사랑, 어쩔 수 없는 사랑이라는 말이 어울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들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느꼈을 고통은 어쩔 수가 없다. 참...

 

그래도 작품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니, 이들의 사랑이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고... 이 중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람들은 로댕과 까미유 클로델이니...이들의 관계가 다른 화가와 모델에게도 나타났다고 보면 된다.

 

2부는 아내, 그 사랑의 이름으로라고 하여 모델이 화가의 아내인 경우다. 이들의 사랑은 불꽃같은 사랑이라기 보다는 잔잔한 물결 같은 사랑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물결이 그들의 생명을 앗아가기도 하지만 말이다.

 

여기서 가장 마음을 울리는 사랑이 바로 모딜리아니와 잔 에뷔페른의 이야기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하고 함께 지내지만, 화가인 모딜리아니가 죽자 아이를 임신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투신 자살한 잔 에뷔페론의 이야기는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하게도 하지만, 이들의 이런 이야기로 인해 그들의 작품이 영원성을 얻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작품 속에서도 생생히 살아있지만, 이야기로도 살아있는 화가와 모델의 관계이기도 하다.

 

3부는 영감의 씨줄, 동행의 날줄이라고 하여 불륜도 아니고, 부부도 아닌, 그러나 화가와 모델로 서로에게 도움을 준 그런 관계들을 살피고 있다.

 

특이하게 맨 마지막에 프리다 칼로 편에서는 모델이 바로 자신인 칼로라고 하고 있는데, 하긴 칼로의 삶을 보면 자신의 그림에서 칼로만큼 중요한 인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은 화가만을 기억하고, 그림 속의 인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지만, 그림 속의 인물은 모델로서 영원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요즘은 미술관에서 박물관에서 특별대접을 받으며 보관되고, 전시되고 있으니 이들의 생명은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생각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림이 존속하는 한 화가 역시 영원성을 얻는다. 화가는 모델에게 영원성을 부여했다고 하지만, 마찬가지로 모델도 화가에게 영원성을 부여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화가와 모델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원성을 주는 그런 관계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명화라고 하는 작품에서는.

 

영원성. 인간이 추구하고 싶어하는 것이지만, 그 영원성을 어떻게 획득하느냐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적어도 안 좋은 쪽으로 영원성을 획득하는 것보다는 좋은 쪽으로 영원성을 획득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림을 보며, 그림을 통한 화가와 모델의 영원성만이 아니라, 그 그림을 보는 나의 영원성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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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배의 재구성 - 기본소득과 사회적 지분 급여
브루스 액커만 외 지음, 너른복지연구모임 옮김 / 나눔의집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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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허경영이라고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래도 한 때 우리나라 대통령 후보였던 사람. 그는 갖가지의 기행으로도 유명한 사람인데, 그가 대통령 후보로 나와 내건 공약을 보고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허황된 소리를 한다고 했었다.

 

그의 공약 중에서 위키피아에 있는 것 몇 가지만 보면 지금 보아도 앞서가도 너무 앞서 갔다.

 

만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건국수당 매월 70만원씩 지급

결혼수당 남녀 각 5000만원씩 지급 (재혼 제외)

출산수당 출산시마다 3000만원씩 지급

 

이것이 그의 공약 중 유명해진 것들이다. 다 복지에 관련되는 것들인데, 만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75만원씩 지급한다는 공약은 현 대통령이 후보시절에 만65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20만원씩 지급한다는 것을 앞서 간 것이다.

 

결혼이나 출산 수당은 외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것들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출산수당은 이야기되고 있지만, 결혼 수당은 아직(몇몇 지자체를 제외하고는 실시하고 있지 않다. 여행 다니다 어느 동네에서 플래카드에 결혼을 하면 결혼 장려수당으로 얼마를 준다는 내용을 본 것 같기도 한데...) 이야기가 되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 때는 저런 미친 사람, 하고 손가락짓을 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무상급식이라 불리는 의무급식이 시행되고 있으며, 어린이들의 누리교육과정을 나라에서 책임지겠다고(말로는 그래놓고, 지자체, 또는 교육청에 떠넘기고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하고 있지 않은가.

