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지의 세계 (양장) - 전통사회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것인가?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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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드 다이아몬드.

 

나도 이 사람의 책을 두 권이나 읽을 정도이니(제3의 침팬지, 총·균·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름이다.

 

이번에 읽은 책도 그의 장기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되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읽어도 잘 이해될 수 있도록 쓰고, 가능한 한 자료들을 모아 자신의 주장을 구체화 하는 것.

 

그래서 책은 두꺼워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본인은 자료들을 발췌해서 책을 냈다고 하지만, 요즘 나오는 책들보다 두 배는 두껍다.

 

무려 680쪽에 달한다. 주나 보충설명까지 더하면 700쪽이 넘는다. 사람들이 읽기에는 우선 분량에서 질린다. 그럼에도 읽기 시작하면 잘 읽힌다.

 

숱한 예화들과 구체적인 자료들이 제시되기 때문에 전문적인 학술서라기보다는 대중서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어제까지의 세계다. 과거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는 자신이 조사할 수 있는 대상을 조사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책에 남아있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직접 만난 사람들 이야기다.

 

쉽게 이야기하면 오지에 살던 사람들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던 사람들과 만나 그들의 생활방식에 대해서 쓴 글이라고 보면 된다.

 

이제는 지구화, 세계화 되어서 그런 사람들이 얼마 남아 있지 않게 되었지만, 그들의 삶을 어제까지의 삶이라고 하고 살펴본 책이 이 책이다.

 

왜 어제까지의 삶일까? 그것은 그 사람들이 우리 인류의 발생초기에 살았으리라 추측되는 삶들을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들은 현대 문명이 발달했음에도 현대문명을 만나지 못해 예전 방식 그대로 살아왔다. 그래서 어제까지의 세계다. 왜 '까지'냐면 이제는 그런 삶을 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국가 없는 삶을 살았던 그들에게 이제는 국가가 존재한다. 국가는 그들이 그들 나름대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그들 고유의 문화를 지니고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국가는 간섭하고 통제하고 교화하려 한다. 또 그들 역시 현대 문명을 접하고는 현대 문명을 동경한다.

 

어제까지처럼 산다는 것은 고통과 괴로움과 굶주림과 위험에 처해 있는 삶이라는 얘긴데, 현대 문명은 이들을 없애버리고 편리하게 살 수 있는 것처럼 비치기 때문에 이들은 어제에서 나와 오늘을 살려고 한다.

 

그래서 어제까지의 세계다. 이제는 사라져 버릴 세계. 그러나 어제란 오늘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오늘에 살아남지 못하는 어제는 어제로 기억되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

 

따라서 어제까지의 세계는 오늘의 세계를 비추어주는 거울이 된다. 오늘의 세계를 더 잘 살게 해주는 안내서가 된다.

 

하여 이 책은 과거의 삶을 사는 소수 민족을 찬양하는 책이 아니다.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그들 삶에서 지금 우리가 들여와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과거가 암울했다고 해서 과거를 통째로 잊자는 말이 아니다. 과거의 빛과 어둠을 다 보여주기 때문에 과거의 어둠은 제거하고, 빛을 지금 우리가 받아들이자는 말이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식생활이다. 또 친밀감이다. 아이들을 키우는 방식이다. 이런 것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식생활로 인해 고혈압, 당뇨병 등 온갖 성인병이 난무하는데, 우리가 살아온 어제까지의 세계에서는 이런 식생활은 존재할 수가 없었다고, 우리의 유전자는 지금의 식생활에 견딜 수 있는 몸을 아직 만들지 못했다고... 그래서 저염식, 채식 위주, 천천히 먹는 습관이 있는 어제까지의 세계가 습관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말.

 

또 서로의 얼굴을 보며 집중하면서 이야기하는 태도. 그리고 아이들을 업을 때 업는 사람과 같은 방향을 보게 업는 것, 또 함께 자는 것 등등. 그리고 많이 걷고 많이 움직이는 것.

 

여기에 무엇보다도 현대를 사는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은 건설적 편집증이라고 할 수 있는 조심하는 태도.

 

안전이 문제가 되고 있는 지금,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어제까지의 세계의 모습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안전 불감증이라는 말은 사라지겠지.

 

방대한 분량에 비해서 결론이 너무도 단순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우리가 잘 살 수 있는 방법은 어려운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닐까.

