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의 원근법 -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서경식 지음, 박소현 옮김 / 돌베개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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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야기라고 하지만, 사실은 삶에 대한 이야기다.

 

그림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읽고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끊임없이 되묻고 있다.

 

서경식은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이산이라고 해석이 되기도 하는, 이방인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말.

 

그는 일본에 살고 있다. 국적은 한국이다. 그의 형 둘은(서승과 서준식이다) 우리나라에 유학왔다가 고문을 받고 감옥 생활을 오래 했다.

 

조국에 공부하러 왔다가 간첩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몇십 년동안 한 것. 그러니 이런 형들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뿌리뽑힘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은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뿌리뽑힌 사람이라는 생각이 어쩌면 그를 미술에 관심을 두게 했는지도 모르겠는데... 미술 중에서도 특히 현실의 모습을 느끼게 해주는 그림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 책은 주로 독일 미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물론 뒷부분에 가면 고흐도 나오고, 살라사르라는 과테말라 사진가도 나오지만, 주요 부분은 독일의 작가들이 그린 그림을 찾아가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독일의 작가들 중에서도 당시의 현실을 그린 작가를 그는 좋아하는데, 그가 말하는 좋은 예술이란 아름다운 예술이 아니라 현실을 끊임없이 환기시켜 나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라고 한다.,

 

그러니 그는 미술비평가들이 좋다고 하는 작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서 현실과 나를 발견하게 하는 작품들을 찾아 다닌다. 그런 그림에서 그는 자신을 보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인식하며,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는다.

 

그가 찾은 작가들을 보자. 그는 1부에서 독일 작가, 그 중에서도 통일이 되기 전의 독일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작가를 찾아가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에밀 놀데'다.

 

나치 독일에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독일 내에서 망명 생활을 한 사람. 끝까지 자신의 그림을 그린 사람. 그의 그림을 찾아가는 것을 시작으로 전쟁의 참화를 그린 '오토 딕스'라는 작가를 찾아가고, 그 다음에는 나치에 의해 학살된 '펠릭스 누스바움'을 찾아간다.

 

이들은 모두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로 낙인찍힌 작가들이 되고, 이 낙인은 우리나라로 바꾼다면 독립운동을 고취한 그림을 그린 불령선인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림의 미학적인 면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들에 나와 있는 현실과 사상, 그리고 서경식이라는 개인에게 다가오는 의미가 이들을 찾아가게 하고, 그 그림들에서 떠날 수 없게 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그림들은 단지 서경식만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국가보안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분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의미있게 다가온다는 생각이 든다.

 

책에 나와 있는 몇몇 그림들만으로도 아직도 우리에게는 진행 중인 일이 이 그림들에 나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니 말이다.

 

이런 점에서 좋은 예술이란 무엇인가 하고 질문을 다시 하게 된다. 아도르노의 그 유명한 말을 빌려 이 책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지만, 과연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그럼에도 시는 쓰여져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술을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겉보기에 아름다운 작품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들의 마음에 충격을 주는 작품, 삶과 작품이 일치하는 작품, 그런 작품들이 좋은 작품이 아닐까?

 

그러므로 서경식은 사람됨과 작품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에게 작품은 곧 사람됨이다. 그런 작품들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되는 '고뇌의 원근법'은 결국 자신의 삶을 끝까지 밀고 나가는 작가들이 좋은 작품을 남길 수밖에 없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그래서 고흐에 관한 대담이 이 책에 실린 것이리라. 원근법을 끝까지 밀고 나가 원근법을 넘어선 사람이 고흐라면, 고흐의 그림은 고흐의 전생애가 담긴 그림이라는 얘기가 되겠다.

 

그러니 고흐의 특별한 생애가 그의 그림에 관심을 끌게 한다기보다는 그의 치열한 삶의 모습이 그림 속에 나타날 수밖에 없음이, 그 고뇌가 나타나고 있음에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고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그는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 수밖에 없으리라. 요즘 일본 사회의 모습을 보면.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도 변하지 않았으니, 그가 독일 미술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그 미술 속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 여전히 우리에게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치열하게 세상을 직시하면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개척해 나갔던 작가들. 우리에겐 좀 낯설지만 에밀 놀데, 오토 딕스, 펠릭스 누스바움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고, 그들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이 책이 나에게는 의미가 있다.

 

우리에게 민중미술이 역사화되었다(6쪽. 책을 펴내며에서)고 서경식은 말하고 있지만, 아니다. 우리에게도 민중미술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 책에 나온 세 명의 독일 작가가 겪었던 일들을 아직도 우리 민중미술계에서는 겪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이 더 의미가 있다.