 

반값 등록금 이야기도 나왔었고,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 반값 등록금으로 내리지는 못하겠지만 그에 준하는 정책을 펼치겠다는 공약도 현 대통령 공약이지 않았나.

 

그런데 그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이 되어버려 문제가 많아졌지만, 이렇게 그런 공약이나마 내걸수밖에 없는 사회 현실이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갑자기 왜 허경영 이야기냐고?

 

요즘 계속해서 기본소득에 관해서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 모두에게 조건없이 일정액을 지급하자는 기본소득.

 

허경영의 공약처럼 실현가능성이 없는 허황된 주장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많고, 그 돈을 어디서 마련하냐고, 꿈도 꾸지 말라고 하는 사람도 많지만, 이미 세계적으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상태다.

 

유토피아, 그냥 유토피아가 아니라 가능한 유토피아라고 해서 '리얼 유토피아'라고도 하는 것 같은데, 기본소득에 관한 토론 내용을 담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분배의 재구성"

 

기본소득은 기본적으로 분배의 재구성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분배의 재구성으로 사람들은 실질적 자유를 누릴 수가 있게 된다.

 

이들은 평등하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가 있고, 당당한 한 개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갈 수가 있다. 무엇으로도 차별받지 않고 말이다.

 

다만, 기본소득으로 달마다 얼마를 주어야 하냐 하는 금액과 어디서 재원을 마련하느냐는 재원 마련의 문제, 그리고 기본소득과는 성격이 좀 다른 '사회적 지분'과의 유사점과 차이점, 그리고 어느 정책을 지지할 것이냐 하는 점이 논쟁거리가 될 수 있다.

 

이 책은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반 빠레이스와 사회적 지분을 지지하는 액커만과 알스톳의 주장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둘은 목표에서는 비슷하기도 하지만 과정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다. 지급이 지속적이냐 일시적이냐, 소액이냐 거액이냐의 차이 말고도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에서도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것이 더 우리나라 상황에 합당하냐를 지금은 따질 수 없지만, 적어도 이런 논의들이 일어난다는 사실들이 기본소득이 먼 미래가 아닌 곧 우리에게 도래할 미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복지가 계속 뒤로 가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이런 책이 번역되어 이미 몇 십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기본소득에 관해서 논의를 하고, 그 주장이 실현될 수 있게 구체화 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나라 복지에 대해서 냉철하게 판단하는 눈을 심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함께 사는 세상, 사람들이 실질적 자유를 누리면서 제 삶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소득은 필수적이니, 그런 삶의 소득을 재분배해주는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도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하는 정당이 있고, 또 기본소득에 관해서 이론을 만들고 홍보도 아닌 단체도 있는데, 기본소득에 대해서 또는 사회적 지분에 대해서 알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을 읽어보면 기본소득이 왜 필요한지, 무엇인지, 또 사회적 지분과는 어떻게 다르고 어떤 것이 더 자신에게 와닿는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본소득에 대해 관심이 더 생기면 기본소득네트워크에 한 번 들어가 살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http://basicinco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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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이렇게 속삭인다 - 이주헌의 행복한 미술 산책 명화 속 이야기 1
이주헌 지음 / 예담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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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명화"라고 하면 우리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이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아니면 반 고흐의 그림을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명화"은 우리네 삶과는 거리가 먼, 미술 시간에나 배운, 미술관이나 가야 만날 수 있는 그런 존재로 여기고 만다.

 

그냥 하나의 지식으로만 머물로 마는 "명화"들이 얼마나 많은지. 책에서 한 번 보았다거나, 이야기를 들었다거나, 가끔 뉴스에서 얼마나 팔렸다거나 하는 소리만을 듣고 넘어가고 만 경우가 태반이다.