 

정답은 늘 가까이에 있는데, 그걸 멀리서 찾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지. 어제까지의 세계는 바로 오늘의 세계와 맞닿아 있고, 어제까지의 세계가 우리에게 내일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오래된 미래"라는 책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미래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에 존재했었고, 오늘에 현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오래된 미래를 보지 못하고 우리는 미래는 과거와 현재와 다를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 저자도 말한다. 과거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과거를 무조건 찬양하자는 것이 아니라고.

 

다만, 충분히 우리 눈 앞에 좋은 것이 함께 존재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계속 유지하자고.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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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부모 얼굴이 보고싶다 무대 위의 문학 1
하타사와 세이고.구도 치나쓰 지음, 추지나 옮김 / 다른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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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5년 전쯤에 우리나라에서 왕따, 집단 괴롭힘이 사회 문제가 되었다. 집단 생활을 하면 집단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인데, 그를 참지 못하고, 차이를 차별로 바꾸어 폭력으로 전환시킨 경우였다.

 

아마도 공동체가 무너지고, 집단의식보다는 개인의식이 대두했으며, IMF란 전대미문의 사태를 겪으면서 나만 잘 살면 돼라는 인식이 팽배해 지고 있던 모습이 학생들에게 내려와서 그렇게 된 것이리라.

 

지금은 좀 덜한데, 아직도 해결되지는 않았다. 학교마다 폭력과 따돌림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고, 이것이 상당히 음성적이어서 발견하기도 힘들도 또 해결하기도 힘들다는데 문제가 있다.

 

여기에 이제는 학교에서뿐만이 아니라, 아니 학교에서는 좀 잠잠해졌는데, 연령대가 높아져 남자들의 경우에는 군대로 옮겨가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아무렇지도 않게 조금 다르다고 해서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들이 지금 군대에서 너무 자주 보여지고, 그래서 힘도 없는 사람들은 자식들까지도 군대에 가서 고생을 하고, 힘있는 자들의 자식들은 군대에 가지 않거나 가더라도 가해자의 편에 서는 경우가 종종 언론에 보도되곤 한다.

 

관용. 배려. 차이를 인정함. 이런 자세들은 여유에서 오는데, 그만큼 우리나라에서 여유가 사라지고 있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학생들 역시 성적 스트레스로 여유를 잃고 있고, 군대에 간 남자들 역시 제대하고 살 길이 막막하긴 마찬가지니 여유가 없고, 여자들은 직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어려움에 처한 경우가 많으니, 나라 전체에 여유란 없다고 봐야 하니, 그 여유없음에서 차이를 인정할 수 있는 관용이 생길 리 없으니...

 

제목이 자극적이다.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우리는 아이들을 야단칠 때 흔히 부모까지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니네 부모가 이렇게 가르쳤니?" 이 말을 참으로 쉽게 하고 있지 않았던가.

 

아이들 교육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사람이 부모이니, 이런 말이 당연히 나온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소설은 이 점에 착안하여 내용이 전개된다.

 

학교는 명문 사립 여자중학교. 학비가 비싸고 학생들의 아르바이트가 금지될 정도의 보수적인 학교다.

 

여기서 한 여학생이 자살을 한다. 교실에서 목을 대달고 죽은 것. 최초 발견자는 담임 교사. 부임한 지 일년 정도된 신임 교사다.

 

이 정도는 어느 소설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왜 그랬을까를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되는데, 이 소설은 아니다. 아이들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나오지 않는다. 오로지 부모들만 나온다.

 

아이가 죽은 뒤 제일 먼저 배달되어온 편지. 담임에게 온 편지. 그곳에 이름이 적힌 5명의 아이 부모가 소환된다.

 

여기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로지 부모들의 이야기가.

 

부모들의 직업이 다양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데, 이 중에는 교사인 부모들도 있다.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어쩌면 학교의 사정을 가장 알 아는.

 

하지만 내용은 정말 생각 밖으로 전개된다. 부모들은 한사코 아이들의 행위를 부정한다. 이들은 부인으로 일관한다. 그것이 아이를 위한다고 여기면서. 특히 교사인 부모가 더 그런 상황을 주도한다.

 

물론 도덕적으로 행동하자고 하는 부모(이 소설에서는 전직 경찰 출신인 할아버지다)도 있지만, 정의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는 교사인 학부모의 말에 대부분의 부모가 동의한다.

 

결론은?  읽어보면 알겠지만...