 

이 책은 도대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지금 우리가 추구해야 할 아름다움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 책으로 이 세 형제의 책은 적어도 한 권씩은 다 읽었다. 모두 다 좋은 책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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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 아래 잠들다 창비시선 229
김선우 지음 / 창비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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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집을 펼치고 몇몇 시를 읽기 시작하자마자 든 생각.

 

'몸시'라는 시를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하면서 검색을 해보니, '몸시' 연작을 정진규가 썼다. 아예 몸시1, 몸시2...이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 몸과 늘 함께 살면서도 우리 몸에 대해서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 몸은 우리와 상관없는 대상으로만 존재하다가 아프기 시작하는 순간, 몸이 나구나 하는 절실함으로 다가온다.

 

그러니 몸은 우리와 가장 가깝지만 가장 먼 존재이기도 하고, 우리 시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너무도 뻔한 내용이 되기도 한다.

 

김선우의 이 시집에 나온 시들은 직접적으로 '몸시'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읽으면 머리 속에서 '몸'이 자꾸 떠오른다. 몸이 생각난다.

 

원초적 생명으로서의 몸이 이 시집에서 퍼득이고 있다.

 

봐라, 이것이 바로 우리 몸이다. 몸이 생명이다. 몸이 활력이다. 이런 살아있는 몸 내음새가 시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아니, 어느 시를 읽어도 몸냄새가 난다. 때론 싱그런, 때론 비릿한 그러한 몸냄새가 시에서 뿜어져 나온다. 그리고 그런 몸에서는 온갖 소리들이 난다. 살아있는 생명의 소리, 살아가고자 하는 소리.

 

그 소리들이 우리를 살아있게 한다. 몸으로 인해 우리는 살아있다. 살아있는 몸이 풍기는 냄새들, 소리들. 그 생명의 살아있음이 이 시집에서 살아 움직인다.

 

그런데 그 많은 생명들, 살아 있음을 제치고, 예전에 본 시가 바로 이 시집에 있었다니, 바로 이것이 생명이거니 하는 시가 있다.

 

단단한 고요

 

  마른 잎사귀에 도토리알 얼굴 부비는 소리 후두둑 뛰어내려 저마다 병드는 소리 멍석 위에 나란히 잠든 반들거리는 몸 위로 살짝살짝 늦가을 햇볕 발 디디는 소리 먼길 날아온 늙은 잠자리 채머리 떠는 소리 맷돌 속에서 껍질 타지며 가슴 동당거리는 소리 사그락사그락 고운 뼛가루 저희끼리 소근대며 어루만져주는 소리 보드랍고 찰진 것들 물 속에 가라앉으며 안녕 안녕 가벼운 것들에게 이별인사 하는 소리 아궁이 불 위에서 가슴이 확 열리며 저희끼리 다시 엉기는 소리 식어가며 단단해지며 서로 핥아주는 소리

 

도마 위에 다갈빛 도토리묵 한모

 

모든 소리들이 흘러 들어간 뒤에 비로소 생겨난 저 고요

저토록 시끄러운, 저토록 단단한,

 

김선우, 도화 아래 잠들다, 창비. 2014년 초판 10쇄. 10쪽.

 

 

보라. 온갖 살아 있는 것들이, 그 소리들이 하나로 뭉쳐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는 그런 모습. 도토리묵에서 세상의 생명들이 살아있는 소리를 느낄 수 있는 시인.

 

그런 시. 이것이 몸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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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로잡은 그녀 그녀들 - 함정임의 미술 속 여자 이야기
함정임 지음 / 이마고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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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성이 강조되는 시대다.

 

이제 세상은 남성성으로 대표되는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여성성으로 대표되는 포용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오죽하면 지구를 가이아라고 하고, 여성으로 표현하고 있겠는가. 땅의 신도 서양에서는 여성이고, 우리나라에서도 풍요를 기원하는 풍습으로 나체의 남성이 밭갈이나 논갈이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대지는 그 포용력으로도 여성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 그림에는, 옛날의 그림에는 여성이 등장하는 경우야 조선후기 풍속화 시기나 되어야 되니까 말할 것이 없는데...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림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니, 머리 속에 떠오르는 그림이 없다.

 

동양적 정신, 가부장적 세계에서 여성이 그림의 주인공으로 나타나는 경우는 없다고(그러니 신윤복의 미인도는 얼마나 대단한가!) 보아야 하겠다. 현대 그림에 대해서는 워낙 관심도 없었고, 또 미술관에 가서 본 경우도 적기에 이야기할 것이 없는데...