 

"명화"라는 말이 주는 느낌 때문에 그런데, 이 책의 제목도 "명화는 이렇게 속삭인다"이니, 명화에 대해서 우리가 갖고 있는 개념들이 적용이 된다면 그냥 또 하나의 지식으로만 멈추고 만 책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지은이는 "명화"에 대해서 다르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명화"가 아니라, 바로 내게 말을 걸어주는, 내가 말을 할 수 있는 그림, 그것이 바로 "명화"라고.

 

'좋은 예술은 무엇보다 사람이 귀한 줄 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자신이 이야기를 들어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에게 좋은 예술 작품은 겸손히 다가간다. 그리고 같이 대화를 나누자고 권유한다. 그렇게 세상의 많은 영혼과 대화할 능력을 지닌 예술 작품, 그것이 바로 걸작이고 명화이다.' 6쪽.

 

이런 작품이 "명화"라고 할 수 있기에,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아주 유명한 작품도 간혹 있지만, 처음 보는 작품들이 태반이다. 그럼에도 이 그림들을 "명화"라고 하는 이유는 이 작품들이 지은이에게 말을 걸었고, 또 우리에게도 말을 걸어 주고, 우리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작품들은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와 행복을 가져다 주는 '명화'들이다.'(7쪽)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시작이 그리 알려지지 않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작품들부터다.

 

낯설지만 기교가 느껴진다기보다는 그 시대의 모습이 그대로 보여지는 작품들이다. 끝부분은 우리나라 최근의 작품으로 맺고 있는데, "명화"가 오래 된 것이 아닌, 지금-여기에서 나에게 말을 걸고 내 맘을 위로하고, 내 말을 들어주는 작품이면 되기 때문에 시대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지은이의 믿음이 담겨 있는 편제라고 할 수 있다.

 

많은 그림들을 감상하는 재미를 느꼈는데,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으며 지식으로 건진 내용이 하나 있었으니...

 

그림과 대화를 나누는데 어쩌면 지식이 필요할 때도 많으니, 그런 지식은 대화가 멀리 벗어나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땅의 붓으로 그린 하늘"이라는 장에서 '교회를 지켜온 거룩한 네 기둥' 부분에서 베네치아(베니스)에 관한 부분.

 

왜 베니스 영화제나 베니스 비엔날레의 최우수상이 '황금 사자상'인지 모르고 있었는데, 베니스의 수호 성인이 '마가'이고, 이 마가의 상징이 '사자'라는 사실. 그리고 베니스에는 마가의 유해가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누가의 상징은 황소, 마태의 상징은 사람, 요한의 상징은 독수리라는 지식을 얻게 된 것.

 

성화를 보는데 이런 상징들에 대한 지식이 있으면 그림들과 대화를 하는데 한결 수월할테니, 이것이 이 책을 읽은 수확 가운데 하나라면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지식에 대한 수확보다는 미술에 대한 태도가 바뀐다는 것이 더 큰 수확이겠지만, 미술을 우리네 삶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네 삶이 미술임을 생각하게 해준 것이 이 책을 읽고 얻은 큰 수확이다.

 

지은이는 말한다.

 

'제가 말하는 미술은 꼭 회화나 조각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넓은 의미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모든 인간적 노력이 다 미술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세상에 미술과 무관하게 사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미술을 잘 모른다니요?

... 우리는 아름다움을 찾고 즐기며 구현해야 합니다.. 아름다움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땀과 열정을 쏟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미술가이고 예술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삶은 하나의 훌륭한, 아름다운 예술 작품입니다.' - 275쪽

 

그렇다. 아름다움은 바로 우리의 삶에 있다. 죽음은 이러한 아름다움조차도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사라짐, 그래서 느낄 수도 볼 수도 없음이 바로 죽음이다. 이 죽음의 순간, 순교의 순간까지는 아름다움이 되겠지만...

 

그러니 살아있음, 이 자체가 얼마나 큰 아름다움인가? 이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태도,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미술에 대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주변을 둘러보라. 그리고 자신을 보라. 우리 자신이 바로 "명화'임을,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이 "명화"임을 알아볼 수 있는 눈. 그것이 바로 "미술의 눈" 아니겠는가.

 

덧글

 

이 책을 읽으며 문득 든 생각.