 

어쩌면 자기 자식들의 행위는 일단 부정하고든 부모의 마음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다른 자식의 죽음 앞에서도 자기 자식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부모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죽은 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했던 신문보급소 점장이 등장하여 한 마디 하지. 그게 바로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이다.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연극으로 공연도 되었다고 하니, 이 소설은 술술 읽힌다. 대사를 중심으로 구성이 되어 있어서 소설이지만 연극적 요소가 곳곳에서 느껴진다.

 

그만큼 박진감도 있다.

 

그러나, 다 읽고 짙은 여운이 생긴다. 도대체 아이 키우기가 정말 힘들다고 하는데, 어떤 것이 아이를 제대로 키우는 걸까? 아이가 잘못을 했을 때, 그것도 큰 잘못을 했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부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소설과 비슷한 관점(?) 또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이창동 감독의 "시"란 영화다. 상황이 비슷한데, 결말은 다르다.

 

그래 아이는 부모의 거울이다. 아이를 보면 그 부모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정말로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 그 아이가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지식으로, 궤변으로 자신을 합리화 해도 자기 앞에 있는 아이의 모습이 바로 자신이다. 부모이다.

 

그러니, 이 소설에서는 굳이 아이를 등장시킬 필요가 없다. 부모를 통해서 아이를 볼 수 있고, 그 사건을 통해서 사회의 모습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경어인(鏡於人)이라고 사람에 자신을 비추어보라고 한 말, 부모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비춰주는 거울이 바로 자식이다.

 

또 바로 자기 주변의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바로 자신이다. 그러니 남 탓 바 아니다. 바로 내 탓이다.

 

자, 정말로 커다란 잘못을 한 아이가 앞에 있다. 부모,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떤 것이 진정으로 아이를 위하는 것인가?

 

이 책은 학교에서 일어난 집단 괴롭힘 문제를 다루면서 이 질문을 하고 있다.

 

대답은 바로 우리에게 달려 있는.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닌, 어른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그런 질문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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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의 시대를 그린 화가, 고야
박홍규 지음 / 소나무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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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의 그림을 보면 스페인이 보이고, 우리나라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이 책은 그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미술에 관한 책을 읽고 있는 중인데, 재미 있다. 많은 사실을 알게 되고, 그림을 보는 재미도 느끼고, 이런 점에서 학창시절에 느끼지 못했던 미술에 대한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데...

 

고야란 이름을 자주 보게 된다. 사실 예전에는 모르고 있던 화가이고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화가이니.

 

그런데 그의 그림 중에 언급되는 그림들이 제법 있다. 어디선가 본 그림도 있고. 그렇다면 그는 중요한 화가? 이런 생각이 든다.

 

도서관에서 박홍규(그는 아나키스트라고 할 수 있다. 아나키즘에 관한 책이 그에 의해 많이 소개되었다)가 쓴 "고야"에 대한 책을 보았다. 그동안 고야에 대해 단편적으로 언급하고 넘어간 책들을 읽은 터라 잘됐다 싶어 빌려 읽기 시작.

 

화가에 대한 이야기, 그림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 것과는 좀 다르게 스페인의 역사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단순히 스페인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와 비교하면서(분명 대조가 아니라 비교다. 이렇게 스페인과 우리나라가 비슷한 줄은 몰랐다) 시작한다.

 

도대체 고야와 스페인의 역사, 그리고 우리나라가 어떻게 관련되기에 이렇게 하나 했더니, 화가는 그 시대를 벗어날 수 없으며 고야는 그 시대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작품으로 남긴 작가라고 한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누드 그림 말고, 대부분의 그림은 스페인의 현실을, 스페인의 민중을 그린 작품들이니 스페인의 역사를 알아야, 고야가 살던 당시 혁명기의 스페인을 알아야 그 그림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음은 당연한 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왜? 반도국가에서 비슷한 시기에 기나 긴 독재시대를 거쳤다는, 외국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살해당했다는 그러한 공통점도 있고, 고야의 작품 두 점이 우리나라에서 전시 불가 판정을 받아 전시되지 못했다는 사실도 있으니, 작가가 우리나라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왜 우리나라에는 고야와 같은 작가가 없는가고 한탄하고 있다. 왜 없겠는가? 우리나라에도 있다. 다만, 그와 같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고, 고야 역시 당대에는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지 못했으니, 우리나라 화가들도 작품을 제대로 발표하지 못할 뿐이다.