 

그러니 그림 하면 서양화를 떠올리고, 인물화하면 역시 서양이며, 서양의 숱한 인물들 중에 여성이 많다는 것에 놀라기도 한다.

 

여기에 서양의 그 많은 누드화들을 보라. 우리나라에서는 불경이라고 차마 그리지도 못했던 그림들을 서양에서는 한참 오래 전에 그리고 있었으니, 그들의 그림에 여성이 많이 남아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그렇다고 해도 서양에서 여성들이 처음부터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남긴 여성들 역시 그 시대에서 권력을 쥐고 있던 사람들의 초상들이 대부분이니...

 

그렇다면 이 책의 지은이를 매혹시킨 그녀들은 누구인가? 왜 지은이는 그림 속의 그녀들에게 매혹당했는가?

 

그것은 그림을 보면서 인생을 생각하고 자신을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림의 아름다움을 삶을 통해서 느끼게 되었기 때문에 '나를 사로잡은 그녀, 그녀들'이라는 글을 쓸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따라서 그림 속의 그녀들은 먼 과거의 이미 끝나버린 고정된 그녀들이 아니라, 지금 삶에 끊임없이 불려나오고, 영향을 주는 그녀들이다. 이런 그녀들만이 우리를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순서를 굳이 생각하지 않았는데, 읽고나니 성모 마리아로부터 시작한다. 성모 마리아,어쩌면 그림에 나오는 가장 오래된 여인(?) 중 하나 아니겠는가.

 

 (서양에서 여인들은 여신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그리스-로마 신화의 여신들이니 여인이라고 하기엔 좀 그랬는데... 마리아의 위상이 그냥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좀 다르긴 하지만...인간으로 출발했으니...)

 

끝은 일본의 전위 예술가라고 할 수 있는 '오노 요코'다. 그 자신의 예술적 업적보다는 존 레논의 아내로 더 알려진, 그러나 확실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지니고 있는 오노 요코가 우리를 사로잡지 않을 이유는 없다.

 

성모 마리아에서 오노 요코까지... 많은 그녀들이 지은이를 매혹시키고, 우리를 사로잡아 그림을 보게 하지만... 이 책에서 지은이를 가장 사로잡은 그녀는 '아르테미시아 젠텔레스키'가 아닐까 싶다.

 

그녀가 그린 '유딧'그림은 지은이를 한껏 사로잡고 있으며, 지은이의 설명이 없더라도 우리를 매혹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남자에게 순종하는 부수적인 삶을 사는 여성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당당한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이 아르테미시아의 그림에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성성이 포용적이라는 얘기는 이것저것 아무런 잣대 없이 다 받아들인다는 것이 아니라, 굳건한 자기 중심을 지니고, 그 중심으로 다른 것을 융합시킨다는 의미가 된다.

 

하여 여성성은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는 그러한 모습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자신의 삶에서 그림에서 보여준 사람이 바로 아르테미시아라고 할 수 있으니, 이 책에서 아르테미시아에 관한 장이 두 장이나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우리를 사로잡는 그녀들은 겉모습이 화려한, 아름다운 여인들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그림을 통해서 또 자신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삶을 살펴보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우리를 사로잡는 그녀들이고, 그녀들은 여성성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바야흐로 여성성이 필요한 시대... 푝력과 광기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지금.. 우리는 그녀들이 나온 그림을 보며 진정한 여성성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덧글

 

31쪽. '그리고 모딜리아니의 그녀, 그가 자살하기 4년 전인 서른세 살에 그린 <나부>의 원래 이름은 <아름다운 로마 아가씨>이다.'

 

문장을 이해하기 힘든 점... 그가 자살하기 전이라고 하면 자살한 사람은 모딜리아니인데, 모딜리아니는 자살하지 않았다. 그는 병으로 죽었으며 자살한 사람은 그의 아내인 잔느 에뷔테른느이다. 그녀는 22살에 죽었다고 하니(1898-1920) 이 문장은 다시 다듬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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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지 않으랴
임옥상 지음 / 생각의나무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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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미술.

 

고야를 읽다가 우리나라에도 민중 미술가가 있다는 생각.

 

오윤이 그렇고, 최근에 논란이 된 홍성담이 그렇고, 내 기억 속에 있던 임옥상이 그렇고.

 

임옥상의 책이 도서관에 있었다.

 

그가 틈나는 대로 써 놓았던 글들을 엮어, 그림과 함께 펴낸 책이다.