 

우리나라가 한 때 지역도서관 짓기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여 이제는 웬만한 지역이면 도서관이 작지만 그래도 하나씩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도서관을 책하고만 관련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지역 미술가들, 예술가들을 위해 도서관의 한 관을 전시회나 연주회 공간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하는. 이미 하고 있는 곳도 있겠지만, 많이 확산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역 도서관에서 자주 미술이나 음악을 접하고, 그에 관련된 책들을 찾아 읽을 수 있다면 "예술"이 바로 우리 삶임을 자연스레 익히게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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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와 기본소득 - 논쟁과 전략의 탐색
이명현 지음 / 경북대학교출판부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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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의 쟁점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세월호법이 통과되자마자 이제는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해야겠다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인지,그도 아니면 이제는 어쩔 수 없으니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것인지 '복지'가 쟁점이 되고 있다.

 

그것도 공약인데, 공약을 지켜야지가 아니라, 내 공약이지만 너희가 지켜라라는 아주 이상한 쟁점이다.

 

누리교육과정 예산에 대한 논의가 무상급식(엄밀한 의미로 쓰면 의무급식이어야 한다. 의무교육에에는 급식 역시 포함되어 있다. 과태료를 부과한다고 엄포까지 놓으면서 학교로 애들을 오게 만들어 놓고 밥은 돈을 내라는 것은 좀 아니지 않은가) 논의로 번져가고 있다.

 

몇 년 동안 잘 시행이 되고 만족도도 높고 정착이 되어가고 있는 급식 문제를 누리교육과정과 연관지어, 경기도 이재정 교육감의 말처럼 아랫돌 빼서 윗돌을 괴려고 하는데, 그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태를 만들려고 하는데도 이상하게도 언론에서 연일 이를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교육청의 잘못인 듯한 어감을 풍기고 있다.

 

이 과정을 보면서 언론이 얼마나 중요한가, 왜 언론을 장악하려고 하는가를 새삼 실감하고 있는 중인데...

 

한 번 자유를 맛본 사람은 부자유를 견디지 못한다. 한 번 복지의 장점을 경험한 사람은 복지 폐지를 견딜 수 없다.

 

무상급식(의무급식) 역시 마찬가지고, 이는 기초노령연금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지켜져야 할 사항이다. 이것을 가지고 왈가왈부 한다는 것 자체가 후진적이다.

 

앞으로 한참 나아가도 시원찮을 판에 자꾸 뒤로 가려는 복지정책. 이것을 언론이 다뤄줘야 하는데...

 

학생들만이 아니라 청년들, 그리고 노인들, 여기에 중장년들까지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사람들로 만들려고 하는지 왜 이렇게 정책이 거꾸로 가는지 모르겠다.

 

지금 세계는 복지를 놓고 논의중이고, 이 복지 중에서도 "기본소득"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고 시행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나라도 있다.

 

선별적 복지니 보편적 복지니 하면서 의무급식조차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우리나라로서는 다른 나라의 기본소득에 관한 움직임이 부럽기만 한데...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기본소득에 관한 움직임이 있다. 우리나라도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에 가입되어 있다. 하지만 소수이고,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언론의 책임이 여기서 또 대두된다.

 

기본소득은 대표적인 보편 복지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누구에게나 일정한 금액을 지급한다는 정책이다.

 

이렇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사람들은 생계의 걱정에서 벗어나 자유를 구가하게 된다. 이 자유는 노동시장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의 자유가 된다.

 

근대에 들어 국가는 노동자들에게서 생산수단을 빼앗아 노동자들이 일을 하지 않으면 생계 유지가 될 수 없게 만들었다. 자본과 결탁한 국가의 초기 모습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다 노동자들의 생계 문제가 자본의 증식에도 문제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국가는 복지를 도입한다.

 

물론 선별적 복지다. 사회에서 살아가기 힘든 사람들, 이들을 그대로 두면 사회 문제가 되고, 그 처리 비용이 더 드니, 이들에게 최소한의 호구책을 마련해 주자는 것이 선별적 복지다.