 

2002년에 쓰여진 이 책은 그 전까지 우리나라 화가들의 서구취향, 또는 전통 한국취향으로 위장한 자기만족에 대해서 비판적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그 때도 우리나라 화가들 역시 시대를 직시하고, 그 시대 상황을, 민중들의 모습을 작품으로 만들어 내고 있었음 확실하다.

 

단지 고야처럼 성공적인 화가의 길을 걸은 사람이 아닐 뿐이지.

 

고야는 시골에서 태어나 아카데미에 두 번이나 떨어지는 고난을 겪는다. 그만큼 그는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발휘한 화가는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부단한 노력으로 아카데미에 들어가고, 결국 궁정화가가 된다.

 

스페인에서 궁정화가가 된다는 얘기는 출세의 길에 들어섰다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영위하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럼에도 고야는 왕실의 화려함을 자랑스레 표현하기 보다는 비판적인 시선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궁정화가로서 지내면서도 민중들의 삶에 대해, 스페인 현실에 대해 풍자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비록 발표를 못하고, 또 금지 당하기도 하지만, 그는 그런 그림을 포기하지 않고, 말년에는 보수 반동의 흐름을 견딜 수 없어 프랑스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삶을 마감한다고 하는데...

 

궁정화가로서 출세의 길을 달리지만 그는 그가 처한 사회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고, 특히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중들의 삶에 눈감을 수 없었다고... 또 가톨릭의 횡포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마녀사냥이 계속되어지는 스페인의 현실에도 눈을 감을 수가 없어 그를 풍자화로 그려냈다고 하니...

 

그의 그림들을 보면 스페인의 근대를 알 수 있고, 전쟁이나 권력이 사람들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평전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에 고야의 그림들이, 그것도 민중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림들이 많이 실린 것은 저자인 박홍규가 권력의 비민주성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고야의 민중성, 혁명성을 더 강조하고 있고, 이런 화가가 우리나라에도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고야처럼 궁정화가는 되지 않았더라도 우리에게도 민중화가들은 많이 있다. 언뜻 떠오르는 이름만 하여도 오윤, 홍성담, 임옥상, 강요배 등이 있으니... 우리도 스페인을 부러워만 할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 역시 우리의 현실 속에서 우리의 현실에 맞는 그림들을 만들어내는 화가들이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가 말하고 있는, 그래서 한 화가의 평전이지만 책의 앞뒤로 스페인과 우리나라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는 점은 우리가 잘 생각해야 한다.

 

스페인이 몇 번의 민주화를 이루어냈지만, 민주화 이후에 독재로 많이도 돌아갔듯이, 우리 역시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루어냈다고 자부하고 있지만 과연 그런가, 정말 그런가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2002년에도 이랬는데, 12년이 지난 지금, 과연 그런가? 이렇게 물으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가?

 

고야의 그림이 우리나라에 전시 불가 판정을 받았듯이(이 책에 의하면 그 그림은 '벌거벗은 마하'와 '1808년 5월 3일, 마드리드 프린시페 비오 언덕의 총살'이다) 2014년 우리나라 광주에서, 민주화의 성지라 불리는 광주에서, 광주 정신을 계승하자고 그렇게 말하는 지금 홍성담과 몇몇이 그린 그림들이 광주 비엔날레에 전시되는 것을 거부당했다는 사실을 보면... 박홍규의 절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 책의 마지막 구절... 2014년에도 유효하다.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그는 권력과 성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한다. 인간을 파괴하는 두 개의 악에 저항한다. 18세기 스페인이나 20세기 한국이나 그 두 가지는 인간을 파괴하는 두 개의 괴물을 상징한다. 그 저항으로 그는 두 장의 그림을 그렸고, 그것이 당대 스페인에서 금지당한 것처럼 20세기 한국에서도 금지 당한다. 한국은 아직도 권력과 성에 있어서는 미개국이다. 274-2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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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나날들이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

 

이미 실시되고 있던 복지는 없던 일로 되돌리고, 없던 복지는 아예 없던 일로 하고, 안 해도 될 일은 굳이 하려고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현진건의 소설 제목처럼 '술 권하는 사회'가 되었으니, 술이나 마실 수밖에 없는 건지.

 

"삶창 101호"가 왔다.

 

반갑게 읽기 시작.