 

임옥상의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가 잘 드러나 있는 책인데...

 

지금은 잘 언급이 되지 않는 민중미술. 이것은 미술은 우리들의 삶과 미술이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 미술이라고 본다.

 

미술이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하지만 미술이 민중들과 함께 할 때 사람들의 삶 곁에 있을 때 더욱 아름다움을 임옥상은 주장하고 있고, 미술관이나 전시장에 갇힌 미술이 아닌 밖으로 나온 미술, 언제든지 사람들이 만나고 함께 하는 미술이 아름더운 미술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안타까워 하고, 때로는 분노하기도 하고, 그를 작품을 통하여 나타내기도 한다.

 

몇 십 년 간 글로 써온 작품에 대한 열정들이 시간 순서가 아닌, 주제에 맞게 재배열되어 나오고, 작품도 볼 수 있는 책이다.

 

미술이 점점 어려워지고 사람들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 현실, 몇몇 호사가들에게만 재산으로써 존재하는 미술이 넘치는 시대에, 임옥상 같이 사람들과 함께 하는 미술, 그런 미술을 하는 미술가들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아직도 권력있는 사람들을 풍자한 그림들들이 마음 놓고 전시되지 않는 현실이니, 임옥상이 안타까워한 시절과 별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씁쓸하기는 했지만, 시대를 떠나 미술은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함을 잊지 않게 하는 임옥상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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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 클래식 레터북 Classic Letter Book 3
이동민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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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이 끝났다. 늘 일어나는 일답게 이번 수능도 오류와 난이도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12년간 공부한 것을 측정한단 말인가? 단 한 번의 시험으로 인생을 결정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의 현실이 안타깝기만 한데...

 

전국민이 교육전문가라고 하는 이 나라에서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듯이, 모두가 교육전문가라서 한 마디씩 하는 것이 이 나라 교육정책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도 된다.

 

수능에 즈음해서, 아니 요즘 우리나라 세태 때문에 "탈무드"를 읽고 싶어졌다. 어렸을 때 읽었던 탈무드는 이솝 우화처럼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라는 생각만 남아 있는데, 요즘 유대인 교육법인 '하브루타'라고 토의-토론 식 교육이 소개되고 있던데, 유대인들이 교육에서 가장 기본으로 삼는 책이 탈무드라고 하니, 어른이 된 지금 다시 읽어보자 하고 생각한 것.

 

그런데 책을 검색해 보니 탈무드는 아이들을 위한 책들이 대부분이다. 도대체 뭐야, 집에 있는 삼성 고학년 문고인 탈무드를 먼저 읽었는데, 이건 유대인들에게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탈무드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내용 중에 나치가 나오고 있으니, 이건 현대에 변용된 탈무드에 불과하다는 생각. 어떤 탈무드가 있을까 하다가 도서관에서 보게 된 것이 바로 이 책.

 

'유태인(요즘은 유대인이라고 하는데, 이 책에는 이렇게 유태인으로 되어 있다)의 생각하는 방식을 배우게 하는 책'이라고 하는데... 삼성 문고와 겹치는 내용도 있지만, 처음 보는 내용도 있다.

 

역시 짤막한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책이 발간되어 있는데, 이 책의 맨 뒤에 있는 '탈무드에 대하여'를 보니, 탈무드는 바빌로니아의 탈무드와 팔레스타인의 탈무드가 있고, 바빌로니아의 탈무드가 더 권위 있고 중요시되고 있다고 한다.(이 책 281쪽)

 

그런데 그 앞쪽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탈무드는 단순한 책이 아닌, 심오하고 방대한 문학이다. 1만 2천 페이지에 달하는 탈무드의 방대한 내용은 기원전 500년부터 기원후 500년까지 구전된 내용을 2천 명의 학자들이 10년 동안 편찬한 것이다.'(278쪽)

 

이게 뭔 말인가?

 

1만 2천 페이지라니? 그런 내가 읽은 이 탈무드는 뭐지? 그 많은 내용 중에 생각할 만한 이야기들을 발췌해서 실은 거란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탈무드의 내용이 전부 들어있는 번역본은 없다는 얘긴가? 1만 2천 쪽에 달한다면 300쪽짜리고 책을 발간해도 40권이다. 엄청난 양이다. 그런데 시중에서는 달랑 한 권짜리 탈무드만 만나볼 수 있다.  

 

결국 탈무드는 내게 완전히 알 수 없는 책이라는 뜻이 되는 건데... 그런데 아니다. 굳이 탈무드를 처음부터 끝가지 읽는 것이 탈무드를 이해하는 것일까?