 

이렇게 선별적 복지로 세월이 흘러갔는데, 이는 자본이 성장을 구가할 때나 가능한 복지 정책이었다. 자본이 세계적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이러한 선별적 복지를 위한 세금이 잘 걷히지 않게 되었을 때 자본과 국가가 선택한 길.

 

아니 자본과 국가가 선택하게 만든 길이 바로 보편적 복지다. 보편적 복지는 현대 국가의 새로운 역할이라고 보면 된다.

 

선별적 복지가 근대국가의 몫이었다면 보편적 복지는 현대국가의 몫이다. 이러한 보편적 복지의 대표가 바로 '기본소득'이다.  그리고 이는 충분히 가능하다. 아직 국가적으로 실행이 되고 있는 국가는 없지만, 시도 차원에서 실시하고 있는 곳은 있으며, 기본소득에 대해서 충분히 연구되고 논의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세계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선별적 복지니 보편적 복지니에서 머물고 있다.

 

이미 보편적 복지인, 지금 세계에서 가장 앞서 간다는 기본소득에 관한 논의가 우리나라에서도 이루어지고 있고, 또 연구들도 많이 되었으며, 책으로도 많이 출판되었는데,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모르쇠로 자신들의 무식을 자랑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보편적 복지의 대표격인 "기본소득"에 대해서 이론 및 쟁점,그리고 실현 가능성까지 종합적으로 살핀 책이다.

 

세계적인 추세에, 이념에 따른 기본소득 논의, 나라에 따른 차이 등을 세세하게 잘 밝혀 놓고 있어서 기본소득에 관한 체계적인 정리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 기본소득은 환상적인 주장이 아니라 실현 가능한 주장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충분히 가능하고, 또 우리가 지속적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본소득이 필수적임을 알 수 있게 된다.

 

허니, 우리 정치권이 뒤로 가게 하지 말자. 앞으로 가도 모자랄 판이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더 나은 정책들, 우리가 실현해야 할 정책들이 앞에 놓여 있다.

 

이미 잘 되고 있는 것들을 흔들려고 하는 집단을 경계하고, 그들을 멀리하고,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꿈을 실현시키려는 노력을 하자. 그런 공부를 하자. 그런 논의를 하자.

 

이 책은 그런 논의가 지금, 필요함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 나온 기본소득, 구체적인 실현은 우리에게 달려 있으니...

 

기본소득은 바로 이런 것이다.

 

모두에게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의 직업을 선택해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지만,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지 않아도 될 자유를 약속한다.
... 기본소득이 있으면 사람들은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자영업이나 협동조합 기업을 시도하기도 하고 원하는 분야의 시간적 작업을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불쾌한 정규직에 종사하도록 선택을 강요받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여유가 생길 것이다.
...기본소득이 지향하는 사회는 책임과 자율 같은 사회적 기반을 중요시하며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대안적 사회이다.  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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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4-11-09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최근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읽기 시작했어요.
요새는 구 사회당(현 노동당) 사람들 외에 녹색당 사람들도 기본소득에 관심을 갖고 있어요.
이 책도 찜해둬야겠어요.
 

뉴스를 듣기도, 신문을 펼치기도 싫다.

 

들리는 소리는 다 귀를 씻어도 시원찮을 소리고(허유와 소부의 고사처럼, 귀를 씻은 물이 강물을 오염시킬까봐 두렵기만 한 나날들이다), 신문을 보면 열통이 터지는 기사들만 난무하고 있다.

 

그러다 오늘 본 <한겨레 신문>, 첫 면. 커다랗게 나온 사진. 전봉준.

 

그 눈빛, 끌려가면서도 세상을 꿰뚫을 것 같은 그 눈빛을 지닌 사람, 녹두장군. 그의 사진을 보며 마음이 뭉클했다.

녹색평론 11-12월호에서도 전봉준에 대해서 다루었는데, <한겨레 신문>에도 그의 사진이 나오다니... 이게 우연일까?

 

아니라는 생각. 그만큼 이런 인물이 필요한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전봉준은 허균의 말대로 한다면 '호민'에 해당할 터.