 

마음이 따스해지고 싶어서 빨리 손에 들었는데... 이거 더 우울하다. 즐거운 소식은 역시 없다.

 

삶이 보여야 하는데, 우리나라 곳곳에 펼쳐져 있는 가림막처럼, 아님 도저히 알 수 없는 어둠의 장벽인 지배 계층의 일들처럼, 삶은 어둠 저편에 있다.

 

어둠 저편에서 삶을 보여주지 않는다. 삶창에 실린 내용들도 아직은 어둡다.

 

이 사회를 보여주는 거울같은 역할을 하는 삶창이니, 당연히 어두울 수밖에 없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럼에도 조금 따뜻할 수는 없을까?

 

비록 희망이 사람을 더 힘들게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희망이 사람을 살아가게 만들고 있듯이 삶창이 무언가 희망을 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번 호에서 <오늘>이라는 주제로 쓰여진 글들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잘 짚어내고 있는데, 그게 참 우울한 단면이고, <공간과 환경>에서도 역시 우리 삶을 침해하고 있지만 적절히 대응하고 있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이 글에서는 삶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희망을 주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조금 희망을 가진다면 <다른 세상>에 나온 '공룡'이란 공동체 실험 이야기처럼 아직 희망을 지니고 다양한 삶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세월호에 관해 재판 결과가 나왔다. 그 결과를 두고 말들이 많다. 그 많은 말들 중에 정작 책임져야 할 사람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없다. 이런 상황이 이번 삶창 101호에서 고병권의 글.

 

그가 <노동의 인문학>에서 이야기한 '왕에게는 아무 것도 희망하지 말라. 그에게는 단지 책임만을 물어라. 힘은 바로 당신에게 있다.'(83쪽)는 고병권의 말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에게 시혜를 구걸하지 말라는 말, 그들이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은 시혜가 아니라 책임이라고, 우리는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힘없는 서발턴(하위 주체)들에게 책임을 묻는 왕에게 읍소하는 것이 아니라, 왕, 네가 책임져야 한다고, 책임자는 바로 너라고 당당하게, 힘있게 말해야 한다고 읽힌다.

 

이게 희망이다.

 

그럼에도 마음은 따스해지지 않는다.

 

이상하게 100호를 기점으로 삶창이 가슴에서 머리로 옮겨간 느낌이다. 삶을 살아가는 주체들의 이야기보다는 그런 주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글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마음을 울리는 글보다는 머리에 호소하는 글이 더 많다.

 

이게 삶창을 읽고 나서도 우울함이 가시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삶이 보이는 창, 마음을 울리는 글들이 나에게 삶을 보여주곤 했었는데, 그 점은 아쉽다.

 

그럼에도 논리적 사유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변화가 더 좋을 수도 있겠지.

 

덧글

 

이번 호에서 사실 마음이 가장 따스해진 글은 책 뒷표지에 실린 손별걸 시인의 글이다. 학생들이 쓴 시를 제비뽑기를 통해서 시상했다는. 시인들 답게 왜 아이들 시를 순위를 매겨야지 하는 생각, 그리고 제비뽑기를 통해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고, 뽑히지 않더라도 마음이 상하지 않는 그런 모습. 정말 따스하다.

 

예전 그리스에서는 추첨으로 지도자를 뽑기도 했다는데, 제비뽑기로 뽑은 지도자가 선거를 통해 뽑은 지도자보다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왜일까?

 

이런 따스한 글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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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교육과정? 아하! 교육과정 재구성! - 교육과정 재구성 워크북 맘에드림 혁신학교 이야기 12
박현숙.이경숙 지음 / 맘에드림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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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에 관한 책이다. 사실 교육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교육과정이라는 말은 낯설다. 학교에 다닐 때 교육과정이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학교에 다닐 때 교과서를 배웠지 교육과정을 배우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교과서만을 열심히 가르치고 배우는 그런 학교였다.

 

그런데 교육학을 배우면 학교에서 가르쳐야 하는 것은 것은 교과서가 아니라 교육과정이라고 한다. 교과서는 교육과정을 가르치는 도구에 불과하고. 즉, 수단과 목적을 구분하지 못하고, 수단을 목적인 양 착각하면서 학교 생활을 한 셈이다.

 

이것이 교육학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만 일어난 일일까? 교육학을 아는 사람들은 교육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해서 답답해 했던가?