 

그것은 단지 지식에 불과하지 않을까? 탈무드의 첫 쪽과 끝 쪽을 백지로 놓아둔다는데, 이는 탈무드는 누구나 다시 쓸 수 있고, 또 채워넣어야 하는 책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굳이 프랙탈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탈무드의 부분을 정확히 이해했다면 이미 그것은 지식이 아닌 지혜가 되었을 터.

 

지혜가 되었다는 얘기는 머리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발현이 된다는 얘기. 이것이 바로 탈무드 아니겠는가.

 

그러니 탈무드를 굳이 완역할 필요가 없다. 탈무드에 나와 있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삶의 지혜를 획득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책을 지혜롭게 읽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탈무드가 가르치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온 이야기 하나하나를 그냥 아, 재미있네, 어, 이런 생각을 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삶에서 실현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탈무드를 읽는 법이고, 그것이 바로 유대인들에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하는 책으로써의 탈무드 아니겠는가. 

 

이런 탈무드와 우리의 수능을 비교해 보자. 우리의 수능은 지혜가 아닌 지식만을 측정하고 있다. 이렇게 자라나는 미래 세대의 사람들에게 지혜가 아닌 지식을 강조하는 교육이 과연 바람직할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우리는 아이들에게 지식이 아닌 지혜를 가르칠 수 있을까? 이 책 탈무드에도 학교의 역할, 교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는 과연 그러한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요즘, 다시 읽을 필요가 있는 책이다. 이 "탈무드"는. 

 

많은 이야기 중에 기억하고 싶은 글들을 아래에 몇 개 적어 놓는다.

질문과 대답


스승의 질문과 제자의 대답이다


"사람의 입은 하나인데 귀는 둘이다. 왜 그렇겠는가?"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많이, 잘 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눈은 흰 부분과 검은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왜 검은 부분으로 세상을 보는 것일까?"

"그것은 세상을 어두운 면에서 보는 편이 좋기 때문입니다. 밝은 면에서 보면 지나치게 자신에 대해서 낙관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되기 때문에 그로 인해 교만해지지 않도록 경계하기 위함입니다. 29쪽

현인


한 사나이가 현인에게 질문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현인이 되셨나요?"


그가 대답했다.

"글쎄요. 식용유보다 등유에 더 많은 돈을 썼더니 현인이라 하더군요." 52쪽


나라를 지키는 학교


어떤 마을에 이웃나라의 유명한 학자가 찾아왔다. 그 마을의 대표가 그를 안내하여 안보 상태를 확인시켜 주었다. 변방을 돌아보니 어떤 곳에는 병사들이 들어 차 있는 작은 진지가 있고, 어떤 곳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그 마을의 대표가 그를 데리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 학자가 말했다.


"나는 아직 이 나라가 어떻게 지켜지고 있는가를 보지 못했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것은 병사가 아니라 학교입니다. 왜 나를 제일 먼저 학교로 데리고 가지 않았습니까?" 53쪽

선과 악


존경하는 스승에게 제자가 물었다.

"경건한 자가 사람들에게는 올바르게 살도록 강권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들은 항시 착한 일을 행하고 올바르게 살도록 사람들에게 권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나 악한 자가 사람들을 악한 짓을 하도록 유혹하는 쪽이 훨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또 사람들을 악한 짓을 하도록 꾀어들여 패거리를 늘리고자 할 때에 우리들보다도 더욱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일을 행하고 있는 사람은 혼자 걷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이라네. 그러나 나쁜 짓을 하는 자는 혼자 걷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지." 71쪽

마음

인간의 모든 기관은 마음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마음은 보고, 듣고, 걷고, 서고, 굳어지고, 부드러워지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화내고, 두려워하고, 거만해지고, 설득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부러워하고, 질투하고, 사색하고, 반성한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인간이다. 174쪽.

교육

가장 위대한 랍비가 북쪽 마을을 시찰하기 위해 두 명의 랍비를 시찰관으로 보냈다. 두 랍비가 그 마을에 가서 말했다.

"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만나서 좀 조사할 일이 있소."

그러자 그 마을의 경찰서장이 나왔다.

"아니오. 우리가 만나야 할 사람은 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오."

이번에는 수비대장이 나왔다. 그러자 두 랍비가 말했다.

"우리가 만나려고 하는 것은 경찰서장이나 수비대장이 아니라 학교의 선생님이란 말이오. 경찰이나 군인은 마을을 파괴할 뿐이오. 교육자들이야말로 진정으로 마을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소." 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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