 

항민들이 그냥 그대로 순응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탐학이 겹치니 이러한 항민이 원민이 되어 버린 시대. 원민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사람, 그가 바로 호민이다.

 

그 호민을 따라 원민도 항민도 함께 일떠섰던 일, 동학 혁명.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던 그런 혁명.

 

전봉준에 겹쳐 허균이 떠오르고, 허균의 호민이 생각나니, 자연스레 홍길동이 나타나게 되고. 홍길동, 그는 호민이었음에 분명하지만, 전봉준이 농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 아니 모든 사람이 평등한 인내천(人乃天) 세상을 꿈꾸었다면 홍길동은 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으되, 그것이 자신에 대한 차별 철폐에 그치고 만 한계가 있는데, 이는 시대적 한계이겠지만, 적어도 허균은 사람들이 신분으로 차별받는 세상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그의 유재론을 보라)

 

무상급식을 없애고 누리교육과정에 돈을 써라. 정부에서 3-6개월은 양보할 수 있다. 절충안 제시.

 

이상하다. 절충안은 교육청에서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닌가?

 

누리교육과정은 대통령 공약이고, 조례든 법령이든 이는 정부가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이를 교육청에 넘기면서 무상급식을 폐지하란다.

 

말을 한 번 잘못 썼더니 이런 일을 당한다. 무상급식이 아니라 의무급식이다. 의무교육에는 학생들의 심신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학교에 학생을 보내지 않으면 부모에게 과태료를 물게 할 정도로 학교에 꼭 보내라고, 그것이 의무교육이라고 하면서 왜 학교에서 밥을 책임지지 말라고 하는지, 그것은 부모가 알아서 할 문제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된다.

 

교육기관도 아니고 보육시설로 되어 있는 어린이집을 교육기관인 교육청에서 책임지라니, 우리나라 보건복지부는 뭐하는 부서인지.

 

세월호법 역시 유가족들의 뜻과는 멀게 정리가 되어 가고 있고, 무상급식이 아닌 의무급식은 자꾸 하지 말라고 해서 아이들을 굶주리게 하거나, 아니면 남 눈치 보면서 밥 먹게 하면서, 비정규직은 차별을 견디지 못해 힘들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나라 학생들의 만족도, 행복지수는 선진국 가운데 꼴찌라는데...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부모들도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치는데... 공무원연금법은 개정한다고 하는데, 당사들과 또 제3자들과의 합의도 없이 먹고살기 편안한, 아니 지들은 너무모 편하게 세비를 받아 쓰고 있는 족속들이 나서고 있는데...

 

우리나라 국민들이 항민에서 원민으로 넘어가고 있는 상태 아닌가? 힘들다고 힘들다고, 이건 아니라고 아니라고 외치고 있는 상태 아니던가. 

 

여기에 호민이 나서기만 한다면, 그렇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 호민, 그리워지는 시대다.

 

갑자기 정여립이 생각났다. 요즘 돌아가는 꼴을 보면서 이렇게 정여립처럼 팽당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그가 꿈꾸던 대동세상은 어쩌면 허균이 말하던 호민이 나서서 건설하려던 세상과 같은 세상이 아니었을까? 녹두장군이 꿈꾸던 세상 역시 대동세상 아니던가.

 

그 때보다 모든 면에서 풍족해진 시대. 그럼에도 왜 이렇게 살기 힘들다는 말이 나오는 걸까? 아직도 국민은 졸인가? 호민이 필요한가? 국민은 졸이 아니라 주인이라고 외치는. 그렇게 함께 외치는.

 

그런 호민.

 

제발 국민들을 원민으로 만들지 말라. 원민이 많아지면 홍길동, 녹두장군같은 호민이 나타난다. 호민을 사람들이 부른다. 호민은 그 자체로 호민이 아니다. 세상이 만들고 세상이 부를 때 나타난다.

 

오늘 본 전봉준의 사진. 그 눈빛.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슬프다. 그의 눈빛이 아직도 내 가슴에 파고드는 이 현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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