 

아니, 그들도 교과서가 교육과정을 충실히 재현해 내고 있기 때문에 교과서만 잘 가르치면 자연스레 교육과정을 가르치게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교과서를 재구성할 생각도 하지 않고 오로지 교과서에 나온 순서대로, 그 내용대로만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게 지금까지 우리 교육의 현주소 아니었던가.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재미있는, 그러나 너무도 한심하고 서글픈 사건이 있었지. 바로 2014학년도 수능 세계지리 문제(작년 문제다)...

 

교과서에 있는 내용만 답이라고 주장하던 교육부가 소송에서 지고 말았지.(올해 가을들어 판결이 났다. 수험생들은 어쩌라고) 

 

이미 세상은 교과서의 내용과 다른 수치를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정답이 없음, 그러니까 모두 정답이라는 판결이 난 것.

 

만약 교과서를 신봉하지 않고 교육과정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 있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교육과정에 대한 인식을 교육부에서조차도, 교육과정 평가원에서조차도 제대로 하지 않고 오로지 교과서만을 맹신하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교육과정에 대해서 알까?

 

만들어지는데 몇 년이 걸리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내용을 담을 수밖에 없는 교과서를 맹신하는 그런 교육이 지금도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이런 점을 보면 이 책은 참 선구적이다. 이 책은 교과서를 말하지 않는다. 교육과정을 말한다. 교육과정에 의해 교과서는 언제든지 재편성되고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교육과정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과간에도 통합, 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일들을 교사들이 해야 한다고 한다. 주장뿐이 아니라 실제로 학교에서 통합 수업을 실시했다.

 

이것이 제대로 된 교육이라고 말한다. 이미 현대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만 파묻히는 사람을 넘어서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한다.

 

현대는 전문가의 시대가 아니라 통섭, 융합의 시대인 것이다. 이런 시대적 요구를 학교가 따라가려면 교사들은 자신의 교과에만 매몰되어 있어서는 안된다.

 

다른 교과 교사들과 교류하여야 한다. 함께 의논하여야 한다. 그리고 함께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교육과정 재구성이다.

 

이 책에서는 교육과정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교육과정이란 우리나라가 추구하는 인간상에 도달하도록 하는 일련의 과정이고, 그 과정을 도달하도록 도와주는 자료가 교과서이며, 도달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교사이고, 그 과정에 펼쳐지는 가장 작지만 일상적인 단위가 수업인 것이다. 27쪽.

 

교육과정은 한 인간이 민주 시민으로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학교 교육의 과정을 학교급별로, 교과별로 정한 항목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다. 29쪽.

 

그러므로 교육과정은 독립된 존재로 있을 수 없다. 교육과정은 끝없이 함께 하려 하는 것이다. 따라서 교사들은 자신의 교과목만이 아니라 다른 교과목 교사들과 교류하고 연구하고 협력하면서 수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고 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시흥에 있는 장곡중학교에서 교과통합 수업, 즉 교육과정을 재구성하여 수업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다양한 교과가 함께 모여 어떻게 수업을 했는지, 그런 수업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직접 수업한 자료들까지 자세히 보여주고 있어서 다른 학교에서도 참조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진정 교육과정이 무엇인지, 학교 수업은 어떠해야 하는지, 어떻게 교육과정을 재편성하여 통합수업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으니, 교과통합 수업에 관심 있는 교사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이다.

 

덧글

 

이런 교육에 관한 책, 특히 혁신학교에 관한 책을 읽으면 우리나라 교육이 참 성공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잘 하고 있는 학교가 많은데, 왜 우리나라 학생들의 행복도는 꼴찌이며, 아직도 구태의연한 교육방식을 택하고 있는 학교가 많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이게 교사들만의 노력으로 가능할까? 무언가 제도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단지 교육감이 바뀌고, 그 교육감의 정책에 따라 지원이 이루어지면 되는 교육활동이 아니라, 늘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에는 진보든 보수든 상관없지 않나. 교육은 정치적 성향을 떠나서 제대로 된 교육제도를 정착시킨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내내 들을텐데 말이다.

 

또 교사들에게만 맡기면 교사들이 나중에 지쳐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교사들이 지치지 않고 이런 활동을 계속해 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나.

 

어떤 일에도 누군가의 희생으로 일이 이루어진다면 그 일은 안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들고.

 

많은 것이 해결되어야 하고... 정말로 많은 것들이 교육 분야에서 논의되고 개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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